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조깅을 시작한 후 10년이 지나도록 마라톤에 도전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라톤은 엘리트 선수들의 전유물이고, 보통사람들은 불가능하리라는 先入見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세계대회에서의 메달 획득에 초점을 맞춘 엘리트 위주의 체육정책 탓으로도 볼 수 있다. 사회체육에 신경을 덜 썼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마라톤에 처음부터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능하다고 눈을 감고 있는데 마라톤에의 길이 보일 리가 없다.
내 경우 조깅 단계에서 마라톤으로 목표 전환이 늦어진 것은 매일 하는 4㎞ 달리기 습관과 관련이 있다. 어떻게 하면 기록을 단축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거리를 늘리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4㎞를 20분에 뛰었으면 8㎞는 「곱하기 오」, 즉 40분 안에 뛰어야만 한다는 경직된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올림픽 100m 선수가 똑같은 속도로 200m를 뛰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8㎞를 뛸 때엔 4㎞ 뛸 때의 속도보다 느리게 뛰어야 한다. 1995년 여름 황영조 선수와 올림픽 공원에서 만나서 달리는 방법에 관해 조언을 들었다. 처음 준비운동인 스트레칭을 충분히 하고 나서, 걷거나 서서히 달리다가 몸에 땀이 날 정도로 되었을 때 제대로 스피드를 내어 달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반대 순으로 점차 마무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정리 스트레칭을 하라는 것이었다.
마라톤 연습은 기를 쓰고 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와 대화하면서 기분 좋게 달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속도를 내서 달리면 누구나 숨이 차게 된다. 숨이 차다는 것은 우리 몸의 세포들이 필요로 하는 산소를 우리 피가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소를 더 공급하기 위해서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지고 한계에 도달했을 때 숨을 헐떡거리게 된다. 그럴 때 속도를 늦추면 다시 숨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간단한 이치를 이해한다면, 속도만 늦추면 얼마든지 오래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마라톤 完走도 같은 원리이다. 시간 단축을 위해 필사의 힘을 다하는 엘리트 선수가 아닌 이상엔, 너무나 간단한 원리이다.
나는 1998년 봄 통일부 차관을 끝으로 공직을 그만둔 후 체중을 줄이기 위해 북한산 등반을 시작하였다. 초여름 2주일을 하루 세 시간 정도 열심히 등반을 하였더니 체중 7㎏이 빠졌다. 체중이 줄어드는 기쁨과 함께 온 것은 무릎의 통증이었다. 결국 통증이 심해져서 등산은 포기해야 했고, 그 대신 달리기에 치중하기로 하였다.
워싱턴의 運河 길
어느 여름 날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집 근처 호수공원을 달리다가 같이 뛰던 사람으로부터 일산호수공원 마라톤클럽(회원 500명, 권영후 회장)이 결성되어 있고, 일요일 새벽 6시에 회원들이 모인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 나간 날부터 과연 회원들은 새로운 참가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도 전해 주고, 달리는 방법에서부터 부상방지를 위한 조언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달리는 방법에 관해 눈을 뜨게 된 셈이다.
그해 12월 나는 美 워싱턴 소재 국제전략 문제 연구소에 객원 연구원으로 오게 되었다. 오자마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은 달리기였다. 도시 전체가 공원처럼 아름답고, 달리기와 자전거를 위해 별도 전용도로가 잘 마련돼 있기 때문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정말 부러웠다. 같이 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도심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록 크리크 공원(Rock Creek Park)의 조깅 코스를 따라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99년 10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해병대 마라톤」에 중앙일보의 문창극 지국장이 完走를 하고, 유엔 대표부의 서대원 차석대사가 뉴욕 마라톤을 완주하였다. 문창극 지국장은 나에게도 마라톤을 해보라고 권유하고, 지구력을 기르는 장거리 달리기(LSD)를 해보라고 권하였다.
추천한 코스는 워싱턴의 조지타운에서 오하이오에 이르기까지 연결되는 운하 길이었다. 이 코스는 미국 독립 이전부터 건설되었던 화물운반용 작은 운하로서, 그 운하를 따라 부드러운 흙길이 마련되어 있다. 휴일엔 그림같이 아름다운 운하 길을 따라서 끝없는 미래를 설계하면서 한없이 달리게 되었다.
한 번은 한여름 운하 길을 20㎞ 달렸더니, 겨드랑이와 다리 사이가 쓸려서 혼이 난 적이 있다. 수만 번 마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장거리를 달릴 때에는 반드시 바셀린을 바르고, 젖꼭지에도 반창고를 붙인다. 미국에는 특수 반창고까지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달리기 거리를 늘려 나가자 부작용들이 또 나타나기 시작했다. 등산에서 경험했던 무릎 통증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라톤 도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습을 하던 차에 일어난 일이라, 속으로는 매우 불안하였다. 그래서 마라톤 용품 전문점에 들러 의논하였더니, 1차적으로 쿠션이 좋은 러닝화로 바꿔보라고 권하였다.
130달러짜리로 그때까지 신던 운동화보다 값이 두 배 이상이나 되었다. 테니스화와 러닝화의 바닥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것도 이제 알게 되었다. 신는 사람의 연령이나, 발의 모양, 走法 등에 따라 러닝화도 세분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라톤을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에 맞는 좋은 신발을 신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800㎞ 정도 달린 후엔 새 신발로 바꾸는 것이 좋다. 여기에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 마라톤에서 발생하는 부상을 방지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다.
그 기회에 과거 마라톤 선수였고 이제는 저명한 저술가인 갤러웨이의 「달리기에 관한 책(Galloway’s Book on Running)」을 구입하여 좀더 체계적으로 마라톤에 접근하기로 하였다. 맥박, 훈련계획, 대회 참가요령, 러닝 폼, 준비운동, 부상방지, 음식, 신발 고르기, 신발 끈 매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궁금한 내용을 과학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그동안 마라톤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공포감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전에는 인수봉 암벽을 멀리서 보는 것과 같이, 마라톤이 나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운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가파른 암벽도 가까이 가보면 올라가는 길이, 그것도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서 경험했던 전문가들이 문외한들이 겁을 먹고 뒤따라 올 것에 대비하여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이제야 이 책에서 제시한 메뉴대로 착실히 훈련을 하면 마라톤을 完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2000년 6월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