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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7-08-21 | |||||||||
가신이의 발자취
선생님, 존경하는 피천득 선생님! 선생님께서 이승의 여행을 마치셨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보다는 부러움이 앞섭니다. 그건 선생님께서 아흔일곱 해라는 천수를 누리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래 사셨으되 아무런 흠 없이, 아무런 티 없이, 아무런 탈 없이, 가을 하늘처럼, 심산의 계곡물처럼, 한떨기 연꽃처럼 사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름을 내걸고 있으면서 선생님처럼 그렇게 오래, 그렇게 깨끗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부러움이 어찌 저 혼자만 갖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선생님을 댁으로 직접 찾아뵀던 것이 7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어느덧 35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인사를 드리면서도 선생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선생님의 수필에 ‘할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는 어린아이들의 당연한 착각처럼 교과서에 글이 실려 있는 유명한 분들은 의당 돌아가셨어야 하는 것이 학생들이 일으키는 착각입니다. 학창 시절의 그 착각을 저는 문인이 되고서도 다 지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높으시고 눈부신 존재였습니다. 남에겐 부드럽고, 스스로에겐 엄정하던 선생님 ‘싸우지 못하고 살아왔다’ 못내 죄스러워 하시던 오롯이 맑고 깨끗하던 우리의 영원한 ‘정면교사’ 선생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이 문인이 된 첫번째 보람이었던 그때부터 오늘까지 선생님은 참으로 청아했고 고결했고 그리고 우아했습니다. 이름을 가진 문인들이 탈을 만들고, 때가 묻고, 추하게 되어 세상의 반면교사가 될 때 선생님께서는 오롯이 맑고 깨끗하여 우리의 정면교사이셨습니다. 선생님, 존경하는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나 나직나직 말씀하시고,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게는 칼날의 예리함으로 단호하고 엄정했습니다. ‘전에 쓴 글보다 수준이 못해서 안 쓰는 것이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절필 50여년의 세월을 사셨습니다. 그 단호함을 지켜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는 문인들은 잘 압니다. 글을 쓰고 싶고, 발표하고 싶고, 박수 받고 싶은 것은 모든 문인들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본능을 억제하신 겁니다. 그리고 문인들의 보편적 아둔함은 자기 자신의 글이 어느 시점에서부터 전 만 못하게 되는지 식별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그 두 가지를 다 하셨으니 현인이시고 성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고, 부끄럽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선생님의 이런 말씀이 들리는 듯 합니다. 예, 선생님께서는 검소하고 또 검소한 생활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는 부끄러움을 늘 일깨워주셨습니다. 아주 오래된 서른두 평짜리 아파트에 사시면서도 그게 너무 잘 사는 거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하셨습니다. 그런 거실에는 그 흔한 소파 하나 없이 낡은 밥상이 놓여 있어 손님을 불편하게 했고, 선생님의 와이셔츠 소매끝과 칼라끝은 닳아질대로 다 닳아져 보푸라기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동은 천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언제나 선생님의 서재를 지키고 있는 시 구절입니다. 그 시구는 선생님의 그 고고하고 절제된 삶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단출한 서재에 있는 책상 하나. 저 50년대의 질 나쁜 합판이 닳고 닳아 모서리가 너덜너덜 들떠 오르는 그 책상은 선생님의 청빈의 표본이고, 풍요의 시대에 가난을 벗하며 옛선비처럼 살고자 했던 선생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보물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박노해의 시집을 사 읽고, 그런 시인이 왜 있어야 하는지도 이해하고, 인정하셨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역사 격랑의 세월을 거쳐 오시며 정면에서 싸우지 못하고 비켜서서 살아온 것을 못내 죄스러워하시곤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60년이 넘게 독자들이 찾는 좋은 글로써 모든 사회적 소임을 다하셨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수많은 독자들이 존경의 마음으로 우러러 꽃을 바칩니다. 그 꽃을 밟고 가시는 그 끝이 천당입니다. 선생님, 부디 먼길 편안히 가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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