하나님이 인정했습니다. 욥이야말로 의인이라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욥의 자식들도 말과 행동에 흠이 없었습니다. 욥이 자식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던 것은 범죄의 정황이 드러났던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마음으로’ 죄를 지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욥이...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욥1:5) 그런데.
마음으로 지은 죄마저도 씻겨주면서, 조심조심 키우던 자식들이 죽었습니다.(욥1:13~19) 욥 자신도 치명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종기가 온 몸을 덮었고, 온 몸을 구더기가 파고들었습니다.
친구들이 인과응보(因果應報)라며 비난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거라고들 했습니다.(욥1:7;8:11) 아예 악인이라 못 박듯 말합니다.(욥18:5~21) 억울한 욥은 친구들의 부당한 고발에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욥의 변론은 친구들의 고발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달리지는 건 없습니다. 병도 여전하고, 고발은 그치지 않습니다. 욥 스스로 훌륭한 변호인이지만, 욥이 처한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결과로 사람은 평가받습니다. 과정 또한 중요하다 말합니다만 말일뿐, 결과로 사람들은 평가받습니다. 욥이 ‘악인’이 된 것도 결과로만 평가받은 까닭입니다. ‘질병이 피부를 삼키고’, ‘후손도 없’으니, 욥은 악인으로 평가받습니다.(욥18:13,19) 아무리 변호해도, 욥이 아무리 의인이라 강변해도 소용없습니다. 결과가 나빠 보이면, 천사가 변호해도 소용없습니다. 결과가 나빠 보이면, 변론에선 이겨도 판결에서 지기 십상입니다.
변호가 아니라 대속(代贖)이 필요합니다. 내가 유능한 변호인 되는 것보다, 대속자(代贖者;Redeemer)가 나를 위해 나서는 것이 절실합니다. 욥은 대속자가 오실 것이라 믿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
대속이란,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을 희년이 오기 전에 해방시키고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게 하는 것입니다.(레25:8~55) 대속은 시간이 지나 희년이 되면 해결될 일을 미리 해결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실현되지 않을 희년(禧年)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빚을 갚아줌으로 희년을 당겨주는 것이 대속입니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희년을 선취(先取)하는 것, 이것이 대속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욥을 공격해대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몸에도 구더기가 슬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친구들 모두의 자손도 죽을 것입니다. 시간은 무섭도록 공평한 것입니다. 시간을 염두에 두었다면, 누구라도 욥을 악인이라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욥의 억울함은 풀릴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됩니다. 허무하게도 해결됩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시간이 지나 ‘백골이 진토 되어’ 억울함이 풀리면 뭐합니까.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구더기에 파먹히는 것을 본다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부당한 결과로 악평을 받고 있는 내 현실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대속자가 ‘땅 위에’ 서야 합니다. 대속자가 ‘땅 위에’ 오셔서 부당한 결과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셔야 합니다. 욥은 대속자가 살아계신다 믿습니다. 욥의 믿음을 따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대속자가 ‘땅 위에’ 서셔서, 의인을 의인으로 인정해주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대속자가 땅 위에 오셔서 땅엣 사람들을 구원하시길 기다리지만, 우리는 미처 대속자를 만나지 못하고 죽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고민이기도 했지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던 성도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순교하거나 자연사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요. 땅 위에 오신 대속자를 뵙기를 원하지만 죽을 수도 있습니다. 대속자가 오셔서 병든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가난한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자식 없는 사람이 자식을 키우게 되는 희년이 선취되어야 하건만, 죽음이 먼저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욥이 건강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아야 친구들이 욥을 인정할 것입니다만 꼭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세상 마지막날까지 병으로 신음하고,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병들고 가난한 까닭에 인정받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뵐 것입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6) 구더기의 주둥이가 내 광대뼈에 닿는다 해도 하나님의 얼굴은 내 얼굴을 향할 것입니다. 의인의 ‘백골이 진토 되어’도 하나님은 알아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이라 인정하신 것은, 그가 부자였고 그 자식들이 건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욥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여서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습니다. 나를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결과가 아니라, 살아가는 나를 인정하십니다. 혹 죽는다해도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