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동종택과 간서 그리고 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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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업(안동상공회의소 회장) | 고성이씨의 시조는 이황이다. 순흥안씨의 ‘추원록’에는 한 문제 때의 사람인 이반의 24대손이라는 기록이 있고 ‘만성보’에 의하면 밀직부사 철령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고성이씨를 또한 철성이씨라고도 하는데 살아서는 고성을 쓰고, 죽어서는 철성을 쓴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이라, 그리고 그 미이라의 주인공 이응태 공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냈던 원이엄마의 편지를 기억할 것이다. 정상동에 택지 개발할 당시 청주정씨들은 자신들의 입향조 묘라고 생각하여 이장을 하려고 하다가 관 뚜껑에 철성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고성 문중으로 연락을 하는 바람에 세상에 미이라가 알려졌다.
고성이씨 문중이 철성을 관향으로 함께 쓰는 까닭은 고려 충선왕 때 문과 출신인 이암이 공신칭호를 받고 철성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이암의 아들이 이강이고 이강은 대제학을 지내다 나중에 좌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원은 이강의 아들인데 조선 태조 때 대간을 역임하고 세종 때는 재상에 보임되고 좌명공신 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살펴보듯이 철성이라는 의미는 조상 대대로 이어진 시호라고 보면 된다.
고성이씨 일문의 안동역사는 바로 이원의 여섯째 아들인 이증이 안동으로 낙향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고성 이씨 문중은 현재 탑동종택, 귀래정, 임청각이라는 거대 문벌의 상징과 정신의 원류로써 도도하게 존재하고 있다. 귀래정은 안동시 정상동에, 임청각과 탑동종택은 안동댐 들어가는 입구인 법흥동에 터를 잡았다. 이 중 귀래정의 맏집은 경북 청도에 살고 있다. 후손도 풍성하여 탑동종택과 임청각, 귀래정을 합친 숫자 보다 많다. 임청각의 맏집은 안동으로부터 이주하여 경남초계 매촌에 살았다. 아마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른 이명의 첫째인 이요가 초계군수를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중 탑동파 종택의 유래는 내게는 12대조인 조선 숙종 때 좌승지로 증직된 후식(1653∼1714)이 건립하면서 부터다. 후식은 법흥파 주손 후영의 동생이며, 탑동파 위손(胃孫)으로 출계하여 탑동 종택을 창건했다. 시항은 후식의 아들이며 문과급제해 병조정랑을 지냈다. 후식이 안채를 건립하고 사랑채를 건축하던 중 완성하지 못한 것을 밀암 이재의 문인이었던 손자 원미(元美)가 대청인 영모당(永慕堂)과 함께 완성했다.
또 하나 탑동파 종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북정(北亭)은 내게는 8대조가 되시는 진사 이종주가 영조 51년(1775)에 건립했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문인이었던 종주는 1780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북정을 짓고 자적하면서 지냈다. 선생이 정자를 북정으로 지은 연유는 ‘북정기’에 남아 있다. “북은 겨울의 방위다. 만물이 북에서 머무르고 곧고 굳음도 북에 있다. 머무르면 반드시 흥함이 있고 곧고 굳으면 반드시 풀려서 발함이 있게 된다. 저 동남서쪽의 생장과 완성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북방의 쌓이고 저장된 것에서 힘입지 않았는가. 이것이 안의 정자에 ‘북’으로 이름 지은 까닭이다. 그 뜻을 취함은 길도다.” 간서는 이 북정의 증회손자가 된다. 현재 탑동종택에는 종손(재익)과 차종손(효근)이 머무르고 있다.
고성이문의 탑동파에 속해 있는 간서와 월사의 유고를 역하고 편집하여 발간한 것은 고성이문의 대대로 이어져 온 학문적 상징을 이 시대에 드러내어 정신의 뿌리를 공고히 하려는 후손들의 심려(心慮)와 효심에서 시작되었다. 유고집을 한글로 번역한 배 선생의 서문을 옮겨보면 이렇다.
“고유영가(顧惟永嘉)의 성 동쪽 모퉁이는 영남산의 화창한 정기가 모여 이루었고 낙동강의 원류동북수가 서로 합쳐지는 곳 오른편 언덕에는 임청각과 정우헌이 우뚝하고 왼쪽 편 언덕에는 귀래정과 반구정이 있어서 철성이씨의 문호가 크게 열려 영남 거벌(巨閥)이었고 또 유현이 대를 이어 문장과 덕행으로 빈빈(彬彬)하게 종무(踵武)해서 문조(文藻)의 강산이라 진실로 사대부의 기북(冀北)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간서이공(澗西李公) 같은 분이 있었으니 북정공(北亭公)의 금손(今孫)이요 천사(川沙) 김종덕선생외회손이시다. 단정(端正)하고 명민(明敏)한 자질(資質)과 영특(穎特)하게 깨우친 총명(聰明)한 재주의 각고면려(刻苦勉勵)의 공부로 독실(篤實)하게 선현(先賢)의 유지(遺志)를 닦으시어 어린 나이에 칭찬하는 소문이 벌써 향중(鄕中)에서나 과장(科場)에까지 퍼졌으나 교묘(巧妙)하고 서투름에 유의(留意)하지 아니하고 붓 만들면 문장(文章)이 이루어져도 말의 조리가 갖추어졌으며 여러 차례 향해(鄕解)에서는 합격이 되었으나 예위(禮圍)에서는 번번이 뽑히지 아니하여 어쩔 수 없이 명수(命數)로 돌리고 재주를 감추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문교(文敎)로 구범(舊範) 넓히고 후진(後進)을 성숙(成孰)시키는데 돈실(敦實)하였다. 아울러 선비의 지취(旨趣)를 바로 잡고자 본분(本分)을 세우고 시속(時俗)의 폐단을 버리게 하였다. 말년에 금정와대진유동림선생(金訂窩岱鎭柳東林兩先生)과 교의(交誼)가 더욱 독실하여 향중제현(鄕中諸賢)에 명망(名望)이 가지런하였다. 강 건너 깍은 듯한 절벽(絶壁) 병풍처럼 둘러있고 기이(奇異)한 층층(層層)의 고탑(古塔)이 우뚝하게 강기슭에 섰으며 향수(香樹)가 뜰 가에 줄을 지어 심어져 나막신과 지팡이로 매화(梅花)의 언덕 연꽃의 못가를 오락가락 거닐며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면 엄연(儼然)히 파리한 신선(神仙)이 강림(降臨)한듯 한 점 진세(塵世)의 생각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소영(嘯詠)으로 흥회(興懷)를 보내려고 읊은 시심만이 만발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시가 천여수(千餘首)나 되는데 사장(詞章)이 다만 평이(平易)하고 담박하며 맑고 깨끗하여 시문(詩文)의 격식이 참된 깨달음 그 자체였다. 공의 시소문(詩所聞)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 창수(唱酬)하다가 찬탄(讚歎)하기를 동국(東國)에 시(詩)의 성망(聲望)이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평(評)을 했다고 한다. 공의 회손월사(쇠)공(會孫月衰公)이 유문(遺文)을 수세(壽世)하려고 수습(收拾)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자에 감추어 두었으나 여러 번의 병화(兵禍)를 겪어 다 전하지 못하고 여존(餘存)한 것을 래손(來孫)들이 매우 간절하게 생각하여 先先世부터 겨를 하지 못한 일을 인쇄에 부치기로 뜻을 모으고.....”
간서와 월사의 유고글
간서와 월사의 유고 글들은 오랫동안 집안에만 묻혀있었다. 가난과 병화 때문에 미처 세상에 빛을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이것을 2003년에 두 권의 책으로 묶어 유고집을 발간한 적이 있다. 이때 한시의 한글 풀이를 배성환 선생에게 부탁하였는데 덕분에 이리 저리 병화에 유실되고 남아 있던 천여 수의 시들이 가지런하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후손된 도리로 그 유고시들을 몇 번이고 살펴보았으나 묶어진 책이 집안 소장용으로 알맞게 편집되고 출간이 된 탓에 이를 대중들에게 보급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것을 요즘 시류처럼 몇 권의 시집으로 엮을까를 고민하다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향중의 여러 훌륭하신 선조들의 흔적과 안동의 문화 즉, 불교적 색채를 가미하여 한권의 책을 만드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 책은 그렇게 탄생이 되었다. 집안 어른을 현창하려는 생각이 다소 넓게 미쳐 이것저것 그동안 청년유도회에 참가하여 배운 것과 발로 뛰며 익힌 것들을 이번에 내놓은 것이다.
그 중 몇 편의 시와 서를 싣는다.
간서 유고 중
秋日卽景(추일즉경)-가을의 경치 露冷聞虫咽 이슬이 차가우니 벌레들의 애달픈 소리 들리고/ 雲歸見雁橫 구름이 지나가니 기러기떼 날아감도 보이네/ 魚跳明鏡水 고기는 거울같이 맑은 물에서 뛰고/ 鴉集墓鐘城 까마귀는 날 저무는 종소리에 성으로 모이는 구나
平沙步歸(평사보귀)-백사장을 걸어 돌아오다 疾趨仍有喘 빨리 달리면 숨이 헐떡이고/ 緩步不知勞 천천히 걸으면 피로를 몰라/ 竗在平常裏 현묘함이 평상한 속에 있나니/ 休思特地高 특수(特殊)한 높은 곳을 생각지 마라
觀大山先生集(관대산선생집)-대산선생의 문집을 보고 晩修李夫子 만래(晩來)에 이선생의 도학을 닦아/ 爲我說眞銓 우리들을 위하여 진전을 설명하셨네/ 始若極幸苦 처음에는 매우 신고(辛苦) 하셨으나/ 終焉得自然 마침내는 자연히 얻어진듯 하도다.
除夕夜坐而待鷄(제석야좌이대계)-제석야에 앉아서 닭소리를 기다림 今夜休先唱 오늘 저녁은 먼저 울지 마라/ 爾鳴卽丙寅 네가 울면 곧 병인년이 되는구나/階階竟何用 고끼요 소리가 무엇에 소용(所用)인고/ 惟被主翁嗔 오직 주옹의 꾸중만 들을 걸.
松鶴圖 擇棲一羽客 가려서 깃들인 날개달린 손님/ 非竹又非梅 대나무 아니고 또 매화도 아닐세/ 獨與公好 홀로 공과 더불어 좋아서/ 翩천入畵來 펄펄 나라 그림 속 들어 왔네.
월사유고 중
寄日本嶺事館長書抄-일본영사관장에게 부칠 글을 초함 : 이 글은 역사적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보여 全文(전문)을 그대로 싣는다.
“귀국이 아국과 함께 동양에 있으면서 기각(箕角)의 세와 복아(犬牙)의 형태로 지목이 되며, 함께 신의를 지켜 타국으로 하여금 외면하거나 넘보지 못하게 함이 가할 것이나, 근년 이래 참람(僭濫)하게도 병탄(幷呑)하려고 하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하는 죄는 가히 셀 수 도 없는지라 우선 그 수 개조를 들어서 성토(聲討)를 하노라. 청컨대 증거를 드노니 갑오년에 竹添進一郞이란 자가 난을 일으켜 우리 황제폐하(皇帝陛下)를 겁박(劫迫)해서 궁궐을 옮기게 하고 정부재상(政府宰相)들을 살육(殺戮)을 했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그 하나다. 갑오년에 또 대조문물(大鳥文物)을 헐어버리고는 우리나라를 독립시킨다고 명칭을 내세워 후일에 빼앗아 움켜쥐려는 기틀이 실상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둘째다. 을미(乙未)에 三浦梧樓가 일으킨 변란은 우리 모후(母后)를 살해하는 천고에 없을 역적의 짓거리로 오로지 나라를 엎어 버리려고 저지른 일인데도 도망간 역적을 하나도 박송(縛送)하지 않으니 대역무도함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것이 세 번째 죄다. 林勸助와 長谷川이 우리나라에 주둔(駐屯)할 때 협박(脅迫)하고 겁탈(劫奪)한 일은 손가락을 꼽아 세일 수도 없다. 그 큰 것만 들어 말하자면 경의선철로를 부설하면서 처음부터 우리정부에 알리지도 않고 어업벌채삼포(漁業伐採蔘圃)의 이익과 광산항해의 권리와 무릇 나라 안의 재원이 나올만한 큰 것은 모두 남김없이 빼앗아 갔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것이 넷째다. 군사상으로 칭탁(稱托)한 뒤 토지를 강점하고 인민을 침략학대(侵略虐待)하며, 묘를 파헤치고 집을 헐어버리기를 셀 수가 없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다섯째다. 정부에 권고 한다 칭탁(稱託)하고, 우리 백성들에게 비패(鄙悖)하고 용잡(慵雜)한 무리들을 앞세워 억지로 하라고 청하고는 회물(賄物)과 추악(醜惡)한 교육을 낭적(狼籍)하게 퍼뜨려서 군율(軍律)을 칭탁(稱託)해 시행하더니 지금(至今)은 용병은 그만두었으나 철로 돌려주기를 생각지도 않고, 토지도 의구히 점탈하고, 군율도 의구하게 시행해서 쓰고 있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여섯째다. 역적 이지용을 억눌러서 의정서(議定書)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점점 쇠퇴하도록 했으며 그 의정서 중에 대한독립과 영토보전 같은 말은 논함이 없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일곱 번째다. 晋紳章甫들이 전후에 진술한 소(疏)는 모두 충언이요, 황제에게 고하기 위함이었으나 문득 포박(捕縛)해 구속하고, 포살(包殺)하며, 놓아주지 않으므로, 이로써, 충성스런 사람의 입을 겸제(鉗制)할 뿐 아니라, 정당한 공론을 막아, 오직 국세(國勢)가 떨칠까 두려워 하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여덟 번째다. 우리나라의 패류잔당(悖類殘黨)을 유인(誘引), 일진회라고 이름하고, 미쳐 날뛰는 귀신(鬼神)처럼 선언서(宣言書)란 문적(文籍)을 만들어 민론이라고 칭하며, 나라를 위하는 의무로 안전을 보호 한다고 하면서 선비들이 모이는 곳인즉 치안방해로 지목해서 백반(百般)으로 훼방하고 포박구금(捕縛拘禁) 하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아홉 번째다. 역부(役夫)들을 억눌러 모집하고는 채찍으로 소 몰고 가듯 하고, 조금이라도 겁내는 눈치만 보이면 잡초처럼 죽이고 또,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誘惑)해서 모집하고는 묵서가(墨西哥)로 팔아먹어 부자형제에게 한을 심고, 원수같이 여기도록 하면서도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천대(賤待)받다가 죽어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열 번째다. 전화국과 우체국 양사를 억압으로 빼앗아 자기네가 통신기관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열한 번째다. 억압으로 고문관을 각부에 배치, 가만히 앉아 후한 봉록을 받고도 오로지 하는 일이란 우리를 망하고 엎어지게 하고, 군인경찰의 봉급은 감액하면서 세금부과는 혹독(酷毒)하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열두 번째다. 억압으로 차관(借款)을 주고, 丁再의 명의로 재정정리를 하면서 신화(新貨)의 색과 질과 경중이 구화(舊貨)와 다름이 없는데도, 돈의 가치를 배나 높게 책정하여 자연이득을 챙김으로써 나라의 재정을 고갈시켰으며, 허명으로 고문관의 예를 갖추고는 후한 봉급을 주어 우리 민족의 고혈(膏血)과 부족한 곡식(穀食)마저 들어 마시려 하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열세번째다. 작년 10월23일 밤에 博文 權助 等이 솔병(率兵)하고 입궐(入闕)해서 내외로 겹겹이 둘러싸고 강압으로 전자의 조약을 빼앗아서 정부에 자기네 부르는 데로 협박해서 인장을 빼앗아 조약을 마음대로 만들고 외교를 통감부에 두게 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의 권리를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만들고도 협박했다는 말은 빠뜨려 만국의 이목을 호도(糊塗)하려 했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 열넷째다. 처음에는 외교를 감독한다고 썼으나 마침내는 일국정사를 전관(專管)하며 소속관원이 적지 아니하여 우리로 하여금 손을 쓸 수 없게 하고 억압과 공갈(恐喝)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한 죄가 열다섯이다. 근래에 또 이민조례(移民條例)를 만들어 억압(抑壓)으로 핍박(逼迫)하여 인장을 찍게 강요하는 것은 인종마저 바꾸려는 악독한 모의이고 우리 민족을 반족도 남아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니 그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함이 천지간에 용서 못할 극악대죄가 열여섯 번째다. 아! 귀국이 신을 버리고 의리를 배반하는 죄가 이에 그칠 뿐인가. 이는 특별한 대개(大槩)만 들었을 뿐이나 그러나 이 십수조란 것은 강화마관등조약(江華馬關等條約)과 열국에 설명한 통첩등(通牒等) 제서(諸書)는 반복(反覆)함이 무상(無常)하여 여우의 꾀로 원숭이를 속이는 듯이 간악(奸惡)한 계책(計策)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고. 우리 대한수천만민중이 과연 귀국에 감정(憾情)이 없이 우리의 공고(鞏固)함을 지지(支持)하겠는가. 아니 마음이 쓰라리며 머리가 아픈 듯이 삼호(三戶)에서 억지로 맺은 맹서를 읊으면서 한번 전반도(前半島)를 밟아 평정하고자 하는 귀국이 우리 황제폐하께서 아국공관으로 파천(播遷)하시어 감정이 있음을 면(免)할 수가 없다고 하나 폐하께서는 친히 곤궁(坤宮)의 변을 만난 그날 밤 놀랍고도 황급해서 괴로워하심이 과연 어떠하실까. 또 逆賊(역적)의 무리가 귀국의 형세를 빙자하여 폐하의 수족을 끊고 結縛(결박)했으니 어느 때 다시 어떤 모양의 화가 있을지 모르니 어찌 앉아서 그 변을 기다리며 변동을 생각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실상 귀국의 죄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다시 감정을 갖게 하는가. 동양 대세를 유지하고자 함인가. 고로 지난날 귀국이 아국과의 戰役(전역)에 우리나라 인민들은 모두 귀국군사를 환영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없었으나 귀국이 全勝(전승)하고 돌아와서는 더욱 독을 우리나라 인민에게 품어 도리어 魚肉(어육)의 慘狀(참상)을 입게 되었으니 假金(가금) 우리나라 인민들이 사람마다 모두 반드시 죽어버리지 살아갈 수가 없고, 반드시 망해서 보존될 수 없는 故(고)로 곧 사망을 기다리면서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어 핍박과 억압을 받아도 마침내 면치 못할 터이면 어찌 한번이라도 奮然(분연)히 주먹을 뻗치고 큰소리로 기운을 낼 수도 없을까. 옛날 魯連이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오히려 秦(진)나라를 황제국으로 하기가 부끄럽다 했으며 蘇秦 같은 說客(설객)의 議論(의논)이 牛後(우후)의 명분을 부끄럽게 여기거늘 하물며 우리 대한삼천리 민중은 선왕선현의 사천년 예의를 復習(복습)해온 후손이 어찌 甘心(감심)되어 奴隸(노예)가 되어 民志(민지)을 일깨워야할 즈음에 아침이슬 같은 운명을 구걸하고자 하리요. 또 천하가 모두 아국사람이 귀국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조만간에 다시 결속해서 부딪칠 憂患(우환)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비록 愚夫愚婦(우부우부)라도 또한 모두 이것을 기뻐할 줄 알거든 이때를 당하여 모름지기 동양삼국이 鼎足(정족)처럼 서서 각각 완전한 힘을 저축해서 기다린다 해도 오히려 보전할까 두렵거늘 하물며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며 怨恨(원한)갖고 同室(동실)의 怨讐(원수)를 면할 수 없다면 아니 서구열국이 또한 輕淺(경천)하여 보전할 마음이 전혀 없는 귀국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서 함부로 날뛰도록 맡겨두겠는가. 이와 같이 귀국의 망함도 족히 발 돋음을 하고 기다림즉 하여 동양이 함께 망하는 화가 장차 멀지 아니하여 이를 것이니 귀국이 어찌 동양의 근심을 다른 나라보다 먼저 면하랴. 진실로 귀국을 위하는 계책을 빨리 그 근본을 돌이킴만 함이 없을 것이니 근본을 돌이키는 도리는 신을 지키고 의리를 밝힘이 되리니 신을 지키고 의리를 밝히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하면 이 글을 귀국황제에게 빨리 上秦(상진)해서 장차 열여섯 가지 대죄를 모두 悔改(회개)하고 統監(통감)을 罷(파)하고 고문급사령관을 불러들이고 다만 충신한 사람을 派遣(파견)할 것이고 또 이런 일로 각국 영사에게 사죄하며 우리나라 독립권을 침해함이 없이 양국이 영원토록 서로 안정이 되면 동양대국이 또한 유지되리라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福善(복선)과 禍淫(화음)은 이에 자연의 도리에 昭然(소연)한 것이다. 귀국의 소위(所爲)가 제민송언(齊湣宋偃)과 더불어 다른 자 아마도 드물 것이다. 향후에 화패(禍敗)가 이르지 않는다하더라도 위에 운운한 바와 같이 귀국이 또한 마땅히 스스로 멸망하리라. 모등(某等)은 영남에 살고 있으면서 비록 시세는 알 수 없으나 저 충민애국과 수신명의(守信明義)의 도리는 익숙하게 익혀 왔음으로 눈으로 국가와 인민의 화가 망극함을 보고 오직 죽을 곳을 찾지 못해서 한스러워한지 오래이다. 불행하게도 작년 10월의 변에 죽지 못하고, 의리를 알기에 원수의 나라에 노예(奴隸)는 될 수 없으므로 구차(苟且)하게 천지간에 목숨을 지탱하는 것이 곧 동지와 더불어 죽기를 맹서(盟誓)하며 약속을 맺고 장차상경해서 博文과 好道等과 더불어 한번 만나 모두를 말하고 죽으리라. 이에 사민(士民)이 동사(同死)하기를 원하는 자약간객(者若干客)이 있으니 이에 먼저 심장과 간담을 풀어 헤치고 이 글을 지어 귀영사관에 송부하여 귀정부에 전달되게 하려고 하니 대개가 우리나라를 위하는 모책(謀策)이 되며, 오직 귀국을 위하는 모책도 되며 또한 동양 삼국을 위하는 모책도 되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잘 살펴보고 헤아리기를 바라노라. ”
월사의 유고, 학계의 연구 필요
이 글은 월사 이공이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의도를 목격하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일본영사관에 항의하기 위해 쓴 문장의 초고다. 민족적 자부심의 당당한 표출은 위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과 견줄 만하고, 정세 판단의 세밀함은 1919년에 33인의 민족 대표들이 발표했던 ‘독립선언문’에 뒤지지 않는 견식을 갖추고 있다. 이제껏 이러한 글이 가승될 뿐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으니 후손된 자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뒤 늦은 감이 있으나 이제라도 학계에서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은 보내거나 쓴 날짜가 기록에 없어 정확한 시일을 말할 수는 없으나 문맥의 정황으로 보아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해인 1906에서 1907년 사이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유로 먼저 눈 여겨 볼 대목은 이지용에 관한 언급이다. 월사공이 이지용을 역적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1904년 외부대신서리로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임권조)]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협정·조인했기 때문이다. 이지용은 이 때문에 일본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리고 ‘귀국이 전승하고 돌아와서란’ 언급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뒤 패악해진 일본의 만행을 말한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 진출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林勸助와 長谷川이 우리나라에 주둔(駐屯)할 때 협박(脅迫)하고 겁탈(劫奪)한 일은 손가락을 꼽아 세일 수도 없다. 그 큰 것만 들어 말하자면 경의선철로를 부설하면서”란 글의 언급을 살피면 일본은 1905년 경부선을 개통하고 다시 서울~신의주 사이, 마산~삼랑진 사이 철도공사에 착수하여 1906년 4월 경의선을 완공하였다. 이것은 러 ·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군사적 목적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철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내용 중에 “작년 10월23일 밤에 博文 權助 等이 솔병(率兵)하고 입궐(入闕)해서 내외로 겹겹이 둘러싸고 강압으로 전자의 조약을 빼앗아서 정부에 자기네 부르는 데로 협박해서 인장을 빼앗아 조약을 마음대로 만들고 외교를 통감부에 두게 하여”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1905년에 체결된 을사늑약을 이르는 말이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해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으로 한국식민지화정책을 결정하여 미국·영국·러시아 등으로부터 승인 및 묵인을 받아냈다. 1905년 11월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특파대사로 파견하여 한일협상조약안을 한국정부에 제출하였다. 일본왕의 위협적인 친서와 함께 전달된 조약안이 정부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치자, 17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임권조)]가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꾀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어전회의를 열게 되었다. 착검한 일본헌병과 경찰들이 궁궐 안까지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어전회의는 일본 제안을 거부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날 회의가 한 번 더 열렸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고, 고종은 정부에서 조약을 바르게 조처하라 명했다.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장곡천호도)]를 대동한 이토 히로부미는 헌병 호위를 받으며 회의를 다시 열어 대신 한 사람 한사람에게 가부결정을 강요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은 절대불가론,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을 나타냈다. 이토 히로부미는 찬성을 표시한 대신들을 따로 모아,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로 하여금 기명, 조인하게 함으로써 결국 이 늑약은 모든 절차를 끝마쳤다. 이 때 늑약체결에 찬성한 박제순·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 5명의 대신들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외교를 감독한다고 썼으나 마침내는 일국정사를 전관(專管)하며’ 라는 월사공의 지적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의 대한제국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5개조로 되어 있는 늑약문은 외교권 접수, 통감부 설치 등을 규정하였는데, 이로써 한국의 대외교섭권이 박탈되어 외국에 있던 한국외교기관은 모두 폐지되었고 동시에 주한외국공사관들도 철수하였다.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는 본래 규정인 외교사무뿐만 아니라 내정 전반에 걸치는 명령·집행권도 행사하였다.
월사공은 또한 일진회의 친일 행각을 질타하고 있다. 집권파인 여흥 민씨 일파의 박해를 받아 10여 년간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은 러일 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 친일적 민의를 조작하려는 일본의 앞잡이로 나서 1904년 8월 18일 옛 독립협회 출신인 윤시병, 유학주 등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8월 20일 다시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고 8월 송병준과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했다. 일진회는 4대 강령으로 왕실의 존중, 인민의 생명과 재산보호, 시정 개선, 군정·재정의 정리 등을 내걸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회원은 모두 단발과 양복 차림을 하는 등 개화를 서두르는 척 했다. 실제로 그러한 급속한 문명개화를 추구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1904년 12월 16일 지방조직을 가지고 있는 동학당(東學黨) 내 친일 세력인 이용구의 진보회(進步會)를 흡수, ‘합동 일진회’로 개편하였고, 13도 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에 송병준이 취임했다. 이후 일진회는 일본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으며 친일활동을 전개,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 지지선언을 냈으며, 기관지《민국신보》를 통해 온갖 친일적 행동을 하였다. 당시 합병 이후의 만주 또는 간도로의 영농이민을 대가로 받기로 하고 그 이전에는 일진회원이 사비를 들여 친일 활동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진회는 형식상 대한제국에서 민중이 만든 순수 민간단체이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일본의 막후 조종과 자문을 받았다. 1904년 10월 22일에는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헌병대장 다카야마(高山逸明),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에게 서한을 보내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 군략상 조금도 방해됨이 없다”라며 친일 색채를 드러냈다.
일진회가 친일의 기치를 선명히 내세우자 일본은 5만원의 운영 자금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막대한 활동 자금을 지원했다. 일진회는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한다는 내용이 알려 지고 있는 가운데 1905년 11월 6일 일본에 외교권을 위임하자고 주장하는〈일진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1907년 5월 2일에는 국채보상운동이 야기한 모든 사태가 정부의 잘못이라고 공격하면서 정부 탄핵을 제기하였다. 1909년에는 한일 합방 조약을 순종황제에게 몇 차례 상주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1910년 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며, 당시 형식상 1주일의 유예 기간을 둔 자진 해산이었다. 당시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지도부는 일본에 합병 청원 및 간도 이주 소요자금으로 3백만 엔을 요구했으며, 가쓰라 총리는 3천만 엔이라도 지원하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게 된다.
월사공의 일진회에 관해 죄를 논한 부분은 4대 강령 중 하나인 인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라는 미명하에 불법으로 자행된 선비들에 대한 탄압이다. 1904년 8월20일 결성되고, 그해 12월 16일에 전국조직을 갖춘 것으로 보아 이들의 본격적 친일 치안활동은 1905년부터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는 “장차상경해서 博文 好道等과 더불어 한번 만나 모두를 말하고 죽으리라.”라는 것으로 보아 아직 이등박문이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등박문은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총탄을 맞고 죽었다. 그러니까 이 장문의 글은 1909년 이전에 쓰여 진 것은 틀림없으나 정확한 년도를 추리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본문 중 작년 10월의 변(을사늑약)이란 정확하게는 11월이지만 이는 을사늑약의 징조가 10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진 점을 배경으로 삼는다면 당시 사람들은 10월부터 시작된 변이라고 느낄 수 있기에 문제 될 것이 없고, 더욱, 아래의 사실에 비추어 이글이 1906년도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월사공은 당시 사회의 커다란 사건을 16개로 나눠 공박하거나 질타하고 있다. 특히 갑신정변, 갑오경장, 을미사변에서부터 1906년까지 일어난 일들이 거의 빠짐없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07년 6월에 일어난 헤이그밀사 사건을 다루지 않고 있다. 만약 이 장문의 글이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기록이 되었다면 위에 내용 안에 반드시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일로 26대 고종(高宗) 황제(黃帝)가 강제(强制)로 폐위되기 때문이다. 폐위의 주역은 다름 아닌 일곱 명의 대신들이었다. 총리대신 이완용ㆍ내부대신 임선준ㆍ탁지부 대신 고영희ㆍ군부대신 이병무ㆍ법무 대신 조중응ㆍ학부 대신 이재곤ㆍ농상공부(農商工部) 대신 송병준이었다.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신하가 나라를 팔아먹으면서까지 임금을 폐위시킨 사건은 충격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월사공이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글을 썼다는 명확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무슨 일이 있어도 1907년 6월 이전에 작성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