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대중 가요의 역사... 』
★모방으로 시작된 재팬 팝★
일본의 팝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일본이 원자폭탄 투하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되고 일본이 패망한 1945년 이후부터이다. 8·15로 우리는 해방을 맞았지만 일본은 이날이 패망한 날이다. 1945년 8월 7일 미국의 폭격기 B-29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1주일만인 8월 15일 일본 천왕이 무조건 항복이라는 방송과 함께 며칠 후 일본에는 맥아더 장군의 연합군이 상주하게 되면서 미국의 팝 문화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도 환도 이후 8군쇼라는 단체가 생겨 가수들이 팝송 가사를 한글 토를 달아 어설프게 불렀듯 초기 일본 역시 그랬고 우리와 비슷한 연예인의 모임이 생겨 미군부대 주위의 클럽 등지에서 팝송을 연주하며 싫든 좋든 간에 모방의 역사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패티 페이지 등의 전형적인 컨트리 & 웨스턴 붐이 있었고 맘보의 유행시대가 있었지만 뭐니해도 로커빌리의 유행은 대단했다.
때마침 일본의 경제는 전후 부흥하고 있던 때로서 1958년에 개최된 '웨스턴 카니발'은 자그만치 관람객이 5만명의 넘을 정도로 로커빌리 최대의 이벤트였다, 이런 여파로 미니 커티스, 히라오 미아사키, 야마니타 게이지 등 3명의 로커빌리 가수가 인기를 끌었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들 3명이 동시에 닐 세다카의 'One Way Ticket'을 각각 커버 버전하여 동시에 히트시킨 것이다. 이것만 봐도 당시의 로커빌리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1960년 전세계를 뒤흔든 트위스트 열풍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어서 웬만한 가수는 거의 트위스트를 불렀으며 심지어 정통 엔카 가수인 미조라 히바리와 고바야시 아키라까지도 트위스트를 부를 정도로 일본열도는 트위스트 붐을 이뤘다.
★이미 1960년대에 미국시장을 석권하다★
일본팝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전기 기타의 발달로 록음악이 활성화되면서 소위 일렉키 사운드(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일렉트릭 기타에 의한 음악)붐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캄보밴드 벤처스가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일본가수 사카모토 큐의 'Sukiyaki'란 곡은 일본어로 부른 노래지만 미국 시장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노래는 일본영화 '위를 보고 걷자'의 주제가로서 일본어 버전으로 노래한 게 빌보드 차트에 오른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곡이 히트한 이면에는 당시 미국에는 일본 붐이 불던 때로서 '사요나라', '나생문', '7인의 사무라이' 등 일본영화가 소개되면서 미국인들은 막연히 일본에 대한 동경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이 기록은 지금까지동양인으로서 미국에서 1위를 차지한 유일한 노래이다.
아무튼 그 여파로 사카모토는 국민적인 영웅대접을 받았고 미국에서도 인기를 끌어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하는가 하면 뒤이어 'China Night(Shina No Yoru)'를 발표했는데 이것도 일본어 버전 곡이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1985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그후에도 일본 가수로 70년대에 핑크레이디, 80년대에 라우드니스, 90년대에 마츠다 세이코 등이 미국시장에 진출했었다.
한편 이때는 피터 폴 & 매리, 부라더스 포의 영향을 받은 모던 포크가 대학생을 중심으로 퍼졌고 이때부터 구미의 팝을 적절히 가미시킨 재팬 팝이 탄생하는 기틀이 마련됐다.
★그룹 사운드의 시대가 열리다★
1964년 비틀즈의 선풍이 일본에도 불어 왔다. 그들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인 것으로서 그 해 여름, 하오리 차림으로 하네다 공항에 내린 비틀즈를 보기 위해 일본의 10대 소녀 팬들은 아우성을 쳤고 그들의 도쿄 공연은 성황을 이뤘다. 그런데 비틀즈의 상륙은 벤처스가 지펴 놓은 일렉트릭 기타(일본인은 일렉키라고 줄여서 표현함) 붐을 더욱 확산시킨 가운데 일본 일렉 기타의 선구자 데라우치 다케시가 이끄는 블루진스를 위시하여 스파이더스, 블루 카미츠 등이 비틀즈와 벤처스풍의 스타일로 인기를 굳혔다.
여기에 1965년 그룹사운드 봄에 도화선이 된 TV프로그램 '토너먼트 일렉 대행진'이라는 프로그램 역할이 컸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펼쳐진 아마추어 밴드 콘테스트가 일본 전역의 젊은이들에게 동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 인기배우 가야마 유조우의 영화 '일렉의 왕자'가 히트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듯 일렉트릭 사운드의 발전은 그룹 사운드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면서 1966년 블루 카미츠의 <푸른 눈동자>는 50만장이나 팔린 가운데 1967년에는 그룹 사운드의 우상적인 그룹 타이거즈를 탄생시킨다. 그들의 'Sea Side Bound'는 그동안 10대 여학생들이 주류였던 팬이 일반인들에게까지 번져 나갔으며 그룹 사운드의 3총사 블루 카미츠의 'Blue Chateau', 골든 캅스의 '긴머리 소녀', 카나비츠의 '좋아 좋아 좋아'등은 일본 가요사에 명곡으로 기록된다.
★야마하가 앞장 서 가요제로 국제화 꾀해★
1970년대 재팬 팝은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에서 국제적으로 도약하는 시대였다. 이미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낀 자부심에다 여기에 일조를 한 게 악기생산 메이커인 야마하가 1970년대부터 개최한 '야마하 세계가요제'와 뒤이어 1972년부터 도쿄방송의 'TBS 국제가요제'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들 가요제는 막대한 자금과 홍보로 기존의 산레모 가요제와 유로비언 가요제의 아성을 넘어서며 이들 가요제를 통해 알 그린,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칩 트릭, 레이프 가렛, 스리 디그리스, 패트릭 쥬베, 클로드 챠리, 놀란스 등을 스타급 가수로 배출했을만큼 일본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공이 컸다.
그런 가운데 유선방송의 활성화와 카세트의 보급, 본격적인 TV 시대의 도래로 미디어에 편승하여 음악산업이 만들어 낸 스타들이 배출된다. 하시, 후니키, 사이코, 노구치고로, 사이조 히데키, 히로미 등이 각광을 받았으며 여성 가수로는 유키 무라이즈미, 고야나미 루미코, 미나미사 사조쿠,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 야마구치 모모에 등이 이때 배출된 스타들로 일본은 이때 이미 국제적인 반열에 올라섰다.
★안그라 포크의 도약★
한편 록과 포크는 TV가 모든 걸 조정하는데 반발해 반항의 수단으로서 TV보다는 라이브 하우스와 심야 FM방송에 그 힘을 키워 나갔다. 이른바 '안그라 포크'(언더그라운드 포크라는 뜻)로서 그들은 사회적인 풍자를 주로 노래했다. 오카바야시 노부코, 다카이시 도모야, 디카다 와다루가 대표적인 인물로 그들은 기타 하나만 들고서 구미의 포크의 복제가 아닌 독창적인 풍자적인 노래를 만들어 반체제를 표방하며 젊은 세대들로부터 카리스마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에 영향을 받아 1970년대에 이미 '안그라 포크'가 상당한 파워로 부상한 가운데 요시다 다쿠로, 가구야 히메, 이노우에 요스이 등이 TV 출연을 일체 거부한채 레코드 판매와 콘서트만으로 인기를 유지시켜 나갔다. 이에 반해 우리는 포크가 군사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원천봉쇄 당한 것과 비교해서 일본은 이때에 언더그라운드의 영역이 자리를 잡았으며 때마침 불어온 음악의 향연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본격적으로 록을 지향하면서 록이 활짝 꽃을 피우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그 결과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그룹 해피 엔드를 배출시켰다. 이로서 일본은 영. 미의 헤베메틀 그룹이 꼭 다녀가는 필수적인 코스로 꼽게 되었고 특히 딥 퍼플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핑크 레이디의 등장으로 활력소★
1970년대 일본 팝이 낳은 2명의 스타는 사와다 겐지와 핑크 레이디이다. 사와다는 그룹사운드 시대에 탤런트 적인 기질로 1977년 <마음대로 해라>를 시작으로 콘서트를 통해 히트곡을 연타했던 인물이며 핑크 레이디는 메이과 게이로 구성된 여성 2인조 디스코 그룹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의상과 안무로 발표하는 곡마다 1위를 차지할 만큼 대단한 인기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TV를 최대한으로 활용해 화려하고 시선을 끄는 아이디어를 동원했다는 점으로 오디오보다는 비디오 쪽에 우선했다. 특히 핑크 레이디의 폭발적인 인기는 1978년만 싱글 1,400만장을 팔았는가 하면 일본 가요사상 초유의 두번째 싱글부터는 9곡이 연속 No.1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여파로 핑크 레이디는 1979년 미국시장에 진출해 'KIss In The Dark'란 곡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37위에 올라 사카모토 큐 이래 16년 만에 미국 땅에 재입성한 가수로 기록된다.
이처럼 핑크 레이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이면에는 10대의 어린 초등학생을 레코드 구매층으로 겨냥했다는 사실로서 지금은 일반화된 현상이지만 당시로서는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로서 이때부터 레코드 구매층이 하향 조정됐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일본 기업의 CM송 상위 베스트 10곡을 모두 독점하기도 했는데 이런 점만 봐도 그들의 인기에 국민적인 공감대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차이돌' 가수의 득세★
영.미의 팝계가 그렇듯 1980년대의 일본 역시 뉴뮤직의 시대였다. 뉴뮤직이란 1970년대말 펑크 록이 보다 테크노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나타난 것으로 영국이 본거지이다. 일본이 이 분야에 빨리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야마하, 코그, 카시오 등 전자악기(키보드)가 이미 세계적인 브랜드로서 구미의 뉴뮤직 아티스트가 거의 이들 일제 악기를 사용한다는 이점과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인 뮤지션인 세카모토 류이치, 호소노 하루오미, 다카하시 켄히로, 기타로 등의 전자 사운드가 일본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이런 가운데 일본 경제가 거품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점점 더 다종다양한 시대를 맞이한다. 1988년까지 주류를 이뤘던 LP와 카세트 테입을 능가하는 강력한 미디언인 CD가 등장하고 가라오케의 일반화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비디오 대여점이 있듯 레코드를 대여해주는 렌탈 레코드 숍의 보급으로 인해 음악인구는 삽시간에 확대일로를 걷게 되었고 음악산업이 전력적으로 만들어 낸 스타가 양상되어 TV가 절대적인 영향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이돌(10대의 우상이란 뜻)'가수가 속속 등장하는데 노무라 오시오, 곤도 마사히코, 다라 도시히코, 소년대, 다노킨 트리오, 히카루 겐지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그들이 가는 곳이면 으레껏 10대 팬들이 나타나 극성을 부렸다. 여성가수로는 유미 마추토야, 마츠다 세이코, 카야마 미호, 고이즈미 교우코, 나카모리 아키나, 하야미유 등의 등장으로 일본의 음악산업은 절정기에 이른다. 그러나 유감인 점은 이들 '아이돌'가수들로 인해 음반 판매는 호황을 누렸지만 10대의 기호에 맞춘 음악의 질은 현저하게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가수를 가리켜 '차이돌'(Child Idol을 합성시킨 말)가수라고 일컫는데 어린10대 아이들의 우상을 의미한다.
★메틀밴드 라우드니스의 미국침공★
한편 록 씬에서는 새로운 파워가 등장한다. 버블(거품) 사회가 만들어 낸 왜곡에 대해 경종을 울리며 카리스마적 존재가 된 오자키유 타카이, 도쿄 로커스, 일본의 펑크를 단숨에 메이저화 시켜버린 블루 하츠,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안전지대, 기발한 외모와 사운드에 가사의 언밸런스가 신선한 X-재팬, 활기있는 무대공연이 매력적인 레베카, 여성 밴드의 가능성을 넓힌 프린세스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괄목할만한 것은 라우드니스의 미국시장 진출이다. 라우드니스의 홍보전략은 자신들의 얼굴을 앨범쟈켓에 싣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인의 음반을 규제할 때도 발매됐으며 일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영어언어 구사가 훌륭하다.
기실 지금껏 헤베메탈 이란 장르는 미국과 영국의 독무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에도 독일, 스위스 등 유럽 몇 나라가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영.미가 양분하고 있는 마당에 그것도 영어가 취약한 동양, 특히 일본의 진출은 과거 2차대전 때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은 명실공히 재팬 록을 대표하는 밴드로서 라우드니스의 앨범 'The In The East'가 1984년 빌보드 앨범차트(1972년)에 랭크된 것은 과거 사카모토 큐와 핑크 레이디, 마츠다 세이코의 싱글차트 진입과는 또 다른 차원으로서 재팬팝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쾌거였다.
★세이코, 아무로 등 우먼 파워의 시대★
1990년대로 옮기면서 일본의 레코드 산업은 더욱 상품화의 길로 치닫는다. 레코드사의 힘이 약해진 반면 프로덕션의 역할이 커져 가수, 노래, 취업의 모든 업무를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체제가 정립되었다. 즉 가수, 곡, 사운드를 철저히 계산해서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포장시켰다. 그 대표적인 존재로 자드(Zard), 그리고 비즈(B'z), 완즈(Wands)가 있다. 그들은 일체의 라이브와 TV 출연을 삼가한 채 CM송과 드라마 출연으로 성공을 거뒀다.
이런 가운데 가수와 탤런트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탤런트가 노래하고 가수가 드라마에 출연하는게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 탤런트의 노래는 고정 팬들을 음반의 주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나 가창력에서 수준미달이 많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라 "누가 노래를 불렀다"를 앞세운 전략으로 최근 국내에서도 안재욱이나 김민종, 손지창 등 탤런트가 가수 겸업을 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1990년 '일본의 마돈나' 마츠다 세이코가 마침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도니 윌버그와 듀엣으로 노래한 'The Right Combination'이 빌보드 싱글 랭킹 54위에 올랐는데 이는 일본의 자금력과 홍보전략이 세계적인 위치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세이코의 성공은 재팬팝 씬에 우먼파워의 시대를 가져왔다.
그 선봉장은 아무로 나미에로 현재 일본 최고의 인기가수이다. 아무로 나미에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가수였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냥 뉴스거리가 된다. 그녀가 입는 옷, 그녀의 악세사리는 24시간 안에 모조품이 나와 불티나게 팔려 나갔는데 이런 제반 모든 것이 홍보전략의 일환이다.
아무로에 비견할 수 있는 가수로 듀오 퍼피의 인기도 만만찮다. 이밖에도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스즈키 쇼오코, 동.서양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샌디 등 지금 일본 팝은 여성가수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느낌이다.
한편 이런 와중에 생겨난 게 '시티 팝'이다. 즉 술집에서 듣기 편한 음악을 캐치프레이즈로 한 이 장르는 감상보다는 배경음악에 가까운 성격을 띤 것으로 드림스 컴 트루, 하라아츠 아이라, 고메 고메 클럽 등의 노래가 그것이다.
이밖에도 오자와 겐지, 오리지널 러브, 커넬리어스 등 각기 다른 장르의 음악이 혼재한 음악이 1990년대 초반을 장식했다.
★댄스의 하락과 세대교체의 바람★
현재 일본은 댄스뮤직의 급격한 하강곡선을 긋고 있다. 그동안 TK(고무로 데츠야)로 대변되던 유로 댄스 열풍이 현저하게 위축된 느낌이다. 이는 영. 미의 팝이 모던 록이나 인더스트리얼 계열의 음악들이 상반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다 고무로 사단의 대표적인 아무로 나미에의 결혼, 고무로의 미국시장 진출 등 내적 요인까지 가세해 댄스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틈새를 파고든 록 음악이 다시금 활기를 띠고 있다. 여전한 모던록의 강세속에 록을 빙자한 가요이건, 인디에서부터 올라온 진정한 록밴드이 간에 이미 상당한 록 성향의 음악들이 주류로 등장하며 베스트셀러 앨범중 무려 70퍼센트 가량이 록 음악이다. 이같은 현상은 고무로가 공동으로 설립한 에이벡스 트렉스 레이블에서조차도 문 차일드(Moon Child)같은 록밴드에 투자를 시작했으며 심지어 섹시 스타 히토미가 갑자기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나올 정도로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지난 몇 년간 일본 대중음악계를 성도해 온 X재팬의 해산, TK사단의 아무로 나미에를 비롯한 아이돌 가수 ,비즈(B'z), 드림스 컴 트루 등 기존의 빅 스타들의 작품들이 판매저조를 기록하는 반면 글레이(Glay), 스피드(Speed), 주디 앤 매리(Judy & Mary), 에브리 리틀싱(Every Little Thing) 등 신예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인기를 거둬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