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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54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십청(十淸)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십청 선생은 경사(京師)에 입조(入朝)하였다가 요동(遼東)에 돌아왔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보다 먼저 음애 선생(陰崖先生) 이자(李耔)ㆍ송재 선생(松齋先生) 한충(韓忠)이 남곤(南袞)과 함께 연경(燕京)에 들어가다가 남곤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송재가 말하기를,
“이놈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온 사류(士類)를 몰살시키고야 말 것이다.”
하므로, 음애가 눈짓을 하고 나서 정성껏 치료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화가 일어났으니, 이는 다 남곤과 심정(沈貞)의 소행이었다.
이에 선생이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
“남곤ㆍ심정이 과연 사류를 몰살시키고 말았으니, 효직(孝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효직은 정암(靜菴) 조광조 선생의 자(字)이며, 간당(姦黨)들은 이 말로 인하여 선생을 이미 밉게 여기고 있었다.
선생이 사신 일을 마치고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상이 마침 《논어(論語)》의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란 대문을 강(講)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殿下)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접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당우(唐虞)의 치도를 본받으려 하자, 전하께서 그들을 높이고 신임하셨으므로 그들 신진이 그만 급속도로 옛것을 새것으로 혁신시키려 하다가 과연 과격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만약 전하께서 그들의 재국에 따라 적절히 조정하셨다면 반드시 성과를 거두게 되었을 터인데, 도리어 그들을 귀양 보내고 살육하였으니, 이는 전하의 허물이 큽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알아서 속히 고치면 허물이 없는 것이요,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으면 진정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하고, 이어 되풀이해서 진언하는데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선생이 물러난 뒤에 남곤이 좌상(左相)으로 그 도당을 모아 합계하기를, “삼가 듣건대, 경연(經筵)에서 한 재신(宰臣)이 조광조의 피죄(被罪)를 두둔하고 나섰다 하오니, 추치(推治)하시기 바랍니다.”하므로, 양사의 장관(長官) 홍숙(洪淑)과 조방언(趙邦彦) 등이 선생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주청하고 드디어 금부(禁府)에 구금시켰는데, 그 죄상(罪狀)에, “조광조의 죄상에 대하여는 조정에서 이미 율(律)에 의거하여 처단하였는데, 김모(金某)가 재상의 서열에 있으면서 시비를 현란하여 의론을 분열시켰으니, 일이 장차 불측(不測)한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용서하여 다만 음죽현(陰竹縣) 유춘역(留春驛)에 장배(杖配)시켰다.
선생이 경연에서 진언할 때 상공진(尙公震)이 한림(翰林)으로 입시하였다가 나와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바른말을 들었다.”
하고 탄복하므로, 간당들이 노하여 상공까지 아울러 탄핵하였다.
임오년(1522, 중종 17)에 선생은 사면(赦免)을 받아 충주(忠州) 지비천(知非川) 가에 우거(寓居)하면서 지비옹(知非翁)이라 자호하였고, 그 뒤 조정에서 당화(黨禍)에 걸렸던 사람들을 다시 기용하게 되어 선생을 추부(樞府)로서 부르므로 상경하여 사은하고는, 즉시 하향(下鄕)하여 세상을 잊고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휘는 세필(世弼), 자는 공석(公碩)으로 신라 김씨왕(金氏王)의 후예이다. 고려 때 인관(仁琯)은 검교 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였고, 자수(自粹)는 문과(文科) 장원으로 벼슬이 도관찰(都觀察)에 이르고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호는 상촌(桑村)인데, 바로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 근(根)은 본조(本朝)의 한성 소윤(漢城少尹)으로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 영유(永儒)는 성종 때 명신(名臣)으로 벼슬은 지중추(知中樞)에 이르고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아버지 훈(薰)은 첨정(僉正)으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송씨(宋氏)는 군수(郡守) 학(翯)의 딸이다.
성종이 친림(親臨)하여 제생을 시험할 때 선생이 제1위로 합격하였는데, 그 나이 겨우 18이었다. 상이 가장 연소한 것을 사랑하여 즉시 글제를 명하고 운(韻)을 부르자, 선생이 다시 붓을 들고 즉시 시를 지어 올리므로, 상이 더욱 기특하게 여기며 매우 융숭한 상을 하사하였다.
홍치(弘治) 을묘년(1495, 연산군 1)에 사마시(司馬試)에, 병진년(1496)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한림이 되었고, 옥당(玉堂)에 선입되어 정자(正字)를 거쳐 수찬(修撰)에 이르렀으며, 이조 낭관(吏曹郞官)으로서 북관(北關 함경도 지방)에 봉명사(奉命使)로 나갔다.
그때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영흥(永興)의 훈도(訓導)로 있었는데, 선생이 첫눈에 그 사람됨을 알고 돌아오는 즉시 선발시켜 마침내 명경(名卿)으로 만들었다. 연산군 갑자년에 사화(士禍)에 걸려 거제(巨濟)로 유배되었고, 병인년(1506)에 중종이 즉위하여 응교(應敎)로 소환, 문사(文士)를 선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하였는데, 그때 피선(被選)된 6, 7명 중에 선생이 제1위였고, 이어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다.
고사(故事)에,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할 적에는 전서리(典書吏)가 으레 진강할 대문에 미리 쪽지를 붙여 진강관(進講官)에게 드리면, 진강관이 그 대문의 구두(句讀)와 문의(文義)를 복습한 뒤에 진강하도록 되어 있는데, 한번은 전서리가 다른 대문에 잘못 쪽지를 붙여 왔었다.
선생이 모든 동료와 함께 경연에 나아가 보니, 미리 복습한 대문이 아니었고 어의(語義) 또한 어렵고 심오(深奧)하므로 동료들은 책을 펴 놓고 모두 쩔쩔매었으나 선생이 잠깐 사이에 독파, 시원히 이해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었으니, 이는 선생이 온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일체 낯선 문자가 없었으므로 그처럼 촉박한 시기에 맞춰 즉각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동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통정(通政) 품계에 승진되어 부제학(副提學)ㆍ승지(承旨)로 재직한 기간이 많았고, 병자년(1516, 중종 11)에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나갔는데, 상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하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어 누가 잘 아느냐고 묻자, 한 사람이 선생밖에 없다고 대답하였다. 즉시 역말(驛馬)를 놓아 선생을 불러들인바, 그 입대가 명쾌하였으므로 상이 크게 가상히 여겨 감탄하였다.
상이 일찍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청백(淸白)하고 선치(善治)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올리게 하였을 때 선생이 정성근(鄭誠謹) 등과 함께 참여되었으므로, 즉시 가선(嘉善) 품계에 승진하여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로 나갔다가 들어와 대사헌(大司憲)ㆍ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기묘년 봄에 상이 장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하기 위하여 조정암(趙靜菴)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 11명을 특별히 선발하였을 때 선생도 그중의 일원이었으니, 그 당시 선생에 대한 상하(上下)의 추중(推重)이 이와 같았다.
선생의 생졸(生卒)은 다 계사년이었고 부인(夫人)은 부사(府使) 이탁(李鐸)의 딸이며, 장남은 숙(䃤), 차남 구(𥗫)는 참봉(參奉), 3남 저(䃴)는 지평(持平)이었고, 생원(生員) 양의(楊誼)ㆍ만호(萬戶) 최필신(崔弼臣)ㆍ생원 이지(李贄)는 세 여서(女婿)이며, 내외의 증손 현손이 크게 번창하고 또 현달(顯達)한 이가 많으나 다 기록할 수 없다.
세상에서, 기묘 연간을 본조(本朝)에서 가장 융성하였던 문명 시대로 치고 있으니, 그 당시 당적(黨謫)에 연좌된 이들의 재덕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의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한 학문 논의가 반드시 많았을 터인데, 참벌(斬伐) 소삭(銷鑠)을 겪은 나머지 능히 발휘하고 전술(傳述)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아들 지평공(持平公)마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음형(淫刑 부당한 형벌) 을 입어 별세한 때문에 선생의 소장(所藏)을 수집하여 후손에게 전수하지 못하고, 그 당시 당적(黨籍)에 겨우 몇 마디 말이 보일 뿐이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지금 그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면, 선생은 천품이 매우 높고 평소의 수양이 원만하며, 학문은 격치(格致 격물(格物)과 치지(致知))ㆍ성정(誠正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선무(先務)로 삼고 문장(文章)에는 조식(藻飾 아름다운 말을 꾸미는 것)ㆍ화미(華靡 화려한 것)하는 관습을 제거하였다.
가정에 있어서는 어버이 섬기는 데 효(孝)를, 형(兄) 섬기는 데 공(恭)을, 조상 받드는 데 성(誠)을 다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일체 예법에 따랐으며, 벼슬에 있어 일을 처리하는 데 청백ㆍ정직하였고, 더욱이 도덕으로써 개제(開濟)하여 사류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였다.
아, 그 당시 정암(靜菴) 제현들의 규모와 기상(氣像)이 그러하였으니, 그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선생의 대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찌 꼭 많아야만 되겠는가. 다만 전후 화(禍)를 받았던 경중으로 논한다면, 송재(松齋)가 가장 참혹하고 음애(陰崖)가 가장 가볍고 선생이 그 중간이다.
지금 선생과 음애가 함께 충주(忠州)의 서원(書院)에 향사(享祀)되고 있는데, 선생을 존모하는 이가 이미 화를 받은 경중으로써 음애에게 간격을 두지 않거니, 송재를 존모하는 이인들 어찌 선생에게 의심을 두겠는가. 이분들의 고하ㆍ천심에 대하여는 후학으로서 감히 알 바 아니지만, 당시의 제현들이 동과(同科)로 인정한 것만은 의심이 없다. 따라서 당적서(黨籍序)에 화를 받은 경중으로써 우열을 삼은 것은 정확하지 못한 바가 있다.
모재 선생 김안국이 일찍이 선생의 행장을 찬하였으나 불행히 병화(兵火)에 의해 없어지고 그 뒤에도 그대로 인순(因循)하여, 다시는 수록하여 드러낼 수 없게 되었는데, 지금 선생의 4세손 우곤(遇坤)ㆍ종현(宗鉉) 등이 나를 찾아와서 묘문(墓文)을 청하므로 사양하다 못하여 대충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중종반정 이후로 / 中廟改玉
여러 현인 함께 나와 / 衆賢彙征
온 조정에 가득할 제 / 濟濟盈庭
요순 군민 만들 뜻으로 / 其志君民
성탕 무왕의 도와 / 其道商周
염계 정자의 학 가졌는데 / 其學周程
뉘 함께 벗이 되며 / 誰與同朋
지기 서로 같았던가 / 與同其氣
진정 선생이 / 允矣先生
군서를 섭렵해 / 博極群書
깊은 것 다 탐구하고 / 無深不鉤
먼 것 모두 통하여 / 無賾不精
경연에서의 강론에 / 經幄討論
직접 창 들고 방 안에 들어서듯 하므로 / 操戈入室
여러 선비 모두 퇴각했네 / 群彥皆傾
외군에 있을 적에도 / 雖在外郡
임금이 그 학문 그리워하여 / 上思其學
즉시 정 보내 부르니 / 亟招以旌
세상에선 그 현능 사모하고 / 世慕其賢
물여우는 모래를 머금다가 / 蜮含其沙
별안간 벌레가 글자를 형성하고 / 蟲篆忽成
밤중에 궐문이 열려 / 神武夜開
현준이 차례로 목숨을 잃으니 / 賢俊騈首
귀신도 흐느끼고 놀랐어라 / 鬼泣神驚
홍수가 하늘에 닿아 / 洪水漫天
산과 언덕 묻혔는데 / 包山駕陵
한 지주 꿋꿋이 서 있으며 / 一柱亭亭
해 저물고 음산한 날에 / 日暮天陰
솔개와 까마귀 득실거리는데 / 鴟鴉滿林
봉새만 외로이 울부짖으며 / 鸑鷟孤鳴
구금(拘禁) 장형(杖刑)에 / 牢狴桁楊
작은 역참(驛站)에 유배되니 / 對移殘馹
택반의 독성(獨醒)일세 / 澤畔之醒
이윽고 법망(法網)이 풀려 / 天網俄弛
다시 조반(朝班)에 오르니 / 置我朝籍
마치 새벽녘 별처럼 빛났으나 / 爛然晨星
이는 본시 그리던 바 아니므로 / 匪我思且
옷깃 여미고 하향(下鄕)하니 / 斂衽來歸
물고기와 새들이 서로 맞아 주었네 / 魚鳥爭迎
나의 거실(居室) 조용하고 / 我室淸幽
나의 농사 풍등(豐登)하고 / 我稼豐長
나의 호수(湖水) 환하여라 / 我湖空明
옛날 송 나라 때 / 如昔宋朝
원우당(元祐黨) 완인으론 / 元祐完人
유원성 한 사람만이 / 有劉元城
끝내 당초의 뜻 일관시켰는데 / 竟收初心
불우한 선생의 일생 / 不施以沒
저 남곤과 심정 때문 / 彼哉袞貞
온 사림 추모하여 / 士林追慕
공경스레 향사하니 / 享祀孔式
서직이 향기로운 게 아닐세 / 黍稷非馨
오는 천추에 / 有來千秋
어느 누가 선생의 무덤에 / 疇敢不式
고개 숙이지 않으랴 / 先生之塋
<끝>
[註解]
[주01] 정(旌) : 옛날에 임금이 대부(大夫)를 예빙(禮聘)할 때 사용하던 기(旗).
[주02] 물여우는 …… 머금다가 : 물여우는 이름을 사공(射工), 또는 사영(射影)이라 한다. 등에 껍질이 있고 머리에 뿔이 있으며, 세 개의
발에다가 날개가 있고 눈은 없으나 귀가 밝은 충류(蟲類)로 모래를 머금어 사람에게 쏘아 대면 사람이 즉시 창병(瘡病)에 걸린다고
하는데, 소인(小人)이 군자를 모해하는 것을 비유한다.
[주03] 벌레가 …… 형성하고 : 조선 중종 시대에 훈구파(勳舊派) 홍경주(洪景舟)ㆍ남곤(南袞) 등이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 후궁(後宮)
을 움직여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新進) 사류(士類)를 무고하게 하고 대전 후원 나뭇잎에 감즙(甘汁)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주
초는 조(趙)의 파자(破字)로, 조광조가 왕이 되리라는 뜻)’ 네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그 잎을 따다
가 임금에게 바쳐 임금의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임금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어조로,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주04] 지주(砥柱) : 중국 황하수(黃河水) 중류(中流)에 우뚝 서 있는 주상(柱狀)의 바위산인데, 사람의 강한 의지와 기개를 비유한다.
[주05] 택반의 독성(獨醒) : 이는 전국 시대 초(楚)의 대부(大夫) 굴원(屈原)이 소인의 참소로 임금에게 소박을 만나 초라한 행색으로 못가
를 거닐다가 어부(漁父)를 만나서 “온 세상은 다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 깨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방축(放逐)을 당했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楚辭 漁父辭》
[주06] 원우당(元祐黨) …… 유원성 : 송 신종(宋神宗) 때 사마광(司馬光)을 위시한 문언박(文彦博)ㆍ정이(程頤) 등 구당(舊黨)이 왕안
석(王安石) 등 신당(新黨)과 대립, 당쟁이 철종(哲宗) 원우(元祐) 연간까지 치열해졌는데, 휘종(徽宗) 숭녕(崇寧) 초기에 소인(小
人) 증포(曾布)ㆍ채경(蔡京) 등이 휘종에게 청하여 구당 180명을 간당(奸黨)으로 지척, 단례문(端禮門)에 ‘원우간당비(元祐奸黨
碑)’를 세웠으며, 구당 중에 원성(元城) 사람 유안세(劉安世)는 기개가 강직하여 일곱 번이나 험악한 곳에 적거(謫居)하면서도 굽
힐 줄 몰랐으므로, 소식(蘇軾)이 그를 ‘철한(鐵漢)’이라 일컬었다.
[주07] 서직이 …… 아닐세 : 서직은 제물(祭物)을 말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에 “지극한 다스림은 향내가 풍기는 것과 같아 신명
(神明)을 감응시키므로,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만이 향기로운 것이다.”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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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十淸金先生神道碑銘 幷序
十淸先生朝京師。還到遼東。聞北門禍作。先是陰崖李先生耔,松齋韓先生忠。同南衮赴燕。衮病甚危。松齋曰。這漢不死。必赤士類矣。陰崖目攝之而至誠救療。至是禍作。衮與沈貞之爲也。先生涕泣曰。衮,貞果赤士類。孝直何罪。孝直,靜菴趙先生字也。姦黨固已銜之。旣畢使。入侍筵席。上方講論語。至過勿憚改。先生進曰。殿下亦有過矣。向者趙光祖等。欲效唐虞之治 。殿下尊寵信任之。於是新進之士。遽欲革舊更新。固有過激之失矣。其時殿下若能取財稱停。則必有成效。而顧乃竄逐殺戮。是殿下之過大矣。然知其過而速改。則是無過矣。過而不改。斯爲過矣。因反覆陳說。言淚俱下。旣退。衮時爲左相。與其黨合辭啓曰。聞筵中一宰臣。以光祖被罪爲言。請推治。兩司長官洪淑,趙邦彥等請拿鞫。遂下廷尉。其責辭曰。趙光祖罪狀。朝廷旣依律處斷。而某在宰相之列。眩亂是非。使論議不定。事將不測。上特原之。只杖配于陰竹縣留春驛。當先生進言時。尙公震以翰林入侍。出而歎服曰。今日始聞讜言。姦黨怒竝劾之。壬午。先生蒙宥。因寓居于忠州知非川上。自號知非翁。及後朝廷收敍黨人。處先生以樞府。入京謝恩卽還。杜門以沒其世。先生慶州人。諱世弼。字公碩。新羅金氏王之後。高麗有仁琯。檢校太子太師。自粹。文科壯元。官至都觀察。以孝旌閭。號桑村。寔先生高祖也。曾祖根。本朝漢城少尹。贈兵判。祖永儒。成廟朝名臣。官至知樞。諡恭平公。考薰僉正。贈判書。妣宋氏。郡守翯之女。成廟臨軒試諸生。先生爲第一。時年十八。上愛其年最少。卽命題呼韻。先生復操筆立就。上益奇之。賞賜甚優。弘治乙卯司馬。丙辰。登第由槐院爲翰林。選入玉堂。自正字至修撰 。以天曹郞。奉使北關時。李聾巖賢輔爲永興訓導。先生一見。識其爲人。歸卽甄拔。卒爲名卿。燕山甲子。罹士禍謫巨濟。丙寅。中廟卽位。以應敎召還。上命擇文士賜暇書堂。時被選者六七人。先生爲之首。陞典翰。故事當進講時。典書吏必籤進當講處。進講官必宿習其句讀文義然後乃入。一日吏適誤籤他處。先生與諸僚入筵。則非所宿習者。而適語艱義奧。同僚開卷失色。先生倉卒讀下。灑然解釋。略無礙滯。蓋先生博洽經史。都無生面文字。故其能副急迎刃如此。同僚莫不歎服。陞通政。爲副提學,承旨者居多。丙子。爲養爲廣州牧。上講易學啓蒙。有難解處。上問誰知者。有以先生對者。卽命馹召。入對明暢。上甚嘉歎焉。嘗命該曹錄聞廉潔善治人。先生與鄭誠謹等與焉。卽進嘉善階。觀察湖南。入爲大司憲,吏曹參判。己卯春。上將講性理大全。別擇靜菴,金慕齋安國等十一人。先生卽其一。先生在當時爲上下所推重如此也。先生生沒。皆癸巳歲。娶府使李鐸女。長男䃤。次𥗫參奉。季䃴持平。生員楊誼,萬戶崔弼臣,生員李贄。三女壻也。內外曾玄甚蕃。而且多顯者。不能盡記。世以己卯爲我朝文明之盛。當時坐黨謫者。其之才之德。不言而可知矣。先生學問論議。可爲後世法者必多。而斬伐銷鑠之餘。無有能發揮傳述者。又胤子持平公於乙巳士禍。繼被淫刑以沒。未能收拾襲藏以遺後昆。獨其見於黨籍者。只寂寥數語而已。可勝歎哉 。今據家狀則有曰。天資甚高。充養有素。爲學以格致誠正爲先。爲文絶去藻飾華靡之習。其居家。事親盡其孝。事兄盡其恭。奉先盡其誠。敎子弟。一遵禮法。當官處事。廉潔正直。尤以道德開濟。爲士類所敬重。噫。當時靜菴諸賢。其規模氣象。自如是矣。此足以觀先生大略矣。夫豈多乎。抑其前後受禍。松齋最酷。陰崖最輕。先生居兩先生之間。今先生與陰崖竝享於忠州之書院。尊慕先生者。旣不以受禍輕重。而有間於陰崖。尊慕松齋者。亦豈有貳於先生哉。其高下淺深。非後學之所敢知。而一時諸賢之相與同條共貫。則無疑矣。然則黨籍。序以受禍輕重爲優劣者。有未必盡然者矣。慕齋先生金公安國。嘗撰先生行狀。不幸逸於兵火。其後因循無復有收錄發揮者。今先生四世孫遇坤,宗鉉等。來請墓文。余辭不獲命而追敍如此云。銘曰。
中廟改玉。衆賢彙征。濟濟盈庭。其志君民。其道商周。其學周程。誰與同朋。與同其氣。允矣先生。博極群書。無深不鉤。
無賾不精。經幄討論。操戈入室。群彥皆傾。雖在外郡。上思其學。亟招以旌。世慕其賢。蜮含其沙。蟲篆忽成。神武夜開。
賢俊騈首。鬼泣神驚。洪水漫天。包山駕陵。一柱亭亭。日暮天陰。鴟鴉滿林。鸑鷟孤鳴。牢狴桁楊。對移殘馹。澤畔之醒。
天網俄弛。置我朝籍。爛然晨星。匪我思且。斂衽來歸。魚鳥爭迎。我室淸幽。我稼豐長。我湖空明。如昔宋朝。元祐完人。
有劉元城。竟收初心。不施以沒。彼哉衮,貞。士林追慕。享祀孔式。黍稷非馨。有來千秋。疇敢不式。先生之塋。<끝>
宋子大全卷一百五十四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