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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날뛰어도 격차는 벌어지고 있다.
김일성은 분수넘친 욕심에서 비롯된 6.25전쟁의 실패를 남의 탓인 북침으로 미화시키고 미국 때문에 조국통일의 과업을 이루지 못했다며 실정의 책임을 떠넘기는 거짓말로 북한인민들을 현혹시키는 반상회를 열어 자식이 부모를 비판하게 하여 부모자식 간에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정해진 천륜에 따른 사회적,혈연관계를 파괴시킨 철면피를 가진 독제자 김일성 일가 제산이 북한이다.
1983년 11월12일 대한항공 피격사건과 아웅산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방안해 전두환 대통령과 두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국회를 방문해 대북관계를 연설하며 미국대통령이 처음으로 대치관계에 있는 최전방을 시찰해 남북대결 현장을 목격하고 한미공동선명을 통해 한국의 안보가 미국의 이익에 직결된다고 강조하고 귀국했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않이다. 기회를 노리고 먹이감을 탐내는 미친개들이 돌아다니는 휴전상태다.
1984년 2월25일 정치규제법에 묵였다 2차 해금(해제)조치로 풀려난 202명과 구속 중 사망한 15명을 제외한 3차 해금 84명 총286명이 풀려나자 해금조치 20일 만에 민한당을 탈당한 12명의 의원들이 이들을 규합해 만든 신한민주당은 정치계에 변수로 등장했다.
1984년 5월3일-7일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전두환 대통령과 천주교 주교단의 초청으로 로마 교황청 교황 요한바오로2세가 전두환 대통령의 환대속에 순교자103위 시성식을 갖고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 있는 한반도에 화해를 강조하며 참된 사랑의 실천과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드렸다. 교황 바오로2세의 방한은 "평화의 사도"로 블행한 한반도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84년 9월1일 새벽부터 내린 폭우는 중부내륙을 강타해 사망189명 부상46명 재산피해1,300여억원으로 서울 수재민들은 인재라고 주장하며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 청구소송을 냈고 한강대교 교각이 홍수피해로 인해 보강작업도 서둘렀다.
1984년 9월6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공식방문해 히로히토 일왕의 공식만찬에서 불행한 과거사에 대해 "유감"이라는 발언에 대해 깊은 사과의 뜻이 아니라는 반응이 전해지자 국민들의 반응도 싸늘하게 식었다.
1984년 9월29일 북한이 보낸 수해물자를 받아 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 동년 11월15일 남북한 경제회담이 열리면서 11월20일에는 7년만에 남북예비회담이 논의돼 제8차 본회담을 다음해 1월중 서울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1984년 11월23일 소련인 관광객 마투조크씨가 판문점 관광중 군사분계을 넘어 탈출하자 북한경비병들의 총격전으로 국군1명 북한군 2명이 사망하면서 그는 미국망명을 희망해 떠난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85년 2월12일 집권여당이 내각개편을 요구하면서 노신영 안기부장이 국무총리에 기용되면서 민정당 대표위원에 노태우대표가 정치전면에 부상하면서 노-노체제의 출범은 총선후의 정국격랑과 제5공화국 후반 체제강화에 정치적 실세로 인식됐다.
신-민태풍으로 비유된 총선(12.12)결과는 김영삼,김대중씨의 지원아래 해금된 정치인들이 주도한 신민당은 서울14개 지역에서 12개 지역을 석권해 11대 국회에서 민정, 민한, 국민당의 밀월관계를 종식시키고 민한당 딩선자들을 영입해 102석의 거대야당으로 급 부상해 총선 이슈였던 개헌논쟁으로 정국이 바람 잘날이 없었다.
1985년 3월22일 소흑산도 근해에서 중국해군 어뢰정 1척이 표류 중 구조요청을 해서 예인해 사상자 8명,승무원 19명을 중국정부에 인도하면서 한중관계에 불편했던 과거가 해소되는 계기로 발전하는 양상이었다.
1985년 5월23일 잠잠해던 운동권 학생들이 공공기관인 민정당 중앙정치 연수원을 점령하고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이후 절정을 이루면서 미국의 책임, 외체배척,개헌등 구호를 수시로 바꾸며 변질시켜 국민들의 반응이 싸늘했다.
정부는 학원사태가 우려된다며 서울대 총장과 법무장관을 경질시키자 농성학생들이 3일만에 자진 해산했다.
1985년 8월24일 중국 해군소속 쌍발 제트기가 전북 이리시 신흥동 농수로 제방에 오후 6시 불시착해 생존 조종사 소천윤(38)은 자유중국으로 통신사 유서의(36)와 사망한 합법사 손무춘(36)의 유해와 통신사는 중국으로 보내졌다.
1985년 9월20일 제1차 남북고향방문단과 공연단이 3박4일 일정으로 40년 만에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는 교환방문이 실현됐다.
남북방문단 인원은 양쪽적십자 총재,고향방문단 50명,예술공연단50명,보도진30명,지원 및 기술요원20명으로 총150명이었다.
분단 40년만에 이루어진 교환방문단은 서울과 평양을 각각 방문해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흥분시켰으나 일회성으로 끝나 기대했던 제2차 고향방문은 실현되지 못해 환희에 들떠던 우리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만 남겨 북한 위정자들을 비난했다.
1985년 10월20일 연초부터 100여개의 품목 수입개방을 요구하던 미국이 영화 및 보험시장개방에 대해 지적소유권 보호를 위한 통상법 301조를 발동시키며 미국이 한국산 앨범류에 64.8%의 고율의 반덤빙 관세부과를 결정 통보하자 양국은 시장개방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렸으나 미국의 요구와 압력에 밀려 한미 무역마찰이 불거진 이유로 남북의 경재력 격차가 벌어진 원인이 발단이었다.
하물며 우방국인 미국과 한반도 주변 국가들의 견제도 심한데 북한의 위정자들의 시기심은 한술 더떠 심한 견제구를 날려 대한민국에 위해를 입혀 먹이 감으로 삼고자 미친 짖을 찾아 내려고 할 것이다.
1986년 2월12일 국민들의 합의 개헌열기는 서울,부산,대구 등 전국 9개 도시에서 개헌추진 서명추진 지부결성식을 열고 대규모 서명운동 군중집회를 연달아 개최했다.
그러나 재야의 개입으로 5.3 인천사태을 유발시켜 여당은 임기 내 개헌으로 방향전화을 하면서 서울대회는 원천봉쇄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권과의 협상에서 임기내 개헌가능과 국회특위 구성으로 호원정국이 개헌정국으로 순조롭게 가는 듯 했으나
권력구조 문제를 둘러싼 정쟁은 합의개헌 성사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다음해로 이월시키는 정쟁 소모전으로 끝내고 말았다.
1986년 9월20일 제10회 아시안 게임이 회원국 36개국 중 불참국 북한,몽골,베트남,남예멘,등 4개국과 자국내 사정으로 참석 못한 시리아, 미얀마(버마)브르나이 등 3개국을 제외한 27개국 4,839명에 임원1.419명 선수3.42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규모였다.
종합성적은 중국이 금메달 94개, 한국이 93개, 금메달 한개 차이로 2위를 했으며 일본은 58개로 3위를 기록했다.
1986년 10월30일 대한민국 경재가 흑자시대의 문을 열었다, 지난 3월부터 국제수지가 흑자를 내더니 연말까지는 흑자폭이 사상 최치인 1.050억달러를 상회한다는 전망치를 내놓았다. 이처럼 국제수지 흑자가 확대되면서 외체가 처음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저유가 저금리,달러화 약세에 따른 3저 현상 덕분에 국내경기는 불황에서 탈출해 실질성장율이 12.2%로 고도성장을 이륙했다 .
국력은 바로 "힘"입니다. 정치,경제,문화,군사,외교 등 다방면에서 나타나는 능력인 것입니다.
국가가 생존하고 미래를 위하여 보유한 힘을 키우면 다른 국가에 대해서 영향을 끼칠 수있는 능력이 보여지며 이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과 미친 개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 한다는 참된 이치입니다.
이런 힘과 능력을 키우려면 지성인과 정치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단결심을 보여 국민들을 총화 단결시켜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여 주지는 못할 망정 어깃장 버릇은 버려야 합니다.
이 시기가 대한민국의 진정한 자유민주주인 담임제를 실천하고 문호 개방을 한 전초전으로 외교력에 역점을 둔 것은 선조들의 삶속에 쇄국정책(통상,교역을 금지,외교,관계제안)에 따른 일제시대에 해방을 맞이하고도 승전국이 아니라는 푸대접의 역사를 의식한 통수권자의 잦은 순방은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하여 통상교역을 원할게 하려고 문호개방에 따른 자유를 풀자 일부에선 자유를 오남용한 사례가 있다.
정치인들의 어깃장으로 과거에 있었던 고속도로를 비롯해 인천공항 반대 등 이런 어깃장이 국민들 마음속에 파고들어 우리사회는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켜 매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1987년 1월15일 북한을 탈출해 따뜻한 남쪽나라를 동경해 동토를 떠나 대한민국을 찾은 김만철(47,의사)씨의 일가족 11명의 탈출기는 우리정부의 외교적 노력 덕분에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한편의 드라마였다.
김만철씨 일가족은 50톤급 낡은 배로 북한 청진항을 떠나 엔진고장으로 표류하던 5일만에 일본 미구니항에 도착해 일본정부의 조사를 받은 후 2월8일 제3국인 대만을 거처 대한항공 전세기 편으로 밤 10시25분에 김포공항에 도착 자유를 외쳤다.
1987년 6월10일 서울대학생 박종철군이 수배당한 민추위 지도위원을 잡기위해 연행돼 조사 받던중 "탁치니 억"하고 쓰러져 중앙대병원으로 옳겼으나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하자 6.10 국민 평화대행진을 하루 앞두고 연세대 학생들의 시위를 저지하려고 발사한 최류탄에 연세대학생 이한열군이 사망하자 6.10 항쟁의 국민들의 열기로 분출되면서 두학생의 비극적인 사망은 민주화 운동의 분기점으로 야당이 요구한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하게 되었다.
1987년 6월29일 집권당인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김대중씨 사면복권을 포함한 8개항의 선언가운데 여야합의하에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한 새헌법에 의해 대통령선거를 통해 평화적 정권이양을 실현하며 국사범 사면복권과 시국관련 구속자를 석방하고 인권의 제도적 보장을 도모하여 언론의 자유를 활성화 한다고 선언했다.
1987년 7월16일 여야합의 개헌결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 민정당 노태우, 민주당 김영삼, 평민당 김대중,공화당 김종필 후보 등 이른바 1노3 김 간의 접전끝에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총 유효투표의 36.6%의 828만표로 차점자인 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약 190여만표 차이로 당선이 확정되자 이번 선거는 야당이 60%를 넘는 득표를 하고도 야당 단일화 실패로 패배했다는 것이다.
1987년 11월29일 KAL858편 대한항공 점보여객기 보잉707기가 버마 영공에서 공중폭발해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 사망해 전 세계가 충격에 힙싸여 충격에 빠지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동년 12월15일 바레인 당국으로부터 폭파범은 하치야 신이치와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로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고 바레인에서 내리면서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폭발물(PLX)에 의한 계회적인 폭탄테러를 밝혀내 한국정부에 통보해와 마유미(김현희)김승일(신이치 자결)사체와 신병 및 증거물을 인도받아 압송해와 조사해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암호문과 독극물이 든 캡슬 등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밝혀냈다.
참고 인내하며 당하는 것도 지겹다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마음에 일고 있는 여러가지 감정을 생각한다면 국가안위를 책임진 지도자는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것인지 보복의 칼을 휘둘러야 한다는 마음이 복받처도 전쟁의 참상을 떠올려 국민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면서 동요하는 군부를 향해 통수권자의 허락없는 그 어떤 보복행위도 역적으로 간주하겠다는 강경한 메시지도 당시엔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다.
한 가정의 부모 마음이 이해된다. 자기 자식이 얻어터저 울고 있어 화난 마음에 상대 아이를 패면 결국 큰 싸움이 되는 것과 같이 참고 원인을 가린 후 재발방지에 노력한다는 약속과 잘못한 측의 사과는 사람 들이 살아가는 인간관계인데 "우리끼리,같은민족"이라는 북한의 미친개는 김승일과 김현희를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켜서 테러범으로 만들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인한 테러를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부인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 밝혀진 미국의 외교문서에 미국은 KAL기 폭파사건을 자체조사해 북한의 테러 개입증거를 확보한 뒤 관련사실을 소련을 통해 북한에 전달하고 한국정부도 중국과 소련에 진상 조사 결과를 사전통보 한 외교문서가 공개되 한국의 언론들이 일제희 보도하면서 북한이 저지른 만행으로 단정지었다
그러면서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의 추가도발 방지를 위한 조치라고 미국에 설명했다고 한다.
김일성,정일부자는 정신상태가 병적이고 어쩔도리가 없는 사람들"이라며 군사보복이 당연하지만 정권교체기이고 서울올림픽을 앞 둔데다 그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문서에는 한국은 KAL기 사건을 계기로 소련등 공산권과 실질적인 관계진전을 글어내 북방외교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미국은 평가하고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었다는 것은 서울압송 이후 한시까지 읊으며 중국인 행세를 했으나 북한에서 훈련받은 대로 침상을 정리하는 버릇 때문에 "꼬리"가 잡힌 것으로 드러 났다는 연합뉴스가 워신톤발로 보도한 내용이다.
대한민국이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르자 경제력 또한 동반 상승했고 북한은 위기감을 느낀 미친 김정일은 남한이 잘되는 것을 탐내고 미워하는 마음의 병이 중환자와 같은 민족이길 거부한 살인마다.
언제까지 이런 미친개의 살인행위를 두고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참고 응분의 대가를 치루겠다는 것인지?
이런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이 이끌던 제5공화국은 민주주의 꽃인 대통령단임제를 실천하고 막을내렸다.
첫댓글 깜박깜박한다더니 전부 거짖이었어 어쩐지 매번일등이더니 침애걸릴일없으니 마음놓아라 엣일을 되돌아보는만평 감동으로 읽였다 고마우이 수고수고....
북한사람 전체가 우리의 적은 아니지만 김씨 왕국의 위정자들로 인해 적으로 변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에 어느 체제가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보살피는지 알게하려는 의도로
더 늙고 치매가 걸리기 전에 우리세대에 할일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관한 이야기까지 마칠 시간이 없는것 같아 조급증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계속 격려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