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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한 걸음 인성의 모든 과정을 헤쳐 나가신 주님
얼마 전 목회자 라이프스타디 세미나에서 강사로 나오신 이 희득 형제님께서 눅2:52절 말씀을 예로 들어서
예수님께서 어떤 인성의 삶을 사셨는지 말씀하셨습니다.
- 눅2:52 “예수님은 지혜와 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분 안에 나타난 은혜가 자라 가셨다.”(회복역)
이 구절에 있는 “자라가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입니다.
본문에서는 ‘자라가며’로 번역되었지만 그 원어의 뜻을 보면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시면서
그 단어가 전치사인 προ(프로)와 동사인 κόπτω(코프토)가 합쳐서 된 단어로서
προ는 ‘앞에 before’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동사 κόπτω는 ‘자르다, 끊어내다 to cut, strike’의
의미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형제님은 주님께서 그냥 성장하신 것이 아니고 그 삶을 마치 길이 없는 밀림에서 칼을 가지고
나무를 자르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헤쳐 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그 분의 인성의 삶을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제 가슴에 이 말씀이 너무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원어사전에서 찾아서 의미를 확인하고 용례를 좀 더 살펴보면서 그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된 영적 의미와,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보다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과 누린 것을 나누길 원합니다.
눅2:52에서 ‘자라다’에 해당하는 원문 헬라어 προκόπτω는 어원상으로 보면 위에서 인용해 드린 것처럼,
전치사 προ와 동사인 κόπτω 두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또한 이 희득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원상으로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전적으로 이 단어의 고유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 첫째 ; “앞으로 때려내다(to beat forward)”의 뜻으로서 마치 대장장이가 쇠를 벼르는 것처럼 망치질을
하여 길이를 늘이는 것과 같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to lengthen out by hammering (as a smith forges metals)〕
- 둘째 ; “앞으로 나가다, 전진하다, 진보하다, 계속 진행하다(to go forward, advance, proceed)”의 뜻으로서
시간이나 어떤 것이 진행되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또한 비유적으로 ‘증가하다’, ‘향상되다’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는 모두 6회 사용되었는데(눅2:52, 롬13:12, 갈1:14, 딤후2:16, 3:9,13),
저는 이 단어가 사용된 각각의 문장 안에서 아래와 같은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 눅2:52 “예수님은 지혜와 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분 안에 나타난 은혜가 자라 가셨다.”
* 해석 ;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인성 안에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계속해서 감당(미완료시재, 능동태)해
가시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인성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인간은 물론 만유를 자신 안에
짊어지시기 위해 얼마나 애쓰신 삶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칼로 우거진 밀림을 쳐서 길을 내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신 삶이었으며, 또한 쇠를 쳐서
늘려 유용한 도구를 만들듯이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영, 혼, 육에 심한 고난과 짊을 친히 지시고 사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헬라어에서 ‘미완료시재’는 어떤 동작이 완료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2) 롬13:12 “밤이 깊었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로 무장합시다.”
* 해석 ; 여기서는 현 시대 곧 어두움의 밤이 이미 깊었고(부정과거, 능동태) 따라서 주님이 오실 낮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시재가 부정과거로 쓰인 것은,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현 시대인 밤 곧 옛 창조가 이미 깊었다는 것 곧 정죄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온 밤에 속할 것인지, 아니면 낮에 속할 것인지
양자 간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엄중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 헬라어에서 ‘부정과거’는 과거에 이미 완료된 동작이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3) 갈1:14 “또한 나는 유대교 안에서 내 동족 중 많은 동년배들보다 앞서 가고 있었으며,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 해석 ; 여기서는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동족 중 그 누구보다 유대교를 열심히
계속하여 추구하였음(미완료, 능동태)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비둘기의 눈처럼
오직 하나님을 향한 단일한 충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계시의 눈이 열렸을 때 그 누구보다
크게 쓰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4) 딤후2:16 “속되고 헛된 말을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은 사람을 경건하지 않은 데로
더욱더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 해석 ; 여기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속되고 무익한 말을 피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것이 사람을 경건하지 않은 것 안으로 점점 빠져들도록(미래, 능동태)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재가 미래로, 그리고 태가 능동태로 쓰인 것에도 의미심장한 교훈이 있습니다.
미래 시재가 쓰인 것은 우리가 지금 그런 속되고 헛된 말들을 접촉할 때 필연적으로 우리가 미래에
경건하지 않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능동태가 쓰인 것은 그런 속되고 헛된 말들을 접촉함으로서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경건치 않은 것으로 빠져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 딤후3:9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렇게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어리석은 짓이
그 두 사람처럼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해석 ;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에 어려운 날들이 올 것이며 그 때에 그들이
옛날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처럼 이들도 진리에 대적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언급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비록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나겠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어리석은 짓이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는
원문에서 미래시재, 능동태로 사용되었습니다. 미래시재는 마지막 때에 대적하는 일이 있을 것임을 말하고,
능동태는 그들이 비록 사단의 궤계에 넘어가서 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의지로 그런 반대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런 자들이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피할 길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로 인해 혹 지금 핍박을 받을지 모르나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6) 딤후3:13 “그러나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더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할 것입니다.”
* 해석 ; 계속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에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다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12절) 한 다음, 그러나 악한 자들은 더욱더 악해질 것(미래, 능동태)이라고
주의를 주면서, 그러므로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것 안에 머무르라고 권면합니다.(14절)
여기서 “더욱 더 악해져서”가 원문에서 미래시재, 능동태로 표현된 것은 위의 구절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또한 그들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자라나심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가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전부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들어간 모든 구절들이 매우 깊은
교훈을 주는 구절들임을 또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단어가 그 자체의 의미에서는 물론, 성경에서 사용된 6가지 용례에서 모두 함축하고
있는 의미로서, 사실 이것이 이 글을 쓰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앞에서 이 희득 형제님께서 주님의 자라나심이 인성의 과정이며, 그것이 마치 주님의 앞길을
험하게 가로막는 그 밀림의 숲을 밀림도로 쳐가면서 길을 낸 것처럼 사셨다고 표현한 것에 들어있는
가장 핵심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단어가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어떤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모든 거쳐야 할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어떤 “과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인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단어가 가진 깊은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계시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는 물론,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시고 새 창조를
이루시기 위해 먼저는 온전한 인간이 되셨고, 두 번째는 인간의 모든 과정들을 33년 반의 이 땅에서의
생애를 통해 하나씩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곧 모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바로
이 단어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가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의 6가지 용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런 “과정”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의미 곧 “과정”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드린 데로 바로 이 단어가 밀림을 칼로 쳐서 한 발자국씩 나가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도구를
만들기 위해 쇠를 두들겨서 조금씩 벼르는 것처럼 본문 안에 내포된 ‘과정’의 깊은 뜻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 첫 번째, 누가복음 2장 52절에서 예수님께서 ‘자라 가셨다’는 것은 그 분의 자람이 단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모든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으며, 너희가 소리치지 않으면 길의 돌들로 소리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자신의 몸에 친히 체휼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인생의
모든 과정을 인내로서 한 걸음 한 걸음 십자가 앞까지 걸어가신 것입니다.
- 두 번째, 로마서 13장 12절에서 ‘밤이 깊었고’는 이미 우리 앞에 다가온 그 어두움의 현 시대가 어느 날
갑자기 도래한 것이 아니고, 마치 밤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깊어져 한 밤중이 되는 것처럼 그 밤이 인간의
죄악의 역사의 과정을 거쳐서 도래한 것임을 말합니다.
- 세 번째, 갈라디아서 1장 14절에서 회심하기 전에 바울이 그 누구보다도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것은
그의 그런 철저한 추구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비록 그가 하나님의 경륜을 알진 못했지만,
그의 천부적인 재능에 더하여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계속적으로 추구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 네 번째, 디모데후서 2장 16절의 우리가 속되고 헛된 말을 접촉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진적으로 조금씩 경건하지 않은 상태로 빠지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 다섯 번째, 디모데후서 3장 9절에서는 진리에 대적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 여섯 번째,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다 박해를 받을 것이며,
악한 자들은 정도를 더하여 계속해서 더욱 악해질 것이니 이를 알고 또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상과 같이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는 어떤 일시적 결과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여 그리고 체험적으로는 내외적인 환경 가운데서 고통과 인내를 통해
걷게 되는 어떤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참 가치 있는 결과물은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뒷부분에서 설명됩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체험과 연계해서 보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구속받는 것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절망이고 세상에 한 사람도
구원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구속은 우리가 믿음으로서 단 번에 얻게 되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내 안에서 생명으로 자라고 내가 새 예루살렘으로 변화되는 것은 단 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나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오랜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분은 우리 안에서
점점 자라시게 되고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로 충만해짐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주관적으로 체험된 그리스도, 내 안에서 경작된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반드시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 주 예수여!
이제 왜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를 거쳐야만 비로소 좋은 결과를 가질 수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προκοπή(프로코페)입니다. 이 단어를 보시면 단 번에
두 단어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προκοπή(프로코페)는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프로코페는 “진보, 향상(progress, advancement)”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신약에서 전부 3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진보와 향상을 의미하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빌1:12,25 / 딤전4:15)
- 빌1:12 “형제님들, 나에게 일어난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 빌1:25 “이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내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속
남아 있어야 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 딤전4:15 “그러한 일들을 실행하고 그러한 일들에 투신하여, 그대의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이상과 같이 προκοπή(프로코페)는 ‘복음전파의 진전’, ‘믿음의 진보’, ‘디모데의 개인적 진보’를 표현하는
매우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 안에서의 진보가 일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이를 표현하는 προκοπή(프로코페)가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에서 나왔으며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가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한 위의 본문들이 사용된 배경을 보면 모두 과정의 결과로서 그런 진보와 향상을 얻게
되었음을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과정을 거쳐서, 그리고 시간을 통해서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산출되는 인내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는 믿음의 과정을, προκοπή(프로코페)는 그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일시에 주어지지만, 우리의 체험 가운데에서의 영적 진보는 이렇게 점진적으로
마치 앞이 보이지 않도록 우리를 막아서고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밀림을 칼로 치고 나가는 것과
같이 그리고 쇠를 두드려 펴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의 그런 과정이 필요하며, 또한 그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결과물, 영광스런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뿌려진 그 신성의 씨, 곧 그 영은 온전하고 완전하며 모든 신성의 충만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는 그것이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인성의 과정을 거쳐 부활하심으로써,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 분께서 이제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옮기셨지만 그러나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는 자라나고 성장을 통해서 곧 과정을 통해서
그 분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며 또한 힘든 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싸움은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인성의 모든 과정을 묵묵히 걸어 나가셨습니다.
그 과정이라는 것은 죽는 과정이요, 오해받는 과정이며, 인내의 과정이며, 고통의 과정입니다.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시지만 그 분은 친히 이런 과정을 거침으로서 그 분은 만유를
그 분의 어깨에 짊어지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이런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예”가 되셨습니다.
(고후1:18,19절 및 각주19-1 참조 “ ~ 사도들이 전파한 그 그리스도는 ‘예’라고 하셨다가 ‘아니요’라고 하시는 분이 되지 않으셨다. ~ ”)
우리에게 이 “예”가 있으므로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예”가 있음으로 우리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예”는 오직 이 우주 안에 참 남자이신 주님만이 할 수 있으십니다. 그 분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영적 원칙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시간 안에서 주어진 이 육신의 삶에서
주님을 본받아 또 우리도 그런 προκόπτω(프로코프토)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오직 이런 사람만이 이긴 자의 영광스런 προκοπή(프로코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글을 마치면서, 우리에게 매우 도전을 주는 치열한 짧은 글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글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한 지체로부터 얻은 ‘시몬느 베이유’의 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해 주옵소서.
일체의 육체적 동작을 할 수 없으며
그런 시도조차도 하지 않도록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어떠한 감각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며
생각과 생각을 연결시킬 수조차도 없게 해 주옵소서."
시몬느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모든 의지와 감각과 지능을
심지어는 사랑까지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면 빼앗아 가 달라고 기도했다.
"이 모든 것들이 벗겨져 제가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육체와 정신이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의
희생물이 되게 하옵소서.
당신은 선이시고 저는 쓰레기이오니 이 몸과 영혼을
갈갈이 찢어 당신을 위해 쓰게 하시고 제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하옵소서." - "불꽃의 여자 시몬느 베이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