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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집 2
역옹패설 후집 2(櫟翁稗說 後集二)
정 사간(鄭司諫) 지상(知常)의 다음과 같은 시(詩)가 있다.
비 갠 긴 둑에 풀빛 푸르른데 / 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그대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른다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푸른 물 언제 마를는지 / 大同江水何時盡
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물결에 보태네 / 別淚年年添作波
연남(燕南) 양재(梁載)가 일찍이 이 시를 등사할 적에 ‘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물결을 불게 한다.[別淚年年漲綠波]’고 썼는데, 나는 생각건대 작(作) 자나 창(漲) 자는 모두 합당하지 않다. 이는 ‘푸른 물결에 보탠다.[添綠波]’고 하여야 한다. 또 정지상(鄭知常)의,
하늘과 땅이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 地應碧落不多遠
흰 구름과 사람이 서로 대하여 한가롭네 / 人與白雲相對閑
뜬구름 흐르는 물 따라 객이 절에 이르니 / 浮雲流水客到寺
붉은 잎 푸른 이끼 속에 중이 문을 닫누나 / 紅葉蒼苔僧閉門
푸른 버들 아래 문 닫힌 엳아홉 집 / 綠楊閉戶八九屋
달 밝은 누대에 기댄 서너 사람 / 明月倚樓三四人
북두성에 닿을 듯한 삼각형 집 / 上磨星斗屋三角
허공에 반쯤 솟은 누대 한 칸 / 半出虛空樓一間
돌머리 늙은 소나무엔 조각달이 걸렸는데 / 石頭松老一片月
먼 하늘 낮은 구름은 하 많은 산 덮었네 / 天末雲低千點山
한 이런 따위의 시구는 시인들이 즐겨 쓰는 운율(韻律)이다.
김 상서(金尙書) 신윤(莘尹) 가 의종(毅宗 고려 제18대 임금) 무인년(1170) 중구일(重九日)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도성에 풍진이 일어 / 輦下風塵起
삼대 베듯 사람을 죽이누나 / 殺人如亂麻
하지만 좋은 시절 저버릴 수 없어 / 良辰不可負
막걸리에 국화꽃 띄워 마시네 / 白酒泛黃花
이 시를 보면, 당시의 일이 어쩔 수 없었음과 이 노인의 회포 또한 뇌락(磊落: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 대축(吳大祝) 세재(世才) 이 의종(毅宗)의 미행을 풍자한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어찌하여 청명한 날에 / 胡乃日淸明
검은 구름이 땅에 덮였는가 / 黑雲低地橫
도성 사람들아 가까이 오지 말라 / 都人且莫近
용이 이 속으로 지나간다오 / 龍向此中行
또 남의 운(韻)에 따라 극암(戟巖)에 대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도성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 있는데 / 城北石攙攙
나라 사람들은 극암이라 부르네 / 邦人號戟巖
멀리 치솟음은 학을 탄 왕자 진(王子晉)을 치는 모습이요 / 逈摏乘鶴晉
높이 솟아오름은 하늘에 오르는 무함(巫咸)을 찌르는 형상이네 / 高刺上天咸
세워 놓은 창끝처럼 섬광이 번뜩거리고 / 揉柄電爲火
닦아놓은 칼날처럼 흰 빛을 내뿜네 / 洗鋒霜是鹽
어떻게 이를 병기로 만들어 / 何當作兵器
초를 없애고 범을 보존시킬 수 있겠는가 / 亡楚却存凡
또 눈병에 대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늙음과 병이 함께 겹쳤는데 / 老與病相期
포의로 지내온 일생이로세 / 窮年一布衣
눈은 흐릿하여 덮어 가린 것 같고 / 玄花多掩翳
자석영(紫石英)으로 보아도 잘 보이지 않네 / 紫石少光輝
등불 앞에서는 글자 읽기 두렵고 / 怯照燈前字
눈 온 뒤 햇빛에는 눈이 부시네 / 羞看雪後暉
금방을 보고 난 뒤에는 / 後看金牓罷
눈감고 세상일 잊는 것 배우리 / 閉目學忘機
이 문순공(李文順公) 규보(奎報/이규보를 말함),
“선생의 시는 한유(韓愈)ㆍ두보(杜甫)의 시체(詩體)를 배웠다.”
하였으나 그의 시를 많이 볼 수 없다. 《김거사집(金居士集)》에 한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시는,
백 아름이나 되는 큰 재목이 쓰일 데 쓰이지 못하고 / 大百圍材無用用
석 자나 되는 부리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구나 / 長三尺喙不言言
하였는데, 역시 노련하고 기운차서 숭상할 만하다.
송(宋) 나라 때, 상원일(上元日)에 궁내(宮內)에서 어시(御詩)를 발표하니 재상(宰相)ㆍ양제(兩制 한림학사(翰林學士)ㆍ지제고(知制誥)ㆍ삼관(三館)이 모두 응제(應製)하여 성대한 행사가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전아하고 아름다운 것은 왕기공(王岐公)의 시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봉황새 한 쌍 구름 사이에서 연 옆으로 내려오고 / 雙鳳雲間扶輦下
자라 여섯 마리 바다 위로 신산(神山) 끌고 오네 / 六鰲海上駕山來
우리나라에도 등석문기장자(燈夕文機障子) 시가 있는데, 이 문순공의,
세 번 만세 부르니 신산이 솟아오르고 / 三呼萬歲神山湧
천 년에 한 번 익는 천도 복숭아 나왔네 / 一熟千年海果來
한 시는 왕기공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두를 다툴 만하다.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일재(權一齋) 한공(漢功)은,
남산이 은 술동이에 상서로운 술을 빚어내니 / 南山釀瑞生銀瓮
북두가 자루를 돌려 옥 술잔에 따르네 / 北斗回杓酌玉杯
여기저기 울리는 갈고 소리에 봄 기운 호탕한데 / 羯鼓百枝春浩蕩
수많은 나무에 걸린 봉등은 낮게 뜬 달 모습이네 / 鳳燈千樹月作徊
하였고, 백 평리(白評理) 원항(元恒)은,
밝은 달이 연회하는 곳을 환히 비추니 / 九霄月滿笙簫地
봄 밤에 금수 강산이 열렸구나 / 一夜春開錦繡山
하였으나, 스스로 권한공의 시를 따르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였다.
동파(東坡)가 한간(韓幹)의 십사마도(十四馬圖)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생의 말 그림 진짜 같고 / 韓生畫馬眞是馬
소자의 시 솜씨 그림을 보는 것 같네 / 蘇子作詩如見畫
세상에 백락이 없고 한생도 없으니 / 世無伯樂亦無韓
이 시와 이 그림 뉘에게 보여야 하나 / 此詩此畫誰當看
이 문순공이 노자도(鷺鶿圖)에 대하여 시를 지었는데, 말은 비록 같지 않으나 용의(用意)는 같았다.
시는 다음과 같다.
그림은 사람마다 가지기 어렵지만 / 畫難人人畜
시는 곳곳에 전할 수 있다네 / 詩可處處布
시를 볼 때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면 / 見詩如見畫
그 그림 또한 만고에 전할 수 있으리 / 亦足傳萬古
홍 총랑(洪摠郞) 간(侃)은 정 승선(鄭承宣) 이름은 습명(襲明), 의종(毅宗) 때 사람이다.
다음과 같은 시를 매우 좋아하였다.
온갖 꽃 속에 깨끗하고 고운 맵시 / 百花叢裏淡丰容
갑자기 광풍 불어 붉은 빛 가셨네 / 忽被狂風減却紅
달수로도 옥 같은 뺨 못 고치니 / 獺髓未能醫玉頰
오릉공자의 한 끝이 없구나 / 五陵公子恨無窮
이 시가 아마도 오랫동안 음미할수록 여미(餘味)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근세(近世)에 풍주(豐州)에 명기(名妓)가 있었는데, 서경존문사(西京存問使)가 불러다 부(府)의 기적(妓籍)에 올려 놓았더니, 기생이 자못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 학사(學士) 의(顗)가 시(詩)를 지어 기생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옛날 열다섯 꽃다운 시절에 / 憶昔正年三五時
금비녀 두 귀밑에 검은 머리 드리웠던 때를 생각하면서 / 金釵兩鬢綠雲垂
스스로 슬퍼하네 파리하게 여윈 얼굴로 / 自憐惟悴容華減
막부(幕府)의 홍련이 되었음을 / 來作紅蓮幕裏兒
정 승선의 시에 비겨 그다지 못할 것이 없다.
장 장간(張章簡) 일(鎰) 의 다음과 같은 승평연자루(昇平燕子樓) 시가 있다.
연자루에 풍월만 쓸쓸하니 / 風月凄涼燕子樓
낭관이 떠난 뒤 꿈결처럼 아득하네 / 郞官一去夢悠悠
당시의 좌객들 늙는 것 혐의할 게 뭔가 / 當時座客何嫌老
누대에서 춤추던 가인도 흰 머리 된 것을 / 樓上佳人亦白頭
곽 밀직(郭密直) 예(預) 이 수강궁(壽康宮)에서 새매 잃은 것에 대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여름 겨울 보살펴 살지게 길렀는데 / 夏涼冬暖飼鮮肥
어인 일로 날아가고 돌아오지 않는가 / 何事穿雲去不歸
제비에겐 한 알의 곡식도 준 적 없건만 / 海燕不曾資一粒
해마다 돌아와서 들보 옆을 난다네 / 年年還傍畫樑飛
이동안(李動安) 승휴(承休) 의 하운(夏雲)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 조각이 문득 흙탕물 위에서 생겨 / 一片忽從泥上生
동서 남북으로 종횡하다가 / 東西南北便從橫
장마비 내려 메마른 식물(植物) 소생시키겠다고 / 謂成霖雨蘇群槁
부질없이 해와 달의 밝은 빛 가렸네 / 空掩中天日月明
정 밀직(鄭密直) 윤의(允宜) 이 안렴사(按廉使)에게 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새벽에 말을 달려 외로운 성으로 들어가니 / 凌晨走馬入孤城
사람 없는 울타리 가에 살구 열매만 달렸네 / 籬落無人杏子成
뻐꾸기는 나랏일 급한 줄 모르고 / 布穀不知王事急
온종일 숲가에서 봄갈이 재촉하네 / 傍林終日勸春耕
이상의 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겨 애송하게 한다.
그러나 장간(章簡)의 시는 감분(感奮)하여 지은 시일 뿐 딴 뜻이 없으나 나머지 3편은 모두 풍유(諷諭)가 함축되어 있는데, 특히 정(鄭)ㆍ곽(郭)의 시는 미묘하고도 완곡(婉曲)하다.
홍평보(洪平甫) 간(侃) 가 시 한 편을 지어 내놓을 적마다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모두 즐겨 전하고 있는데, 《논어(論語)》에 ‘고장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더라도 옳은 것이 아니고 모두 미워하더라도 옳은 것이 아니니, 선(善)한 사람이 좋아하고 불선한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 못하다.’ 하지 않았던가.
시문(詩文)을 짓는 것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시는 만고에 떠들썩하게 전할 수는 있으나 공감을 얻게 할 수는 없으며
온 좌중(座中)을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사람마다 적의(適誼)하게 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참으로 명언(名言)이다.
월암장로(月菴長老) 산립(山立)은 시를 지을 적에 옛사람의 시어(詩語)를 점화(點化)한 것이 많았다.
남으로 수곡에 오니 곧 어머니가 그립고 / 南來水谷還思母
북으로 송경에 이르니 다시 임금이 생각나네 / 北到松京更憶君
일곱 역 두 강 길에 노새마저 작으니 / 七驛兩江驢子小
문득 구름처럼 가볍지 않은 행장이 혐의스럽네 / 却嫌行李不如雲
이 시는 곧 형공(荊公)의,
어머니는 한구 가에 계시고 / 將母邗溝上
자식들 백저 북쪽에 남겨 두었으니 / 留家白苧陰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음 들으면 / 月明聞杜宇
남북 양쪽이 모두 마음에 걸리네 / 南北兩關心
한 시를 본뜬 것이다.
또,
백악산 앞의 버드나무를 / 白岳山前柳
안화사 안에 옮겨 심었더니 / 安和寺裏裁
봄바람 할 일이 많은지 / 春風多事在
한들한들 또 불어오네 / 裊裊又吹來
한 시가 있는데, 이는 곧 양거원(楊巨源) 의,
언덕 머리 버드나무 푸른 실처럼 드리웠는데 / 陌頭楊柳綠煙絲
말 세우고 그대 시켜 한 가지 꺾었더니 / 立馬煩君折一枝
봄바람 그를 아껴 차마 가지 못하는 듯 / 唯有春風最相惜
다시 꺾인 꽃을 향해 은근히 불어오네 / 慇懃更向手中吹
한 시를 본뜬 것이다.
금(金) 나라 말엽의 시인(詩人) 양비경(楊飛卿)이 단풍숲을 두고 지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바다 놀 숲 위에 서렸고 / 海霞不雨棲林表
바람도 없는데 들불이 나무 끝에 올랐네 / 野燒無風到樹頭
이 문진공(李文眞公) 장용(藏用) 도 위와 같은 제목으로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폐원이 보일 듯 말 듯하니 가을 생각 괴롭고 / 廢院瞞盱秋思苦
야산이 타는 듯하니 석양이 밝구나 / 淺山搪揬夕陽明
비경(飛卿)도 이 시에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진공(文眞公)이 삼각산(三角山) 문수사(文殊寺)를 두고 지은 장편시(長篇詩) 가운데,
말이 뜸해지자 이지러진 달이 깊숙한 사립을 비추고 / 語闌缺月入深扉
늦도록 앉았노라니 미풍이 높은 잣나무 가지를 울린다 / 坐久微風吟聳柏
하였는데, 산중의 아취(雅趣)를 깊이 터득하였다고 하겠다. 또 한 구는,
염불 소리 종 소리 속에 한 등이 붉구나 / 鐘梵聲中一燈赤
하였는데, 이는 나필(羅泌)이 찬(撰)한 《노사(路史)》에 실려 있는 ‘어떤 사람이 가화(家火 불씨)를 5세(世) 동안이나 꺼뜨리지 않고 전하여 왔는데 그 불빛이 핏빛처럼 붉었다.’는 일을 인용하여 장명등(長明燈)임을 말한 것이다.
박 문의(朴文懿 문의는 시호) 항(恒) 의,
밝은 낮 야산에 소나기 내리니 / 淺山白日能飛雨
황사 깔린 옛 성에 무지개 섰네 / 古塞黃沙忽放虹
와 안 문성(安文成 문성은 시호) 향(珦) 의,
아침비에 싱그러운 푸른 들 위로 비둘기 한 마리 날고 / 一鳩曉雨草連野
봄바람에 꽃이 만발한 성을 필마로 돌아드네 / 匹馬春風花滿城
와 김 밀직(金密直) 이(怡) 의,
한 조각 검은 구름 어느 산에 비 내리나 / 片雲黑處何山雨
방초 푸른 시절에 온종일 바람이네 / 芳草靑時盡日風
는 모두 아름다운 글귀인데, 다만 전편(全篇)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산인(山人) 오생(悟生)의 황산강루(黃山江樓) 시의 낙구(落句 율시(律詩)의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구(句))에,
누워서 어부들이 뱃전에서 하는 말 들으니 / 臥聞漁父軸轤語
티끌 일으키며 말 달리는 사람들 우리 무리 아니라 하네 / 走馬紅塵非我徒
하였으며, 동파(東坡)의 어부사(漁父詞)에는,
강 머리에 말 타고 선 벼슬아치 / 江頭騎馬是官人
내 외로운 배 타고 남쪽 언덕으로 건너겠다네 / 借我孤舟南渡坡
하였는데, 동파의 시는 용민(龍眠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의 호)이, 이광(李廣)이 오랑캐의 활을 빼앗아 시위를 당긴 채 아직 쏘지 않고 있는 상태를 그린 것 같고, 오생의 시는 추격하여 오는 기병(騎兵)을 쏘아 맞힌 상태를 그린 것 같았다.
탄지(坦之)는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시명(詩名)이 있더니, 출가(出家)하여서는 호를 취봉(鷲峯)이라 하였다. 그가 지은 낙이화(落梨花) 시에,
옥룡 백만이 구슬을 다툴 때 / 玉龍百萬爭珠日
바다 밑 양후가 떨어진 비늘을 줍는 것 같네 / 海底陽侯拾敗鱗
은근히 봄바람에 실어서 꽃 시장에 파니 / 暗向春風花市賣
동군이 붉은 물감 뿌리기가 용이하구나 / 東君容易散紅塵
하였는데, 이른바 시골 서당의 냄새가 나는 시라 하겠다. 김 문정(金文貞 문정은 시호) 구(坵) 이 같은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춤추듯 나부끼며 날아갔다간 돌아오기도 하고 / 飛舞翩翩去却回
바람이 치올려 불면 가지에 도로 올라 피려 하네 / 倒吹還欲上枝開
무단히 한 조각 거미줄에 걸리니 / 無端一片黏絲網
거미는 나비인 줄 알고 잡으러 나오네 / 時見蜘蛛捕蝶來
작가(作家)의 수법은 으레 각기 다른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강선생 일용(日用)과 좨주(祭酒) 임유정(林惟正)이 다함께 백가의체(百家衣體)에 능하다.”
하였으나, 강선생의 시는 보지 못하였지만 임 좨주의 시는 문집(文集)이 간행(刊行)되어 있으므로 보았는데, 홍곡(鴻鵠)과 가계(家鷄)처럼 차이가 현격하다는 기롱을 면하기 어려웠다.
근세에 최집균(崔集均)이 집구(集句)에 있어 일인자(一人者)인데, 비록 장편(長篇)이나 험운(險韻 글귀를 얽기 어려운 운자)이라 할지라도 붓을 달려 바로 완성하므로, 구경하는 자들이 놀라 나자빠질 정도였다. 그의 시에,
흰 철쭉꽃과 붉은 철쭉꽃이 섞여 있고 / 白躑躅交紅躑躅
노란 장미꽃과 붉은 장미꽃이 마주 서 있네 / 黃薔薇對紫薔薇
투계장 안에서 닭싸움 구경하고 / 鬪鷄場裏看鬪鷄
귀안정 앞에서 돌아가는 기러기 전송하네 / 歸雁亭前送歸雁
물빛이 푸르고 붉으니 무지개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 水色靑紅虹未斷
구름 모양 검고 희니 비가 막 갰네 / 雲容黑白雨初收
약포의 달팽이 침은 잎에 흘러 젖어 있고 / 藥圃蝸涎施葉濕
밤나무 숲의 매미 껍질 가지 안은 채 말라 있네 / 栗林蟬脫抱枝乾
한 이런 시는 대우(對偶)가 친절하여 가령 나 자신이 짓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보다 잘 짓지는 못할 것 같다.
임서하 춘(林西河椿)이 꾀꼬리 울음을 듣고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농가에 오디 익고 보리는 마르려 하는데 / 田家椹熟麥將稠
푸른 숲에 꾀꼬리 소리 처음 듣겠네 / 綠樹初聞黃栗留
낙양에서 꽃 아래 노닐던 사람 제 아는 듯이 / 似識洛陽花下客
은근히 울어울어 그치지 않는구나 / 慇懃百囀未能休
최 문청공(崔文淸公 문청은 시호) 자(滋) 이 밤에 숙직(宿直)하다가 채진봉(採眞峯)에서 학(鶴)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구름 갠 높은 하늘에 달이 마냥 밝으니 / 雲掃長空月正明
소나무 둥지에 자던 학 청아함 이기지 못하네 / 松巢宿鶴不勝淸
온 산의 새와 짐승 마음 알아주는 것 적으니 / 滿山猿鳥知音少
홀로 성긴 날개 퍼덕이며 밤중에 우는구나 / 獨刷疏翎半夜鳴
위의 두 시는 모두 불우(不遇)를 슬퍼하여 지은 것이다. 그러나 문청의 시는 기절(氣節)이 강개하여 임춘에게 견줄 바가 아니다.
진 정언(陳正言 정언은 직명) 화(澕) 의 버들을 읊은 시에,
봉성 서쪽 강둑에 휘늘어진 황금 물결 / 鳳城西畔萬條金
봄 시름 한데 묶어 그늘을 만들었네 / 勾引春愁作暝陰
한없이 맑은 바람 쉬지 않고 불어 / 無限光風吹不斷
이는 운애(雲靄) 화한 빗속에 가을이 깊었네 / 惹煙和雨到秋深
하였는데, 정치(情致)가 유창(流暢)하고도 아름답다. 그러나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버들[柳] 시에,
일찍이 봄바람과 함께 춤자리를 쓸었고 / 曾共春風拂舞筵
맑은 원림에 놀면서 이별하는 사람 보기도 했는데 / 樂遊晴苑斷腸天
어쩌다가 즐겨 가을까지 왔는가 / 如何肯到淸秋節
석양도 서러운데 매미 소리마저 처량하네 / 已帶斜陽更帶蟬
하였는데, 진 정언이 아마도 이 시를 모방하여 지은 것 같다. 산곡(山谷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호)의 시에,
남을 따라 계책을 세우면 끝내는 남에게 뒤지는 것 / 隨人作計終後人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핍진한 경지에 이르게 되네 / 自成一家乃逼眞
하였는데 참으로 미더운 말이다.
옛사람이 역사(歷史)에 대하여 읊은 작품이 많이 있는데, 그 작품이 이해하기 쉽고 싫증나기 쉬운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만을 곧바로 서술하였을 뿐 새로운 뜻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다음과 같은 시들을 애송하는데, 두목(杜牧)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적벽시(赤壁詩)
부러져 모래에 박힌 창 아직 반은 삭지 않았는데 / 折戟沈沙半未鎖
시험삼아 가져다 갈고 닦으니 전조의 것임을 알겠네 / 試將磨洗認前朝
동풍이 주랑의 편리를 도와주지 않으니 / 東風不借周郞便
동작대에 봄이 깊었는데도 이교가 꼼짝 않네 / 銅雀春深鎖二喬
오강정시(烏江亭詩)
승패는 병가의 일 기약할 수 없는 것 / 勝敗兵家事未期
수치를 참는 것이 바로 남아라네 / 包羞忍恥是男兒
강동 젊은이들 재준이 많았으니 / 江東子弟多才俊
세력 회복하여 다시 왔으면 승패 알 수 없었으리 / 捲土重來未可知
운몽택시(雲夢澤詩)
일기와 용패 아득히 나부끼는 듯 / 日旗龍旆想悠揚
한 포승으로 초왕 결박하니 공이 높았는데 / 一索功高縛楚王
곧바로 표연히 오호로 떠나가니 / 直使飄然五湖去
시종일관 충성바친 곽분양만 못하네 / 未如終始郭汾陽
도화부인묘시(桃花夫人廟詩)
세요궁 속 이슬 머금은 도화꽃 / 細腰宮裏露桃新
맥맥이 몇 봄을 말없이 보냈던가 / 脈脈無言度幾春
마침내 식 나라 멸망함 무슨 일 때문이었나 / 畢竟息亡緣底事
금곡원(金谷園) 누대에서 뛰어내린 여인이 가련쿠나 / 可憐金谷墮樓人
당언겸(唐彦謙)의 중산(仲山)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천고의 외로운 무덤들 쑥대 덩굴에 덮였으니 / 千古孤墳寄薛蘿
패군(沛郡)의 향리요 한 나라 산하이네 / 沛中鄕里漢山河
장릉도 쓸쓸한 구릉 되었으니 / 長陵亦是閑丘壟
이 날에 누가 중씨(仲氏)보다 훌륭한 줄 알겠는가 / 此日誰知與仲多
장안도(張安道)의 가풍대(歌風臺)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불우했던 유랑이 황제되어 돌아와 / 落魄劉郞作帝歸
술잔 앞에 강개하게 대풍시를 읊었네 / 樽前慷慨大風詩
한신 팽월 젓담고 소하 옥에 가두고도 / 韓彭菹醢蕭何縶
다시 많은 맹사를 구하려 하였네 / 更欲多求猛士爲
유 공부(劉貢父)의 새상(塞上)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예부터 변공은 무엇 때문에 있었던가 / 自古邊功緣底事
폐행에게 후(侯) 봉해주기 위해서였네 / 多因嬖倖欲封侯
차라리 그들에게 바로 황금인을 주고서 / 不如直與黃金印
사막에 흩어진 해골들을 아낄 것을 / 惜取沙場萬觸髏
왕개보(王介甫 개보는 왕안석(王安石)의 자)의 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장량시(張良詩)
한 나라 왕업의 존망이 그의 생각에 달려 있었으나 / 漢業存亡俯仰中
유후는 이런 때일수록 늘 침착하였네 / 留侯於此每從容
고릉에서는 한신 팽월에게 땅 나눠줄 것 의논했고 / 固陵始議韓彭地
복도에서는 옹치 봉해 줄 것을 도모하였네 / 複道方圖雍齒封
한신시(韓信詩)
빈천하면 모욕받고 부귀하면 교만한 법 / 貧賤侵陵富貴驕
공명을 다시 못 세우면 천한 백성 될 것이라 / 功名無復在蒭蕘
장군이 북면하매 군사들 오랑캐에 항복하였으니 / 將軍北面師降虜
이런 일 인간 세상에 오래도록 없었다네 / 此事人間久寂寥
이는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활롱어(活弄語)라는 것이다. 이 은대(李銀臺)와 이 문순(李文順)도 영사시(詠史詩) 수십 편(篇)이 있는데, 요약하면 호증(胡曾)과 막상막하이다.
후주(後周)가 쌍기(雙冀)를 사신으로 보내와 빙문(聘問)하였는데, 광종(光宗)이 표문(表文)을 올려 그를 머물게 하여 주기를 청하고 두터운 은총을 베풀었다. 최 중령(崔中令) 승로(承老) 이 소(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비록 중화(中華) 의 풍교(風敎)를 사모하였으나 아직 중화의 영전(令典)을 얻지 못하였고, 비록 중화의 선비를 등용하였으나 아직 중화의 고재(高才)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쌍기 때문에 말한 것 같다.
주저(周佇)와 호종단(胡宗旦)은 모두 민(閔) 땅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북조(北朝 북송(北宋))와 왕복한 문서는 주저가 찬진(撰進)한 것이 많았다. 종단(宗旦)이 인종(仁宗)에게 올린 글이 있는데, 박흡(博洽)하기는 저(佇)만 못하지만 문체가 선명하여 절로 기뻐할 만하였고 또 총민(聰敏)한데다가 잡예(雜藝)에도 통달하였으므로, 누가 더 압도적으로 훌륭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분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김 시중(金侍中) 인존(仁存) 이 지은 청연각기(淸讌閣記)가 송(宋)나라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실려 있는데, 그 문사가 애연(藹然)하여 덕(德)있는 자의 말이었다. 김 문열『金文烈: 문열은 김부식(金富軾)의 시호』의 혜음원기(慧陰院記), 귀신사(歸信寺)ㆍ각화사(覺華寺)의 비문(碑文)과 최 문숙 『崔文肅: 문숙은 최유청(崔惟淸)의 시호』 의 옥룡사(玉龍寺)의 비문은 모두 겉치레를 꾸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김 밀직(金密直) 부철(富轍)의 문수원기(文殊院記)와 김 장원(金壯元) 군유(君儒)의 송광사비(松廣社碑)도 즐겨 읽을 만하나 문사(文辭)가 번거로운 것이 애석하다. 윤 정당(尹政堂) 언이(彦頤)는 선학(禪學)에 밝았는데 그가 지은 운문사(雲門寺)의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를 보면 그 이치에 깊은 조예(造詣)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 사간(鄭司諫) 지상(知常)은 장자(莊子)와 노자(老子)의 학을 즐겨하였는데, 그가 지은 동산(東山) 진정선생『眞靜先生: 진정은 곽여(郭輿)의 시호』 비문(碑文)을 보면 표연(飄然)한 산수(山水)의 경치를 상상하게 한다.
요인(遼人)이 압록강(鴨綠江) 너머로 경계(境界)를 정하려 하자,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올렸는데, 거기에, “온 하늘 밑이 모두 왕토(王土)인데, 왕신(王臣: 고려 임금)의 얼마 안 되는 땅을 하필 내 땅이니 내가 다스리겠다고 하십니까.”하고, 또, “폐읍(弊邑)을 무유(撫綏)시키기 위하여 문양(汶陽)의 옛 땅을 돌려주었고, 창신(昌辰)에 춤 출 적에 춤 잘못추는 장사왕(長沙王)을 위하여 봉토(封土)를 넓혀 주었습니다.”하였는데, 요(遼) 황제(皇帝)가 이 표(表)를 보고서 그 의논(議論)을 중지시켰다.
형공(荊公)이 일찍이 글 한 구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조수의 공도 없으니 / 功謝曹隨
외시의 은혜에 부끄럽네 / 恩慙隗始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곽외(郭隗)의 고사(故事)에도 은(恩)자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자』의 연구(聯句)에 ‘은혜 갚음이 외시(隗始)에 부끄럽다.[報恩慚隗始]’ 했다.”하니, 묻던 사람이 감복하였다.
박공(朴公)이 ‘얼마 안 되는 땅을 하필 내 땅이니 내가 다스리겠다고 하십니까.’ 한 말도, 아마 따로 출처가 있을 것이라 했다.
‘유분(劉蕡)이 급제(及第)하지 못하였는데 우리가 급제하였다.[劉蕡不第我輩登科]’는 글에 대하여 ‘옹치(雍齒)도 후(侯)에 봉하여졌으니 우리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雍齒且侯吾屬無患]’는 글이 대구(對句)가 될 수 있고 ‘내가 보건대 위징(魏徵)이 매우 아름답다.[我見魏徵殊嫵媚]’는 글에 대하여 ‘사람들이 노기(盧杞)는 간사하다고 말하더라.[人言盧杞是姦邪]’는 글이 대구가 될 수 있다.
글이란 대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대구를 씀에 있어 그 내용이 부실(不實)하다면 어찌 숭상할 수 있겠는가.
임종비(林宗庇)가 학사(學士) 권적(權適)에게 준 글에,
배 타고 상국으로 가니 / 乘船歸上國
북방의 학자들 그대 앞설 이 없네 / 北方學者莫之先
비단옷 입고 고국에 돌아오니 / 衣錦還故鄕
동도의 주인이 감탄하는구나 / 東都主人喟然嘆
하였는데, 최 문청『崔文淸: 문청은 최자(崔滋)의 시호』이 ‘송(宋) 나라는 서쪽에 있는데 북방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원 세조(元世祖)가 아리발가(阿里孛哥)를 평정(平定)하자, 김 문정『金文貞: 문정은 김구의 시호』 구(坵)가 하표(賀表)를 짓기를,“혁연(赫然)히 노하시어 이에 군려(軍旅)를 정돈하여,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 나라를 칠 때처럼 황월(黃鉞)과 백모(白旄)를 드날리셨으며 사랑이 위엄보다 성하시므로 진실로 수고로움을 잊으신 채, 진 소후(晉昭侯)가 소의 주박『素衣朱襮: 옷깃을 보불로 수놓은 흰옷으로 제후의 옷』으로 곡옥(曲沃)을 치듯이 평정하였습니다.”하였는데, 한림학사(翰林學士) 왕백일(王百一)이 그 문장의 공교(工巧)함을 여러 번 칭찬하였다.
세조가 이미 사해(四海)를 통일하고 나서 유아(儒雅)한 선비를 등용하였으므로, 헌장(憲章)과 문물(文物)이 모두 중화(中華)의 옛모습을 회복하였다. 김문정이 표(表)를 지을 적에 한 구(句)를 얻었는데 다음과 같다.
“천하를 어찌 마상『馬上: 무력을 뜻한다』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문명(文明)을 천양(闡揚)하소서.”
이 글의 대구(對句)를 세 번이나 고쳐 지었으나 끝내 마음에 맞지 않았었다. 내가 추후에 대를 맞추기를,
“강남(江南)을 주머니에 든 물건과 같이 얻었으니 바야흐로 통일할 시기가 이르렀도다. 천하를 어찌 마상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문명을 천양하소서.”하였는데, 이는 《통감(通鑑)》에 나오는 이곡(李穀)의 말이다.
당(唐) 나라 양사복(楊嗣僕)이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고향 집에서 그의 아버지 복야공(僕射公) 양어릉(楊於陵)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때의 좌객(座客)이었던 양여사(楊汝士)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천자 곁에서 문장으로 성가 빛낸 지 오래더니 / 文章舊價留鸞掖
이정에 도리의 그늘이 새롭구나 / 桃李新陰在鯉庭
오대(五代) 때에 마예손(馬裔孫)이 문생을 이끌고 와서 좌주(座主) 배고(裵皥)의 집에 가 뵈니, 배공(裵公)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세 번 시관(試官)을 맡았던 팔십 먹은 늙은이가 / 三主禮闈年八十
문생의 문하에서 문생 남을 보는구나 / 門生門下見門生
우리나라에서는 시관(試官)이 된 자를 학사(學士)라 부르는데, 그 문생이 그를 은문(恩門)이라 부른다.
문생과 좌주 사이의 예(禮)가 옛날보다 더욱 중하여져서, 학사의 아버지나 좌주가 살아 있으면 방방(放榜)한 다음에는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가서 뵙는데, 문생이 줄지어 수행(隨行)한다.
당도하여 학사가 문으로 나아가 절을 하면 문생은 그의 뒤에서 절을 하는데, 많은 빈객 가운데 비록 존장(尊長)일지라도 모두 마루에서 내려와 뜰에 서며, 예(禮)가 끝나기를 기다려 읍양(揖讓)하고서 올라가 차례대로 배하(拜賀)한다. 그리고 나서 학사가 자기집으로 맞이하여 잔을 올리고 오래 살기를 축수하는데, 이는 대개 양사복과 배고의 고사(故事)를 본받은 것이나, 예문(禮文)이 그보다 지나쳤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경신년(1320)에 내가 외람되게 고시관(考試官)이 되었을 적에 선군(先君)은 연세가 77이었고 대부인(大夫人)은 연세가 70으로 모두 강녕(康寧)하셨으며, 지금 국재『菊齋: 권보(權溥)의 호』 정승 권공(政丞權公)은 내가 등과(登科)할 적에 지공거(知貢擧)였고, 동지공거(同知貢擧)는 열헌『悅軒: 조간의 호, 조공(趙公) 이름은 간(簡)이다.』 이었으며, 성균시(成均試) 때의 시관(試官)은 상헌『常軒: 정선의 호) 정공(鄭公) 이름은 선(僐)이다.』 이었는데 세 분 좌주(座主)도 모두 건강하였었다.
이에 두루 찾아 뵙고서 초청(招請)하였는데, 나는 또 국재공의 사위였으므로 변국대부인(卞國大夫人)의 견여(肩與: 교자(轎子)도 왕림하니, 사람들이 과거(科擧)가 있은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다. 윤저헌(尹樗軒: 저헌은 윤혁의 호) 혁(奕) 이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잔치 벌여 세 좌주와 함께 즐기니 / 一宴共歡三座主
나란히 술잔 올려 어버이에게 축수하네 / 四觴齋壽兩家尊
앞뒤로 길 물리고 선관 옹위하여 오고 / 讓前讓後蟬冠擁
남쪽과 북쪽에서 봉개가 달려오네 / 迎北迎南鳳蓋奔
6년 뒤에 국재(菊齋)의 맏아들 정승(政丞) 길창군(吉昌君) 또한 지공거가 되었는데, 부모를 모시고 경축(慶祝)하는 자리에 형제와 생질(甥姪)과 사위들이 모두 고관 귀척(高官貴戚)이 되어 앞뒤에서 부옹(扶擁)하니, 광채가 길에까지 가득하였다.
윤공(尹公)이 또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성대한 일로 큰 거리 화려하게 꾸몄고 / 盛事粧成九街畫
아름다운 이야기로 온 장안이 밤가는 줄 모르네 / 美談挑盡萬家燈
사람 가운데 생불(生佛)이라 말하지 않는 이 없으니 / 無人不道人中佛
늙은 정승을 말함인가 젊은 정승을 말함인가 / 老政丞耶小政丞
당시의 일을 잘 묘사하였다.
선군(先君)은 3형제분이었는데, 조모(祖母) 김씨(金氏)의 성품이 근엄하시어 몸소 서사(書史)를 가르치셨으며, 백부(伯父)와 계부(季父)는 불행히 일찍 돌아가시고 선군만이 연세 80에 이르렀는데, 자질(子姪)들을 교양(敎養)하여 세업(世業)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백부의 아들은 내서사인(內書舍人) 전(槫)인데, 성균시(成均試)와 대과(大科)에 모두 장원(壯元)하였으며, 그 아우는 덕원목사(德原牧使) 규(樛)이다.
계부(季父: 아버지의 막내 동생)의 아들은 지금 첨의평리(僉議評理)인 천(蒨)인데, 나의 가형(家兄) 이암공(怡庵公) 및 나와 함께 모두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었으므로 민묵헌『閔黙軒: 묵헌은 민지(閔漬)의 호』이 선군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꽃봉오리 세 집에 다섯 장원 났으니 / 華萼三家五榜魁
사람들 모두 이백(李白)의 재주라 하네 / 人言皆是謫仙才
참으로 공의 적선(積善)에 짝할 이 없음을 알겠도다 / 知公積善眞無敵
해마다 그대만이 경축연을 여니 / 獨見年年慶席開
내서(內書)는 아들이 없고 덕원(德原)의 아들은 아직 급제(及第)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평리(評理)의 아들 달중(達中)ㆍ배중(培中)과 나의 둘째아들 달존(達尊)만이 등과(登科)하였는데, 달존은 학문(學文)을 좋아하여 자못 시배(時輩)의 추허(推許)를 받았었으나 30세도 못 되어 죽었다. 늘 후사(後嗣)의 어려움을 생각할 적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끝>
[註解]
[주01]양재(梁載) : 본디 원(元) 나라 연남(燕南)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歸化), 충숙왕의 총신(寵臣)인 왕삼석(王三錫)에게 아부하여 횡
포를 부렸으므로 당시에 미움을 받았으며, 뒤에는 조신경(曹莘卿)과 함께 인사권(人事權)을 잡고 정치를 농간하였던 간신이다.
[주02]도성(都城)에 …… 죽이누나 : 고려 의종(毅宗) 24년에 있었던 정 중부(鄭仲夫)의 난을 가리킨 것이다. 의종이 문무(文武)에 차별
을 두어 무신을 학대하였으므로 정중부 등이 보현원(普賢院)에서 난을 일으켜 문신을 죽이고 학대하였던 일을 말한다.
[주03]검은 구름이 …… 덮였는가 : 임금이 미행한다는 뜻. 한 고조(漢高祖)가 대업(大業)을 이루기 전에 망탕산(芒碭山)에 숨어 있었는
데, 그가 있는 곳에는 늘 검은 운기(雲氣)가 서려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04]왕자 진(王子晉) :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인데 피리를 잘 불었으며, 신선이 되어 갔다가 30여 년 만에 학을 타고 와 구씨산
(緱氏山)에 내렸다한다.
[주05]무함(巫咸) : 옛날 신무(神巫)인데 은 중종(殷中宗) 때에 하늘에서 내려왔다 한다. 《楚辭 離騷經 注》
[주06]초(楚)를 …… 있겠는가 :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돕는다는 뜻으로 씌었는데, 이 말은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상세
히 보인다.
[주07]한간(韓幹) : 당 현종(唐玄宗) 때 사람으로 인물화(人物畫)와 말의 그림을 잘 그렸다. 처음에는 조패(曹霸)를 사사(師事)하였으나
뒤에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독보적 존재가 되었으며, 옥화총(玉花驄)ㆍ조야백(照夜白) 등의 말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尙友
錄》
[주08]백락(伯樂) : 옛날 말의 상(相)을 잘 보던 사람으로 성(姓)은 손씨(孫氏)이고 이름은 양(陽)이다. 《韓昌黍集》 雜說 四에 “세상에
백락이 있은 뒤라야 천리마(千里馬)가 있다.” 하였다.
[주09]달수(獺髓)로도 …… 못 고치니 : 아무리 좋은 약으로도 시든 꽃잎을 되살릴 수 없다는 뜻. 달수는 수달의 뼈 속에 든 기름으로 생채
기를 낫게 하는 데 쓰이는 명약(名藥)이라 한다. 《拾遺記》
[주10]오릉공자(五陵公子) : 오릉은 한(漢) 나라 다섯 황제(皇帝)의 무덤으로, 곧 장릉(長陵 고제(高帝))ㆍ안릉(安陵 혜제(惠帝))ㆍ양릉
(陽陵 경제(景帝))ㆍ무릉(茂陵 무제(武帝)ㆍ평릉(平陵 소제(昭帝))인데, 이 무덤이 모두 장안(長安)에 있고 유협(遊俠) 소년들이
여기에 모여 놀았으므로 이들을 오릉공자라 불렀다.
[주11]점화(點化) : 종래의 것을 새롭게 고친다는 뜻으로, 전(轉)하여 전인(前人)의 시문(詩文)의 격식을 본따 더 새로운 기축(機軸)을 열
어 시문을 짓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12]이광(李廣) : 한(漢) 나라의 장군으로 문제(文帝) 때 흉노를 쳐서 공을 세웠고 무제(武帝) 때에는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있었는데,
흉노가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면서 두려워하였다. 뒤에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과 흉노를 치다가 길을 잃어 문책당하자 자살
하였다. 《漢書 卷54》
[주13]옥룡(玉龍) …… 같네 : 배꽃이 눈처럼 흩날려 떨어진다는 뜻. 옥룡은 나뭇가지에 눈이 쌓인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용으로 인용하
였으며, 양후(陽侯)는 물귀신의 이름이다.
[주14]동군(東君) : 봄을 맡은 신(神)이다.
[주15]백가의체(百家衣體) : 시체(詩體)의 하나로, 옛사람의 시구(詩句)를 모아서 시를 만드는 것이다.
[주16]이교(二喬) : 대교(大喬)와 소교(小喬)로, 대교는 손책(孫策)의 아내이고 소교는 주유(周瑜)의 아내이다.
[주17]한 포승으로 …… 떠나가니 : 초왕은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가리킨다. 범려(范蠡)가 힘을 다하여 구천(句踐)과 함께 회계산(會
稽山)의 수치를 씻고, 표연히 강호(江湖)로 떠나갔다 한다. 《史記 卷129》
[주18]곽분양(郭汾陽) : 분양은 곽자의(郭子儀)의 봉호(封號). 당 현종(唐玄宗) 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안록산(安祿山)ㆍ사사명
(史思明)의 난을 평정하였고, 회흘(回紇)과 손잡고 토번(吐蕃)을 정벌하였다.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분양군왕(汾陽郡
王)에 봉하여졌다. 《唐書 卷137》
[주19]도화부인(桃花夫人) : 식후(息侯)의 부인인 식위(息嬀)를 말한다. 식위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는데, 채 애후(蔡哀侯)의 충동
에 의하여 초왕(楚王)이 식 나라를 멸망시키고 식위를 빼앗았다. 식위는 초왕과 살면서 도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으나 말을
않고 살므로 초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하였을망정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左傳 莊公 14年》
[주20]금곡원(金谷園) …… 가련쿠나 : 석숭(石崇)의 애첩 녹주(綠珠)가 식위(息嬀)보다 훌륭하다는 뜻. 석숭은 진(晉) 나라 사람으로 형
주 자사(荊州刺史)를 지냈고 또한 큰 부자였는데, 애첩 녹주 때문에 잡혀가게 되자 금곡원에서 마지막 연회를 베풀고서 이 사실을
녹주에게 말하니 녹주는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누대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晉書 卷33》
[주21]중씨(仲氏)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형을 말한다. 처음 고조가 가업(家業)을 돌보지 않자 고조의 아버지가 형만 못하다고
나무랐었는데, 뒤에 고조가 왕업(王業)을 이루고 미앙궁(未央宮)을 지은 뒤 아버지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오늘 내가 이룬 업(業)이
형과 비겨 어떻습니까?” 하였는데, 여기서 인용한 말이다. 《史記 高祖本紀》
[주22]대풍시(大風詩) : 이는 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고향인 패군(沛郡)에 돌아가 크게 잔치를 베풀면서 읊은 시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큰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나는도다. 위엄이 천하를 뒤흔듦이여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해야 용맹한 사
람을 얻어 사방을 지킬 수 있을까" 《史記 高祖本紀》
[주23]한신(韓信) : 이는 회음후(淮陰侯) 한신이 아니라 한 양왕(漢襄王)의 얼손(孼孫)으로 한(漢)에 귀의한 사람인데, 뒤에 흉노에게 항
복하여 한 나라를 배반하였으므로 고조가 장군 시무(柴武)를 보내어 쳐죽였다. 《史記 卷93》
[주24]호증(胡曾) : 당 나라 사람으로 글에 능하였다. 함통(咸通) 연간에는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의 서기(書記)로 있다가 뒤에 고병(高
騈)에게 발탁되었는데, 모든 전주(箋奏)가 그의 손에 의하여 지어졌으며 저서로는 영사시(詠史詩)ㆍ《안정집(安定集)》 등이 있다.
《尙友錄 卷3》
[주25]폐읍(弊邑)을 …… 돌려주었고 : 우리나라의 경계를 침범하지 말라는 뜻. 폐읍은 노(魯) 나라를 가리키는데, 제후(齊侯)가 노 나라
의 북변(北邊)을 쳐 빼앗았던 문양(汶陽)을 되돌려준 일을 말한다. 《左傳 成公 2年》
[주26]창신(昌辰)에 …… 주었습니다 :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인 장사정왕 발(長沙定王發)이 경제의 탄신일에 조하(朝賀)하러 왔을 적
에 술잔을 올리고 춤을 추게 되었는데, 발은 옷소매만 길게 하였을 뿐 손을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신의 봉국(封國)은
너무 협소하여 마음대로 선회(旋廻)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제(帝)가 무릉(武陵)ㆍ영릉(零陵)ㆍ계양(桂陽) 등지를 예
속시켜 주었다. 《史記 五宗世家 卷59》
[주27]조수(曹隨)의 공 : 전임자(前任者)의 법규를 그대로 준수하여 성사(成事)시키는 것. 한(漢) 나라 때 소하(蕭何)를 이어 조참(曹參)
이 정승이 되었으나 조참은 소하가 세운 법규를 고치지 않고 준행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28]외시(隗始)의 은혜 : 자신을 알아준 은혜. 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현사(賢士) 맞아들이는 방법을 물으니, 곽외(郭隗)가 “변변
찮은 저부터 등용하시면, 저보다 훌륭한 사람은 부르지 않아도 절로 올 것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9]이정(鯉庭)에 …… 새롭구나 : 훌륭한 문생(門生)이 많다는 뜻. 이정은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는 장소를 가리키는데 공자(孔子)가
그의 아들 공리(孔鯉)를 훈계한 데서 온 말. 《論語 季氏》 여기서는 좌주(座主)를 가리키고, 도리(桃李)는 문생을 말한다.
[주30]좌주(座主) : 급제자가 시관(試官)을 일컫는 말로, 평생 문생(門生)의 예를 다하였다. 은문(恩門).
[주31]선관(蟬冠) : 매미 날개로 꾸민 관(冠)으로 품질(品秩)이 높은 조관(朝官)을 말한다.
[주D-032]봉개(鳳蓋) : 천개(天蓋)가 달린 수레로 고관(高官)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김신호 (공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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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집 습유
시ㆍ서ㆍ서ㆍ의(詩書序議)
익재집 습유
시ㆍ서ㆍ서ㆍ의(詩書序議) 8편
1 공북루(拱北樓) 응제시(應製詩)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인다.
2 정동성(征東省)에 올리는 글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3 도당(都堂)에 올리는 글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보인다. 역사(歷史)를 편찬하는 자가 너무 요약하였기 때문에 문장의 위아래가 잘 연
관되어 지지 않는다. 다음에 있는 글도 같다.
4 경성(京城)을 수축(修築)하는 일로 왕이 대신(大臣)을 방문(訪問)할 때에 올린 글 《동국 통감》에 보인다.
5 설곡시 서(雪谷詩序)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6 효행록서(孝行錄序) 《효행록(孝行錄)》에 보인다.
7 우정승(右政丞)으로 정동성사(征東省事)를 권단(權斷)하게 하는 것을 사양하는 글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8 종묘(宗廟) 소목(昭穆)의 위차(位次)에 대한 상의(上議)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공북루(拱北樓) 응제시(應製詩)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인다.
나라 남쪽 지방 살피던 날 / 省方南國日
북루에서 처음 표를 올렸네 / 拜表北樓初
술잔 앞에 호탕한 흥이 일어 / 浩蕩尊前興
생각나는 대로 붓 놀려 글을 쓰네 / 縱橫筆下書
바람 높은데 기러기 물따라 날고 / 風高雁遵渚
구름 맑은데 학 허공에 솟았네 / 雲淨鶴沖虛
내 이제 늙고 병들었으니 / 老矣今多病
임금님의 은혜 보답 못함이 부끄럽네 / 懽恩負倡予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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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성(征東省)에 올리는 글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고려국(高麗國)의 기로(耆老) 중관(衆官)은 삼가 목욕 재계하고 정동성의 여러 상국(相國) 집사(執事)에게 올립니다.
조정(朝廷: 원 나라를 가리킨다)의 사신(使臣) 타적(朶赤) 등이 삼가 ‘교천제(郊天祭)를 지내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한다.’는 덕음(德音)을 받들고 왕경(王京: 우리나라 서울)에 왔으므로, 우리 보탑실리왕『寶塔實里王: 충혜왕(忠惠王)의 몽고(蒙古) 이름』이 관료(官僚)를 이끌고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城) 밖에 나아가 영접(迎接), 본성(本省: 정동성을 가리킨다)에 들어가 조서(詔書)를 듣고 나자, 사신 등이 나와서 왕을 잡아 말에 태워 돌아갔습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그 자리에 있었던 배신(陪臣)들이 몸 둘 곳이 없었던 것이야 다시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하건대 왕(王)이 나이 어리고 일을 경험해 보지 않아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은 것입니다만, 그 본뜻을 살펴보면 역시 딴 마음이 있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天日]이 굽어 살피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우리나라의 시조(始祖) 왕씨(王氏)가 바다 모퉁이에 개국(開國)한 지 4백 28년이요.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온 지 28세이며, 송(宋)ㆍ요(遼)ㆍ금(金)을 거쳐오면서도 사신(使臣)을 통하여 견제만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 성무황제(聖武皇帝: 성길사한(成吉思汗)께서 왕업(王業)을 일으킬 때에, 금산왕자(金山王子)란 자가 중원(中原)의 백성들을 몰아내고 약탈하면서 망한 요(遼)의 왕업을 회복하려 꾀하였으나, 형세가 궁하여지자 동쪽으로 도망쳐와 도서(島嶼)에서 멋대로 날뛰었으므로, 태조께서 합진(哈眞)ㆍ찰랄(扎剌) 두 장수를 명하여 토죄(討罪)하게 하였는데, 날씨가 춥고 눈이 쌓여 군량(軍糧)을 대지 못하게 되자, 우리 충헌왕(忠憲王)이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 등을 보내어 병력과 군량을 도왔으므로 일거에 적을 깨뜨렸습니다.
이리하여 두 나라가 동맹(同盟)하기를 ‘만세 자손에 이르기까지 오늘을 잊지 말자.’ 하고, 인하여 사로잡은 포로를 나누는 것으로 믿음을 삼았으니, 지금 우리나라에 거란장(契丹場)이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세조(世祖) 문무황제(文武皇帝) 홀필렬(忽必烈)께서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사열할 적에 아리발가(阿里孛哥)가 막북(漠北)에서 변란을 선동하였으므로, 제후(諸侯)들이 의아심을 품고 각각 거취(去就)에 대하여 생각하였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충경왕(忠敬王)은 당시 세자(世子)로 있으면서도 고초를 무릅쓰고 곧바로 변량(汴梁)에 이르러 길에서 맞이하니, 세조께서 바라보시고는 놀라고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고려는 아득히 먼 나라이다. 내가 북으로 돌아가 장차 대통(大統)을 이으려 하는데, 저들의 세자가 스스로 와서 귀부(歸附)하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다.”하였습니다. 충경왕(忠敬王)이 국정(國政)을 맡고 나자 배신(陪臣) 임유무(林惟茂) 부자(父子)가 속국이 되기를 즐겨하지 않고 마음대로 왕(王)을 폐립(廢立)하면서 강화도(江華島)에서 군사로 항거하였습니다.
세자 충렬왕이 조정(朝廷: 원 나라이다)에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니, 세조께서 격노하시어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복위(復位)시키라.’ 하였으므로 역마를 타고 입근(入覲)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충경왕 및 세자 충렬왕은 군사를 이끌고 동으로 돌아와 역적(逆賊)의 무리를 사로잡아 죽이고, 강화도를 버리고 육지로 돌아와서 일편단심으로 공직(供職)하였습니다.
충렬왕 때에 세조(世祖)께서 두 번 일본(日本)을 정벌하였는데, 이때에도 왕이 김방경(金方慶) 등을 보내어 전함(戰艦)을 수리하게 하는 한편 늘 선봉(先鋒)이 되게 하였으며, 또 내안(乃顔)의 무리 합단(哈丹)이 수달달(水達達)ㆍ여진(女眞)의 지역을 쳐서 함락시키고 우리나라의 국경까지 침범하여와 천위(天威)에 항거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맞아 공격하여 한 대의 수레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말년에 익지례불화왕『益知禮不花王: 충선왕(忠宣王)』이 인종황제(仁宗皇帝)를 도와 난을 평정하여 궁중을 깨끗이 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맞아들였으므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으니, 이렇게 본다면 왕씨(王氏)가 조정에 충성을 바쳐온 지 오랩니다.
또 생각하건대, 세조황제께서 홀독겁미사공주『忽篤㤼迷思公主: 장목 왕후(莊穆王后)의 몽고(蒙古) 이름』를 충렬왕(忠烈王)에게 시집보내셨는데, 이 분이 익지례불화왕을 낳았고, 익지례불화왕이 아납특실리왕『阿納忒室利王: 충숙왕(忠肅王) 』을 낳았고, 아납특실리왕이 보탑실리왕『寶塔實里王: 충혜왕(忠惠王)』을 낳았으니, 보탑실리왕은 비록 소원(疏遠)하다고는 하나 세조황제에게 대하여는 실로 골육의 친분이 있는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황후(皇后) 기씨(奇氏)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위로 지존(至尊)의 배필이 되었으며, 황태자(皇太子)를 낳아 기름으로써 천하가 기꺼이 의뢰할 바가 있게 하였으니, 조정(朝廷)에서 우리나라를 대우함에 있어 응당 여러 번방(蕃邦)과 동등하게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일본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포상을 받으면 저들은 귀화(歸化)가 더디었음을 부끄러워할 것이나, 우리가 죄를 받으면 저들은 집미(執迷)의 고루함을 달게 여기게 될 것이니, 이는 형세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주(周) 나라에서는 위후(衛侯) 간(衎)을 잡았다가 마침내는 다시 복위(復位)시켜 주었고, 한(漢) 나라에서는 양왕(梁王) 무(武)를 불러들였다가 역시 양(梁)으로 돌려보낸 것은 이로써 왕자(王者)의 큰 도량을 보이기 위하여서였는데, 하물며 우리 조정은 열성(列聖) 이래로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주 나라나 한 나라보다 만 배나 더함이리까!
이제 친히 남교(南郊)에서 교천제(郊天祭)를 지냄으로써 조종(祖宗)을 높여 하늘과 짝하게 하는 큰 예를 이미 이루었고 덕음(德音)을 널리 반포하였으므로, 밖으로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춤추면서 환호하는데, 진실로 한 사람이라도 그 은택을 받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삼가 성천자(聖天子)께서는 과오(過誤)를 범한 것은 아무리 커도 용서하신다는 인자함을 베푸셔서 생각을 한 번 돌리시어, 우리 보탑실리왕으로 하여금 죄의 그물에서 벗어나 끝없는 은택에 젖게 하시고, 또 왕씨(王氏)의 군신(君臣)과 사직(社稷)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바꾸지 않게 하고, 의관(衣冠)과 풍속(風俗)을 아울러 그 제도대로 하게 함으로써 산해(山海)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구업(舊業)의 편안함을 얻게 하여 주신다면, 태조(太祖)ㆍ세조(世祖)께서 저의 나라를 불쌍하게 여겨 돌보시던 뜻이 어찌 더욱 밝아지지 않겠으며, 세조께서 공주(公主)를 시집보내시어 자손(子孫)을 낳게 하심으로써 먼 나라의 마음을 매어 두던 그 규모(規模)가 어찌 더욱 원대하지 않겠으며, 황후가 황태자를 낳아 기름으로써 천하가 기꺼이 의뢰할 바가 있었던 것이 어찌 더욱 위대하여지지 않겠으며, 우리나라가 황제께 충성을 다 바쳐 적과 싸우려는 뜻이 어찌 더욱 굳건하여지지 않겠으며, 굴복하지 않던 일본(日本) 백성이 집미(執迷)함을 고쳐 즐겨 귀화(歸化)하려는 그 뜻이 어찌 더욱 도탑지 않겠으며, 4백 26년 28세(世) 동안 제사받아 오던 귀신이 어찌 더욱 감동하지 않겠으며, 조정(朝廷)에서 과오로 범한 죄는 아무리 커도 용서한다는 관용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어찌 더욱 천하 후세에 전파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집사(執事)께서는 비천하고 무식한 자의 말을 굽어 살피시어, 황제(皇帝)께 주달(奏達)하여 주십시오. <끝>
[註解]
[주01]거란장(契丹場) : 거란 사람 포로들의 집단 수용지(收容地). 고려 고종(高宗) 6년(1219)에 장군 김취려(金就礪) 등이 거란족의 강
동성(江東城)을 함락시키고 항복한 군졸 5만여 명을 거두어 국내의 여러 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던 곳이다.
[주02]임유무(林惟茂)……폐립(廢立) : 임유무는 권신(權臣) 임연(林衍)의 아들인데, 이들 부자는 환관(宦官) 최은(崔)ㆍ김경(金鏡) 등
을 제거하고, 개경(開京)으로 환도하려는 원종(元宗)을 폐하고 안경공 창(安慶公淐)을 즉위시켰는데, 당시 세자로 있던 충렬왕(忠
烈王)이 이 사실을 원 세조(元世祖)에게 고함으로써 몽고의 압력에 따라 원종은 복위되고 임연은 병사하고 임유무와 그 일족은 몽고
로 잡혀갔다.
[주03]주(周) 나라에서는……복위(復位) : 위후(衛侯) 간(衎)은 위 헌공(衛獻公)을 말한다. 사조(師曹) 때문에 손임보(孫林父)의 공격을
받아 쫓겨났었으나, 12년 만에 진(晉) 나라가 주실(周室)의 명(命)을 표방하여 복위(復位)시켜 주었다. 《史記 卷37 褒康叔世家》
[주04]한(漢) 나라에서는……돌려보낸 것 : 양왕(梁王) 무(武)는 한 문제(漢文帝)의 제 3자인 유무(劉武)이다. 문제(文帝)가 교동왕(膠
東王)을 태자(太子)로 삼자 양왕 무가 이 때문에 원앙(袁盎) 등을 없앨 것을 모의, 자객(刺客)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제
의 노여움을 샀으나 양왕이 궐하(闕下)에 나아가 사죄하였으므로 드디어 풀려났는데, 이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漢書 卷47》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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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都堂)에 올리는 글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보인다.
역사(歷史)를 편찬하는 자가 너무 요약하였기 때문에 문장의 위아래가 잘 연관되어 지지 않는다. 다음에 있는 글도 같다.
지금 우리 국왕께서는 옛날 원자(元子)가 입학하던 때의 나이로 천자(天子)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조종(祖宗)의 중대한 왕업을 이었습니다만, 전왕(前王)이 전복된 뒤를 당하였으니 공경하고 삼가서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경하고 삼가는 실상은 덕(德)을 닦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덕을 닦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학문을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좨주(祭酒) 전숙몽(田淑蒙)이 이미 사부(師傅)가 되었으니, 다시 어진 선비 2~3인을 가려서 숙몽과 함께 《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을 강(講)하게 하여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도를 익히게 하고, 진신(縉紳)의 자제들 가운데 정직하고 근후(謹厚)하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예(禮)를 사랑하는 자 10명쯤을 선발, 시학(侍學)으로 삼아 좌우에서 보도(輔導)하게 하여, 사서(四書)를 익히고 나서는 육경(六經)을 차례로 강명(講明)하게 함으로써, 교사(驕奢)와 음일(淫泆)과 성색(聲色)과 구마(狗馬 애완물과 놀이를 말한다)를 눈과 귀에 접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리하여 습관이 성품과 함께 완성되면 덕으로 나아감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더없이 급한 당무(當務)인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한 몸과 같은 것인데, 머리와 팔다리가 친부(親附)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재상(宰相)은 연회(宴會)가 아니면 만나지 못하고 특별히 부르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입니까. 청컨대, 날마다 편전(便殿)에 나와 앉아서 늘 재상들과 함께 정사(政事)를 의논하여야 하지만, 혹 날을 나누어 진대(進對)하게 하는 것도 가하니, 비록 일이 없더라도 이 예(禮)를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대신(大臣)과는 날로 소원(疏遠)하여지고 환시(宦侍)와는 날로 친닐(親昵)하여져, 백성의 휴척(休戚)과 종사의 안위(安危)에 대하여 상달(上達)할 길이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정방(政房)의 명칭은 권신(權臣)이 세도를 부리던 때에 만들어진 것이요,
옛제도가 아닙니다. 마땅히 정방을 혁파하여 전리군부(典理軍簿)에 귀속시키고, 고공사(考功司)를 설치하여 공과(功過)를 표시함으로써 그 재능의 현부(賢否)를 논하게 할 것이며, 매년 6월과 12월에 도목(都目)을 실시하게 하고 정안(政案)을 상고하여 이로써 출척(黜陟)하되 길이 항규(恒規)로 삼는다면, 청알(請謁)하는 무리를 근절시키고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그대로 답습하면서 옛 제도를 회복시키지 않는다면, 장차 양장(梁將)ㆍ조윤(祖倫)ㆍ박인수(朴仁壽)ㆍ고겸지(高謙之) 같은 무리가 떼지어 일어나 흑책(黑冊)의 비방을 막을 수 없게 될까 매우 염려됩니다. 응방(鷹坊)ㆍ내승(內乘)은 백성을 더욱 괴롭히는 것이므로 전에 이미 영(令)을 내려 혁파(革罷)하게 하였습니다만, 뒤에 다시 시일을 미루면서 지체하므로 중외(中外)가 실망하였는데, 고용보(高龍普)가 원(元)의 명을 받고 나아 와서 견책(見責)하기까지 하였으니, 마음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덕령고(德寧庫)ㆍ보흥고(寶興庫) 등 무릇 옛 제도가 아닌 것은 일체 개혁(改革)하여야, 길이 성지(聖旨)의 백성 돌보는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사(刺史)ㆍ수령(守令)이 적격자이면 백성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이며, 적격자가 아니면 백성이 그 피해를 입게 됩니다.
관계(官階)가 높은 사람을 낮추어 제수하면 교만하여 법을 준수하지 않게 되고, 나이가 많아 벼슬을 얻은 사람은 혼미하고 나태하여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며, 혹 청알(請謁)에 의하여 한미(寒微)한 데서 일어나 금어(金魚)를 찬 자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청컨대, 옛제도처럼 조사(朝士)에 입참(入參)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감무(監務)ㆍ현령(縣令)을 거쳐야 하고, 4품(品)에 이른 뒤에는 으레 목수(牧守)에 임명하여 감찰사(監察使)ㆍ안렴사(按廉使)로 하여금 반드시 포폄(褒貶)을 행하게 하고 포폄에 따라 상벌(賞罰)을 시행해야 합니다.
이른바 관계가 높은 자와 나이가 많은 자와 청알에 의하여 한미한 데서 일어난 자에게는, 부득이한 경우이면 차라리 경관(京官)을 제수할지언정 백성을 가까이 하는 직임(職任)은 제수하지 말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20년만 행한다면, 유망(流亡)한 백성이 돌아오지 않거나 공부(貢賦)가 부족할 리가 없습니다.
금은(金銀)ㆍ금수(錦繡)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으므로, 전에는 공경(公卿)들도 피복(被服)은 소단자(素段子)와 주포(紬布)만을 사용하였으며, 기명(器皿)은 유동(鍮銅)과 자와(瓷瓦)만을 사용하였었습니다.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께서도 옷 한 벌 짓는 데 드는 값을 물어보시고는 값이 비싸자 철회하고 짓지 않으셨으며, 의릉(毅陵)께서는 일찍이 금으로 수놓은 옷과 새 깃을 꽂은 갓은 우리 조종(祖宗)의 구법(舊法)이 아니라고 전왕(前王)을 책하셨었으니, 이로써 국가가 4백여 년 동안 능히 사직(社稷)을 보전하여 온 것이 검소한 덕을 숭상한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의 풍속은 사치(奢侈)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으니, 백성이 곤궁하여지고 국용(國用)이 고갈된 것은 오로지 이에 연유된 것입니다. 청컨대, 재상(宰相)들은 이 뒤로 비단으로 옷을 짓거나 금옥(金玉)으로 그릇을 만들지 말 것이며, 또 현복(袨服)을 입고 말탄 자로 하여금 앞뒤를 옹위(擁衛)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각각 검약을 힘쓸 것이며, 따라서 위로는 임금을 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감화시킨다면 풍속이 순후(淳厚)하여질 것입니다.
전자에 각박하게 거두어들인 징포(徵布)는 각각 바친 자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리(官吏)들이 이를 인연하여 간사를 부리게 되면 힘없는 백성이 그 실혜(實惠)를 받지 못할까 염려스러우니, 제사(諸司)에 나누어 주어 내년의 잡공(雜貢)에 충당(充當)시킴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빚을 지면서 미리 바쳐야 하는 폐단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행성(行省)에서도 이미 이문(移文 공문(公文))이 있었으니, 일찍 시행하여야 합니다.
3식읍(食邑)을 설립한 뒤로 백관(百官)의 봉록(俸祿)을 제대로 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대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군신(群臣)의 양렴(養廉)을 위한 자본(資本)을 빼앗아 사사 창고에 채운다면, 어찌 후세의 기롱을 받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양궁(兩宮)께 상문(上聞)하여 식읍을 파하시어 광흥창(廣興倉)에 환속(還俗)시킴으로써 봉록에 충당하게 하소서....
경기(京畿)의 전지(田地)는 조업전(租業田)ㆍ구분전(口分田)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급(折給)하여 녹과전(祿科田)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행하여 온 지 근 50년이었는데, 근래는 권세가(權勢家)가 거의 다 빼앗아 점유(占有)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자주 개혁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그 때마다 위언(危言)으로 상청(上聽)을 속였으므로 끝내 행하여지지 않았습니다만, 이는 대신이 고집(固執)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과감하게 개혁한다면, 기뻐할 사람은 매우 많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권세가 수십 명에 불과할 따름인데, 무엇을 꺼려 과감하게 개혁하지 않습니까. 주군(州郡)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공부(貢賦)를 유사(有司)가 온갖 계교를 다 써서 박징(迫徵)하였지만, 결국 10분의 1도 받아내지 못하고 원망만 살 뿐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영(令)을 내리시어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3년 이전의 못받아들인 공부는 일체 면제하게 하소서....
또 이에 앞서 수년간 가혹한 징수(徵收) 때문에 전매(典賣 저당잡혔거나 팔린 것)된 남녀(男女)에 대하여서는, 제도(諸道)의 존무사(存撫使)ㆍ안렴사(按廉使)로 하여금 방(榜)을 붙여 서울에 와서 스스로 고발하도록 허가하여, 고발한 자에 대하여는 관재(官財)를 지급하여 속환(贖還)하게 할 것이며, 산[買] 사람 또한 자수(自首)하도록 하되 만약 자수하지 않고 있다가 뒤에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는 값을 지불하지 않고 강제로 그 부모에게 돌려주도록 할 것이며, 매우 심한 자는 죄로 다스리소서. <끝>
[註解]
[주01]정방(政房) : 고려 때 정무(政務)를 행하던 곳. 고종(高宗) 12년에 최이(崔怡)가 처음으로 설치한 사설 정치기관(政治機關)인데,
무인(武人)의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그대로 행정기구(行政機構) 안에 흡수되어 전주(銓注)를 맡고 있었다.
[주02]도목(都目) : 벼슬아치의 근무 성적이 좋고 나쁨에 따라서 벼슬자리를 떼어 버리거나 더 좋은 데로 올리거나 하던 일. 도목정사(都目
政事).
[주03]정안(政案) : 이부(吏部)나 병부(兵部)에서 각기 문관ㆍ무관의 출신(出身)한 연월(年月)의 차례와 직무(職務)의 험이(險夷)를 나
누어 놓은 것, 재직(在職)할 때의 잘하고 못한 것을 표시한 것, 그 자리에 적합하고 못 한 것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전주(銓注)에 참
고하던 문부(文簿).
[주04]흑책(黑冊)의 비방 : 고려 충숙왕(忠肅王) 16년에 정방(政房)에서 재가(裁可)를 얻어 내려온 정목(政目)을 용사자(用事者)들이 서
로 다투어 지우고 다시 쓰는 등 시꺼멓게 개칠(改漆)을 하여 알아 볼 수 없게 만든 것을 말한다. 흑책정사(黑冊政事).
[주05]응방(鷹坊)ㆍ내승(內乘) : 응방은 매를 길러 궁중의 수렵에 제공하던 곳이고, 내승은 고려 말엽에 승여(乘輿)를 맡은 곳으로 사복시
(司僕寺) 외에 궁중에 따로 두었다.
[주06]금어(金魚) : 고기 모양으로 만든 금빛 주머니인데, 고려 때에 4품 이상의 벼슬아치와 특사(特賜)받은 사람만 사용했다.
[주07]현복(袨服) : 성장(盛裝)할 때에 입는 잘 꾸민 검은 옷을 말한다.
[주08]양렴(養廉) : 관리의 청렴을 기르기 위하여 봉급(俸給) 외에 급여하던 수당을 말한다.
[주09]녹과전(祿科田) : 고려 고종(高宗) 44년부터 모든 관리들에게 녹봉 대신으로 준 전지인데, 병란(兵亂)으로 국고(國庫)가 고갈되어
생긴 제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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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을 수축(修築)하는 일로 왕이 대신(大臣)을 방문(訪問)할 때에 올린 글 《동국 통감》에 보인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동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쳐서 삼국(三國)을 통일하여 하나로 만든 뒤 7년 만에 훙(薨)하였습니다. 그때 피폐한 백성을 동원하여 토목(土木)의 역사(役使)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송경(松京)에 성(城)을 쌓지 않은 것은,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형세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왕『顯王: 현종(顯宗)』 초기에 이르러 거란(契丹)이 서울을 유린하고 궁실(宮室)을 불살랐는데, 당시에 만약 굳건한 성곽(城郭)을 쌓았더라면 거란이 반드시 이처럼 쉽사리 극심하게 유린하거나 불사르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현왕 20년에 비로소 이가도(李可道)를 명하여 개경(開京)에 성곽을 쌓게 하였는데, 그 뒤 금산왕자(金山王子)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서해도(西海道)ㆍ충청도(忠淸道)와 사평진(沙平津) 이북에는 가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고(餘古) 차나대(車羅大)가 황교(黃橋)에 둔병(屯兵)하였었으면서도 서울에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은 성곽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성곽을 수축하여야 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이 의논이 결정되었으니, 비록 음양(陰陽)에 꺼리는 바가 있더라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은 뒤라야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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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곡시 서(雪谷詩序)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설곡(雪谷) 정중부(鄭仲孚)는 최춘헌『崔春軒: 춘헌은 최문도(崔文度)의 호』의 사위인데, 최졸옹『崔拙翁: 졸옹은 최해(崔瀣)의 호』에게 수학(受學)하였다. 졸옹은 원래 사람을 추허(推許)하는 예가 적었으며, 춘헌은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서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매양 나를 대하면 중부(仲孚)의 훌륭함을 칭찬하였으므로 내가 이에 그 사람됨을 알게 되었다.
중부는 처음 벼슬하여 사한(史翰)을 역임한 지 10년도 못되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배(除拜)되었으며, 나아가 울주(蔚州)를 다스릴 적에는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으므로 그가 떠날 때는 백성들이 어린이는 이끌고 노인은 부축하여 나와서 울며 끌어당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라의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 원 나라의 서울)에 갔을 적에는 승상(丞相) 별가보화공(別哥普化公)에게 중히 여김을 받아 공(公)이 천자에게 추천하려 하였으나, 중부는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들 추(樞)가 영구(靈柩)를 받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니, 이 사실을 들은 자는 놀라고 애석해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아, 옛날에 재주가 있으면서도 오래 살지 못한 사람으로는 당(唐) 나라의 이장길(李長吉)과 송(宋) 나라의 형돈(邢敦)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 역시 백성에게 사랑을 받았고 대인(大人)에게 중히 여김을 받았기는 하지만, 우리 중부(仲孚)같기야 하였겠는가!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중부의 불행에 대하여 놀라고 애석해 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
그가 저술한 시(詩)와 문(文) 약간 편이 있는데, 추(樞)가 엮어 전후집(前後集) 두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을 보니 처연한 마음이 일어 되풀이 해서 읽었으며, 인하여 그 끝에 졸어(拙語) 몇 마디 써서 정씨(鄭氏)에게 돌려보낸다. 추(樞)는 지금 도관낭중(都官郞中)으로 있는데, 실은 나의 문생(門生)이다.
[註解]
[주01]이장길(李長吉) : 당(唐) 나라의 종실(宗室)인 이하(李賀)를 말하는데, 장길은 그의 자(字)이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문체(文
體)가 숭엄(崇嚴)하였는데, 벼슬은 협률랑(協律郞)을 지냈다. 《唐書 卷203》
[주02]형돈(刑敦) : 송(宋) 나라 사람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때에 진사(進士)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나서
옹구(雍丘)에 은둔하여 살았다. 성품이 정직하고 경사(經史)를 즐겨하였으며, 회화(繪畫)에도 능하였다. 《宋史 卷457》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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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록서(孝行錄序) 《효행록(孝行錄)》에 보인다.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공『權公 이름은 준(準)』이 일찍이 공인(工人)을 시켜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를 그리게 하였는데, 내가 그 그림에 찬(贊)을 썼으며 사람들이 자못 널리 전하였다. 이윽고 부원군이 그림과 찬을 국재국로『菊齋國老: 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에게 바치니, 국재가 또 손수 서른 여덟 가지 일을 초(抄)하여 나에게 그 찬을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전후로 지은 찬이 모두 예순 네 가지 일이었는데, 우구자(虞丘子)에다가 자로(子路)의 효행을 붙이고 왕연(王延)에다가 황향(黃香)의 일을 붙였으므로 장(章)으로는 62장이 된다. 그 사어(辭語)가 저속함을 면하지 못한 것은, 대개 전야(田野)의 백성들도 모두 쉽게 읽어 다 알기를 바라서였으나, 이를 본 문사(文士)들은 이를 가리켜 조치부『調蚩符: 조치는 2부(符)의 이름이다.』 동파(東坡)가 옥여동(玉女洞)의 약수(藥水)를 즐겨 마셨다.
심부름하는 사람이 속일까 염려하여, 대나무를 쪼개 좌계(左契)를 만들어 한쪽은 절의 중에게 보관시켜 신표로 삼게 하였는데, 이를 조수부(調水符)라고 한다. 또 송 경문(宋景文 : 경문은 송기〈宋祁〉의 시호)이 삼천관용동시(三泉觀龍洞詩)를 지었는데, 뒤에 임 마조(任馬漕)가 이를 석각(石刻)하고 탁본(拓本)하여 바쳤더니, 경문이 “근세에 글은 보잘것 없으면서 석각하기 좋아하는 것을 세상에서 치냉부(蚩冷符)라 한다.” 하였다.
치냉(蚩冷)이란 곧 산충전(山虫篆)이다. 라고 하지 않은 자 드물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국재공은 85세이고 길창공(吉昌公)은 66세인데도, 아침 저녁으로 문후(問候)하고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봉양함으로써 국재공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이 또한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아롱이옷을 입고 어린애 유희를 한 효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장차 대서 특필(大書特筆)로 다시 권씨(權氏)의 효행(孝行)을 위하여 1장(章)의 찬을 쓴 다음에야 그만두리라.
지정(至正) 6년 5월 초길(初吉)에 익재거사(益齋居士) 이제현(李齊賢)은 서(序)한다.
[註解]
[주01]우구자(虞丘子)에다가 자로(子路) 우구자는 춘추 시대(春秋時代) 초(楚) 나라의 영윤(令尹)이었는데, 손숙오(孫叔敖)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장왕(莊王)에게 천거하여 자신의 직(職)을 대신하게 하였다. 자로는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인 중유(仲由)인데, 공자
의 제자이다. 《孔子家語》에 “자로(子路)는 일찍이 ‘옛날 내가 어버이를 섬길 적에 늘 여지 열매를 먹으면서 1백 리 밖에 가서 쌀을
져다가 봉양하였다.’ 했다.” 하였다.
[주02]왕연(王延)에다가 황향(黃香) : 왕연은 전조(前趙) 때의 효자로 9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고
제삿날을 당하면 열흘 이상을 슬피 울었다. 계모(繼母)가 몹시 학대하였으나 학대할수록 더욱 정성을 다하여 섬겼으므로, 마침내 감
동하여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여겼다.《晉書 卷80》
황향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9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정성껏 아버지를 봉양하였는데, 여름에는 베갯머리에서 부채질을 하였고 겨울
에는 자기의 몸으로 아버지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불을 미리 따뜻하게 하였다. 《後漢書 卷110》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우정승(右政丞)으로 정동성사(征東省事)를 권단(權斷)하게 하는 것을 사양하는 글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삼가 성지(聖旨)를 듣건대, 국왕(國王)과 승상(丞相)이 동시에 수명(受命)하였다 하니, 위로는 경덕부(慶德府)에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춤추면서 기뻐함을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또 왕지(王旨)를 받드니,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긴요한 국무(國務)를 담당한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를 들은 자들은 다시 살려주는 은혜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 신은 재주가 없고 나이가 많아서 만사(萬事)를 처리함에 있어 남만 못한데, 갑자기 중명(重命)을 받들매 권성정승(權省政丞)으로 임명한다 하니 나의 감격한 마음을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직임(職任)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몸둘 바 없사옵니다.
오직 바라건대, 인보(印寶)가 이미 이르렀습니다만, 현능(賢能)한 사람을 초선(抄選)하여 서관(庶官)에 임명할 것으로 조속히 새로운 명을 내리소서.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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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 소목(昭穆)의 위차(位次)에 대한 상의(上議)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삼가 상고하건대, 종묘(宗廟)의 제도(制度)는 천자(天子)는 칠묘(七廟)이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이며, 태조(太祖)는 백세(百世)토록 조천(祧遷)하지 않습니다.
태조 이하는 아버지는 소(昭)가 되어 왼편에 있고 아들은 목(穆)이 되어 오른 편에 있으므로, 소목(昭穆)이 좌우로 나뉘어 있는 것은 백세토록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도 ‘태왕(太王)의 소(昭)와 왕계(王季)의 목(穆)과 문왕(文王)의 소와 무왕(武王)의 목이라.’ 하는 글이 있으며, 《상서(尙書)》에도 문왕을 목고(穆考)라 하고 무왕을 소고(昭考)라 하였으니, 이것이 소목은 변치 않는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형제간에 서로 대(代)를 이은 경우에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소(昭)면 소에 목(穆)이면 목의 같은 반열(班列)에 둔다.’ 하였으므로, 송(宋) 나라 협향위차도(祫享位次圖)에도 태조(太祖)와 태종(太宗), 철종(哲宗)과 휘종(徽宗), 흠종(欽宗)과 고종(高宗)은 각각 일세(一世)의 위차(位次)에 두었으니, 이것이 곧 형제는 같은 반열에 두는 법입니다.
22능침(陵寢)은 강도(江都)를 떠나 육지로 옮겨 오면서부터 창졸간에 설치한 것으로, 그 제도가 1당(堂)에 5실(室)이므로 22능의 신주(神主)가 한 줄로 배열되었으니, 마땅히 더 넓혀 고치고 바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착수할 수는 없는 것이요, 착수하여 성취되기 전에는 사계절(四季節)의 제사를 향사(享祀)할 곳이 없습니다.
또 5실(室)은 동한(東漢 후한(後漢) 이래 당(堂)은 같이 하되 실(室)은 달리하는 제도에 따라서, 22신주를 일일이 각각 한 방에다 따로 모셔야 합니다. 태조(太祖)ㆍ혜종(惠宗 태조의 맏아들)ㆍ현종(顯宗 안종의 아들)은 태묘(太廟)에 있어 불천지주(不遷之主)이니, 태조를 소(昭)로 하는 정종(定宗: 태조의 제2자)ㆍ광종(光宗: 태조의 제3자)ㆍ대종(戴宗: 태조의 제4자)ㆍ안종(安宗: 태조의 제8자)은 이에 앞세울 신주가 없으니 중실(中室)에 두되 서쪽을 위로하고, 광종(光宗)의 목(穆)인 경종(景宗 광종의 맏아들)과 대종(戴宗)의 목인 성종(成宗 대종의 제2자)은 종형제(從兄弟)가 되니, 서쪽 제1실의 제1방(房)과 제2방에 두어야 합니다.
성종을 소(昭)로 하는 목종(穆宗: 경종의 맏아들)과 현종을 소로하는 덕종(德宗: 현종의 맏아들)ㆍ정종(靖宗: 현종의 제2자)ㆍ문종(文宗: 현종의 제3자)은 동쪽 제1실의 제1ㆍ제2ㆍ제3ㆍ제4방(房)에 두어야 하는 것은 또한 종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문종(文宗)의 목(穆)인 순종(順宗: 문종의 맏아들)ㆍ선종(宣宗: 문종의 제2자)ㆍ숙종(肅宗: 문종의 제3자)은 서쪽 제1실(室)의 제3ㆍ제4ㆍ제5방(房)에 두시고, 선종을 소(昭)로 하는 헌종(獻宗: 선종의 맏아들)과 숙종(肅宗)을 소로 하는 예종(睿宗: 숙종의 맏아들)은 종형제가 되니 동쪽 제5ㆍ제6방에 둘 것이며, 예종의 목(穆)인 인종(仁宗: 예종의 맏아들)은 서쪽 제6방에 둘 것이며, 인종을 소(昭)로 하는 의종(毅宗: 인종의 맏아들)ㆍ명종(明宗: 인종의 제3자)ㆍ신종(神宗: 인종의 제5자)은 동쪽 제7ㆍ제8ㆍ제9방에 두어야 합니다.
신종의 목(穆)인 희종(熙宗: 신종의 맏아들)과 명종의 목인 강종(康宗: 명종의 맏아들)은 또한 종형제가 되니, 서쪽 제7ㆍ제8방에 둘 것이며, 강종을 소(昭)로 하는 고종(高宗: 강종의 맏아들)은 동쪽 제10방에 두소서. 이렇게 하면 좌소(左昭) 우목(右穆)과 형제는 반열을 같이한다는 의에 합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5실(室)을 더 넓혀 고치고 바루는 일은 중서성(中書省)에 내려 예관(禮官)ㆍ박사(博士)로 하여금 널리 의논하게 하고, 상정(詳定)하여 시행하소서.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익재집
부록
[익재선생연보]
묘지명ㆍ발ㆍ지ㆍ간행기(墓誌銘跋識刊行記)
익재선생 연보(益齋先生年譜)
지원(至元) 24년 충렬왕(忠烈王) 14년 정해 12월 경진일에 선생이 탄생했다.
25년 무자 선생 2세
26년 기축 선생 3세
27년 경인 선생 4세
28년 신묘 선생 5세
29년 임진 선생 6세
30년 계사 선생 7세
31년 갑오 선생 8세
원정(元貞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원년 을미 선생 9세
2년 병신 선생 10세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원년 정유 선생 11세
2년 무술 선생 12세
3년 기해 선생 13세
4년 경자 선생 14세
5년 신축 선생 15세
공(公)은 어릴 때부터 뛰어나게 영리하여 성인(成人)과 같았고, 글을 지을 줄 알고부터는 이미 작가(作家)의 기풍(氣風)이 있었는데 이해에 성균시(成均試)에서 장원급제하였고, 또 권 보(權溥)가 시관(試官)이 되었을 적에도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과거는 작은 재주이니, 이것으로 나의 덕(德)을 크게 기르기에는 부족하다.’ 하였다.
경서(經書)를 토론하는 데 있어서는 널리 알고 정밀하게 연구, 절충하여 지당한 데 이르게 하니, 문정공(文定公)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아마도 우리 가문(家門)을 크게 번창시키려는 것인가.’ 하였다. 부인 권씨(權氏)를 맞아들였는데, 권씨는 문정공(文正公) 국재(菊齋) 보(溥)의 딸이다. 국재가 지공거(知貢擧)로 있었던 것을 계기로 선발하여 사위로 삼았다.
6년 임인 선생 16세
7년 계묘 선생 17세
8년 갑진 선생 18세
9년 을사 선생 19세
10년 병오 선생 20세
11년 정미 선생 21세
지대(至大 원 무종(元武宗)의 연호) 원년 무신 선생 22세
예문관(藝文館)ㆍ춘추관(春秋館)에 선발되어 들어가니, 관중(館中)의 사람들이 추대하여 사양하면서 감히 글에 대하여 논하지 못하였다. 이해 겨울에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에 승진되었다.
2년 기유 충선왕(忠宣王) 원년 선생 23세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다.
3년 경술 선생 24세
선부 산랑(選部散郞)에 승진하였다.
4년 신해 선생 25세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전임되었는데, 있는 곳마다 직무에 충실하였다.
황경(皇慶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원년 임자 선생 26세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는데 옛날 절도사의 풍도가 있었으며,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올랐다. 겨울에는 제거풍저창사(提擧豐儲倉事)가 되었다.
2년 계축 선생 27세
내부 부령(內府副令)ㆍ풍저감 두곡(豐儲監斗斛)에 제배되었는데, 내부(內府)에서 치수(錙銖)와 척촌(尺寸)을 세밀히 계산할 적에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기국(器局)을 한정할 수 없는 군자이다.”
하였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원년 갑인 충숙왕(忠肅王) 원년 선생 28세
이때에 정주학(程朱學)이 중국(中國)에 행해지기 시작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백이정(白頤正)이 원(元) 나라에 있다가 이를 배워 우리나라로 돌아오자, 선생이 제일 먼저 사사하여 전수받았다.
전에 충선왕(忠宣王)이 원 인종(元仁宗)을 도와 내란(內亂)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영립(迎立)하였으므로, 양조(兩朝)의 총우(寵遇)가 비길 데 없이 컸다. 왕이 드디어 주청(奏請)하여 충숙왕(忠肅王)에게 전위(傳位)하고, 자신은 태위(太尉)로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문 연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인하여 이르기를,
“경사의 문학사(文學士)는 모두 천하에서 선발한 사람들인데, 나의 부중(府中)에는 아직 이런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수치다.”
하고 선생을 불렀으므로, 경사에 갔었다.
원(元) 나라의 학사인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왕(王)의 문하에 놀았는데, 선생도 그들과 종유(從游)하면서 학문이 더욱 진보되었으므로 제공(諸公)이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상왕(上王)이 선생에게 묻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물(文物)이 중국과 같다고 일컬어왔는데, 지금 학자(學者)들은 모두 불교(佛敎)를 추종하고 있으며, 장구(章句)나 익혀 문장을 꾸미는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는 반면,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을 닦는 선비가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이에 대하여 선생이 답한 내용은 대략,
“전하께서 진실로 상서(庠序)와 학교(學校)를 넓혀 근엄하게 하고 육예(六藝)와 오교(五敎)를 높여 밝힘으로써 선왕(先王)의 도(道)를 천명(闡明)하신다면, 어찌 진유(眞儒)를 배반하고 불교를 추종할 리가 있겠으며 실학(實學)을 버리고 장구를 익힐 자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앞으로는 문장을 꾸미기만 하던 무리들이 모두 경서에 밝고 행실을 닦는 선비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2년 을묘 선생 29세
선부 의랑(選部議郞)에 승진되었고 가을에는 성균좨주(成均祭酒)를 겸하였다.
3년 병진 선생 30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며, 4월에는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서촉(西蜀)에 갔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지었는데 사람들에게 즐겨 애송(愛頌)되고 있다.
4년 정사 선생 31세
선부 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명(命)을 받들고 원(元) 나라에 가서 상왕(上王)의 탄일(誕日)을 축하하였다.
5년 무오 선생 32세
6년 기미 선생 33세
강남(江南)에 강향사(降香使)로 가는 상왕(上王)을 호종하였는데, 상왕이 이름난 누대(樓臺)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흥이 일어 회포를 풀 적마다, 조용히 말하기를,
“이러한 곳에 이생(李生)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상왕이 고항(古杭) 오수산(吳壽山)을 불러 선생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북촌(北村) 탕선생(湯先生)이 찬(贊)을 썼다. 그 뒤 32년 만에 선생이 국표(國表)를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다가 자신의 초상을 보고,
“내가 예전에 그림자를 남겼다.[我昔留形影]”
하고 읊은 시구가 있다.
7년 경신 선생 34세
7월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고, 또 토지와 장획(臧獲)을 하사받았으니, 이는 오(吳)ㆍ연(燕) 지방에서 시종(侍從)한 공 때문이었으며, 주청(奏請)하여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하였다. 9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최용갑(崔龍甲)ㆍ이곡(李穀) 등을 뽑았는데, 왕이 인재 얻은 것을 가상히 여겨 은병(銀甁) 50개와 쌀 1백 석(石)을 주어 학사연(學士宴)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겨울에 원(元) 나라에 가다가 황토점(黃土店)에 이르러, 상왕(上王)이 참소를 받았는데 능히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시(詩) 3편을 짓고, 또 명이행(明夷行) 1편을 지었다.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원년 신유 선생 35세
이때에 상왕이 토번(吐蕃)의 철사결(撤思結)이라는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경사(京師)와의 거리가 1만 5천 리였다. 선생이 경사의 왕저(王邸)를 지키면서 시를 지어 유청신(柳淸臣)ㆍ오잠(吳潛)에게 보내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였다. 문정공(文定公) 동암(東菴)의 상(喪)을 당하였다.
2년 임술 선생 36세
3년 계해 선생 37세
원(元) 나라가 중국과 같이 우리나라에도 정동성(征東省)을 설치할 것을 의논하므로, 선생이 원 나라에 가서 도당(都堂)에 《중용(中庸)》의 구경장(九經章)에 있는 ‘먼 데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글을 올려 변명(辨明)하고, 그 나라와 그 사람은 그대로 있게 하여 달라고 청하니, 그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때에 상왕이 아직 토번에 있었으므로 선생이 원 나라의 낭중(郞中)과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려 돌아오게 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말의 뜻이 간측(懇惻)하고 충분(忠憤)이 격절하였다. 이에 감동한 배주가 황제에게 청하여 타사마(朶思麻)라는 곳으로 양이(量移)되었다. 선생이 상왕을 배알하러 갔었는데, 농산(隴山)을 넘고 조수(洮水)를 건너는 험한 길을 가면서 도중에 읊은 시(詩)들은 모두 충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여행 길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묘(墓)를 지났는데, 시 한 편을 남겼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어찌 주 나라의 여분으로 / 那將周餘分
우리 당 나라의 일월을 더럽혔는가 / 黷我唐日月
또 짧은 서(序)를 지어 구양수(歐陽脩)의 잘못을 기롱하였는데, 뒤에 주자(朱子)의,
어찌하여 구양자는 / 如何歐陽子
사필잡고 지극히 공정한 사실을 흐리게 했는가 / 秉筆迷至公
한 감흥시(感興詩) 1편을 얻어 보고 스스로 자신의 식견(識見)이 정대하였음을 알았다.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원년 갑자 선생 38세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가 되었다.
2년 을축 선생 39세
추성량절(推誠亮節)로 공신호를 고쳐 하사했으며,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ㆍ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전임(轉任)되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하였다.
3년 병인 선생 40세
삼사사(三司使)에 옮겨졌다.
4년 정묘 선생 41세
치화(致和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원년 무진 선생 42세
2년 기사 선생 43세
지순(至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원년 경오 선생 44세
충혜왕(忠惠王)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다시 정당문학을 삼았으나 얼마 안 되어 파하였다.
2년 신미 선생 45세
3년 임신 충숙왕 후원년 선생 46세
원통(元統 원 영종(元寧宗)의 연호) 원년 계유 선생 47세
2년 갑술 선생 48세
후 지원(後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원년 을해 선생 49세
2년 병자 선생 50세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가 되었다.
3년 경축 선생 51세
4년 무인 선생 52세
5년 기묘 선생 53세
2월에 충숙왕(忠肅王)이 훙(薨)하였다. 가을에 정승(政丞) 조적(曹頔)이 백관(百官)을 위협하여 군대를 영안궁(永安宮)에 주둔시키고, 임금 곁의 나쁜 소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라고 선언(宣言)하면서, 몰래 심왕(瀋王)의 지반(地盤)을 만들었다.
이 사실을 안 충혜왕(忠惠王)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쳐 죽였으나, 그 당여(黨與)로서 경도(京都)에 있는 자가 많아 왕을 기필코 죄에 얽어 넣으려 하였다. 이리하여 원(元)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부르니 인심(人心)이 의아해 하고 불안하게 여겼으며, 장차의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선생은 격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내가 우리 임금의 신하인 것만 알 뿐이다.”
하고, 왕을 모시고 경도에 가서 말 대신 글을 올려 일이 순리대로 변별(辨別)되었다.
6년 경진 충혜왕 후원년 선생 54세
4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오다가 제화문(齊化門) 주루(酒樓)에서 읊은 시가 있다. 돌아와서는 뭇 소인이 더욱 치열하게 날뛰므로, 공이 자취를 숨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지원(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원년 신사 선생 55세
2년 임오 선생 56세
여름에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3년 계미 선생 57세
11월에 원 나라 사신 타적(朶赤) 등이 와서 교천사조(郊天赦詔)를 반포한다 하므로 왕이 성 밖에 나아가 영접하니, 타적 등이 칼을 들이대고 왕을 잡아 말에 태우고 돌아갔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군신(群臣)이 정신이 없어 어떻게 조처해야 할 줄을 몰랐는데, 선생이 글을 올려 사면(赦免)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4년 갑신 선생 58세
겨울에 충목왕(忠穆王)이 나이 8세로 즉위하여 선생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제배하고, 부원군(府院君)에 승진시켜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를 삼았다.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선생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진언(進言)하기를,
“옥(玉)에 흠집이 있는 것은 반드시 양공(良工)이 다듬은 뒤에라야 보기(寶器)가 되는 것입니다.
임금인들 어찌 모든 일에 대하여 잘못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양신(良臣)의 간언(諫言)이 있은 뒤에라야 성덕(聖德)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인하여 아뢰기를,
“신등이 시강(侍講)에 참여하지 못할 적에는 마땅히 늘 원송수(元松壽)를 좌우에 두시어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소서.”
하였다. 선생은 또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다시 어진 선비 2인을 가려서 《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을 강(講)하게 하여,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도(道)를 익히게 하고, 또 정직하고 근후(謹厚)하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예(禮)를 사랑하는 자 10명쯤을 선발하여 좌우(左右)에서 보도(輔導)하게 하고, 재상(宰相)을 친하게 하고 설압(褻狎)하는 무리를 내칠 것이며, 성색(聲色)과 완호물(翫好物)을 이목(耳目)에 접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리하여 습관이 성품과 함께 완성되면 덕(德)으로 나아감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이어,
“정방(政房)을 혁파하여 청알(請謁)을 근절시키고 공과(功過)를 기록하여 요행의 문을 막을 것이며, 금은(金銀)ㆍ금수(錦繡)의 사용을 금지시켜 검소한 덕을 밝힐 것이며, 못 받아들인 공부(貢賦)를 견면(蠲免)하여 줌으로써 민생(民生)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뒤에 금성군(錦城君) 나익희(羅益禧)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에 두서너 가지 계책으로 집정자(執政者)들을 깨우쳤으나 시행되는 것을 못 보았으므로, 늘 과감하게 물러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었다.”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빌었다.
5년 을유 선생 59세
6년 병술 선생 60세
전(箋)을 올려 서연강설(書筵講說)의 직(職) 면하여 주기를 빌면서, 찬성사(贊成事) 안축(安軸)ㆍ밀직부사(密直副使) 이곡(李穀)을 천거하여 자신의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5월에 《효행록(孝行錄)》의 62효찬(孝贊)을 짓고, 또 서(序)를 지어 첫머리에 실었다.
11월에 왕(王)이 민지(閔漬)가 찬수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에 빠진 것이 많다는 것으로 선생에게 명하여 다시 찬수하게 하였으며, 또 명하여 충렬왕(忠烈王)ㆍ충선왕(忠宣王)ㆍ충숙왕(忠肅王) 3조(朝)의 실록(實錄)을 찬수하게 하였다. 문정공(文正公) 국재(菊齋)의 상(喪)에 조문하였다.
7년 정해 선생 61세
8년 무자 선생 62세
3월에 경사도감 제조(經史都監提調)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 충목왕(忠穆王)이 훙(薨)하였으므로, 선생이 표(表)를 받들고 원(元) 나라에 가서 충정왕(忠定王) 세우기를 청하였다.
9년 기축 충정왕 원년 선생 63세
10년 경인 선생 64세
11년 신묘 선생 65세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아직 우리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선생을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에 임명하였는데, 선생이 글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임명하였는데, 선생이 법사(法司)로 하여금 각 도의 존무사(存撫使)ㆍ안렴사(按廉使)의 공과(功過)를 고핵(考覈)하게 하고, 홍원철(洪元哲)을 평양도 순문사(平壤道巡問使)로 보내고, 김용(金鏞)으로 왜적을 방비하게 하고, 허유(許猷)를 서북면 찰방(西北面察訪)으로 삼고, 배전(裵佺)ㆍ박수문(朴守文)을 행성(行省)의 옥에 가두고, 노영서(盧英瑞)ㆍ윤시우(尹時遇)를 유배(流配)보내고, 한대순(韓大淳)ㆍ정천기(鄭天起)를 폄하(貶下)하였다. 이때 왕이 원 나라에 있어서 두어 달 동안 나라가 비어 있었으나, 선생이 잘 조처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를 힘입어 안정되었다.
12년 임진 공민왕 원년 선생 66세
서연(書筵)을 열고 다시 선생을 시강(侍講)에 임명하였다. 조일신(趙日新)이 왕을 시종(侍從)한 공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횡포를 부렸었는데, 선생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게 됨을 시기하였다. 선생은 이 사실을 알고 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감히 정승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굳게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친 것을 인하여 전(箋)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추성량절동덕협의찬화(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의 공신호를 더 내렸다.
선생이 또 전을 올려 굳게 사양하니, 왕이 특별히 좌부대언(左副代言) 유숙(柳淑)과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 김용(金鏞)을 보내어 교지(敎旨)를 내리고 사직하려는 청은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또 전을 올려 기필코 사양하여 마지 않으니 드디어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그해 겨울 일신(日新)이 불령배(不逞輩)를 모아가지고 밤에 궁중으로 들어가 평소에 자기가 시기하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는데, 선생은 작위(爵位)를 사퇴하였으므로 화(禍)를 면하였다. 일신(日新)이 복주(伏誅)되자 선생을 기용하여 우정승(右政丞)으로 삼고 순성직절동덕찬화(純誠直節同德贊化)의 공신호를 내렸다.
13년 계사 선생 67세
정월에 정승을 사임하였고, 5월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색(李穡) 등을 뽑았으며, 동지공거(同知貢擧) 홍 이상(洪二相 이상은 홍언박(洪彦博)을 말한다)에게 준 시(詩) 2수(首)가 있다.
14년 갑오 선생 68세
12월에 다시 우정승이 되었다.
15년 을미 선생 69세
우정승 직을 사임하였다.
16년 병신 선생 70세
역신(逆臣) 기철(奇轍) 등이 복주(伏誅)되자, 왕(王)이 기철 등의 재산(財産)을 양부(兩府)에 하사하였으나, 선생은 공이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2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17년 정유 선생 71세
5월에 본직(本職)으로 치사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봉군(封君)으로 치사하면 반사(頒賜)하는 녹(祿)에 차등이 있었는데, 이미 늙었으면서 후한 녹을 받는 것이 의(義)에 있어 불안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朝廷)의 의논은 본직으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였다.
선생은 지위를 버리고 한가히 지내게 되자, 손을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고금(古今)의 일에 관하여 비교하고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사람을 시켜 자문하였다. 혹 수시로 인견(引見)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면서 치도(治道)를 묻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선생은 전례를 끌어다 비유하여 진달하면서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간절히 권면(勸勉)하니, 왕이 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집에서 국사(國史)를 찬수(撰修)할 적에는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다 모였었는데, 뒤에 국사는 병화(兵火)에 잃어버렸다. 또 《금경록(金鏡錄)》을 선(選)하였다. 또 국사가 미비함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년(紀年)ㆍ전(傳)ㆍ지(志)를 찬수하였는데, 뒤에 홍건적(紅巾賊) 난리에 유실되고 오직 태조(太祖)에서 숙종(肅宗)에 이르기까지의 기년(紀年)만이 남았다. 8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의 소목위차(昭穆位次)를 정하게 하니, 선생이 이에 대한 의(議)를 올렸다.
18년 무술 선생 72세
왕(王)이 경성(京城)을 수축할 적에 기로(耆老)ㆍ대신(大臣)에게 방문(訪問)하였는데, 이때 선생이 글을 올렸다. 그 대략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이상은 알 수 없지만 삼대 이하로는 도읍을 세우고서 성곽(城郭)을 쌓지 않았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동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쳐서 참람한 무리를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시킨 뒤 7년 만에 훙(薨)하셨습니다. 그때 피폐한 백성을 동원하여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송경(松京)에 성(城)을 쌓지 않는 것은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형세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하였다. 안렴사(按廉使) 박대양(朴大陽)을 전송한 시(詩)가 있고, 또 정조(正朝)에 대한 시가 있다.
19년 기해 선생 73세
손자 보림(寶林)을 위하여 집정(執政)에게 보낸 시가 있다.
20년 경자 선생 74세
21년 신축 선생 75세
2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을 강하게 하였다.
22년 임인 선생 76세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켜 어가(御駕)가 남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하자 선생이 달려가 상주(尙州)에서 배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기를,
“오늘의 이 파천이, 당 현종(唐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때문에 서촉(西蜀)으로 파천하였던 것과 무엇이 다르랴!"하였다.
또 홍언박(洪彦博)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이 일컫기를 ‘웅장하구나 산하(山河)여! 이는 위(魏) 나라의 보배다.’ 하였으니, 애초에 요해처(要害處)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협애(狹隘)한 목을 지켰다면 승리를 기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일찍 도모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소. 만약 적과 들에서 싸웠다면 반드시 아군(我軍)이 패배하였을 것이나, 단 눈이 내리는 것을 이용하여 적이 생각지도 않은 틈을 노려 공격하였으므로 이겼으니, 이는 종묘(宗廟)와 산하(山河)의 도움이오.”하였다.
인하여 어가를 호종하고 청주(淸州)에 이르렀으며, 선생이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임금의 명에 의하여 판상(板上)의 시운(詩韻)에 따라 시를 지어 올렸다.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여졌다.
23년 계묘 선생 77세
왕(王)이 청주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환도(還都)하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모든 재상(宰相)들을 인솔하고 가서 진언(進言)하기를 ‘송도(松都)는 종묘(宗廟)가 있는 곳이요 국가의 근본이니, 속히 환가하셔서 백성의 바라는 마음을 위로하소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음양(陰陽)의 구기(拘忌)로 아뢰었으니, 마땅히 먼저 성남(城南)의 흥왕사(興王寺)에 주가(駐駕)하였다가, 강안전(康安殿)이 수리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니, 왕이 따랐다.
24년 갑진 선생 78세
25년 을사 선생 79세
왕(王)이 신돈(辛旽)을 총애하므로, 선생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한 번 돈(旽)을 만났었는데, 그의 골상(骨相)이 옛날 흉인(凶人)과 비슷하여 반드시 후환(後患)을 끼칠 것이니, 상께서는 가까이 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이로하여 신돈이 깊은 원심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헐뜯었으나, 선생이 늙었기 때문에 가해(加害)하지 못하였다. 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유자(儒者)들은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안팎으로 포열(布列)하여, 서로 돌려가면서 간청(干請)함으로써 하고 싶은 짓을 멋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제현(李齊賢) 같은 사람은 그의 문생(門生)의 문하에 또 문생이 있어 드디어 나라에 가득찬 도둑이 되었으니, 유자의 해(害)가 이와 같습니다.”
하였는데, 신 돈이 패하여 실각하자, 왕이,
“익재(益齋)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동료들이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반드시 익재라고 불렀으며, 재상이 되고 나서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익재라 불렀으니,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대받음이 이러하였다.
6월에 조마(照磨) 호약해(胡若海)가 명주사도(明州司徒) 방국진(方國珍)의 사신으로 와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돌아갈 적에 선생에게 시(詩)를 청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노쇠하였으므로 글짓는 것을 꺼렸으나 너무 정성스럽게 청하므로, 이에 오언시(五言詩) 1편(篇)을 지어 주었다. 이로부터는 다시 저술(著述)하지 않았다.
26년 병오 선생 80세
27년 정미 선생 81세
가을 7월에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卒)하였는데,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겨울 10월에 유사(有司)가 위의(衛儀)를 갖추어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 선영(先塋) 아래 장사하였다.
홍무(洪武) 9년 병진에 공민왕(恭愍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끝>
[註解]
[주01]지공거(知貢擧) : 과거(科擧)의 고시관(考試官)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의 위이다. 그 과거에서 합격된 자는 이 지공거를 좌주(座
主) 또는 은문(恩門)이라 부르면서, 평생 문생(門生)의 예(禮)를 다하였다.
[주02]상서(庠序)와 학교(學校) : 상(庠)ㆍ서(序)ㆍ교(校)는 모두 향교(鄕校)를 말하고, 학(學)은 국학(國學)으로 곧 태학(太學)을 말한
다. 《孟子》 滕文公 上에 “하(夏) 나라에서는 교(校)라 하였고, 은(殷) 나라에서는 서(序)라 하였고, 주(周) 나라에서는 상(庠)이라
하였는데, 학(學 : 태학〈太學〉임)은 삼대(三代)가 다 같았다.” 하였다.
[주03]육예(六藝)와 오교(五敎) : 육예는 선비로서 배워야할 여섯 가지 일로 곧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며,
오교는 즉 오륜(五倫)으로 부자(父子)의 친애, 군신(君臣)의 의리, 부부(夫婦)의 분별, 장유(長幼)의 차서, 붕우(朋友)와의 신의를
말한다.
[주04]구양수(歐陽脩)의 …… 기롱하였는데 : 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고종이 죽은 뒤에 중종(中宗)ㆍ예종(睿
宗)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하였었다. 이는 《춘추(春秋)》의 필법으로 보면 정통(正統)이 아니
므로 본기(本紀)에 넣어서는 안 되는데, 구양수가 《당서》를 찬술하면서 측천무후기를 넣은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주05]태상(太常) : 태상부(太常府)인데, 제사(祭祀)와 증시(贈諡)를 맡은 관아(官衙)이다. 충렬왕(忠烈王) 24년에 봉상시(奉常寺)로
개정(改定)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익재집
부록
묘지명ㆍ발ㆍ지ㆍ간행기(墓誌銘跋識刊行記) 7편
1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시(諡) 문충(文忠) 이공(李公)의 묘지명(墓誌銘)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
(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영예문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領藝文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이색(李穡) 찬(撰)
2 발(跋) [김빈(金鑌)]
3 익재선생문집 발(益齋先生文集跋) [유성룡(柳成龍)]
4 지(識) [이시발(李時發)]
5 익재선생문집(益齋先生文集) 중간지(重刊識) [허경(許熲)]
6 익재선생(益齋先生) 연보(年譜) 후서(後敍) [김노응(金魯應)]
7 익재선생문집 중간지 [이규석(李圭錫)]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시(諡) 문충(文忠) 이공(李公)의 묘지명(墓誌銘)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영예문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領藝文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이색(李穡) 찬(撰)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27년 정미년(1367) 가을 7월에 추성량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익재선생(益齋先生) 이공(李公)이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卒)하니 나이 81세였으며, 태상(太常)에서 시호(諡號)를 문충공(文忠公)이라 내렸다.
그해 10월에 유사(有司)가 위의(衛儀)를 갖추어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先塋) 아래 장사하였으며, 병진년(1376) 겨울 10월에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공(公)의 휘(諱)는 제현(齊賢)이고, 자(字)는 중사(仲思)요, 아버지의 성(姓)은 이씨(李氏)이다.
신라시조 혁거세(赫居世) 때 좌명대신(佐命大臣)의 한 사람에 이알평(李謁平)이 있었으며, 그 후손인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을 낳았고, 병부령이 삼한공신(三韓功臣)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에 들어와서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을 금서의 아내로 삼아주어 윤홍(潤弘)을 낳았다. 윤홍이 승훈(丞訓)을 낳고, 승훈이 주복(周復)을 낳고, 주복이 칭(偁)을 낳고, 칭이 치련(侈連)을 낳고, 치련이 총섬(寵暹)을 낳고, 총섬이 춘정(春貞)을 낳고, 춘정이 현복(玄福)을 낳고, 현복이 선용(宣用)을 낳고, 선용이 승고(升高)를 낳고, 승고가 문림랑(文林郞)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 휘(諱) 득견(得堅)을 낳았으며, 상의(尙衣)가 증 좌복야(贈左僕射) 휘 핵(翮)을 낳고, 복야가 검교정승(檢校政丞) 시(諡) 문정공(文定公) 휘 진(瑱)을 낳았는데, 진이 대릉직(戴陵直 대릉은 대종(戴宗)의 묘호) 박인육(朴仁育)의 딸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게 장가들어, 지원(至元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정해년(1278) 12월 경진일에 공을 낳았다.
공(公)은 어릴 때부터 뛰어나게 영리하여 성인(成人)과 같았고, 글을 지을 줄 알고부터는 이미 작가(作家)의 기풍(氣風)이 있었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신축년(1301) 공의 나이 14세로 응시하였는데, 상시(常侍) 정선(鄭僐)이 성균시(成均試)의 시관(試官)이었다.
이때 응시자들이 자기의 재능을 자부하여 서로 자기가 훌륭하다고 과장하였었는데, 공이 지은 글을 듣고서는 의기가 위축되어 아무도 감히 앞을 다투지 못하였으며, 결국은 공이 장원하였다.
국재(菊齋) 권공 보(權公溥)와 열헌(悅軒) 조공 간(趙公簡)이 예위(禮闈)의 시관이 되었을 적에도 공이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권공이 공을 사위로 삼았다. 공이 말하기를, “과거는 작은 재주이니, 이것으로 나의 덕(德)을 크게 기르기에는 부족하다.”하였다.
분전(墳典 고서(古書)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경전을 가리킨다)을 토론하는 데 있어서는 널리 알고 정밀하게 연구, 절충하여 지당한 데 이르게 하니, 문정공(文定公)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아마도 우리 가문(家門)을 더욱 번창시키려는 것인가.”하였다.
계묘년(1303)에는 봉선고 판관(奉先庫判官)과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를 권무(權務 임시로 맡다)하였으며, 무신년(1308)에는 예문관(藝文館)ㆍ춘추관(春秋館)에 선발되어 들어가니, 관중의 사람들이 추대하여 사양하면서 감히 글에 대하여 논하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에 옮겨졌고, 기유년(1309)에는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다. 경술년(1310)에는 선부 산랑(選部散郞)에 옮겨지고, 신해년(1311)에는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전임되었는데, 있는 곳마다 직무에 충실하였다.
황경(皇慶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임자년(1312)에는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는데 옛날 절도사의 풍도가 있었으며,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올랐다. 겨울에는 제거풍저창사(提擧豐儲倉事)가 되었으며, 계축년(1313)에는 내부부령(內府副令)ㆍ풍저감두곡(豐儲監斗斛)을 역임하였는데, 내부(內府)에서 치수(錙銖)와 척촌(尺寸)을 세밀히 계산할 적에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기국(器局)을 한정할 수 없는 군자이다.”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 인종(元仁宗)을 도와 내란(內亂)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영립(迎立)하였으므로, 양조(兩朝)의 총우(寵遇)가 비길 데 없이 컸다. 왕이 드디어 주청(奏請)하여 충숙왕(忠肅王)에게 전위(傳位)하고, 자신은 태위(太尉)로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인하여 이르기를,
“경사의 문학사(文學士)는 모두 천하에서 선발한 사람들인데, 나의 부중(府中)에는 아직 이런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수치이다.”
하고 공(公)을 불렀는데, 공이 경사(京師)에 이른 것은 바로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갑인년(1314) 정월이었다.
요목암(姚牧菴 목암은 요수(姚燧)의 호(號))ㆍ염자정(閻子靜 자정은 염복(閻復)의 호)ㆍ원복초(元復初 복초는 원명선(元明善)의 호)ㆍ조자앙(趙子昂 자앙은 조맹부(趙孟頫)의 호) 등이 모두 왕(王)의 문하에 놀았는데, 공도 그들과 종유(從游)하면서 학문이 더욱 진보되었으므로 제공(諸公)이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을묘년(1315)에는 선부 의랑(選部議郞)에 승진되고 가을에는 성균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었는데, 인하여 의랑(議郞)을 겸임하였다. 병진년(1316)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서촉(西蜀)에 갈 적에 이르는 곳마다 시(詩)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즐겨 애송(愛頌)하고 있다.
이해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며, 정사년(1317)에는 선부 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고, 기미년(1319)에는 왕(王)이 강향사(降香使)로 강남(江南)에 가게 되었는데, 이름난 누대(樓臺)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흥이 일어 회포를 풀 적마다 조용히 말하기를,
“이러한 곳에 이생(李生)이 없을 수 없다.”하였다.
경신년(1320)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서는 당시 사람들이 훌륭한 인재들을 뽑았다고 칭찬하였는데, 공(公)의 나이 34세였다. 또 아버지 문정공(文定公)과 어머니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장인과 장모, 3좌주(座主)가 모두 건강하였는데, 공이 술잔을 올리면서 오래 살기를 축수하니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이해에 주청(奏請)하여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이 되었으며,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임술년(1322)에 경사(京師)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아직 도착하기 전에 충선왕(忠宣王)이 참소를 받아 서번(西蕃)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공이 충선왕을 배알하러 갔었는데, 도중에서 읊은 시(詩)는 충분(忠憤)으로 가득차 있었다.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갑자년(1324)에는 정광대부(靖匡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를 더하고, 을축년(1325)에는 공신호(功臣號)를 추성량절(推誠亮節)로 고쳐 하사하였고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ㆍ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전임(轉任)하였다.
병인년(1326)에는 삼사사(三司使)에 옮겨졌고, 천력(天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경오년(1330)에는 충혜왕(忠惠王)이 다시 왕위에 오르매 다시 정당문학으로 삼았으나 얼마 안 되어 파하였다. 지원(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병자년(1336)에는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封)하여졌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가 되었다.
기묘년(1339) 봄 2월에 충숙왕(忠肅王)이 훙(薨)하였는데, 그해 가을에 정승(政丞) 조적(曹頔)이 백관(百官)을 위협하여 군대를 영안궁(永安宮)에 주둔시키고, 임금 곁의 나쁜 소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라고 선언(宣言)하면서, 몰래 심왕(瀋王)의 지반(地盤)을 만들었다.
이 사실을 안 충혜왕(忠惠王)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쳐 죽였으나 그 당여(當與)로서 경도(京都 원 나라의 서울)에 있는 자가 매우 많아 왕을 기필코 죄에 얽어 넣으려 하였으므로 인심(人心)이 의아해 하고 불안하게 여겼으며, 화(禍)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공(公)이 격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내가 우리 임금의 신하인 것만 알 뿐이다.”
하고, 왕을 모시고 경도(京都)에 가서 말 대신 글을 올려 일이 순리대로 변별(辨別)되니, 공(功)이 일등(一等)이었다. 이미 돌아와서는 뭇 소인이 더욱 치열하게 날뛰므로, 공이 자취를 숨기고 나가지 않은 채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갑신년(1344) 겨울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서는 부원군(府院君)에 승진시키고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에 임명하였으며, 공(公)을 서연(書筵)의 스승으로 삼았다. 병술년(1346)에는 충렬왕실록(忠烈王實錄)을 찬수(撰修)하였으며, 무자년(1348)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신묘년(1351) 겨울에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아직 우리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공(公)을 우정승(右政丞) 권서정동성사(權署征東省事)에 임명하였는데, 두어 달 동안 나라가 비어 있었으나 공이 잘 조치(措置)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의뢰하여 안정되었다.
임진년(1352)에 추성량절 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를 내리자, 공민왕을 시종한 공신 조일신(趙日新)이 공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게 됨을 시기하였는데, 공이 이 사실을 알고 세 번이나 표(表)를 올려 굳이 사퇴하였다.
그해 겨울 10월에 일신(日新)이 불령배(不逞輩)를 모아가지고 밤에 궁중으로 들어가 무기를 휘둘러 평소 자기가 시기하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는데, 공은 작위(爵位)를 사퇴하였으므로 화를 면하였다. 일신이 복주(伏誅)되고 나서 공(公)을 기용하여 우정승(右政丞)으로 삼았는데, 계사년(1353) 정월에 사퇴하였다. 그해 5월에는 부원군(府院君)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갑오년(1354) 12월에는 다시 우정승을 삼았으나 다음해에 또 사직하였다.
공의 나이 70세에 김해후(金海侯)에 봉하여졌고, 12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으며, 정유년(1357) 5월에는 본직(本職) 그대로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나라의 제도가 봉군(封君)으로 치사(致仕)하면 반사(頒賜)하는 녹에 차등(差等)이 있었는데, 이미 늙었으면서 후한 녹을 받는 것이 의(義)에 있어 불안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朝廷)의 의논은, 본직으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여, 임인년(1362)에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였다.
공(公)은 15세에 등과(登科)함으로부터 명망(名望)이 일세에 떨쳤으며, 조정에 벼슬한 이래로는 문서(文書)의 일을 전임하여 춘추관(春秋館)ㆍ예문관(藝文館) 등에서 외제(外制 임금의 뜻을 전하는 글을 짓다)의 직을 역임하였으며, 속관(屬官)으로부터 양부(兩府)ㆍ봉군(封君)에 이르기까지 관직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오직 충정왕(忠定王) 때에 3년간 벼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공이 일찍이 표(表)를 올려 공민왕(恭愍王) 세우기를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은 타고난 자품(資品)이 중후한 데다가 학문으로 보익(輔益)하여 고명(高明)하고 정대(正大)하였으므로, 의론(議論)을 발하고 사업(事業)을 시행함에 있어 환하게 빛나 볼 만하였다. 처음 공이 사서(史書)를 읽을 적에 필삭(筆削)의 대의(大義)는 반드시 《춘추(春秋)》를 법받았으므로, 측천기(則天紀)에,
어찌 주 나라의 여분으로 / 那將周餘分
우리 당 나라의 일월을 더럽혔는가 / 黷我唐日月
하였는데, 뒤에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을 보고서 자신의 식견이 정당하였음을 스스로 증험하였다.
조그만 선행(善行)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칭찬하고 기려 널리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며, 선배가 남긴 일이면 아무리 세미한 일이라도 자신은 따라가기 어렵다고 하였다. 평생 침착하지 못하게 빨리 말하거나 갑자기 당황한 얼굴빛을 짓거나 저속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객(客)을 접대할 때에는 술자리를 베풀고 고금(古今)의 일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최졸옹(崔拙翁)이 감탄하기를,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 만에 다시 만나도 학문이 놀라울 만큼 진취된다는 말을, 내가 익재(益齋)에게서 증험하여 알았다.”하였다.
공은 구법(舊法)을 힘써 준행하고 경장(更張)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내 뜻이야 어찌 옛사람만 못하랴마는, 내 재주가 지금 사람만도 못하기 때문이다.”하였다.
공(公)의 손자가 기씨(奇氏 기철(奇徹)의 일족을 가리킨다)의 집안과 인척(姻戚)을 맺었으나 공은 기씨들의 권세가 너무 극성(極盛)하였으므로 꺼리더니, 그가 평장(平章)에 임명되매 공민왕이 양제(兩制)에 명하여 시(詩)를 지어 축하하게 하고 또 공에게 명하여 그 일을 서술하라고 하였으나 공은 사양하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호(號)를 익재(益齋)라 하였는데, 신돈(辛旽)이 실각하자 공민왕이 말하기를,
“익재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따라갈 수 없도다. 일찍이 신돈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지금 과연 증험되었다.”하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동료들이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반드시 익재라고 불렀었는데, 재상(宰相)이 되고나서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익재라 블렀으니, 공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대받음이 이러하였다. 공이 저술한 문집(文集) 약간 권이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공(公)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권씨(權氏)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서종(瑞種)은 봉상대부(奉常大夫) 종부부령(宗簿副令)이고, 차남 달존(達尊)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지제교(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이다.
장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임덕수(任德壽)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전농정(典農正) 이계손(李係孫)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 딸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簽書樞密院事翰林院太學士)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여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작(封爵)되었다.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박씨(朴氏)는 서경등처 만호부부만호(西京等處萬萬戶府副萬戶)를 선수(宣授)받은 중현대부(中顯大夫) 사복정(司僕正) 휘(諱) 거실(居實)의 딸로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창로(彰路)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윤(開城尹)이고, 장녀(長女)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박동생(朴東生)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송무(宋懋)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 딸은 혜비(惠妃)가 되었다가 지금은 비구니이다.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서씨(徐氏)는 통직랑 지서주사(通直郞知瑞州事) 휘(諱) 중린(仲麟)의 딸로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우윤(三司右尹) 김남우(金南雨)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봉선대부(奉善大夫) 전의부정(典醫副正) 이유방(李有芳)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이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중랑장(中郞將)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아직 어리다.
종부(宗簿 서종(瑞鍾)을 가리킨다)는 밀직사 겸 감찰대부(密直使兼監察大夫) 홍유(洪侑)의 딸에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보림(寶林)은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政堂文學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上護軍)이며, 장녀는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조무(趙茂)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중현대부 순흥부사(順興府使) 이원적(李元)에게 출가하였다.
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송주(金松柱)의 딸에게 재취(再娶)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원익(元益)이고, 또 밀직(密直) 최항(崔沆)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총랑(摠郞 달존(達尊)을 가리킨다)은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덕림(德林)은 조봉랑 여흥군사(朝奉郞驪興郡事)이고, 차남 수림(壽林)은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원(元) 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자선대부(資善大夫)가 되었으므로, 공(公)에게 태상경(太常卿)을 증직(贈職)하고 품계(品階)와 훈작(勳爵)을 갖추었다.
그 다음 학림(學林)은 중현대부 소부윤(小府尹)이며, 딸은 봉익대부 개성윤(開城尹)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기인걸(奇仁傑)에게 출가하였다.
개성(開城 창로(彰路)를 가리킨다)이 중대광(重大匡) 청성군(淸城君) 시(諡) 평간(平簡) 휘 공의(公義)의 딸 한씨(韓氏)에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춘추검열(春秋檢閱) 원서(元序)에게 출가하였다.
계실(繼室)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전객시사(典客寺事) 김앙(金昂)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반(蟠)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고, 차남 곤(袞)은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이며, 딸은 어리다.
사복(司僕 임덕수(任德壽))이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순의(純義)는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소윤(軍器少尹)이고, 차남 순례(純禮)는 중랑장(中郞將)이며, 장녀는 통직랑 기거랑 지제교(通直郞起居郞知製敎) 신혼(申渾)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친어군 대호군(親禦軍大護軍) 박영충(朴永忠)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봉선대부(奉善大夫) 소부윤(小府尹) 황간(黃侃)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중랑장(中郞將) 김추(金錘)에게 출가하였다.
전농정(典農正 이계손(李係孫))이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즐(隲)은 낭장(郞將)이고, 차남 양(亮)은 중랑장(中郞將)이며, 딸은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안익(安翊)에게 출가하였다.
판전농(判典農)이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경(經)은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소윤(軍器少尹)이고, 차남 위(緯)는 별장(別將)이고, 그 다음 수문(殊文)도 별장이며, 딸은 어리다.
전교(典校 송무(宋懋))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고, 우윤(右尹 김남우(金南雨))이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상좌(上佐)이고, 차남은 광대(廣大)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증손(曾孫)은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위위(衛尉) 조무(趙茂)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종선(從善)은 중랑장(中郞將)이고 차남 유선(遊善)은 권무(權務)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순흥(順興) 이원적(李元)이 1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유희(有喜)는 숭은전직(崇恩殿直)이고 딸은 어리다.
여흥(驪興 덕림(德林))이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신(申)은 승봉랑 공조서령(承奉郞供造署令)이고 차남은 밀(密)이며, 장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이승원(李承源)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선덕랑 통례문지후(宣德郞通禮門祗候) 곽유례(郭游禮)에게 출가하였다.
밀직(密直 수림(壽林))이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숭의(崇義)이고 차남 숭도(崇道)는 전객녹사(典客錄事)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소부(小府 학림(學林))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어리고 장녀는 사헌지평(司憲持平) 김 만구(金萬具)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어리다.
개성(開城 기인걸(奇仁傑))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신(愼)이다.
순의(純義)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고, 순례(純禮)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자(滋)이고 딸은 어리다.
신혼(申渾)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호(浩)는 대전지유중랑장(大殿指諭中郞將)이고, 장녀는 낭장(郞將) 황윤기(黃允奇)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어리다. 대호군(大護軍 박영충(朴永忠))이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용수(龍壽)는 별장(別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며, 소부(少府 황간(黃侃)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약노(藥奴)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즐(隲)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효노(孝奴)이고 딸은 어리며, 양(亮)이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백공(伯恭)이고 차남은 백겸(伯謙)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천지가 정기(精氣)를 쌓아 공(公)이 뛰어난 자질로 탄생하니, 빛을 뿜는 구슬처럼 공이 그 정기 발양하였네. 명망(名望)은 천하에 넘쳐흘렀고 몸은 해동(海東)에 살았는데,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이 유자(儒者)의 종주(宗主)였네. 한유(韓愈)처럼 모두 우러러 존경하였고, 주돈이(周惇頤)처럼 상쾌하고 깨끗한 기상이었네.
네 번 정승(政丞)을 역임하여 나이 80이 넘었는데, 상서(祥瑞)롭기는 기린과 봉황이 이른 것과 같았고, 신기롭기는 시초점(蓍草占)과 거북점 같았네. 사직(社稷)에는 공(功)이 있고 생민(生民)에게는 은택이 있었으므로,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니 그 영화로움 짝할 만한 이 없도다. 자손(子孫)들은 공의 충효(忠孝)를 준행할지니, 준행하지 않아도 알 리 없다 말하지 말지어다. 공이 구원(九原)에 계시니라. <끝>
[註解]
[주01]예위(禮闈) : 한(漢) 나라 때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전조(銓曹)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발(跋) [김빈(金鑌)]
고려(高麗)의 익재공(益齋公)은 덕업(德業)과 문장(文章)으로 당세를 창도(倡導)하였다.
저술한 바 시문(詩文)을 《익재난고(益齋亂稿)》라고 명명하였으며, 시사(時事)에 대하여 이것저것 기록한 것을 《역옹패설(櫟翁稗說)》이라 불렀는데, 사지(詞旨)가 전아할 뿐만 아니라 전조(前朝) 전후 5백 년 사적(史跡)의 대략을 알 수 있으니, 실로 《고려사(高麗史)》와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 책이다.
간행(刊行)된 지가 오래어서 판각(板刻)이 이즈러져 오류가 생김을 면할 수 없었으므로, 선덕(宣德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 6년(1431, 세종 13) 전하(殿下)께서 문신(文臣)을 명하여 바루어 선사(繕寫)하게 하고,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에서 간행하게 하였다.
공(公)의 높은 도덕과 성대한 공업(功業)은 후배가 흠모(欽慕)하는 바이나 볼 수가 없으며, 다만 그 영화(英華)로운 통서(統緖)가 후세에 전하여 오는 것은 오직 문장(文章)을 힘입는 것이니, 학자(學者)로서 그 풍교(風敎)를 듣고 그 시(詩)를 독송(讀頌)하면, 반드시 흥기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 문집(文集)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특별히 다시 간행하도록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여지게 하셨으니, 전하께서 덕을 높이고 학문을 숭상하시는 아름다움이 아, 성대하도다.
선덕(宣德) 임자년(1432, 세종 14) 가을 7월 일에 조봉대부(朝奉大夫) 집현전 응교 예문응교 지제교 경연검토관(集賢殿應敎藝文應敎知製敎經筵檢討官) 신 김빈(金鑌)은 분부를 받들어 삼가 발(跋)을 짓는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익재선생문집 발(益齋先生文集跋) [유성룡(柳成龍)]
경자년(1600, 선조 33) 가을 내가 하촌(河村)에 있을 적에 동도윤(東都尹 동도는 경주) 이공 시발(李公時發)이 새로 판각(板刻)한 《익재선생문집》 인본(印本)을 보내오고, 또 말하기를, “익재 선생은 나의 선조(先祖)입니다. 왜란(倭亂)을 겪은 뒤 내외(內外)의 문적(文籍)이 거의 없어졌는데, 오직 이 책만이 간신히 불타 없어짐을 면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없어져 전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편질(篇帙)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이제야 일을 마쳤습니다. 이를 명산(名山)에 보관하여 영구히 전해지기를 도모하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발(跋)을 지어 주시오.”하므로, 내가 삼가 받아 다 읽어보니, 《익재난고(益齋亂稿)》가 10권(卷), 《역옹패설(櫟翁稗說)》이 4권, 《효행록(孝行錄)》이 1권으로 모두 약간 권(若干卷)이었다.
인하여 책을 어루만지면서 감탄하기를, “많구나, 선생의 글이여! 민첩하구나, 이공(李公)의 거사(擧事)여! 전(傳)에 이르기를 ‘군자의 유택(遺澤)도 오세(五世)가 지나면 끊어진다.’ 하였으나, 이는 다만 대개(大槪)를 말한 것이다. 대저 덕(德)이 두터우면 그 빛이 오랜 세월을 흘러가는 것으로, 그 유풍(遺風)과 여운은 백세(百世)가 지나도 오히려 보존되는 것이니, 어찌 단지 오세로 한정지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이른바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세 가지라는 것은, 덕(德)ㆍ공업(功業)ㆍ입언(立言)이다. 그러나 덕이 있는 자가 반드시 공업을 세우는 것은 아니고, 공업을 세운 자가 반드시 입언하는 것은 아니다. 고려(高麗) 5백 년을 통하여 세상에 명예를 드날린 사람이 많지만, 그 본말(本末)이 겸비하고 시종(始終)이 일치되어 우뚝하게 높이 솟아 의논을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을 찾아본다면, 오직 선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2백 34년이로되 남긴 글이 세상에 유행됨이, 북두(北斗)가 하늘에 걸려 있고 교악(喬嶽)이 눈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으며, 병화(兵火) 속에서도 사람들이 수습하여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유실(遺失)된 것이 없기에 이르렀으며, 또 훌륭한 자손(子孫)이 있어서 발휘(發揮)하여 선양하니, 덕이 두터우면 그 빛이 오랜 세월을 흘러간다는 말이 미덥구나.
내가 듣건대, 이공(李公)이 처음 동도(東都)에 이르렀을 적에는 왜적(倭賊)이 겨우 물러간 뒤라서 가시 덩굴만 성(城)에 가득하여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텅텅비어 있었는데, 이공이 다스린 지 얼마 안 되어 정사(政事)가 잘 행해지고 인심이 화합하여, 모든 시위(施爲)가 점차로 옛 모습을 회복했다고들 하였으며, 이에 정무(政務)를 보는 여가(餘暇)에 문교(文敎)의 일에 마음을 두어 학습(學習)에 관계되는 옛 서적은 다 취하여 간각(刊刻)해서 널리 유포(流布)시켰으며, 선생의 글에 대하여 더욱 정성을 기울여 몇 달 안 되는 사이에 이 큰 일을 신(神)처럼 빨리 완성시켰다 하니, 공(公)의 정사(政事)와 문학(文學)에 대한 재능이 남보다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참으로 선생의 후손(後孫)이라고 이를 만하다.
나 역시 선생의 외척(外戚) 계보(係譜)에 있으며, 과거 기사년(1596, 선조 2) 간에 선군자(先君子)께서 청주목(淸州牧)으로 나가 있을 적에 성근(省覲)하러 왕래하다가, 진사(進士) 이잠(李潛)의 집에서 선생의 유상(遺象)에 첨배(瞻拜)한 적이 있었는데, 잠(潛) 또한 선생의 먼 후예(後裔)였다.
선생의 유상은 바라보매 엄숙하고 나아가매 온화하였으므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뒤 선생의 유상이 병화(兵火)에서 보전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는데, 30년 뒤에 이 전집(全集)을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고금(古今)을 통하여 변천되는 인사(人事)를 돌아보건대, 거듭 느껴지는 바가 없을 수 없다.
선생의 문장과 덕업(德業)의 성대함에 대하여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의 서(序)에서 다 말하였으니, 내가 감히 덧붙이지 않는다. 다만 기꺼이 부윤공(府尹公)의 일을 말하고 또 나의 느낌을 기록하여 돌려보냄으로써, 뒤에 이 글을 읽는 자로 하여금 이 문집이 더욱 귀중함을 알리려 한다.”하였다.
이해 9월 상한(上澣)에 후학(後學) 풍산(豐山 유성룡의 본관) 유성룡(柳成龍)은 삼가 발(跋)을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지(識) [이시발(李時發)]
나의 선조(先祖)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은 빼어난 자질로 고려(高麗) 말년에 탄생하셨는데, 그 도덕과 문장의 성대함은 신사(信史 믿을 수 있는 사적(史籍))에 전하여 오고 지명(誌銘)에 실려 있어 뚜렷이 상고할 수 있으니, 뒷사람이 소급하여 덧붙일 필요가 없다.
저술(著述)하신 바 《난고(亂稿)》ㆍ《패설(稗說)》 및 찬(贊)한 바 《효행록(孝行錄)》 등 책의 옛 판본(板本)이 계림(鷄林)에 있는데, 계림은 곧 우리 이씨(李氏)의 본관(本貫)이다. 그러나 그 판본이 세상에 유행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자획(字畫)이 거의 다 이즈러졌고 계속하여 병화(兵火)를 겪었으므로, 인가(人家)의 책궤에 보관되었던 것과 아울러 함께 타버렸다.
아, 수백 년 뒤에 태어나서 수백 년 전을 소급하여 그 영화(英華)로웠던 발양(發揚)을 오직 이 편질(篇帙)의 보존에 의하여 알 수 있었는데, 이제 인몰(湮沒)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사문(斯文)이 다 함께 탄석(歎惜)하는 바이거늘, 하물며 후손(後孫)된 자에 있어서랴!
불초(不肖) 후손 내가 다행히 이 경주(慶州)의 부윤(府尹)이 되었으므로, 곧 이 지방에 사는 종인(宗人)들과 함께 급히 다시 판각할 것을 꾀하였더니, 사람마다 모두 기꺼이 그 비용을 도왔고 계속하여 서천(西川) 정 상공(鄭相公)이 거듭 편지를 보내어 부지런히 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족조(族祖)인 전(前) 정언(正言) 광윤씨(光胤氏)가 그 집에 보관하고 있던 《효행록(孝行錄)》을 찾아 보내면서 아울러 간행(刊行)할 것을 권면(勸勉)하였다.
아, 불초의 간절한 추모(追慕)의 정성과 다시 종인(宗人)들의 도움과 상공(相公)의 당부와 정언공(正言公)의 권면이 이 일을 완성시키게 한 것이다. 《난고》 및 《패설》과 《효행록》3책을 총합하면 약간 권(若干卷)이 되는데, 모두 직접 교수(校讐)하였고 그 글자도 옛 판각보다 크게 하였으며, 또 본집(本集)에 빠진 시문(詩文) 수편(數篇)을 수집하여 권말(卷末)에 붙였다.
《효행록》 1부(部)에 대해서는 정무(政務)를 보는 여가(餘暇)에 손수 선사(繕寫)하였는데, 이는 능하다고 여겨서가 아니고 나의 구구한 경모(敬慕)의 뜻을 붙이고자 해서였던 것이다. 판각(板刻)이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전말(顚末)을 밝히지 않을 수 없어 이에 말하는 것이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경자년(1600, 선조 33) 가을 11대손(代孫) 통정대부(通政大夫) 수경주부윤(守慶州府尹) 시발(時發)은 삼가 기록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익재선생문집(益齋先生文集) 중간지(重刊識) [허경(許熲)]
선생(先生)께서 평소 저술하신 것이 수없이 많은 데도 세상에 전하여 오는 것은 단지 약간의 시편(詩篇) 및 《패설(稗說)》 뿐이다.
지나간 만력(萬曆) 경자년(1600, 선조 33)에 상서(尙書) 이시발(李時發)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적에 판각(板刻)하였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자획(字畫)이 이즈러져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해 하였다.
내가 마침 본주(本州 경주를 가리킨다)의 부윤(府尹)으로 와 있었으므로, 세대가 오래가면 마침내 민멸(泯滅)될까 염려하여 드디어 다시 판각하여 중간(重刊)하였다. 선생의 이름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오래 전하여 질 뿐만이 아니라, 후생(後生)들이 이를 음송(吟誦)하면 족히 감발(感發)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풍화(風化)에 도움이 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구본(舊本)에는 연보(年譜)가 없었는데 선생의 후손(後孫)인 세석(世碩)이 가장(家藏)을 조사하여 대략 시말(始末)을 기록, 나에게 보였으므로 아울러 간행하여 후세에 전한다. 계유년(1693, 숙종 19) 정월 기망(旣望)에 양천후인(陽川後人) 허경(許熲)은 계림부(鷄林府)에서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익재선생(益齋先生) 연보(年譜) 후서(後敍) [김노응(金魯應)]
아, 선생(先生)의 문장 덕업과 성대한 공렬(功烈) 가운데 유구(悠久)히 전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은 동사(東史)에 실려 있다. 하지만 전하여오는 선생의 유집(遺集)도 참으로 소략(疏略)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이 문집(文集)에 기록된 것은 소략한 점이 많을뿐더러, 또 간행(刊行)된 지가 이미 오래어서 판본(板本)이 이즈러져 판별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내가 전에 월성(月城)의 수재(守宰)로 있을 적에 보익(補益)하여 다시 판각할 것을 도모하였었으나 곧바로 직차(職次)가 옮겨졌으므로 착수하지 못하였었는데, 근래 경주(慶州)에 사는 선생의 후손들이 이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동사(東史)에 실려 있는 것 가운데 요점만 뽑아서, 사실(事實)은 연보(年譜)에 휘보(彙補)하고 저술(著述)은 습유(拾遺)에 첨록(添錄)하였는데, 인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내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 보철(補綴)한 전말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돌려보냈다.
갑술년(1814, 순조 14) 중춘(仲春)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경주(慶州) 김노응(金魯應)은 삼가 기록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익재선생문집 중간지 [이규석(李圭錫)]
도(道)는 하늘에서 나온다. 하늘이 변하지 않으므로 도 또한 변하지 않는 것인데, 문자(文字)로 기록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를 변치 않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아! 우리 선조(先祖)의 이 문집(文集)은 도(道)가 보존되어 있는 바이니, 마땅히 변함없이 전하여져서 하늘과 함께 그 종시(終始)를 같이하여야 한다. 그러나 한결같이 하늘에만 의존한 채 임자년(1434)ㆍ경자년(1600)ㆍ계유년(1693)에 중간(重刊)하는 역사(役事)가 없었던들, 이 문집이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것 또한 기필할 수 없었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과 계유년의 역사와의 기간 또한 이미 오래라서 판본(板本)이 이즈러지고 파손되어, 전현(前賢)이 뒷사람을 돌보는 혜택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으므로 내가 일찍이 이 때문에 주야(晝夜)로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었다.
다행하게도 노림재(魯林齋)에서 족보(族譜)를 나누어 주던 날에 내가 이런 뜻으로 의논(議論)을 제기하였더니, 여러 족씨(族氏)들 또한 내 뜻에 동의하였으므로 드디어 종렬(鐘烈)을 시켜 공인(工人)을 모집, 노림재에서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는데, 노림재는 곧 익재공(益齋公)의 현손(玄孫)인 청호공(淸湖公)의 묘우(墓宇)이다. 7개월이 지난 다음 일이 준공(竣工)되었으니, 이는 청호공의 신령이 선조(先祖)를 위한 사업을 묵묵히 도와 준 것이 아니겠는가?
《효행록(孝行錄)》은 비록 귀원(龜院)에서 신간(新刊)한 것이 있으나 지금 원고(原稿)를 중간한 이 판본은 따로 노림재에 보관하려 하니, 사세(事勢)가 각기 따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인하여 그 일에 참여하였었으므로 감히 그 전말을 기록한다.
병인년 양로절(涼露節)에 19대손(代孫) 규석(圭錫)은 삼가 노림재(魯林齋)에서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