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족에 관한 글을 읽고 너무 충격적이라...
고대 중국에 이런 악습이 있었다는 점을 알리고자 글 올립니다.
◆전족 = 중국에서 여자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하여 헝겊으로 묶던 풍습을 말한다. 명대(明代)에 특히 성행했으며, 청대에는 만주인에게도 유행할 조짐이 보여 1664년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후 1894년에는 서태후(西太后)가 금지령을 내려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소각(小脚:전족을 한 발)''에 비해 ''대각(大脚:전족을 하지 않은 발)''은 천시됐다. 민국(民國)시대에는 여성운동에 의해 전족 해방이 제창되어 현재는 거의 소멸됐다.
전족의 풍습이 생긴 이유는 확실치 않다. 전통적인 남존여비, 남성의 여성 독점욕, ''가는 허리''와 더불어 ''작은 발''을 미인의 특질로 한 점 등 여러 가지 논의가 있으나, 중국 고대 남성들의 변태적 기호의 대상인 것은 확실하다.
전족의 유래
중국의 환관과 전족은 고대 중국이 낳은 인간 장난감의 폐습이었다. 전족의 기원은 통설로는 10세기 때의 시인으로 유명한 이욱이 궁녀 예낭의 발을 비단으로 싸서 황금의 연꽃 대좌에서 춤을 추게 한 것이 그 시초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족은 '금련, 서연'이라는 식으로 미칭했고, 조그만 구두(궁혜)를 신은 요염한 모습은 바로 연꽃 위를 걷는 화사한 아름다움이었다. <중국의 기습>이라는 연구서에 의하면 전족은 여자가 유아 때 발을 천으로 꽁꽁 감아 조그만 구두를 신겨서 후천적으로 교정하여 기형으로 만들어버리던 풍습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발이 1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걸음을 걷는 것을 보면 아슬아슬할 정도이지만, 우아한 그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이 전족의 시술은 잔인무도한 것으로 남자의 거세와 대응되었다. '시전, 시긴'이라고 하는 시술은 두번째 발가락부터 나머지 관절을 발바닥에 붙을 때까지 구부려 천으로 죄어서 묶는다. 절세의 미인 비연이나 양귀비는 구두의 크기가 10센티미터도 못되는 전족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이런 전족에는 3귀의 미라고 해서 '비', '연', '수'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비는 지방이 있어서 윤기가 흐를 것, 연은 부드러워서 살집이 좋을 것, 수는 모양이 아름다울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전족은 규방에서 여자를 인공적으로 고쳐 만들어서 쾌락을 한층 더 즐기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여자의 발이 좁고 작다는 것은 고귀하다는 상징이며, 발이 작다는 것은 성기도 멋지다는 특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보행에 보통 이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허리 부분이 단련되고 강철 같은 힘을 키워주었다. 규방의 사치 동물로의 도태였다.
또 진상을 명확히 추리한다면 발을 기형화한다는 것은 규방에 가두어놓고 외출할 수 없게 하고,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는 질투심에서 나온 계략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플루타르코스가 기술하고 있듯이 처첩에게는 신을 것을 주지 않고 외출을 금하여 하루 종일 집 안에 가두어두었다. 대개의 여자는 금이 장식된 신을 신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았다. 전족은 남자의 시기심이 낳은 열쇠로 잠겨진 발이었다.
또 다른것은....
최근에는 단순히 얼굴이 예쁜 여성보다는 섹시한 여성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는 것을 보면 여성 미의 기준도 날로 변한다. 얼굴, 유방, 둔부가 가장 매력적 포인트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이보다 더욱 매력적이고 섹시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전 족, 즉 작은발이었다. 전족의 기원은 10세기 무렵 당나라가 소멸된 후 생긴 5호 16국시대 남당에 서 시작됐다고 한다.
남당의 황제가 아름다운 왕비를 위해 황금으로 큰 연꽃을 만들고 무희들의 발을 비단으로 묶고서 발끝은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연꽃 위에서 춤을 추는 가무를 즐겼다. 이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모든 여성들이 그것을 흉내내는 바람에 전족의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전족은 연꽃 위를 걸어간다는 뜻으로 「금련」이라고도 했다.
전족은 어린 아이때부터 발에다 엷은 천을 감고 엄지발가락은 위로 젖힌 뒤 다른 네발가락은 뒤 꿈치 쪽으로 향하게 해 접어개듯이 한 후 작은 신을 신겨 발이 커지지 않도록 하는 바람에 잔혹 비정한 고통이 따르는 처사였다.
작은 발은 걷는데도 위태위태하므로 당연히 허리에 미치는 부담이 커 그로인해 음부의 지방이 많아지고 음부를 이루는 골반근육이 활성화되며 허리부분의 힘도 세어져 성적능력이 배가된다고 믿었다.
더 나아가 발바닥은 성적으로 민감하기 때문에 또다른 성기라 여겼고 그래서 그런지 전족을 드러 내놓고 내보이는 것은 터부시되기도 한 것을 보면 당시 전족의 위력은 대단하였던 것 같다. 「성과 관련된 것은 천하다」라는 보이지 않는 유교적 관념은 이제 과감히 떨쳐버려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