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이 뜨진다.
여행 때만 되면 어김없이 생기는 기특한 버릇 중의 하나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불꺼진 로비로 내려가면 언제나 그렇듯 GH의 철문은 굳게 잠겨있다.
잠을 자고 있는 직원을 어쩔 수 없이 깨워야 하지만, 무엇보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다.
쉼호흡을 크게 하고, 제법 말끔해진 새벽 공기를 가르며...
마치 순례자처럼 강가강이 있는 가트를 향해 씩씩하게 걷는다.
바라나시의 해돋이는 대략 5시 10분쯤.
가트는 많은 순례객들로 벌써부터 북적인다.
힌두교에선, 해돋이 시간에 맞춰 성스러운 강가강에 몸을 담는 것에 아주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몇 천년을 거슬러 내려왔을 그들만의 거룩하고 독특한 의식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계단 한 켠에 앉아서 숨 죽인 채 그 광경을 바라본다.
뷰파인더가 아닌 육안으로 오랫동안 그 장면들을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어서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도 살짝 내려놓는다.
물질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꽃잎을 강가강에 띄우는 순례자들의 아련한 실루엣이 꽤나 매력적이다.
아침의 옅은 역광과 독특한 주황색 색감 때문에 더욱 신비스럽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강가강엔 순례객들만 있는 게 아니다.
새벽 뿌자를 보기 위해서 새벽잠까지 설치며 나온 여행자들도 꽤나 눈에 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보트를 타며 여유롭게 해돋이와 새벽뿌자를 즐긴다.
하긴 예외없이 나도 그들 중 하나겠지.
그래서, 수많은 보트 삐끼들이 어김없이 다가와서는 흥정을 원한다.
터무니 없는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그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날리고는, 말없이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내 곁에 붙어앉아서 노래하듯 종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단잠을 깨웠을 때, 왈칵 치밀어 오르는 노기 같은 게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거린다.
여유롭게 새벽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영감님의 짜이는 한 잔에 2루피다.
GH에서 내려오면, 제단근처의 계단에서 새벽부터 불을 지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영감님은 어느새 익숙해진 내 얼굴을 슬쩍 확인하신 뒤에
언제 씻었는 지 모를 잔에다가 따뜻한 짜이 한 잔을 담아 건내신다.
그렇지 않아도, 달콤한 짜이 생각이 간절했는데 말이다,
나는 영감님과 애기를 나눈 적이 없다.
더 정확하게 애기하자면, 손가락 하나를 드러내면서 짜이 한 잔을 주문을 하고,
그 자리에 꽤 오랜시간 앉아있다가 주머니에서 2루피를 건내주면 그걸로 끝이다.
바라나시를 떠나는 날 아침에 그에게 사진 한 잔을 찍고 싶다고 했고,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표정한 포즈로 기꺼이 사진을 허락했다.
바로 사진을 뽑아드렸지만, 그는 웃지도 않고 신기해 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덤덤하게 세상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 같다.
그에겐 표정이 없다.
그런 그를 바라볼 때면...
그 무표정이 내게도 전염되는 것 같다.
여전히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보트 위의 사람들...
나중에 물어보니, 집보다 보트 위가 훨씬 시원하다고 한다.
하긴, 한낮 내내 달궈어진 지열은 밤이 되어서도 쉽게 식지 않는다.
GH에 에어쿨러가 달려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열대야 때문에 더위에게 고스란히 잠을 반납해야 할 판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샤워를 하고, 또 몇 바가지의 땀을 흘려야 하는지...
이곳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6월의 바라나시는 '폭염'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부지런한 도비왈라들은 새벽부터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빨래를 하는데도,
시원한 보트 위에서 잠을 청한 그들은 새벽의 단잠에 흥건하게 취해있다.
빡빡하지 않은 그들의 일상이 부럽게 느껴진다.
오랫동안 그들을 지켜본다.
새벽등(燈)이 채 꺼지지도 않은 이른 시각부터, 아니 어쩌면 밤 새 내내
산처럼 저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 지 모른다.
해가 뜨고 나서도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는다.
망부석처럼 오랫동안 동녁하늘을 주시한 채 언어마저 잊은 듯 했다.
해돋이가 시작되자,
그제서야, 나즉히 읊조리며 뭔가를 툭툭 바닥으로 던지는 무슬림 남자와
더 짙은 상념 속으로 잠기는 또다른 남자.
그들의 표정이 꽤나 감상적이면서도 진지하다.
사진을 찍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날이 어두운 탓에 셔터속도가 나오질 않는다.
그래, 저 청년을 본 적이 있지.
저녁뿌자에서 의례를 집행하던 바로 그 청년이다.
뿌자 때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그는, 언제나 나의 주(主) 피사체였다.
새벽부터 그를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해 내고, 아는 체를 한다는 건 분명 기쁜 일이리라.
낯설고 어색한 인도라는 사회에 조금씩 적응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작지만, 한 걸음부터 가는 게 여행이다.
너무 많은 것을 보려고 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내 여행은 이제 단순히 찍고 돌아서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스펀지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낯선 그들의 삶은 의외로 재미있다.
바라나시에 오는 인도 여인들의 사리 색감은 꽤나 컬러풀하다.
실제로 보면 천박하고 촌스러운 느낌을 받는 그런 색감인데도,
막상 사진을 찍고보면 색감이 화사하게 살아난다.
바라나시는 힌두교도들에겐 하나의 바람이며 염원이다.
살아서 성스러운 강가강에 몸을 담그면 죄를 씻어내고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고,
죽어서, 이곳에서 화장을 하면 오랜 윤회의 업보를 끊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바라나시는, 아니 강가강에 몸을 씻고 소망을 비는 것은
삶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갓 가트에 도착한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화장한 재와 각종 쓰레기 등의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니는 강가강을 바라보면서,
지저분하고 더럽다는 인상을 먼저 받는다.
내가 그랬다.
여행자의 피상적 시선은 꼭 그만큼 왜곡되고 굴절되어어 있는가 보다.
단순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데도 말이다.
겉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나의 어설픈 선입견부터 고쳐야 할 때인가 보다.
미리 판단하지 않기...
망원렌즈를 장착한 서양인 여자 포토그래퍼가 가트 쪽을 향해 셔터를 날린다.
망원렌즈로 바꿔 달고는 이번엔 내가 그녀를 향해 셔터를 날린다.
진지한 그녀의 표정과 자세가 사공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피사체를 가려내는 정확하고 순간적인 찰라의 눈빛과
셔터버튼을 누르려는 섬세한 손짓까지도...
그런 그녀에게서 일련의 동질감을 느낀다.
인도인들은 내 카메라 장비를 보고는 놀라서 묻는다.
"Are u a photograper?"
난 그저 웃음으로 넘겨버린다.
사람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단함을 표시한다.
"How much are these camera and lense?"
인도인들은 모든 걸 돈으로 결부지어버리려는 버릇이 있나 보다.
모든 걸 금액으로 환산하려고 한다.
대충 금액을 말해주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역광으로 담은 한 뿌자 바바.
작은 구멍이 뚫린 커다란 대나무 우산 아래에서 그들은 뿌자를 하러 온 순례자들을 돕는다.
대개 브라만 출신의 사제들이 의식을 집도한다고 한다.
저곳에서 많은 순례자들은 미간에 점을 찍고 뭔가를 기원한다.
대개 그들의 가족과 회사의 번영 등 개인적인 소망을 담는다.
어떤 의식을 행하는 지 오랫동안 그들을 관찰한다.
무릎을 끊고 앉아서 양미간 사이에 뭔가를 찍어주고,
뿌자 바바가 뭔가를 낭송하면 순례자는 그대로 따라한다.
머리를 깍고
수염을 자르는 왜소한 체격의 남자.
뭔가 성스러운 의식을 준비하려는 듯,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결연하다.
4명의 사두는 늘 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은 늘 저 만큼의 간격을 유지한 채 앉아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더 끌리는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벽에 붙은 각종 간판과는 묘한 대조를 불러 있으킨다.
4개의 각기 다른 크기와 색감의 간판과
4명의 각기 다른 시선의 사두들...
우연한 일치치곤 참 재미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루라도 보이지 않는다면
바라나시에서의 내 일상은 뭔가가 어긋나서
삐긋거리며 모가 날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까지 들었을 것이다.
사원 앞을 청소하는 남자.
가트를 걷다보면, 늘 종교적인 것들만 만나는 게 아니다.
그 속엔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이 있다.
가트는 성스러운 곳이지만 또한 삶이 존재하는 곳이다.
삶과 죽음의 공생.
그 경계는 어디에도 없다.
세상 모르는 아이들은 그래도 마냥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