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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월향 (桂月香 , ?~1592 )
계월향은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 김응서의 첩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부장 소서비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신은 자결하였습니다.
왜장을 죽이고 자결한 기생 계월향에 얽힌 이야기.
의열사는 계월향의 의열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으로, 매년 봄·가을에 평양 기생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계월향은 평양 기생으로 본명은 월선(月仙)이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이 함락되어 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때 평양 기생 계월향도 포로로 잡히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인 고니시(小西飛)의 진중에 있게 되었다. 고니시는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가까이 두려고 했으나 계월향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계월향은 죽을 것을 결심하였는데, 문득 “혼자 죽어 무엇하랴!”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난 이후 고니시의 부장 소서비 장군을 가까이 대하여 그의 애첩이 되었다.
원래 계월향에게는 사모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김응서라는 평양의 순별 초관이었다. 평양성이 함락되자 김응서는 용강, 강서 등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평양성 밖 대동간 서편에서 진을 치고 날마다 평양 서문 쪽으로 와서 정찰을 했다. 계월향은 이를 알고 미리 세워둔 계획을 실천하기로 하고, 성 밖 김응서에게 비밀리에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며칠 후 계월향은 소서비에게 같이 연을 날리고 싶다고 청을 하여 서문으로 그를 유인하였다. 때마침 김응서가 이곳을 지나니, 이는 사실 계월향과 김응서 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계월향은 “장군님! 저기 지나는 이가 네 오라버니이옵니다. 이번 난으로 서로 헤어졌는데 이곳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부디 한 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라고 간곡히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소서비는 애첩 계월향의 뜻을 들어주고 이 둘을 성 안에 같이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 안에서 큰 잔치를 벌어졌는데 계월향은 소서비에게 계속 술을 먹여서 만취하게 하였다. 소서비는 그런 계월향의 의중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계월향은 마냥 벙긋벙긋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이키는 소서비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남다른 각오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저녁 소서비는 무거운 몸뚱어리를 이끌고 마침내 잠이 들었다. 계월향은 안팎의 동태를 살피어 문 밖으로 신호를 보내 방안으로 김응서를 불러 들였다. 그는 바람처럼 몰래 들어와 단숨에 소서비를 죽여 버렸다. 그 뒤 김응서는 도망가고 계월향은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계월향 일화는 논개처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전쟁에 맞선 여인들의 모습을 잘 알려주는 일화이다
매창과 허균 두 사람이 만난 지 꼭 408년 된 날
1601년 7월 23일 허균은 해운판관이란 관리로 변산반도 부안에 있었다. 지금부터 408년 전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허균은 술이 덜깬 눈을 하고 변산반도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얼마 뒤 그러니까 정오가 좀 넘을 무렵 부안현감의 심부름으로 온 아전에게서 월명암 부근 부안의 3대 자랑이라 일컫는 매창의 술집(객점)에서 술이라도 한 잔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눅눅한 옷이며 마음도 온통 눅눅했다. 허균은 부안의 유명한 사찰 소래사 입구에 들어섰다.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위치한 소래사. 633년 백제 무왕 시대 창건된 이 절은 당시로도 천년 고찰이라 사람들이 자주 찾은 곳이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전나무 숲이 허균을 반겼다. 하늘을 가득 메울 빽빽한 전나무 숲길을 지나 소래사 대웅전으로 허균은 걷고 있었다.
오늘날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부안의 변산 소래사를 찾는다. 소래사 전나무 숲길을 손 잡고 거닐면 연인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전설은 허균과 매창이 살던 당시에도 있었다. 소래사 대웅전을 둘러 본 허균은 직소폭포 방향으로 산을 올라갔다. 직소폭포는 선녀들이 목욕한 흔적이 있다. 선녀의 옷은 없지만 선녀의 향기는 남아 있다. 그래서 나뭇꾼들은 호시탐탐 선녀의 출현을 기다린다. 그러나 허균은 직소폭포를 지나면서 그곳에서 매창이 목욕을 했을 것이고 그녀가 스스로 선녀라 착각해서 그런 소문을 퍼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허균이 오늘 술손님으로 올 것이란 소식을 들은 매창은 이런 저런 준비로 바빴다. 교산 허균! 천하에 바람둥이 허균이 전라도에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에 들었다. 그는 기생들에게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어젯밤 김제에서도 시끌벅적 했단 소리가 벌써 다른 기생들 입에서 들은 매창이다.
오후 6시, 해가 막 서산 끝에 걸리기 시작할 무렵 허균 일행이 당도했다. 매창은 한 눈에도 저자가 허균이구나 그리 생각했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노는 사내 티가 확 났다. 옷을 입은 맵시 하며 허균은 그 시대 댄디(사대부의 멋쟁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 정도로 이것 저것 별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내 나이는 서른셋 인데 벌써 머리가 백발이었다.
매창은 색이 밝은 사내는 머리가 빨리 쉰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자네가 매창인가?
네. 그럼 그 유명한 조선의 괴물 허균이 바로 당신.
두 사람은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술자리 앉았다. 허균은 매창이 조선의 여인, 아니 기방의 여인 가운데 시와 서예 거문고 솜씨가 최고라고, 그래서 사내들 사이에서는 황진이가 60년 만에 환생했다고 관심, 스포트라이트를 집중 받던 매창에게 처음에는 별 관심 없는 듯 시선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여인의 후리는 솜씨에서는 당대 최고 노는 남자 허균은 그리 매창을 한 수 아래로 보고 있었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유명한 매창을 보았다. 얼굴은 소문보다 별로여서 볼게 없었다." 이런 일기 기록을 보면 매창은 분명 당대 최고 미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허균은 매창을 처음 보는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무언가 끌어당김, 대개 연애에 빠지는 연인들이 느끼는 그런 것을 허균도 가졌을 것이다. 연애 프로라고 하지만 운명적으로 다가서는 사랑에는 맥을 못추는 법이다.
기생 몇 명이서 거문고 가락을 뽑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창이 노래를 듣고 싶었다. 그건 허균도 마찬가지였다. 초반 분위기 띄우는 일을 맡은 갓 열일곱 열여덟 기생들의 노래가 끝나자 술이 몇 순배 돌았고 갑자기 서쪽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불이 난 듯 전체 하늘로 번졌다. 매창의 술집은 앞 전망이 참 좋았다. 바닷가 석양 노을의 멋진 모습 보게 마루가 틔여 있었다. 부안의 8대 절경 가운데 월명암의 낙조가 꼽힌다. 월명암 바로 밑에 위치한 매창의 술집에서도 부안의 석양 노을은 참 고았다.
김영주 화백이 그린 매창의 모습
1601년 7월 23일 비가 하루종일 내리다가 저녁 무렵 비가 그친 하늘에는 무지개처럼 고운 저녁 노을이 두 사람 평생 기억에 각인됐다.
허균은 매창의 긴 노래(창)을 들었다. 긴 것은 노래가 길다는 것 보다는 늘어지는 노래라 그리 부른 것이다. 대개 그 시절 노래라는 것이 목 울대를 흔들어 숨이 넘어갈 듯 한 소절로 몇 십초 끌어야 노래 잘하는 절창이란 소리를 들었다. 매창은 자기가 지은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는 오늘날로 말하면 싱어송라이터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훌륭한 거문고 연주자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를 있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새로나온 허균 평전 <허균, 길에서 살며 사랑하다 죽다>라는 책은 이렇게 허균과 매창이 만난 1601년 7월 23일 그 날 하루 일어난 두 사람의 풍경에서 시작된다.
그 날 이후 허균은 평생 죽을 때까지 매창을 사랑했다. 워낙 여자들을 몸으로 좋아하던 허균이라 다른 기생들 품을 줄곧 찾았지만 마음으로 사랑한 기생은 매창이 유일하다.
오늘이 7월 23일이고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날이지만 누가 있어 이런 날을 기억할까?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시에 적었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인간세계에 살고 있는 선녀를 의미) 아무도 모르게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변산엔 구름의 자취도 없는데 이듬해 소소의 집을 못 찾으면 시든 버들 그늘도 못 드리우리."
처음 1601년 7월 23일 만났을 때는 생긴 게 별로라고 하던 허균은 1610년 6월 초 매창이 죽은 그 어느 날 자기 비밀노트에 그렇게 매창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선녀처럼 묘사한 것이다.
교산! 당신 그곳에서는 당시 조선이란 나라에서 살 때만큼 욕은 먹지 않지요?
그리고 매창과 진실한 사랑은 나누고 있소. 400년 전 그때 당신은 정말 매창을 사랑하면서 마치 사랑이 아닌 것처럼 그저 친한 기생인 것처럼 과장되게 마음을 숨겼지요. 전 다 압니다.
408년 전 오늘이 두 사람 만난 그 날이니 당신의 후배가 이리 두 사람을 그리워 하며 한 글 올립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진짜 408년 전 그날 아무일 없었던 것 맞소?
[조용헌 살롱] 까마귀와 백로
사상체질(四象體質)론에 의하면 태음인(太陰人)은 간(肝)이 큰 체질이다. 술도 잘 먹고 체력도 좋은 체질들이다. 사업가와 정치인들 중에 태음인이 많다. 반면에 태음인은 교도소에도 많이 들어가 있는 편이다. 담력과 체력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사고를 내기 쉽다. 소음인(少陰人)은 차분한 성격이라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 고시 합격자들 가운데 소음인이 많다. 고시공부는 소음인들이 잘 버텨낸다. 오버를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소양인(少陽人)은 순발력이 좋다. 방송국과 연예계에 소양인들이 많다. 연예인이라는 직종은 소양인에 적합하다. 태양인(太陽人)은 기발한 착상과 자존심이 강하면서,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다. 기발한 전략가들 중에 태양인들이 많은 것 같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자 했던 윤동주 시인과 같은 사람도 태양인에 속한다. 태양인의 단점은 간이 약해서 술을 잘 먹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네 가지 체질 가운데 대표적인 체질은 태음인과 태양인으로 압축된다. 태음인은 까마귀에 비유될 수 있고, 태양인은 백로에 비유될 수 있다. 사업과 정치는 까마귀들에게 맞다. 사업과 정치를 하려면 우선 술을 잘 해야 하는데, 까마귀들은 폭탄주를 즐기는 타입들이다. 정력도 강하다. 새벽 3~4시까지 술을 먹어도 다음날 거뜬하게 버텨낸다. 뿐만 아니라 융통성도 많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다. 그러니까 복잡한 현실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백로들은 이상주의자들이 많다. 자기의 이상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손해를 감수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자기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결정적인 약점은 술이 약하다는 점이다. 백로가 까마귀들 따라다니면서 넙죽넙죽 술 받아먹다가 간경화로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갈 일이 아니다. 백로는 퇴근하면 곧바로 집에 돌아와서 책을 보고 몸 관리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백로가 까마귀를 욕하면 안 된다. ‘겉 희고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는 반격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조용헌 살롱] 이병철과 觀相 [조선일보 2006-08-10 19:06]
60년대 초반에 2명의 유명한 관상가(觀相家)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백운학(白雲鶴)과 우종학(禹鍾鶴). 백운학은 종로 보령약국 뒤의 한옥 집에서 살고 있었고, 우종학은 화신백화점 뒷골목에 ‘운수우거처’(雲水寓居處)라는 조그만 팻말을 붙인 집에서 관상을 봐 줌.
우종학의 생긴 모습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다가 눈이 칼날처럼 가늘고 길었다고 한다. 평안도 사투리를 쓰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신상문제를 정확하게 집어내곤 하였다. 그 사람의 장기 운세 쪽보다는 단기 운세를 적중시키는 주특기가 있었다.
지금 당장 당면한 문제를 집어내는 능력은 그 사람의 얼굴 찰색(察色) 여부와 관련된다. 우종학은 ‘찰색’을 잘 보았다. 관상에서는 얼굴의 특정 부위가 빛이 나면서 밝은 색을 띠는가, 아니면 어두침침한 색깔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그때그때 운세 여부가 달라진다고 본다.
우종학의 적중률을 경험한 고급 관료나 사업가, 명사들이 운수우거처에 자주 드나들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집 한 채 값과 맞먹는다는 백색전화가 여기에 놓여 있었는데, 그 백색전화는 체신부 장관이 우종학에게 선물한 것이었다고 한다.
삼성 이병철 회창의 친형인 이병각씨도 자주 우종학에게 놀러왔다. 이병각 본인이 관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관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동생(이병철)은 요즘 관상 연구에 몰두해 있다. 시간 날 때마다 항상 관상서(觀相書)들을 들여다본다. 일본에 갔다 오면 일본에서 나온 관상서들도 많이 사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일본 관상서들은 간단하게 요점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보기에 편하다. 우종학이 가지고 있던 관상책들도 형인 이병각을 통해서 이병철에게 전달되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병철은 오랜 세월 동안 관상의 이론과 실전에 대한 내공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관상내공’(觀相內功)이 삼성의 신입사원 채용이나 간부직원 승진과정에서 일정 부분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병철이 선호하였던 관상은 단정(端正)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단정한 관상은 정직하고 배신을 하지 않는다. 오늘날 삼성의 성공 뒤에는 창업자의 관상내공도 한 몫 하였다고 본다.
명문고택(名門古宅) [조선일보 2007-01-23 23:26]
지난 2002년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한 뒤 상당 기간 시달려야 했다. 책을 낸 뒤 이처럼 시달린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시달림은 주로 좌파진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왔다. “한국에 무슨 명문가가 있단 말이냐? 한국에 무슨 사회 지도층이 있단 말이냐? 자다가 일어나 봉창 뜯는 소리 하지 말아라!” 이런 조롱과 비판에 대해 필자가 들이댔던 대응 논리의 근거는 오래된 고택(古宅)이었다.
현재까지 고택이 남아 있는 집안들은 주변의 존경을 받아왔던 명문가임이 분명하다. 존경받는 집안이 아니었다면 동학농민혁명이나 6·25때 고택이 모두 불타버려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리산 밑에 있는 구례의 대저택 ‘운조루’(雲鳥樓)만 하더라도 여순반란이나 6·25때 불에 타 없어졌어야 했다. 대지주 집안이었으니까. 그러나 지리산 빨치산에 가담했던 이 집안의 머슴들도 자기 상전 집이던 운조루를 불태우는 것은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운조루 출신의 머슴들이 반대하니까 다른 빨치산들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운조루는 적선을 많이 한 덕가(德家)로서 그 평판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과 노고단은 빨치산 근거지가 있던 곳이었는데, 바로 그 근처 동네에 있었던 지주 저택 운조루가 불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중기부터 계속해서 부잣집이었던 해남윤씨들의 녹우당(綠雨堂)도 마찬가지이다. 이 집은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로 불렸던 집안이다. 가난해서 세금을 내지 못한 지역민들이 감옥에 갇혔는데, 그때마다 세금을 대신 내줘 세 번이나 감옥에서 꺼내줬다는 일화이다. 6·25때 좌·우 어느 쪽이 세력을 잡아도 이 집안의 덕망과 카리스마를 훼손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엎어져도 윤가(尹家)요, 뒤집어져도 윤가”라는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고택을 보존하고 있는 명문가는 이런 관용과 적선을 통해 좌파의 도전에서 살아남은 집안들이다.
[조용헌 살롱]간송(澗松)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입력 : 2007.10.26 22:41
구한말에서부터 해방 무렵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3대 부자를 꼽는다면 화신백화점을 가지고 있던 박흥식, 광산을 해서 큰돈을 벌었던 백 부잣집, 그리고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 집안이다. 간송 집안은 윗대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무반(武班) 집안이었지만, 구한말에는 상업에 뛰어들어 서울의 종로 4가, 즉 배오개 일대의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송파 가락동, 창동 일대뿐만 아니라 황해도 연안, 충청도 공주·서산 등지에까지 수만 석의 전답을 보유할 정도였다.
이처럼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1938년에 성북동 97번지에다가 보화각이라는 개인박물관을 짓고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 수장가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던 민족 문화재들을 수집하여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고서, 그림, 도자기와 같은 우리 문화재들을 구입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물건값을 절대로 깎지 않았기 때문에 중개상들은 귀중한 물건들을 간송에게 제일 먼저 가지고 왔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심사정(沈師正)의 ‘촉잔도권’(蜀棧圖卷)은 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5채 값을 지불하고 구입한 그림이다. 이 ‘촉잔도권’을 수리하기 위해서 일본 교토의 전문가에게 간송이 지불한 비용은 기와집 6채 값이었다. 간송은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농사도 잘 지었다. 미술사의 대가들인 최순우, 김원용, 황수영, 진홍섭, 정영호가 다 간송 문하를 출입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후학들이다.
최순우(1916 ~1984)는 원래 본명이 최희순(崔熙淳)이었는데, 간송이 순우(淳雨)라고 지어주었다. ‘우’(雨)자는 간송의 아들 항렬이 쓰는 글자이다. 아들같이 생각하고 지어주었던 것이다. 1961년에 최순우가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를 구라파에 전시하기 위해서 김포공항에 가던 길이었다. 택시 안에서 최순우의 낡은 손목시계를 본 간송은 “우리국보를 보여주러 가는 책임자가 이런 낡은 시계를 차면 체통이 안 선다”하면서, 자신의 ‘론진’ 손목시계를 그 자리에서 풀어 채워주었다. 최순우는 살아생전에 이 일화를 주변사람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서울 부자의 품격을 대표하는 집안이 간송 집안이고, ‘간송미술관’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심사정의 대표작은 '촉잔도권(蜀棧圖卷)'
지금으로 말하면 중국 쓰촨(泗川)성, 촉나라로 들어가는 300리 길의 절경을 상상해 그린 이 그림은 심사정이 조카의 청을 받아 62세 때인 1768년 영조 44년 8월에 그려냈다.
이듬해 5월 심사정이 작고했으니 그의 절필(絶筆)작이면서 생애 최고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화선지 6폭을 붙여 가로 818㎝, 세로 58㎝ 크기 두루마리 작품
생로병사(生老病死) 가운데 병(病)이 가장 문제이다. 생(生)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老), 병(病), 사(死)가 눈앞에 쭉 기다리고 있다.
노(老)도 피할 수 없고, 사(死)도 피할 수 없다.
이 가운데 병(病)은 자신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약간 달라질 수 있다.
병 없이 살다 죽으면 이것 같이 복된 삶이 없다.
병의 원인을 관찰해 보니까 크게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는 육체적인 차원이다.
술을 많이 먹으면 간경화가 온다.
간경화를 치료하거나 예방하려면 일단 술부터 줄여야 한다.
담배 피우면 폐가 나빠질 수 있으니까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육체적인 차원의 병은 그 원인이 비교적 분명하다.
둘째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오는 병이다.
퇴직금 모아놓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으나 되돌려 받지 못하고 돈을 떼인 경우는 화병이 온다.
시부모와의 갈등으로 생긴 며느리의 병은 심리적인 데서 그 원인이 발생한 경우이다.
이럴 때는 상담을 받거나 자기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긍정적인 쪽으로 돌려야 한다.
어떻게 마음을 돌릴 것인가가 관건이다.
이러한 마음 병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셋째는 귀신병(鬼神病)이다. 이는 귀신(鬼神)이 붙어서 생긴 병이다.
이게 복잡한 병이다. 첨단 의료장비인 MRI나 CT로 찍어도 아무 이상이 없는데,
여전히 고통으로 시달리는 병이 있다. 이게 대체로 ‘귀신병’이다.
물론 현대의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인정하기 힘든, 논란의 소지가 많은 병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귀신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은 대개 퇴마사(退魔師)들이었다.
퇴마사는 종교 성직자들이 많았다.
가톨릭의 경우에는 영적인 힘을 가진 신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영적인 힘은 고도의 정신 집중력에서 온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한 종교 성직자들이 자연스럽게 퇴마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불교 고승들이 많았다. ‘
삼국유사’에 보면 고승들이 귀신병을 치료한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개신교 목사들도 이러한 힘을 가진 경우가 많다.
퇴마사들의 공통점 한 가지는 바위가 많은 암산(巖山)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임.
[조용헌 살롱] 발효차 입력 : 2007.03.23 22:44
한국은 발효(醱酵) 음식의 강국이다. 한국음식을 대표하는 김치가 바로 대표적인 발효음식이다. 된장, 간장, 그리고 수십 가지의 각종 젓갈류도 발효음식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밥상에 오르는 밑반찬은 대부분 발효가 되어 있는 음식이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데다가 국토의 70%가 산악으로 형성된 한반도는 지형적인 조건이 발효에 적합하다. 발효의 핵심은 건조(乾燥)와 습기(濕氣)가 반복되면서 나타나는 시너지 효과인데, 한반도는 해양의 습기와 산악지형의 건조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 건조가 양이라면 습기는 음에 해당한다. 음과 양이 반복되어야 묘용이 발생한다. 발효 강국인 한국이 만들지 못한 음식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중국 남부지역인 윈난(雲南)에서 생산되는 보이차(普?耳茶)이다. 보이차는 50년 또는 100년이나 되는 장기간 동안 발효가 진행되는 차이다. 발효음식의 최고봉은 아마도 보이차가 아닌가 싶다. 지난 19일 청나라 광서제(재위:1874~1908)에게 진상되었던 보이차인 ‘만수용단(萬壽龍團)’이 베이징 자금성 내 박물관에서 나와 언론에 공개되었다. 2.5kg 무게의 만수용단은 무려 150년 동안 숙성된 차라고 한다. 이 정도면 가격을 헤아리기 어려운 국보급 차이다.
필자의 지인 가운데 40대 후반의 보이차 마니아가 있다. 한 달 수입의 70%를 고급 보이차를 구입하는 데 소비한다. 차를 구입하는 데 드는 돈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다. 돈을 아끼지 않아야 진정한 프로이다. 그가 하루에 마시는 보이차의 양을 따져 보니까 1.8?짜리 생수통으로 3병 정도가 된다. 지금까지 대략 10억원어치 이상을 마신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보이선인(普?耳仙人)’이다. 보이선인이 10억을 마시면서 깨달은 철학에 의하면 보이차는 ‘거듭남의 진리’를 보여주는 차라고 한다. 왜 거듭난 것인가. 발효는 일단 썩는 것이다. 썩는다는 것은 자기가 죽는 것이요, 해체되는 것이다. 썩어야 새 생명이 만들어진다. 보이차는 에고가 썩은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서 독특한 맛과 효능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거듭난 차는 우리 몸에 들어가서 오장육부를 거듭나게 만든다. 발효 강국인 우리나라에서도 발효차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조용헌살롱] • 박정희 사주 발행일 : 2005.02.01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두고 시비가 분분하다. 시비가 분분하다는 것은 평가가 현재진행 중임을 시사한다. 역사적 평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학은 ‘미래완료형’이라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의 생년월일시를 따지는 명리학(命理學)은 ‘과거완료형’ 시제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에 이미 그 사람의 자질이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인간을 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시간의 경과를 기다려야 하지만 명리학자는 인내심 없이 조급하게 그 결론(?)을 미리 훔쳐보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어떤 팔자를 타고 났던 것인가? 1917년 9월 30일(음) 인(寅)시이다. 만세력에서 이를 육십갑자로 환산하면 정사(丁巳)년, 신해(辛亥)월, 경신(庚申)일, 무인(戊寅)시가 나온다. 이 사주는 보기 쉬운 사주에 속한다. 간단명료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특징은 지지(地支)에 인(寅), 신(申), 사(巳), 해(亥)가 모두 구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명 사맹격(四孟格) 사주이기도 하다. 맹(孟)자가 우두머리를 상징하므로 전형적인 제왕사주에 해당한다. 명리학의 고전인 ‘명리정종’(命理正宗)에 보면 사맹격은 ‘남자일 경우는 대귀할 것인데, 그 지위는 삼공(三公)에 이를 것이다’고 되어 있다. 명리학의 대가인 유충엽의 지적에 의하면 중국 월나라 구천의 신하로서 오나라를 멸망시켰던 범려(范♥)의 사주가 인신사해를 모두 갖춘 사맹격이었고,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역시 인신사해를 모두 구비한 사주였다고 함.
내가 보기에 박정희는 전형적인 금체질의 무사(武士) 팔자이다. 갱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로버트 드니로가 이런 팔자에 맞는 이미지이다. 야무지면서도 칼을 뽑으면 반드시 적을 가격하는 스타일이다. 한 손에는 도끼(庚)와 한 손에는 회칼(辛)을 들고 피 튀기는 무림의 세계에서 끝없이 고수들과 싸워야 했던 험난한 팔자이다. 칼에 묻은 피를 냇물에 씻으면서 왜 나는 이렇게 피를 묻히며 살아야만 하는가! 하고 한탄한다. 인신사해는 역마살인데, 역마살이 4개나 들어 있으면 잠시도 편히 쉴 수가 없다. 전쟁터나 또는 난세에 앞장서서 총대를 메야 하는 팔자 센 운명인 것이다
[조용헌살롱] 겸재의 '쌍도정도(雙島亭圖)' 입력 : 2005.04.22 18:46 19'
동양에서 유럽의 백인들에게 내놓을 만한 고급문화는 과연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차문화(茶文化)와 정원(庭園)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의 차는 피를 맑게 하고 정원은 정신을 쉬게 만든다.
피를 맑게 하고 정신을 쉬게 하는 것이 고급문화이다.
한자문화권의 식자층들은 산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너무 좋아하였다.
산이 내가 되고, 내가 산이 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인생 최고의 행복으로여겼다.
대자연과 인간이 서로 대등하게 호환되는 ‘대칭적 호환(對稱的互換)’의 경지에 들어가는 상태를 도(道)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정원은 바로 그러한 ‘대칭적 호환’ 욕구의 산물이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호환이 되지 않고 따로 놀 때 번뇌와 스트레스가 많은 법이다.
그림도 그렇지만, 정원도 그 호환욕구의 대체품인 것이다.
이번에 소격동 학고재에서 주관한 ‘조선후기 그림의 기와 세’ 전시회에서
눈에 띈 그림은 겸재 정선이 그린 ‘쌍도정도’였다.
성주(星州) 관아의 객사인 백화헌(百花軒)의 남쪽 연못에 있던 정자를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 방지(方池) 조원(造園)의 원형복원을 가능하게 하는 자료이다.
네모꼴의 연못 속에 석축으로 둘러싼 2개의 섬이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 쌍도정이다.
왼쪽 섬에는 소나무만 심어져 있지만, 오른쪽 섬에는 정자가 설치되어 있다.
두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연못 주변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 느티나무와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다.
섬 뒤쪽으로는 괴석이 보인다.
우리나라 정원의 연못은 대부분 네모진 형태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세계관에 맞추어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네모진 연못은 네모진 땅을 상징한다.
연못 안의 섬은 1개나 혹은 3개가 많다.
3개의 섬은 도교의 유토피아인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한다.
2개가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아마도 음양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이 쌍도정의 조성이 고산 윤선도의 성주목사 재임시절(1634-1635)과 관련 있다고 추측
윤선도는 해남의 녹우당 앞 연못, 보길도의 세연정을 직접 조성한
조선제일의 정원전문가이자 풍류의 완성자였다.
[조용헌 살롱] 칠월 칠석(七月 七夕) 입력 : 2005.08.10 19:40 33'
세상사는 화택(火宅)처럼 매일 지지고 볶지만, 오늘은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던 명절인 칠월 칠석이다. 1600년 전 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나는 그림이 있다. 하늘의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가 음력으로 7월 7일이 되는 오늘 만나는 것이다.
왜 이날을 명절로 삼았는가. 1년 농사일을 대강 끝내고 이날부터 여름휴가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칠석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호미 ‘서(鋤)’자를 써서 ‘세서절’(洗鋤節)이라고도 한다. ‘호미를 씻는 날’이다. 호미를 들고 일하던 머슴들이 농사일을 끝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날은 노동을 하던 하인과 머슴들에게 반가운 날이기도 하였다. ‘견우’와 ‘직녀’라는 표현도 노동과 관련이 깊다. 견우는 남자가 소를 몰고 하던 농사일을 상징하고, 직녀는 여자가 옷감을 짜는 일을 상징한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데는 남녀가 노동을 멈추고 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고천문학(古天文學)에서 보면 자미원(紫薇垣) 한가운데에 있는 천황대제(天皇大帝:북극성)와 북두칠성이 만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음력으로 7월6일 저녁부터 만나기 시작한다. 6일 저녁은 칠석날의 전야제였다. 칠석 명절은 6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기망(旣望)인 16일까지 계속되었다. 합하면 모두 11일을 명절로 여겼던 셈이다.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의 첫대목이 ‘임술지추(壬戌之秋) 칠월기망(七月旣望)’으로 시작된다. 칠월기망은 음력 7월16일이고, 이날은 칠석축제의 마지막 날이면서 달이 밝기 때문에 배를 띄워놓고 놀았던 것이다. 고대 농경사회의 달력에서는 보름달이 기점이 된다. 정월 보름이 1년을 시작하는 ‘대보름’이라면, 7월 보름은 전반기를 마감하고 후반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축구에 비유하면 ‘하프타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7월 보름을 ‘백중(百中)’이라고 불렀다. 모든 절기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이를 종합하면 칠석 전날부터 백중 다음날 까지는 고대사회에서 농사일을 일단 끝내고 쉬던 날이다. ‘정역’에서는 이 기간을 ‘농부세서 세공성(農夫洗鋤 歲功成)’이라고 노래하였다. ‘농부가 호미를 씻으니 그해의 일이 이루어졌네!’.
[조용헌 살롱]'철부지' 考 입력 : 2004.09.22 21:28 10' / 수정 : 2004.09.23 17:18 39'
언제나 철이 들 것인가! 철이 없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부른다. 철부지는 원래 ‘철不知’라고 쓴다. ‘철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철이란 무엇인가? 사시사철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철부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때’를 모른다는 말이다. 봄이 오면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땀을 흘리면서 김을 매고, 가을에는 열매를 수확하고, 겨울에는 월동을 하기 위해서 창고에 저장해야 한다. 철을 모르는 사람은 땅이 꽁꽁 얼어붙은 엄동설한에 씨를 뿌리려고 들판에 나가는 사람이다. 눈밭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올 리 없다. 가을이 되어서 수확을 해야 하는데, 철을 모르면 수확을 할 줄 몰라서 열매가 땅에 떨어져 썩어 버린다.
이렇게 설명하면 쉽지만, 사실 자기 인생 사이클에서 철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마다 각기 철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인생은 태어나자마자 가을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부모가 물려준 빌딩의 임대료부터 받기 시작하면 과일부터 따먹는 셈이다. 흥청망청 청년기를 보내면 대개는 주색잡기(酒色雜技)로 흐르기 마련이고, 패가망신(敗家亡身)이라고 하는 엄동설한이 다음 코스로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겨울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자장면 배달부터 시작하지만, 시간이 가면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맞는다.
문제는 자기인생이 지금 어느 철(때)에 와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진단이 정확하면 처방은 나오게 되어 있다. 봄이라는 진단이 나오면 씨를 뿌리면 되고, 여름이라는 진단이 나오면 기꺼이 땀을 흘려야 한다. 철을 알면 기다릴 줄 안다. 겨울 다음에는 반드시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기다린다. 철을 모르면 기다리지 못한다. 철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이다. 진단만 정확하면 그 사람 인생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셈이다. 살아보니까 진단을 하기도 어렵고, 제대로 된 진단을 받아 보기도 정말 어렵다. 진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철든 사람이고, 진단을 내려주는 사람이 스승이다. 한국사회에 스승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철부지가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
食神生樂 [조선일보 2006-11-02 02:23]
돈이 많은 부자 팔자의 전형은 ‘식신생재’(食神生財)이다. 식신(食神)을 해석하면 ‘먹을 것을 주는 마음’이다. 수백억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팔자에 ‘식신’이 많음을 발견한다.
식신이 많다는 것은 ‘베푸는 기질’이 선천적으로 발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작은 부자들은 근검 절약하여 재산을 모으지만, 큰 부자들은 근검 절약하다가도 돈을 써야 될 상황이 발생하면 미련없이 후하게 쓰는 스타일들이다.
예를 들어 10군데에다가 돈을 썼다고 한다면, 그 중에 1~2군데는 나중에 돌고 돌다가 몇 배 또는 몇 십 배의 이익으로 다시 돌아온다. 돌고 돌아서 결국 자기에게 다시 돌아오는 ‘재물의 스리쿠션 법칙’은 인간의 이성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참으로 미묘난측(微妙難測)한 세계이다. 한 달 후에 2~3단계를 거쳐 돌아오는 수도 있지만, 10년이 지난 후에 8~9단계를 거쳐 몇 십 배의 크기로 환원되는 수도 있다.
이번에 110억원이라는 거액의 재산을 사회단체에 기부하여 세간의 화제가 된 세중㈜의 천신일(千信一·63) 회장. 며칠전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식에 놀러 갔다가 이 자리에 같이 참석한 천신일 회장과 조우하게 되었다. 110억원을 기부한 인물이라는 소개를 받고 그의 관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관상은 사업가답게 호락호락한 인상이 아니었다. 깐깐하고 야무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생년월일시를 물어보니까 식신이 발달하여 재물을 불러일으키는 ‘식신생재’의 명조(命造)가 아닌가. 한강물처럼 물이 많은 사주(四柱)인데, 태어난 시가 인(寅)시이다. 인(寅)이 바로 한강물을 빼내는 식신에 해당한다. 시(時)를 잘 타고 났다. 이 인목(寅木)이 다시 불(火)을 일으켜서 재물로 돌아오는 부자 사주이다.
대뜸 질문을 던졌다. “큰 금액을 기부하고 나니까 무엇이 달라졌는가?” “매일 매일이 즐겁다. 내 얼굴색이 아주 좋아졌다. 나뿐만이 아니다. 집사람도 친구들로부터 좋은 일 했다는 칭찬을 들어서 얼굴이 좋아졌고, 자식들도 학교 친구들로부터 축하전화를 많이 받았다. 온 가족이 즐거워졌다”.
기부는 결국 자신을 구원한다. ‘식신생락’(食神生樂)인 것이다. 인생의 낙(樂)은 ‘보람’과 ‘의미’에서 오는 것 아닌가!
[조용헌 살롱]경주의 소나무 입력 : 2005.09.26 19:04 15'
늙어가는 것의 서러움은 할리우드 여배우만 느끼는 게 아니다. 먹고 사는 데 시달리는 ‘장삼이사’들도 모두 서럽다. 하지만 늙어간다는 것의 서러움을 위로해 주는 나무가 하나 있다. 그게 바로 소나무다. 소나무는 늙어갈수록 품격이 깊어지고 향기가 짙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소나무의 ‘송(松)’자를 뜯어보면 나무 목(木)자에다가 공(公)자가 들어간다. 소나무는 나무의 공경(公卿)인 것이다.
소나무는 온대지방이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자라는 나무이지만, 그 소나무를 가장 아끼고 인격체로까지 대접한 나라는 한국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를 사랑한 나머지 소나무에다가 벼슬까지 주었다. 속리산의 ‘정이품송’이 그렇다. 소나무를 인격체로 여긴 셈이다. 정이품송이 있는 뒷산에는 그 부인 되는 소나무까지 있다. ‘정경부인송’이라는 이름이 그것이다.
경북 예천군에 있는 석송령 소나무는 부동산까지 소유하고 있다. 세금까지 내는 소나무다. 600년 된 고송인데, 1927년 이 동네에 살던 이수목이라고 하는 노인이 죽으면서 그 유산을 이 소나무에게 물려주고 죽었던 까닭이다. 얼마나 이 나무를 사랑했으면 유산까지 물려주었을까. 요즘도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이 나무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석송계’가 조직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소나무 산지는 전북 부안군 변산, 충남 태안군 안면도, 경북 봉화군 춘양, 울진군 소광리, 경주 왕릉 옆의 소나무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변산의 소나무는 선박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안면도의 소나무도 역시 궁궐 건축과 선박 제조에 사용되었다. 곧게 뻗은 춘양목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소나무를 전문적으로 찍어온 사진작가 배병우(55). 그는 전국의 여러 소나무 가운데 경주 왕릉의 등이 굽은 소나무를 최고로 친다. 등이 굽고 키가 크지 않은 경주의 소나무 숲에 들어서면 삶의 그윽함과 역사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배병우가 찍은 경주 소나무 사진 한 장은 올봄에 영국의 팝가수인 엘튼 존이 런던 로열아카데미 사진시장에서 3만달러에 구입해 가기도 하였다. 그 귀중한 경주 소나무들이 ‘소나무 에이즈’인 재선충에 걸렸다고 하니 가슴이 철렁하다.
藥食同源 (약식동원) 2006/08/14 11:35 추천 1 스크랩 2
http://blog.chosun.com/eggbadung/1348811
[조용헌 살롱] 藥食同源
한국 음식의 특징은 무엇인가? 외국의 유명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밖에 나가서 외국 음식을 먹어 보아야 우리 음식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전통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남자탤런트 이정섭(61)씨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토박이로서 어렸을 때부터 종가(宗家) 음식을 많이 먹어보고 스스로 요리를 해본 그가 꼽는 한국 음식의 원리적인 특징은 ‘약식동원’(藥食同源)이었다. “약과 음식은 근원에서 같다”는 뜻이다. 약을 따로 먹을 필요 없이 평소에 음식을 고루 섭취하면 그것이 곧 보약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한국 음식은 대부분은 보약(補藥)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 음식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왜 그렇다는 말인가? 내가 보기에 한국 요리를 구성하는 양대 골격은 ‘채식’(菜食)과 ‘발효’(醱酵)이다. 한국 요리의 상당부분은 식물성이다. 한반도는 오랜 세월 동안 농경문화권이었다.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당연히 곡물 섭취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나라도 그리 흔치 않다. 그 산들의 높이도 해발 1000m 전후의 높이라서 각종 채소, 산나물과 약초가 많이 자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환경이다. 해발이 3000m 이상 넘어가면 인간이 먹을 만한 식물이 살기 어렵다. 사계절이 분명한 산간 지역에서는 다양한 채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요즘은 서구문화권에서 과도한 육식의 부작용을 절감하고 있으므로, 채식이 그 대안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한국은 채식요리의 노하우가 많이 축적된 나라이다.
발효식품도 그렇다. 해양과 대륙이 접합된 나라가 한반도 아닌가. 이런 나라에서 발효문화가 발달된다. 콩을 발효시킨 된장, 간장 그리고 고추장이 그렇고, 한국 사람이 매일 먹는 김치도 채소와 발효의 만남이다. 생선을 발효시킨 젓갈만 해도 수십 종류가 아닌가. 지난번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회 세계미식대회에서 내로라 하는 요리 강국들을 제치고 ‘전주비빔밥’이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전주비빔밥이야 말로 전형적인 ‘채소’와 ‘발효’의 융합 아닌가! 이런 음식이 바로 보약(補藥)이다.
변비엔 고구마밥… 감기엔 배춧국 입력 : 2006.08.14 00:24 29'
음식 제대로 먹으면 藥
음식으로 영양도 챙기고 병도 고친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여기에 음식 재료를 농약이나 유해 첨가물이 없는 유기농으로 준비한다면 음식의 약리 효과는 더욱 높아진다.
부산대 식품영양학과 박건영 교수팀이 일반 농법과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채소의 영양 성분을 비교 조사한 결과, 유기농 시금치의 경우 식이섬유가 일반 시금치에 비해 1.6배, 상추는 30% 더 많았다. 위암세포 증식 억제 효과를 측정한 실험에서는 유기농 케일이 일반 케일보다 9%에서 395%까지 효율이 높았다. 현미도 유기농이 위암세포 억제 효과가 월등히 높았다. 박 교수는 “유기농은 악조건에서 자라기 때문에 식물이 살아남기 위해 항산화 또는 항균 물질 등 각종 영양소를 풍부하게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음식과 약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다. 식(食)을 바르게 하면 병이 낫는다는 이른바 ‘약식동원(藥食同原)’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았다. 음식의 약리 효과를 좋게 하려면 조리 과정에서 영양소 파괴가 적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료를 튀기거나 끓이기보다는 가능한 찌거나 날로 먹는 것이 좋다. 조리시간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또한 화학조미료나 설탕 대신 다시마 국물, 멸치 가루, 꿀 등 천연조미료를 사용하여 원래의 맛을 살리는 것이 좋다.
1 변비약=고구마밥
고구마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셀룰로오스 식이섬유는 물을 흡수하는 힘이 강해서 장에서 잘 흡수되지 않고 대변량을 늘려 변비를 해결한다. 장의 연동운동도 활발하게 해주고 대장 벽을 청소하는 빗자루 역할을 해서 숙변 제거에도 좋다. 토양 속 영양성분을 그대로 흡수한 유기농을 사용하면 효과를 더욱 높일 수 있다.
○ 제조법
쌀을 씻어서 20분 이상 불린다. 고구마는 적당한 크기로 깍두기처럼 썰어 밥솥에 쌀과 함께 담는다. 밥물 양은 쌀밥 지을 때와 같다. 삶은 고구마와 잣을 으깨서 깨와 콩가루에 묻혀 먹는 고구마 경단도 변비에 좋다.
조선일보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doctor@chosun.com
(사진·자료=녹색연합이 엮어 펴낸 서적 ‘자연을 담은 소박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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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보다 돈되는 음식산업, 우리는…
태국선 국가전략 산업으로 세계화 박차
중국 한식당 ‘대장금’ 주인은? … 중국인!
- 뉴스 돋보기
- 아지노모토
일본 식품회사 ‘아지노모토’는 2001년부터 ‘Cook do Korea’라는 브랜드로 비빔밥 등 한국 전통음식을 상품화했고, 일본의 최고급 레스토랑 ‘노부’는 갈비와 불고기 메뉴로 전 세계에 진출하고 있다. 타이완 맥도날드는 ‘김치버거’를 개발해 두 달 새 18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세계 각지에 한류(韓流) 열풍이 불고, 아시아 음식이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한국 음식산업의 세계 진출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우리 음식산업의 주도권까지 외국에 빼앗기고 있다.
◆외국에 선수(先手) 빼앗기는 한국의 음식산업=세계 각지에 산재하는 한국 식당은 현지 교민을 대상으로 한 영세 개별 점포가 대부분이다. 한국 음식 브랜드화는 엄두도 못 내고, 그나마 식당 수도 크게 부족하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영국에 있는 일본 음식점은 1만2000여개, 인도 음식점은 9000여개, 베트남 음식점은 7000여개에 이르지만 한국 음식점은 한인(韓人)타운인 뉴몰든을 중심으로 50여개에 불과하다. 해외의 한국식당 외국인 손님의 비율은 10%를 밑도는 곳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안방에서조차 푸대접 받고 있다. 서울의 17개 특 1급 호텔 중 한식당을 운영하는 곳은 5곳에 불과하다. 반면 외국계 프랜차이즈 점포는 2002년 3721개에서 2004년 4579개로 급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식품산업의 특허비용은 수출 9만달러에 수입이 6400만달러로, 수입이 수출의 711배에 달한다. 음식 산업이 처참한 ‘수입 초과 산업’으로 전락한 셈.
◆각국별 음식산업 육성 경쟁=음식산업은 어느 업종보다 고용창출 효과가 크다. 국내 고용 유발 인원이 52만8000명으로 자동차(7만9000명)와 반도체(8만9000명)보다 훨씬 많다. 생산 유발액도 음식업은 37조원으로 반도체 34조원·자동차 33조원보다 많다.
외국은 ‘최고의 문화상품’인 음식산업 수출에 발벗고 나섰다. 태국은 2001년부터 탁신 총리가 직접 주도해 전 세계 태국 음식점을 5500개에서 2007년까지 8500개로 증설하는 ‘Kitchen of the World’ 프로젝트를 국가전략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글로벌 타이 레스토랑(GTR)’이란 법인을 만들어 해외 태국식당 브랜드화에도 나섰다. 태국은 음식산업 수출로 연간 60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다. 일본은 초밥 요리의 일인자를 꿈꾸는 소년을 다룬 만화 ‘미스터 초밥왕’을 보급시켜 일본문화를 세계에 퍼뜨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한식 세계화를 위해 편성한 올해 예산은 ‘조리법 표준화’에 1억8000만원 등 총 23억원에 불과하다. 어느 외국인 주부는 “한국 책자를 보고서 갈비찜 조리법대로 조리를 했더니 갈비찜이 아닌 갈비탕이 됐다”고 말했다. 전통음식연구소 윤숙자 소장은 “그동안 도제식으로 전수돼 온 한국 음식의 조리법을 표준화·과학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희망의 씨앗 뿌리는 한국 기업들=두산이 1997년 중국 베이징에 개점한 한식당 ‘수복성(壽福城)’은 후진타오 주석이 찾을 만큼 최고위층의 입맛을 사로 잡았다. CJ그룹은 지난 6월 일본 나리타 공항에 자체 브랜드인 ‘웰리앤 돌솥비빔밥 전문점’을 오픈했고, 홍콩국제공항 등으로 점포망을 넓혀갈 계획이다. 해외 시장을 겨냥해 한식 뷔페 ‘한쿡’과 비빔밥 전문점 ‘소반’을 개발했다.
한국음식 프랜차이즈를 통째로 일본에 수출한 기업도 있다. ㈜놀부는 ‘항아리 갈비’ 브랜드를 매출액의 4%를 로열티로 받는 좋은 조건으로 일본에 수출했다. 최근 삿포로에 첫 점포를 열었고, 오는 15일에는 일본의 유력 외식업체 ‘페퍼런치’가 있던 자리에 도쿄 1호점을 낸다. 놀부 영업본부 유민종 이사는 “우리의 비법인 양념장을 일본 현지 재료로 만들기 위해 두 달 동안 일본에서 연구했다”며, “우수한 한국 음식을 표준화·현지화하면 해외시장에서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조용헌살롱] 자시(子時)
“임자 만났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임자’는 무슨 뜻일까? 한자로 풀어보면 ‘임자’(壬子)로 해석된다.
임(壬)은 천간(天干)의 10개 중 하나로 수(水)에 해당한다. 수(水)는 숫자로는 1이다. 물에서 생명이 시작되므로 물을 제일 첫 번째로 보는 것이다. 자(子)도 수(水)에 해당한다. 지지(地支) 12개 가운데 자(子)가 제일 첫 번째이자 물이다. 따라서 ‘임자’는 천간에서도 첫 번째이고, 지지에서도 첫 번째에 해당하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이다. 그러므로 “임자 만났다”는 “일등을 만났다”“제일 센 상대를 만났다”는 뜻이 된다.
임자(壬子)에서도 위에 있는 임(壬)보다도, 밑에 있는 자(子)가 더 근원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루 시간 중에서 자시(子時)가 가장 근원적인 시간이다. 자시는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의 시간이다. 우리 조상들은 자시를 만물이 시작되는 시간이요, 탄생하는 시간이요, 소생(蘇生)하는 시간으로 생각하였다.
자시는 한밤중을 가리킨다. 음(陰)이 극(極)에 달한 시간이다. 음이 정점에 도달하는 시간에 사람은 반드시 잠을 자야 한다. 그래야 깊은 휴식이 된다. 깊은 휴식이 되어야 소생도 되고, 시작도 된다. ‘활자시’(活子時)라는 표현이 이 의미이다. 자시에 잠을 자지 못하면 소생도 되지 않고 새로운 시작도 할 수 없다.
[조용헌 살롱] 술과 周易
술 주(酒)자를 보면 삼 수()와 유(酉)자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고대에는 이 ‘유(酉)’자의 모습이 술 그릇을 의미하였다고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유(酉)는 단지의 형상이기도 하다. 또한 유(酉)는 10번째 지지(地支)이다. 즉 음력 8월을 가리킨다. 8월은 곡식이 익어서 수확하는 시기이다. 익은 곡식에다가 물()을 부으면 술(酒)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주역을 들여다보면 64괘 중에서 마지막 64번째 괘인 ‘화수미제(火水未濟)’ 괘가 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미제사건(未濟事件)이라고 한다. 그렇듯이 화수미제 괘는 그야말로 미제(未濟: 건너가지 못함)를 상징한다. 달리 말한다면 전반전의 마지막 괘가 화수미제이다. 이 화수미제 괘의 마지막 효를 보면 ‘유부우음주(有孚于飮酒)면 무구(无咎)어니와’라고 되어 있다. “술을 마시는 데 적절히 마시면 허물이 없다”는 뜻이다.
이를 종합하여 해석하면 전반전에서 후반전으로 건너갈 때 술을 마시면서 건너가야 하는데,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 과정에서 다른 과정으로 건너갈 때 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당한 술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써 얽힌 것을 풀어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주역의 천재였다는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1958)은 화수미제를 설명하면서 “술- 잘- 먹었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이때 야산의 술 잘 먹었다는 말의 본뜻은 동양의 전통 종교인 유·불·선 삼교와 서쪽에서 들어온 기독교의 화합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 유·불·선 삼교(三敎)는 3이니까 삼 수()이고, 유(酉)는 방향으로 따지면 서쪽 방향에 해당하니까 기독교로 해석한다.
야산이 볼 때 주(酒)는 동양 삼교와 기독교의 화합이고, 이 주(酒)를 화수미제 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넘치지 않게 적당히 잘 마셔야 한국이 다음 세기(世紀)로 잘 넘어간다고 보았던 것이다.
동서 종교의 화합과 공존은 한국에서 이룩된다는 예언이었다. 그동안 야산주역(也山周易)의 맥을 이어왔던 수제자 대산(大山) 김석진(金碩鎭) 선생이 은퇴하고, 이번 4월부터는 대학로 흥사단에서 그 손제자가 강의를 계승한다고 한다.
현대그룹과 소 조용헌·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5.07.20 18:41 57'
엊그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백두산과 개성 관광을 합의하면서 양쪽 실무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진이었다. 사진 오른쪽에는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과 현 회장의 장녀인 정지이 현대상선 과장도 함께 있었다. 시아버지인 정주영 회장과 남편인 정몽헌은 이제 가고 없지만, 며느리인 현정은 회장이 그 자리에 대신 서 있다. 오른쪽에는 손녀딸까지 서 있다.
무슨 인연으로 3대가 연이어 대북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것인가! 휴전선이라고 하는 세계 최강의 군사분계선을 뚫기 시작한 것은 정주영부터 시작되었다. 1998년 1001마리의 소떼를 몰고 강철 같은 휴전선을 뚫은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소를 몰고 가는 방법이었다. 소의 힘은 뿔에 몰려 있는데, 소뿔로 삼팔선이라고 하는 철의 장벽에 구멍을 낸 셈이다.
왜 소가 구멍을 뚫었는가? 강호동양학자들 사이에서는 소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그 중에 가장 설득력이 있는 해석은 동학의 실패와 일제의 침입을 목격하였던 강증산(姜甑山)의 예언이다. 강증산은 일찍이 “현하 한반도의 대세가 씨름판과 같다. 애기 씨름판과 총각 씨름판이 지난 뒤에 상씨름으로 판을 마친다. 씨름판은 태극형상과 같은 조선의 삼팔선에서 세계 상씨름판을 붙인다. 씨름판에서 소가 나가면 판을 걷게 된다”고 예언한 바 있다.
그동안 여러 주석가들은 ‘소가 씨름판에서 나가면 판을 걷게 된다’는 대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가 씨름판을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러다가 CNN을 통해서 정주영이 소떼를 몰고 삼팔선을 넘어가는 장면을 보고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삼팔선(휴전선)은 한반도 주변 4강의 이해가 맞물려 있는 상씨름판과 같다. 정주영과 소떼가 이 판을 뛰쳐나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판을 걷는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분쟁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진 속 또 하나의 인물이 김윤규 부회장이다. 1989년 70명이 사망하는 비행기추락 사고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밖으로 튕겨져 나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인물이다. 그도 현대가의 3대와 같이 대북사업에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조용헌 살롱] 무등산파(無等山派 ) 입력 : 2007.07.06 22:52
▲ 조용헌 명산(名山)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문파(門派)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광주 무등산(無等山)에는 무등산파(無等山派)가 있었다. 역대 무등산파의 주특기는 풍류(風流)였고, 후세인들은 그 풍류를 계산풍류(溪山風流)라고 이름 붙였다.
16세기 중반 무등산 자락의 소쇄원(瀟灑園)에 모였던 소쇄 양산보,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임제 백호, 송강 정철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바로 무등산파였다. 시절 인연이 도래하면 인물들이 모이는 법이다. 근래에 무등산파의 장문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의재 허백련(1896~1977)이다. 허소치의 남종화 맥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춘설헌(春雪軒)에 거주하면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춘설차(春雪茶), 그림, 서예, 민족사상을 이야기하다가 떠났다.
1960~1970년대 광주가 예향(藝鄕)으로서 나름대로 예향(藝香)을 간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무등산파의 전통과 의재의 뒷심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무등산에는 누가 남아 있는가? 누가 무등산파의 풍류 맥을 잇고 있단 말인가?
계산(谿山) 장찬홍(張贊洪·64)이 무등산을 지키고 있다. 21세에 의재를 모시고 춘설헌에 입문한 이래 무려 43년 동안이나 무등산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무등산 속에 살고 있다. 계산이 43년 동안 빠뜨리지 않고 한 일은 바로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이었다. 그는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면 왠지 모르게 밝고 훈훈한 느낌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렸다. 특히 소나무 그림을 즐겨 그린다.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계산이 자주 보러 가는 소나무는 무등산 뒷자락인 화순군 동면에 있는 암간송(巖間松)이다.
30명쯤 앉을 수 있는 마당바위가 있고, 그 옹색한 바위벽 틈새에서 어렵게 자란 수령 800년 가량의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바위 틈새에서 암기(巖氣)를 먹고 자라느라 소나무의 몸체가 심하게 뒤틀려 있다. 그러면서도 성성한 기운을 간직한 소나무이다. 마치 살 안 찐 마른 노승과 같은 풍모이다. 엊그제 계산 선생과 같이 이 소나무를 보고 오니 마음의 위로가 된다
[조용헌살롱] 매(鷹) 입력 : 2006.12.04 18:52 / 수정 : 2006.12.04 18:52
카타르의 도하에는 매(鷹)를 사고파는 전문 상점이 7군데나 있다고 한다. 이 나라엔 아직도 매를 기르는 고대의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예부터 매는 6가지 취미인 ‘응마주색난석(鷹馬酒色蘭石)’ 가운데 첫 번째 취미에 들었다. 10대 때의 취미는 매를 훈련시켜서 꿩을 잡거나 토끼를 사냥하는 일이었다. 매와 함께 산과 들판을 뛰어다니다 보면 운동도 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도 자연히 길러진다. 청소년기에 맞는 운동이자 취미였던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매의 사육과 사냥을 담당하는 ‘응방(鷹坊)’이라는 전문부서가 있었다. 응방은 몽골에서 들어왔다. 매는 중앙아시아와 몽골에 살았던 북방 유목민족에게 익숙한 새였던 것이다. 끝없는 들판에서 커다란 날개를 편 매가 공중에서 선회하다가 지상에서 달려가는 토끼를 향해 몸을 내리 꽂는 장면을 구경하는 일은 볼 만했을 것이다. 고려 충렬왕은 매사냥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응방도감(鷹坊都監)이 설치된 시기는 충렬왕 재위시인 1281년이다. 조선 중기까지 이 응방은 유지돼 왔던 것 같다.
현재 국내에 매를 훈련시켜 꿩이나 토끼를 사냥하는 풍습이 남아 있는 곳은 전북 진안군의 백운면이다. 내륙 오지인 이곳은 해발 400m에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서 매가 꿩을 잡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매는 만주, 시베리아에서 겨울에 한반도로 날아오는 철새이다. 요즘 같은 12월에 사냥용으로 쓸 매를 그물로 잡는다. 이곳 사람들은 ‘매를 받는다’고 표현한다. 사냥용 매도 두 종류가 있다. 1년생 신출내기 매는 ‘보라매’라고 하고, 몇 년 된 묵은 매는 ‘산진이’라고 부른다. 매는 아홉 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산진이를 구별하는 방법은 눈동자를 보면 안다. 눈동자가 붉으면 ‘산진이’이다. 매를 받은 다음에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주인과 항상 같이 있는 것이 방법이다. 이때 매가 놀라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매가 한 번 놀라버리면 길들이지 못한다. 꿩 사냥을 할 때에도 먹이 조절이 필요하다. 배가 부른 매는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는 12월은 ‘매 사냥’ 시즌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조용헌살롱] 신십승지(新十勝地)
‘정감록’(鄭鑑錄)에서는 십승지(十勝地)를 이야기한다. 풍기(豊基), 봉화(奉化), 변산(邊山)을 비롯한 피신처 10곳이다. 난리 났을 때 여기로 피란가면 목숨을 보전하고 자급자족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정감록 신봉자들은 집과 전답을 판 돈과 가족을 이끌고 십승지로 이사를 갔다. 십승지로 가기 위해 집을 팔고 전답을 파는 행위는 일대 결단이었다.
요즘에도 전 재산을 처분하고 해외의 십승지로 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첫 번째는 ‘유학십승지’(留學十勝地)에 해당하는 사례이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집과 전답을 파는 경우이다. 자신의 봉급을 거의 다 송금해야 하는 기러기 아빠들도 이 범주에 속한다. 미국의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와 캐나다의 토론토 같은 도시가 대표적인 유학십승지다. 미국에 가 있는 한국 유학생의 숫자가 약 8만 명이라는 통계가 있었다. 8만 명이 유학비로 쓰는 돈은 적어도 수조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십승지로 가야 산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전답을 팔아서 그 비용을 댈 수밖에 없다. 특히 로스앤젤레스는 한국인의 ‘부동산십승지’(不動産十勝地) 가운데 첫번째로 꼽힌다. 한국의 많은 투자가들이 LA의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들었다.
두번째는 ‘노후십승지’(老後十勝地)이다. 퇴직을 한 뒤 어디에 가서 살아야 큰 걱정 없이 남은 인생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피지, 인도네시아, 네팔 같은 나라가 노후십승지에 꼽힌다. 이들 지역은 한결같이 물가가 싸서 생활비가 적게 든다. 한 달에 200만원이면 가정부 2~3명을 고용하고 살 수 있다는 점이 노후십승지의 최대 매력이다.
세번째는 ‘환경십승지’(環境十勝地)이다. 뉴질랜드와 호주가 환경십승지의 우선 순위이다. 이 나라는 자연환경이 오염되지 않고 깨끗하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네 번째는 ‘낭인십승지’(浪人十勝地)이다. 직장과 조직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꽉 짜여진 틀 속에서 산다는 것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서 인생을 한번 방랑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인도가 바로 낭인십승지이다. 거지로 살아도 부끄럽지 않은 곳이 인도이다.
[조용헌 살롱]唐詩, 周易, 史記 입력 : 2004.09.03 18:35 56'
밑천이 모자랄 때 어디로 가야 하는가. 유럽 사람들은 사고의 한계에 봉착하면 그리스·로마의 고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사색의 밑천을 장만하는 경향이 있다. 한자문화권의 식자층도 고전으로 돌아가는 취향은 마찬가지다.
한자문화권의 3대 고전은 ‘당시(唐詩)’, ‘사기(史記)’, ‘주역(周易)’이다. 관점에 따라 선별기준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세 책은 아시아의 문·사·철을 대표한다.
‘당시’를 읽다보면 ‘인생의 고통과 남루함에 직면해서도 이를 시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문학적 기백’을 배우고, ‘사기’에서는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의 흥망성쇠는 누구나 겪었던 일이니까, 불행을 당하더라도 너무 아등바등하지 않고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력’을 얻는다. ‘주역’을 통해서는 ‘잘 나간다고 너무 즐거워할 일도 아니고, 못 나간다고 해서 너무 절망할 일도 아니라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공통적인 핵심은 희망이다. 자살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당파 싸움에서 패배하여 적막강산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가장 많이 읽었다는 주역의 괘가 있다. 바로 28번째 ‘택풍대과(澤風大過)’ 괘이다. 앞으로 가자니 강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태풍이 몰아붙이는 형국을 상징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가는 형국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이때가 닥치면 어떻게 마음을 다져 먹어야 하는가.
택풍대과 괘의 요점은 이렇다. ‘독립불구(獨立不懼)하며 돈세무민(遯世無悶)하나니라’.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과 멀리했어도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친구도 찾아오지 않고, 가족도 만나볼 수 없는 적막강산에서 유배생활을 지탱하게 해 주었던 대목은 독립불구 돈세무민이라는 괘였다.
요즘 40대 중반에 들어서는 샐러리맨은 유배생활을 준비해야 한다. 그동안 월급을 주던 회사에서 퇴출당했을 때 과연 ‘독립불구’할 수 있는지,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을 때 과연 담담하게 ‘돈세무민’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해 볼 일이다. 평소 고전에 대한 밑천을 장만해 두어야 한다.
이 글에서 작자는 동양 문사 전통의 문사철을 이야기 하며 고전적 밑천을 장만 해 둘 것을 이야기한다.
인류사의 많은 변화 속에서 인류가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를 거치며 이룩한 문명적 학문적 토대는 지금 인류가 비록 정보화시대니 바이오 시대니 하며 지나간 것들을 빛바랜 옛 날의 것으로 친다 하더라도 고전의 토대는 여전히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일 것이다.윤택함과 풍요로움이 같이 있는 대과의 괘를 이야기하며 독립불구 돈세무민을 이야기하는 것도 지금의 사람들이 짐작치 못하는 옛 사람들의 생각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는 것이리라.고전을 통해 지금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글쓴이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에게는 어찌 들릴 지 몰라도 인생을 한 발 물러나서 깊이 사색해 보는 사람이라면 작자의 깊은 뜻을 어찌 모를 수가 있으랴?
[조용헌 살롱]팔월 보름날 입력 : 2004.09.24 18:31 56'
우리민족은 보름날을 좋아하였다. 3대 보름날을 꼽는다면 정월 보름은 대보름날이고, 칠월 보름은 백중날이고, 팔월 보름은 추석날이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보름달을 좋아하였다. 음양(陰陽)만 보아도 그렇다. 태양보다 달을 더 중시하였기 때문에 ‘음양’이라고 불렀다. 양보다 음을 앞세웠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반대로 서양문화권에서는 달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였다.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이 활동하는 시간대는 한밤중이고, 그 배경에는 꼭 달이 떠 있다.
영화 울프(wolf)를 보면 사람이 늑대로 변하는 시간대도 달이 떠 있는 밤으로 설정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달이라고 하는 것을 논리보다는 감성을, 남성보다는 여성을,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복과 투쟁을 중시하는 문명권에서 보자면 당연히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다. 세밀하게 따져 보면 달은 인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달이 지니는 인력(引力)은 지구상의 만조(滿潮)와 간조(干潮)에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인체의 혈액도 액체상태이므로 초승달이냐 보름달이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보름달이 뜰 때는 사람의 피도 더 많이 끌어당기는 셈이다. 그래서 요가 수행에 심취한 고단자들은 보름날이 되면 식사량을 줄인다. 달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평소보다 더 많이 섭취하므로, 음식 섭취를 줄여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여자들의 생리를 ‘월경’(月經·달이 다니는 길)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달과 피가 함수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도교 수행자들은 ‘월체납갑설(月體納甲說)’을 중시한다. 달이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호흡하는 시간대와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보름달이냐 반달이냐 그리고 상현달이냐 하현달이냐에 따라 각기 호흡법이 다르다. 유교의 선비들은 농월정(弄月亭)을 지어놓고 달을 희롱하였다. 서산에 태양이 넘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인생이 이처럼 시들어 가는가 하고 생각하였는데, 밤이 되니까 다시 동쪽에서 쟁반만한 보름달이 밝게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낮 무대가 끝나니까 밤무대가 다시 시작되는 이치’를 깨달았던 것이다. 달은 재생(再生)의 기쁨을 상징한다. 한가위의 보름달을 보면서 생명의 기쁨을 느꼈으면 좋겠다.
[조용헌 살롱] 주유천하(周遊天下) 입력 : 2007.06.29 22:36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하는 물음이 강했던 사람들은 집을 나와서 세상을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는 것 그 자체가 큰 공부였다. 불가의 승려들은 이를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 한다. 등에 바랑 하나 짊어지고 구름과 물처럼 세상을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는 의미이다. 도교의 도사들은 이를 표주(漂周)라고 하였다.
적어도 3년 정도는 돈 없이 세상을 둘러보아야만 도사의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조건은 돈 없이 맨주먹으로 다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야 밑바닥의 인심을 알고, 각 지역의 특산물이 무엇인가,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 기인, 달사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가, 물류의 흐름이 어떤가, 좋은 기운이 뭉쳐있는 명당수도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하게 된다.
돈 많이 가지고 여행을 하면 수박 겉핥기로 끝날 수 있다. 서양의 고전인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모두 주유천하(周遊天下)의 산물이다. 이들이 주유천하를 하지 못했으면 어떻게 이러한 대작을 쓸 수 있었겠는가. ‘사기’를 쓴 사마천도 20대에 몇년 동안 중국의 각 지역을 여행한 바 있다.
구름에 싸인 명산의 웅혼한 기상을 느껴보고, 장강의 도도한 흐름을 보고, 석양 노을과 안개에 싸인 명승지들을 보았기 때문에 ‘사기’를 쓸 수 있었다고 본다. 20대의 주유천하 경험이 ‘사기’에 알게 모르게 반영되었다. 대자연의 장엄한 광경을 봐야만 심량(心量)이 커지고, 아울러 인간과 세상에 대한 초연함이 길러진다.
주유천하의 첫 단계는 명산유람이다. 산을 올라가 보아야 내려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갖는다. 관점과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가 꼽는 남한의 10대 명산은 이렇다. 지리산, 설악산, 계룡산, 한라산, 오대산, 가야산, 월출산, 속리산, 북한산, 태백산이다.
이런 산들은 하루 등산만 하고 곧바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 산에서 잠을 자 보아야 한다. ‘백등산(百登山)이 불여(不如) 일숙(一宿)’이라고나 할까. 한 번 가면 적어도 2박3일 정도는 머물러야만 산기운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이 허락하면 보름 정도 머무르면 좋다. 산마다 모두 기운이 다르고, 전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잠을 자다 보면 자기에게 맞는 산이 어떤 산인지도 알게 된다.
[조용헌 살롱] 물의 시대
동양의 고대사회에서는 토·목·금·화·수 오행(五行)의 변화를 가지고 왕조 교체를 설명하였다. 예를 들면 황제(黃帝)가 세운 나라는 토의 기운에 바탕하였던 나라고, 그 다음에 등장하였던 하 나라는 목이다. 그 다음의 은 나라는 금이고, 주 나라는 화, 그리고 등장한 진시황의 제국은 수(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 오행사관을 가지고 인류문명 전체를 해석해 볼 수 있다. 먼저 토의 시대다. 원시 시대에는 땅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는 열매나 짐승을 먹고 살았다. 토의 시대 다음에는 목의 시대가 등장하였다. 목이라 하면 나무를 사용한 초보적 수준의 생활용품과 공구를 말한다.
목의 시대 다음에는 금의 시대가 등장하였다.
금의 시대는 철기문명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창과 칼, 그리고 각종 전쟁무기에 사용된 재료가 철이다. 금의 시대 다음에는 화의 시대였다. 화의 시대에는 불과 전기, 그리고 에너지가 지배하는 사회다. 산업혁명 이후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문명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이유는 바로 불과 에너지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다.
불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 바로 물이다. 많은 예언자들이 앞으로는 물의 시대가 전개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다면 물의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인가. 물이 상징하는 바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물류(物流)이다. 물은 멈추지 않고 낮은 곳을 향하여 계속 흐르는 속성이 있다. 이 흐르는 속성이 바로 물류를 의미한다.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물류가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주변 4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장점은 바로 물류의 중심기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불이 남성이라면 물은 여성을 상징한다. ‘도덕경’에서 강조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바로 부드럽고 모성애를 지닌 여성적인 에너지를 상징한다. 한국의 고시 합격자도 여성의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정치 지도자도 여성이 많아지고 있다.
독일 총리를 비롯하여, 이번에 당선된 칠레와 라이베리아 대통령도 여성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 물망에 오르는 강금실 전 장관도 마찬가지다.
셋째, 물은 영성(靈性)을 상징한다. 요가, 명상, 참선을 비롯한 영성 산업이 앞으로 각광 받을 것이다. 물의 시대가 오고 있다.
<2006.1.26. 조선일보, 조용헌·goat1356@hanmail.net >
조용헌 살롱] 삼복 [조선일보 2007-08-01 23:18]
삼복(三伏)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린다. 달력에서 삼복날짜는 무엇을 기준으로 정해지는가. 우선 기준은 일년 중에서 가장 낮이 긴 절기인 하지(夏至)이다. 하지가 지난 다음에 3번째 ‘경’(庚)자가 드는 일진이 바로 초복에 해당한다. 올해 하지는 양력으로 6월 22일이었다. 하지 이후로 첫 번째 경자가 들어가는 날인 6월 25일은 경인(庚寅) 일이었고, 2번째 경자가 드는 7월 5일은 경자(庚子)일이었다.
3번째 경자가 드는 날이 7월 15일 경술(庚戌)일이었다. 이 7월 15일이 하지 이후로 3번째 해당하는 ‘경’자 일이었으므로 초복이었던 것이다.
중복은 어떻게 되는가. 하지 이후로 4번째 경자가 드는 날이다. 7월 25일이 경신(庚申) 일이므로 중복이 되었다. 초복 다음에 중복이 돌아오는 데에 10일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보통 같으면 말복도 중복으로부터 10일 이후에 돌아오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예년 같으면 8월 4일, 경오(庚午) 일이 말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8월 4일이 말복이 아니다. 올해의 말복은 8월 14일, 경진(庚辰) 일이다. 중복인 25일로부터 20일이나 건너뛴 날이다. 이처럼 예년보다 10일 늦게 돌아온 말복을 가리켜 월복(越伏)이라고 부른다. 복날이 ‘건너뛰었다’는 말이다.
올해처럼 말복이 10일 늦게 돌아온 이유는 입추(立秋) 때문이다. 말복은 입추가 지난 지 첫 번째 돌아오는 경(庚)일을 정한다. 올해 입추는 8월 8일이다. 8월 8일 이후로 첫 번째 ‘경’자 들어가는 날이 8월 14일(庚辰)인 것이다.
환산하면 8월 14일은 하지 이후로 6번째 ‘경’이 들어가는 날이다. 그렇다면 5번째 ‘경’일은 어디로 갔는가. 원래는 8월 4일(庚午)이 바로 5번째 ‘경’이 들어가는 날이므로 말복이 되어야 하지만, 이날은 입추(8월 8일) 이전에 해당한다.
초복, 중복은 하지 이후면 되지만, 말복만은 입추가 지나야 자격이 발생한다. 8월 4일은 입추 이전이므로 말복이 되지 못하고, 입추 이후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만약 5번째 경일이 입추 이후라면 말복이 되지만, 입추 이전이면 6번째 경일이 말복이 되는 것이다. 올해처럼 월복(越伏)인 해에는 무더위가 오래간다.
[조용헌 살롱] 동물로 보는 관상 입력 : 2007.04.04 22:58 / 수정 : 2007.04.04 23:04
관상(觀相)을 보는 방법 중에는 동물법(動物法)이 있다. 그 사람의 얼굴과 행동양식의 특징을 잡아낸 다음에 이를 동물로 환원시켜 보는 관상법이다. 그래서 열두 띠도 모두 동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어차피 인간세계는 ‘동물의 왕국’ 아니던가! 동물법을 적용하기에 가장 좋은 대상은 정치인과 기업 CEO들이다. 정치인과 CEO는 소시민과 달리 삶의 궤적이 크고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밝힌 바와 같이 노무현 대통령은 스라소니 상(相)이다. 스라소니는 맹수에 속하는 동물이다. 주로 북만주에서 서식하는 고양잇과 동물인 스라소니는 매우 빠르고 민첩해서 난타전의 명수이다. 각본 없는 난타전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묘하고 애매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 확보에 동물적 후각을 발동시킨다. 노 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타결시킨 이번 한미FTA협상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대권도전을 포기한 고건 전 총리의 관상이 독특하다. 그는 기린이다. 기린은 키가 커서 높은 나무에 열린 나뭇잎과 열매를 주로 먹는다. 고고(孤高)한 동물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스타일은 아니다. 정치는 때로 땅바닥에 떨어진 호떡도 주워 먹어야 하는데, 기린이 어떻게 땅에 떨어진 것을 먹는단 말인가.
CEO 가운데 흥미로운 관상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다. 이건희 회장은 두꺼비 상이다. 우리나라 할머니들이 며느리에게 손주를 기대하면서 하던 말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낳아라!”이다. 두꺼비는 재물의 상징이다. 삼성은 창업자인 이병철보다 이건희 대에 들어와서 엄청 커진 것 아닌가. 선대에 묘를 금섬복지(金蟾伏地: 금두꺼비가 엎드려 있음) 명당에다가 썼다고 전해지는데, 금두꺼비의 발복(發福)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두꺼비의 특징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날아가는 파리를 채 먹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 본인이 외부에 자기를 노출하면서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스타일도 아니다. 가만히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할 일은 다한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가 없다. 두꺼비는 정중동(靜中動)의 리더십을 상징한다.
관상학으로본 이명박,박근혜(코, 鼻 편) [1] 석우영(stone6200) [2007-06-12 09:59:51]
나는,조용헌 살롱을 꼭 읽는 독자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에 경탄을 마지 않는다.정말이지 사사받고싶은 욕망 간절하다.
나도 주역(周易)공부를 한 10여년했는데 정말 어렵고 난해하여 아직도 그 학문의이치를
100만분의 1도 터득못한 얼치기 에 다름없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음력 四柱 (생년.월.일,시,)를 알면 얼치기 육신풀이라도 해보련만,
알수 없으니 관두고 요즘 , 두사람의 관상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다.
한나라 유방은 거지와 다름없는 가난한 서민출신이지만 제왕의 운명을 타고 났기에 천하를 손에 쥘수 있었다.
나는, 노무현이 도대체 어떤 운명을 타고 났기에 대권을 잡았을까? 하고 많이 생각해 보았으나 사주를 알수 없어, 얼굴(관상)중에 코를 보니 제왕의 운기가 가득하다고 보았고
급기야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여기고 있다.
(20여년전 에는 노무현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의소개는여기서는 생략한다)
가까이서 아주 자주 보았기 때문에 비교적 얼굴을 자세히 알고 있는 편이다.
노무현의 코는 龍鼻 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되돌아가서 .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두 후보의 얼굴을 자주 접할수 있다.
오늘은 코에 대해 얼치기 풀이를 해볼까 한다.
먼저, 이명박 코를 보면 자수성가형이다.
콧대가 우뚝하고 앞이 뾰족하여 크게출세할 코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뾰족한 코끝이 너무 강하여 정면에서 보면 콧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像 은 무엇인가 감추고 있다는 상이라고 한다.
다음은 박근혜
콧대가 반듯하고 코끝주위로 둥그스레하게 콧볼이 형성되어있다.
한마디로 복코다. 물론 콧대를 보면 외로운상도 보인다.
아마 부모님을 일찌기 여의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제왕적 지기를 가진 코는 박근혜 코 라고 본다.
코(鼻)만 놓고 보면 박근혜가 이명박보다 훨씬 강하고 기운이 세다.
(그래서 나는 박근혜의 動線과 결과를 아주 예의주시하고 있다)
사주는 변할수 없겠지만 운명은 개척하기에 두 사람다 열심히 해보기 바란다.
나의 이글을 조용헌 선생이 보실까 무척 두렵지만 (조용헌 선생도 언젠가 두사람의 관상에 대해 글을 쓴적이있다.) 이곳은 독자들이 쉬는 놀이터니 애교스럽게 봐주실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용헌 살롱] 매장(埋葬)과 화장(火葬) 입력 : 2007.10.01 22:50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사생관(死生觀)이다. 사생관은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르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된다고 생각하였다. 부정모혈(父精母血)이 만나는 시점, 즉 어머니 뱃속으로 입태(入胎)가 될 때 백(魄)이 들어온다고 여겼다. 태몽 꿈을 주로 이때 꾼다.
혼(魂)은 출태(出胎)가 되는 시점, 즉 탯줄을 자르는 그 순간에 들어온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혼과 백이 뭉쳐서 있다가, 죽기 며칠 전에 혼이 먼저 빠져 나간다. 옛날 어른들은 이를 ‘혼불’이 나간다고 표현하였다. 남자 혼불은 올챙이처럼 꼬리가 있고, 여자 혼불은 남자 혼불에 비해 작으면서 꼬리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은 어떻게 되는가. 이 백은 나가지 않고 사람의 뼈에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뼈대’를 중시하였다. 이 뼈를 명당에 묻으면 망자(亡者)의 백도 즐거워하고, 그 후손에게도 여러 가지로 이롭다고 본 것이 풍수사상이다.
풍수는 매장을 전제로 한다. 좋은 장소에 매장을 하면 대개 열흘 이내에 후손들이 길몽을 꾼다. 반대로 물이 나거나 좋지 않은 곳에 매장을 하면 안 좋은 꿈이 있다. 이 꿈은 백(魄)의 작용이다. 뼈에 남아 있는 백(魄)이 조상과 후손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뼈는 망자와 후손을 연결해주는 휴대폰과 같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화장(火葬)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화장은 뼈를 불에 태우는 방법이다. 뼈를 불에 태우면 뼈에 붙어 있는 망자의 백도 같이 사라진다고 여겼다. 뼈를 불에 태우면 망자와 후손을 연결하는 휴대폰도 같이 사라지는 셈이다. 연락두절이 된다는 말이다. 골치 아픈 전화는 받지 않는 게 상책이다. 따라서 화장을 하면 무해무득(無害無得)이다. 해도 없고, 득도 없다. 매장을 해서 명당에 모시면 좋지만, 좋지 않은 곳에 유해를 모실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더 많다. 물이 나오는 곳에 유해를 매장하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요즘은 명당 구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더군다나 산 사람이 거주할 땅도 부족하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무해무득’한 화장이 좋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화장터 부지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조용헌 살롱]전립선과 구두수선공 자세 (조선) 입력 : 2005.09.07 19:08 46'
전립선암 환자가 20년 사이에 20배로 증가했다고 한다. 놀라운 증가속도이다. 50대 이후 장년남자들이 잘 걸리는 질병이 전립선암이다.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말년에 이런 병까지 걸리면 인생이 정말 서글퍼진다. 옛날에는 이 병이 별로 없다가 최근 들어서 증가한 이유는 서구식 식생활 때문이라고 한다. 과도한 지방질 섭취에 비해서 채소섭취는 줄어든 탓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의자생활과도 관련이 있다. 그동안까지 한국 사람들은 방바닥이나 마루에 앉아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서구화가 되면서 의자생활이 보편화되었다. 의자생활을 하면 자연히 골반이 좁아진다. 골반이 좁아지면 전립선을 압박하면서 전립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앉아서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양반자세나 가부좌로 앉게 된다. 양반자세나 가부좌를 틀고 앉는 방바닥 생활은 은연중에 골반을 넓혀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골반이 넓어지면 전립선에 물론 좋다.
전립선 질환을 예방해주는 요가의 자세가 바로 ‘받다 콘아사나(Baddha Konasana)’라고 하는 자세이다.
마루에 앉아 발뒤꿈치를 회음부 근처로 가져간다. 그런 다음 발을 잡고 양 무릎이 마루에 닿을 때까지 넓적다리를 벌리는 것이다. 인도에 가면 구두수선공들이 이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구두를 수선한다고 해 ‘구두수선공 자세’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구두수선공들은 하루 종일 이 자세로 앉아 있다. 그래서 구두수선공들은 비뇨기계의 질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소문나 있다. 말하자면 전립선암에는 걸리지 않는 것이다.
인도 ‘하타요가’의 대가인 아헹가(B.K.S Iyengar) 선생이 지은 ‘요가 디피카’(Yoga Dipika:현천 번역)에 이 자세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자세를 취하면 골반과 복부가 혈액의 충분한 공급으로 자극받게 되면서, 신장과 전립선 그리고 방광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해 준다고 되어 있다.
전립선암 예방에 좋은 또 하나의 자세가 ‘우파비스타 콘아사나(Upavistha Konasana)’이다. 마루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벌린다. 그런 다음 엎드려서 엄지손가락과 둘째, 셋째 손가락으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잡는다. 필자도 요즘 전립선 강화를 위해 이 자세를 매일 하고 있다.
입력 : 2007.09.05 22:49 [조용헌 살롱] 무재팔자(無財八字)
10대 후반에 산이 불러서 아루나찰나 산으로 들어갔던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는 평생 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탐구하였다. 한국의 40대 남자들은 ‘왜 나는 돈이 없는가?’라는 화두를 붙들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그토록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왜 돈은 마음대로 벌리지 않는 것인가.
재물은 노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재물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주님의 뜻을 어떻게 거역하겠는가.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재물은 전생업보(前生業報)이다.
전생에 베풀어 놓은 것을 금생(今生)에 이자 쳐서 받아먹는 것이다. 금생에 베풀어 놓으면 다음 생에 받아먹는 시스템이라고 본다.
재물이 없는 무재팔자(無財八字)는 전생에 주변 사람들에게 투자해 놓은 것이 없는 사람의 팔자이다. 무재팔자가 억지로 무리를 해서 재물을 움켜쥐려고 하면 가야 할 길은 두 가지라고 전해진다. 하나는 몸에 큰 병을 얻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감옥행이다. 이 두 가지의 오류를 자주 목격한 우리 조상들은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무재팔자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팔자에 재물이 없는 사람들은 청렴하고,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다. 명판사(名判事)나 대학자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 가운데는 무재팔자가 많다. 무재팔자가 뇌물을 받으면 반드시 문제가 된다. 간혹 팔자는 무재팔자로 타고 났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상당한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목격한다.
팔자에 재물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쥘 수 있을까? 사주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 엉터리구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이런 사람들은 전혀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무재팔자가 돈을 가지고 있어 보았자 일상생활에서는 돈을 쓸 수 없다. 점심도 항상 자장면이다. 돈 한푼 쓰는 것을 벌벌 떤다. 주변 사람들에게 시원하게 돈 한번 쓰는 일을 결코 목격할 수 없다. 돈은 오직 예금통장에 검정색의 숫자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무재팔자는 통장에 돈은 있지만 자기 마음대로는 절대 돈을 쓸 수 없는 팔자를 가리킨다. 아끼다가 죽는다. 돈은 쓰는 사람이 임자이다
팔죽시(八竹詩) 2007/08/25 02:23 조용헌 살롱] 팔죽시(八竹詩)
우리나라 불교 고승 가운데 3명의 행보가 눈여겨볼 만하다. 그 3명이란 7세기에 활동하였던 의상(義相), 원효(元曉), 부설(浮雪)이다. 의상과 원효는 해골바가지 물 먹은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부설거사(浮雪居士)로 불린다. 결혼하여 아들과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3인은 여자와 결혼문제에 대하여 각기 대처 방식이 달랐다. 먼저 의상은 철저하게 여자를 멀리하는 청정비구(淸淨比丘)의 삶이었다. 의상을 죽도록 사모했던 중국 처녀 선묘(善妙).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속에 뛰어들어 용이 되었다. 죽어서 용이 된 선묘는 영주 부석사(浮石寺)에까지 따라와 의상을 지키는 신장(神將)이 되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잠깐 살면서 아들 설총을 낳았다. 그렇지만 요석궁에서 결혼생활을 계속하지는 않고 다시 승려생활로 되돌아갔다.
부설은 도반스님들과 순례를 하던 중에 묘화(妙花)라는 처녀의 간곡한 청혼을 받는다. 하도 간곡하게 청혼을 하는 바람에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결혼해서 아들(登雲)과 딸(月明)을 낳은 뒤에도 계속 수행에 정진하여 도통(道通)하였다고 전해진다. 부설 자신뿐만 아니라 이후에 부인과 아들, 딸이 모두 도통하였다. 말하자면 ‘패밀리(family) 도통’이다. ‘패밀리 도통’은 세계불교사에서 유일한 일이 아닐까. 부설거사 일가족이 도통한 자리가 변산 월명암(月明庵)이다. 월명암에는 부설거사가 남긴 시가 전해 내려 온다. 읽어 볼 때마다 참 기막힌 시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 제목은 ‘팔죽시’(八竹詩)이다.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此竹彼竹化去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風打之竹浪打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粥粥飯飯生此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是是非非看彼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賓客接待家勢竹), 시장 물건 사고 파는 것은 세월대로(市井賣買歲月竹),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萬事不如吾心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네(然然然世過然竹).
여기서 ‘죽’(竹)자는 우리말 ‘대로’라고 해석한다.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혼자서 읽어보는 시이다.
[조용헌 살롱] 姜元龍 목사 입력 : 2006.08.20 23:03 19'
이번에 작고한 강원용(姜元龍) 목사는 1998년에 출간한 자서전 ‘빈들에서’(전3권)에서 해방 정국의 정치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을 놓고 “당시 유명인사들 가운데 신언서판(身言書判)이 가장 뛰어났던 남자”로 기록하고 있다. 몽양도 인물이 좋았다고 하지만, 강 목사 자신도 몽양 못지않게 신언서판이 훤한 인물이었다. 관상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 목사의 관상이 사례연구 대상이었다. 전형적인 ‘대인(大人)의 상(相)’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이 대인의 얼굴에 해당하는가? 우선 강 목사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눈썹이 눈두덩 위로 높게 붙어 있으면서, 양 눈썹 사이의 미간(眉間)이 넓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를 관상 용어로는 ‘미고거액’(眉高居額)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면 이상과 포부가 크고 높고, 멀리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다. 그래서 지도자 얼굴 중에 이런 눈썹이 많다.
그 다음으로는 눈과 코다. 강 목사의 눈은 맑고 선한 눈이었다. 그 사람의 성격이 사나운가, 착한가는 눈에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눈이 길다. 눈이 길다는 것은 통찰력과 관련된다. 코는 매부리코[鷹鼻]에 가깝다. 매는 뭇 새의 왕이다. ‘중조지왕’(衆鳥之王)인 것이다. 매는 고공에서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내리꽂힌다.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하고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매부리코는 조직을 장악하는 힘이 있다. 선한 눈과 정확한 매부리코가 조합된 얼굴을 ‘안선구비’(眼善鉤鼻)라고 한다. 구(鉤)는 갈고리라는 뜻이다.
대인의 관상을 지녔던 강원용은 크리스찬아카데미라는 저수지를 파는 데 힘을 쏟았다. 이 저수지에서 세 군데의 못자리판으로 물이 공급되었다. 그 첫 번째는 여성지도자를 키우는 못자리판이었다.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한명숙 국무총리,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이계경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을 양성하였다. 두 번째는 민주화라는 못자리판이고, 세 번째는 종교 간 화합이라는 못자리판이었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이 이만큼의 종교화합을 이룬 데에는 고인의 힘이 컸다.
보통 사람은 1~2권의 소설 분량을 살고 가고, 혹은 5~10여 권의 분량을 살다 가지만, 선생께서는 30여 권의 분량을 살다 가셨다.
[조용헌 살롱] 해삼위(海蔘威) 입력 : 2007.07.27 22:44 / 수정 : 2007.07.27 23:02
‘블라디보스토크’의 블라디는 러시아어로 ‘정복하다’는 뜻이고, 보스토크는 ‘동쪽’의 의미라고 한다. 러시아가 동쪽으로 와서 정복한 도시가 블라디보스토크이다. 정복하기 이전에 이 땅은 발해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고, 이후로는 여진과 거란의 땅이었다. 러시아가 이 도시를 건설한 역사는 겨우 147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땅을 한문으로 해삼위(海蔘威)라고 표기하였다. 이름이 독특하다. 왜 ‘해삼위’라고 불렀는가? 현지 한인 교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바닷가에 ‘해삼’이 많아서 해삼위라고 하였다고 한다. 요즘은 해삼을 채취하는 일이 불법이기는 하지만 가끔 바닷가에 가서 안줏거리로 잡으면 한 시간에 한 양동이 잡힐 정도로 해삼이 많다고 한다.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 높은 언덕에 위치한 독수리 전망대이다. 여기에 올라가 항구 전체의 지세를 조망해보니까 ‘큰 게(蟹)가 바다를 바라보는 형국’이다. 대해망해(大蟹望海) 형국인 것이다. 게는 두 개의 커다란 앞발이 특징이다. 마치 엄지와 검지를 U자처럼 오므리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두 개의 앞발 사이로 만(灣)이 형성되어 있다.
이 만 안으로 배가 들어오면 풍랑으로부터 안전하다. 이 만을 게의 두 앞발이 감싸고 있는데, 게는 통상 오른쪽 발이 크고 힘이 좋다. 시내의 ‘에게르셀드’반도 쪽이 바로 게의 이 오른쪽 발에 해당한다. 오른쪽 발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역과 항구의 선착장이 같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발에 해당하는 ‘추르킨’반도에는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최대 장점은 유럽과 극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육로와 태평양으로 나가는 해로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철도역에서 기차를 타면 9288km 떨어진 모스크바까지 8일이 걸린다. 비행기를 탈 수 없었던 1900년대 초반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쉽게 유럽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기찻길이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는 러시아의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있다. 북해, 발틱, 흑해 함대와 함께 러시아 4대 해군 기지의 하나에 속한다. 이 두 가지 물류로(物流路)가 큰 게의 두 앞발이 아닌가 싶다. ‘대해망해’의 명당인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조용헌 살롱]전립선과 구두수선공 자세 입력 : 2005.09.07 19:08 46'
전립선암 환자가 20년 사이에 20배로 증가했다고 한다. 놀라운 증가속도이다. 50대 이후 장년남자들이 잘 걸리는 질병이 전립선암이다.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말년에 이런 병까지 걸리면 인생이 정말 서글퍼진다. 옛날에는 이 병이 별로 없다가 최근 들어서 증가한 이유는 서구식 식생활 때문이라고 한다. 과도한 지방질 섭취에 비해서 채소섭취는 줄어든 탓.
또 하나의 이유는 의자생활과도 관련이 있다. 그동안까지 한국 사람들은 방바닥이나 마루에 앉아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서구화가 되면서 의자생활이 보편화되었다. 의자생활을 하면 자연히 골반이 좁아진다. 골반이 좁아지면 전립선을 압박하면서 전립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앉아서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양반자세나 가부좌로 앉게 된다. 양반자세나 가부좌를 틀고 앉는 방바닥 생활은 은연중에 골반을 넓혀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골반이 넓어지면 전립선에 물론 좋다.
전립선 질환을 예방해주는 요가의 자세가 바로 ‘받다 콘아사나(Baddha Konasana)’라고 하는 자세이다.
마루에 앉아 발뒤꿈치를 회음부 근처로 가져간다. 그런 다음 발을 잡고 양 무릎이 마루에 닿을 때까지 넓적다리를 벌리는 것이다. 인도에 가면 구두수선공들이 이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구두를 수선한다고 해 ‘구두수선공 자세’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구두수선공들은 하루 종일 이 자세로 앉아 있다. 그래서 구두수선공들은 비뇨기계의 질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소문나 있다. 말하자면 전립선암에는 걸리지 않는 것이다.
인도 ‘하타요가’의 대가인 아헹가(B.K.S Iyengar) 선생이 지은 ‘요가 디피카’(Yoga Dipika:현천 번역)에 이 자세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자세를 취하면 골반과 복부가 혈액의 충분한 공급으로 자극받게 되면서, 신장과 전립선 그리고 방광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해 준다고 되어 있다.
전립선암 예방에 좋은 또 하나의 자세가 ‘우파비스타 콘아사나(Upavistha Konasana)’이다. 마루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벌린다. 그런 다음 엎드려서 엄지손가락과 둘째, 셋째 손가락으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잡는다. 필자도 요즘 전립선 강화를 위해 이 자세를 매일 하고 있다.
[조용헌살롱] 천도재(薦度齋) 입력 : 2005.06.24 18:27 09'
이번에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28사단에는 20년 전인 1985년에도 동일한 유형의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망자도 20년 전과 같은 8명이고, 잠을 자고 있던 내무반의 동료들에게 난사했다는 상황도 20년 전과 같고, 사건 발생 요일도 같은 일요일 새벽이었다고 한다. 20년 전에 발생했던 참사가 다시 반복된 것이다.
왜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유형의 참사가 반복된 것인가. 우연의 일치일 뿐인가, 아니면 어떤 영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인가. 사판(事判:합리적 판단)으로 보면 우연일 수 있다. 세상에는 우연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판(理判:영적인 판단)으로 보면 구원받지 못한 원혼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었거나 전쟁터에서 죽은 경우, 아니면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귀신으로 남아 이승 어딘가에 떠돈다고 믿었던 것이 한국인의 전통적인 귀신관(鬼神觀)이었다.
비유하자면, 정상적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은 버스 터미널에서 차표를 구입하여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출발해 버린다. 천당행 버스이거나 아니면 지옥행 버스를 잡아타고 출발한다. 어찌 됐든 이승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비정상적으로 죽은 영혼은 차표를 구입하지 못한 채 터미널 내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껌팔이의 상태와 비슷하다. 터미널을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껌 사달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천도받지 못한 영혼들은 자기가 죽었던 장소나, 아니면 살아생전에 좋아했거나 싫어했던 사람에게 붙는 경우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동일한 유형의 사건이 우연처럼 반복되는 까닭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28사단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 병사들의 고충 상담을 확대하고, 구타와 욕설을 줄이는 등의 합리적 개선책도 물론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혼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는 종교 의례도 고려해봄 직하다. 한국의 민속에서 보면 살인사건이 난 집터나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장소, 대규모 참사가 발생한 건물,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인명이 몰살한 장소,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은 영혼을 위로해서 멀리 보내는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용헌 살롱] 전자맹금(田字猛禽) 관상 입력 : 2007.06.25 22:47
도박보다도 더 적나라하게 깊은 속을 보여주는 무대는 바로 선거(選擧)가 아닌가 싶다. 출마한 사람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적 내공을 선거 무대에서 관객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게 돼 있다. 그래서 관상가들은 선거철이 되면 많은 실전 사례들을 공부하게 된다. 관상과 그 사람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선택하는 결정은 과연 상관관계가 있는가? 이것이 핵심 연구과제이다. 관상서 가운데 마니아들에게 인기 있는 책이 ‘상리형진(相理衡眞)’이라는 책이다. ‘상리형진’의 내용 가운데 재미있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비전십자면도(秘傳十字面圖)’라는 대목이다. 사람의 얼굴을 10개 글자로 압축시켜 관상을 보는 방법이 설명돼 있다. 유(由), 갑(甲), 신(申), 전(田), 동(同), 왕(王), 원(圓), 목(木), 갑(甲), 풍(風)이 그 10글자다. 예를 들어 아래턱과 하관 부분이 두껍고 풍만하면서 상대적으로 이마 부분이 좁은 얼굴은 유(由)자 관상으로 간주한다.
요즘 여권의 대선 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이해찬 전 총리의 관상은 독특하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매섭고 사나운 얼굴이지만 ‘십자면도’의 차원에서 보면 전자(田字)에 해당하는 얼굴이다. 전자는 네모진 얼굴을 가리킨다. 특히 턱 부분이 각이 지다시피 해서 전자를 형성하고 있다. 전자 관상은 실용적이고 쓸모가 있는 관상이라고 소개돼 있다. 현 정권의 친노계 인물들 가운데 눈에 띄는 관상이다. 이해찬은 눈이 매우 매섭다. 동물로 치면 맹금류(猛禽類)의 눈에 가깝다. 맹금류라고 하면 쥐·토끼를 사냥하는 매나 독수리를 말한다. 공중에서 빙빙 선회하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급강하해서 송곳처럼 찍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맹금류는 사냥감을 찾기 위해 공중에 높이 떠 있어야 하므로 시야가 넓다. 그래서 툭 터진 장소를 좋아한다. 왜냐 하면 먹잇감인 토끼나 쥐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면 나무가 울창한 숲 속이나 계곡보다는 평지나 초원이 훨씬 잘 보이기 때문이다. 골프장이 이런 곳이다. 그가 골프를 좋아하는 것도 다 이런 맥락이 아닐까. 문제는 날개가 약하다는 점이다. 머리는 맹금류인데, ‘친노(親盧)’라는 약한 날개를 달고 있어서 과연 얼마나 비상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연재 | 동양학 박사 조용헌의 영지 기행 ①] 도선국사의 풍수철학 완성지 구례 사성암(四聖庵)
글·사진 | 조용헌 동양학자·칼럼니스트 기자의 다른 포토보기
어떤 분야이든지 창시자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남이 해놓은 것을 따라 하는 것은 쉽지만, 미지의 영역을 처음으로 개척한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타고난 에너지와 창의력 그리고 인연복(因緣福)이 따라줘야 한 문파(門派)를 개창한다. 일본사람들은 이를 ‘리빠나’(立派)라고 부른다. 문파를 세운 사람은 ‘훌륭하다’는 뜻이다. 일본은 전국시대 죽고 사는 칼부림을 겪으면서 내공을 쌓으려면 문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보다 훨씬 먼저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통일신라 말기의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야말로 한 문파를 세운 장문인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정립한 풍수철학(風水哲學)은 1,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어도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의 집터 잡는 데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서양철학의 트렌드가 길어야 100~200년이다. 그런데 1,000년 이상 영향력이 유지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닌가!
▲ 기운이 강한 암벽 옆에 섬진강을 바라보며 사성암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풍수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이를 한국의 상황에 맞게 토착화한 인물은 도선국사이다. 더군다나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정권을 거치면서 풍수의 맥이 끊기다 시피했고, 홍콩이나 대만에서 유지되는 풍수는 원래의 대풍수(大風水) 사상에서 곁가지로 나간 소풍수(小風水)라고 보아야 한다. 원래 의미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살아 있는 대풍수는 현재 한국이 종주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선이 풍수철학을 정립하기까지의 과정과 사연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제조과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도선은 어디에서 풍수를 연마한 것인가. 그리고 도선의 스승은 누구란 말인가? 전남 구례(求禮)의 사성암(四聖庵)은 도선이 풍수를 연마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도선은 이곳에서 풍수의 요체를 이해하고, 자신의 철학체계를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도선국사 비문에 의하면 도선은 젊었을 때에 구례의 사도촌(沙圖村)에서 지리산의 이인(異人)을 만났다고 한다. 그 이인은 수백 살 먹은 인물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지리산의 신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도촌은 사성암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저 앞으로 보이는 동네이다. 섬진강의 모래가 쌓여 형성된 ‘사도촌’은 모래로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상사도리(上沙圖里), 하사도리(下沙圖里)로 나뉘어 불린다. 도선이 수백 살 먹은 지리산 도사로부터 이곳 사도리의 모래를 쌓아놓고 산의 모양과 강물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야 명당인지를 학습했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칠판에 그림을 그리면서 산천순역(山川順逆)의 모양을 설명했겠지만, 칠판이 없었던 1,000년 전에는 섬진강에서 퇴적된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칠판 역할을 하는 풍수학습장이었던 셈이다.
사성암(四聖庵)이 있는 오산(鰲山)은 표고 350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다. 산은 높다고 장땡이 아니다.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쓴 ‘누실명’(陋室銘)에 보면 ‘산부재고 유선즉명’(山不在高 有仙則名)이라고 했던가. ‘산은 높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다’는 뜻이다. 산만 높고 명인이 살지 않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명산에는 명인이 있어야만 명산으로서 가치가 빛난다. 오산은 지리산의 도사들이 어느 정도 공부가 되면 마지막으로 들러서 마무리 공부를 했던 산으로 전해져 온다. 중간단계 이상을 거쳐 고단자로 승단한 신선과(神仙科)들이 지리산 1,500m급 영봉(靈峰)들의 고단백 에너지를 몽땅 섭취한 다음 이 오산에 와서 되새김하는 공부를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지리산파의 마지막 공부코스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오산은 지리산의 형님 산’ 이었다고 도사들 사이에 회자되어 온다.
▲ 좌우에 암벽이 꽉 끼일 정도로 바짝 붙은 곳에 자리 잡은 산왕전은 기운이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곳이다.
도선국사, 사도촌에서 지리산 신선 만난 듯
오산 사성암에서 마무리 공부를 마치면 그 다음에 가는 코스는 계룡산이나 금강산이었다. 계룡산이나 금강산은 학교에서 배운 공부를 현실에서 적용해 보는 실전경험 양성 과정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왜 이 350m밖에 안 되는 산이 지리산파의 최종 공부 터가 될 수 있었나? 어떤 점이 매력이란 말인가?
오산에서 마주 보이는 구례 일대의 지리산은 한반도 백두대간의 큰 줄기가 3,000리를 흘러 내려와 멈춘 지점이다. 풍수적으로 해석하면 결국(結局)을 이룬 곳이다. 호박 줄기의 끝에 호박이 열리듯이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끝자락에 기운이 뭉치면서 국(局)을 이룬 지점이다. 섬진강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 다음에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그런데 자그마한 오산이 구불구불 3천리를 내려온 대간(大幹)의 에너지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용어로 표현하면 회향(回向)을 시켜주는 기능이라고나 할까. 회향을 하지 않으면 기운이 그냥 분산되어 버린다. 달리 비유하면 반사경처럼 빛을 반사시켜 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적당한 산이 끝에서 하나 받쳐 주어야만 기운이 응집되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이처럼 기운이 빠지지 않도록 응집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봉우리를 ‘수구(水口) 막이’라고 부른다. 앞으로 수구막이에 대해서 종종 설명을 하겠지만 양산 통도사에도 가면 차량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는 정문 입구에 자그마한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이 봉우리가 있어서 통도사를 관통하는 냇물의 기운을 마지막으로 잡아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게 없으면 통도사의 기운이 세기 때문에 돈도 빠져 버린다. 오산이 바로 이 수구막이 역할과 같다고 본다.
더군다나 이 오산은 지리산처럼 백두대간의 주맥이 아니다.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호남정맥의 끝자락은 광양의 백운산(白雲山)인데, 오산은 이 백운산의 시작지점이기도 하고 끝자락이기도 하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백두대간의 끝자락과 호남정맥의 끝자락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맥이 다르면 기운도 다르다.
난류와 한류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 고기가 많이 모인다. 기운이 서로 다른 이종격투기가 이루어지는 지점에 스파크가 튄다. 구례 사성암은 바로 이런 산맥의 이종격투기가 이루어지는 현장인 것이다.
▲ 오산 정상은 모두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산의 정상은 단단한 바위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양화를 그리는 기법 중에 부벽준(斧劈)이라는 게 있다. 바위나 암석을 붓으로 그릴 때에 도끼로 장작을 패는 것처럼 탁탁 쳐서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사성암이 자리 잡고 있는 오산 정상 바위들의 표면은 도끼로 탁탁 쳐서 다듬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무협지에 등장하면 딱 맞는 분위기의 바위들이다. 주인공이 적과 싸움을 하다가 내상을 입고 숨어 들어와 고수를 만나 다시 공력을 연마하는 장소 말이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비밀스럽기도 하면서 장쾌한 경관이 연출되는 지점인 것이다. 3~4m 높이의 바위가 총총히 서 있기도 하고 10m 이상의 우뚝 솟은 바위도 서 있는 석림(石林)의 형세이다.
이처럼 단단한 바위가 밀집되어 있는 지세는 기운이 강하다. 바위는 지기(地氣)가 응축되어 있는 신물(神物)이다. 바위가 많으면 기운도 강하다. 에너지가 있어야 도를 닦는다. 바위 속에 있는 광물질로 지구의 자석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는데, 인체의 피 속에도 철분을 비롯한 각종 광물질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바위에 앉아 있으면 이 에너지가 피 속으로 들어와 온 몸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바위에서 뒹굴 방굴 하면서 머무르면 나도 모르게 땅의 기운이 몸으로 들어오게 된다. 몸이 빵빵해진다.
신선들이 바둑을 두면서 놀았다고 하는 지점들을 유심히 보면 거의 대부분 이처럼 지기가 강하게 들어오는 넓적바위들이다. 땅 기운 받으려고 너럭바위에 있었던 것이다. 사성암의 바위들도 마찬가지이다. 바위가 한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자의 이빨처럼 총총하게 암벽들이 밀집되어 있다. 그것도 산의 정상에 말이다.
▲ 사성암 주위로 1천m급 봉우리들이 웅위하고, 섬진강이 활처럼 흐르는 바로 앞에는 구례평야가 있어 어디든 먹을 것이 많아, 한마디로 명당인 곳이다.
3천리 뻗어온 백두대간 기운 받쳐주는 지점
천문과 지리를 연구하는 도사가 이런 석림 지점을 절대로 그냥 지나칠 리 없다. 4명의 성인이 공부했다고 해서 사성암인데, 그 4명은 원효(元曉), 의상(義湘), 도선(道詵), 진각(眞覺)이라고 한다. 이 4명도 여기에 와서 이 바위들의 정기를 듬뿍 받았을 것이다. 사성암에는 산신각(山神閣) 자리가 기운이 많이 뭉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왕전(山王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산신각이라는 명칭보다 더 높인 표현이 산왕전이라는 표현이다. 전각(殿閣)이라고 할 때 전(殿)이 각(閣)보다 앞에 오는 이치와 같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사찰 대웅전(大雄殿)의 전(殿)이 아닌가. 그만큼 높여 부른 이름이다.
사성암의 ‘산왕전’이 자리 잡은 터는 아주 기막힌 지점이다. 좌우에 바위 암벽이 꽉 끼이는 여자들의 스커트처럼 양 옆으로 바짝 붙어 있다. 뒤쪽에도 또한 바위 맥이 내려오고 있다. 그야말로 기운이 빠질 수 없는 꽉 조이는 지점에 산왕전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기도를 열심히만 하면 7일 만에도 소원 하나는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압력 밥솥에 넣고 푹푹 찌는데, 어찌 밥이 익지 않겠는가! 절절 끓는 찜질방에서 일주일만 제대로 지지면 어지간한 병은 나을 것이다.
산왕전 바로 옆에는 도선이 공부했다고 하는 도선굴(道詵窟)이 있다. 그 옛날에 이 높은 산꼭대기 지점에 법당을 짓기 힘들었을 것이다. 법당이 있기 전에는 이 자연동굴에서 수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곳이 동굴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수도처는 동굴이 많다. 도선도 아마 이 자그마한 동굴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사성암은 약사도량이니까 기도하는 데가 산왕전이 아니라 약사여래 모셔 놓은 데서 해야 한다. 절벽에 기둥을 세워서 지은 법당이 있다. 이 법당에는 바위 절벽에 손톱으로 그렸다고 전해지는 약사여래의 선각(線刻) 그림이 있고, 이를 유리창 너머로 바라볼 수 있도록 법당 구조가 되어 있다. 보통 사성암을 찾는 기도객은 여기에서 기도를 한다.
▲ 오산의 정상엔 사자의 이빨처럼 암벽들이 총총하게 밀집되어 기운이 강한 지세를 띠고 있다.
기운이 빠질 수 없는 바위 사이에 기도처
사성암의 암벽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부터 견두산, 지초봉, 간미봉, 만복대, 성삼재, 차일봉, 노고단, 반야봉, 왕시루봉, 천왕봉 등이다. 다시 왼쪽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백운산에 연결된 광양 일대의 고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사성암 주위를 1,000m급 봉우리들이 삥 돌아서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하면 덜 떨어진 인간이다. 주변 사람들이 잘났다고 해야 진짜 잘난 인물이 된다. 사성암 주위로 1,000m급 봉우리들이 웅위(雄衛)하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사성암을 알아주고 있는 형국이다. 주변에서 알아주니까 외롭지 않다. 이처럼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는 국세라야만 좋은 터이다.
높은 봉우리가 둘러싸면 자칫 답답할 수 있다. 그런데 사성암 앞으로는 널따란 구례평야가 있다. 평야가 있으니까 쌀이 나온다. 어디든지 먹을 것이 나와야 명당이다. 배 고프면 오래 못 간다. 금상첨화격으로 섬진강이 사성암을 활처럼 둘러싸고 흐른다. 이를 풍수에서는 금성수(金星水)라고 부른다. 활, 반달 또는 가락지처럼 둥그렇게 감아 돌면서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 사성암을 감아 도는 섬진강의 모습은 금성수에 해당한다. 이렇게 명당터를 둥그렇게 감아 도는 모양은 사성암 아니면 보기 힘들다. 오산의 정상 바위들을 애무하는 섬진강이라고나 할까. 그 애무가 너무나 부드럽고 감미롭다. 곡성, 압록(鴨綠) 쪽에서 내려온 강물은 사성암을 활처럼 감아 돌면서 화개, 하동 쪽으로 흘러간다.
산왕전 뒤의 바위에 올라가서 보면 저 멀리 압록에서 흘러 들어오는 강물이 사성암 앞에서 감아 돌아가 화개 쪽으로 빠지는 모양 전체가 보인다. 거대한 에스(S)자의 모양이다. 이 S자 모양의 강물을 보는 것이 풍수교 신자인 필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장관이다. 1시간 이상을 이 모양을 바라다보았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다. 꽃이 피는 5월이 오면 도시락 싸가지고 와서 반나절 동안이나 이 모습을 보고 싶다.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대웅전 앞을 감아 도는 냇물도 S자 형국이고, 거시적으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계룡산을 감아 돌아 서해로 빠지는 금강의 모양이 이렇다. 그러나 마곡사 S자는 너무 작고, 계룡산을 감아 도는 금강의 S자는 비행기를 타고 5,000m 이상을 올라가지 않고는 전체 모양을 한눈에 관조할 수 없다. 사성암의 섬진강은 이 중간 사이즈이다. 관조가 가능한 지점이다. 이렇게 감아 도는 물이 있으면 ‘산태극 수태극’(山太極 水太極)의 명당이 된다. 높은 지리산과, 구례평야, 그리고 진강이 3박자를 이루면서 조화를 이룬 곳이 오산 사성암 터이다.
산의 흐름, 평야의 인가(人家), 물의 방향을 알면 풍수 공부의 골격은 다 마친 셈이다. 거기에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이 마주보는 산태극, 수태극의 형국이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도선국사가 여기에서 풍수를 공부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학습장이었다.
동양학 박사 조용헌씨는 현재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이란 칼럼을 매주 월요일 800회 넘게 쓰고 있으며, <사주명리학 이야기>, <사찰기행>,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방외지사1, 2>, <조용헌의 고수기행>, <나는 산으로 간다> 등 다양한 저서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