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의 창간 14주년 특집 연재로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남성성악가 등을 살펴보며 진행되어온 ‘20세기를 빛낸 음악가들’이 이번 호에는 그 마지막 순서로 ‘10인의 여성 성악가’를 선정해 소개한다.
이번 선정에는 국내 음악평론가, 칼럼니스트 외에 성악가들도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간발의 차로 여기에 들지 못한 가수는 바바라 헨드릭스(S), 레진느 크래스팽(S), 일레아나 코투르바스(S), 마릴린 혼(S), 레나타 스코토(S) 등이다. (S:소프라노 M:메조 소프라노 A:알토)
선정 결과 역시 이탈리아 오페라를 전문으로 하는 가수들이 강세를 나타냈으나, 독일-오스트리아계 오페라, 리트, 바그너 전문가수들도 높은 평가를 얻어 지난달의 ‘남성 성악가’ 선정 결과에 비하면 전문분야별로 고른 분포를 보였다. 다만 기악 분야의 선정결과와는 달리 러시아 가수들이 약세를 면치 못한 점은 아쉬웠다. 게나 디미트로바, 이리나 아르히포바,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 갈리나 고르차코바 등을 꼽은 선정위원도 있었으나 소수의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0인’ 안에 든 성악가들이 칼라스를 제외하고는 아직 모두 살아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이들 중 프레니와 카바예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은퇴한 상태로 가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무대에 선다는 소식이 들릴 뿐이다. 현재 무대를 누비고 있는 가수 중에는 바르톨리와 소피 폰 오터, 보니, 헨드릭스 등이 높은 평가를 얻었다.
1. 마리아 칼라스(1923∼1977)
칼라스. 스칼라, 디바, 카리스마, 테발디, 오나시스, 비극, 마스터 클래스, 그리고 ‘사상 최고의 가수’ 등이 그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열정’과 ‘불행’이 추가돼야 할 것이다.
1923년 뉴욕에서 그리스계 이민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장티푸스로 잃었던 어머니 에반겔리아는 칼라스가 딸로 태어나자 낙심했다. 그 보상심리 때문에 마리아의 음악교육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여기에 때마침 불어닥친 대공황, 부모의 불화로 마리아는 뚱뚱하고 못생긴, 그로 인해 심각한 콤플렉스에 빠진, 그러나 노래는 아주 잘하는 괴물로 커갔다.
1937년, 이혼녀 에반겔리아는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갔다. 칼라스는 아테네 음악원에서 전직 프리마 돈나 엘비라 데 이달고를 사사했다. 이듬해 아테네에서 불과 15세 나이로 산투차를 노래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생활고는 높아졌다. 그 훨씬 전부터 마리아는 노래로 돈을 벌어 어머니를 부양하고 있었다. 41년에 역시 아테네에서 ‘토스카’로 정식 데뷔했다.
1947년 베로나 아레나 음악제에서 ‘라 조콘다’를 노래하며 지휘자 세라핀과 사업가이자 오페라의 열광적인 팬인 메네기니를 만났다. 세라핀은 칼라스의 노래를 새롭게 다듬어 냈다. 메네기니는 칼라스와 결혼하며 그의 인생을 새롭게 다듬어냈다. 우선 칼라스는 어머니와의 연을 거의 끊었다. 후에 에반겔리아는 칼라스를 향해 공개적으로 ‘불행해질 것’ 이라고 악담했고, 이는 들어맞았다.
칼라스가 51년 ‘시실리 섬의 저녁기도’로 스칼라에 공식 데뷔하기 이전부터 유명한 ‘테발디와의 불화’가 시작되어 있었다. 양쪽 팬들의 대립은 격렬했다. 이는 결국 테발디가 스칼라를 떠나는 사태로 이어졌다. 칼라스는 스칼라 무대에서 ‘세기를 지배하는 여신’으로 떠받들어졌다. 병적인 집념으로 체중을 감량하고, 52년 코벤트 가든, 54년 시카고 리릭오페라, 56년 메트로폴리탄, 58년 파리 오페라를 차례로 점령했다. 이 역사적인 파리 공연에서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조우했다. 오나시스는 ‘세기의 여신’을 차지하기 위해 불 같은 열정으로 달려들었다.
59년, 칼라스는 오나시스와 야반도주하며 메네기니의 품을 떠났다. 그런데 오나시스는 목표를 성취하면 다음 목표에 도전하는 스타일의 인간(물론 이는 칼라스도 마찬가지였다)이었다. 재클린 캐네디가 다음 목표가 되었다. 63년경인 이때부터 칼라스의 노래에 이상이 생겼다. 수면제 없이 잠을 이룰 수 없는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65년, 42세의 나이로 칼라스는 무대를 떠났다. 71년 오나시스가 재키와 결혼했고, 칼라스는 유명한 줄리어드 마스터 클래스를 시작했다. 77년, 파리에 칩거하던 칼라스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졌다.
칼라스의 목소리는 소프라노로서는 낮은 쪽에 중심이 잡혀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무리하게 살을 빼면서 비음과 날카로움이 더해진 차가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가창에 있어서 누구도 트집을 잡지 못한다. 그의 바이브레이션은 기계적이라고 할 정도로 균일하고 규칙적이었다. 그리고 칼라스는 탁월한 연기력과 무대 위에서의 카리스마를 노래에 실었다. 한편 벨리니와 도니제티를 현대에 되살려낸 ‘벨 칸토의 성녀’였다. EMI는 그녀의 음반을 끊임없이 ‘업 데이트’하고, 새로운 오페라 팬들은 또 끊임없이 ‘칼라스교 신자’로 개종한다.
2.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1915∼)
슈바르츠코프를 잘 모르는 사람이 젊은 시절 그의 사진을 본다면 1940년대의 영화배우라고 생각할 것이다. 천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하고 귀족적인 용모와 노래가 정확히 일치했던 가수. 그래서 ‘신이 빚은 가수’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그다.
목소리의 농담 조절로 표현하는 시정과 시의 가사와 멜로디를 일치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언제나 고아한 기품을 잃지 않던 그이기에 리트에 있어서 ‘피셔 디스카우에 비견되는 여성가수’라는 평은 ‘지당한 말씀’인 것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빈에서 성공했으므로 20세기 독일-오스트리아계를 대표하는 여성 성악가로 남았다. 1938년 베를린 시립 오페라 극장에서 ‘파르지팔’의 꽃의 소녀로 데뷔한 그는 42년의 빈 리사이틀을 계기로 칼 뵘의 눈에 들었다. 43년에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무대에 초대되어 ‘세빌랴의 이발사’ 중 로지나 역을 부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뵘에 의해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가 된 그는 4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돈나 엘비라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리리코, 더 나아가 드라마티코까지 영역을 넓혔다. 51년 바이로이트 무대에 섰고, 스트라빈스키의 ‘난봉꾼의 행각’, 칼 오르프의 ‘아프로디테의 승리’ 등의 초연에도 참가했다.
40대에 접어들어 미국 데뷔를 가졌고,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와 결혼했다. 물론 이전까지도 일류가수였지만, 이를 계기로 슈바르츠코프는 레코딩에서도 폭발적인 활약을 펼치게 되었다. 레코딩 레퍼토리는 무대 위에서와 같이 독일-오스트리아계 오페라와 가곡, 그리고 종교음악, 성악이 포함된 교향곡 등이다.
97년 3월호 ‘객석’이 선정한 ‘최고의 마샬린’이란 사실이 증명하듯, 그가 참여한 ‘장미의 기사’ 녹음(EMI, 카라얀 지휘)은 최고의 명반 중 하나이다. 작곡가는 다르지만 ‘피가로의 결혼’(EMI, 줄리니 지휘)과 ‘카프리치오’(EMI, 자발리쉬 지휘)에서의 백작부인 역도 역시 그에게 딱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볼프 가곡집’(세온)과 같은 명반을 비롯, ‘스페인 가곡집’(DG), ‘슈베르트 가곡집’(EMI),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EMI) 등도 빼놓을 수 없다.
3. 레나타 테발디(1922∼)
테발디가 과연 칼라스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꼈을까? 흔히 ‘그렇다’고들 한다. 스칼라에서 칼라스와 정면충돌했을 당시 그의 행적을 보면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 당시에는 ‘악마적 카리스마’를 지닌 칼라스에 대해 예쁘장한 ‘천사’의 이미지로 부각되고 있었으나 테발디가 가졌던 위기의식은 평범한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고 전한다. 그에 따라 한 영화의 대사처럼 ‘보이지 않는 물 밑에서 바쁘게 발을 움직여대는 백조’에 비할 만큼 의심이 가는 행적도 있다.
1950년 칼라스가 처음 스칼라 무대에 서게 된 것은 테발디의 대역으로서였다. 이때 칼라스는 훌륭한 공연에도 불구하고 청중석과 주최측으로부터 고의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 당시 사건에 대해 무섭게 커가고 있던 칼라스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테발디가 사전에 준비해 놓고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것이라는 설이 떠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듬해 스칼라의 브라질 공연 당시에는 좀 더 노골적인 면을 선보였다. 딱 한 곡만 부르고 앙코르를 절대로 하지 말자고 자기 입으로 제안해놓고는 다른 가수들(물론 칼라스도 포함된다)은 이를 따랐는데, 혼자만 두 곡의 앙코르를 더 부른 것이다.
하지만 테발디와 칼라스의 불화는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꼴을 못보는’ 조잡한 군중 심리에 의해 조장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견해다. 테발디 자신은 지난해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칼라스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얘기하고 싶다. 그동안 ‘지나치게 많이’ 얘기되었다”고 소견을 밝혔다.
누가 뭐라 해도 테발디는 20세기가 낳은 이탈리아 태생의 여성 가수 중에 최고의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카르멘 멜리스를 사사하고 1944년 데뷔 무대를 가졌다. 1946년 토스카니니의 스칼라 연주회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세계적인 가수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20년 동안 리리코 스핀토와 드라마티코의 배역에서 칼라스의 강렬한 음성과 비교되는 맑고 아름다운 음성의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초기 테발디의 음성은 ‘신이 내린 소리’라 할 만큼 청순함과 청량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30대가 넘어서면서부터는 조금씩 중심이 아래로 이동해 균형이 잡혔고 가창의 표현도 차츰 성숙해갔다. 따라서 아이다와 데스데모나 역으로도 훌륭한 음반(데카)을 남기고 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테발디는 푸치니에서 빛을 발한다. ‘라 보엠’ ‘나비부인’ ‘토스카’(모두 데카) 등은 한 세대 후의 프레니 외에는 비견할 만한 자를 찾기 쉽지 않다.
4. 조안 서덜랜드(1926∼)
서덜랜드는 호주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반적인 아마추어를 넘는 수준을 지녔던 어머니에게서 피아노와 노래를 배웠다. 시드니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중 1949년 시드니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곧바로 런던 유학길에 올랐다.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공부하던 20대의 서덜랜드에게는 주로 조역이 주어졌다. 52년 칼라스의 코벤트 가든 데뷔 공연인 ‘노르마’에 클로틸데로 출연했던 그는 칼라스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자신이 칼라스의 대를 잇는 벨 칸토의 여왕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지금은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인 리처드 보닝이 서덜랜드의 인생에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시드니 음악원의 후배였던 보닝이 런던으로 유학을 왔고, 서덜랜드는 54년 네 살 어린 보닝과의 결혼을 택했다. 보닝은 훌륭한 성악 코치가 되어주는 한편, 서덜랜드가 드라마티코보다는 콜로라투라 쪽으로 더 큰 자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남편의 조언대로 방향을 선회한 서덜랜드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1959년 코벤트 가든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타이틀 롤로 대성공을 거두며 일약 ‘벨 칸토의 신데렐라’로 뛰어올랐다. 60년대 들어서자 음악계는 칼라스의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칼라스의 쇠퇴가 눈에 띄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61년 스칼라에서 ‘텐다의 베아트리체’, 메트로폴리탄에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로 데뷔하자
음악계는 더 이상 칼라스를 혹사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후 서덜랜드는 세계무대를 석권해 나갔다. 1979년 영국 왕실은 그녀에게 ‘데임’(Dame) 작위를 주었다.
전성기의 서덜랜드는 투명하고 가벼운 콜로라투라 가창을 놀랄 만한 정확도를 갖고 구현해 냈다. 고음에서 날카로워지지 않는 둥글고 아름다운 음색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리고 드라마티코로서 목소리를 혹사시키지 않았고, 훌륭한 외조자의 철저한 관리 덕택에 최근까지도 노래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남편 보닝과 콤비를 이루어 녹음한 벨리니와 도니제티는 이 분야의 최상급 음반들에 속한다.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마리아 스투아르다’ ‘연대의 아가씨’, 그리고 벨리니의 ‘청교도’ 등이 손꼽힌다.
5. 크리스타 루드비히(1928∼)
메조 소프라노로서 유일하게 ‘10인’ 안에 든 루드비히는 소중한 존재였다. 최근까지 그의 성역대에 맞는 다양한 역을 루드비히만큼 충실히 소화한 가수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런 역들을 거의 독점했다. 오늘날에 와서야 안네 소피 폰 오터가 그를 대체할 독일 메조 소프라노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베를린 태생인 그는 성악가였던 아버지 안톤 루드비히와 어머니 코제니 베살라 슬하에서 일찍부터 음악을 배우며 자라났다. 딸을 조금 멀리 보내 공부시킨다는 부모들의 뜻에 따라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으로 진학했다.
부모들의 생각은 적중해 루드비히는 1946년 혼자 힘으로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박쥐’의 오를로프스키 역으로 데뷔했다. 52년에 다름쉬타트 음악제, 54년에 하노버 오페라 극장 등의 무대에 오르다 칼 뵘의 눈에 들어 55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 역을 맡았고, 이후 전속 가수가 되었다. 이듬해 ‘장미의 기사’의 옥타비안 역으로 대성공을 거둔 그는 이후 카라얀의 전폭적인 후원을 안고 잘츠부르크 무대와 레코딩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카라얀이 요구하는 역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거부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오페라에서 거의 손을 떼고 가곡과 종교음악, 그리고 교향적 작품들의 녹음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올해로 탄생 70주년을 맞이한 그는 최근까지도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에는 슈베르트 탄생 200주년 기념 음악회로 ‘겨울 나그네’를 부르기도 했다.
루드비히의 특징은 뛰어난 기교와 지극히 넓은 성역에 있다. 목소리의 안정감도 높아 리릭에서 드라마틱, 알토에서 웬만한 소프라노까지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소화할 수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의 경우 카라얀 지휘의 음반(DG)에서는 옥타비안을, 번스타인 지휘의 음반(CBS)에서는 마샬린을 노래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다.
바그너 또한 그의 중요한 레퍼토리였다. ‘탄호이저’의 비너스 역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브랑게네 역 등이 그것이다. 그는 솔티의 유명한 링 녹음에도 참여했다. 가곡 음반으로는 ‘베젠동크 시에 의한 다섯 개의 노래’(EMI),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와 ‘뤼케르트 시에 의한 다섯 개의 노래’(DG, 카라얀 지휘)가 유명하다. ‘대지의 노래’는 번스타인(소니)과 클렘페러(EMI) 음반이 있다. 이밖에도 슈만과 브람스 가곡집, 슈베르트 가곡집 등도 있다.
6. 미렐라 프레니(1935∼)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태어난 그가 파바로티와 같은 유모 밑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호에 소개한 바 있다. 1956년 고향에서 ‘카르멘’의 미카엘라 역으로 데뷔했는데, 이 역은 이후 프레니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자리를 굳혔다. 58년 비오티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세계무대를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1960년 글라인드본 음악제에서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를 불러 모차르트에서도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1963년 스칼라의 ‘라 보엠’의 미미로 출연하며 테발디 다음 세대의 미미로서 확고히 자리를 굳혔다. 당시 지휘는 카라얀, 연출은 제피렐리였다.
1960년대 전반까지는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 ‘연대의 아가씨’의 마리아, ‘팔스타프’의 난데타 등 가벼운 역을 불렀으나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외부에서의 압력으로 여러 가지 역들을 불렀다. 이는 오히려 좋은 결과로 나타나 ‘투란도트’,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 프랑스 레퍼토리인 ‘진주 조개잡이’ ‘마농’, ‘로미오와 줄리엣’ ‘파우스트’ 등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70년대 들어서는 벨 칸토 레퍼토리로까지 손을 뻗었으나 이는 실패한 경우라 보는 평가가 많다. 반면에 리리코 스핀토로 뻗어나간 방향은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텔로’ ‘시몬 보카네그라’ ‘돈 카를로스’ 등이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다. 목소리의 질은 전형적인 소프라노 리리코지만 차가운 인상이 전혀 없는 따뜻한 것이다. 가창에 있어서 너무나 균질한 안정감 때문에 ‘개성이 없다’ 또는 ‘무엇을 불러도 비슷하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프레니의 가창은 성악적으로 완벽해 성악가들이 가장 공감을 가진다고 한다.
카라얀 지휘의 ‘오텔로’(EMI), ‘라 보엠’(데카), ‘나비부인’(데카), 아바도 지휘의 ‘시몬 보카네그라’(데카), ‘카르멘’(RCA) 등이 프레니가 출연한 오페라 전곡음반으로는 대표적이다. 종교곡으로는 베르디의 ‘레퀴엠’(DG), 그리고 조금 이례적이지만 고음악 연주에도 참가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아르히브 레이블의 스카를라티와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테르’ 등이 좋다.
7. 비르기트 닐슨(1918∼)
1895년에 태어난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의 대를 이은 바그너 전문 소프라노가 바로 비르기트 닐슨이다. 플라그슈타트는 노르웨이 태생이다. 닐슨은 스웨덴 태생이다. 금세기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 둘이 모두 북유럽에서 탄생했다는 것 또한 얘깃거리를 만들었다. 북유럽의 여인들만이 그 ‘커다란 몸통에서 뿜어내는 통소리’로 바그너를 완벽히 구현할 수 있다느니, 바그너가 인용한 북구의 전설이 20세기 들어 가수들을 통해 실현됐다느니 하는 얘기가 그것이다.
닐슨의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무섭게 뻗어나가는 엄청난 음량이다. 남성들에게만 붙는 수식어라 할 수 있는 ‘인간 트럼펫’ ‘황금의 나팔’ 등이 그에게 붙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따라서 빽빽히 들어찬 오케스트라의 음향의 숲을 뚫고 나가야 하는 바그너에서 빛을 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또 다른 분신이라고 공인된 역이 푸치니가 창조해낸 히로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캐릭터인 ‘투란도트’다.
그는 역사적인 솔티의 ‘링 사이클’(데카)과 뵘의 ‘링 사이클’ 전곡음반(필립스, 바이로이트 실황)에서 브륀힐데를 노래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역시 뵘 지휘의 1966년 바이로이트 실황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명반으로 남는 데 일조했다. 1954년 플라그슈타트가 은퇴하자 곧바로 그 뒤를 이어 바이로이트에서 활약했던 모습들도 음반으로 남아 있다.
1941년부터 스톡홀름 왕립 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한 닐슨은 1944년부터 스톡홀름 오페라 극장 무대에 섰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느린 발걸음이었다. 30의 나이를 훨씬 넘기고까지 차분하게 스톡홀름에서 노래하던 그는 위에서 소개된 대로 5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엘자 역을 선보였다. 이는 같은 해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출연과 함께 그녀의 명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58년 스칼라, 59년 메트로폴리탄 무대를 밟았고 60년대 들어서는 최고의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군림했다.
바그너 외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도 자주 등장했으나 바그너보다는 좀 떨어진다는 것이 중평이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DG, 칼 뵘 지휘) 중 돈나 안나, 베토벤의 ‘피델리오’(데카, 마젤 지휘) 가운데 레오노레, 푸치니의 ‘토스카’(데카, 마젤 지휘) 등도 장기로 하던 역들이다.
8. 몽세라 카바예(1933∼)
카바예가 20대 초반일 때, 한 매니저에게 오디션을 받은 일이 있다. 그는 카바예의 노래를 듣고 “목소리도 재능도 없다.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 일이나 돌보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당시 그 매니저가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든, 아니면 전혀 안목이 없는 무지한이었든, 카바예가 그의 얘기를 듣고 상심해 포기했다면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하나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카바예가 30대에 이를 때까지 무명의 가수였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목소리가 섬세하고 투명한 것에 비례해 음량이 작다는 카바예의 단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단점은 훗날에는 카바예의 특기로 자리잡았다. 특유의 ‘메차 보체’(mezza voce; 반으로 줄인 음. 고음에서 음량을 줄여 여리고 부드러운 음으로 노래하는 것)가 그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21세 때 고향의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56년에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갔지만 그곳에는 유난히 ‘목소리 큰’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에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카바예는 바로 스위스 바젤 오페라 극장으로 옮겼다. 전속되어 여러 단역과 조역을 맡던 그는 60년에 스칼라에 데뷔했다. 하지만 여전히 단역이었다.
65년은 32세가 되던 카바예에게 의미 깊은 해였다. 글라인드본 음악제에서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 부인과 ‘장미의 기사’의 마샬린을 노래했고, 카네기 홀에서 열린 갈라 형식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로 뉴욕에 데뷔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목소리의 특성상 경쾌하고 가벼운 드라마티코 다질리타(dramatico d’agilita)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70년에 이르러 스칼라에 주역으로서 입성했다. 역시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였다. 이후 그녀의 음성은 급격히 무르익었다. 성량도 풍부해져 드라마티코나 리리코 스핀토로 성장했다. 오늘날에도 카바예가 대기만성형의 성악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벨리니의 ‘해적’(EMI), ‘노르마’(RCA),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필립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RCA), 베르디의 ‘군도’(필립스), ‘해적’(필립스), ‘루이자 밀러’(데카) 등의 우수한 음반을 남긴 카바예는 칼라스, 서덜랜드를 잇는 19세기초 벨 칸토 레퍼토리의 최고의 가수로 70년대, 그리고 80년대까지 군림했다. 물론 이런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카바예 이후 이 분야에서 아직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만만찮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9. 군둘라 야노비츠(1937∼)
영화 ‘쇼생크 탈출’ 중에는 ‘피가로의 결혼’ 중 이중창 ‘산들바람이 부드럽게…’가 등장하는 명장면이 있다. 당시 독백으로 주어진 대사는 ‘노래부르는 이탈리아 여인네들이 누군지는 알 바 아니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그 노래에 실려 쇼생크 밖으로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영화에 삽입된 노래의 주인공들은 ‘이탈리아 여인네들’이 아닌 베를린 태생의 군둘라 야노비츠와 루체른 태생의 에디트 마티스였다.
감독도 분명히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지만 대사는 일부러 그렇게 처리한 것이다. ‘아는 사람만 알고 미소 한번 지으라’는 감독의 위트였던 것이다. 위의 곡이 원래 담긴 녹음은 칼 뵘이 지휘하고 백작부인에 야노비츠, 수잔나에 마티스, 피가로에 프라이, 백작에 디스카우가 출연한 최고의 명반(DG)이다.
독일-오스트리아계 리릭 소프라노 분야에서 슈바르츠코프에게 왕관을 물려받은 사람이 야노비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인연이 있다. 슈바르츠코프는 23세 때 ‘파르지팔’의 꽃의 소녀를 불렀다. 그런데 야노비츠도 23세되던 1960년에 바이로이트에서 꽃의 소녀를 불렀다. 키리 테 카나와는 이보다 조금 늦은 27세 때 꽃의 소녀를 불렀다. 가장 뛰어난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과 ‘장미의 기사’의 마샬린으로 가는 첫 단계가 꽃의 소녀라고 주장하는 듯한 기묘한 예다.
위에서 소개했듯 베를린에서 태어난 야노비츠는 어릴 때 오스트리아의 그라츠로 이주해 그곳에서 음악원을 나왔다. 이후 바그너 협회 장학금을 받으며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연구생이 되었다. 이는 59년의 일로 모두 보석을 발견했다고 믿은 카라얀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다음해 ‘피가로의 결혼’의 바르바리나로 데뷔한 그는 앞서 말한 대로 1960∼62년까지 바이로이트에서 꽃의 소녀를 불렀다.
이후 카라얀의 막강한 후원으로 승승장구한다. 62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정식단원이 되었고, 63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의 단원을 겸임했으며, 66년에는 베를린 도이치 오퍼로 옮겼다. 67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도 선을 보였다.
레코딩에서도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된 카라얀 지휘의 성악곡에 거의 모두 등장했다. 바흐 ‘마태 수난곡’, B단조 미사, 브람스 ‘레퀴엠’, 베토벤 ‘장엄 미사’, 하이든의 ‘천지창조’와 ‘사계’ 등이 그들이다. 한편 칼 리히터의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와 헨델 ‘메시아’를 명반의 대열에 오르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10.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1923∼)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 음악원에서 공부한 데 로스 앙헬레스는 카바예의 10년차 선배다. 카바예와의 공통점은 성량이 적은 만큼 노래가 섬세하고 여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바예는 목소리가 중후하게 익어간 반면, 로스 앙헬레스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개성이 넘치는 리릭하고 맑은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청량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 목소리에 걸맞는 개성적인 표현, 그리고 폭넓은 음역과 완성도 높은 테크닉이 잘 조화를 이룬 가창을 선보였던 그다. 따라서 그는 가곡 분야에서 뛰어났다. 독일 가곡 분야에서 슈바르츠코프에 버금가는 해석을 선보였다는 평은 너무 높은 평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가곡에서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EMI에서 선보였던 캉틀루브의 ‘오베르뉴의 노래’는 유명한 음반이다. 한때 그는 리사이틀의 앙코르로 직접 기타를 치면서 스페인의 민요를 부르는 것을 상례화하기도 했다.
22세 때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으로 데뷔했으나 국제적인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24세 때인 1947년 제노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부터였다. 1950년 파리 뮌헨 등지에 데뷔했고, 역시 같은 해 카네기 홀에서 리사이틀을 가지며 뉴욕 데뷔를 기록했다. 이듬해 메트로폴리탄의 ‘파우스트’에서 마르가리테를 불렀다. 콩쿠르를 거치면서 비교적 빨리 출세한 성악가였던 것이다. 61년에 이르러 바이로이트에까지 입성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만, 당시 불렀던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 그리고 메트로폴리탄에서의 ‘오텔로’의 데스데모나 등은 호평을 받았었다.
오페라 레퍼토리도 이미 암시된 대로 상당히 넓다. ‘라 트라비아타’ ‘라 보엠’ 등의 이탈리아 레퍼토리, ‘마탄의 사수’나 ‘탄호이저’ 같은 독일 가극, 그리고 ‘파우스트’ ‘카르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 이르는 프랑스 오페라에까지 특기를 갖고 있다. 음반으로 가장 평판이 높은 것은 그를 역대 최고의 마르가리테로 꼽히게 한 클뤼탕스 지휘의 ‘파우스트’(EMI)다. 역시 클뤼탕스 지휘의 포레 ‘레퀴엠’(EMI)도 로스 앙헬레스의 참여로 완성도가
높아진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글/박정준.
세기를 열광시킨 '디바들의 전쟁’
여러 가지 시각에 따라 19세기와 20세기의 성악가를 가를 수 있지만, 역시 금세기의 산물인 그라모폰 녹음의 유무에 따라 나누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렇게 볼 때 소프라노를 먼저 얘기하자면 20세기 최초의 여성 성악가로는 독일의 릴리 레만(1848∼1929)과 프랑스의 엠마 칼베(1858∼1942), 동갑내기인 폴란드의 마르셀라 셈브리치(1858∼1935)를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대작곡가들과 교류하면서 낭만주의 오페라를 직접 초연한 경험이 있다. 레만은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바이로이트 무대의 1876년 개막 공연에서 동생 마리 레만(1851∼1931)과 함께 라인의 처녀 중 한 명으로 출연했으며, 영국에서 이졸데 역을 처음 불렀다.
칼베는 전형적인 프랑스 스타일의 리릭 소프라노였다. 마스네는 오페라 ‘사포’의 주인공을, 마스카니는 ‘친구 프리츠’의 수젤을 각각 그에게 헌정했다. 이탈리아 레퍼토리에 정통했던셈브리치는 베르디가 존경했으며, 푸치니가 ‘완벽한 미미’로 부를 정도였다. 또 콜로라투라에도 자신이 있었고 동시에 바이올린과 피아노에서도 수준급 기량을 보였던 만능 재주꾼이기도 했다.
신세기의 소프라노
이처럼 19세기에 태어난 20세기의 여성 가수 1세대는 낭만주의 끝자락에 와 있던 오페라의 황금기를 이끌면서 당시는 번거롭고 생소하기까지 하던 녹음활동을 병행했다. 이들은 여러 계보를 형성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은 확고히 굳혔는데, 그 영역은 독일과 이탈리아-프랑스 레퍼토리라는 두 갈래 흐름을 만들었다.
음역이 넓어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에 능했던 프리다 헴펠(1885∼1955)과 로테 레만(1888∼1976), 오페라와 함께 리트에 뛰어난 해석을 보여주었던 엘리자베트 슈만(1888∼1952), 독일계 콜로라투라의 정형으로 R. 슈트라우스로부터 ‘체르비네타는 따를 자가 없다’란 평을 들었던 마리아 이보귄(1891∼1987) 등을 전자의 대표적인 가수로 꼽을 수 있다. 앞의 세 사람은 독일 태생으로 나중에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밖에 바이킹의 후예로서 가공할 음량의 바그네리안이었던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1895∼1962), 모차르트부터 R. 슈트라우스에 이르는 모든 독일 오페라에 정통했던 티아나 렘니츠(1897∼1994)와 에르나 베르거(1900∼1990)를 빼놓을 수 없다. 제2의 그리지와 파티를 꿈꾸며 20세기 초반부를 이끈 이탈리아의 신인 그룹은 클라우디아 무치오(1889∼1936)와 로자 폰셀(1897∼1981), 스페인의 루크레시아 보리(1887∼1960)로 구성되었다.
이탈리아 콜로라투라의 양대 산맥을 이룬 테트라치니(1871∼1940)와 갈리 쿠르치(1882∼1963)가 정통 드라마틱 소프라노인 이들과 함께 활동했다. 한편 칼베를 잇는 프랑스 그룹에는 ‘피치 멜바’라는 디저트를 유행시킨 것으로 유명한 넬리 멜바(1861∼1931)와 프랑스 멜로디의 일인자로 꼽히는 니농 발랭(1886∼1961)이 있다.
음악 분야에서 다소 소외된 듯했던 영어권과 동구권 국가에서도 좋은 가수들이 나왔다. 전자에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초연했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가든(1874∼1967)과 ‘수녀 안젤리카’를 초연한 미국의 제랄딘 파라(1882∼1967)가 대표적이다. 이들과 같은 시기에 활약한 두 명의 체코 가수, 에미 데스틴(1878∼1930)과 마리아 예리차(1887∼1982)는 독일과 이탈리아 레퍼토리에 모두 일가견이 있었다는 사실로 잊을 수 없다.
데스틴은 미국에서 파라와 라이벌을 이루며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를 초연했고, 1901년 바이로이트에서 최초 공연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젠타를 불렀다. 예리차 역시 R. 슈트라우스의 ‘아리아드네’를 처음 불렀고 푸치니의 후기작들을 장기로 삼았다. 19세기의 성악 전통을 20세기에 전해주었던 1세대들의 녹음은 대부분 편집 앨범 형식으로 남아있다. SP를 복각한 열악한 음질 때문에 목소리의 진수를 느끼기 위해서는 다양한 비교 감상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맛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2세대 소프라노들
녹음 기술이 더욱 발달한 1930년대 후반이 되면 드디어 신세기에 태어난 가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대부분 앞서 말했던 1세대에게 성악을 배웠던 제자들이었다. 독일에서 가장 돋보인 가수는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1915∼ )였다. 이보귄에게 성악을 배운 그는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게와 결혼하면서 EMI에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카라얀이 지휘를 맡은 일련의 오페라 녹음은 지금까지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귀족적인 풍모가 느껴지는 음색에 고음역과 저음역에서 모두 따뜻한 톤을 지녀서 모차르트와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뿐만 아니라 볼프 등의 리트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슈바르츠코프보다 음량이 크고 음색이 날카로운 잉게 보르크(1917∼ )와 비르기트 닐슨(1918∼ ), 아스트리드 바르나이(1918∼ )는 주로 바그너의 악극과 R. 슈트라우스의 ‘악녀’ 역을 주특기로 삼았다. 특히 닐손과 바르나이는 둘 다 스웨덴 출신인 데다가 같은 나이였고 50년대와 60년대 바이로이트에서 브륀힐데를 두고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들보다 음색이 부드러웠던 수잔느 당코(1911∼ )와 이름가르트 제프리트(1919∼1988), 리자 델라 카사(1919∼ )는 모차르트 오페라에서 독보적이었다. 전자의 전통은 지휘자 도흐나니의 부인인 안냐 실리야(1935∼ )와 80년대 바그너 오페라를 주름잡았던 힐데가르트 베렌스(1937∼ )에게, 후자는 카라얀의 총애를 받으면서 성장한 군둘라 야노비츠(1937∼ )와 에디트 마티스(1938∼ )에게로 이어졌다.
한편 20세기 프랑스가 낳은 거의 유일한 스타급 소프라노인
레진느 크래스팽(1927∼ )은 양쪽을 모두 소화하면서 프랑스 레퍼토리를 섭렵했고, 스페인의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1923∼ )도 프랑스와 이탈리아 역을 충실히 노래하여 많은 팬을 확보했으나 이후로 이들같이 메트로폴리탄적인 가수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칼라스와 테발디
독일에 슈바르츠코프가 있었다면 이탈리아에는 마리아 칼라스(1923∼1977)가 있었다. 그리스 혈통으로 미국에서 태어나 다시 그리스에서 교육받고 그곳에서 데뷔한 칼라스는 47년 베로나를 시작으로 50년대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를 석권했다. 칼라스는 강인한 고음, 유연한 음이동, 탁월한 연기력을 갖추고 라 스칼라 극장에서 베르디와 푸치니의 제1의 프리마 돈나 자리를 굳혔다.
아직까지 스칼라의 관객들은 그가 남긴 공연을 기억하면서 새로 등장하는 신인들을 괴롭힌다. 또 잊혀진 벨 칸토 오페라를 부활시킨 공로도 크다. 사람들은 그가 아니었더라면 로시니와 도니제티, 벨리니의 많은 오페라가 악보로만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칼라스의 음악은 오나시스와의 결혼 등 파란만장했던 가수의 사생활과 뒤섞여 하나의 신화가 된 상태다.
그 신화 한 구석에는 ‘적수’ 관계를 이뤘던 레나타 테발디(1922∼ )가 있다. 그는 다방면에 재주를 부렸던 칼라스와는 달리 특기가 한정적이었다. 테발디는 스칼라 극장을 자신이 터줏대감이 된 지 5년 만에 칼라스에게 내어주고 50년대에 뉴욕과 로마에 새 둥지를 틀었다. 콜로라투라와 드라마틱한 발성에서는 칼라스에게 ‘비교당했지만’, 리리코-스핀토로서 테발디는 칼라스에게 없던 따뜻한 음색이 있었다. 그 장점을 살려 그는 아이다와 데스데모나, 나비부인 역에서 50년대 최고의 가수였다.
칼라스가 독점했던 이탈리아 오페라는 후배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돌아갔다. 우선 19세기초의 벨 칸토 오페라에서는 호주 태생의 조안 서덜랜드(1926∼ )와 스페인의 몽세라 카바예(1933∼ )라는 우수한 재원이 나왔다. 서덜랜드 역시 칼라스와 마찬가지로 드라마틱 창법에 콜로라투라 기교를 겸비했고, 한층 윤기가 흐르는 음색을 가진 가수였다. 다만 연기력과 결부된 해석의 묘미에서 칼라스와 대비되었다. 부군인 지휘자 보닝, 파바로티와 팀을 이뤄 녹음한 벨리니와 도니제티의 오페라는 칼라스의 음반과 함께 요지부동의 명연으로 남아 있다.
카바예도 벨 칸토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리 테너들과 돌아가면서 만든 베르디와 푸치니 역시 잊지 못할 수작이다. 베르디와 푸치니 레퍼토리는 레나타 스코토(1934∼ )와 미렐라 프레니(1935∼ )로 전승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계열에 있으면서도 목소리는 확연한 개성 차를 보였다. 스코토가 찌를 듯한 고음으로 칼라스와 비슷한 이미지를 전달한 반면, 프레니는 테발디 풍의 감미로운 미성을 가졌다.
신대륙을 무대로 삼은 소프라노들
유럽에서 데카와 EMI를 중심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가수들이 왕성한 녹음 활동을 펼치는 동안, 미국에서도 RCA와 콜럼비아를 통해 그에 못지않은 특출한 기량의 가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선발 주자는 브라질 태생의 비두 사야오(1902∼ )와 유고 출신의 징카 밀라노프(1906∼1989). 화려한 색채, 수정같이 맑은 음성에 다양한 기교가 더해진 사야오의 노래는 40년대 뉴욕 메트를 주름잡았다. 미미와 비올레타가 장기였다. 밀라노프는 같은 미성질띤 목소리였으나, 힘과 박력이 넘쳐 그보다 무거운 배역에 어울렸다. 비욜링과 호흡을 맞추어 베르디와 푸치니, 베리스모 오페라에서 발군의 실력을 과시했다.
그 뒤로, 칼라스가 거부한 바버의 ‘바네사’ 역을 초연한 것으로 유명한 일리노 스테버(1916∼1990)와 이탈리아와 독일 레퍼토리를 동등하게 소화했던 에일린 파렐(1920∼ )이 등장해 칼라스와 테발디에 맞섰는데, 진정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이는 그보다 좀 늦게 데뷔한 레온타인 프라이스(1927∼ )다. 원래는 브로드웨이에서 데뷔했고, 거슈인의 블루스를 주로 불렀던 이 가수는 풍성한 음량과 광채나는 고음으로 나중에는 스칼라와 메트에서 오랜 기간 프리마 돈나의 위치를 유지했다.
마리안 앤더슨(1897∼1993)이 세운 흑인 가수의 위상을 확립하면서 제시 노먼(1945∼ )과 바바라 헨드릭스(1948∼ ), 캐슬린 배틀(1948∼ )과 같은 훌륭한 후배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 것도 프라이스의 공이다.
저역 가수의 전성시대
응당 소프라노에게 돌아갔던 프리마 돈나의 몫을 저역 가수가 조금씩 공유하기 시작한 것도 20세기의 일이다. ‘아주체나’로 이름을 날린 에르네스틴 슈만 하인크(1861∼1936)는 이탈리아와 독일 오페라에, 스페인의 콘치타 수페르비아(1895∼1936)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에 자주 등장했던 1세대 메조 소프라노였다.
이후 소프라노와 마찬가지로 저역 가수 역시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양분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에서 여주인공의 라이벌이 되는 비중있는 메조 소프라노 역은 에베 스티냐니(1903∼1974)와 페도라 바르비에리(1920∼ ), 피오렌차 코소토(1935∼ )가 삼대를 이뤘다.
이들은 모두 칼라스의 상대역을 맡으며 명성을 구축했다. 주인공으로서 고난도의 기교를 요하는 ‘로시니 히로인’은 줄리에타 시묘나토(1910∼ )를 시작으로 마릴린 혼(1929∼ )과 테레사 베르간사(1934∼ )를 거쳐 얼마 전 타계한 발렌티니 테라니(1946∼1998)에게로 그 중심점이 이동했다.
양분된 계열을 통합한 메조 소프라노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그리스의 아그네스 발차(1944∼ )이다. 그는 드라마틱과 콜로라투라에 뛰어난 기량이 있어 ‘메조의 칼라스’라고 불렸으며, 메조 소프라노가 부를 수 있는 거의 모든 역을 노래한 가수로 특별히 기억할 만하다.
독일계 레퍼토리에서 메조 소프라노는 오페라의 조역보다는 리트의 해석가로 더욱 비중있게 생각되었다. 영국의 알토, 캐슬린 페리어(1912∼1953)가 저역 가수가 부르는 리트의 개념을 확립했고 그 뒤를 크리스타 루트비히(1928∼ )와 브리기테 파스벤더(1939∼ )가 이어갔다. 최근에는 안네 소피 폰 오터(1955∼ )와, 페리어 이후 진정한 알토라고 말할 수 있는 나탈리 스튀츠망(1965∼ )이 가곡계를 주도하고 있다.
밀레니엄을 위한 여성가수
최근 여성가수들은 미디어 시대를 실감할 정도로 오페라 무대보다는 음반사의 선택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는 경향이 짙다. 또 언어간 레퍼토리의 장벽이 낮아진 특징도 있다. 80년대와 90년대 음반 상에서 최고의 소프라노는 세릴 스튜더(1955∼ )였다. 그에게 바그너나 베르디는 똑같이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그를 잇는 신성으로 시원한 발성의 제인 이글린(1960∼ )이 단연 돋보인다.
이밖에 21세기초에는 르네 플레밍(1959∼ )이 독일계 레퍼토리를, 레온티나 바두바(1964∼ )와 안젤라 게오르규(1965∼ )가 이탈리아-프랑스계 레퍼토리를 주도할 인물들로 보인다. 한편 콜로라투라 계열은 그루베로바(1946∼ ) 이후 현재 조수미(1962∼ )와 나탈리 드세이(1967∼ )가 평정한 상태로 21세기에도 이들의 활약은 더욱 기대된다. 작고 아담한 목소리로 가곡을 주무기 삼고 있는 소프라노로는 두 미국인 바바라 보니(1956∼ )와 돈 업쇼(1960∼ )가 있으며, 앞으로는 독일의 야심, 크리스틴 쉐퍼와 줄리안느 반제가 이들의 자리를 대신할 듯하다.
소프라노 못지 않게 각 음반사들이 경쟁적으로 저역 가수들을 확보하면서 ‘스타 메조’가 탄생한 것도 최근의 동향이다. 데카의 체칠리아 바르톨리(1966∼ )와 텔덱의 제니퍼 라모레(1958∼ )가 유럽과 미국 양 대륙간의 자존심 싸움을 일으키는 가운데, RCA의 베셀리나 카사로바와 필립스의 올가 보로디나(1960∼ ), 소니의 수전 그레이엄(1960∼ )이 새로 가세했다. 여기에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소련 붕괴 이후 알려진 갈리나 고르차코바(1962∼ )와 같은 러시아
가수까지 합하면 예비 스타의 수는 더욱 늘어나, 금세기 초와 마찬가지로 풍부한 음악성의 축적 속에서 21세기의 여성 가수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