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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을 교수님 역시 고령이라 컴푸터에 입력하는 수고를 며칠 계속했습니다.
혹 제본 전에 고칠 부분 있으면 연락 부탁합니다.)
상주 백화산 권역 한문학 (尙州 白華山 圈域 漢文學)
권태을 (경북대학교. 문학박사)
이 원고는 옛 부터 백화산 권역에서 우리 선조들이 느꼈던 지(知), 정(情), 의(意)를 살피는 데는 문학 작품만한 것도 없다고 본다. 그래서 2001년에 발간한 “백화산(白華山)” 중에서 백화산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번역은 金子相선생 원고)와 산문(필자)을 간추려 발표용으로 만들었다.
1. 백화산 권역의 시(詩)
◦ 도량고첩(刀良古堞) 도량현의 성첩 경현재 강세진(1717-1786)
刀良縣名古 刀良縣은 이곳의 옛 이름인데
敗堞山之阿 무너진 성첩, 산의 언덕에 있다.
割裂懷羅麗 갈라지고 찢어져 新羅 高麗 감회 깊은데
年代度幾何 연대는 그 얼마나 지났던가?
漠漠愁雲集 멀리서 愁雲이 모여 들고
悠悠飛鳥過 천천히 나는 새 지나간다.
廢興千古事 흥하고 폐하는 것 千古의 例事이니
徛劒一悲歌 칼 잡고 크게 悲歌(義士의 노래) 부른다.
이 시는 바로 백화산의 금돌성을 소재로 한 한시라 하겠다.
◦ 八節鳴灘 여덟 구비의 여울 만성 김재륜(1776-1846)
非竹非絲折折鳴 퉁소도 거문고도 아닌데 굽이굽이 울리니
自然聲樂石間生 자연의 聲樂이 돌 사이에서 생겼다.
浮泡飛沫雖渠使 뜬 거품, 나는 물방울은 비록 네가 시킨 것이나
停則淵澄亦性情 멈추면 맑은 못 되는 게 또한 너의 性情이다.
이 시는 화재(華齋) 황익재(黃翼再)가 명명한 구수천(龜水川 : 중모천) 여덟 구비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묘미를 읊은 시다.
◦ 만경현폭(萬景懸瀑) 만경산 폭포 만성 김재륜(1776-1846)
快瀉崩濤一直懸 상쾌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一直으로 달렸으니
紛紛勢若落來天 어지러운 형세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다.
山靈欲供遊人興 山靈이 遊人에게 興을 주고자
不死銀龍借水仙 죽지 않는 銀河에 龍을 水仙에게 빌려 주었도다.
◦ 백화산 (白華山) 장원 황원선
無端拔地高 끝없이 땅에서 높이 빼내어
直上天半傑 바로 하늘 半空 위에 傑出하였다.
何事造化翁 무슨 일로 造化 할애비가
如許大瀜結 크게 엉키고 맺히도록 허가했는가?
裔壑同行療 큰 구렁은 길바닥 빗물과 같이 가고
枝峰等丘垤 가지 봉우리는 언덕과 비등하다.
羅王昔播遷 신라의 왕이 이곳에 옮겨 왔으니
遺堞雪中列 기친 城堞이 눈 속에 줄 지어섰다.
大唐蘇將軍 唐나라 蘇定方 將軍이
暫過仍成別 잠시 지나며 이별 이루었다.
篤生名世賢 篤實한 名賢이 세상에 나니
元氣頗漏泄 元氣가 자못 漏泄되었다.
名藍九十餘 유명한 伽藍(寺刹) 九十餘가
流傳曲曲設 流傳하여 구비마다 세워져있다.
靈湫出雲雨 신령한 용추에서 구름과 비가 나오니
牲弊以磬折 犧牲과 폐백으로 祈雨祭 올렸다.
急難有兄弟 急難에 형제 있으니(月澗蒼石故事 參照)
名高北斗巀 名聲이 北斗같이 높았도다.
黃仙無恙否 黃石公 신선은 탈이 없었으니
滄海凡幾閱 滄海 桑田 바뀌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으리.
이 시는 백화산의 역사 문화를 제재로 하여 그 역사성(무열왕의 행재소, 소정방은 차라 대임?)과 인물(명현 배출), 종교(절 90여 곳), 민속(용추 기우제), 인륜(형제 우애, 급란도) 등을 노래함.
◦ 옥봉왜송(玉峯矮松) 옥봉의 키 작은 소나무 우평 황인로(1785-1830)
獻壽峯尊壽獻君 헌수봉이 높이 임금에게 헌수하니
珊瑚一束結綸紛 산호 한 묶음으로 많은 푸른 실끈 맺었도다.
勁髥倒雲龍昻首 억센 수염 눈에 엎드리니 龍이 머리 들었고
皺甲封苔豹點文 쭈그러진 껍질, 이끼로 봉하니 표범의 무늬 박혔다.
健爲樑棟非渠願 굳센 棟樑이 되는 것이 너의 소원 아니던가.
飽死侏儒定爾群 배불러 죽은 侏儒(난쟁이)가 바로 너의 무리로다.
下有仙苓餌不老 아래에 신선의 伏苓 있어 버섯이 늙지 않으니
蓬壺春晝也難曛 蓬壺(三神山 中一 蓬萊)의 봄, 낮 어두워지기 어려우리라.
이 시를 보면 옥봉을 헌수봉으로 일컫고 있다.
◦ 옥봉(玉峯) 장원 황원선
江濆陡起玉尖峯 강가에 뾰족한 玉峯이 우뚝 일어났으니
流落崑岡灝氣中 崑岡이 먼 水氣 가운데 흘러 떨어졌네.
却恨似他奇絶態 문득 다른 기절한 모양과 같은 것을 한탄하여
聲名終不擅堯封 이름을 끝까지 태평 세상에 들내지 안했도다.
◦ 옥봉(玉峯) 시려 황란선(1825-1908)
削玉簪花臨水涯 옥 깎고 꽃 꽂아 물가에 임했으니
武夷二曲却生疑 武夷山에 二曲인가 의심되도다.
亨亨影人漣漪裡 높다란 그림자 고운 물결 속에 들어오니
最是朝暉夕照時 아침저녁 해 빛일 때가 가장 좋도다.
위의 시는, 옥봉을 서왕모(신선)가 살며 아름다운 옥이 난다는 곤강(곤륜산)에 비유하였 고, 아랫것은 송나라 주자가 읊은 무이9곡가 중의 제2곡 옥녀봉(玉女峰)에다 비유하였 다.
◦ 사담(沙潭) 사담 김홍민선생 유허지이기도 함. 장원 황원선
樵牧猶傳學士家 樵童 牧叟도 아직 學士의 집 전하는 터에
滿汀秋色荻飛花 물가에 가득한 가을 빛, 갈대꽃 날리네.
空壇霞鎖千尋檜 빈 壇에 노을 자욱하고 회나무만 천 길이니
文藻江山起遠嗟 文藻의 강산이 멀리 슬픔 일으키네.
이 시는, 문장에 뛰어났던 사담을 회억하여 쓴 시다.
◦ 세심석(洗心石)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돌 황인로
頎然一石石中君 품위 있는 한 돌, 돌 가운데 왕이니
雨洗苔心淨絶紛 비로 이끼 낀 중심 씻어 깨끗이 世紛 끊었다.
爲德眞堪隱士友 德을 위해 참된 숨은 士友 맡았고
其名盖取繫辭交 그 이름은 대개 주역의 繫辭에서 취했다.
中高拔地三三丈 가운데가 높아 땅에서 九丈을 빼어 냈고
上廣容人十十群 위가 넓어 二十群의 사람 용납한다.
千古江濆藏得密 千古의 강물 결에 精密을 얻어 갈무렸으니
不妨林翳晝還曛 숲에 숨는 것 방해 않아 낮에도 도리어 어둑하네.
이 시는 ‘주역(周易). 계사상(繫辭上) ‘의 “성인이 이로써 마음을 깨끗이 씻어 은밀함에 물 러가 감춘다.(以比洗心 退藏於密)” 는 뜻으로 세심석을 노래하였다. 명명은 밀암 이재다.
* 詠家近十景 집 부근의 열 곳 경치 황원선
이들 시는 백화산 일대의 유적지를 읊은 것이라 저자가 쓴 차례대로 소개한다.
◦ 용문사(龍門寺)
荒墟不見人 거친 옛터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烟霞藏滿谷 山水의 경치 골에 가득하다.
下有千丈潭 아래에 천 길 못이 있는데
龍亡水流獨 龍은 없고 물만 홀로 흐르네.
◦ 보문암(普門庵)
縹緲寄山顚 멀리 희미하게 산마루에 부쳐 있어
下壓千林翠 아래의 모든 푸른 숲을 압도하네.
邈哉羅王城 아득히 먼 신라왕의 城이
應傳不億麗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백성 전하리.
◦ 진불암(眞佛庵)
酹酒林千石 林千石臺에서 降神술 올리고
斜陽淨界尋 석양에 암자 찾았다.
人亡庵不見 사람 없고 암자 보이지 않으니
白日故陰陰 한 낮에도 아직껏 그늘음 하네.
◦ 환수암(喚睡庵)
香淸茶己熟 향기 맑아 차가 이미 익었으니
法界有餘閒 절간에 남은 한가로움 있었다.
華胥欲濃處 경치가 짙어가는 곳에
巖泉時拂顔 바위의 샘물 낯에 뿌려 오네.
◦ 청월루(淸越樓)
有峰名以玉 봉우리 있어 이름을 옥으로 하니
應見崑岡來 아마도 崑崙山에서 왔나 보다.
其下栗然立 그 아래 엄숙하게 서 있으니
上遊占得嵬 上遊가 높은 곳 얻어 자리 잡았나 보다.
◦ 반야사(般若寺)
上方水月淨 절간에 물과 달이 맑으니
遊客少閒愁 유람하는 길손 조금 한가한 것 시름하네.
惑恐鐘聲發 혹 종소리 울릴까 두려워서
驚飛鶴不留 놀래 나는 鶴이 머물지 않는다.
이상은 다 백화산에 있었던 사찰을 중심으로 읊고, 가운데 옥동서원의 청월루를 노래하였다.
◦ 만경대(萬景臺)
蓬萊亦有一 봉래산이 역시 하나뿐이어서
海國開之東 바다 나라 동쪽에만 펼쳐 놓았다.
萬樹荵籠地 많은 나무가 무성한 곳에
最奇十八公 十八公이 가장 기이하도다.
◦ 오도령(吾道嶺) 오도고개(오도치)
離岳撑天立 俗離山이 하늘을 떠받쳐 서서
抽來一枝橫 한 가지를 뽑아내어 가로 뻗었다.
主人粧點意 주인이 이곳을 점찍은 뜻은
志道老昇平 道에 뜻을 두고 태평하게 늙기 위함이다.
◦ 비덕촌(比德村)
德隣元不孤 덕은 이웃이 있어 원래 외롭지 않으니
三兩水之渚 두 셋 물가에 이 마을 있도다.
我欲觀其人 내가 그 사람을 보고자 하여
携笻鎭日去 막대 끌고 해를 진정하며 찾아 간다.
◦ 풍호정(風乎亭)
鼓瑟正聲希 북과 비파의 바른 소리 바래니
於焉興不淺 어느 새 흥이 얕지 않도다.
鳳凰千仞像 봉황의 천 길 날으는 기상을
千載孰親見 천 년에 누가 친히 볼 것인가?
2. 백화산 권역의 산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의 기문(記文) 짓는 법을
산문 소개에 앞서 살펴본다.
息山은 ‘충효당기(忠孝堂記)’ 서문에서, “옛 사람이 집(堂)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에는, 外的인 경우 두 가지가 있고 內的인 경우 두 가지가 있었다.
이들을 息山의 기문 창작관에 의거하여 도식화하면,
⌈ 地號文(지명을 게시하여 완미하게 하는 글) : ①②③
⌈ 外的 作法 -⎜
⎟ ⌊ 標物文(사물을 표시하여 완미하게 하는 글) :
記作法⎟ 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⑬⑭⑮⑯⑰⑱⑲⑳(21)
⎟ ⌈ 寓言文(말에 우의하여 작자의 뜻을 드러내는 글) :
⎟ 內的 作法-⎜ ①②③④⑤⑥
⌊ ⌊ 述訓文(성현의 교훈을 기술하여 힘쓰게 하는 글)
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
숫자는 백화산 권역에서 창작된 산문(기. 설. 서)의 숫자이다. 총41편을 소개한 바 있다.
◦ 백화재기사(白華齋記事) 화재 황익재
“亭子로부터 남으로 바지를 걷고 개울을 건너 수 백 발자국에 玉洞書院이 있으니 선조 翼成公을 봉향하여 독서 소리가 난다. 그 앞에 蘇堤 平郊가 있는데 늘 어스름 녘이면 사라지는 연기가 탁 트이듯 깔려 조망하는 경치가 있다. 옥동서원에서 조금 꺾여진 서쪽이 곧 玉峰이다. 玉峰은 十景 중에서도 으뜸인데 높고 험준하게 우뚝 서서 한 구역을 진압하는데 돌 색깔은 고색을 띠었다.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니 아침 햇살을 받으면 흡사 금색 뱀(金蛇) 같다가 석양을 받으면 찬란한 은(銀)이 되고, 바람이 지나면 시장의 떠들썩한 소리를 짓다가도 짙은 안개가 끼면 모습을 숨기고 삼라만상을 장식하여 사람의 눈을 어지럽혀 가히 가까이 할 수가 없다. 그 다리로 개울물이 들어 와 鼈巖을 지었는데 앉아 낚시를 할 만 하다. 물길을 따라 조금 밑으로 가면 萬景臺가 우러러 뵈는데 기이한 나무와 뭇 꽃으로 덮혀서 봄이 오면 천 가지의 꽃을 피워 이상한 새들이 어지러이 지저귀고, 가을 깊어도 푸른 솔빛은 바래지 않는데 단풍이 그것을 엮어서 눈 앞 가득 다듬은 그림을 펼친다. 그곳에 飛泉(폭포)이 진동하며 푸른 절벽에 부딪혀 기이한 울림을 내는데, 밑으로 떨어진즉 펀펀하게 퍼지며 탁 트이게 열어 가 백 발자국이나 꽉 채우며 흘러 간 중간에 洗心石이 있다. 돌은 모나게 놓였는데 높이는 한 발이 넘고 위에는 수 십 명이 앉을 만하다. 세 모서리는 깎아 세운 듯 한데 한 모서리는 자연스럽게 돌계단이 생겨 발로 딛고 오를 수 있으니, 가장 서성이기에 알맞으나 오직 하나뿐 짝이 없어 10경 중에는 들지 않는다. 또 그 밑으로 수 십 발자국에 沙潭이 있는데 개울을 건너면 산록이 끊어진 데가 곧 선배(역자 주: 金弘敏)가 살던 옛 터다. 그 앞에 蓴淵이 있는데 못 위에는 회나무가 우거져 어두침침하게 수구(水口)에 우뚝 서서 마치 문지기인 듯하다. 沙潭으로부터 물을 거슬러 곧바로 위로 가서 다시 여덟 번 꺾이며 밑으로 흐른다. 이 개울은 龍門에서 발원하여 玉峰 앞에서 합류한 물이다. 두 물길 좌우에 철쭉이 숲을 이루어 무성히 피면 불 구름이 땅을 덮어 마치 붉은 비단을 펼쳐 장막이 비스듬한데, 북쪽으로 여울을 따라 점점 깊이 드니 발걸음이 엇갈려 끝까지 다 볼 수는 없었다. 절이 앉은 자리로 여러 산의 중앙에 있는 것은 龍門寺요, 뭇 벼랑의 가장 높은데 있는 것은 普門庵이다. 亭子의 경치는 천만이나 그 중 가장 기이한 곳을 짚었으니 무릇 十景이다.
라고 하여 白華洞의 10경을 玉洞書院(황희선생 봉안), 玉峰, 鼈巖, 萬景臺, 飛泉, 沙潭, 蓴淵, 龍門寺, 普門庵 등이라 하였다.
이 기사 속에 8절명탄의 말이 나온다.
◦ 백화동대벽기(白華洞㙜壁記) 식산 이만부(1664-1732)
自沙潭西下。白華,萬景。勢益壯。聱岈崛岉。呈怪不相讓。石焉苔蘚蝕。土焉蘿蔦封。水劃中如絲貫。屈折交絡。齧其涯。潦澤加則尤怒號。劈破崩崖震谷焉。左峙壁削開一面。色紺黝。覆壽藤。窈窕而深。益下無幾。有巖架起二層。㸦鐫刻。其趾黛蓄噴薄。流沫塗瀯。其巓老松翠層。落陰釀凉。有補虧平治之迹。塊石剝落。俗傳新羅亡。樂師林千石隱居于此。每於巖上彈琴。故尙稱林千石㙜云。余欲破石根疏磴道。抱三尺琴。臨其壁上其㙜。俯其流。彈一闋二闋。吊古人宣堙鬱而未能焉。再叟所表揭勝。滿十夥矣。惟是二者遺焉。故於是名其壁曰欄柯。名其㙜曰峩洋。息山翁云。
“사담(沙潭)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리니, 白華山과 萬景山의 지세가 더욱 장하여 들쭉날쭉 우뚝 우뚝 솟아 기괴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서로 양보치 않는다. 돌은 이끼가 파랗게 덮었고 흙은 댕댕이넌출과 칡이 봉하여 잠겼다. 물이 그 가운데를 가르며 실같이 관류하며 꺾어졌다간 서로 잇고, 그 가장자리를 씹어 못을 이루어 깊이를 더하니 더욱 성난 듯 부르짖으며 벼락 치듯 깨뜨려 언덕을 무너뜨리고 계곡을 진동 시킨다. 왼쪽에 우뚝 솟은 언덕의 바위벽은 깎은 듯이 한 면(面)을 열었는데 빛깔은 검붉고 긴 등나무가 덮어 그윽하고도 깊숙하다. 더 밑으로 내려가 얼마 아니 되는 곳에 바위가 2층으로 시렁을 이루었는데 어긋난 어금니같이 조각되었고, 그 발치에는 거무스레한 물이 고여 세차게 솟구치며 물방울을 튕기며 흘러 가득히 퍼진다. 그 산꼭대기에는 해 묵은 소나무가 푸른 층계를 이루어 그늘을 지어 시원함을 빚어내는데, 이지러진 데를 보태어 평평하게 닦은 흔적이 있고 돌덩이가 벗겨졌다.
민간의 전설에, 신라가 망하자 樂師 林千石이 이곳에 은거하여 늘 바위에 올라 거문고를 탄 까닭에 아직도 林千石臺라 한다고 하였다. 내가 돌부리를 밟고 돌층계 길을 따라 삼척(三尺) 거문고를 안고 그 절벽에 다다라 그 臺에 올라 물을 굽어보며 한 두 곡을 켜서 옛 사람(임천석)을 조상(弔喪)하여 막히고 답답한 심회를 펴려 하였으나 할 수가 없었다. 再叟(黃翼再)가 표 나게 드러낸 경치가 열 곳이나 되었으나 오직 이 두 곳은 남겨 놓은 까닭에 이에, 그 벼랑(壁)의 이름을 ‘난가(欄柯)’라 하고 그 대(臺)의 이름을 ’아양(峨洋) ‘이라고 息山翁이 말한다. “
난가벽(欄柯壁) :임천석대 가기전의 벼랑
황익재 10경 : 벼랑(난가), 임천석대(아양) 명명
이는, 華齋 黃翼再(1682-1747)가 白華洞十景에 부여한 의미를 재해석하였는데, 그 가운데 들지 않은 二景인 欄柯壁과 峨洋臺를 명명한 기문이다. ‘난가(欄柯)’란 ‘지면에 설정한 구획’으로서의 난간인 절벽에 초목의 가지나 줄기(枝莖)가 덮인 형상을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으며, ’아양(峨洋) ‘이란 林千石臺에다 작자는,’峨‘(높고 험준함. 풍채가 단정하고 위엄이 있으며 아름다운 모습) 字와 ’洋‘(물결이 성대함. 도도함) 字를 붙여 林千石의 山高水長한 절의가 그대로 남은 臺라고 재삼 부각시키었다. 이는, 林千石의 인간적 본질에 접근하는 지름길을 제시한 기문이라 할 수 있겠다.
◦ 임천석대가(林千錫臺歌) 경현재 강세진(1717-1786)
由自玉洞 沿溪而下 行數里 有蒼巖 削立於溪上 高可數十丈上可坐十許人 故老謂之林天錫(一作石)臺 天錫 麗末伶官也 以善鼓琴名 見麗王無道 携家遠遁 隱迹於商之中牟縣 壽峯村 每日上此臺 鳴琴作兩三曲 其聲悽惋 及麗亡 太祖 聞其名 使人召之 天錫曰 我麗臣也 義不可屈 不赴召 上又使人迫之 天錫 抱琴自投於臺下而死 後人 遂名其臺曰 林天錫臺 嗚呼 當麗運之訖 能守義而不臣于聖朝者 惟吉注書 徐掌令數公而止耳 其名跡 光于簡冊如林君 以一伶官 節義之卓 亦何鈊少遜於二公 然 泯滅不章 只留於村翁野老之口 其可悲也己 余逐詩之曰
“백옥동(白玉洞)에서 개울을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푸른 바위가 개울 위에 깎아지른 듯 섰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그 위에는 여남은 명은 앉을 만하다. 그런 까닭에 늙은이들 들이 林千錫臺라 일러왔다. 天錫은 고려 말의 伶官(樂士)으로, 거문고를 잘 타기로 이름이 났다. 고려왕이 무도한 것을 보고는 가족을 이끌고 멀리 도망 쳐 商山(상주)의 中牟縣 壽峰村에다 자취를 감추고 매일 이 대에 올라 거문고를 타 두세 곡을 지었는데 그 소리가 悽捥하였다. 고려가 멸망하자 太祖가 그 이름을 듣고 사람을 시켜 소환하니 千錫이, ‘나는 고려의 신하라, 의리상 굽힐 수도 없다.’ 하고, 불러도 가지 않으니 임금이 또 사람을 시켜 구박하니 千錫은 거문고를 안고 臺 밑으로 투신하여 죽었다. 뒷사람이 드디어 그 대를 이름하여 임천석대라고 하였다. 오호라. 고려가 망하자 능히 의리를 지켜 聖祖에 신하 노릇 아니한 자는 오직 吉注書(吉再)와 徐掌令 등 몇 분에 그칠 뿐이니, 그 이름과 자취를 簡冊(史書)에 빛내었다. 林君은 伶官(樂士)으로서 節義가 卓異하니, 또한 어찌 二公보다 못하다 하랴. 그러나 민몰되어 드러나지 못하고 단지, 村翁 野老의 입에 남았으니 가히 슬플 뿐이다. 내가 드디어 이를 시로 쓴다.”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었다.
林千石을 林天錫이라 함. 거문고를 잘 탐.(善鼓琴). 중모 수봉에 은거함. 이 태조가 강압으로 소환-투신자살.
徐掌令은 서중보(徐仲輔) 야은 등은 역사에 남음. 임천석은 이름이 민몰됨.
水瀰瀰石崔崔 물은 넘실거리고 바위는 가파른데,
人說林君千錫之故臺 사람들은 林君 千錫의 옛 臺라네.
林君麗季時伶官 林君은 麗末의 樂師였더니,
桐絲一鷗能令鳳凰爲徘徊 거문고 한번 울려 능히 봉황으로 배회하게 하였다네.
麗王淫戱自勦絶 고려의 왕 게으름만 부리다 스스로 멸망하니,
鵠嶺伯氣寒於灰 鵠嶺의 뛰어난 기운 재로 되어 식었네.
掛我珠冠飄遠擧 珠冠을 걸어두고 표연히 멀리 달아나,
一溪禽鳥近無猜 한 계곡 짐승과 고기 가까이 해도 시기하지 않았네.
抱琴時上百尺臺 거문고 안고 때로 백척의 대에 올라,
蕭蕭黍離悲風來 쓸쓸히 망국의 한 타니 슬픈 바람 불어왔네.
一彈潛潛亡國淚 한 번 타고 끝없이 망국의 눈물 흘리고,
再彈咽咽孤臣哀 거듭 타며 나라 잃은 신하 서럽게 흐느꼈네.
我是麗朝之遺民 내 고려의 유민이거늘,
嗟爾使者胡爲乎來哉 아. 네 사자야 어찌해 왔단 말인가.
幽絲在彈絶命詞 조용히 현 눌러 절명사 다시 켜니,
頭上麗日看看頹 머리 위 밝은 해가 차츰 차츰 무너졌네.
曲終自投臺下水 곡 마치자 스스로 대 밑 물에 투신하니,
魂逐遊魚去不廻 혼은 고기 따라가 다시는 안 돌아왔네.
水不渴石不泐 물은 마르지 않고 돌은 갈라지지 않고,
林君義烈與之留藁萊 林君의 義烈이 초야에 남았네.
烈光暖暖山鳥悲 의열의 광채 어두컴컴하니 산새도 슬퍼하여,
我今發揮歌詩傳八垓 내가 이제 歌詩를 지어 팔방에 전하네. “
◦ 임천석대(林千石臺)
疊石枕碧泓。 첩첩이 쌓인 바위 푸른 못을 베었는데
云是林子㙜。 이곳을 일러 임천석대라네.
知是武陽倫。 내 아노니 그는 무양(武陽)의 무리여서
抱器避地來。 거문고 안고 세상을 피하여 여기로 왔음을,
人去雲埋壑。 사람은 갔는데 구름은 골짜기를 메우고
㙜存巖蝕苔。 대는 남았는데 바위엔 이끼가 끼었네.
松籟晩不齊。 솔바람 소리 해 질 녘에 고르지 않으니
擬聽律呂哀。 흡사 슬픈 가락을 듣는 듯 하네.
武陽은 전국시대 연나라 용사로 진시왕을 살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을 가리킴임. 위의 번역은 필자. 이하는 김자상선생 번역임.
◦ 林千石臺 立齊 鄭宗魯(1738-1816)
麗運無那聖運開。 고려의 운, 어찌 할 수 없어 朝鮮이 開國하니
忠臣來死此荒臺。 忠臣이 이 거친 臺에 와서 죽었도다.
英靈不與寒波逝。 英靈이 寒波와 더불어 가지 안했으니
應抱孤琴故國廻。 아마도 거문고 안고 고국에 돌아오리.
◦ 林千石臺 林下 李敬儒(1750-1821)
(在州西六十里 新羅樂師 林千石 抱琴逃隱于白華山中 彈琴於巖石上 後人名之爲林千石臺)
상주의 서쪽 60리쯤에 있다. 신라의 樂師 林千石이 거문고를 가지고 백화산 중에 숨어
바위 위에서 거문고를 타니 후세의 사람들이 임천석대라 하였다. 신라 疑高麗.
一人全節遂名臺 한 사람의 온전한 節義, 臺에 이름되니
林壑千年不盡哀 숲 구렁에 千年토록 슬픔 다하지 않네.
祗有高山月小夜 다만 높은 산의 달빛 적은 밤에
應隨玄鳥羽衣 마땅히 鶴을 타고 신선되어 오리.
◦ 林千石臺 白下 黃磻老 (1766-1840)
高麗山色夕陽臺 고려의 산색이 빛나는 석양의 대에서
烈士前塵問刼灰 烈士의 지난 날 죽음을 물어본다.
夢八朱絃彈不盡 꿈마다 거문고 타서 다하지 않고
江深白馬去無來 강이 깊으니 백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네.
雷鳴急峽蛟龍鬪 우뢰 우는 가파른 골짝엔 교룡이 싸우고
春到空林杜宇哀 봄이 오는 빈숲엔 두견이 슬피 우네.
怊悵東風誰灑麥 슬프도다. 봄바람에 누가 원한을 씻을 고
空敎石面但崔嵬 공연히 바위가 名聲 높도록 만 가르쳤네.
◦ 林千石臺 雨坪 黃麟老 (1785-1830)
秋泉如有怨 가을의 샘소리 마치 원망 있는 듯 하여
冷冷不盡流 선듯하고 시원하게 흘러 다하지 않네.
下有千年魄 아래에 영원한 넋이 있어
一琴與爲儔 한 거문고와 더불어 짝이 되어 있도다.
◦ 林千石臺 藏園 黃源善 (1798-1873)
疊石層支小作臺 첩첩 층층이 돌 쌓아 작은 대(臺) 만들었으니
藏園處士百年來 藏園處士가 생전 처음 예 왔다.
野人尙說殉身事 野人들이 林千石의 순사한 일 말하니
碧血知應化錄苔 푸른 피가 아마도 푸른 이끼로 化했나보다.
◦ 林千石臺 姜秀永
若麝之過香滿林 사향노루 지나간 듯 향기 숲에 가득하니
危臺千尺郎華陰 千尺의 높은 臺, 백화산 아래에 있다.
當三韓國頹綱久 三韓國 당하여 紀綱 무너진 지 오래이고
以一伶官見義深 一伶官으로써 의리를 깊게 보았다.
海磬遙追師襄迹 바다 경쇠 멀리 師襄의 자취 쫒아 가고
山薇復採伯夷心 산 고사리 멀리 伯夷의 마음으로 캤도다.
不盡詩人不盡吟 詩人도 다하지 않고 詩도 다하지 않으리.
◦ 林千石臺 시려 황란선(1825-1908)
臨水巉巖百尺臺 물에 임해 바위 쌓아 百尺臺 되니
芳名不與石苺苔 꽃다운 이름 돌에 이끼와 더불지 않도다.
千秋義烈無從問 千秋에 義烈을 물을 곳 없는데
惟有西風萬壑哀 오직 가을바람 있어 모든 구렁을 슬프게 하네.
* 임천석은 정조 실록(1797.2.13, 정조지)에도 천양됨.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正祖 46卷,
21年( 1797 丁巳 (嘉慶) 2年) 2月 13日 甲申
○前持平金光遇上疏曰: “
昔宣川知印金鐵賢, 從忠武公金應河, 到深河, 及兵潰矢盡。 應河謂鐵賢曰: ‘汝其去矣。’ 鐵賢曰: ‘小人何敢去? 請伏劍, 以明不去之心。’ 遂與應河, 同時殉節。 其後立應河之祠於義州, 以鐵賢配之廡下, 至丙子之難, 祠亦焚焉。 高麗樂工林千石, 麗末抱琴入尙州之華山, 日上層巖, 援琴北望而長唏, 聞革命之報, 遂捨琴自投巖下, 至今傳林千石臺。 此兩人所成就樹立, 炳烺字宙, 而旣無名位, 莫能褒揚, 宜使本官, 伐石記事, 以彰其烈。”
命廟堂稟處。
정조 21년 정사(1797, 가경 2) 2월 13일(갑신) 전 지평 김광우(金光遇)가 상소하기를,
“옛날에 선천(宣川)의 지인(知印) 김철현(金鐵賢)이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심하(深河)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무너지고 화살이 다했습니다. 그러자 응하가 철현에게 ‘너는 떠나거라.’ 하니,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어찌 떠나겠습니까. 칼을 물고 자결하여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겠습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응하와 함께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
그 뒤 응하의 사당을 의주(義州)에 세웠을 때 철현을 무하(廡下)에 배향하였으나 병자년의 난리에 사당마저 불타고 말았습니다.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 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褒揚)할 수 없으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華山-白華山의 별칭)
◦ 구제급란도(求題急難圖) 급란도에 글을 청하며 창석(蒼石) 이준(李俊)(1560-1635)
我兄脊梁硬。背上半日恩。續我百年命。無兄背無我身。兄背母乳恩可竝。狀貌兄豈與人殊。七尺之身病且䂂。問君脥梁那得硬如許。爲有義膽大於軀。目前不知有釰㦸。背上但欲存骨肉。盡工能盡當時事。一片血心盡不得。我公筆力重千鈞。况復平生樂道人。詩公一揮揄揚語。寫出赤心照千春
“우리 형님 등뼈 단단하시어 등에 업힌 반나절 은혜로 나의 백년 목숨 이어졌네. 형님 등 없었던들 내 목숨도 없었을 걸. 형님 등 은혜는 어머님 젖 주신 은혜와 비등하네. 모습이야 형님 등 다른 사람과 다르랴. 일곱 자 큰 키에 병색 같고 여위셨는데 묻나니, 그 등뼈 어이 그리 단단하여 의리로 엉킨 담력 몸보다 더 크셨는가.”
‘형제급란도’ 지방유형문화재 제217호
目前不知有劒戟 눈앞에 창칼 아랑곳없이
背上但欲存骨肉 등에 업힌 아우만을 살리고자 하였도다.
畵工難畵當時事 화공이 당시의 일도 그리기 어렵거든
一片血心畵不得 一片血心이야 어떻게 그리랴!
我公筆力重千鈞 우리 公의 筆力 千鈞의 무게 가졌으며
況復平生樂道人 하물며 평생을 樂道하는 사람임에랴!
請公一揮揄揚語 청하옵긴 한 번 들내는 말씀 써 주어서
寫出赤心照千春 赤心을 그려 내어 千春에 비추어주오.
◦ 산곡일고서(山谷逸稿序) 장원 황원선
“이에 평일 종유한 분들은 저 權淸臺(相一), 鄭鳳沙(儁), 姜松隱(碩弼), 盧芝陰(啓元)의 제 선배로 도의로써 서로가 강론하고 연마하여 만년에는 산수에서 놀아 지팡이와 나막신을 나란히 하고 다니던 날이 오래였은즉, 토론하여 의리를 밝히고 性靈을 글로써 쏟아 낸 것이 편지에 드러나고 읊조린 것이 반드시 많았을 것이나, 지금 수집한 것은 약간 편에 불과할 뿐이요. 나머지는 볼 수 없으니 이른바 태산의 한 떨기 억새풀이라 할 만하다. 또, 公의 ‘次東坡赤壁賦’는 당시 인구에 회자되었으나 遺落하여 전하지 않는다.”
라 하고, 山谷 黃沈(1688-1763)은 문과급제자로 문명을 얻었으나, 주손이 끊기어 그 문집조차 못 내어 유문이 일실됨을 염려한 宗人들이 1846년(丙午)에 ‘山谷逸稿’를 완성했을 때의 서문이다. 이 또한, 사람만이 사람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글이라 하겠다.
사람의 정신은 사람이 계승한다.
◦ 송화사의운서(送畵師義雲序) 시려 황란선
이 서문은 방촌 황희선생의 초상화를 그릴 때 대승사(大乘寺)의 승려요 화사인 의운(義雲)을 초빙했던 사실의 기록.
“禪宗의 義雲師는 정신이 완전무결하고 골격이 준수하며 모습이 고아하고 미목이 청수한데 불법을 설하여 寶花가 정수리에 내리고 게송을 염하여 명경 같은 마음을 비추었다. 대개, 일찍이 사문에 나아가 오묘한 도를 깨우친 사람이요, 書藝에도 두루 통하여 정신을 오로지 하여 그린 지가 또 수 십 년이라 한다. 그 자를 山陽의 黃翊周 등이 맞아들여 옥동서원에 있는 우리 선조 익성공(필자 주: 황희)의 진영을 공경히 모사(본 떠 그림)하도록 하였다. 이 지방(필자 주 :상주 모동) 사람들도 그가 신묘함을 알고 一本을 더 모사하여 안치해 모실 계획으로 청하였더니 義雲師가 분명히 허락하고 삼일 만에 두 본을 완성하였다. 선비들이 좌우로 둘러 서 기다리던 자들이 너무도 닮았다고 감탄을 하였으니 진실로 최상의 奇才였다. 오호라. 옛날 우리 선조공께서 불교를 침에 심히 노력하였는데 정권을 잡은 날에 미치어서는 善懷란 중이 있었는데 懷善으로 이름을 고치고 마음을 바꾸어 儒學에 귀의하니 淸香齋 尹淮公이 이를 庬村 (필자 주: 黃喜)의 덕화라 하였으며, 오늘에까지 미치어 義雲이 우리 선조의 참됨(眞)을 생생하게 그려 내었다. 또 어찌, 우리 선조의 정령이 그 마음을 인도하여 그로 하여금 목욕하고 二帝 三皇 周公 孔子의 道에 교화하게 한 것임을 알겠는가. 깊은 가을 달이 밝아 내 응당히 배를 타고 영강의 안개 낀 숲으로 올라 大乘寺 동구로 師를 방문한다면, 師 는 장차 미간을 떠받치고 눈을 쏘아 보며 선 채로 뿌리쳐 대할 것인가? 아니면 장차 善懷가 懷善이 된 것 같이 名敎(유교) 가운데서 한가롭게 놀고자 하겠는가? 개울에 비는 잠깐 개었으나 고갯길 진흙탕 험하니 가는 길에 조심하여 미끄러져 길 잃음을 경계하라.”
畵師 義雲 : 고승이요. 서예에도 능함. 의운 스님은 초상화에 신묘한 재능이 있음.
3일 만에 두 본 완성.
◦ 중모초당기(中牟草堂記) 반간(槃澗) 황뉴(黃紐) (1578-1626)
“東國”의 산수는 嶺東이 최고요, 嶺南이 그 다음이다. 영남의 산수는 商顔(尙州의 산 곧 商山)으로부터 시작되니, 시작의 기이함은 실로 마지막 승경에 뒤지지 않는다. 마을은 白華山 동쪽 산록으로써 병풍을 삼아 앉았는데, 龍門山의 서쪽 가지를 담장으로 삼아서 두 내가 교류하며 울타리 밑을 돌아 보호하므로 파지 않아도 못이 생겼다. 뭇 바위가 벽처럼 서서 반은 집 뜰에 떨어져 공 들이지 않아도 정원의 怪石이 되었다. 산은 높고 물은 풍성하며, 구름이 날고 안개가 일어, 초목은 윤기로 반질거리고 갯가는 밝고도 깨끗하여 사람이 오고 갈 때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 무궁한 奇狀을 온통 내 집으로 실어왔으니 산수의 부자로는 온 나라에서 구한 데도 거의 나보다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또, 삼 칸 집으로써 산수를 수용하였지 삼 칸 집이 혹시라도 산수에 수용된 것은 아니다. 가령, 내 몸도 오히려 산수와 같아서 한 책상 앞에서 수용하니 또한 심히 유여하다 하겠다. 그러나 본래 삼 칸인 까닭에 그 용량만큼만 수용하나 이미 나의 칠 척 몸뚱이를 수용하고도 또 만 겹의 산과 백 굽이의 물까지 수용하였은즉, 어찌 군자가 寸心에 萬理를 갖추고도 천하에 몸을 맡긴 것과 다르겠는가.
땅은 비록 심히 궁벽 지나 실로 東國의 山水로는 버금가는 곳이요. 嶺南의 으뜸이며, 집은 비록 심히 좁으나 오히려 산수의 가멸참과 무궁한 모습을 수용하였은즉, 남들이 실로 그 제도의 좁고 누추한 것으로써 업신여기지는 못 할 것이다. 나 또한, 어찌 근근이 무릎이나 용납되었다고 스스로 작게 여기랴, 이에 記한다. “
이 기문의 구성은,
起 : 尙州는 嶺南 山水의 시작이요. 東國 山水景으로 버금가는 곳이다.
承 : 中牟는 尙州 山水의 시작으로 景勝地다.
轉 : 草堂이 산수를 수용하였고, 주인이 그 초당을 수용하였다.
結 : 草堂에 살아도 自然亨有로는 동국 제일의 부자다.
◦ 녹차(錄此) 황오(黃五)의 詩와 설(說)
그이 호가 錄此인 것은 鴨綠江 이남에서는 조선의 제1이란 자긍심에서 自號로 삼았으며, 그는 자신이 中國 黃庭堅 . 蘇軾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자부심도 대단하여 “生日” 詩에서는,
山谷同姓稱漢案 산곡(山谷 黃庭堅)과 성이 같아 한안(漢案)이라 號 삼고
東坡同甲正分明 동파(東坡 蘇軾)와 동갑년(同甲年)임에 틀림없네.
天孫渡河十五日 천손(天孫. 織女星)이 은하수 건넌 15일 만에
普應祖師同日生 보응조사(普應祖師. 宋 高僧)와는 한 날(21일)에 태어났네.
라고 하였다. 먼저 ‘石裳說’을 소개하면,
“漢 나라 승상 張良이 穀城을 지나다가 黃石을 보고 절한 지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이나 된다. 黃五가 돌(塊石) 한 덩이를 洌泉(寒泉)의 위, 上州(尙州 古號)의 서쪽 白華山 밑에서 얻었는데 , 돌이 여러 개로 뭉친 것이 사람 같아서 小童을 시켜 가져 오게 하여 茆齋의 앞 작은 못가에 앉히고 石裳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는 곧 옛날 張良이 下鄙 땅의 다리 위에서 갈옷 입은 노인(黃石公)을 만나 太公 兵法을 전수 받을 때, 黃石公이 ‘13년 뒤에 나를 穀城山 밑에서 보리니, 누른 돌(黃石)이 바로 나다.’ 라고 한 고사를 취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돌은 누른색(黃)이 아니나 主人의 姓이 黃이요. 이 사람이 돌은 아니나 그 입은 옷이 갈옷이다. 사람이 한번 돌에 이르고, 갈옷이 한 번 변해 치마에 이르니 아, 나는 알 수 없구나, 몇 백 년 뒤에 어떤 이가 있어 白華山 밑에서 (이 돌을 보고) 절을 할런지는. “
東國의 시인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녹차의 도가 사상을 엿보게 하는 작품.
* 석상(石裳), 치마(바지)를 입은 바위를 통하여 자신은 뒷날 석상으로 남으리라는 우의(寓意)가 도도하다.
◦ 왕송설(王松說) 금석(錦石) 김병후(金秉厚) (1871-1922)
정자를 王松으로써 이름한 까닭은 무엇인가. 대개 왕(王)이란 지극히 존귀하여 상대가 없는 호칭이요. 지극히 커서 쌍이 없음을 이름이다. 까닭에, 민간 풍습의 늘 하는 말이 되어 사물의 품질 고하를 막론하고 단지, 무리 중에서 크게 드러나 보인 즉 왕(王)이라 일컬어왔다.
이는 실제 사물 가운데의 칭왕(稱王)이라 우매한 풍습이나 바꾸기는 어려운 것이요. 그 말이 이치가 없으면 심한 것이다. 내가 사는 마을 앞 큰길가에 소나무 세 그루가 섰는데 몇 년이나 되었는지 그 크기가 쌍이 없고,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하기를 2백 년은 넘었다 하였으며 동리 사람들이 이를 王松이라 일컬어왔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놀고 쉬며 배회하여 그 경치를 사랑하고 아껴왔다. 그 대대로 선 것을 보호한즉 분에 넘쳐 불안 한 마음이 있긴 하나, 늘 의아한 마음을 가져 말하기를, 초목식물 중에는 옛 사람이 이름을 지은 것이 많은데 竹君子(대나무는 군자). 梅美人(매화는 미인). 桃李將相(복숭아 오얏은 장상). 楊柳少年(수양버들은 소년). 芝蘭朋友(지초 난초는 붕우). 蓮菊賢隱(연과 국화는 현인 은자) 등이 다 이것이다. 그러나 소나무인즉 장부의 지절(지조와 절개)이 있다. 기둥이나 대들보 감이다 하여 품질의 귀천으로 등급을 매겼으되, 고작 벼슬을 대부에 불과하고 신선에 적송자가 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 소나무는 풍상의 두려움을 겪고 창연한 옛 기상으로 무거운 이름을 지닌 채 거친 땅을 지켜 만 사람의 우러러 존경함을 받으며 지내 온 것이다.
오호라. 이름을 헛되이 얻은 게 아니고 일에 우연히 합치됨이 있으니, 朝鮮(槿域)이 상전벽해(桑蘭)가 되고 太上王(高宗)이 승하했을 때(1907) 인민은 관청에 가서 곡할 여지가 없어 이 소나무 사이에 병풍을 치고 북향하여 호곡하기를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 같았으니, 문득 모든 사람은 松柏의 회포(절개를 지키려는 마음)를 품었던 것이다. 붉은 갑옷 같은 껍질과 푸른 수염 같은 솔잎은 완연히 슬프고 처량한 빛을 띠었으며, 백설이 안개 같이 걸리어 모두가 참담한 기색으로 굽어 큰 길을 내려다본다. 또한 이 길은 옛날 嶺南右道의 進貢 길이었으나 이제는 변환하여 다스리지 않으니 王風은 씻은 듯 없어졌으나 王松 홀로 푸르러다. 아, 우리 주민은 진실로 王松의 고향에 있거니, 반드시 甘棠 을 공경하여 베지 말라시던 옛 사람이 훈계한 바를 기록하도다. “
* 지사(志士)의 우국 단심이 은밀히 우의(寓意)된 곳.
(구성) 모동 상판리에 “王松說碑” 가 섰다. -2008년
起 : 민간 풍습에 사물 중 가장 크게 드러난 것은 王이라 호칭하였다.
(어떤 이치가 없으면 王이라 하기는 심한 것이다.)
承 : 마을(中山磻溪) 앞 2백년 묵은 세 그루 老松을 王松이라 불러 위아하였다.
轉 : 고종이 승하(1907년)함에 이 소나무 밑에서 望哭禮를 드리며 松柏의 회포를 지녔다.
結 : 王風은 사라졌으나 王松은 홀로 푸르게 서서 嶺南右道의 進上 길을 굽어보고 있다.
(베지 말고 보호하라.)
◦ 삼포정화록(三浦鼎話錄) 시려 황란선
이 글은 시려 황란선이 당색이 다른 박운창(朴芸窓)과 1886년 4월에 당시의 시속(時俗), 예론(禮論), 인물론(人物論)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대목의 하나다.
“芸窓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中山의 黃氏로 八老가 있어 당세에 울렸다 하는데 그 이름은 누구며, 文學은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蘭善이 답해 말하기를, 審幾堂 諱는 啓熙인데 大山의(李象靖)의 高孫子다.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懹萵 諱 辛老로 文學을 삼가 지켰으며 文詞가 簡雅하였고, 중간 아들은 正齋 諱는 岩老로 律度가 峻整하고 經術에 該暢하였으며, 막내는 곧 白下 諱 磻老로 文章과 筆法으로 한 세대를 크게 기울였다. 또 城南 諱 眉老는 諸集을 두루 읽어 적용함이 恢恢하였으며, 恥萵 諱 獻老는 才氣가 민첩하고 날카로워 말에 기대고 立草할 정도였고, 義菴 諱는 漢老로 詞賦로써 南省에서는 으뜸이라 영남인이 그 詞賦를 외는 자가 많으며, 竹窓 嵩老는 對策文으로써 東堂의 으뜸으로 籌數에 정통하여 朞三百解를 저술하였다. 이 중에 蘭善의 先考가 계시니 號는 雨坪(麟老)으로 鄭谷口 諱 象觀과 姜過庵 諱 世誾과 더불어 嶺下의 三文章이었다. 芸窓이 말하기를, 白下 雨坪은 이미 들어서 알거니와 一門에 八俊이 났으니 어찌 장하지 않으리오. 그 후 능히 잇는 자가 있는가? 라고 하자 蘭善이 대답해 말하기를, 從祖兄 藏園의 諱는 源善인데 어려서부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고 오로지 뜻을 향상시키려 하여 칠십 생애는 실로 곤궁하였으나 讀書와 文學이 탁연하여 짝할 자가 드물었어도 道德을 품은 채 시험되지 못하고 불우하게 생을 마치어 溪翁이 ‘藏園은 抄選의 선비로 합당하나 세상이 公의 道德을 아는 이 없어 초야에 묻혔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
* 인물론으로 黃氏八老
회와 신로, 정재 암로, 백하 반로, 성남 미로, 치와 헌로, 의암 한로, 죽창 숭로, 우평 인로
* 영남 3 문장
우평 황인로, 곡구 정상관, 과암 강세은
* 인재 등용의 허실을 뜻함.
위의 문답은 尙州에 인물이 번성함을 자긍심을 가지고 芸窓에게 이른 말이고, 밑의 첫 문답은 방촌 황희의 후손으로서 당시 嶺南八老로 일컬어진 선비가 一門에서 났음을 구체적인 사실로 밝혔으며, 뒤의 문답은 芸窓이 도리어, 발탁되어 크게 등용되어야할 藏園 黃源善 같은 선비가 초야에 묻히고 말았음을 애석해 한 것이니, 이는 조선조 말기까지도 인재 등용의 득실이 당쟁에 좌우되었음을 은근히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첫댓글 사찰에 대한 글중에서 끝부분 "불"이 아니라" 물" 아닌가요?다 읽지는 못했지만 차츰 읽어보죠 좋은글들 마음에 푸근함주네요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며칠을 밤 새우다보니 눈이 흐릿해 ...... 수정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