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바뀌었습니다.
오늘 누가 쓴 글을 따라가다보니 처박아둔 제 네이버 브로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오래전에 적은 글 하나 있어 올려보는데요,
김정진인가 하는 분의 글에서 아이템을 받아 이리저리 꾸며본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발표한 적도 있지만 지금 제가 읽어봐도 재미있어서 복사해 붙혀 봅니다.
혼자만 재밌나요?
호랑이를 위한 변명
호랑이는 참 억울했을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시험 같았거든요.
호랑이는 처음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곰과 함께 환웅에게 찾아갔었지요.
환웅은 그들에게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동안 동굴에서 견디면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호랑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열흘도 못되어서 뛰쳐나왔어요.
고기만 먹는 호랑이보고
100일동안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지내라는 것은
그냥 굶어죽으라는 이야기하고 같은 겁니다.
쑥과 마늘도 충분하게 준 것도 아니었을 거에요(쑥 한타래와 마늘 20쪽이라나요).
그리고 그 쑥과 마늘이 얼마나 냄새가 독합니까?
좁은 동굴 속에서
아니, 자기한테서 나는 냄새는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상대방에게 나는 쑥과 마늘 냄새는 오죽할까요.
게다가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절은 땀과 배설물, 그리고 익숙하지 않는 다른 개체의 몸냄새는 정말 짜증났을 겁니다.
그런데 곰은 어땠을까요?
사실 곰에게는 그런게 별 어려움이 없었을 거같아요.
알잖아요. 곰은 잡식동물이어서 쑥과 마늘도 먹을 수 있었을거에요.
무엇보다도 곰은 겨울잠을 자본 경험이 있잖아요.
그때처럼 동굴에서 쿨쿨 잠을 자다보면 100일이야 후딱 지나가지 않겠어요.
물론 그전에 잘 먹어둬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겨울잠을 자다가 동굴 속에서 굶어죽었다는 이야기를 곰은 들어본적이 없어요.
그래요.
환웅은 이미 곰을 사람으로 만들 계획이 미리 선겁니다.
호랑이는 들러리이지요.
그래도 경쟁에서 곰이 이겼다는 것을 빛나게 하려고 교묘하게
호랑이에게는 아주 불리하고 곰에게는 너무나 유리한 조건하의,
경쟁이라 할 것도 없는 시험을 치룬거에요.
그것은 호랑이가 열흘을 참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가고,
삼칠일만에, 그러니까 21일만에 곰을 사람으로 변하게 해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의 인내 조건은 100일을 약속했잖아요.
비록 경쟁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건 조건을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21일만에 곰에게 혜택을 준 것은 너무 하잖아요.
둘 중에 더 나은 자를 뽑는 경기가 아니고
100일을 쑥과 마늘로 견딘 자에게 혜택을 주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곰은 아예 처음부터 다른 것 포기하고 잠을 쿨쿨 자고 있는데,
툭툭 누가 깨워서 나가보니 고난을 잘 참았으니 상을 주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 아닐까
이렇게 호랑이는 생각되는 겁니다.
만약에 둘 중에 더 나은 하나를 고르는 시험같았으면
호랑이의 행동과 선택은 달랐을 수도 있을겁니다.
가만 생각해보세요.
열흘이 지나가면서 호랑이는 배가 고파 눈이 뒤집히고 생각도 뒤집혔을 겁니다.
그 열흘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굶어 죽을 고생을 해가며 사람이 되려는 게 과연 잘한 것일까.
이치적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굶어죽을 100일동안을 환웅의 약속대로 동굴 속을 지키는 것이 과연 옳을까?
100일사이에 내가 굶어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연스레 나를 제거하려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하는 게 불경스러워 휘휘 고개를 내저었을 지도 모릅니다.
과연 100일을 견디면 내가 사람이 되기는 하는 걸까?
환웅의 거룩한 말씀을 의심하다니
내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건 불공평한 시험 속에 그냥 자신은 들러리같기만 하다는 생각만 드는 겁니다.
환웅이 100일을 견딘 자에게 사람이 되도록 해준다고 했으니까
처음엔 곰이 자기의 경쟁자가 아니라 같은 고난을 나누는 친구로 생각됐을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서로를 달래주는 행동은 않고,
100일간을 혼자 견디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잠을 청하는 곰이 야속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여 자리를 잡고 잠자는 곰이 속으로 얼마나 미웠을까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는 호랑이에겐
저편 동굴 끝에서 잠자며 누워있는 곰이 이젠 친구가 아니라 적이나 그냥 먹이감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늘과 쑥에 절어있는 곰을 먹겠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어쩌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하게끔 고도로 계산된 환웅의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호랑이는 경쟁자를 해치려는 유혹을 이겨내고 동굴을 그냥 뛰쳐나온 것만으로도 시련을 이겨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남과의 경쟁에선 진 것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선 이기는 순간입니다.
엄청나게 불리하고 비합리적인 경쟁에서 자신을 보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거지요.
남을 이기고 해치겠다는 경쟁심리가 자기 생각을 뒤덮고,
허황된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미련스럽다고 판단될 때,
그런 희망이 없는 싸움을 피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거 아닐까요.
호랑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제대로 해낸 거 아닐까요?.
그러니까 호랑이와 곰이 다 같이 승리한 거 아닐까요?
곰은 자기의 입장에서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호랑이는 자기가 잠자다 거저 얻은 승리라고 하지만,
유리한 경기를 얻기 위해 자신이 그동안 노력하여 얻은 명성과 신임이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닐 거잖아요.
환웅이 왜 자신에게 휠씬 유리한 경기를 진행했겠어요?
그리고 겨울잠을 자는 식으로
동굴 속에서 그냥 시간을 견뎠다고 호랑이는 주장하지만,
어쩌면 그 겨울잠이란 것도
사람이 되기까지 곰이 겪은 동굴 속의 고난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후대의 곰들이 겨울에 행하는 하나의 의식일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곰은 겨울잠을 잔 것이 아니라 혼자 꿍꿍 어둠과 배고픔을 참으며 잠자듯 누워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제가 왜 이런 캐캐묵은 곰과 호랑이 이야기를 하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성취를 위해 경쟁 혹은 노력을 한 많은 일들이
사실은 별 어렵지 않는 곰의 시험일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호랑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걸고 하는 시련을 치르고
결국 굶어죽지 않기 위해 뛰쳐나온 동굴 속 시험을,
불공정한 시험 속에서 너무나 쉽게 시련을 견뎌온 곰으로서는
그래도 나는 경쟁에서 이겼노라,
힘들게 성취했노라라고 소리칠 수 있는 명분 같은 것으로
내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미 내정되어있는,
다 각본이 짜여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시험을 치르고
내가 잘났노라 떠들 수는 없다는 거지요.
현재 우리가 나름대로 힘들게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이
사실은 그 결실을 더 합리화하기 위해 조금 비틀어놓은
각본된 고난일 수 있잖아요.
또 호랑이의 입장에서는
비록 결과적으론 남과의 경쟁에서 졌지만,
그건 엄청나게 자신에게 불공평한 세상 속 하나의 싸움에서는 진 것이지만
결코 불명예스러운 선택은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현명한 판단으로
남을 해치지 않고 자신을 지킨 거라는 거지요.
결국 삶에 있어 나를 둘러싼 시련은
잘 되어나가든 잘 못되어나가든(경쟁에서 이기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든)
결국은 좋은 쪽으로 나가게끔 하는 디딤돌(걸림돌이 아니고)일지도 모릅니다.
호랑이의 입장에서
자꾸 곰에 입혀진 불공평한 조건을 곱씹으며 원망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고,
곰의 입장에서
자신이 호랑이보다 더 우월하고 더 열심히 인내하고 노력해서
호랑이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도 덜떨어진 거지요.
어느 순간에 호랑이와 곰이 서로의 자리를 바꿀 수 있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