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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부사랑의샘터♡ 원문보기 글쓴이: 동반자
한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영국 하버노교회
토마스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 대동강변 순교 장면
토마스 선교사 순교 기념교회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선교사는 (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1839년 남부 웨일즈의 Rhayadar 에서 당시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였던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9살 때 부모님을 따라 남부 웨일즈의 Abergervenny 부근의 하노버로 옮겼고, 부친은 1644년에 건립된 하노버 교회(Lanver Evangelical church)를 담임했다(1848-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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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 죽어가며 던져준 성경
" 여러분, 지금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교하는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구원에 감사하는 영혼들을 볼 때 저는 선교사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교하는 신앙으로 세계곳곳에 나아가 복음 전할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학교를 찾아 온 선교사의 말을 듣던 토마스의 마음은 선교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주님, 지금까지는 제가 웨일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제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제 길을 열어주세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리고 그는 곧 바로 런던선교회를 찾아가 중국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신청하였다. 1863년 5월 "토마스씨, 런던선교회는 당신을 중국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연락을 받았을 때, 토마스는 중국선교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격하며 찬양을 드렸다. "캐롤라인 드디어 내가 중국선교사로 파송받게 되었소!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오." 그는 약혼자인 캐롤라인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선교사로 떠나야 하는 토마스는 캐롤라인과 결혼한 후 곧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드디어 토마스 부부는 1863년 7월 21일 그래이부센드 부두에서 출발하는 폴메이스호를 타고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한 토마스부부의 선교활동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여보, 맛이 없더라도 건강을 생각해서 좀 먹어봐요" 남편인 토마스의 염려하는 말에 임신하여 입덧에 시달리던 캐롤라인은 "입맛이 없어서 음식이 먹히지가 않네요."라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설상가상으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의 선임선교사인 무어헤드와의 불화로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토마스 부부는 "주님, 저희들에게 이곳 중국에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렇게 중국사역을 진행하던 토마스는 1864년 3월에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구라는 곳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런데 토마스의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미국선교사 부인이 갑자기 풍토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곁에서 본 캐롤라인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을 겪었다. 출장을 떠났던 토마스는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태중에 있을 아기를 생각하며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여보, 내가 돌아왔소. 떠나 있는 동안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순간 토마스는 섬짓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면서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급한 마음으로 "캐롤라인! 캐롤라인!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자고 있는거요?" 이렇게 말을 하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토마스는 "아- 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다. 그의 아내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캐롤라인 내가 왔소! 눈을 떠 봐요 내가 왔단 말이오." 그러나 싸늘한 몸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가운데 이미 일주일 전에 혼자 죽어간 것이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그는 선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갔다. 마치 미친 사람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캐롤라인! 나를 두고 당신 혼자서 가면 어떻게 하오. 하나님 캐롤라인은 우리의 사랑스런 아기를 유산시키고 혼자서 죽어갔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내가 여기에 왜 왔는데요. 중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고향과 부모를 떠나 이곳까지 왔는데. 당신이 내게 한다는 것이 고작 이것입니까? 내 아내와 자식을 데려가는 것이 당신의 뜻이냐구요. 저와 캐롤라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선교사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저도 데려가지 왜 저 혼자만 이렇게 남겨두셨습니까?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하나님 당신은 사랑이시라고 했잖아요. 정말 당신이 사랑이신 분이 맞아요? 그런 분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인지 이제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많은 날을 헤매어 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분노와 원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에 편지를 썼다. "처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그는 런던선교회에 선교사 사직서를 제출하고 중국 해상세관에 통역으로 취직하였다. 세관에 취직한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일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에 토마스는 우연한 기회에 조선인 '동지사' 즉, 조선시대에 동지를 전후하여 중국에 공물을 갖고 보내던 사신 일행을 만나서 조선 내에서의 카톨릭교도들에 관한 수난을 듣게 되었다. 동지사로부터 카톨릭교도들이 참수당하는 소식을 듣게 된 토마스의 마음에는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졌다. 그리고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동지사의 말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어! " 토마스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윌리암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다. "토마스, 계속하여 세관에서 통역하는 일만 할 생각이오? 당신이 아내를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당신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능통한데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이러한 언어의 재능을 주셨을 것 같소. 복음전하는 것에 사용하도록 함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아도 세관에 사표를 내려던 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의 모습은 조용하지만 복음전하기 위해 준비된 결연한 모습이 보였다. "윌리암슨, 사실은 얼마 전에 조선의 동지사를 만나 그곳 소식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 조선에는 많은 카톨릭신자들이 예수를 믿는 것으로 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오작통이라고 하여 한 가족이 예수를 믿으면 다섯가족이 죽음을 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하고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제 마음은 어떻게 하면 제가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답니다. 저는 중국에 복음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가 조선에 복음전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럼 내 당장 조선에서 나를 찾아온 두 사람을 만나게 해 드리지요." 윌리암슨의 말에 토마스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윌리암슨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두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이 분은 토마스목사입니다. 인사하시지요." 윌리암슨의 말을 들은 두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는 김좌평입니다.저는 최선일입니다." 하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토마스목사입니다.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예수)교를 전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조선에 가서 야소교를 전하겠다는 토마스의 말에 놀란 두 젊은이는 "예-예-- 안됩니다. 조선은 지금 박해가 심해서 야소를 믿던 우리도 목숨을 걸고 피해 왔습니다. 조선에 있다간 칼날에 맞아 죽습니다."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젊은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토마스목사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칼날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다시 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말에 "글쎄 돌아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니까요." 두 젊은이는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였다. "그건 다시 사는 겁니다. 거듭나는 거지요." 젊은이들은 토마스목사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는 듯 어안이 벙벙하였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하고 토마스목사가 말을 꺼내자 "마태복음--?"하면서 젊은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경을 안가지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책과 교리문답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성경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 젊은이가 합창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책을요? 저를 조선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제가 그들에게 성경책을 갖다 주겠습니다." 결국 두 젊은이는 토마스목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조선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고 윌리암슨목사는 토마스목사에게 다량의 한문성경을 공급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1865년 9월 4일에 토마스목사는 두 젊은이와 함께 다량의 한문성경을 실은 목선을 타고 제1차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중국의 지포를 출발한 그들은 10일 만에 황해도 창린도 자자리 군포에 도착하였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을 본 토마스는 "안녕하세요. 저는 야소교 목사입니다. 이 책은 야소교 책입니다. 받으세요" 외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내밀었다. "에그머니나, 이상하게 생긴 코쟁이가 어떻게 우리말을 하지?" 주민들은 토마스목사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받아들었다. 토마스 목사는 백령도 부근의 섬을 2개월 반 동안 돌면서 섬주민들에게 성경책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가르쳤다. 토마스목사는 동시에 섬주민들에게 많은 조선말을 배웠다. 토마스목사가 돌아간 후 관가에서는 성경책이 법으로 금하는 천주학쟁이들의 책이라고 하여 백령도 참사로 하여금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회수하도록 하였는데 그때 거두어 들인 책이 99권이나 되었다. 토마스목사 일행은 서울로 가서 전도할 생각으로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하였으나 난데없는 폭풍으로 접근치 못하고 표류하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왔다. 이 일로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던 토마스목사는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동지사인 평양감사 박규수대감을 만나 "저는 야소교목사 토마스입니다." "오-오 어떻게 조선말을 잘 하시오? 놀랍소이다." "작년에 조선에 가서 배웠습니다." "난 박규수라 하오." "지난 번에 조선에 가서 천주교 박해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들었습니까? 지금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소이다." "저는 또 조선에 갈 생각입니다." "조선이 그렇게 좋더이까?"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를 전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마구 뜁니다. 대감에게 제가 이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소이다." 토마스목사가 박규수대감에게 선물한 책은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이었다. 그가 조선동지사인 박규수대감을 만나고 나올 때 누군가 따라나와 작은 종이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토마스목사가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던 그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달아나듯이 뛰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받은 종이쪽지를 읽던 토마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종이쪽지를 들고 있던 토마스목사의 두 손이 가슴에 모아졌다. 그곳에는 "백령도에서 뿌렸던 야소교 책을 꼭 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후로 조선선교에 대한 그의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고 어떻게든지 조선에 갈 방법을 찾아 나셨다. 그때 조선에는 천주교인들이 핍박을 당하여 강산이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러시아 군함이 원산에 들어와 통상압력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압력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 때 천주교도였던 승지 남종상 이 대원군을 찾아가 한가지 방도를 제안하였다. 러시아를 격퇴시키려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것은 프랑스 신부의 도움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의 도움을 받으려면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러시아 함대만 격퇴시키면 천주교의 포교를 인정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것으로 대원군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 함대가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서야 나라의 위기를 이용하여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남승상의 속셈을 알게 된 대원군은 분노하여 천주교를 사교로 간주하고 책을 불태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만 천주교를 믿어도 다섯 가구 모두 처형되는 오작통을 실시하였다.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서양인과 만나는 사람을 엄하게 다스렸고, 천주교도를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사람들에겐 포상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8,000명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고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된 병인년 박해의 발단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자국인의 신부를 학살한 것을 항의하고 압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프랑스 함대를 조선에 원정을 가도록 하였다. 이 때 마침 토마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수락한 토마스는 조선에 가져갈 성경과 전도지를 준비하여 소식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토마스목사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소." "윌리암슨목사님, 왜 프랑스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거죠?" "프랑스 배는 오지 않는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인 반도지나에 변란이 일어나서 그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고 합니다. 대신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위해 조선으로 간답니다. 그 배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합류하는 것이 어떻소?" "오! 그것 잘되었습니다. 지금 그 선장을 만나보면 안될까요?" "성미도 급하십니다. 마침 지금 그곳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같이 가봅시다." "선장님 이 분은 조선말을 잘하시는 토마스목사입니다." "안녕하시오. 우리는 한양으로 가서 무역을 할 계획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평양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요? 평양감사가 저와 친분이 있어서 도와준다고 약속했는데요. 아직까지 조선과 무역을 시작한 나라가 없는데 누군가 도와준다면 통상을 시작하는데 도움이 될겁니다." "글쎄, 그럼 평양으로 가도록 합시다." 1866년 8월 9일 토마스목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목적지인 평양에 가기 위하여 대동강을 출발하였고 제2차 조선선교여행에 오른 토마스목사는 이번 조선여행에서 선교를 잘 감당하기 위하여 뱃머리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셔어먼호가 조선국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에 포리에 다다랐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 배는 미국배로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왔습니다." "프랑스 배가 아닌가요?" 주민들은 프랑스배가 아니라는 말에 실망한 듯 하였다. "하나님께서 조선을 사랑하십니다. 자 이걸 받으세요. 성경책입니다." "이걸 그냥 받아도 됩니까?"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지자 수 많은 사람들이 배 위에 올라와서 배는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이 때 나누어 준 성경이 500여 권이나 되었다.그리고 셔먼호가 북상하여 석호정까지 올라왔을 때 토마스목사는 배의 갑판으로 나와 "야소 (예수)를 믿으세요! 야소를 믿으세요!"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던져 주었다. 이때 4일간 머물면서 100여 권의 성경을 주민들에게 주었다. 셔먼호가 석호정에서 만경대까지 다다르자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선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하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셔어먼호에서는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였고 조선에서는 그것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셔먼호의 미국인 선장은 조선인 이익현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속여 배로 유인한 다음 그를 억류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토마스목사는 선장에게 "이러면 안됩니다. 어서 저 사람을 보내주시오." "당신은 상관마시오. 내가 선장이요." "정말 조선과 교역을 원하신다면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두고 보시오 저들은 곧 내 말을 듣고 통상을 요구해 올 것이오." "이건 비겁한 짓입니다. 빨리 저 사람을 보내고 저들에게 잘못을 사과하시오" 그러나 선장은 토마스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익현의 억류로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은 소극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틈에 박춘권이라는 부교가 이익현을 셔먼호에서 구출하였다. 대포로 공격을 하던 셔어먼호 선장은 조선군사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퇴각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홍수로 불어났던 물이 줄어들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모래에 좌초되었다. 이 순간을 놓칠리 없던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순간에 토마스 목사는 "야소" "야소 믿으시오!" "야소!" 소리치며 배 안에 있던 성경을 군사들에게 던졌다. "잠깐, 항복하겠으니 우리를 돌려 보내주시오." 배 안에 있던 선장이 외쳤다. "항복하면 돌려보내주겠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대포는 조선의 군사들을 향해 발사되었다. 선장의 비열한 처사에 화가 난 조선의 군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싣고 셔먼호에 접근하여 불화살을 쏘아대었다. 배에 떨어진 불화살로 셔어먼호는 불타기 시작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강으로 뛰어내렸고 목숨을 건져 뭍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성난 조선의 군사들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동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서도 누군가 한손에 백기를 들고는 "야소, 야소" 외치면서 성경책을 던졌다. "야 저러다가 저 사람 불타 죽겠다. 야소교 목사라고 했던 사람이지 않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의 옷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순간 두 팔을 높이 든 토마스는 "야소!" 큰 소리로 외치더니 강물에 뛰어내렸다.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온 그를 목베이려고 누군가 칼을 쳐들었을 때, 부교인 박춘권은 그를 생포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신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책만 던지던데."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토마스목사 외에도 3명의 사람이 생포되었다. 평양감사는 이들에게 국법을 어기고 사교를 전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모두 부교인 박춘권으로 하여금 참수토록 명하였다. 죄수로 묶여 있는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만을 찾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대동강변에서 국법에 따라 한 사람씩 목을 베는 형벌이 실시되었다. 선장과 중국서기인 조능봉, 이팔행이 먼저 목베임을 당하였다. "다음 영국 야소교목사 토마스"하자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칼을 잡은 박부교의 손이 높이 올려진 순간이었다. "잠깐만 이걸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이 말에 멈칫하고 놀란 박부교는 토마스목사가 내미는 작은 보따리를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러자 토마스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일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1866년 9월 3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목사는 대동강의 한사정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 토마스가 죽고난 다음 33년이 지난 1899년의 일이다. "목사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이대로는 못살겠습니다. 제가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입니다. 그 때 그가 죽어가면서 제게 주었던 작은 보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 마음이 찔려서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마펫선교사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감님, 영감님이 토마스목사를 직접 보셨단 말입니까?" "보다마다요. 제가 토마스목사를 죽였다니까요?" "하나님께서는 토마스목사의 죽음을 통하여 영감님과 같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영감님도 예수를 믿고 전하면 됩니다." "목사님, 정말 그럴까요? 그때 셔어먼호가 불타는 가운데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을 던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어느 여관에 갔을 때 방안이 온통 성경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여관주인을 불러서 연유를 알아보니 토마스목사가 포리에서 500여 권의 성경을 배포할 때 박영식이라는 평양감청 경비가 사람들이 버리는 책을 주워다가 도배를 했답니다. 그것을 여관주인인 최치량이 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관에 묵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이 글을 읽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제게 들려주면서 자신도 예수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알기로도 토마스목사에게 성경을 받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많습니다. 홍신길은 후에 대동문에 교회를 세웠으며, 그의 동생도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고, 김영섭은 원래 천도교였으나 동생 종권과 함께 교인이 되어 장로가 되고, 황명대는 셔먼호가 불탈 때 "야소, 야소"하는 소리를 듣고 평양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습니다." 이렇게 토마스목사가 죽음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뿌렸던 성경은 살아서 조선의 교회가 세워지는 초석이 되었다. <2> 성경을 던져주고 순교한 최초의 한국선교사 토마스 이야기
영국 웨일즈에 하노버교회가 있습니다. 시골에 있는 교인 열 네댓 명의 자그마한 교회입니다. 한국 최초 선교사로 대동강변에서 순교당한 토마스목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입니다. 그의 부친께서 목회했던 곳이기도 한데 그 교회 뜰에 가족묘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목사의 묘는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거부하고 칼로 친 조선 땅 어디에 아무렇게나 묻혔기 때문입니다. 하노버교회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은 예배당 한편에 걸려있는 빛바랜 그의 사진틀 하나뿐이었습니다.
토마스선교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은 후 깊은 방황과 갈등 중에 그 단체를 탈퇴합니다. 사역지였던 중국을 떠나 조선을 향하는 상선을 타게 되는데 조선관군에 의해 그 배는 불타고 겨우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칼에 맞아 죽습니다. 27세의 꽃다운 삶을 바쳤지만 정작 영국교회 안에는 그의 순교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학자는 토마스목사가 한국교회 부흥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가 죽으면서 전해 준 성경이 놀라운 일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군관인 박춘권에게 성경을 줍니다. 얼떨결에 받은 성경을 박춘권은 조카인 이영태에게 건네줍니다. 이영태는 그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나중에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놀즈선교사의 전도사가 되어 성경 전체를 번역할 때에 상당부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토마스목사가 죽기 전에 최치량이라는 어린이에게도 성경 세 권을 전달했는데, 당시에 금서인 성경을 받자 이 아이는 겁이 나서 평양 감영 경비인 박영식에게 갖다 줍니다. 성경을 수거하는 책임자이기도 한 박영식은 성경을 가져다가 집에 도배를 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신문으로 도배를 한 방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오래 전에 종이로 도배한 방은 흔치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으로 도배된 벽과 천장을 상상해 보세요. 멸시했던 성경말씀이 명물이 되었습니다. 디자인도 디자인이려니와 누워도 말씀, 앉아도 말씀이 가득합니다. 이 집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바로 박영식의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교회가 됩니다. 그 후 이름이 장대현교회로 바뀌게 되는데 이 교회에서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묘지 하나 제대로 없이, 고국의 교회에 이름 하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이 땅을 위해 던진 생명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
<3>
중국과 한국은 예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다. 때로는 그들이 일으킨 엄청난 전쟁의 재난으로 고통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또 어느 때는 그러한 과거를 잊은 채 이웃형제처럼 지내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때 굴욕의 역사도 이었고, 그러한 굴욕의 역사 속에서 중국을 통해 많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 역시 중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사비엘 선교사의 의해서 1549년 일본 선교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후 그는 아시아에서의 선교는 중국을 빼 놓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을 하고, 1552년 8월 중국 광동성에서 가까운 상천도라는 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사비엘 선교사는 중국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후 로마 교황청에서는 1568년에 카르네이오를 중국 주교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중국 선교에 착수하였으며, 1573년에는 카르네이오의 뒤를 이어 발리야니가 40명의 선교사를 이끌고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다시 발리야니 선교사는 루지에리를 초청하였으며, 또한 루지에리는 마테오 리치를 초청하였다. 이들은 마카오에 머물면서 중국어 학습을 받았는데, 드디어 1583년 중국 본토 광동성 책임자로부터 허락을 받은 것을 계기로 중국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미 중국에 천주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를 펴 나가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터졌는데, 이 왜란은 1598년에야 끝이 났다. 그런데 이러한 왜란이 지난 지 30년만인 1627년에 북방에 자리잡고 있던 여진족(후금 또는 청나라)의 침략으로 정묘호란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침략은 다시1636-7년 병자호란으로 끝나지만 결국 승리는 청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일로 승리한 청나라는 엄청난 물자를 조선에 요구하면서 아울러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당시 청나라는 국토를 정비하고 다시 명나라를 침공하고 나섰으며,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하고 1644년에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서현세자와 그 일행도 모두 북경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소현세자는 북경에 머물고 있던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 과 사귀게 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 일로 조선에서는 중국의 여행자들이 빈번해지면서 한역 서학서의 유입이 있게 되었다. 한편 조선과 중국, 중국과 조선의 정기적인 외교 사절이었던 부연사행의 일원이었던 조선 사신들은 북경을 방문하면서 서양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경에 있던 천주교회당을 방문하여 선교사를 만나게 됨으로써 천주교가 한국에 유입되게 되었다.
한편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서 북경 가게 되었다. 1784년 그라몽 선교사로부터 영세를 받게 되었다. 이때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역사적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렇게 조선과 중국이 천주교를 통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중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하여 깊은 선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한국에 대한 선교의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이들 중 한국 선교에 가장 관심을 깊이 가진 사람들은 영국 회중교회 출신인 [토마스 선교사]와 스코틀랜드 선교회소속 [로스 선교사]로, 중국 동북 지방(또는 만주)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기울였다. 결국 이들의 기도와 깊은 선교적 관심과 선교에 대한 노력으로 조선과
중국 동북부 지방 선교의 역사가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의 중국 선교
이처럼 중국 땅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증거 하는 외국 선교사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과연 누가 한국 선교의 선두 주자로서 선교의 씨앗을 뿌렸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못 궁금하게 여기는 일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구츨라프'라고 하고 또한 어떤 사람은 '토마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로스'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알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과연 한국 기독교의 첫 선교사였을까? 이제 그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보자.
그는 바로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에 첫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던 토마스 선교사이다. 토마스는 1839년 영국 웨일즈에서 영국 회중교회의 라야더 교회 담임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는 14세 되던 해인 1853년 그 유명한 크란도버리 컬리지에 입학하여 3년 간 라틴어, 불어, 헬라어 등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다시 뉴컬리지 신학부에 입학하여 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목사의 길을 준비하고 나섰다. 그는 비록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지만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여 항상 책을 사서 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친구들의 책을 빌려서 많은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목회 하시는 아버지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었기에 자연히 식사도 늘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그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학교를 휴학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휴학계를 제출한 토마스는 시골에서 요양하면서 더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하였으며 더 많은 기도의 시간에 정력을 쏟았다. 오래지 않아 몸이 회복되자 그는 곧 복학을 하였고 다시 학교 생활에 매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중국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아직도 졸업하려면 3년이라는 긴 세월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중국 선교에 대한 열정과 큰 소망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를 잊지 않았다.
토마스가 이렇게 중국 선교에 대한 애정을 불태우고 있을 때 이미 런던선교회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월리암 케리를 인도해 첫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며, 다시 1807년에 모리슨 선교사를 중국 대륙에 파송 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선교의 거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학교만 졸업하면 이 런던선교회의 추천을 받아 중국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서원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꿈은 1년 3개월이나 앞당겨진 1863년 5월 교수회의 최후 심사 결과 졸업 통과를 받음으로써 실현을 보게 되었다. 졸업장을 손에 쥔 토마스는 고향 하노버를 향해 달려갔으며, 드디어 1863년 6월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는 곧바로 런던선교회에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부인 캐롤라인과 함께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같은 해 7월 21일 그래이브샌드 부두에서 미지의 세계 중국을 향해 나아가는 파송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중국을 향해 출항하는 폴메이스 호에 올랐다. 그 배에는 역시 런던선교회로부터 북경 기독교 병원 감독으로 임명받은 다젼 선교사 부부가 함께 승선하고 있었다. 그 중 월리암슨 선교사는 이미 지난 1855년에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임명받아 활동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하여 치료를 마치고 이번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지푸 지부 총무로 파송을 받아 다시 중국을 향해서 가는 길이었다.
토마스 선교사와 그의 부인 캐롤라인은 희망에 넘치는 꿈을 안고 고향을 뒤로 두고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향해할 때에 뱃전에서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과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선교의 길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곤 하였다. 다시 배의 기선이 북쪽을 향하였고 적도선상에 이르렀을 때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렸으나 그들은 이 불볕 더위도 주님의 은혜로 알고 계속 항진하여 인도를 지나고 광동성을 지나 드디어 목적지인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12월로 장장4개월의 긴 항해였다.
매서운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상해 부두에 첫발을 내디딜 때에 런던선교회의 소속으로 이미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어헤드 선교사가 영접을 하였다. 토마스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모두 얼굴이 같아 구별하게 힘들었으며, 어학에 재간이 있다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의 언어는 현지인들과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정적인 선교의 꿈을 가지고 중국 땅에 도착하였지만 그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들이 한두가지 아니었던 것이다.
기후와 문화 음식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위생 시설 등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토마스 선교사의 부인 캐롤라인 선교사는 이때 임신을 하고 있어서 토마스 선교사와 같이 선교 활동을 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 었다. 여기에 음식이 전혀 입에 맞지 않아 그의 부인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선교사는 집에서 부인을 돌보면서 뒷바라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주재 런던선교회의 본부가 있는 중국 내륙 도시인 한구(漢口)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토마스 선교사는 하는 수 없이 미국에서 파송을 받아 온 이웃 선교사 부인에게 자기 부인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서 출장을 떠나야만 했다.
거기에서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의 총무인 스파함과 그 지역의 선교회 책임자이며 스파함의 사위인 존 그리피스 선교사를 만나 중국 선교의 전망에 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머물면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상해에 남아 있었던 부인 캐롤라인은 정신적 불안까지 겹치면서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지고 말았으며, 어느 날 이웃 미국 선교사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크게 충격을 받아 이것이 원인이 되어 유산을 하고 말았는데, 하혈까지 하였지만 그를 돌보아 줄 이가 없어서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로 나흘이나 방치된 채로 지내면서 남편의 이름을 몇 번이고 애절하게 불러 보았지만, 1000km나 떨어져 있는 토마스가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이렇게 하여 결국 그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주일 후에야 남편 토마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그 머나먼 길을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그 어디에도 캐롤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렇게도 함께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던 중국 선교에 대한 열정의 메아리들만 허공에서 어지러이 들려 올뿐이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하나님께 소리치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묵묵히 토마스를 지켜보시면서 스스로 이 고통을 이겨내기를 기다리고 계셨을까?
지푸에서의 활동과 한국인과의 만남
부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토마스 선교사는 얼마 동안 넋을 잃고 사명이 흐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처럼 굳게 다짐하고 약속했던 선교의 동반자가 지금 그 곁을 떠나고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중국 여인들을 중국의 고루한 관습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부인과의 약속이 계속해서 그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결국 토마스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교할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짓고는 1864년 12월 7일 영국에 있는 런던선교회에 사표서를 정식으로 제출하였다. 그 후 그는 산동성에 있는 지푸로 자리를 옮겼는데 함께 중국으로 왔던 웜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푸는 발해만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한국과 일본을 드나들기 편리한 곳이었으며 산동성 이남을 향해하기 아주 좋은 장소였다.
토마스는 이곳 지푸에 와서 막상 월리암슨을 만나기는 했지만 자신이 일을 해야만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지푸 세관에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자연히 외국인과 거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중국어는 말할 것도 없이 몽고어 및 러시아어 등을 열심히 배웠다. 이렇게 지내기를 9개월, 다시 그는 이 생활을 청산하고 선교 사역에 임하겠다는 다짐을 한 후 월리암슨 선교사에게 그 뜻을 전달하고는 함께 기도하기에 힘썼다.
이때 토마스는 뜻하지 않게 한국에서 온 두 기독교 신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기자평과 최선일이었다. 이들은 사업관계로 지푸에 오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조정은 철저한 쇄국 정책을 쓰고 있었기에 누구든지 조정의 허가 없이는 외국에 나갈 수 없었는데, 이들은 외국뿐만 아니라 외국인 선교사를 만나서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 두 사람은 한문에 능한 사람들인지라 자유롭게 토마스 선교사와 필담으로 의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대화 중에 이들 두 사람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말에 토마스 선교사는 귀가 솔깃하여졌으며, 한국에서 자유롭게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를 당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한국에서는 선교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이 일을 계기로 한국 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어 하루 속히 한국어를 배워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펼치겠다는 마음을 품고 이들에게 자신을 한국까지 안내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이들은 선뜻 토마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토마스는 이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가기로 하고 월리암슨에게 알렸다. 이때 윌리암슨 선교사는 토마스에게 순교할 각오로 선교에 임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월리암슨 선교사의 전적인 후원을 받아 다양한 한문 성서를 가지고 중국인 우문태의 배를 타고 김자평의 안내로 1865년 9월 4일 지푸를 출발하여 황해도 창린도 자라리 근처 포구에 도착하였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는 서해안 일대에 널려 있는 여러 섬을 순회하면서 성서를 배포하고 한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서울에 올라가 국왕을 만나 선교의 윤허를 얻어 보려고 했으나 거듭되는 폭풍 때문에 이를 단념하고 일단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가 조선 선교의 재개를 꿈꾸면서 북경대학의 학장 서리직을 잠깐 맡아보고 있을 때에 평양감사 박규수가 동지사로 북경에 와 있었다. 그는 일행을 런던선교회 북경 지부로 초청하여 성서와 서구 과학서를 나누어주면서 자신의 조선 선교 계획을 말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뜻하지 않는 한국의 실력자를 북경에서 만난 일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평양감사 박규수도 조선 선교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박규수가 돌아올 무렵 한국의 조정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프랑스 신부 9명을 포함해서 수천 명의 교인들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중국에 주둔하고 있었던 프랑스는 한국에 대하여 잘 아는 토마스 선교사를 안내원으로 선정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던 인도차이나에 뜻하지 않는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그 군함이 그곳으로 가고 말았다. 다시 한번 한국에 들어가 선교를 펼쳐 보려고 했던 토마스의 선교 계획은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 선교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그러나 때마침 천진에 머물고 있던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가 많은 상품을 선적하고 조선으로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토마스 선교사는 이 배의 안내원으로 부탁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다시 월리암슨 선교사로부터 많은 성서를 얻어 가지고 동승하게 되었다.
드디어 1866년 8월 9일 중국을 떠난 이양선 제너럴셔먼 호는 일주일 후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나타났고, 이어서 강 상류인 평양쪽으로 거슬러올라갔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 제너럴셔먼 호와 한국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국 측에서는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을 파견,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다. 통역으로 승선한 토마스는 제법 조선말에도 능통했던 듯, 그들의 목적지가 평양이며 통상을 원한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토마스는 한국의 문정관에게 천주교인 학살을 문책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耶蘇聖敎)를 믿으며, 그들의 목적이 야소교를 전파하려는 데 있음도 밝혔다.
어느덧 제너럴셔먼 호는 대동강 하구 보산을 지나가고 있었다. 보산은 조그만 어촌이었지만 군사 기지로는 대단한 곳이었다. 이때 이상한 배를 보았던 조선 군인들이 일제히 활을 당기자 그 배에 승선해 있던 한 중국인이 순수한 상업을 위해 온 배니까 안심하라고 손짓하자 활을 멈추었다.
한편 대동강 강변에 살고 있던 천주교 교인들은 프랑스 함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있던 중 그 배가 온 줄로 알고 지달해(池達海) 등 10여명이 배에 승선하였다. 토마스는 이들을 환대하고 성경책을 나누어주었다. 다시 배는 북상하여 포리에 정박하게 되었는데 토마스 선교사는 이곳에서 성경을 배포하였다. 후에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이 마을 사람들 중에 홍신길은 성경을 받고 열심히 읽어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 선교사의 연구가였던 오문환은 1928년 토마스 선교사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서 홍신길을 만났는데 그때 홍신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정식으로 신자가 되기는 을미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종자를 받기는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병인년 포리에 있었을 때 토마스 목사에게서 성경을 받았을 때입니다. 81세의 늙은 것을 아직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남겨 두시 것은 아마도 토마스 목사의 전도 사적을 증거하라 하심인가 보외다."
포리에 배가 정박했을 때에 토마스 선교사는 이 배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자그마치 500여 권이나 배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훗날 기독교인들이 되었으며, 한국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배는 점점 북상하면서 만경대에까지 진입을 하게 되었다. 만경대는 평양성에서 10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계속해서 열심히 성경을 전달하면서, 북경에서 만났던 박규수를 생각하며 한국 선교의 꿈을 부풀렸다.
그러나 제너럴셔먼 호에 동승해 있던 중국인 이현익이 그만 붙잡혀 억류를 당하자 선원들은 총을 난사하였고, 이에 놀란 평양성 군인들이 주민과 합세하여 일대 혼전을 빚었다. 다행히도 이현익이 구출되자 다시 제너럴셔먼 호와 한국 군인들은 팽팽한 긴장감을 접어 두고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감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선교사와 굳게 약속을 했던 평양감사 박규수는 중앙 정부의 대응 방법에 대한 지시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박규수는 이번 기회에 조정이 마음을 활짝 열어 개국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 강하였음을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자신이 개화론자였기 때문에 그는 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에 대하여 집권자인 대원군의 쇄국론과는 달리 개국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양선 제너럴셔먼 호가 개국론자 박규수의 관찰 하에 들어온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개국 통상의 호기가 됨직도 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 호의 오만한 접근방식은 이 개국론자의 결단의 폭을 좁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너럴셔먼 호의 위협적인 행동은 평양성 당국자들에게 불안감을 갖게 했는데 이때와 시기를 같이하여 제너럴셔먼 호가 그만 대동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양각도(羊角島) 모래톱에 좌초되고 말했다. 비 때문에 불어났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제너럴셔먼 호가 그만 물이 줄어들면서 모래 위에 멈추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공으로 공격하는 조선병사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제너럴셔먼 호는 불타 버렸고 불을 피해 강으로 뛰어들었던 승무원들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대동강변 모래 위에서 죽음을 맞았다. 토마스 선교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866년9월 2일 토마스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개신교의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가 거름이 되어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 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가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하였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에게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선교사 마펫(한국명: 마포삼열)을 찾았다는 일화는 그의 최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 당했던 평양은 그 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가 되었다.
한편 제너럴셔먼 호의 사건과 관련해서 북경 주재 미국 대리공사는 청국 정부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했으며 중국 지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북 장로교 소속 콜벳 선교사는 황해도 장련에 한 주간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기도 하였다.
그 후 1년이 지난 후에도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으며 이일로 중국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한국) 선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국 연태(필자 주: 지푸)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월리암슨 목사는 토마스 목사의 대동강변 순교 제 1주년에 해당되는 1867년 9월 9일에 고려문(高麗門)을 포함하는 제 2회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그가 동 여행 스케줄에 고려문을 포함시킨 이유는 그곳에서 한국인을 만나 토마스 목사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얻어 보려는 것과 고려문을 통하여 토마스 목사가 기도하던 한국선교 사업의 단서를 얻어 보려는데 있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송을 받고 중국 지푸에서 활동했던 월리암슨 선교사는 이미 소개한바 있지만 영국에서 토마스 선교사 부부와 함께 출발하여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함께 중국선교를 시작했었기에 그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게 강하였다.
그래서 월리암슨 선교사는 한국인이 많이 다니고 있는 남만주 고려문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는 만나는 사람에게 성경책과 전도지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관심을 가졌던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소식은 끝내 확인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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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같은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사진 : 토마스 선교사 부부 / 성결교회역사연구소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됬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땅을 밞아보지도 못한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권 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 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 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2일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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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 | ||
귀츨라프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지 34년 후인 1866년 영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 젊은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崔蘭軒) 선교사였다. 귀츨라프가 로드 암허스트 상선을 타고 입국했던 것처럼, 토마스 역시 미국상선 제너럴셔먼(the General Sherman) 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1년 전에도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도착하여 한국선교를 모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번 입국이 한국과의 첫 인연은 아니었다. 토마스의 조선에 대한 선교적 관심은 이번이 입국을 타진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점에서 앞서 진행된 귀츨라프의 단회적인 선교타진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토마스의 중국 입국과 한국선교 준비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의 라야다(Rhyader, Radnoshire)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B.A.)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4년 후 목사안수를 받은 후 중국에 왔다. 1863년 6월 4일 고향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토마스는 윌리엄 캐리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한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그 해 7월 21일 폴메이스(Polmaise) 호를 타고 중국을 향했다.
토마스가 아내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것은 한창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1863년 12월이었다.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이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은 배우자와의 사별이라고 말한 한 현대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은 토마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써 내려갈 수 없다는 말은 얼마나 그가 아내의 사별로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대변해 주기에 충분하다.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그에게 아내의 죽음은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는 그곳 기후가 자기의 아내한테 맞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한구(漢口)의 기후가 어떤지 살펴보러 갔다가 아내의 비보를 들은 것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 이국 만리타향에서 비보를 접한 23세 젊은이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가지고 이국 만리를 달려 왔던 젊은이의 가슴은 견딜 수 없어 터질 것만 같았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중국에 와있던 현지의 런던 선교회 총무 무어헤드(Wm. Muirhead)와도 의견이 맞지 않아 마찰이 생기자 그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에 가서 청국의 해상세관에서 통역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로 온 토마스를 방관하실 수는 없었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들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윌리엄슨이었다.
1865년 가을, 한국에서 온 목선 한 쌍이 지푸에 나타났는데 그 안에 사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에까지 온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염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메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슨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나 성경지식이 아주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종교적인 형편과 국내 실정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은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추진할 것을 다짐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1865년 9월 4일 조선으로 향하는 배가 있어서 토마스는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엄슨이 전해 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의 소속 선교사로 서해안으로 떠났다.
1865년 9월 13일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1865년] 9월 4일 중국의 목선을 타고 지푸를 떠나 13일에 한국의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 해안에서 우리는 2개월 반 동안 보냈습니다. 나는 여기서 복음의 진리를 한국인에게 전하기에 넉넉한 그 지방 언어를 한국인 천주교인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토마스가 다시 북경에 돌아온 후, 1866년 1월 12일자 자기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곳 한인들은 목이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토마스가 주는 성경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조선이 천주교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강행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당국으로부터 선교의 윤허를 받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당시에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만주 해안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오랜 표류 끝에 이듬해 1월 초에 우장(牛莊)과 산해관(山海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간신히 돌아갔다.
잠시 북경대학 학장 서리로 일하며 한국선교를 물색하던 토마스는 1866년 1월 한국에서 동지사(冬至使) 일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그들이 묵고 있는 예부회동관(禮部會同館)까지 찾아가 한국 사절단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오문환의 토마스 목사 전에 따르면 토마스와 개화파의 거장 박규수(朴珪壽)와의 만남이 이때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다:
맛참 드르매 朝鮮셔 朴珪壽라 하는 이가 冬至使로 들어와서 北京에 寓居한다고 하였다. 이 消息을 들은 도마스 牧使는 急遽히 그를 차져갓다. 가셔 朴珪壽氏를 會見한 後 聖經 一券을 드리면셔 “貴國도 이 冊을 밧아 그대로 實行하면 만흔 福을 밧으리라” 하였다. 여러 가지로 얼마 동안 談話를 交換한 後 마즈막에 付託하는 말이 “내가 다시 朝鮮으로 갈 터이니 萬一 가면 當身은 좀 잘 指導하야 주시오” 하였다. 朴珪壽氏도 所然히 그러케 하기를 許諾한 後 그 밧은 바 聖經을 가지고 朝鮮으로 도라와셔 그것을 金玉均氏의게 주엇고 金玉均씨는 다시 金弘集 氏의게 주엇다 한다.
박규수를 비롯한 동지사 일행과의 만남은 너무도 짧고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이것을 통해 토마스는 한국선교에 대한 전의를 새롭게 다질 수 있었다. 더구나 평양감사 박규수와의 만남은 토마스의 평양행을 더욱 사모하게 만들어 주었다. 1866년 4월 4일자 편지에서 토마스는 북경에 온 동지사 일행 중 한 사람이 토마스 목사의 포켓에 한문으로 된 쪽지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거기에는“어느 외국인이 서해안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마태복음 책 하나를 구득(購得)해 달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여기 어느 외국인은 토마스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렇다면 토마스는 서해안에서 불과 얼마 전에 전했던 자신의 선교사역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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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Thomas) 선교사의 순교가 한국교회의 부흥과 근대사에 미친 영향 |
제 1장 :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866년 9월5일 평양의 대동강 한 가운데 화염에 쌓인 뱃머리에서 한 벽안의 청년이 “야소”, “야소(예수)”외치면서 강변에 운집해 있는 군중들과 군인들을 향해 피를 토하듯 외치고 있었다. 그 외침은 조선인들을 향해 예수의 이름을 선포한 최초의 복음이었다. 그러면 토마스선교사는 어떻게 조선을 알게 되었고, 조선을 향한 불타는 선교의 비젼을 갖게 된 것일까? 또한 그의 평양 대동강의 순교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으며 그 운동이 그 당시 한국(조선)교회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우리 나라 교회사에 마가다락방의 성령임재의 역사요,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놀라운 부흥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한국교회 성장의 원동력과 좌표가 되었다. 내년이면 그 운동의 100주년이 된다. 우리는 지난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100년을 반추해 보면서 나아가서 북한의 교회 재건의 꿈과 통일된 한국교회의 비젼을 갖어야 할 것이다. 본 글에서는 이 같은 평양대부흥의 역사의 배경과 그 원류가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시작과 과정을 어떻게 진행하셨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을 통해 리뷰하면서 이 민족과 교회를 향하신 구속의 역사하심을 짚어 보고자 한다. 1. 바다를 건너온 흰 옷을 입은 조선인과의 만남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9,10) 토마스선교사는 1863년 7월21일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받아 상해에 도착해 사역을 했으나, 그해 그의 아내 캐롤라인의 유산과 그 후유증으로 병사하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아픔을 잊기 위해서도 중국인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전도를 위해 전도 여행과 로방전도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방법에 대해 현지의 사역 책임자와 런던선교회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더 이상 의욕적인 사역을 할 수 없자 소속 선교회를 탈퇴하고, 제도와 사람에게 얽메이지 아니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역지인 즈프(산동성 연대)로 옮겨갔다. 그 지역은 항구 지역으로서 영국.미국의 5명의 선교사들이 이미 사역하고 있었으며, 많은 교역의 상선들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조선 백령도의 상인들도 선박을 이용하여 자주 출입을 하고 있었고 조선반도와는 지리적으로 약 200킬로미터의 근접 거리였다. 토마스는 이미 중국어에 능통하여 그 곳 세관에서 통역원으로 일하면서 주일이면 중국인들을 상대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곳에 상주하는 여러 선교사들 가운데 그와 가장 절친한 선교사요 협력자가 되는 알랙산더 윌리엄슨을 만나게 된다. 그는 스코트랜드 성서공회 소속으로서 선교에 많은 경험이 있었고 토마스에게는 충실한 멘토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윌리엄슨은 그 항구에 은밀히 출입하는 중국인이 아닌 흰 옷을 입은 조선인들과 보게되면서 특별히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어느 날 중국인들의 소개로 그 조선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토마스선교사도 합석하였다. 그가 만나 본 조선인들은 놀랍게도 천주교인이었고 중국인들과는 다른 기질에 각별한 인상을 받았다. 이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서 조선에 천주교의 활동과 조선 천주교인들과 외국인 신부들이 처형된 이야기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토마스선교사와 윌리암슨은 마련된 식사를 하기 전에 조선인에게 식사 감사 기도를 부탁하자 그 조선인은 망설임없이 너무도 간절한 어조로 기도하는 가운데 모두가 왠지 가슴 속에 뜨겁게 느껴지는 감동을 받았다. 그 조선인은 자신이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들과의 대화는 늦은 밤까지 계속 될 정도로 모두가 진지했고 신천지를 보는 듯 조선에 대해 깊이 빠져들어갔다. 윌리암슨은 후일에 조선인들에 대한 소감을 소속 선교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저는 조선이 현재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보다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조선은 큰 역량을 지닌 나라입니다. 조선인들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빈틈히 없으며 영리하고 게다가 단호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두 선교사가 만난 그 조선인은 김자평(金子平, 1789~1868)으로 독실한 천주교도로서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천주교 신부들을 생명을 걸고 안내하는 일에 헌신하였었다. 그는 본래 조선 백령도와 산동성 연대를 오가면서 밀무역을 하는 상인이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1865년 조선 1차전도 여행 때(백령도와 옹진반도 등) 길잡이를 해 주어 조선의 복음전파에 일조를 하게 된다. 그는 훗날 1867년에 셔만호 사건의(1866년) 진상을 조사하러 온 미국인 선교사 코빗(Hunter Corbett)에게 그 사건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후일에 그 일에 관여한 사실이 들어나게 되어 황해 감사에 의해 체포되어 1868년 4월 참수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토마스선교사에게 조선인을 앞서 만나 조선에 대한 상황과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결단을 하게하는 데 김자평을 예비하신 것이었고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길잡이로 만나게 하신 것이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유럽이라는 신천지와 같은 새로운 사역지에 루디아를 앞서 예비하셔서 그 땅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같이 동일하게 역사하신 것이었다. 토마스는 조선인을 만나면서 자신이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의 학장시절 때 독일인 선교사 귀줄라프가가 아시아권을 전도여행을 한후 귀국하여 쓴 책 중에 조선에 관한 부분을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은둔의 나라인 조선 땅은 토마스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새로운 사역의 산지요 언약의 땅처럼 강한 도전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조선을 향한 비젼을 가슴속에 만 담아 둘 수 없었고 그 땅을 향해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토마스는 더 지체 할 수없어 윌리엄슨에게 자신은 조선 전도를 위해 그 곳으로 가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윌리엄슨도 조선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된터라 그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 뿐만아니라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기로 하였다. 조선 전도 여행을 위해 그 다음 날부터 김자평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출항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윌리엄슨도 마치 자신이 가는냥 전폭적인 도움을 주려했다. 두 사람간에는 사역의 사무적인 관계를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토마스는 이미 런던선교회와는 결별한 상태였기 때문에 만일 그 신분으로 조선 사역을 위해 간다면 일반인 신분으로 가게되는 것이었다. 즉 이에 대한 신분 정립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 간에 합의된 것은 이번 조선 전도여행은 스코트랜드 성서공회의 대리인 사역자로 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 최소한의 여행 경비와 한문 성경과 전도지를 제공받은 것이었다. 토마스는 그 동안 세관의 통역 일을 보면서 그에 대한 보수를 받았기에 어느 정도의 돈은 모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윌리암슨이 사례비를 제공하려했으나 완곡히 거절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조선선교를 위해 자비량 사역자가 된 것이다. 2. 조선의 멜리데 섬 백령도를 향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행28:1,2) 1865년 9월4일 토마스는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들뜬 마음으로 자그마한 어선에 김자평과 동료인 조선인과 선주인 중국인 우웬타이(于文泰)와 함께 조선의 섬인 백령도로 출항하였다. 거친 황해를 나흘간 항해 끝에 마침내 백령도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은 백령도 두문진 포구였다. 토마스선교사는 그간 익혀둔 조선말로 전도와 성경책, 전도지를 나누어주었다. 그 섬에서 그와같은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자평과 중국인이 그 지역의 관리와 친분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와같이 그 왼딴 작은 섬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멜리데 섬에 난파된 상태로 상륙하므로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소외된 토인들에게 전해졌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백령도에 복음의 씨가 토마스를 통해 심어지게 한 것이었다. 140여년이 지난 지금 백령도에는 섬주민의 65%가 기독교인이요 교회가 12개나 세워져 있다. 이는 분명 토마스선교사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 사역이 헛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라 볼 수 있다. 토마스는 이제 섬이 아닌 조선 내지에 복음을 전하고 싶은 의욕에 사로잡혀 선주에게 강청하여 약7일이 지난후 황해도 창린도 자라리에 상륙하여 성경과 전도지 등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신변의 위험 때문에 유숙은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조선 실록에서는 그때 토마스선교사가 배포한 증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에 타고 있던 한 영국인이 모래사장에 종이 뭉치 하나를 던지고 남해를 향해 달아났다. 그 종이 뭉치 속에는 종이 한 묶음과 16권의 금서와 서양 달력이 있었다” 토마스선교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내침김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가고자 하여 중국인 선주에게 강청했으나 그가 다른 일정 관계로 불허하자 다른 조선배를 소개받아 높은 선가를 주고 강화도쪽으로 가는 도중 예상치 못한 강풍을 만나 파선되다시피하여 구사 일생으로 생명은 보존할 수 있었다. 의욕이 너무 앞섰던 그는 여러번의 배를 갈아타고 천신만고 끝에 요령성 어느 포구에 당도하였고 선교사들이 있는 신변이 보장되는 북경까지 가야만 했다. 근 4개월만에 모진 고생을 다겪은 후 마침내 북경에 당도하게 되었다. 3. 북경에 온 조선 사신들과의 만남 북경은 런던선교회의 지부가 있는 곳으로 중국선교에 20여년의 경륜이 있는 에드킨스(Joseph Edkins) 선교사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된 토마스선교사를 따듯이 맞이해 주었고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으며, 새로운 사역지에서 중국인 사역에 팀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북경은 주변의 18개국으로부터 많은 사신들이 왕래를 하였으며 조선은 일년에 3차례(새해. 황제의 생일. 황태자 생일) 보내졌었다. 나중에는 동지 시기나 조선의 새 왕이나 왕비가 세워질 때도 왔으며 그 규모는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넘는 대 규모의 사신 행렬도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북경에 주재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는 각국으로부터 입경하는 다양한 사신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거나 기독교를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토마스선교사는 산동성 연대에서 조선인 교제와 백령도까지 진출하여 복음을 전하였기에 조선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로인하여 조선의 사신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을 하였다. 그는 1866년4월4일에 런던선교회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었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조선 사절단이 막 베이징을 출발했습니다. 저는 베이징에 있는 다른 외국인들보다 조선인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약간의 지식은 그들이 숙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조선에는 천주교 선교사가 11명 있으며 수천명의 천주교 개종자들이 있습니다. 작년에 조선에 머무는 동안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사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헌신적이면서도 우리 기독교의 좀더 순수하고도 단순한 믿음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교부는 일본, 조선, 몽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 토마스는 그 사신들에게 전도를 했으며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작년 가을에 백령도와 옹진반도 어느 육지에 던져준 성경이 평양에까지 전해져 그 성경을 읽은적이 있었다는 증언을 듣게 까지 되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사신 가운데 한 명은 성경을 더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의 선교보고서에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박(朴)가라는사람이 며칠전에 제게 말하기를 평양에 배포된 책을 한권 입수하여 정독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조선말로 야소교책이 매우 좋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 조선인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의 기독교 서적을 열정적으로 읽는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4. 조선을 행한 2차 전도 여행 준비와 하나님의 예비하심 북경에서 얼마 동안 조선의 사신들을 접하면서 조선이란 나라와 조선인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선교의 열정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이미 그의 가슴에는 오직 조선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조선은 이미 천주교 신부들과 조선 천주교인들에 대한 무참한 박해가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토마스선교사에게는 그러한 조선의 정세가 두려움을 갖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받고 있는 그 땅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업의 땅으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토마스는 조선을 가기위해 어떻게 가야할지 어느 곳을 목적지로 정해야 할지 모든 것이 미확정 된 상태였다. 그는 일단 최초로 조선인을 만나 본 연대(煙臺)가서 처음부터 다시 준비를 해야했다. 그 곳은 가장 단거리로 조선을 항해 할 수 있는 곳이고, 여행 경비를 스스로 확보할 수 있는 항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의 동료들이 있기에 여러 모로 적합하였다. 조선을 가기위한 분주한 준비는 하였지만 선편이 마땅치 못하였다. 공교롭게도 지난번 자신을 백령도로 데려다주었던 김자평이 연대에 와 있었다. 그 또한 토마스가 원하면 지난번과 같이 기꺼이 함께 가겠다는 호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배는 너무 작은 관계로 항해의 안전성과 많은 성경을 싫고 가기에도 적합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전혀 예상치 못한 미국 국적의 상선이 연대에 입항하였고 신기하게도 그 배는 조선의 교역을 위해 준비를 하던 배였으므로 조선으로 가는데 항해의 안내인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 배에 대해 고려해 볼 필요조차 없었고, 항해 목적지가 한양이 아닌 이북 지방의 평양이라는 것이다. 불과 몇 달전에 평양에서 온 사신을 만난 일과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었다. 그는 작년 백령도에 갔다가 내침김에 한강을 거술러서 한양으로 들어가고자 시도도 한 바 있었는데, 북경에서 만난 평양 관리들을 통해 들어본 평양이라는 지방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한국 교회사에서 토마스 선교사의 평양 대동강 순교의 사건은 평양의 복음화에 지대한 영양을 주었다. 만일 이 배가 평양이 아닌 다른 지방으로 갔다면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또한 놀라운 하나님의 조선을 향한 구원의 섭리였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김자평의 조선 배가 아닌 미국 상선으로 결정되었다는 것도 하나님의 관여하심이었다. 미국적의 셔만호의 사건은(1866년 9월) 조선과 미국과 국교 관계(1882년)를 맺게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고 이로인해 조선반도에 미국의 선교사들이(1884년 9월 의사선교사인 알렌의 입경과 1885년 4월5일 언더우드, 아펜젤로)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만일 토마스가 김자평의 배를 타고 한성으로 향했다면 한반도의 복음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5. 미지의 평양도성과 광야의 외침 조선 평양으로 향하는 출항의 준비는 완료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마치 출전을 앞둔 전사와 같은 심정으로 자신을 파송한 런던선교회에 비장한 각오의 서신을 보냈다. “이번에도 상당히 많은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출발하며, 이 모든 것이 그 곳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 기독교 선교사가 한번 들어갔건 나라에 다시 들어가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지부장 에드킨스와 다른 여러 선교사들의 제안은, 저로 하역금 조선내륙의 선교를 결심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앞으로 굉장히 유익한 방향의 변화를 불러 올 것입니다. 이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의 로마카톨릭의 실수와 순수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우리의 노력을 이사회가 신뢰할 것을 믿습니다. 1866년8월1일. 토마스선교사” 평양을 향한 출항을 앞둔 토마스선교사는 자신이 평양에 가면 북경에서 만났던 사신들과도 재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성경과 교역물자를 실은 제너랄셔만호는 백령도를 첫 도착지로 정하고 황해를 건넜다. 토마스는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고 주민들과 군인들에게도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훗날 백령도의 최익로라는 그 곳 주민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외국인들 중 한명이 유독 친절하여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그가 우리에게 나눠 주었던 음식물들에 대해 잘 몰랐지만, 지금은 그것이 케이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로부터 몇권의 책을 받았는데 후에 조선 군인들의 위협적인 태도에 우리는 그 책을 버리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관리는 외국인이 나눠 주었던 책 모두를 관청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한 후에 그 책들을 다시 옹진해군 관청으로 보냈다.“ 백령도를 떠나 그 근방의 작은 돛섬에서는 공개롭게도 지난 1차 조선항해 때 자신의 배를 직접 몰았던 중국인 우웬타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대동강으로 셔만호가 항해하는데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이로인해 평양을 향한 항해는 매우 순조로왔다. 배가 대동강 입구에 들어서자 우웬타이는 최근의 조선 정세가 매우 험악하다는 점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셔만호 선장과 선주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우웬타이는 그들에게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자신은 더 이상 안내를 하지 않겠다며 도중에 하선했다. 제너럴셔만호는 거침없이 평양을 향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대동강변의 주민들과 관가의 관리들은 난생 처음보는 거대한 배의 모습과 서양사람들이 기이하기도 하였으며 그 위세에 위협을 느꼈다. 1866년 8월17일 대동강 급수문에 도착했으며, 이에 조선 정부는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평양관가의 문정관(問情官)을 파견하여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며 조선은 외국과 통상을 할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설득하였다. 그러나 셔만호는 평양행을 고집하며 자신들이 필요로하는 음식물을 강력히 요구하기까지했다. 문정관은 외국에서 온 그들을 예의를 갖추며 선대하여 쌀과 쇠고기 30파운드, 계란260개, 야채20꾸러미, 장작20더미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대동강 변에 사는 일반 백성들은 이 기이한 외양선을 구경하러 몰려들기 시작했다. 토마스선교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은 배를 내려서 강가에 나와 아무 적의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는 백성들에게 성경책과 기독교 책자를 온 힘을 다해 나누어주었다. 훗날 기독교인이 된 박민우라는 청년도 성경을 받아보았고 토마스선교사가 어눌한 발음으로 조선어로 전도하는 것을 흥미롭게 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8월20일에는 대동강 나루터 장사포에 도착했는데 그날 마침 근처에서 장이 열려 수천명이 이 배를 구경하러 왔다. 시장에 나와있던 홍신길(洪信吉)이라는 소년은 외국에서 배가왔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친구 2명과 함께 배를 저어 그 외국배에 구경가자고 제의하여 마침내 토마스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그의 방으로 안내되어 성경책자을 선물로 받았고 감자라는 기이한 음식물을 먹어보기도했다. 그 소년들 가운데 배자근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서당선생인 할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게 성경책을 보여드렸으나 할아버지가 심하게 꾸짖자 대동강에 내다버렸다. 그날 밤 쑥개마을에서 9명의 조선청년들이 성경을 나누어준 모습을 본 토마스를 만나기 위해 밤에 은밀히 찾아왔다. 그들의 이름은 장인국, 장용국, 표영보, 지달수, 지달체, 지택구, 지택붕, 지택주, 지달해였다. 그 중 장용국만 제외하고는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지달해(池達海) 청년은 1864년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 다불뤼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후 그 마을에 있는 친척들에게 천주교리를 전하고 그들 모두가 천주교인이 되도록한 인물이었다. 평양의 지달해를 비롯한 천주교 청년들은 셔만호가 프랑수함대가 천주교박해 사건을 수습하러온 배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날마다 대동강가에 나가 자신들을 구원해주러 올 프랑스 배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 평양의 천주교인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있었으며 셔만호가 나타나자 그들은 평양일대의 천주교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그배의 일행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은 셔만호의 갑판에서 토마스선교사를 만났다. 그들은 토마스 선교사를 추호의 의심도 없이 프랑스신부로 확신하고 벅찬 마음으로 대면했다. 그들은 서툰 중국말로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처한 위급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토마스선교사가 조선말로 자신은 프랑스 천주교 신부가 아닌 개신교 영국선교사라고 설명을 했지만 그 청년들은 그 내용을 이해하질 못했다. 토마스선교사의 마음도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그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못함을 안탑깝게 생각하면서 그들을 힘써 위로하려 애썼다. 토마스는 그들에게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을 주면서 빅토리아여왕의 초상이 새겨진 은화도 선사하였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은화의 여왕 형상을 성모마리아의 형상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훗날(1867년1월22일) 그 셔만호의 사건이 종결된 다음 지달해와 지달수 두 형제는 그 배에서 외국인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평양의 보통문밖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1866년8월17일 셔만호는 평양 상류로 더 항해를 하여 석호정으로 이동하였고 이배에 대한 소문이 평양 도성에까지 전해지면서 평양 주민들은 긴장과 호기심을 갖고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전도에 힘을 쏟았다. 성경책과 기독교서적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그 때 기독교 서적을 받은 평양인들 가운데 김영섭은 진리역지라는 책을 선물받고 남몰래 읽은 후 마침내 기독교인이 되었고 아들 김종권, 조카 김성집에게도 그 진리를 가르쳤고 후에 그 두 사람은 평양의 어느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8월22일 셔만호는 만경대 근처의 작은섬 두루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는 이곳에서도 약 100여권의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하에 있던 때였기에 평양도성은 이 외국 배의 갑작스런 출현에 첨예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평양 감사인 박규수는 셔만호의 평양 진입에 대해 몇차례의 만류와 경고를 하였으나 그 배는 막무가내식으로 만경대까지 올라왔다. 박규수 감사는 셔만호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시켰다. 배가 대동강에 들어온 때는 늦장마가 시작되면서 강 수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만경대까지 올라 올 수 있었다. 6. 평양 대동강에 부어진 순교의 잔 1866년 9월4일 그믐이었기에 달 빛도 없는 어두운 밤 셔만호는 물이 빠져나간 강의 진흙바닥에 좌초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쑥섬에 갇히게 되었다. 이같이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자 박규수 평양감사는 그 다음 날 9월5일에 유황을 뿌린 잡목들을 실은 거룻배에 불을 붙여 셔만호를 향하여 떠내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불붙은 작은 배들이 토마스가 승선해 있는 그 배에 닫자 마자 이내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규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군인들로 하여금 화살과 총포를 총동원하여 거대한 외양선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렸다. 제너럴셔만호가 볏집처럼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모든 승무원들은 목숨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흥분된 조선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토마스선교사는 훨훨타오르는 극한 상황에도 대동강변에 나와있는 평양백성들을 향하여 힘써 외치고 있었다. “야소” “야소”.... . 화마처럼 자신을 향해 타오르는 불길도 조선백성들을 향한 토마스선교사의 복음의 열정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한권의 성경이라도 조선백성들의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있는 것은 배에서 뛰어 내려 자신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성경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토마스 자신도 그의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리는 순간이 왔다는 것을 느꼈기에 더 이상 주점함이나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한권의 성경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 내리었다. 대동강 쑥섬에 기어올라 온 토마스는 조선군인에게 잡혔고 자신 앞에 서있는 조선 병사에게 예수를 믿으라면서 가슴에 품고 있었던 한 권의 성경을 그에 주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뿌리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칼로 토마스선교사의 가슴을 찔렀다. 힘없이 쓰러진 그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피는 모래밭을 적시고 대동강 물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선교사가 바로 한국 교회사에 최초의 순교한 선교사였다. 그이 나이 27세. 조선 땅에 최초로 들어와 복음을 전한 그는 토마스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였다. 7. 순교의 가해자 박춘권의 회심과 널다리골 교회 셔만호의 격침에 누구보다도 많은 공로를 세우며 토마스선교사의 가슴에 칼을 겨눈 혈기 등등한 한 평양의 병사가 있었다. 한국교회사 100년에 토마스를 순교시킨 인물로 또 평양의 최초의 교회이며 장대현 교회의 전신인 안주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 박춘권(朴春權)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조선말기 평양 중군 이현익휘하의 관군으로 6척장신의 기골에 용맹한 군인이었다. 셔만호에 대한 화공에 직접 관여하여 누구보다도 혁혁한 공을 세워 오위장이라는 관직을 얻었으며 구전된 이야기에는 그가 토마스선교사를 직접 살해했고 토마스가 전해준 그 성경책을 집으로 가져가 보관했고 훗날 성경을 보면서 회심하였다고 한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30년이 지난 후에는 Samuel A. Moffet선교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그를 찾아와 주님을 영접하고 널다리골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마치 사도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의 초대 성도들을 핍박하고 빌립집사가 순교 당할 때에 이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혈기 왕성한 인물이 후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가장 열정적인 복음의 사도가 된 사실과 너무도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칠 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테판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무릎을 끓고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7:58~8:1) 1918년부터 평양의 총회는 토마스의 전도행전과 순교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를 직접 만나보거나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을 200여명을 찾아내어 증언한 자료가 1928년 오문환 장로에 의해 <토마스 목사전>을 출간 하였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황명대는 친히 목격하였던 이 광경을 오문환장로에게 증언하였다. 증언할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평양 부근 장로교회의 신자였다. 이 대동군 대동면 조왕리 교회는 1932년 토마스목사 기념 교회로 선정되었다. 토마스선교사가 순교할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대동강변에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선교사가 뿌린 성경3권을 얻어 집으로 가져왔고, 그때 20세였던 여인 이신행도 성경 한권을 얻었고 훗날 그녀는 평양에서 최초의 여성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교인이 되어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1866년 9월 4일 제너럴 셔만호의 사건이 종결된 후 박규수 평양 감사는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뿌려진 수백권의 성경과 전도 책자의 소지자에 대한 체포령과 회수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버렸다. 이 때 버려진 성경을 수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양 대동문 안의 영문주사의 관직자였던 박영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거둬드린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하였다. 후에 박영식의 집을 토마스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갖고 있었던 평양의 최치량이 구입하여 여관으로 사용하므로 이 여관에 머무는 여행객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자신도 모르게 접하게 되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인 것이다. 1893년 마팻선교사는 평양에 선교부를 두기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바로 이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집 주인인 최치량이 기독교인이 되어 그 여관이 나중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최치량은 그 교회의 개척 멤버였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이 재현되는 것 같은 일화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이 2차 빌립보성으로 전도 여행시에 루디아의 집에 유하므로 그 집안이 구원받고 그 처소가 빕립보의 가정교회가 되었던 사실과 동일한 역사이기도 하다. 마팟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본부를 두기 위해 방문한 사실도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와 유관한 것이며, 그가 평양을 방문할 당시에 이미 토마스에 의해 뿌려진 성경으로 인해 자생적인 기독교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팟선교사가 평양도성 대동문안에 교회를 개척할 때 토마스선교사에게 얻은 성경책을 들고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토마스선교사에 의해 평양에 뿌려진 성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에 복음의 새 순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이며, 마팻 선교사는 그 증거를 확인한 것이었다. 이같이 토마스선교사가 죽는 순간까지 힘써 성경을 뿌린 것이 평양 초대 교회의 태신자들을 탄생시켰으며 평양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춘권영수가 섬긴 평양 널다리골교회는 1894년 마팻선교사가 그 동네의 29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림으로 개척된 것이다. 이 널다리골 교회는 후에 크게 부흥이 되어 1903년에 72칸짜리 큰 예배당으로 건축하면서 교회 이름을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다. 이 장대현 교회는 평양의 장자교회 역할을 했으며, 한국교회 부흥의 전환점을 가져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바로 이 교회였다. 이는 토마스선교사의 평양에서의 한알의 밀알이 된 순교가 장대현교회의 탄생과 그 교회를 통해 발원된 부흥운동을 잉태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8.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와 평양 대부흥운동 전술한바와 같이 장대현교회는 한국교회 부흥의 진원지였으며 이북 지역의 모교회 역할을 하였다. 이 교회는 평양에서 제일먼저 세워진 교회라는 뜻으로 평양제일교회라고도 했고 평양중심에 있는 교회라는 뜻으로 중앙교회라고도 불렀다. 장대현 교회가 태동된 시점을 다시 정리하면 1866년 9월 토마스 선교사에게 3권의 성경을 얻었던 최치량은 성경으로 도배된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고, 1893년 마펫선교사가 평양에 왔을 때 유숙했던 여관에서 마펫선교사와 주인인 최치량과 그 동네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그 이후 널다리골로 이전하여 예배를 드렸으며 그 당시 박춘권이가 토마스선교사로부터 받은 성경을 보면서 회심하였고 그가 이 널다리골 교회에 다녔고 후에 그 교회 영수가 된것이다. 그후 지속적인 교회 성장을 거듭하면서 1903년 평양 중앙의 장대현이라는 곳으로 이전하여 73칸짜리 조선고유의 건축 양식으로 봉헌한 교회가 그 지명을 쫓아 장대현교회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다. 그 해에 평양 남문밖이라는 곳에 교회를 분립시켜 “남문밖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교회를 평양 제2교회라고도 불렀다. 1905년에는 다시 창동교회를 분화하여 개척했고, 이 창동교회는 이어서 1907년에 “능라리교회”를 다시 개척시켰다. 1911년 연화동교회를 다시 분립하여 개척하므로 평양에서 장자교회의 역할을 명실공히 감당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음란과 강포함으로 가득찬 이 죄악의 평양 도성을 거룩한 도성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 이같은 구원의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진행하신 것이었다. 평양에는 기생과 술집이 많았으며 기생학교까지 있을 정도였다. 뿐만아니라 싸움꾼들도 많아 그 당시 선교사들이 신변의 위험을 늘 경계해야 했다. 이들이 행하는 폭력은 주로 돌팔매질과 박치기였다. 평양에 사역을 하던 미국의 선교사들 가운데 이들에게 많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김익두, 이기풍은 혈기 왕성한 때에 거리에서 전도하는 선교사들에게 돌팔메질을 하여 머리와 얼굴이 상하게 하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은 미신을 많이 숭배하여 무당 등 무술인들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또한 평양감사등 관리들의 횡포는 매우 심하여 선교사들이 집을 사는 것도 금지하여 마펫선교사는 한석진의 이름으로 구입하였으나, 집주인에게 압력을 주어 결국 무산시키기도 했고, 평양에 최초로 병원을 세운 윌리암 제임스 홀(Willam James Hall)은 물을 길어다 주는 하인을 관가에서 불러다 매질을 하여 물도 못 사용하게 할 정도로 매우 강팍하였었다. 평양에서 사역하던 어떤 선교사는 미국 선교본부에 평양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성” 같았다고 보고한 바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타락한 도성을 복음으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토마스선교사를 그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시었고, 선교사들을 돌짝밭과 같은 그 도성에 집중적으로 보내시어 교회와 평양신학교와 홀병원 등 다양한 선교사역을 통해 그 땅을 새롭게 갈아 엎으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1907년에 평양 대부흥운동을 일으키시고 진행하셨는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대부흥운동의 불씨는 이미 1903년 원산에서 의사인 하디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함으로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확산되면서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그후 1906년 9월 서울에서 뉴욕에서 온 죤스톤박사가 선교사 연합사경회에서 인도 카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소개하면서 그곳에서 8천5백명이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주었다. 이때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존스톤으로부터 인도 부흥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가졌던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와 같은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이 땅에도 임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20여명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인도에서의 부흥운동이 평양에서도 일어나게 될 것을 믿고 정오기도회를 가졌다. 죤스톤은 서울선교사 사경회를 마친후 평양을 방문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인도했다. 이 날 그는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인도교회에서 번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말하면서 “조선에서 누가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인 이반로버츠처럼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겠느냐? 이 자리에 있는 사람가운데 손을 들고 일어나시요!”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모든 회중은 잠잠하였다. 그런데 당시 평양신학교 학생이자 수석 장로로 장대현교회에서 봉사하던 조사인 길선주(吉善宙)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손을 들고 일어섰다. 이 것을 본 죤스톤박사는 장차 조선교회에 큰 부흥운동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고, 길선주조사와 장대현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약 한 시간에 걸친 이 예배로 인해 모든 성도들은 은혜가 넘쳤고 장대현교회를 비롯한 평양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조짐을 내비치게 되었다.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그러한 기도회를 4개월이나 교파를 초월해서 오직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 길선주조사(전도사)는 죤스톤목사의 집회에서 큰 은혜를 체험한 후, 1906년 12월 16일부터 22일까지 황해도 재령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이 집회를 통해 김익두 등 수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강한 임재와 역사하심을 통해 심령이 뒤집어지고 통회 자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길선주를 뒤이을 사역자인 위대한 부흥사인 김익두를 준비해두시었다. 길선주 조사는 교회의 성령의 역사하심에 이끌림을 받아 평양에서도 계속 사경회를 그해 12월26일부터 31일까지 인도했고 그 성회를 통해 수다한 성도들이 회심하고 자신들이 지운 수치스럽고 때로는 말로할 수없는 무서운 죄를 회중 앞에서 토로하기까지했다. 심지어는 죄를 고백하는 죄인들을 잡으러 그 집회에 잠복하여 참석했던 경찰관이 불덩이를 받은 사람처럼 꼬구라지면서 “선생님!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호소하자 길선주는 그를 위해 설교를 중단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그뿐아니라 승려까지도 그 집회에 참여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9. 평양의 오순절 성령 강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 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행2:1~4) 1907년 1월2일부터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원근각처에서 은혜를 받기위해 약1천5백명의 성도들이 참여했다. 집회는 13일째 매일 진행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성도들의 반응은 냉냉하기만 했고 아무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집회에 참여했던 고포드선교사는 그 때의 분위기를 이같이 기록해놓았다. “천정은 놋으로 덮인듯 기도는 상달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의 역사를 두고 선교사들은 마치 사탄이 회중을 압도하는 것과 같았다고 증언하였다. 14일, 집회 종료를 하루 앞둔 날, 선교사들은 정오 기도회를 가지면서 하나님께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대로 사경회가 끝난다면 그들이 그토록 사모했던 영적 부흥운동을 경험하지 못하고 끝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날 집회는 처음부터 전날과는 완연히 달랐다. 어는 선교사가 기록한대로 “하나님께서 그날 성령을 한국교회 위에 어마 어마하게 쏟아 부어주셨다. 이 날 집회에 길선주장로의 설교가 끝나자 영적인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집회에 성령의 불길을 당긴 것은 그의 수치스러운 사건을 회중앞에 숨김없이 회개한 기도였다. 그는 1년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가 죽기 전 아내 대신 재산을 정리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돈을 사취한 바가 있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친구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선주장로의 담대한 고백은 그곳에 모인 회중들의 상한 심령을 주님께로 향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고포드의 증언을 빌린다면 길선주의 회개가 있은후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방해의 방벽은 별안간 무너져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해 주셨습니다.” 사회를 보던 이교회의 담임목사인 그레함 리(Graham Lee)선교사(한국명은 이길함으로 사무엘 마팟선교사에 이은 두 번째 장대현교회 목사였다)는 다음과 같이 회중에게 당부하였다. “여러분 기도하시기를 원하시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요”라고 통성 기도를 요청하였다. 이 기도가 한국교회의 통성기도의 출발이 된것이다. 온 회중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통회의 기도를 저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토로하기 시작했다. 마치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같이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집회에 참석한 어느 선교사는 조선인들의 기도 소리가 마치 하늘 보좌를 향해 포효하는 것 같았다고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함리목사는 집회의 모든 순서를 마친후 기도를 더 원하는 사람들은 남아 계속 기도하도록 광고를 했다. 천오백명중 남은사람들은 약 6백명이 남아 밤이맞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통회의 기도가 평양도성의 밤을 진동시켰다. 그중에 약 20여명의 남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이러한 죄의 고백이 모두의 고백이기에 함께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러한 기도를 어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죠지메큔선교사는 이 기도의 모습을 보고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어 이 날의 집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전하였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인 1월15일 화요일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인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주셨다. 이날 집회는 전날과 같았지만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훨씬 강력하였다. 이 날의 역사에 대해 그 현장에 있었던 스왈론선교사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그 날 장로들 그리고 선교사들 사이에 큰 죄악들이 드러났는데, 모두가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제까지 자신이 범한 그 극악한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없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힘에 압도된 것처럼 건장하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견딜 수없을 만큼 통회하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마지막 심판을 보는 것처럼, 너무도 무시무시했습니다. 다만 나는 그날 밤의 장면을 설명하기에 더 이상 어떤 단어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경회 마지막 날 성령의 역사가 전날보다 더 강하게 임하였다. 이날 역시 그 포문을 연 사람은 길선주 장로였다. 그 날 길선주장로가 설교를 할 때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 장로는 설교하는 길선주의 얼굴이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 다음 날 길선주는 외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처음부터 그것은 길선주의 얼굴이 아니었다. 한 때 장님이었다가 아직도 장님인 길선주 그러나 여기서 그의 얼굴은 대단한 위엄과 능력의 얼굴,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고백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 날 밤늦도록 행해진 회개 기도에서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했다. 어느 여인은 자신의 아기를 청일전쟁 때 죽인 일, 선교사들의 돈을 사취한 사람들까지도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돈을 돌려 준 일, 매켄지 선교사를 돕는 한 소년은 4달러를 속인 것을 토로하고 60리길을 달려가 용서를 구하고 돌려준 일, 남편과 아내몰래 음행한 것까지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일 등, 온갖 죄악의 찌꺼기들을 다 쏟아냈다. 그 집회는 죄악을 씻어내고 성결함을 얻는 거룩한 성회였다. 거듭남의 시간이었다. 불레어선교사는 그 모습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내가 결코 전에 보지 못했던, 또 하나님께서 만약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은 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와 같은 집회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악이 공개적으로 그 날 밤 고백되었다. 감정으로 인해 창백해지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심신이 괴로운 가운데 백보좌앞에서 서있는 죄악된 심령들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고 있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 10. 거듭난 도성 동양의 예루살렘 1907년 1월14일,15일 양 이틀간에 놀랍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네 곳에 분산되어 예배를 드렸던 여자 성도들의 1월19일 토요일 집회 때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21일 22일에는 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그 일 후 장대현교회는 날마다 연이어 신도들이 모여 들었으며 정결케 하시는 영이 언제나 그 성전에 계셔서 그곳에 모인 심령들을 깨끗케하셨다. 그 성령의 불길은 이윽고 평양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평양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였던 남산현교회 담임목사가 변화를 받은것이다. 처음 부흥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그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후 시각이 완전히 변해 부흥운동의 적극적인 옹호자로 바뀌었다. 성령의 역사가 그 교회에도 동일하게 재현된 것이다. 그 부흥의 불길이 평양전역으로 확산되어 각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교회뿐만아니라 미션스클 교육계에도 그 영향을 주었다. 평양시내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여 체풀 시간에 학생들이 성경을 읽을 후 기도를 시작하자 한 여학생이 일어나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보고 스눅 여선교사가 놀랬다. 이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다른 학생들도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신비하게도 오전 전체를 기도와 죄의 고백으로 시간을 보냈다. 평양의 교회마다 1월이 다 가기 전에 영적대각성운동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 시작했다. 이길함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감리교회도 마찬가지로 은혜와 축복을 공유했고, 평양 기독교인들은 조선 전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교사, 한국인, 장로교인, 감리교인, 남학생, 여학생, 선생, 교회직분자들, 모든 계층과 신분의 남녀논소 불문하고 합심하여 한 사람같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 완전히 조직되어 그들이 평양 시내와 조선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평양의 감리교 선교사인 노불도 이러한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을 보고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조선교회에 나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매 집회에 주님의 권능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도 임했습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사함이나 아직 회심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탄식하며 자신들의 집에서도 온 밤을 지새웠습니다. ....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도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많은 악기에서 나는 화음보다 더 조화를 이루는 수 백명의 기도 소리의 중얼거림으로 가득찼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임했던 회개의 영이 미션스클인 숭실대학에도 임하였다. 수업중에 가진 기도회에서 성령님이 임재하시어 그 교실은 통회의 외침과 흐느낌으로 가득차 학생들은 자신들의 죄의식으로 가득차 전율을 느꼈다. 먼저 육체적으로 비통해하며 손과 머리로 바닥을 치며 통회하였고, 마치 군대마귀가 그를 찢듯이 울부짖었고, 정결치 못한 삶에 대한 뉘우침으로 흐느끼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였다. 이러한 영적 각성이 있은 후 학생들의 생활에 변화가 나타났고 수업태도가 달라지고 경건의 생활로 이어졌다. 그들은 중보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복음 전도에 뛰어들었다. 전 학생들의 3분지 2의 학생들이 방과후 매일 교실과 기도실에서 기도하였다. 평양신학교에도 강한 성령의 역사가 반복되어 일어났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4월6일부터 9일까지 다시 성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의 산실 역활을 하였던 평양신학교에도 성령의 운행이 강하게 나타나 모든 신학생들이 다시금 성령의 도가니에 변화되었다. 이처럼 1907년 겨울에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어 평양시내 남녀 노소가 은혜를 체험하였다. 조선 땅에서 가장 희망없던 장망성 같았던 평양 도성이 이같이 끊임없는 기도와 찬송과 말씀 선포로 거룩한 도성으로, 정결한 백성으로 변화된 것이다. 11. 전국으로 퍼진 평양 장대현교회의 불길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처음 발흥해 교파를 초월해 평양 시내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된 성령의 강한 불길은 곧 평양에서 가까운 선천, 해주, 재령, 개성으로 확대되었고 이어서 서울로 점화되었으며, 그동안 냉랭했던 대구에서도 나타났고, 강화, 제물포에서, 공주에서 그리고 전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평양에서 가까운 선천, 해주, 영변, 재령 지역은 가장 먼저 평양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그 놀라운 부흥운동 그 현장에 있던 월리엄 헌트가 맡고 있는 황해도 재령은 가장 민감하게 그 영향을 받았던 곳이다. 장대현교회의 목사인 그레험 리선교사는 재령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이 지역의 교회가 몇 개월 동안 기도해왔던 바대로 하나님의 권능이 놀랍게 현시되었다. 선천과 의주가 함께 사경회를 열었을 때 그곳에 성령의 권능과 회개의 역사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 지역 교회들은 죄의 고백으로 순결해졌고, 도둑맞은 돈들이 되돌아 왔다. 이러한 부흥의 역사는 이남 지역의 송도, 강화, 제물포에서도 나타났다. 공주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케이불선교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나는 방금 사경회를 끝냈는데 공주에서는 가장 놀라운 집회었습니다. 그곳에는 약 200명이 참석했습니다. 부흥회는 내가 지금까지 인도했던 어떤 것을 훨씬 능가하는 집회였다. 죄의 확신과 고백이 무언가 무시무시할 정도였습니다. 몇칠을 남녀가 울부짖고 자신들의 손과 머리로 바닥을 치고 무섭게 자신들의 죄악을 통회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심판 날과 같았습니다. 그런 후 죄 용서와 평안과 기쁨이 그들의 심령에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곧 한반도 전체의 성령 행전이었다.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가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온 유대로 확산된 것처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온 평양도성과 그 주변 지방으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놀랍게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12. 부흥의 불길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 대륙으로 1907년의 평양의 성령의 불길은 그 위세를 더하면서 마침내 압록강을 넘어 만주와 중국 중원과 남방과 내지까지 휘몰아 갔다. 제임스 게일선교사가 언급한 것처럼 “만주 지역에서도 한반도에서 일고 있는 대부흥운동 소식을 듣었고 만주 중국인 교회도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중국인 사역자 호만선(胡萬成), 장석정(長碩禎)은 1907년 평양에 입국하여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였다. 이들은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예배의 모습만 보고도 성령의 은혜를 받아 자기 나라에 돌아가 자신들이 맡고 있는 교회에 이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었다. 그 부흥의 소식을 들은 중국 성도들은 자신들에게도 부흥이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곳에도 성령의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났고 체험하였다.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조나단 고포드가가 평양대부흥운동이 한창일 때 조선에서의 부흥 운동의 현장들을 곳곳에서 목격하였고,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교회에 그 놀라운 역사들을 전해주었다. 1909년에만 28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부흥 집회를 인도했고, 특히 중국의 유명한 고도요, 중요 선교지인 남경에서는 1,200명을 수용하는 천막에서 1,500명이 운집하여 집회가 열렸다. 브라운선교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보통 무감각한 중국인들은 성령의 뚜렸한 임재 앞에 완전히 무너졌으며, 초기의 개척 선교사들이 있었다면 거의 믿지 못했을 놀라운 장면들이 목격되었다. 산서성(山西省)에서는 통회와 기도의 물결이 회중들을 압도했으며 마치 오순절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자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한 중국인은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 평양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이 어느 선교사에게 큰 액수의 돈을 보냈는데 그 선교사가 후에 죽었다. 그 돈은 안전을 위해 어느 중국 신자의 뜰에 감추어두었는데 그 가 그 돈을 꺼내 사용했던 일을 진심으로 회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령의 회심의 역사는 중국 남방 연안지역인 복건성(福建省) 힝화에도 회개가 동반된 각성운동이 일어나 이 집회에 참여한 어느 중국인 마약장사는 창고에 보관했던 아편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목사가 불태워버리도록 하는 일도 있었다. 산동성 연대(煙臺)에서도 동일한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있었다. 헌터 코르벳(Hunter Corbett)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후에 목사들은 수십 곳에서 먼저는 자기들의 마음에서 부흥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기도는 응답받았다. 어느 목사는 자기 교회의 부흥에 대해서 쓰기를, 기도하는 목소리와 통회하는 고백의 울부짖음이 뒤범벅이 되었다고 증언했다. 100여명의 남녀가 울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 그 이전에 50일동안 계속되었던 하루 두차례의 모임이 그 많은 참석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도록 준비시켰다. 토요일 저녁에 수를 세어보니 4,800명이 있었다. 주일 저녘에는 6,000~7,000명이 모이는 집회가 네 곳에서 동시에 열렸다. 다른 선교구에서는 나흘 동안 주님을 대망하는 백여 차례의 집회가 있고 나서 부흥이 일어났다. ” 중국교회사에 있어서 이 때만큼 복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시대도 없었다. 중국 대륙에서도 이같은 놀라운 성령의 부흥 바람이 특정 지역만이 아닌 도시와 농촌에까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교회로 몰려든 적이 없었다. 1908년과 1909년 사이에 부흥운동은 중국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1909년 4월 산동기독대학교 문과대학에서 부흥이 일어났고, 그 대학을 졸업한 딩리메이(丁立美) 목사가 그해 5월 30일 특별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그 현장에 있던 많은 이들이 예전에 전혀 알지 못하는 성령의 친밀한 임재를 의식하였다. 이 집회를 통해 무려 116명의 청년들이 자신들의 생애를 온전히 주의 종으로 헌신하겠다고 결신하였다 이같은 현상이 산동성과 복건성, 산서성, 협서성, 호남성, 절강성 등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들보다 현지 중국인 설교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부흥을 일으키셨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하였고, 교회의 영적 삶이 풍요로워졌다. 이같은 놀라운 부흥과 회심의 역사를 목도한 미국과 카나다의 28개 선교부에 소속된 선교사와 선교부 관계자 75명은 “우리가 오랜동안 노력을 하면서 기도해 왔던 시간이 우리 믿음을 능가하는 규모와 추진력을 동반하고 드디어 찾아 온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이어서 “중국의 변화야 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 가운데 하나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케넷 라토렛(Kenneth S. Latourett)의 지적대로 만주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평양 대부흥운동과의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압록강을 넘어 이어진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만주의 중심지인 봉천(심양)에 재 점화되었고 그후 부흥의 역사가 요원의 불길처럼 중국 대륙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이라는 지극히 작은 반도 국가요, 그 가운데서도 가장 타락한 도성인 평양에 성령의 불이 임하여 한반도와 나아가서 중국 대륙을 진동시킨 발원지는 평양 장대현교회였다. 이는 지극히 작은 민족을 통해 20세기에 새로운 택함 받은 거룩한 민족으로 택하셨고 사용하셨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었다. 13. 평양 대부흥운동의 결실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인해 그 당시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미친 그 영향과 결실은 참으로 지대했다. 이는 그 시대뿐만 아니라 10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교회와 신앙의 정체성의 확립과 근간을 유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운동으로 인한 그 결실은 다음과 같다. 1) 기독교 윤리의 형성과 정립 평양 대부흥운동의 핵심은 철저한 회개와 죄성의 각성이었다. 그 당시의 한반도 전역에 몰아친 변화의 바람은 성경에 입각한 죄의식의 각성과 기독교 윤리의식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각 교회에서 나타난 자신들의 죄의 자복과 회개로 그들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깊이 있는 죄의식은 변화된 행동으로 입증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기준과 원리를 세우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있던 뮤어선교사는 부흥운동의 중요한 열매의 하나로 새로운 윤리 의식의 형성을 꼽고 있다. 이는 가장 바람직한 변화였다. 그 땅에 복음이 들어와 교회가 세워지고 신앙인들이 형성되었지만 그들의 신앙과 윤리의식의 수준은 걸음마 단계였다. 초급 수준의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성장을 위해 무엇보다도 전도에 힘을 썼다. 그 때의 교회 행사중 사경회는 매우 중요했고 이로 인한 개인의 신앙의 성장과 교회의 성장에 견인 역활을 했었다. 참고로 그 당시의 사경회의 일정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에는 한 시간 기도회를 하고 두시간 이상 성경을 공부한 후 다시 한 시간 동안 거리로 나가 축호 전도를 한다. 저녘에는 전도 집회를 연다. 오후에는 생활상에 필요한 주제를 정하여 공개 토론회를 열어 생활에 대한 도덕적 입장을 정립하도록 했다. 이로인해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새로운 윤리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 사경회에 나타난 죄목은 대부분 살인, 절도, 간음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죄로 분류되는 보편적인 것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는 흡연, 축첩, 노비, 제사, 주술 같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죄목에 들지도 않았던 행위들도 포함됐다. 주로 유교나 불교, 민간 토속신앙에 근거를 두고 이어져 내려온 생활 습관들이 이제는 기독교 신앙 원리와 기준에 비춰 볼 때 죄악이었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되기 시작했고 죄의식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행위들이 죄목으로 나열됐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유교 및 전통 종교 윤리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형성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윤리의 종교적 근거로 기독교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기독교적 윤리가 일반 사회에서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초기 부흥운동은 한국 교인들의 회개 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한국의 근대사회 윤리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한국교회의 자립 구축 한국 기독교사의 시작은 민족의 고난과 외침의 수난과 함께 태동되었고, 그러한 역사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발아되었다. 선교사들도 그들의 신앙 노선과 상관없이 민족 문제에 간여할 수 밖에 없었다.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민족적 아픔을 외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1900년대를 전후로 일어난 청.일.러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1905년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군대 해산과 고종의 퇴위라는 격랑의 세월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가 민족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한국인들의 바람은 점차 커져갔다. 말하자면 선교사들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 경제적인 피난처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더많아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을 민족적 성향으로부터 전환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1907년의 평양대흥운동을 본격적인 대각성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1907년 이전의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내세 중심적인 신앙운동이었다면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에는 “조선기독교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길선주목사가 있었다. 이 운동으로 인해 조선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대부흥운동은 한반도의 지경을 넘어 중국 대륙에 점화되어 중국으로부터 받은 기독교를 30년만에 돌려주는 역사로 이어진 것이다. 1907년은 여러 모로 한국교회의 원년이 되는 역사가 많다. 첫째로, 1907년 9월17일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목사7명에 대한 장립이 되므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한국교회가 본토 조선인 목사에 의한 교회가 운영되고 치리되게 된 것이다. 한석진, 방기창, 서경조, 길선주, 이기풍 등 7명이 한국교회의 최초의 목사가 탄생된 것이다. 장대현교회의 초대목사는 샤뮤엘 마펫(한국명 마삼열)이었고 2대 목사가 그렘함리, 삼대 목사가 바로 그 교회 장로출신인 길선주목사였다. 9월17일 이 날은 가히 한국교회가 자주적으로 탄생되는 기념비적인 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립노회가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명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로회”였다. 당시 교세가 노회 수준이었기 때문에 독립된 노회라는 의미에서 독노회라 불리게 된 것이다. 조선인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이 장대현교회에서 함께 모여 이러한 거사를 행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조선장로회 신조”를 택하므로 교회의 독립성과 그 정체성을 선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이 날부터 피선교지가 아닌 자국인화 된 교회라는 것을 선포한 의미가 주어진 날이인 것이다. 3) 선교하는 교회로 거듭나다. 그해 독로회는 목사 안수받은 7명목사 가운데 한명인 이기풍목사를 제 1호 해외 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하였고, 1908년에는 일본 도꾜에 한석진목사를, 1909년에는 최관홀목사를 러시아 불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선교사로, 1910년에는 만주 북간도에 김영재목사를,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결성되어 유교의 본산지인 중국 공자의 고향 산동성에 김영훈 등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므로, 조선교회는 명실공히 세계를 향해 선교하는 교회로 거듭난 것이고 장성한 모습을 온 세상에 선포한 것이다. 이같이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은지 20여년만에 자립과 선교하는 교회로 급성장을 거듭한 것이다. 이는 세계 선교 역사에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그 외에도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1905년부터 새벽 기도회, 1907년에 통성기도 등 기도에 전혀 힘쓰는 교회로 그 유래를 갖고 있으며, 그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받아 기도하는 한국교회, 선교하는 한국교회로 자리 메김을 견고히 하고 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가운데 세계의 많은 교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맺는 말> 재건될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을 향한 소망 “그러나 보라 내가 이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33:6,9) 이제 한국교회는 1866년 9월5일 평양 대동강에서 이 땅의 구원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된 토마스선교사의 순교가 있은지 140주년과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운동이 발흥된지 100년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북녘 땅에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공산화 되었고, 이어서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북 지방의 기독교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민족의 출애급 같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남으로 내려와 흩어져 교회를 세우므로 오히려 이남지역에 교회의 부흥이 크게 일어나게 되는 환경이 구축되었다. 그 반면에 공산화가 된 북한에는 지상 교회가 다 훼멸되고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였을뿐만 아니라 핍박과 고난을 받음으로 그 땅의 교회는 지상에서 공동화(空洞化)가 되었다. 북한에 남아있는 기독 신앙인들은 무형교회로 지하화 하였고,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6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당대의 신앙인들은 소멸되거나, 노령화되어 극소수의 신앙인만 남게 되었다. 공산화되기 직전에만 이북 지역에는 3천여 교회가 있었고 평양지역만 하더라도 약280여개 교회가 있었지만, 6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모든 교회들은 다 훼파되었고 오히려 곳곳에 우상의 형상들이 세워져 영적으로는 흑암의 땅이요, 10가지 재앙을 받은 애급 땅처럼 장망성으로 변해버렸다. 과연 그곳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소생의 여력이 남아 있는 것일까? 또 하나님께서 저 땅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생명의 복음이 파종할 수 있게 기경될 것인가? 많은 회의와 절망감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140여년 전 보다 더 굳어지고 피폐해져 버린 저 땅을 어떻게 회복시키시고 재건할 것인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소생될 여망이 없으나, 모든 일에 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토마스선교사와 무수히 많은 이북교회 성도들의 피뿌림의 순교가 있었기에 그 언약하심을 작정하신 하나님의 때에 성취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 황무한 땅에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남은자요, 거룩한 씨요, 신앙의 그루터기들을 보존하고 계시며 이들의 간구와 순교자들의 신원(伸寃)에 응답하시고 그 평양 도성을 제이의 예루살렘으로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1~13) 필자는 98년 중국 국경지대에서 양식을 얻으러 압록강을 건너온 한 청년을 만났었다, 그는 놀랍게도 이미 하나님을 믿는 기독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30년대 초반이었으며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과 한국의 기독교 방송을 은밀히 들으면서 상당한 수준의 신앙과 신학을 갖추고 있었고 타 지방의 기독인들과도 연계를 갖고 있는 듯 했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는 지난 날 신앙을 지녔던 그 후손들과 그들에 의해 전도된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땅의 백성들이 복음으로 다시 소생되며 일백 여년전에 평양 대부흥운동의 발흥지였던 장대현교회를 재건하며, 도처에 무너진 재단을 다시 수축할 꿈을 갖고 있을 뿐만아니라 세계선교의 큰 비젼도 품고 있다. 비록 지금은 공산주의 정치 체제라는 철의 장막으로 둘러져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남은자들(Remnant)을 통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 같은 저들을 하나님의 생기로 회복시키시며 부흥케하실 것이다. 그와 오랜 대화를 나누면서 그와 같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청년은 헤어지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하나님은 결코 평양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북녘 동포들은 반듯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도 더욱더 복음을 갈망 하던 우리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복음의 불씨를 받아 안고 전하려고 합니다. 평양은 세계 선교의 마지막 리정표로 되며 아울러 세계 선교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 수행할 수 있는 커다란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평양선교의 전망은 매우 낙관적입니다. 파쇼 폭압으로 기독교의 토양의 질이 그 어느 곳보다도 훌륭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평양이 제이 예루살렘으로 소생될 그 날을 확신하며, 평양 선교의 불씨, 불길, 시한탄이 되고자 다시 여리고를 위한 요단강인 압록강을 건너려고합니다. 나는 분명 나의 꿈을 만드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내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과 하나님의 도움이 반듯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평양에서 지은 노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나이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 나 하나의 안락만 찾다가 말랴 그 누가 이 나라를 구원해 주랴 일어나자 대장부야 목숨을 걸고 감옥도 죽음도 두렵지 말자 예수와 더불어 영생하리라” 우리는 이런 신념의 노래를 부르며 사선을 넘을 것입니다. .... 한국의 성도 여러분 전 인류의 그리스도화를 위한 성스러운 길에서 서로 어깨 겪고 나갑시다. 북녘의 동포들의 구원을 위해 합심기고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의 언덕에서 영원한 상봉을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북한의 지하교회 청년 성도들을 평양을 비롯한 곳곳에 그루터기처럼 남겨두시고 하나님의 때에 저들을 통해 북녘 땅에 100여년 전에 불었던 성령의 바람으로 다시 그 땅을 변화시켜서 그 백성들을 소생시키시고, 남.북교회를 하나로 묶어주셔서 통일된 한국교회가 21세기의 선교의 주역으로, 택함받은 제사장 민족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9,10) ======================================================================== <참고서적> 1. 한국개신교사/ 백락준/ 연세대학교 출판부 2. 토마스목사전/ 유해석/ 생명의말씀사 3. 평양 대부흥이야기/ 박용규/ 생명의 말씀사 4. 다수의 선교 싸이트 자료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