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남 박경희

[강병철]

빛의 속도로 변신하던 문장들

- 유지남 『마실 가는 길』, 박경희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강병철(소설가)

첫 만남과 고정관념

처음 만나던 풋된 표정의 기억으로 오랫동안 그 벽에 갇혀 있다가 느닷없이 포착된 중후한 연륜에 깜짝 놀라는 사태가 있다. 도깨비밥풀처럼 붙어살던 젊은 벗들과의 동행에서 그런 우를 범하기가 특히 쉬우니 유지남 시인과 박경희 시인 모두 내 고착된 감성의 피해자들이다. 미안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아차, 반성의 무르팍 치면서도 정작 무표정의 관계를 지속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각각 출산된 『마실가는 길』과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의 문장들을 손때가 반들거리도록 더듬으며 다소나마 자책감을 덜어내는 것이다. 덕분에 행복한 독자가 되었다. 이제 비로소 ‘밤 마실’의 ‘그늘’을 걷어내며 문장의 속살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서 묵힌 부채가 쬐끔은 덜어지는 마음이었고.

지금은 그들 모두 묵정밭에 뿌리내리던 저력을 바탕으로 질곡의 시국을 감당하는 중이다. 그래서일까, 구성진 문장 뚜껑들을 얼핏만 뜯어보아도 애잔함이 선명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문학은 슬픔의 세상을 녹여주는 지난한 표현 과정이다. 예나 제나 그들 모두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시인들이었고.

돌아보다가 화들짝 『마실 가는 길』

89년 공주의 전교조 사무실에서 첫 조우를 했을 때 유지남은 29세였다. 전교조의 격동기, 그는 묵묵히 유인물을 챙기거나 대자보를 붙였고 흩어진 술상의 뒤끝을 처리했다. 중동시장 백락다실 건물 침침한 3층 사무실에서 그들의 습작 문장에 감히 빨간 펜을 들이대던 기억도 새록새록 민망하다. 전병철 시인까지 3인방이었고 가끔 김상배, 김상천, 가덕현 등 열혈청년이 합류하기도 했던 아득한 젊음의 언저리이다. 그랬다. 시국의 부채감을 조마조마 숨긴 채 쟁쟁한 르네상스를 구사하던 그 시절 우리들은 태양처럼 젊었었다.

어느 철부지 녀석이 흘렸을까

분홍색 편지 조각 하나

복도에 뒹굴어다니고 있다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 속에

말밥굽 같은 마음이

벌판을 마구 내달리고 있다

「가랑잎 편지」부분

지게를 얹어도 농부의 자취가 나타나지 않으니 기실 그는 상남자 체질은 아니다. 화염병을 들면 얼핏 투사(鬪士)의 실루엣이 소환되기는 하지만 장막이 걷히는 찰나 출석부 옆구리에 낀 범생이 훈장의 풍모로 고정된다. 다행이다. ‘시 쓰는 선생’인 그가 반평생 분필밥 먹으며 입동리 모퉁이에 자리잡으니 아들 딸 삼남매 미루나무처럼 쑥쑥 커서 청년이 되고 더러는 둥지도 트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교무실 모퉁이에서 19세기 붙박이 스승으로 남아 디지털 시대 꿈나무들과 얽히고설킨다. 교무실에서 가장 만만한 ‘호구 스승’의 일과표 속에서 그는 어느덧 초로가 되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꽃단장 죄목으로

19세기 학생부에 체포되어 왔겄다

한 마디 점잖게 거든다는 것이 , 넌

화장 안 해도 참 예쁠 거야 했더니

눈 동그랗게 뜨고 날 빤히 올려다보며

화장하면 더 예쁘죠, 하는 게 아닌가

-「한 수 배우다」부분

이번에는 지어미의 남편 행각이다. 첫 시집 「내 몸의 봄」과 두 번째 시집 「밥꽃」에서 천사로 규정되었던 그의 아내는 아침마다 목장의 ‘소젖 짜기’에 바지런해지더니 시나브로 사내처럼 근육질 팔뚝으로 변신할 판이다. 다행이랄까, 종아리만큼은 여전히 풀꽃 대궁으로 말랑말랑하다. 새새틈틈이 세밀화 그리며 무르팍 모으던 아내의 형광등 아래 새삼스레 그림자 흔들대며 치근대던 연유이다.

어쩌다 소파에 다정하게 앉게 되는 날에도

남편 손에 내맡겨지는 여자의 몸이라는 게

겨우 발바닥이거나 발목 종아리가 다인데

-「19금 활명수」부분

자주 얹히는 위장 탓에 부채표 활명수를 버릇처럼 끼고 살던 그미와 모처럼 소파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을 것이다. 문풍지 흔드는 북서풍 막으며 톱밥난로 위로 주전자 물이 끓고 있었을까. 어쩌다 시인의 손길이 아내의 무르팍 건너 흐르는 강물로 ‘풍덩’ 젖어도 보았노라고 눙치던 정담이 ‘8월의 크리스마스’ 연애 스크린처럼 풋풋하다. 지천으로 덮인 유월의 밤꽃 동산, 저 거품을 파도처럼 밟고 떠나고 싶다며 눈자위 붉히던 그 아내와 그렇게 풋사랑을 되살렸단다. 그건 그렇고.

리(里)는, 흙(土)와 밭(田)이 합쳐진 말로

흙과 더불어 농사짓는 일이야말로

마을살이의 기본이란 뜻이다

-「마을의 유래」부분

마침내 도시 탈출 시도, 시인은 젊은 날의 그 결단을 인생의 가장 다행한 성사로 꼽는다. 그는 왜 도심지 휘황한 불빛 내던지고 하필 아비의 텃밭에 몸을 붙이게 된 것일까. 거미들의 아침식사 배경 아래에서 질경이풀과 이슬의 교합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면 너무 신파적일까. 물꼬 트러 가다가 논 개울에 얼굴을 살피고 오는 길목 풍경이 삼삼하게 겹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늘 놓는 할매의 늦봄 노동까지 뭐 하나 놓칠 것이 없다. 더러는 하얀 이빨로 찾아오는 이웃들 그림자를 떠올리며 저물녘 양철문 열어놓기도 하는.

산은 내게 가슴 펴고 사는 법을 알려주고

나무는 침묵의 미덕을 말없이 가르치는데

서산마루에 걸린 저 붉은 노을이 있었기에

눈물 많은 여자 다행히 달아나지 않았네

-「참 다행한 일」부분

그런데 막상 문장화시키며 마냥 껴안기에는 배경의 변신이 너무 신산하다. 불안을 먹고 성장한 자본주의가 세상을 통째로 뒤집는가 했더니 그예 골짜기 그 마을까지 잡아먹은 것이다.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마을에 플라스틱만 널브러지고 칠순의 젊은이(?)들이 허둥지둥 분리수거봉투 챙기는 모습도 안쓰럽다. 그의 목장 갓 난 송아지들 입술에 물린 실리콘 젖꼭지 풍경까지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사각지대 낮은 곳 더듬으며 이정표 가리키는 장승으로 변신한다. 더듬이 눈처럼 오래된 도정이다.

저 한 손이,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장작을 패서

겨우내 스님의 방구들을 뜨뜻하게 덥힌다

절집 주위에 구절초가 지천인데

천 송이 만 송이 꽃이 저 손끝에서 자라

파란 하늘을 하얗게 떠받든다

-「구룡사 천수관음」부분

팔뚝 한 짝 구름 속 어디쯤에 숨기고 나머지 한 손으로 합장하는 생불 천수관음의 산 아래 마을이 그의 보금자리이다. 겨드랑이 사이에 낀 싸리비가 눈 부셔서 겨울눈도 함부로 쏟아지지 못하던 그 자리이다. 굳이 사찰의 사연을 꺼내지 않더라도 기실 그는 구부러진 길 안쪽에 사람의 마음이 있음을 알고 있다. 발 시린 배추꽃 제 몸 껴안는 풍경이 그렇게 등장한다. 그랬다. 살아, 한 번도 우뚝 서보지 못한 살붙이들끼리 시린 몸 부비는 온기에 그는 그만 몸을 훌훌 던져버렸다.

으이구, 저, 저

억척스런 할망구 같으니라구

저승길 먼저 떠난

남용 할매

밭둑머리 억새꽃으로 돌아와

연신 체머리 흔들고 있다

- 「억새꽃」부분

서리꽃 하얗게 핀 아침, 녹슨 호미와 합체된 굽은 등 하나 유령처럼 흘흘 웃음 짓는 풍경이다. 괜찮다. 저승길 떠난 남용할매가 밭둑을 막아도 무섭기는커녕 등허리 지지던 구들장처럼 정겨운 것이다. 손을 잡으려는 순간 당연히 사라지지만 지극한 반가움의 아침만으로도 하루가 넉넉해진다. 또 있다. 밥솥 연기 뽀송뽀송 몸을 푸는데 나비 한 마리가 자두나무 젖무덤을 오래도록 더듬더니 재빨리 시인의 눈으로 오려낼 찬스가 온 것이다. 도종환 시인의 ‘부드러운 직선’을 응용하지 않더라도 정 많은 곡선의 형상화가 문장을 통째로 공유하는 것이다. 둥지 벗어난 생명붙이가 뽀드득뽀드득 어깨를 두르는.

아니다

쇠항아리 철조망으로 뒤덮인

허리 잘려 신음하는 조선 반도

쫘악 갈아엎고 다시

힘차게 일으켜 세우는

아아, 시퍼렇게 뜨거운 쟁깃날이다

- 「다시 금강에서」부분

시인의 연륜도 6부 능선 어디쯤 넘어간 것 같다. 하여, ‘내 몸→가족→강물과 공동체 울타리’까지 연륜이 연장되었으니 이제 멀리 보는 눈의 각도를 확장할 시간이 되었다. 평론가 김정숙이 그의 시를 ‘강→ 마을→ 노래’와 ‘흐름→ 머무름→ 더불어 삶’이라고 설명한 이유가 그런 맥락이다. 그랬다. 낱낱은 헐거운 듯 느슨한 포장이지만 한 권을 독파했을 때 꽉 차게 넘치는 포만감이 바로 『마실가는 길』이다. 그의 다음 시집은 그 나라 백성들의 각진 가슴에 소망의 돛을 드리우는 크낙한 고목나무 그늘로 내려 주길 고대하며.

그리움이 진해져서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90년대 중반 즈음일까. 박경희 시인은 작가회의의 궂은일을 도맡는 20대 초반 푸짐한 웃음의 소녀풍으로 나타났다. 그뿐이었다. 그의 보령 텃밭 명천에는 이미 망자 이문구 선생의 후광이 쟁쟁했고 김종광, 안학수, 서순희 등의 문사들도 어렴풋이 그려보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그를 떠올리면 모두 민망한 재단들이다. 수 년 동안 기거했던 사찰의 벼랑 끝 사연이나 삼보일배 국토순례의 고행 역시 문풍지 너머로만 어렴풋할 뿐이다. 그저 2프로 공백을 채워야 하는 젊은 시인으로만 규정시켰던 그가 깍지동처럼 커다랗게 자리잡았음은 깨달은 건 나중 얘기이다.

지금 그는 첫 시집 이후로도 「차라리 돈을 달랑께」「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등 다섯 권의 산문집과 동화집을 내고 7년 만에 두 번째 시집 「그늘을 걷어내는 사람」을 생산했으니 만만찮은 시력(詩歷)이다. 담담한 여백에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는 고백은 일단 차치하고.

자식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등

경운기와 사투를 벌이며

빨려들어가는 옷자락을 얼마나 붙들었던가

-「벚꽃문신」부분

첫 시집 「벚꽃문신」서두에 등장한 20년 이력 붙은 그의 부친 등허리 사연이다. 논바닥에 쓰러진 경운기 굉음과의 사투 속에 새겨진 피댓줄 문신 때문에 석별의 그날까지 목욕탕 출입을 피했던 그 사내, 비밀의 베일을 그제야 열어주었다. 철렁, 놀라움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때까지 그는 나에게 젊은 리얼리즘 시인으로만 각인되었고 오래도록 그게 마음에 편안했다. 그러다가 이차구차 두 번째 시집을 만난 것이다. 오래 볼수록 문장이 진해지는 것일까, 대상은 동일한데 확연히 달라진 빛깔로 쿵, 이마를 치는 것이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늙은 독자의 호흡이 두근두근 고르지 않아진다. 그리고 서평을 위하여 펜을 잡다가 탄식하는 것이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좋은 씻나락 어깨에 짊어지고 들아와

방 안에 한가마니 떡, 하니 놓아두더니

할 일 다 했다는 듯 마지막 끼니로 김밥 드시고

당신 집으로 돌아가셨다

-「꿈」부분

도대체 무슨 귀신이 추수 때마다 이승 출입으로 이리 서두르는가. 즈이 집 콤바인 아래 논바닥에 흘린 나락까지 주워 넣고 뒷짐 쥐며 한참을 머물렀다던 망자의 이야기는 팩트가 확실하다. 그래서 시절도 보낼 만큼 겪은 석별의 사연이 끝도 없이 깊고 화사한 것이다. 동시에 나는 ‘슬픔을 걷어내는 그만의 방식이 가히 독보적’이라 칭한 안상학 시인의 해몽에 무방비로 재청을 토로하는 바이다. 마찬가지다. 시인 김해자가 ‘글자 이전에 말이, 말 이전에 마음이 있었음을 실감’한다는 문장을 주억거리며 ‘배고픈 머스매 공복의 수숫대 씹듯’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 후 한번 빠진 문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풍 걸린 할머니 걷게 한다고 안 해본 일 없는 할아버지 바람

맞은 다리에는 오리 피가 좋다는 말에 오리 모가지 치고

생피 받았다 머리 없는 오리 뛰어다니는 거 보고 뒤로 자빠진

며느리, 한참을 뒤꼍에서 마당으로 피 뿌리며 다니던 오리가

고꾸라진 건 할아버지의 낫질 한 방

- 「낫질 한 방」부분

목 잘린 오리와 씨름하던 할아버지 풍경이 먼저 등장하니 그게 오픈게임이다. 근동의 조현병 사내 낫춤 한방으로 무당춤 추던 사연을 두 번째 배경으로 오버랩시키는 것도 그의 근황을 건져내기 위한 살짝 시도이다. 그제야 시인의 시국 선언으로 검찰 고소 운운하는 사연이 넌지시 드러난다. 느리고 진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딸내미 이름 석 자가 신문에 오른 후 지서 소리만 들어도 두근거린다던 엄니는 정작 지금은 심드렁하다. 화투 패 깔며 재수 끝발이나 올리는 중이니 뭐 하나 서두름이란 게 없다.

입담 고수 이정록 시인의 귀띔에 의하면, 느슨하던 그의 시가 돌풍을 일으킨 건 인과응보의 당연한 소산이란다. 문예창작 제도권 수업과 삼보일배로 삼천리 바닥을 더듬으며 밤마다 원고지와 씨름하더니 ‘가랑비에 옷 젖듯’ 시와 합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손바닥 발바닥으로 몸을 비비더니 언제부터였나, 간장 냄새에서 초승달 번지는 사연도 찾아내고 소금포대 갉아대던 생쥐의 기척에서 세월호 참사를 껴안는 것이다. 빨랫줄에서 속옷의 이슬을 구분하는 ‘매의 눈’도 터득했음도 덧붙인다. 서늘하다. 그러나 가장 큰 덫은 망자가 된 부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그물망 숙명이다.

아비는 왜 한 번도 안 온다냐, 여즉 논에서 일 하능 겨? 오째

이리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여. 하늘 깊어진 걸 보니께

벼 벨 때가 된 것 같기는 헌디, 암만 그려도 엄니 얼굴 잊어

버리믄 안되지. 참말로 벨 일이여.

-「참말로 벨일이여」부분

부친은 떠나기 전에 이미 운명의 벼랑 끝을 감지했다. 하여, 먼저 저승길 터놓고 기다리겠다, 며 아내의 사발에 국수를 덜어주니 지어미는 면발처럼 퉁퉁 부은 얼굴로 온몸만 바들바들 떨었을 뿐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그렇게 허물어지고 지어미와 막둥이 아들은 각자의 방에서 참았던 억장을 후엉후엉 터뜨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인 혼자 표정을 견뎌내야 한다. 치매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아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 하고 알사탕 하나를 넣어주며 방긋방긋 빈 가슴 채워주는 중이다. 그 대신 부친이 불혹의 딸에게 살아생전 던지던 ‘호미날에 너무 빠지지 말고 펜과 함께 끝까지 가라’던 당부를 깊이 새기며.

그새 봄까치꽃 환하게 밭모퉁이에 피었다 똥구멍 시리게

달렸던 겨울은 전깃줄에 매달린 방패연 구멍 속에서 뱅뱅

돈다 빈대 잡는다고 불에 탄 꼬리 흔들며 짖어대는 진순이

를 뒤로 하고 불에 덴 손등에 침 발라가며 검불 불사른다

마른 오줌 벽이 검게 그슬린다

-「경칩」부분

그 부친의 스크린과 딱 한번 조우했던 기억이 있으니 나로서는 다행한 기억이다. 15년 전쯤인가. 최은숙 시인 그리고 딸 한단아와 함께 대천 그의 집을 방문한 차에 장승처럼 키가 큰(187센티) 부친께 무심히 인사를 드렸다. 양파 한 망씩 선물 받은 포만감으로 보령 어항 파도가 고무다리처럼 출렁였고 늘 그렇듯 나는 취했다. 아, 이 순간 다시 그의 문장이 싸-하게 밀려온다.

단명할 아부지 명(命) 이어준다고 배 속에서 끊어질 생을

이어 태어난 막둥이 아기 때 사과 궤짝에 앞 숫구멍이 찍혀

죽을 고비를 저수지 물결로 세어온 생인데 팔자에 집 안팎

을 뒤져봐도 없는 스님이 될 사주가 있다고 하니 꺾인 감나

무 그늘 쓰다듬던 엄마 뒤로 하고 스님이 되어도 내가 된다

고 막둥이 그늘을 뒤집어쓰겠다고

- 「팔자(八字)」부분

이상하다. 서해안 모퉁이 장삼이사 오두막에 왜 시도 때도 없이 출가의 연(連)이 손을 뻗치는가. 잘못 든 산 헤매다가 만난 스님이 그의 막둥이 동생에게 공양 조롱박을 주던 사연은 나중 얘기이다. 그에게 ‘삭발하자’ 선문답 던진 주지스님의 예전 표정까지 겹치니 이거 참 만만한 사태가 아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의 모친이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으로 허둥지둥 ‘안 된다, 안 된다’며 한사코 빗장을 건 주문이 먹힌 것이다. 그러나 출가(出家)를 비켜난 또 다른 출가(出嫁)의 연도 평행선으로 가는 걸까. 그가 둥지 트는 ‘시집’보다 인쇄물 ‘시집’ 출산에 몰입하는 이유가 수상하다. 경로당 민화투 패거리들은 ‘필시 상처받아 시집을 안 갔을 거라’고 궁싯대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시(詩)의 늪에 바친 상태이다. 그의 시가 그렇게 온 것이다.

오래전 깨진 장독대 귀퉁이에 돌을 덧대며 여자의 헛걸음

에 접질린 발목을 부여잡고 앉아 울던 달이 비스듬히 스러

졌다

- 「생일」부분

어쩌면 그는 부친과 전생의 연인이나 남매였을 것이다. 그래서 불가의 윤회 대목에서도 남매와 모자까지 전생의 부부 인연과 연관시켜 구슬을 꿰어내지 않던가. 망자가 아내의 몸을 더듬고 떠났다며 그들 모녀가 키득거리는 속화된 풍경이 아랫목처럼 따땃하다, 며 글을 끝맺는 내 마음이 허허로웠음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인생의 시계추 정오를 넘긴 그의 시점에서 토로하는 충청도 문장의 적나라함은 나중에 따로 풀어야 할 과제이다.

별리(別離) 그리고 동행

책 바보 이덕무는 그의 「청장관전서」에서 ‘말똥구리의 분비물 굴림이 용의 여의주와 똑같은 무게’ 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두 시인 모두 지금껏 체화된 문장만으로도 그런 비유를 당겨내지 않을 만큼 몸집이 어지간하다. 익살을 넘어선 해학의 마력 그리고 텍스트를 극복한 진정성의 힘, 그게 그들 시의 의미와 문장의 혁명이다. 이제 생산된 문장의 뿌리가 상생의 울타리 공동체를 쌓는 중이니 지순한 사연들이 사사로운 서정성의 벽을 넘는 이유가 되리라. 그럼 됐다. 세밀화처럼 짯짯하던 필력의 전율만으로도 이미 오소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