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나라를 잃고 먼 이역 땅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향수와 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고 밝은 내일에의 기다림을 노래한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죠.
역사인물열전, 오늘은 청포도, 절정, 광야 등 어두운 시대상황에서 명징한 언어로 불멸의 독립의지를 노래한 민족시인,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닌 몸을 던져 싸운 실천시인 이육사(이원록)에 대해 살펴볼까요.
1.출생과 어린 시절
1904년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난 육사,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항일 투사의 집안인데, 그의 투철한 항일 정신은 이런 가풍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 아닐지··
한편 어릴 때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그는 17살 때 대구로 가 교남학교(대륜고등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후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도쿄 쇼오소쿠 예비학교에서 공부하다 1925년 귀국하는데,
그의 수필이나 평론에 보이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나 서구문학이나 사상에 대한 깊은 조예는 바로 이같은 교육경험 때문으로 봐야겠죠.
2.독립투쟁
귀국 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그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는데,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라 호를 육사(陸史)로 정하게 되죠.
참고로 그는 처음에는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로 '戮史'란 필명을 썼는데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는 집안 어른의 권고로 다시 바꾼 것이죠.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학문과 독립투쟁을 병행하게 되는데, 이때 루쉰을 만나게 되어 후일 그가 사망하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죠.
그는 40년의 짧은 생애동안 17회나 투옥될 정도로 항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쫓기며 살았는데, 결국 그의 이 모든 희생은 오직 민족사 앞에 떳떳하게 서려고 하는 그의 굳은 신념과 의지 때문이 아니었을지··
3.시작(詩作) 활동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우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한 그는 1935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면서 본격 문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죠.
이후 만주의 외숙들이 경영하던 일창한약방에서 독립운동의 연락책 역할을 하며 자주 만주를 오가던 그는 이 때를 배경으로 ‘절정'이라는 시를 짓게 되죠.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그는 이 외에도 약 3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의 시들은 치열한 항일 투쟁 속에서도 직설적인 표현들은 거의 없어 심지어 진짜 항일시인지 여부에 대해 오해를 받는 경우까지 있는데 이는 그의 삶의 궤적을 제대로 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특히 마광수 교수는 '청포도'의 주제는 그냥 '청포도는 맛있다'일 수도 있지만 수능을 쳐야 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시에 '민족'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수험교육에 대한 비판은 별론으로 그 예는 정말 잘못 들은 듯··
4.인간 이육사
"그의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얼굴빛이 그리 희지는 않았지만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고 구김새가 없었다. 그 위에 상냥하고 관대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제일류의 신사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술을 무척 좋아하고 많이 마셨다. 그는 아무리 마셔도 주정을 하지 않았고 조금의 일탈도 없었다."
그와 절친했던 신석초의 평가인데 그는 일경에 잡혀 갈 때도 양복에 나비넥타이는 꼭 맬 정도로 멋쟁이 였다고 하니 "아직도 넥타이가 어색한" 저와는 전혀 다르지만 뒷부분은 어찌 그리 저와 똑같은지··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왔다"던
할머니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그의 '연보(年譜)'라는 시의 앞부분인데, 이 또한 "술은 피보다 진하다"는 저의 소신과 어찌 그리 같은지··
다만 열여덟 살 때 중매 결혼한 그는 독립투쟁으로 말미암아 부인과 보낸 시절이 평생 2년도 채 되지 않아 슬하에 딸 하나만 겨우(?) 두고 있는데 '첫사랑' 운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네요.
이것까지 '조국'으로 해석해야 되는 것인지·· (ㅎㅎ)
5.마치며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조국을 위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결코 쓰지 않겠다던 이육사,
그는 1943년 모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귀국했다가 독립운동조직의 무기 반입을 도운 혐의로 체포돼 이듬해 북경 감옥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고국에 돌아오는데, 그의 유해는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고향으로 이장되죠.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에 대해 강렬한 저항 의지로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이육사,
치열한 삶의 아픔과 피맺힌 통곡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그의 유고시 '광야'로 마칠까요.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의 피울음과, 부둥킨 두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를 잊지 않는 회원님들 되시길··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청포도! 언제 날 좋은 날 청포도라도 한송이 싸가지고 안동에 있는 그의 문학관을 한번 들러보시는 회원님들 되시길··
(펌글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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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칠월은
이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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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1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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