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아ㅡ니 너희 엄마는 계모냐,
물지게가 너보다 큰데 엄마는 뭘 하고 어린 걸 물을 길으러 보냈으니 쯧쯧“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깍뚝머리에 초등학교 일학년이었다.
공동수돗가에 물통을 대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한쪽에서 수다쟁이 아주머니들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수군거리면서
뉘 집 자식인지 불쌍하다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어디 사는 아이인 줄 아느냐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우리엄마
흉을 보는 것 같아 마음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수돗가에 가면 하는 말도 듣기 싫고 엄마가 물 길어 오라고 시키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한번은 물을 길어 와 독을 채워놓느라
물지게를 질질 끌고 다녔다.
엄마는 그냥 놔두라고 조금 있다가 정신이 들면 내가 한다고 하지만,
물독은 비어 있고 밥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하는데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나보다 큰 어른 물지게를 지고 비척거리며 집에까지 지고가면 물은
길거리에 다 쏟고 물통의 물은 절반만 남아 있었다.
엄마는 물지게를 지고 다니는 나를 늘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곁에서 칭얼대는 동생들도 돌봐주어야 하고 심부름도 해야 했다.
나보다 일곱 살 어린 동생과 연년생인 여자동생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는 늘 몸이 아파 골골하며 자주 누워 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는 나도 어려서 잘 몰랐다.
외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는 나는 밭으로 일하러 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엄마 집에 다녀오겠다는 인사 할 사이도 없이, 토요일 학교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방을 마루 위에 내던지고,
주말이면 창동역으로 기차를 놓일까봐 온힘을 다해 뛰었다.
기차는 기적소리와 검은 연기를 내품으며 칙칙폭폭 서울로 달렸다.
청량리역에서 어른들 속에 끼어 출구로 밀려나와 용두동 살고있는 엄마집으로 갔다.
다른 집 엄마들은 건강한데 우리 엄마는 늘 아파서 내 마음을
늘 우울하고 슬프게 했다.
나는 어김없이 출렁거리는 물지게를 지고 돈 주고 사온 귀한 물을
길거리에 뿌리며 오래도록 지고 다녔다.
엄마는 청량리 정신병원 뒤 펌프가 있는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제는 물지게를 지지 않아도 되 뛸 듯이 기뻐하며 펌프가 움직일 때마다
나오는 물이 신기해 동생들과 늘 물가에서 놀았다.
물지게와는 영영 이별인 줄 알았는데 시집을 가니 또 물지게를 지게 되었다.
답십리 장안평 개발지역이라 집은 새로 지었는데 수도가 없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한집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이북이 고향이라 만두를 좋아하셨고 한 광주리씩 해서
지하실에 놓고, 먹거리가 떨어질세라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녹두와 콩을
맷돌에 갈아 빈대떡과 콩탕도 자주 하시고 늘 술 안주로 드시곤 하셨다.
빨래도 물을 길어다 빨아야했고 이불호청 손질하느라 다디미 방망이질이
어린 나는 힘에 겨웠지만 죽은듯이 살았다.
벙어리.귀머거리.장님 삼년을 살아야한다는 고지식한 친정 엄마 말에 속아서 찍소리도못했다.
때로는 남편과 시아버님이 물지게를 지고 다녔지만 송구스럽고 늘 불편했다.
나는 시집간 지 일 년 후 첫아들을 낳고, 물 쓸 일은 더 많아졌다.
어느날 용기를내서 아버님께 수도 좀 놔달라고 간곡히 간청을 했다.
시댁 어른들은 막내아들에게서 첫 손주 본 것이 기쁘셨는지 정말 수도를 놓으셨다.
지겨운 물지게를 벗으니 날아갈듯이 기뻤다.
꼭지만 틀면 깨끗한 물이 콸콸 나온다.
나는 아들의 기저귀를 헹구고 또 헹구며 마냥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키가 자라지 못한 것은 어려서부터 물지게를
하도지고 다녀서 자라지 못한 것 같고,
팔에 힘이 좋은 건 맷돌질과 다듬이 방망이질을 자주해서 힘이 좋은듯하다.
아ㅡ힘든 그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시 돌아가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듯싶다.
2021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