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관광자원
이 지역에는 광주산맥의 영향을 받아 저산성 산지들이 기복을 이루면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임진강이 한강으로 흘러들면서 주변에 많은 관광요소의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월롱
면 덕은리에서 발견된 고인돌 무리는 이곳에 서기전 7∼8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
을 밝혀주고 있는데, 동양에서도 큰 것으로 알려졌다. 교하리와 다율리를 비롯한 곳곳
에는 청동기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남과 북을 잇는 서부
교통의 중심지이었으므로 역과 원이 많은데 대표적인 곳으로는 광탄원이다. 특히, 파주는
서울∼개성거리가 거의 같은 지점에 위치하여 나그네가 많이 머무르던 곳이며 안성장
다음가는 파주장은 쇠전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파주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보다 사람과 문물이 거쳐 지나가는
길목으로써의 구실이 더 컸던 지역이다. 또한, 파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임진강 주변
은 자연경관이 빼어나 관광지가 발달되어 있다. 하상은 물살이 빠르고 강변에는 층층이 톱날
모양으로 깎인 바위가 늘어서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이 외의 주요 관광명소로는
용미리의 부처돌입상, 덕은리의 옛주거지와 고인돌군, 갈현리의 장릉, 조리면의 공·순·영릉,
교하동한강 하류의 재두루미도래지, 파주읍 봉서리의 통일공원, 탄현면오두산의 통일
전망대 등이 있다. 또한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 광탄면 부수리의 윤관장군묘와 영장리
의 보광사, 문산 마정리임진각 전면에 있는 반공전시관, 사목리의 반구정, 파평면 율곡리
의 화석정, 파주향교 등이 있어 서울 시민의 안보의식을 높여줄 수 있는 좋은 관광코스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
(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4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하산하여 외가인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
(自警文)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자경문은 입지(立志)ㆍ과언(寡言)
등 11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운 것이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서 천문ㆍ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
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
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생원시(生員試)
ㆍ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
하여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과에 급제한 1564년에 정6품 호조(戶曹) 좌랑(佐郞)으로 관직에 나선 뒤에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좌랑을 거쳐 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의 대간(臺諫)의
직위에 있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
(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569년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로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
(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정철(鄭澈)과 함께 경세제민(經世濟民)
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0년(선조 3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학문에 전념
했다. 1571년 청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
로 낙향했다가 파주 율곡촌(栗谷村)으로 거처를 옮겼다. 1573년(선조 6)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ㆍ우부승지
(右副承旨)를 역임했으며, 1574년(선조 7) 당시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구체
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그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다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관직에 올랐고, 그 뒤 대사헌(大司憲),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575년(선조 8) 선조에게 제왕학(帝王學)의 지침서
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제출하였고, 1577년(선조 10)에는 관직
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해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편찬했으며, 1580년에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저술했다. 이 무렵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社倉)을 실시하기도 했다.
1581년 대사헌과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겸임하며 다시 관직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1582년에 이조판서, 1583년에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바치며 십만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등으로 임명되었다. 1584년 음력 1월
16일에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는 파주
선영에 묻혔으며, 1624년(인조 2)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
(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
되었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성혼(成渾)과 함께 공자(孔子)를 섬기는 문묘
(文廟)에 우리나라의 명현(名賢)으로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경연일기(經筵日記)>,
<천도책(天道策)>, <역수책(易數策)>, <문식책(文式策)>, <격몽요결(擊蒙要訣)>
, <만언봉사(萬言封事)>, <학교모범(學校模範)>, <육조계(六條啓)>, <시폐칠조책
(時弊七條策)>, <답성호원서(答成浩原書)> 등이 있으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의 저술들은 1611년(광해군 3) 박여룡(朴汝龍)과
성혼(成渾) 등이 간행한 <율곡문집(栗谷文集)>과 1742년(영조 18)에 이재(李縡)와
이진오(李鎭五) 등이 편찬한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