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타임스로 가서 이 기사 전문 보기>
미래창조과학부장관에 내정되었다가 자진 사퇴한 김종훈 씨가 3월 30일 워싱턴포스트지에 이에 관한 소회를 기고문 형식으로 올렸다.
<A return to South Korea, thwarted by nationalism ; 민족주의에 좌절된 귀향>
* 클릭하면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영어 기고문 전문을 볼 수 있음. 또한 이 기고문에 대한 영문 댓글도 볼 수 있음.
김종훈 씨는 이 기고문에서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검증을 마녀사냥(witch hunt)이라고 표현했으며, 마녀사냥을 한 주체로 민주당, 네티즌, 언론 등을 지목했다.
<이 기고문의 번역문 보기>
* 김종훈은 누구인가?
위키백과 프로필 요약
<Jeong Kim Biography 직접 읽기>
김종훈 (1961년 ~ )은 대한민국 서울 출생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기업인, 과학자이다. 알카텔-루슨트의 벨 연구소 전략연구소장이자 임원으로 2013년 2월에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의해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2013년 3월 4일 장관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김종훈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나서 군장교 출신인 아버지와 의붓 어머니 사이에서 극심한 가난을 겪으며 성장하였다. 5세에 부모가 이혼하였고 형제로는 형, 여동생 둘이 있었으나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1975년에 14살의 나이로 미국 메릴랜드 주로 이민을 갔으나 가난한 생활은 계속되었고 그의 부모는 차가 없어서 직장으로 걸어가야 했고 매일 2시간 정도를 걸어야 했다. 또 돈이 없었기에 한 벌당 50센트씩 하는 중고품 매점에서 옷을 구입했다. 그 후 인터뷰에서 '미국에 와서 처음에 딱 보니까 집이 꼭 감옥소같이 보이더라구요. 답답했지요. 백인만 생각했는데 처음 간 곳은 완전히 흑인촌이었어요.'라고 말하였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던 그는 앤 어런덜 카운티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수줍음이 많았아 적응이 쉽지 않았다. 미국 아이들은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 아니냐며 놀려대기 일쑤였고 점심값 50센트가 없어서 정부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식권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지만 그나마도 창피해서 안 먹는 날이 더 많았다. 그는 '그 나이에는 그게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돈이 없어서 공짜밥 먹는다는 게. 그래서 인제 밥 안 먹는 이유를 대요. 밥 안 먹기두 힘들어요.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살짝 보여줘서 먹고.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라고 당시 일을 회고하였다. 당시 스트레스가 심하여 집에 올 때면 항상 코피가 났다고 후에 회고하기도 하였다. 어눌한 영어실력 탓에 고교 때는 학교 감사관은 “지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며 별도로 IQ 검사를 받게 했다. 하지만 분석력과 이해력이 뛰어나고, 기억력은 그것만 못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로 인해‘외울 게 많은 의사는 안 되겠군. 말도 못하니 변호사도 어림없지. 천상 물리학자나 공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진로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생계 유지를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식당에서 그릇 치우는 일, 조경회사 아르바이트로 잔디 깎는 일도 하고, 식료품점에서 계산대 점원으로도 일했다. 가정 생활은 훨씬 더 어려웠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와 그의 관계는 그저 나쁘기만 했던 수준에서 견디기 힘든 정도로까지 악화되어 17세에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댄 브레든(Dan Bredon) 선생님께서 그의 처지를 알고는 자신의 집 지하실에 월세를 내고 살게 해주었다. (그 후 벤처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수학선생님의 이름을 기념하여 고등학교에 기부를 하게 된다.) 1978년 수학선생님이 그에게 애플의 퍼스널 컴퓨터를 보여줬다. 그는 즉시 여기에 빠져들었고 ‘잡스가 했는데 내가 못하란 법은 없지’ 하며 꿈을 키웠다. 그의 가난과 재능을 안쓰럽게 여긴 교장은 조기 졸업을 허락했다.
고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한 그는 명문 존스홉킨스대학 전자공학과에 부분장학금을 받고 진학했고 그는 3년 만에 우등졸업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영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어서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은 책을 통해 보충해야 했다. 대학시절 그의 부지런함과 집중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 그가 논문을 한참 쓰다가 배가 고파 시계를 보니 2시였다. 그래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서관을 나와 보니 새벽 2시였다는 이야기를 "밝을 줄 알고 나갔는데 깜깜했다"며 "12시간을 도서관에 앉아 집중하며 논문을 쓰다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몰랐다"고 하며 회고했다.그 과정에서 첨단 분야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후에 인터뷰에서 그는 '대학시절 컴퓨터에 미처서. 애플의 스티브 쟙스가 초기 PC 개발했을 무렵. 저건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고 느끼고 내 자신의 컴퓨터를 만들고 싶었다. 컴퓨터에 대단히 쏠려 있었습니다'고 말하였다.
김종훈은 그 후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7년 동안 원자력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다. 그가 후에 해군잡지에 기고하길 “왜냐하면 나는 이 나라가 나에게 베풀어준 기회에 대해 은혜를 갚길 원했기 때문이다.”며 "군복무는 완전한 미국인이 되는 통과의례였다"고 말하여 후에 한국에서 장관지명된 후 애국심 문제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또한 존스 홉킨스 대학으로부터 기술 경영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시민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김종훈은 미국해군연구실험실에 얼라이드시그널 (AlliedSignal)을 위해 일했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2년의 연구 후, 그는 1991년에 메릴랜드 대학교가 수여한 그 분야에 있어 최초의 박사학위인, 신뢰성 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에 그는 컨설팅 사업을 시작으로 몇개의 다른 사업을 시작하였다. 1992년에, 김종훈은 다른 시스템 사이에 전기적인 의사소통을 능률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진척시키기 위해 자신의 회사인 유리 시스템스(Yurie Systems)를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의 해군 배경 덕분으로 한 사람 작업으로 방위 계약을 얻어 보다 더 수익성이 있다고 결정했다. 그 컨설팅 작업은 군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강력한 야전 시스템에 걸쳐 음성, 자료와 영상의 전송을 허용할 수 있는 어떤 시스템의 만드는 것에 이르게 했다. 그 기간은 김의 기업가적 위험 감수의 절정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그의 집에 저당을 꺼내 4십만 달러의 빚으로 바꿨고 그의 신용카드들을 최대한도로 썼다.
그곳에서, 그는 무선 장치를 위한 비동기 전송 방식 스위치 개발을 이끌었다. 군사수요덕분에 유리 시스템스는 흑자가 되었다. 그 수익을 만족스럽게 즐기기 보다는, 유리 시스템즈를 주요 기업으로 세우는 것을 김은 시작했다. 그는 그의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을 고용하였고 전 국방장관 윌리암 페리를 고용하기 위해 열의를 냈다. 방위 계약에서 상용에 비동기 전송모드(ATM)의 표준을 지렛대로 삼는 것에 대한 잠재성을 인정받으면서, 1997년까지 김은 기술 기업가들의 가장 인기있는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인정을 받았다.
회사는 매우 성공했으며 1998년에 루슨트 테크놀로지 (Lucent Technologies)는 회사를 구입하기 위해 10억 달러 이상을 지불했다. 사실 유리시스템즈는 한국 대기업에 먼저 팔려고 했으나 '당신을 어떻게 믿고 기술을 사느냐'며 무시하였다고 후에 말하였다. 1998년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 최고 갑부 400명'에 들었을 때 김 내정자의 재산은 5억6천만달러(당시 환율기준 약 6천600억원)였다. 포춘이 1999년 발표한 '미국내 40세 이하 부자' 조사에서의 재산은 4억2천900만달러(약 5천148억원)였다. 매각 당시 직원들에게도 주식의 40%를 나눠주며 직원 중에는 20명가량의 백만장자가 나왔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다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훌륭한 팀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게 김 내정자의 생각이었다.
김종훈은 전기, 컴퓨터 공학, 재료, 원자력 공학부를 연결한 지정과 함께 신뢰성 공학의 실습 교수로 메릴랜드 대학교에 돌아갔을 때인 2001년까지 부사장으로서 루슨트에서 근무했다.
2003년 3월에 김종훈은 CTIA (Cellular Telecommunications & Internet Association)로부터 사이버넷을 구입했던 투자 그룹을 이끌었다. 그는 "세계 도처에 무선 사업자들에게 혜택을 줄 신 기술을 소개하기 위한" 의도로 사이버넷의 회장직을 떠맡았다. 그는 그들의 유명한 벨 연구소 부서의 수장이 되기 위하여 루슨트로 돌아왔을 때인 2005년 4월에 사이버넷을 떠났다.
1998년에, 코리아 소사이어티 (Korea Society)는 미국과 한국 관계를 더 가깝게 한 기여로 연례 밴 플리트상을 수여했다. 그는 전미기술아카데미로 취임했다. 메릴랜드 대학교는 그를 명예 혁신 전당 상 (Innovation Hall of Fame award)를 수여했으며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딴 〈Jeong H. Kim Engineering and Applied Sciences Building〉을 지었다. 추가하여, 김종훈은 나스닥 상장 청문 재심위원회 (NASDAQ Listing and Hearing Review Council)를 포함하는 많은 대학, 기업, 비영리 기구의 이사회에 재임중이다.
2001년, 루슨트 테크놀로지를 떠나 메릴랜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2005년 루슨트 테크놀로지를 인수한 벨 연구소의 소장 (President)으로 합류하였다.
벨연구소는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1925년 설립된 민간연구소로, 전기통신 및 기초과학기술을 연구한다.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미국의 자존심'으로 꼽힌다. 루슨트는 김 내정자의 혁신, 도전정신을 높이 샀고 그를 영입해 시장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연구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김 내정자는 몇 차례 고사했다. 벨연구소 역사상 사장 제의를 거절한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자격이 부족하다"는 게 거절 이유다. 결국 루슨트측의 삼고초려 끝에 2005년 김 내정자는 벨연구소 수장에 올랐다. 벨연구소 최초 외부인이자 최연소 수장이다. 김 내정자 부임 이후 연구소는 달라졌다. 기술을 통합하는 팀과 제품을 빨리 만들어 시장에 투입하는 벤처팀을 만드는 등 상용화 전략을 펴면서 김 내정자는 벨연구소를 위기에서 구한 최고의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김 내정자는 지난해 7월부터는 알카텔-루슨트 최고전략책임자직을 겸임해 회사 전략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연구소를 다시 세운 자신의 일에 대해 "저는 이 일이 쉬워서 맡은게 아닙니다. 이 일이 어렵기 때문에 맡은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스탠퍼드대 한국학 석좌교수 자리도 페리 전 장관의 이름을 따 만들었으며 2007년에는 그와 함께 북한 개성공단을 방문하기도 했다.또 하키와 농구팀을 갖고 있는 위저즈 그룹에 2400만달러를 투자했다. 메릴랜드대학교에 동양인의 기부로 만들어진 대학건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본인이 기부해 김종훈 엔지니어링 빌딩을 만들기도 했다. 김은 또한 워싱턴 마법사와 워싱턴 캐피털의 일부 소유자 및 벤처 자선 파트너이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지명2013년 2월,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의해 대한민국의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으로 지명되었다.
2013년 2월 19일, 김종훈 또 드러난 ‘CIA 이력’ 2009년 자문위원도 지냈다
2013년 2월 20일 1년여 전 김종훈 "나는 진짜 미국인이 됐다"
美해군 잡지에 기고… 정체성 논란 불붙어 "해군 복무 통해 이곳이 조국이고 미국인이라는 사실 증명할 수 있게 됐다.
2013년 2월 26일 김종훈 부인 소유건물서 유흥업소 영업
박홍근 민주통합당 의원은 26일 “김 후보자의 부인이 1998년부터 소유한 청담동의 4층짜리 건물 지하에서 ㄱ 유흥주점이 영업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주변 상인들과 주민들이 ‘해당 유흥주점에 접대부로 추정되는 여성들이 자주 드나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김 후보자의 부인 김아무개씨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법원 경매를 통해 이 건물을 낙찰받아 임대사업을 벌여왔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 사퇴
2013년 3월 4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2013년 3월 4일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결국 사퇴했다. 김 후보자가 밝힌 사퇴의 변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자신이 미국에서 성취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으나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싼 ‘정치권의 혼란상’, 특히 야당의 몰상식한 태도에 실망했다는 것이다.(중략) 고위 공직자가 자신이 맡은 자리에 대해 고맙고 영광스럽고 과분하게 여기는 겸손한 자세가 없이는 오만과 편견으로 빠지게 돼 있다.
|
첫댓글 조국을 욕하는 이가 미국 국민들로 부터 욕 먹지 않을지 걱정 해봅니다..
이사람아 오바마가 한국와서 대통령하면 더 잘 할까~?
"미국에서 성취한 모든것을 등에 업고 한국에서 실험(실행,권력접목)하려고 했으나, 미국정서를 이해(?)못한 한국민들에 의해서 실패했다" 가 정석일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