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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휘 종선 (種善, 1368~1438) 양경공 (良景公)의 네째 며느리가 되시며 휘 계원 (季畹, ?~?) 사헌부 감찰공 (=司憲府 監祭公)의 전배위가 되시는 의인 (宜人) 여흥민씨 (驪興閔氏, ?~? )는 사헌부지평 (司憲府持平; 정5품) 을 지낸 민소 (閔逍)의 1남 2녀중 장녀요, 중직대부 교서감지제 (中直大夫 校書監知製敎, 종3품)를 지낸 민안인 (閔安仁)의 손녀요, 대사헌 (大司憲; 종2품)를 지낸 문화인 (文化人) 유운 (柳雲, 1485~1528) 의 외손녀 이시다. 부인은 당대 명문가에서 곱게 자란신 귀한 따님이셨다.
의인민씨의 조부님되시는 교서감지제 민안인 (閔安仁) 에 관해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뿐 아니라 1674년 간행된 양촌 (陽村) 권근 (權近,1352~1409) 선생의 문집 《양촌집(陽村集)》39권에 양촌선생이 지은 <민안인(閔安仁)의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그 행적을 살펴 볼수가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공은 1343년(충혜왕 4)때 출생하였고, 양촌선생이 지은 <민안인(閔安仁)의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홍무(洪武) 갑인년 (1374, 공민왕23)에 과거에 급제”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한중연 1374년 고려문과 기록을 보면 35명의 명단 (민씨 성을 쓰는 2명을 포함)이 보이는데, 동진사 (同進士) 23위 민중립 (閔中立: 증조부가 민지 (閔漬)로 민안인 (閔安仁)과는 재종형제) 및 동진사 (同進士) 24위 민이 (閔頤)가 4월에 급제한 후 9월에 사망하였다는 고려사 기록이다.
그런데 『高麗史』의 또 어떤 기록엔 급제자가 35명이 아니라 33명이라고 한다; 공민왕 23년 (1374) 4월에 정당문학 이무방 (李茂方)이 지공거, 밀직사사 염흥방 (廉興邦)이 동지공거를 맡아 주관한 고려문과에서 김자수(金子粹) 등 33명을 뽑았다는 것이다. 염흥방(廉興邦)은 1374년 동지공거, 1380년 지공거, 1386년 동지공거로 3차례 고려문과를 주관하였다.
[참고: 이무방 (李茂方, 혹은 李茂芳) 은 휘 맹진 (孟畛) 판중추공 (判中樞公) 의 부인되시는 정경부인 (貞敬夫人) 무송윤씨 (茂松 尹氏) 의 외조부이시란걸 익히 알고 있슴]
도대체 어떻게 된 사실인가? 어떻게 해서 양촌선생이 지은 묘지명엔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국가문서에는 그 기록이 누락되어 있단 말인가? 당시에 과거급제란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개인의 전체 가문에게 있어서도 둘도 없이 중요하며 의미심장한 사건인데 말이다. 묘지명에는 “홍무(洪武) 갑인년(1374, 공민왕23)에 과거에 급제”라는 기록이 분명히 있는데, 35명이건 33명이건간에 민안인 (閔安仁)의 이름이 급제자 명단에 올려져 있지 않는 것 또한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여하튼 공의 집안을 살펴보면 유서깊은 명문가임을 알수가 있다; 공의 증조는 원(元) 나라로부터 조열대부(朝列大夫) 한림직학사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翰林直學士壁上三韓三重大匡判都僉議使司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驪興府院君)을 받고 문인공(文仁公)의 시호가 추증되었던 민지(閔漬)이다. 조부는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판판도사사 상호군(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判版圖司事上護軍)이였던 민상정(閔祥正)이며, 부친은 문화찬성사 봉익대부 판도판서 (門下贊成事奉翊大夫版圖判書)에 추증되었던 민선(閔璿)이고, 모친은 완산군대부인(完山郡大夫人) 최씨(崔氏)로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평리(僉議評理) 양경공(良敬公) 최문도(崔文度)의 딸이다. 민선은 완산군대부인 최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이 중 딸이 태조의 4남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에게 시집갔었다. 3남1녀중 3남되신 분이 민안인이다.
이렇듯 의인민씨는 당시의 여느 한산이가의 며느리들처럼 나라의 내노라 하는 명문가에서 곱게 자라시다가 출가할 나이가 되자 한산이가에 시집을 오셨음을 쉽게 알수 있다. 이런 사실 또한 고려말 충남 한산지역 호장집안출신의 한미한 배경의 한산이문이 가정-목은 두 부자 세대를 거치며 이제는 나라의 국반 (國班)
의 반열에 우뚝섰음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목은 선조의 《목은집(牧隱集)》제26권에 민씨 3형제에 관한 시 한편이 나오는데, "민자복 (閔子復), 민유의 (閔由義), 민진사(閔進士) 삼 형제가 주식 (酒食)을 가지고 와서 나를 대접하는데, 마침 염동정 (廉東亭)이 오므로 매우 기뻐서 이에 한유항(韓柳巷)을 초청하여 자리를 함께하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민진사는 민안인을 뜻하고 염동정은 염흥방을 일컸는데, 목은선조와 여흥민씨형제들과는 밀집한 관계가 이미 성립되었음을 엿볼수 있다. 참고로, 민안인은 염흥방의 문생이였기도 하다;
"여강의 삼 형제가 / 驪江三弟兄
성찬으로 늙은이를 대접하는데 / 盛饌餉老夫
동정이 갑자기 왕림해주니 / 東亭忽枉駕
조양이 좌석을 환히 비추고 / 朝陽照座隅
서쪽 이웃서도 반갑게 와주어 / 西鄰惠肯來
우연히 즐거운 자리 이루었네 / 偶爾成歡娛
가을바람은 사람을 맑게 스치고 / 秋風著人淸
노란 국화는 찬란하게 피었거니 / 黃花爛開敷
가득한 술잔 사양할 것 없고말고 / 不辭酒滿巵
흐르는 세월이 진정 일순간인걸 / 流光如隙駒"
위에서 살펴보아 알수 있듯이 려말선초시기때에 한산이문과 혼반으로 인연을 맺은 가문들은 대개가 다 선대때에 가정-목은 선조들과 두터운 사제의 정이나 긴 관료생활을 통해 오랜세월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었다. 혼사가 무턱대고 집안만 좋다고 이뤄진 것이 아니라 몇대를 거치며 쌓아온 끈끈한 인덕과 신뢰, 믿음, 그리고 쌍방간의 두터운 상호존경심에서 그 기반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민안인의 행적을 살펴보면 공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훈계를 받들었다고 한다. 일찌기 학문에 뜻을 세워 성관 (成冠)되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학문이 날로 진취되어 확실친 않지만 홍무(洪武) 갑인년(1374, 공민왕23)에 과거에 급제 (?!) 한 다음 춘추관 검열(春秋館檢閱)에 선임되었다. 부친의 상사를 당하여 3년 동안 시묘를 살면서 복제를 마친 다음, 통례문 지후(通禮門祗侯)에 임명되고, 여러 번 옮겨 예의(禮儀)-전법(典法)의 두 총랑(摠郞)을 역임하였다. 직언으로 권신(權臣)들을 거스르다가 파면되어 4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기도 했다.
공은 다시 군부총랑 (軍簿摠郞) 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삼사(三司)의 좌ㆍ우윤(左右尹)을 더하였는데, 모두 관직 (館職)을 띠고 제고 (制誥) 를 관장하였다. 또 14년 동안이나 오래도록 문서응봉사 (文書應奉司) 를 맡았었는데, 사람들은 근실하다고 일컬었다 한다. 국초에는 재상 우인렬 (禹仁烈) 을 따라 경사 (京師)에 갔었고, 돌아와서는 성균 좨주 (成均祭酒) 에 임명되어 나라의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사람들은 모두 직책에 맞게 하였다고 하였다. 교서감 (校書監)으로 전임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평양교수 (平壤敎授) 로 나가서는, 문묘 (文廟)를 수리하여 석전 (釋奠)의 의식을 갖추며 조약을 엄격히 하여 가르치므로, 생도들 중에 이에 감화되어 가묘 (家廟)를 세우고 분묘 (墳墓) 를 지키는 자가 많았다.
을해년 (1395, 태조4)에 신도 (新都)의 종묘 (宗廟)가 완성되어 상께서 친히 제사하려 할 때, 공이 전고 (典故)에 밝다 하여 악기 (樂器)를 수리하게 하였는데, 낡은 것을 새롭게 만들고 떨어진 것을 보수하되 다 제도에 맞게 하여 대례 (大禮)가 잘 이루어지게 하였다.
공은 성품이 솔직하고 성실하며 인정 많고 검소한데다가, 학문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였다. 서책을 많이 쌓아놓고 아침저녁으로 열람하면서 유도 (儒道)를 독신하고 이단 (異端) 에 현혹되지 않았다. 이락구선생도 (伊洛九先生圖) 를 청사의 벽에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분향 (焚香) 하여 경의를 일으키며, 동몽 (童蒙)을 가르침에도 언제나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에게 청탁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가산 (家産) 을 다스리지 않았다. 언행에도 반드시 옛것을 사모하여 현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못 지나치게 부지런하다는 비방이 있어도 조금도 변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일찍이 《훈몽(訓蒙)》 몇 편을 주석 (註釋) 하고, 또 《속동인문 (續東人文)》을 찬 (撰)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의 일고 (逸稿) 를 수집하여 1백여 질 (帙)에 이르렀는데, 이를 손수 초록(抄錄)하며 여러 해 동안 스스로 즐겨 부지런히 하다가,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무인년 (1398, 태조7) 윤5월 초9일 갑신에 신도 (新都) 자택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이 56세였다. 모월 모일로 택일하여 덕수현 (德水縣) 금옥산(金玉山) 선영 곁에 안장하였으니, 이는 공의 뜻에서였다.
공과 친분이 두터웠던 양촌선생은 공의 묘지명에, "능히 마음속으로 연구하여 터득한 바 있음은 공 (公) 의 학문이요, 옛법을 따르기를 힘써 이행한 바 있음은 공의 뜻이로다. 그 학문을 가지고 나라를 유복하게 하였고, 그 뜻을 실천하여 모든 일에 베풀었도다. 규구 (規矩) 의 기국이라 먹줄을 쓰지 않았고, 포백 (布帛)의 바탕이라 수를 놓지 않았도다. 그 지위가 덕망에 비해 만족하지 못하여 여기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천명인가 그 누가 계승하랴. 무덤 속에 돌을 묻으면서 명 (銘)을 새기거니, 천 년 뒤에라도 선생이 있었음을 알리라." 라고 적었다. 공은 성품이 근면하면서도 질직돈후 (質直敦厚)하였고, 고려말에는 제고에 기여하였으며, 조선개국초에는 유학진흥과 의례의 정비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은 병부시랑 (兵部侍郞) 이도손 (李道孫)의 딸 전의이씨 (全義李氏) 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으니, 차남되는 민소((閔逍) 가 바로 의인민씨의 생부가 되는 것이다.
의인민씨의 부친되는 민소는 진사 (進士) 로 관직에 올라, 1418 (태종 18)년 이천 현감 (利川縣監)을 지냈었다. 세종 초에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을 거쳐, 세종 9년 한성부판관 (漢城府判官) 을 역임하였다. 공의 형님되는, 즉 의민민씨의 백부되는 민진 (閔進) 은 공조정랑 (工曹正郞)을 지냈으며, 공의 여동생, 즉 의인민씨의 고모되는 분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해주최씨 (海州崔氏) 최관 (崔關) 에게 출가하였다. 의인민씨의 고모부되는 최관은 1392년 (공양왕 4) 예조총랑 (禮曹摠郎) 에 임직해 있을때에 정몽주 (鄭夢周)의 일당으로 몰려 직첩을 빼앗기고 곤장 70도를 맞은 뒤에 원지로 유배되기도 하였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곧 풀려나 이후 조선조에 출사하여 여러 요직을 거처 한성부윤, 예문관대제학에 오른 인물이였다.
민소의 부인, 즉 의인민씨의 생모가 되는 공인 (恭人) 문화유씨 (文化柳氏) 는 생몰년미상으로 부사 (府使), 관찰사, 대사헌등을 지낸 문화인 (文化人) 유운 (柳雲) 의 따님이셨다. 민소는 부인 문화유씨와의 사이에 1남2녀, 총 3남매를 두었는데, 의인민씨가 장녀이였고, 둘째가 아들 민효동 (閔孝童) 이였으며, 셋째 차녀는 사헌부대사헌 (司憲府大司憲-종2품), 경상도/전라도관찰사 (觀察使)를 지낸 흥양오씨 (興陽吳氏) 흥원군(興原君) 오백창 (吳伯昌) 에게 출가하였다.
의인민씨의 외조부되시는 문경공 (文敬公) 유운 (柳雲, 1485
~1528) 은 연산군 (燕山君) 10년(1504) 갑자 (甲子) 식년시 (式年試) 갑과 (甲科) 3위 (3/31) 에 올랐는데, 기묘사화 (己卯士禍) 에 연루된 인물로 앞서 말했듯이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한 중요인물이였다. 공의 부친은 사지 (司紙) 유공좌 (柳公佐) 이였는데, 공은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고 1504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14년(중종 9) 호당 (湖堂) 에 들어갔다.
공은 151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기생들과 술만 마신다고 하여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로 전직되기도 하였다. 이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남곤 (南袞)에 의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남곤일당에게 협력하지 않고 도리어 대간들을 거느리고 청하기를, “전하께서 다시 광조 (=趙光祖) 를 쓰시어 임금과 신하가 옛날과 같으면 신등이 마땅히 직에 나아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청컨대 신들을 죽여서 간인 (奸人) 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라고 하여 조광조를 구원하고자 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그 뒤 향리에 묻혀 술로 울분을 달래다 죽었다 한다.
유운은 시풍이 호탕하여 한때 명성이 높았는데, 편저로는 《진수해범 (進修楷範))》 2권 2책이 있는데, 이 책은 1519년 (중종 14) 옛 경전과 사첩 (史牒) 및 구류제가 (九流諸家) 의 설을 섭렵하고 진덕수업 (進德修業) 에 필요한 문구를 뽑아 간행한 것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휘 계원 감찰공의 생졸연대와 자세한 행장은 기록이 일실하여 알 수가 없으나, 공의 형님되는 휘 계전 (季甸) 문열공 (文烈公) 과 더불어 통감훈의 (通鑑訓義) 를 교열하여 편찬했었음을 볼때 학문적 식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의인민씨는 감찰공과의 사이에 2남을 두셨는데 장남은 휘 연 (堧) 현감공 (縣監公) 이며, 차남은 휘 돈 (墩) 참군공 (參軍公) 이다.
2. 휘 종선 (種善; 1368~1438) 양경공 (良景公)의 네째 며느리가 되시며 휘 계원 (季畹) 사헌부 감찰공 (=司憲府 監祭公)의 후배위가 되시는 의인 (宜人) 순흥안씨 (順興安氏) 에 대해선 족보에 “묘풍덕 (墓豊德)”이란 짧은 기록만 있을 뿐 생몰년 미상 및 일체 다른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안타깝다. 그러나 여러정황을 미뤄볼때 부인또한 명문가의 출신이 확실하다. 단지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상황속에 사후에 연루되어 혹 부인과 부인친정에 관계된 정보가 족보나 공공문서에서 누락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의인 안씨는 감찰공과의 사이에 2남을 두셨는데 장남은 휘 한 (垾) 이조정랑공 (吏曹正郞公) 이요, 차남은 휘 분 (墳) 이시다.
[역사적 고찰 하나:
의인안씨와 감찰공의 증손녀 (曾孫녀) 가 되는 분이 사림파 (士林派) 의 거두 (巨頭) 였던 문정공 (文正公) 정암 (靜庵)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의 아내가 되었으니, 휘 한 이조정랑공의 손녀요, 휘 윤형 (允泂) 첨사공 (僉使公) 의 따님이 되시는 분이다. 조광조가 열여덟에 부인과 혼인을 하였고 둘은 금술이 아주 좋았으며 둘 사이엔 아들 둘이 있었다. 두 부부는 조광조가 처형될때까지 20년을 같이 동거동락하였다.
(조광조와 부인 한산이씨의 묘비)
조광조는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던 인물로 중종의 훈구파 (勳舊派) 견제정책에 의해 막강한 왕권의 후원을 등에 업고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었다.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등을 단행하였는데, 성리학적 도학 정치이념을 구현하려 애썼다. 그러나 세조의 총신 (寵臣), 공신 (功臣)으로 벼슬이 높고 녹전 (祿田), 노비 (奴婢)) 를 많이 소유한 당시의 대표적인 지배계급 훈구파인 정인지 (鄭麟趾) , 신숙주 (申叔舟) , 서거정 (徐居正), 강희맹 (姜希孟) 등의 맹렬한 반발에 부딛혀 그의 성리학적 도학정치 이념은 아쉽게 구현되지 못했었다. 1519년 훈구파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이 나뭇잎에 과일즙을 발라 주초위왕 (走肖爲王) 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기묘사화때에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회순으로 유배되었다가 결국엔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사사되었다.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 (李珥) 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
38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조광조는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배타적 종교로 신봉하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불교, 도교, 도참비기 (圖讖秘記) 등을 금할 것을 주장하여, 도교에 대해서는 소격서 혁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무격(巫覡)의 숭신 및 영철야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 중창을 엄금하고 사찰의 노비, 전지를 몰수하였다.
한편 부정적인 평가로는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이있다. 율곡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 (石潭日記)>> 에서,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며 그 급진성을 비판하였다.
퇴계 이황 (李滉)은 <<퇴계집 (退溪集)>> 에서 “그는 자질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하지 못해 그 실행한 바가 지나침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만일 학력이 넉넉하고 덕기 (德器) 가 이뤄진 뒤에 나와 나라의 일을 담당했던들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민이 요순시대의 군민과 같고 또 비록 군자의 뜻이 있다 하더라도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묘의 실패는 여기에 있었다”라고 했다.
또한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아까운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라는 점 역시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된다.
권력에 있었던 기간은 비록 4년밖에 아니되는 짧은 기간이였지만, 조광조는 실로 조선역사에 큰 획을 하나 긋고 지나간 비상한 인물이였음에 틀림은 없는 듯 하다.
그럼, 물론 의인 여흥민씨와 순흥안씨대로부터 2-3세대 흘러간때의 사건이지만 기묘사화를 둘러싼 당시의 한산이씨선조들의 입장과 태도, 행동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간단하게 말하면 다양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이들은 훈구파편에 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지키려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사림파의 입장에서 급진적 태도를 보이거나 아니면 중립의 입장에 서서 표면에 나서려 하지 않는 등, 개중엔 벼슬을 버리며 고향으로 낙향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한 마디로 잘라 이렇다 저렇다 정의할 수가 없다.
단 조선조의 무서운 연좌죄를 적용한다면 감찰공 배위 의인 여흥민씨와 순흥안씨를 둘러싼 집안내에선 아마도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한 일이 벌어지지나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을 해 볼수 있겠다.]
첫댓글 다음편엔 휘 계정 집의공 배위 죽산박씨 가문에 관한 글이 실리겠습니다. 죽산박씨편을 마지막으로 목은할아버지의 열다섯분에 이르는 손주며느리되시는 부인들은 거의다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휘 맹진 판중추공의 장남되는 휘 연기 감사공의 배위 순흥안씨편을 시작으로 목은할아버지의 증손주 며느리되시는 할머님들 집안얘기로 엮어나갈 예정입니다.
대단한 열정에 큰 갈채를 보냅니다
많이 부족한 사람이 쉽지 않은 연재물을 잇자니 여러고충도 있지만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위해서도 풀어야할 과제로 받아들이고 계속 이 길을 가는데까지 걸어보기로 맘을 먹었네 그려. ^^ 옆에서 충고와 조언 아끼지 마시게나..
@이주원 (周遠) 제가 오히려 조언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