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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頌第四品 若有信解心으로 受持讀誦書하고 若復敎人書하며 及供養經卷하고 散華香抹香하대 以須曼薝蔔과 阿提目多伽하야 薰油常然之니 如是供養者는 得無量功德하대 如虛空無邊하야 其福亦如是니라 況復持此經하대 兼布施持戒와 忍辱樂禪定하고 不瞋不惡口하며 ㈑ 頌第五品 恭敬於塔廟하고 謙下諸比丘하며 遠離自高心하고 常思惟智慧하며 有問難不瞋하고 隨順爲解說호리니 若能行是行하면 功德不可量이라 若見此法師가 成就如是德하면 應以天華散하고 天衣覆其身하며 頭面接足禮하대 生心如佛想하며 又應作是念하대 不久詣道樹하며 得無漏無爲하야 廣利諸人天하며 其所住止處에 經行若坐臥하야 乃至說一偈하면 是中應起塔하대 莊嚴令妙好하고 種種以供養이니 佛子住此地하면 則是佛受用이라 常在於其中하야 經行及坐臥니라 |
㈐ 송제사품(頌第四品)
약유신해심(若有信解心)으로, 만약에 어떤 이가 믿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수지독송서(受持讀誦書)하고, 수지하고 독송하고 서사하고, 쓰고 사경한다는 거지요,
약부교인서(若復敎人書)하며, 만약 다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하며
급공양경권(及供養經卷)하고, 그리고 경권에다가 공양하고
산화향말향(散華香抹香)하대, 꽃을 흩고 그리고 향, 말향 이런 것을 흩되
이수만담복(以須曼薝蔔)과, 수만(須曼)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수만나라고 하는 꽃 이름 이예요. 담복도 꽃 이름인데 담복화라고도 하고 천복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그래요. 우리나라에서는 담복화라고 그래요. 다른 곳에는 천복이라고 되어 있는 데도 있고 그렇습니다.
아제목다가(阿提目多伽)하야, 목다가는 향기가 나는 나무의 이름이지요. 그런 것으로써
훈유상연지(薰油常然之)니, 기름에다 그것을 항상 태운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향유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지요. 수만나향, 천복향, 아제목단향 이런 것을 기름에 넣어서 우려내든지 아니면 그 향이 기름에 배어들도록 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 기름에서 향기가 나는 거지요. 향수도 그렇게 해서 만들 거예요. 어쨌든 그런 식으로요.
그렇게 해서 그 기름으로 불을 밝힌다는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향기가 나겠습니까?
여시공양자(如是供養者)는, 이와 같이 공양하는 사람은
득무량공덕(得無量功德)하대, 한량없는 공덕을 얻되
여허공무변(如虛空無邊)하야, 허공이 무량한 것과 같아서
기복역여시(其福亦如是)니라, 그 복이 또한 이와 같다.
황부지차경(況復持此經)하대, 하물며 다시 이 경전을 가지되
겸포시지계(兼布施持戒)와, 겸하여 보시 지계와
인욕락선정(忍辱樂禪定)하고, 인욕과 선정을 좋아하고,
막 닦는다는 말이지요.
불진불악구(不瞋不惡口)하며, 진심도 안 내며 악구도 하지 아니하며,
험한 소리, 욕하는 소리, 악한 말 하는 소리를 내지 아니하며
㈑ 頌第五品
공경어탑묘(恭敬於塔廟)하고, 탑묘에 공경하고
겸하제비구(謙下諸比丘)하며, 비구스님들에게 겸손하고 하심하며
원리자고심(遠離自高心)하고, 자고심을 멀리 떠나고, 지 잘 났다고 하는 마음이 자고심(自高心))이에요. 스스로 높이는 마음이지요. 아만심, 자존심을 멀리 좀 떠나고
상사유지혜(常思惟智慧)하며, 항상 지혜로 사유하며
유문난부진(有問難不瞋)하고, 누가 일부러 애 먹이려고 따져들더라도 진심을 내지 아니 하고
수순위해설(隨順爲解說)호리니, 그 사람을 위해서 잘 수순하여 해설을 해 주니,
저쪽에서는 놀리려고 묻고, 따지려고 묻고 하더라도 이쪽에서는 성의껏 대답을 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하리니,
약능행시행(若能行是行)하면, 만약에 이러한 행을 행할 것 같으면공덕불가량(功德不可量)이라, 그 사람의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약견차법사(若見此法師)가 성취여시덕(成就如是德)하면, 만약에 이 법사가 이와 같은 공덕 성취한 것을 보거든
그러니까 법화경을 수지독송하고 위인해설 서사수지 하는 사람은 전부 법사입니다. 뒤에 법사공덕품이 나옵니다. 오종법사가 나오는데 서사 수지하는 이런 것이 전부 법사에요.
응이천화산(應以天華散)하고 천의복기신(天衣覆其身)하며, 응당히 아주 아름다운 꽃[天華]으로써 흩고,
아주 좋은 최고급 옷을 천의(天衣)라고 해요. 천화(天華)도 제일 좋은 꽃이지요, 비싸다고 좋은 꽃은 아니에요. 또 옷도 비싸다고 좋은 옷은 아니에요. 어쨌든 최고로 좋은 옷으로 그 몸을 덮으며,
두면접족례(頭面接足禮)하대, 머리와 얼굴로써 발에 닿게 예배를 하되, 접족(接足)은 발에 닿게 예배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배를 제대로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머리나 얼굴이 발에 닿도록 예배를 하는 거지요. 부처님께 예배할 때는 꼭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오체투지를 할 때에 발을 이렇게 드는 흉내를 내지 않습니까? 뭔 복을 달라고 두 손을 펼치는 게 아니고 부처님의 발을 드는 그런 예배예요. 접족이란 말이 그 말입니다.
지금은 부처님이 안 계시지만 부처님 발을 이렇게 받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머리와 얼굴이 부처님 발에 닿아야 해요.
인도에 가면 걸인들이 와서 절을 한다고요, 그런데 머리를 발에다 막 때려요. 머리를 갖다가 쿡쿡 찧는다고요. 발에다 닿도록 하는 그게 접족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높은 곳[머리]을 가지고 제일 낮은 발에다 하니까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거지요. 불교의 예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도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불교의 예법입니다.
두면접족례(頭面接足禮)하대
생심여불상(生心如佛想)하며, 마음을 내기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생각을 내며, 부처님과 같다고 하는 생각을 내며,
이왕 예배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지요. 그래야 자기한테 공덕이 있지요. 상대야 어땠던지 간에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따라서 공덕이 오는 거지요.
상대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내가 그런 마음을 내지 않으면 별로 공덕이 안 되지만, 상대가 별로 훌륭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마음을 딱 내어 버리면 그 공덕은 나한테 온다고요.
우응작시념(又應作是念)하대, 또 응당 이런 생각을 하되
불구예도량(不久詣道場)하며, 도량에 나아가서, 도수(道樹)라고 되어 있는 책도 있지요.
아까 읽은 산문 원문에 있었지요. 곧 도량에 나아간다, 또 보리수하에 나아간다. 원문에 맞춰서 같게 하려면 도수(道樹)라고 해야 옳지요. 도수라는 말은 보리수라는 말이니까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 나아가 일주일 만에 깨달았으니, 보리수 밑에 간다고 하는 그 말은 ‘곧 부처된다.’ 이 말입니다. 도량이라고 하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곧 도량에 나아가되
득무루무위(得無漏無爲)하야, 무루무위를 얻는다, 샘이 없고 함이 없는 그런 경지를 얻어서
광리제인천(廣利諸人天)하며, 널리 모든 사람들을 이익케 할 것이다.
기소주지처(其所住止處)에, 그가 머무는 곳에
경행약좌와(經行若坐臥)하야, 경행하거나 또는 앉거나 눕거나 간에
내지설일게(乃至說一偈)하면, 일 게를 설하면,
법화경의 많은 내용은 놔두고라도 한 게송만 설한다는 거지요.
시중응기탑(是中應起塔)하대, 그 가운데 응당히 탑을 세우되,
거기에 그 사람이 누워서 법화경 한 구절을 읽든지, 앉아서 읽든지, 걸어 다니면서 읽든지 어떻게라도 한 게송을 읽으면 그 자리에다 탑을 세우라는 겁니다.
시중응기탑(是中應起塔)의 응 자는 꼭 세우라는 이런 말이에요.
그만치 법화경의 가르침이 소중하다는 거지요. 뭐가 소중하냐? 영원한 생명, 무한한 가능성, 그걸 알아야 해요.
덮어놓고 소중하다 소중하다 해서 맹신이 되면 안 되지요.
여유가 있거든 [여래수량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아, 뭣 때문에 법화경이 소중하다고 했지? 그것을 모르겠거든 [여래 수량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읽어보면 알 수가 있어요.
장엄영묘호(莊嚴令妙好)하고, 아주 장엄스럽게 하고, 묘호(妙好)라고 하는 것은 아주 아름답고 예쁘게 하는 것입니다.
탑을 아무렇게나 세우면 되나요? 아주 아름다워야지요.
저 불국사의 다보탑 석가탑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정말 빼어나거든요. 규모는 작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불국사는 초기에는 화엄사찰로 기록이 되었는데 지금은 법화경사찰로 되어 있어요. 왜냐? 다보탑이 있고 석가탑이 있지 않습니까. 다보, 석가 이런 말이 나오면 이건 법화경입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이 같이 있다고 하면 그건 빼도 박도 못하고 법화경을 지상에다 형상화 해 놓은 것이다, 라고 알면 틀림이 없어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 두 분이 같이 나왔잖아요. 법화경을 지상에다 형상화 해 본, 말하자면 그런 도량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법화경 도량인지 아는 거지요.
불국사를 창건하고 탑을 세운 사람들이 여기에 나오는 탑 이야기, 장엄영묘호(莊嚴令妙好)라는 것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겠어요? 그러니까 최고로 아름답게, 인간이 할 수 있는 한도 것 아름답게 한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탑이 남아 있습니다.
종종이공양(種種以供養)이니, 가지가지로 공양할지니
불자주차지(佛子住此地)하면, 불자가 이러한 자세에 머물면,
차지(此地)라고 하는 건 이러한 지위, 이러한 자세입니다.
불자가 이러한 자세에 머물면
즉시불수용(則是佛受用)이라, 즉시에 부처님이 거두어 준다. 불이 수용한다, 이 쯤 되어야 부처님께서 수용하신다는 겁니다.
‘아이고, 부처님께서 안 돌봐주신다. 영험이 없는가, 부처님이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다.’ 그러지 마세요. 여기에 딱 해 놨잖아요.
불자가 이러한 경지에 머물기만 하면 즉시에 부처님이 수용한다고 해 놨잖아요. 수용하지 왜 안 하겠습니까? 하게 되어 있어요.
상재어기중(常在於其中)하야, 항상 그 가운데에 있어서
경행급좌와(經行及坐臥)니라, 경행급좌와(經行及坐臥)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삶의 가치, 삶의 기준을 항상 법화경의 가르침, 법화경 내용, 이 생명의 가르침, 여기에다가 두고 살라는 뜻이지요.
상재어기중(常在於其中), 그 가운데라는 게 뭐겠어요? 바로 법화경의 도리에 우리의 삶의 기준과 가치를 둔다면 곧 그것이 부처님이 우리를 거두어 주는 가운데 있는 것, 부처님 가운데 있는 것이 되지요,
거기에서 경행하고 좌와 한다는 것은 모든 생활이 거기에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거두어 주는데 있지요.
부처님이 거두어 준다고 하는 것은 바로 법화경의 도리를 깊이 믿고 이해하고 그래서 환희심을 내는 거기에서 말하자면 모든 삶이 펼쳐진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됩니다.
공덕을 아무도 상상할래야 상상할 수 없을 만치 그렇게 여러 가지로 많이 이야기를 해 놓았지요. 그러면서 또 왜 그렇게 공덕이 많은가 하는 것도 사이사이에 우리가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특이할 만한 것은 공덕 중에서도 탑을 쌓는다, 절을 세운다, 스님들에게 여러 가지로 사사공양을 올린다고 하는 그런 내용들을 쭈욱 이야기 해 놓은 뒤, 법화경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런 거 하지 않아도 좋지만 만일 겸해서 하게 되면 더욱 좋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분별공덕품의 결론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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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처님의 본회가 묘법연화경이요 또한 부처님이 이세상에 오신 일대사인연이 묘법연화경이다
석가세존께서 인(人)본존으로서 인법일여(人法一如)의 본존이며 이 묘법연화경 5자는 말법의 부처님으로 세우신 법(法)본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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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공덕품이 끝나가는가 봅니다. 감사히 읽습니다. ()()()
법화경의 도리에 우리의 삶의 기준과 가치를 둔다면 곧 그것이 부처님이 우리를 거두어 주는 가운데 있는 것, 부처님 가운데 있는 것이다...은우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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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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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도리를 깊이 믿고 이해하고 환희심을 내는 거기에서 모든 삶이 펼쳐진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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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심여불상(生心如佛想)하며, 마음을 내기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생각을 내며, 부처님과 같다고 하는 생각을 내며, ~~~~은우님 감사합니다,_()_
상사유지혜(常思惟智慧)하며 유문난부진(有問難不瞋)하고 수순위해설(隨順爲解說)호리니... 놀리고 따지고 애를 먹이려고 물어도 성의껏 설명을 해주리라 다짐합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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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잘 났다고 하는 자고심(自高心). 아만심을 떠나 항상 지혜로 사유하며, 누가 애 먹이려고 일부러 따져들더라도 진심을 내지 아니 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잘 수순하여 설명을 해 주니, 그 사람의 공덕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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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경행급좌와(經行及坐臥)니라.......
경행급좌와(經行及坐臥)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삶의 가치, 삶의 기준을 항상 법화경, 생명의 가르침 여기에다가 두고 살라는 뜻.............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