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수능시험 잘 치나 못 치나 구원 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데 이 사회가 구조주의 사회여서 주류에 서지 아니하면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의할 내용이 고전 15장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강의를 잘 들었는지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부활이 왜 있는 것입니까? ‘약속’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되고 싶어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안 죽고 싶다고 안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되어 있고, 처형하도록 되어 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활되어야 해요. 부활될 수밖에 없어요.
‘약속’속에는 부활도 들어 있고, 죄 용서도 들어 있고, 영생도 들어 있고 다 들어 있습니다. 골라잡아 선택할 것 하고 거부할 것 거부하고 이렇게 되지 않아요. 한꺼번에 다 우리 운명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시험 치나 안 치나 합격이에요. 이것을 [지옥의 하나님]에서 “구원은 무시험 합격”이라고 했습니다.
입시생들에게 대학도 무시험으로 가면 좋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시험 합격이란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수요는 적고 공급은 많기 때문에 추려내야 합니다. 공무원은 자리가 1개 비었다면 그 자리에 취직하려는 사람이 30명이면 3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1명만 합격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추려내야 하기 때문에 시험이 있지만, 천국은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곳은 천국이란 이름의 지옥입니다. 결국 이것은 종교지요. 그런데 진짜 천국은 수요 공급에 따른 경쟁이 아니라 이미 천국 가기로 생명책에 예정된 자에 한해서만 약속대로 우리 안에서 폭발하지요.
이번 부산 APEC 보고 알았는데, 성도는 천국의 불꽃놀이입니다. 온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놀이입니다. 천국이 팍팍 터질 때마다 성도 1명이 뚝뚝 튀어나와요. 하나님은 깜깜한 어두운 밤에 불꽃놀이를 하고 계신 거예요.
부활의 영생이란 것은 수요 공급의 경쟁에 의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작정한 자는 반드시 구원이 되도록 그렇게 결정을 한 거예요. 천국 자체가 밀려오는 거예요. 천국 자체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실현됩니까? 아닙니다. 이 문제가 신학적으로 어려운데, 그러면 누구한테 실현되는가? 또 예수님입니다. 전 시간에 예레미야, 이사야의 예언, 천상회의 하는 장면 그것도 예수님을 가리키고, 구약에서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말씀도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다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종결됩니다.
예수님 믿고 그 이후에 무엇이 또 있는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모든 일은. 예수님 믿고 그 다음에 또 다른 것 하고? 뷔페식당에 가서 김밥 있고 잡채 있고 탕수육이 있다고 하면, 빈 접시에다 김밥 담고, 잡채 담고, 탕수육 담고 그 다음에 또 뭘 담고 하는 식으로 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쟁반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쟁반에다 우리를 담아버리지요. 이렇게 되면 그 쟁반 안에 김밥도 있고 잡채도 있고 다 있어요. 이 쟁반 자체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잡채, 김밥, 탕수육이 다 담겨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우리가 동참하다 보니까 우리에게도 부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전 15:22-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여기에서 “죽은 것 같이”라는 말은 구원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해 달라고 외쳐도 그것은 죽음에서 나오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국 가고 싶어요.’라는 외침도 죽음의 다른 양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은 계급이나 차등 없이 구원 받는 다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은 예수님이 깃발의 앞에 서서 깃대 잡은 우리의 선도자 모습으로 나옵니다. 부활의 장면에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니고 죽음의 첫 열매가 된다면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죽었다가 살아나는 첫 열매입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예수님보다 먼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나사로도 있고, 야이로의 딸도 있고 하지만 이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입니다. 이런 소생은 장차 올 부활의 예고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한테 와서 예수님으로 이미 종결된 사항입니다. 이 부활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죽은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죽은 자가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들어와서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시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정죄함’과 ‘부활’을 연관시켜봅시다. 왜 연관을 시키는가 하면 고전 15장 끝에 보면 이런 것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두 자로 하면 뭐죠? “약속”입니다.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결재 서류 올려서 도장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기안 작성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요. 정죄해도 아무소리 못할 사람이에요. 우리는 지옥에 가도 따질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이란 이유 때문에 정죄함을 받지 않아요. 평생 지은 내 죄가 어디로 가 버렸습니까? 없어져 버렸어요. 이것은 교체작업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 있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서 우리는 죄 없이 되고, 주님은 주님대로 의롭게 되고 예수 안에서 놀라운 이런 변화가 생깁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소망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제 다음 재앙은 개구리 재앙. 이런 식으로 고대했겠습니까? 다음 내려질 재앙이 개구리 재앙인지 돈까스 재앙인지 아무도 몰랐어요. 그런데 개구리 재앙이 내리고, 그 다음에는 이, 그 다음에는 파리-- 이런 프로그램은 순전히 주님만이 혼자 알고 계시고 나머지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하나하나 풀어져 나오는데 그것이 10가지 재앙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마지막 재앙을 내리라고 한다면 ‘애굽 사람들 모든 지갑에 돈이 바닥나기, 혹은 애굽 사람들 집이 불타기’ 이 정도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엉뚱하게 애굽의 모든 장자 죽이기를 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여튼 하나님은 너무 엉뚱해서 우리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감춰진 비밀’이라고 하는데 --
세상에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신 가져갈 아이디어를 우리는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왜 이런 생각을 못합니까? 못 하도록 감춰버렸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조정하셔서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 사람이 없도록 만듭니다. 기껏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교회 잘 다니기, 헌금 잘 하기, 찬양대 봉사하기’ 이런 정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겨우 가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서 구원 얻는 이런 아이디어는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박사 학위 딸 필요도 없고, 직분 딸 필요도 없고, 그런데 김을수 집사님은 언제 장로 됩니까? 연세가 그쯤 됐으면 장로 돼야 되는데. 장로 하고 싶은 생각 있으면 말씀하세요. 우리 노회가 공연히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장로 되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약속에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장로 안 돼?느긋한 것입니다. 약속에 포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이런 것이 필요치 않아요.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것도 약속입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절대로 천국에 와서는 안 될 사람들은 도저히 이런 말씀이 ?믿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놀라운 기적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안 믿어진다고 거부해요.
왜 이렇게 못 믿게 하는가 하면, 부활이란 부활 안 됨, 이것을 전제로 한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부활 안 됨을 가지고 고전 15장에서는 율법 아래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특이하게도 부활의 반대를 율법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부활을 이해하면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구나. 이렇게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정체를 드러내는데 활용되는 부활입니다. 여러분들이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이 세상을 정죄해야 합니다. 세상 전부를 지옥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조주의 사회에서 고난 받겠지요. 그러나 고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내 속에 있는 부활의 능력이 그렇게 시키니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지요. 그런데 이것조차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단 말이지요.
부활은 ‘너 살릴게’가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를 고발하는 일을 하게 합니다. 아직도 부활의 느긋함을 이해 못하고 죽는 것이 무서워 벌벌 떠는 사람을 고발하는 입장에 서라고 우리를 부활 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부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육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흙에 속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했고 흙에 속했다는 말은 재료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연약함, 허약함을 말합니다. 마귀가 공격하면 눌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함을 육과 흙으로 보고 있습니다. 죽음에 얽매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쉽게 해 봅시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거치고 난 부활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이미 거친 사람이 됩니까? 죽음까지도 이미 거처 간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 속에 들어가잖아요. 죽음을 통과하고 난 후의 완제품을 우리가 받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는데,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니까 이 땅에서 죽음의 혹독함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부활에 참여된 것을 기쁨으로 느끼게 합니다.
죽음은 이미 거쳐 온 것이기에 충분이 죽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느긋하게 부활되었다 이 말입니다. 죽어도 상관없는 느긋함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가 부활을 아는 자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흙에 속한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속한 영광과 하늘에 속한 영광이 다릅니다. 별의 영광과 달의 영광이 다르듯이. 지상의 영광과 하늘의 영광을 비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5장 55절을 봅시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 재미있지요? 영희야! 영철아! 이것은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사망아! 사망은 인격체가 아닌데 사망아! 하고 부르고 인격체 다루듯이 하지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여기에서 ‘사망아!’ 하는 것은 ‘율법아!’하는 뜻입니다. 율법이 사망을 조장하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아! 혹은 사망아! 네가 지금 어디를 겨냥하고 있느냐? 이미 우리는 거쳐 왔는데.
그러니까 타깃이 두게 있는데 하나는 죽음의 타깃(A)이고 하나는 부활의 타깃(B)이라고 하면, 성도는 죽음을 거쳐서 부활 속에 있거든요. 그런데 율법은 활을 들고 어디에 쏘는가 하면, A타깃을 향해 쏩니다. 그러니까 부활 쪽에 있는 사람이 ‘사망아! 네가 지금 어디를 향해 쏘느냐?’ 하고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가 A쪽에 있으면 아프겠는데, 이미 사망을 지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나와 함께 사시는 분이 부활이기 때문에 B쪽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공격을 해도(너 간음했지! 살인했지! 거짓말 했지! 등등) 예수 안에서는 ㅑ改纛?없어요.
‘목사님! 그 말을 믿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왜 없는가 하면, 실제로 자기는 육이고 육은 안 죽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육에서 나오는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어간다는 말은 아파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죽음을 느끼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은 모두가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이것은 개,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살고자 하는 본능을 자기 힘으로 꺾어서 부활로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내 느낌상 여전히 살고 있지만 성경을 보니까 이미 우리는 죽었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더라는 것이지요.
마치 내가 저녁 안 먹으면 배고프듯이 믿고 어쩌고 할 것 없이 확실한 것처럼, 예수님 말씀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그 말씀이 자연스럽게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육의 떡보다 영의 떡이 더 그리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일 수 없고 숨길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집에 누워서 ‘이제부터는 예수 안 믿고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도, 이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면, 비록 내가 살려고 애를 쓰도 그것은 허상이고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내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어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오지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누가 훔쳐갈까 봐 꼭꼭 감춰 두었어요. 누구도 손 못 대도록. 지금 현재의 우리 목숨은 버릴 생명이에요. 버려도 괜찮아요. 거지 나사로가 죽었지요. 없어져도 괜찮다고요. 거지로 죽어도 괜찮아요. 귀한 생명이 있다면 VIP로 모시고 갈 테니까.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5-58)
이 말씀은 ‘이제 됐다’ ‘안심 하라’는 것입니다.
15장 2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확실한 ‘약속’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하고 설교를 하면서도 무슨 생각이 자꾸 드는가 하면, 교회 이렇게 온 분들에게 말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봉투에다 천만원씩 넣어서 나눠드리면 얼마나 기뻐할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돈은 안 주고 말만 나불대는 내가 일종의 사기꾼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람들은 지금 돈이 그리워서 왔는데 나는 말만 하고 돈은 오히려 내가 받으니 일종의 사기성이 농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그럴 경우에도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고 사도바울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세요.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15:2)
돈 천만원 가지고 구원을 얻을 것 같으면 그냥 천만원 줘버려요. 수십억을 줘도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구원 되도록 해야지요. 그것은 복음이지 돈으로는 안 돼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돈이 10억 있는 사람도 있고 1억 있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점이 있는데, 10억 있어도 한 시간 후에 죽을 수 있고 100억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와 상관없이 한 시간 뒤에 죽을 수 있어요.
죽음에는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논할 때는 죽음을 기초로 해서 논해야 합니다. 죽어가는 인간이 왜 돈만 챙기느냐? 죽어가는 인간이 왜 교회 안 나오는가? 죽어가는 인간이 왜? 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만 따라다니는 줄 알지 죽음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몰라요. 이런 자를 잠언에서는 ‘어리석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자가 어리석은 거예요.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쌀이 창고에 쌓여 있어서 더 넣을 공간이 없어요. 1인당 쌀 재고량이 20년 전보다 1/4로 줄었습니다. 쌀을 먹지를 않아요. 새벽 1시까지 비디오보고 자는데 아침에 밥맛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우유나 빵으로 때우지.
쌀 소비를 안 해요. 그런데 농민이 쌀 생산한 것에 대해 정부에서 보조금 지급하면 국제 협약에서 입도 못 뗍니다. 국제 협약에서 정부가 쌀 보조금 못주도록 해 놓았어요. 게임을 하면 공정한 규칙에 따라 해야지요. 우리나라도 농민에게 쌀 보조금 안 줄 테니 너희나라에서도 주지마라고 서로 협약했어요. 서로 이 약속을 지킬 때만 우리가 휴대폰이라도 하나 더 수출할 수가 있는 거예요.
농민 인구가 전체 7%도 안 돼요. 나머지 93%가 농민들 살리기 위해 있습니까? 농민들한테 쌀 보조금 지급하면 도시 빈민들이 얼마나 더 어려워진다는 것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대구 칠곡에 있는 어떤 농민은 벤츠타고 다닙니다.
조류독감 유행하면 치킨집 안 된다고 데모하고, 비브리오 균 돌면 동해안에 횟집 망합니다. 그러면 나라에서 횟집 하는 사람 다 보조해야 합니까?
이 세상이란 곳은 어차피 죽도록 되어있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죽음을 통과한 부활이 아니라 이 죽음을 통해서 죄를 알라는 것이지요.
성도가 이 땅에서 처절한 죽음을 맛보면서, 성도로 하여금 ‘네가 무슨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야했던가’를 아는 것을 가지고 부활의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지요. 율법이 날아와서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면, 여기도 맞고 저기도 맞고 천번 만번 맞아도 당연한데, 지금은 이미 부활 안에서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죄는 죄대로 온 몸으로 느끼면서 절실하게 죽음을 절감하면서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믿고 감사하면서 찬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15장 45절을 보겠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구절 보니까 실로암교회가 생각나요. 옛날에 이 구절 강의할 때 그 장소에서 했거든요. 그 때 기억나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화장실 ---
여기 보면, 왜 산 영이 되었다고 하고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살려준다는 말은, 아담은 살아있음의 최초지요. 살아있어서 문제없다면 살려준다는 말이 동원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살아 있는데 이 사람이 뭔가 잘 못 되어서 죽음으로 가니까 살려주는 영이 없으면 어떤 인간도 아담에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43절에 “욕된 것”이란 말이 나오는데, 욕되다는 것은 천하다는 것입니다. 무가치하다는 뜻입니다. 42절에는 “썩을 것” 43절에 “약한 것” 이런 것은 전부 첫 사람 아담의 것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도 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약하고, 썩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뭐 또 희망을 갖느냐? 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이러한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이 행한 것에 대해서 이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 당신이 돈을 줬어, 나에게 뭘 준 것이 있는데?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근원적으로 우리는 살려내는 분입니다.
그리고 15장 초반에 보면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있지요. 5절에 보면, 게바에게 보이시고, 12제자에게, 그리고 500여 형제에게, 그리고 바울에鍍?보였다고 하지요.
여기에서 상당히 어려운 논쟁거리가 하나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지요. 부활 후 그 부활된 몸이 십자가 죽기 전의 그 몸으로 돌아간 몸입니까, 다른 몸입니까?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 있지요.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만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다시 나왔지요. 그 때 그 나사로와 죽기 전의 나사로가 같은 몸입니까, 다른 몸입니까? 같은 몸입니다. 그러니까 동생들이 알아보고 주위 사람들이 알아봤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에게도 이것이 해당 되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심한 논쟁거리에요. 왜 논쟁거리인가 하면, 영, 육, 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그들의 논리가 다 깨질 판이에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다른 몸이라면 영1, 영2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3분설이 아니고 4분설이 되지요. 육도 육1, 육2가 되어야 합니다. 혼도 혼1, 혼2가 되고. 이렇게 되면 6분설이 됩니다.
영, 혼, 육 이렇게 나눌 때는 서로 전혀 다른 요소가 있을 때 끊을 수 있어요. 논리를 전개할 때 끊어지면 그 끊어진 것을 책임을 져야 해요. 예수님은 죽을 때 육은 보내고 영혼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은 죽었어요. 그러면 부활은 뭐냐? 육적인 부활이 되려면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도 따라와야 해요. 육이 따라오면 그 전의 육과 같은 육이라면 예수님께서 뭘 통과 못합니까? 문을 통과 안 했잖아요. 물 위를 걸은 적은 있지만. 예수님께서 벽을 통과하고 이런 적은 없었잖아요.
사람의 몸이 딱딱한 금속이나 물질을 뚫는다는 것은 에너지 반발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못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통과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에 귀신일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후에 문이 닫혔는데 제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귀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귀신이란 것은 영혼만 있는 것을 귀신이라고 합니다. 육체가 없는 것이 귀신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한 것이 아니고 그냥 귀신으로 떠도는 것이지--
진짜 육 같으면 뚫리지 않아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만든 영, 혼, 육에 맞추다보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귀신이라고 합니다. 귀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이 전과 동일한 육 같으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안면이 있기 때문에 엠마오로 내려갈 때 예수님을 다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실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더란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마리아가 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 갔을 때에, 동산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리고 천사일수도 있고.
그러면 무엇부터 규명되어야 하는가 하면, 천사는 육이 없잖아요. 토마스 아퀴나스나 이런 학자들은 그렇게 말했어요. 육이 없는데 어떻게 동산지기가 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천사 3명이 찾아왔을 때, 육의 모습으로 찾아왔잖아요.
이런 것을 영, 육, 혼 3분설로 이해를 하려고 하니까 가르치는 사람도 무리수를 두고, 듣는 사람도 골치 아프고 --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부활이란 죽어서 소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활은 지상에서 측정할 수 없는 다른 법칙과 원리가 통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떡을 잡숫고, 문이 닫혔는데 들어오는 것은 예수님이 육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귀신이 아니고, 세상과 다른 부활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왜 자꾸 예수님을 영, 혼, 육으로 이해하려고 하는가 하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문을 통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부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을 보면서 라이벌 의식을 느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 따라잡으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나는 죽어야 마땅한 인간인데 예수님처럼 부활시켜 주신다니 너무 감사하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끝내면서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령에 의한 신앙생활은 부활신앙이 있으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대단히 작고 보잘 것 없게 만듭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보면, ‘인생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부활은 예수님의 대단함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잘 것 없어요. 우리를 아주 작게 봐야 돼요.
자신을 개미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개미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별 큰 고민거리가 아니고 근심거리가 아닙니다.
부활신앙이란 것은 자신을 더욱 더 작고 보잘 것 없게 만들어요. 그대 앞에서 나는 한 없이 작아져야 해요. 사람이 작아져야 정상인데, 이것이 신앙생활인데, 반대로 자신이 커지면 그 속의 근심도 따라 커집니다. 걱정도 커지고 두려움도 커지고 함께 커집니다.
많은 주부들이 이혼하고 식식하게 잘 삽니다. 그런데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혼하면서 난리를 치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데, 대부분의 이혼한 가정의 자식들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드라마에 나오는 아이들은 부모가 이혼한 후에 문제아로 나와요. 부모가 이혼하면 아이는 양쪽 집에 다 다니면서 용돈 타고 하면 됩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적응력이 강해서 그래요. 아무 문제없는데 너무 사건을 심각하게 보는 거예요.
너무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게 되고, 기도도 씩씩거리면서 오래 하게 되고, 뭔가 신비로운 것을 봐야 되고, 뭔가 획기적인 것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되면 성경이 주는 자유가 ‘약속’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약속이 되어버려요. 이것은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부활장(고전 5장)을 끝내면서,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개미도 그냥 개미가 아니고 죽은 개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나를 주님이 사용하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