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Morgon og kveld)
욘 포세 저. 박경희 역. 문학동네 간
♣ 신이 그토록 매정할까? 아니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자애로운 신 못지않게 사탄 역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올라이는 의심해본 적이 없다, 세상은 좀 더 미약한 신이나 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자애로운 신 역시 존재하니까,
♣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 굳이 말하자면, 그의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누군가 세상에 등 돌릴 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
♣ 거리의 악사가 훌륭한 연주를 할 때, 그는 그의 신이 말하려는 바를, 조금은 들을 수 있다, 그래 그럴 때 신은 거기 있다, 좋은 음악은 세상사를 잊게 해주니까,
♣ 소멸은 늙음에 다름 아니나 결코 그와 같지 않으며 저 또렷한 외침 맑게 외침 별처럼 또렷하고 이름처럼 감각처럼 바람 이 숨 고요한 숨 그러고 나서 고요히 고요히 고요한 움직임들 그리고 부드럽고 하얀 천 그리 오래지 않으나 바다로부터 천 조각 하나 그리고 어둠과 붉음 대신 건조하고 두려운 고요
♣ 그래요. 아이가 우는 건 좋은 거예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잘하고 있어요,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그래야지, 그녀가 말한다
네 그런 거군요, 올라이가 말한다
그래 그런 거예요, 늙은 안나가 말한다
♣ 너무 늘어져도 못쓰는 법,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완전히 녹슬고 말 테니, 젊음은 이미 먼 옛날 얘기라고, 요한네스는 생각했다, 이제 정말 일어나야지,
♣ 저 안에다 얼마나 많은 빨래를 했는지, 그래 결코 적지 않은 빨래였다, 그리고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 그가 가만히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자 페테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역시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야,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는 부엌 식탁의 자기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재떨이에 올려둔 담배에 다시 불을 붙여 몇 모금 피우고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이렇게 슬플 데가,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이렇게 혼자라니 끔찍하군,
♣ 사람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언젠가는 우리 모두 차례가 오는 걸, 레이프가 말한다
♣ 이제 자네도 죽었다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뒀어, 그가 말한다 내가 자네의 제일 친한 친구여서 나를 이리로 보낸 거라네, 자네를 데려오려고 말이야, 그가 말한다... 이제 고깃배를 타고 떠나자고, 그가 말한다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거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니,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 에르나도 거기 있나?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가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다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페테르가 말한다
♣ 이제 말들이 사라질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 읽고 발췌한 날 202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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