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장
세상을 떠난 누이의 아들 입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첫 정기휴가를 나온단다.
날마다 기도하듯 챙겨주는 어미가 없음에도 묵묵히 그리고 의젓하게 군 생활을 해주어 고마울 뿐이다. 사실 오는 4월이면 상병으로 진급하니 정기휴가가 좀 늦은 편이다. 오늘 아침 통화에서 저 스스로 시간이 참 빠르다고 하였으나 나에게는 그 말이 몹시 아프게 들렸다. 이등병 때 면박 한 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편지 한 통 제대로 못 보내준 채 지금까지 왔다. 내가 녀석을 잊고 지내는 동안에도 녀석은 군에서 가장 힘들다는 전술훈련이며 유격훈련 그리고 엊그제 온 세상이 꽁꽁 얼었을 때의 혹한기 훈련도 받으며 보냈다. 또 연평도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어땠으랴. 저 안의 단내 나는 시간들이 내게는 앞산 숲의 바람처럼 흘렀던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특히 군대를 갔다 온 남자들에게 후임병 시기처럼 시간이 더디 갈 때가 있을까. 자유를 빼앗긴 구속, 별의별 성격을 지닌 8도 사나이들의 동거, 살벌한 위계질서, 30여 년 전 그 시절들은 지금도 꿈을 꾸면 거의 악몽이다.
나는 꼬박 33개월을 군에서 보냈는데 후임병 시절 영어 단어장 하나가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입대하면서 영어 단어장 한 권을 신줏단지 모시듯 챙겨갔다. 입대하기 전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를 통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해치운 터라, 병영생활을 마치고 나면 다시 백지로 돌아갈 게 뻔해, 단어장 한 권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 나오자는 마음을 먹었다.
1980년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 세상이 뒤숭숭하던 시기에 입대한 나는, 두 달의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강원도 철원의 백골부대로, 1개 소대가 1개 대대를 지원하는 4.2인치 박격포 부대였다. 그러다 보니 1개 소대씩 독립된 생활이었다.
서서히 자대 적응을 해가면서 이등병의 풋내를 벗어갈 즈음 나는 그 영어단어장을 꺼냈다. 서릿발 같은 선임들의 눈치가 있으니 내무반에서는 단어를 암기할 엄두를 못 냈다. 대신 화장실이 제격이었다. 일기를 쓰는 척하며 단어장의 단어를 적은 메모지를 가늘게 말아 화장실의 허름한 시멘트 벽돌 틈에다 숨겨두고서는 갈 때마다 그것을 꺼내 암기를 하였다. 휴식 시간에도 눈치가 보여 마음 편히 못 쉬는 이등병이라, 쉬는 시간이면 생리현상이 없어도 화장실을 찾았다. 비록 냄새 나는 공간이요, 쪼그려 있으려니 다리도 저렸으나 그것은 고된 졸병 생활의 유일한 낙이며 위안이었다. 그런데 점차 화장실 출입이 잦아지자 하루는 선임병이 장(腸)이 나쁘냐고 물어왔다.
영어 단어를 몇 개라도 외우면 어쩐지 그 하루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심지어 서서 볼 용무도 그곳에서 쭈그려 보면서 단어 메모지를 꺼냈다. 선임병이 뭔가 눈치를 챈 듯해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였지만 끝내 꼬리는 밟히고 말았다. 수상쩍어하던 선임이 화장실 문틈으로 들여다본 것이다.
감히 ‘쫄따구’ 주제에 제 시간을 찾으려 한다며 그날 밤 내 엉덩이는 그야말로 묵사발이 되었다. 팬티가 살점에 엉겨 붙어 화장실에서 팬티를 내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달 정도 지나서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화장실 머무는 시간 10초, 횟수 세 번으로 제한되었다.
화장실 사건 이후 뜸하던 단어 암기는 제법 일병 티가 났을 때부터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 대놓고 책을 볼 위치는 아니어서 교육 가운데 휴식시간이나 야간근무 시간을 이용한 것이다. 이번에는 아예 단어장을 한 장씩 떼어내 투명 비닐로 감싸 철모 안에 넣었다. 그리고 휴식 시간이면 철모를 벗어 커닝하듯 들여다보며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벗은 철모는 두 손으로 깍지를 껴 항상 가슴에 안고 있어서 누구도 눈치채기 어려웠다. 다들 그랬듯 그저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이나 힐끔거리는 줄 알았을 터이다.
야간 경계근무를 서면서 딴 짓을 한다면 영창감이다. 하지만 긴긴밤 근무를 서면서 하늘도 보고, 고향 생각이며 부모가 그리워 눈물짓기도 한다. 또 가끔은 달빛을 받아 메모를 하기도 하였다. 나는‘볼펜플래시’를 만들었다. 박격포 부대에서 야간 훈련 때 사용하는 전구를 이용한 것인데, 이 전구의 크기는 조금 두꺼운 볼펜 촉 정도이다. 이 전구를 볼펜 볼이 나오는 곳에 넣어 소형 건전지를 부착하였다. 작은 홈으로 나오는 이 플래시 불빛을 철모 안에다 비추면 반경이 작아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지 않았다. 낮 근무 중에는 철모를 벗을 수는 없어도 야간에는 슬쩍 벗어들 수 있었다. 함께 근무 서는 선임이 꾸벅꾸벅 졸 때면 나는 아주 잠깐씩 이 플래시를 철모 안에다 비추었다. 단어를 외울 요량으로 눈 좀 붙이라며 선임을 은근히 부추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조는 경우가 없었다. 동료에겐 지루하게 느껴졌을 야간 보초 시간이, 다음 초병의 근무조차 대신 서주고 싶을 만큼 나에게는 짧게 느껴졌다.
한 장 한 장 뜯어진 단어장이 어느덧 바닥을 보일 때 나는 어느 정도 선임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내게 주어진 여가를 철저히 챙겨 갔다. 다 찢긴 단어장 대신 새로 산 단어장을 사물함에 기대어 두 다리 뻗고 볼 수 있게 된 위치였다. 제대할 무렵에는 어느 페이지 몇째 줄의 단어라고 기억할 만큼 완벽하게 내 것이 되어 있었다. 물론 고등학교 과정을 건너뛴 나에게 그것은 대학에 들어가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우리 찬오도 대학에 못 갔다. 가난하거나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방황이 좀 깊었다. 녀석이 제대를 하면 대학에 진학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제 서서히 군 생활의 여가를 잘 챙기면 보탬이 될 것이다. 지금은 내무생활도 30여 년 전과는 환경이 다르지 싶다. 녀석이 첫 휴가를 나온다니 어쩐지 마음이 급하다. 제 외삼촌처럼 금쪽같은 젊은 날을 허드렛물 버리듯 할까 봐, 무언가 일러주어야 할 말이 입안에서 콩나물처럼 자라나는 듯하다.
*군잎
소대가 독립생활을 하다 보니 내무반의 군기가 엄격한 편이었으나 나는 비교적 내무반 생활을 잘하는 편이었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거나 선임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잘 챙겨주어 얼차려나 구타가 있을 때는 늘 열외의 대상이었다. 내가 제대할 무렵만 해도 구타는 거의 사라져 갔지만 그 이전에는 달랐다.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일주일이면 거의 한 번 꼴로 매질 푸닥거리가 이어졌다. 그 푸닥거리를 얼른 치러 버려야 주말이며 잠자리가 편안하였다. 은밀한 집합이 있을 때마다 선임들은 나를 근무 교대시켰다. 교대할 시간이 아닌데도 내가 나오면 근무자는 무슨 일이 있을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동기들이나 바로 위 선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어서 회식이나 영화 상영 그 밖의 오락 시간이면 나는 근무를 자청하였다.
첫댓글 여자에게 출산의 이야기가 있듯이 남자에게는 군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찬오에게도 희망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사장님의 희망이 늘 찬오에게 전달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