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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6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제가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성경 : 요한복음 21장 15~19절
지난주간 교회 청소와 정리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 식당에 갔습니다. 그렇게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의 소리를 지르는 수준으로 들려온 그 목소리를 찾고자 고개를 돌리니 TV에서 뉴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스는 인사청문회 자리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 들으면 굉장히 무안할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그 사람이 앉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문득 ‘자격’이라는 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자격’이라는 말의 뜻은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거나 일정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런 가벼운 뜻이 아니라 너무 무거운 뜻을 지닌 단어가 ‘자격’이라는 말 같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자격’이라는 말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그리고 저에게는 이상하게도 이 말이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종종 이런 말을 듣곤 합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될까요?”, “저 같은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어!” 등등의 말들입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발언을 하게 되어도 그런 발언을 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들도, 스스로 묻곤 합니다. 자기의 능력보다 어려운 위치에 있다면 더 많이 자격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꾸만 작아지는 마음은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어 내가 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 존재인지, 스스로 자꾸만 ‘자격지심’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나의 무능함이 두각이 되는 것 같고, 회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고, 아무리 봐도 이 회사를 다닐 자격이 없다고까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부모로서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래, 오늘부터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할거야!’, ‘오늘은 화내지 말아야지!’, ‘칭찬! 칭찬! 잊지 말자’라고 생각하다가도 아이의 행동을 보는 순간 폭발하고 등짝 스매싱을 날리게 됩니다. “야! 너 진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어이구! 내가 못 살아 정말!”, “핸드폰 좀 그만하고! 공부 안 하니?”, “말 좀 들어라 말 좀!” 그리고는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곧 후회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스스로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서는 어떨까요? 신앙생활이야말로 이 ‘자격’이라는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면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셔야 할 이유가 없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자격이 없고,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에 염치가 없어 자격이 없다 말하고, 내 안에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이 없다고 단정 짓는 분들도 계십니다. 혹시나 여러분들에게 누군가 이렇게 질문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은 예배드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우린 이 질문 때문에 많이 흔들릴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사탄은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넌 예배드릴 자격이 없어!”, “와~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하나님이 모를 거 같아? 하나님이 그런 너의 예배를 받으실까? 넌 지금 하나님 앞에 나올 자격도 없어!” 라고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와 섬김의 사역을 맡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데, 더 뛰어난 사람이 해야 하는데, 난 잘 못하고 부족한 사람이라 그 자리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사역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교회 안에서 직분을 부탁드릴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자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말씀의 통로가 되기에는 아직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하기에는 저는 여전히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리 있는 듯 느껴집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되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격’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괜시리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죄책감이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자꾸만 자격지심에 빠져듭니다. 그렇다고 회개할 거리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억지로 눈을 감고 하나님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내뱉게 됩니다. 그러니 예배는 멀어지고, 기도는 어렵고, 찬양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 되어지는 듯 보입니다.
오늘 함께 읽었던 본문이 바로 그런 ‘자격’에 대해서 가장 깊게 고민했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때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 변절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시 어부가 된 사람입니다. 3년 동안의 일들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삶에 희망이 없기에 다시 하던 대로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직접 베드로를 만나러 베드로를 처음 만났던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얼마나 베드로의 마음이 자격지심으로 가득했는지 바로 옆에서 3년 동안이나 보았던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실루엣만 보고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 터인데 베드로는 완전한 절망에 빠져 무엇이라도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토록 듣고 싶었던 예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런 것을 묻냐 짜증이 나서 그저 퉁명스럽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바로 이 말이 베드로의 귀를 때리고, 마음을 때렸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낯익은,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먼저 눈치를 채고는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저 분은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물 가득한 고기를 바라보던 시선을 그제야 바꾸어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이 지금 눈앞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서둘러 벗고 있던 겉옷을 입었습니다. 지금 보여 드릴 수 있는 자격은 스승 앞에서 벗은 몸을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동료들이 근처에 올 때까지 베드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 지 송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전혀 예상 밖에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더니 잘 살고 있냐? 이런 자격 없는 제자들 같으니라고! 너희들이 그러고도 제자라고 할 수 있냐? 배은망덕한 녀석들!”
사실 이런 말을 들어도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 도망쳤고, 죽기 싫어 외면했고, 죽기 싫어 고향에 내려와 다시 어부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책하셔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변명할 자격도 없는 베드로입니다. 그 누구도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같이 아침을 먹자고 하십니다.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직접 빵을 구우시고, 직접 고기를 굽기 시작하십니다. 아무런 질책도, 비난도 없습니다. 그저 따뜻한 불과 향기로운 음식 냄새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가와 직접 빵과 고기를 나누어 주시기 시작합니다. 다함께 요한복음 21장 13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요한복음 21장 13절, 새번역>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어떻게 그 빵과 고기를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손에 들고 눈물을 뚝뚝 흘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 찬송가가 자꾸만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제는 스승이라고 부를 자격조차 없는 제자가 아니라 여전히 동일하게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라고 생각하며 대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그저 묵묵히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밥을 다 먹어갈 때까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듯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침묵이 얼마나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그렇게 식사가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를, 제자들을 만나러 온 이유를 이제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말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자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 질문을 듣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랑하는데 그렇게 행동해야 했냐고 자격을 운운할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점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두 예수님의 이 말씀을 주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다시금 패배와 절망감에 빠져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십니다. 제자가 될 자격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여하는 것을 알려주시기라도 하시듯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내 양 떼를 쳐라”, “내 양 떼를 먹여라”
다시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마치 베드로가 3번 부인한 것을 모두 잊게 해 주실 마음인 듯 3번이나 물어 보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계속해서 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번째 대답을 할 땐 불안한 마음마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는 고백도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 날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인 것처럼 다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 <요한복음 21장 17절, 새번역>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자격지심에 빠진 베드로를 아십니다. ‘자격’ 때문에 고민하는 우리를 아십니다.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를 아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다시 시작하자! 다시 같이 걷자! 나를 따라라!”
다시금 ‘자격’을 부여 하십니다. 다시금 제자로서 부르십니다. 자격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그 ‘자격’을 당당하게 허락하십니다. 마치 자격증을 수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괜찮아, 베드로야! 넌 여전히 내 사랑하는 제자란다. 내 일을 맡길 사람이란다. 나를 따라라!”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괜찮아! 넌 여전히 내 사랑하는 자녀란다! 얼른 자격지심을 버리고 나의 일을 맡아 주지 않겠니? 내가 괜찮으니 ‘자격’에 대한 마음을 다 내려놓으렴. 이 자리가 바로 너의 자리란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싶단다. 나를 다시 따라오지 않겠니? 나와 다시 함께 하지 않겠니?”
네. 그렇습니다. 오늘 지금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 허락하신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는 길입니다. 고민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격’이 안 된다고 나를 비웃는 사탄을 향해 예수님이 허락하신 자격증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의 힘으로 자격증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격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동역자라고, 자녀라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새번역>
그 자격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당당하게 함께 할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24시간대기하고 있는 콜센터가 연결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확증을 얻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 모든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크게 보면 인류 전체를 위한 놀라운 역사이겠지만, 가장 우선은 바로 나를 위한 부활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자격 논쟁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도록 예수님은 부활이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까다로운 논문 심사를 받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보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자격을 논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그 자격을 ‘부활’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안식일이 아닌 안식일 다음 날을 주님의 날로 지키며, 주일에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신 부활이 있었기에 우리는 살아갈 희망을 얻고, 당당히 자격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먼저 찾아오셨던 주님이 이 시간 우리 모두를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이 시간 간절히 여러분과의 아침 식사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다시 시작하자고, 같이 걷자고, 나를 따라오라고 친히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는 이 부르심에 응답했던 베드로의 후기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촌구석 변절자 어부는 정말로 ‘사람 살리는 어부’가 되어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밟는 모든 땅이 주를 예배하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격지심’에 빠진 수많은 이들의 위로가 되어 주며 다시 시작할 길을 열어주는 치료사가 되었습니다. 죽음까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셔서 먼저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10월의 세 번째 주일, 10월 16일이 인생의 또 하나의 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 첫 날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더 넓은 건물로 옮겨져 첫 예배를 드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라고 하는 교회가 다시금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믿음으로 날아오르는 시작점이 바로 오늘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을 이 동행으로 초청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이렇게 외쳐 보시기 바랍니다. “네, 제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 자격을 얻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짜리” 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너무도너무도 많이많이 진짜진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여전히, 변함없이, 앞으로도 동일합니다. 할렐루야!
BGM - [PIANO HYMN]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가사) | 찬송가연주 by All Nature Sings
결단 찬양 –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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