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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설악 (2009.1.10~11)
일시: 2009.1.10(토)~1.11(일)
참석: 이시관, 김용덕, 이혜연,이시성, 한영경, 송기봉 6인
산행지: 설악산
산행코스: 한계령 - 서북능선삼거리 - 끝청 - 중청대피소 (1박) - 휘운각 - 천불동 - 비선대 - 소공원
산행시간: 첫날 5시간 10분, 둘째날 5시간
등산 경력 2년 남짓한 나로서는 겨울 설산을 오르는 것이 가장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장 긴장되기도 하는 일이다. 카페에서 예정된 1월 10일 토요일부터 1박2일 간의 설악산 산행을 앞두고 꼭 그런 기분이었을게다. 삼사일 전부터 배낭을 꺼내놓고 생각날 때 마다 장비들을 한두가지씩 배낭 속에 던져넣고, 이번에 신고갈 나의 최대 실패작인 라스포티바의 빙벽화를 신고, 엔조이 래칫이라 부르는 꼭 크램폰 비스무리하게 생긴 아이젠을 단번에 장착하는 연습을 해보면서 설산을 걷는 일행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였다.
일기예보에는 공교롭게도 요 이틀이 아주 춥다고 하는데 인제군 북면의 최저 기온은 영하 십사오도까지 내려갈 전망이다. 몸통보다 손이 시려서 고생했던 예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속장갑 한 켤레, 겉장갑 세켤레를 챙긴다. 저 무지막지한 빙벽화가 발은 시리지 않게 해 주겠지. 그것도 못하면 어디 내다 버리든지 남 줘버리든지 할 판이다.
1일차 - 1월10일 토요일
버스 승차권을 책임진 터라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니 새벽 5시 30분이다. 무인발권기에서 인터넷 예매한 8시30분발 티켓 5매를 우선 발권한 뒤 카운터로 가서 6시30분발로 교환해 달라고 하면서 추가 신청한 김용덕 사장님 티켓까지 추가로 구입했는데 임시 배차된 6시 29분발 버스 승차권 6매로 별 문제없이 처리가 된다. 버스 문제가 해결되자 마음이 놓인 김에 커피 한잔 마시고 있자니 김용덕 사장님이 도착하시고 뒤이어 일행들이 속속 도착한다.
버스 기사는 심술궂게 좌석이 다 찼으니 배낭을 짐칸에 실으라고 했는데 막상 출발하고 보니 좌석이 텅텅 비었다. 배낭에 걸려 있는 스틱에 좌석이 찢어질까봐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럼 그렇다고 할 것이지 왜 좌석이 다 찼다고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하는지...
승객이 많지 않아 그런지 히터를 최대한 올렸다고 하는데도 차내 기온은 썰렁하고 유리창은 내부의 습기가 얼어붙으면서 햐얀 막을 덧씌워서 바깥을 전혀 볼 수가 없다. 멀리 가는 원행에서는 차창 밖을 내다보는 재미도 꽤 쏠쏠한데 오늘은 틀린 것 같다. 화양강 휴게소에서 15분간 버스가 멈추는 동안 휴게소 안의 히터 앞에 서서 식은 몸을 녹인다.
승객들이 다시 버스에 오르고 출발하려는데 시몽과 영경씨가 나타나질 않는다. 차장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전화도 해보다가 이고문님이 건물로 뛰어 들어가 두 사람을 데리고 나온다. 우리 일행이 다른 쪽 출입문으로 나간 줄 모르고 그냥 기다렸다는 해명인데, 그냥 믿기로 하자.
한계령을 직행해야 할 버스가 이상하게 원통 읍내로 들어선다 싶더니 뒤에 오는 버스가 고장이 나서 승객들을 실으러 가야 하니 죄송하지만 앞서 가던 6시30분 발 버스로 바꿔타란다. 어차피 거의 다 왔으니 상관없는 일이고, 9시 15분 한계령에 도착한다. 구름이 많으리라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데, 거칠게 윙윙대며 뺨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손매가 꽤나 맵다.
오늘은 따로 도시락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 휴게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중청 대피소에서 저녁을 할 때까지는 행동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든든하게 먹고 올라가자는 마음으로 국밥을 주문하려는데 영경씨가 오더니 벌써 고문님이 일괄해서 주문하셨단다. 웬일인가 싶어 가보니 오뎅우동 6인분을 주문하셨다고...아, 오늘은 갈 길이 먼니까 밥을 먹어둬야 하는데...할 수 없다. 끗발이 제일 좋은 회장님만 비빔밥을 따로 주문해서 드시고 다른 이들은 우동으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하며 잠시 침묵 모드다.
잠시 담배 피러 나간 사이에도 불어대는 얼음 바람에 손이 곱아진다. 중간에 걷다보면 더워지겠지 라는 기대는 일단 잠시 접어두고 다들 단단히 차비를 갖춘 후, 식사를 한 손님에게만 뜨거운 물을 제공해 준다는 깍쟁이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보온병에 물을 채우고 길을 나서니 오전 10시20분이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얼음처럼 차갑다. 날이 맑은 덕에 주변의 여러 산들이 조망되는데 아직 내공이 쌓이지 않은 터라 남녘의 점봉산을 빼고는 무슨 산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조금 오르니 한계령에서 불어대던 세찬 바람이 점차 잦아들고 대신 다져진 눈길이 일행을 기다린다.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아이젠을 꺼내는데, 집에서 몇 번 연습을 한 덕분인지 원터치로 한방에 장착이 된다. 이 녀석은 10발 가운데 발 끝에도 2개의 프런트 피크가 있어서 전문 장비인 크램폰 흉내를 내고 있는데 6발보다는 훨씬 안정되고 착용감도 좋다. 빙벽화를 신은 김에 70도쯤 경사진 얼음에 대고 tv에서 눈여겨 봐 두었던 빙벽에서 쓰는 프런트 킥킹 연습을 해 보는데 얼음에 박힌 프런트 피크 2개 만으로도 체중이 실어지는 것이 신기하다.
오전 11시 20분. 벌써 한 시간 여를 걸었다. 회장님과 알공님이 저만치 앞서 가고 내가 가운데, 그리고 영경씨와 시몽, 고문님이 후미를 이루었다. 후미라고는 하지만 내 뒤를 바싹 쫓아오기 때문에 느긋하게 기다리며 사진을 찍을 여유가 도무지 없다. 사진이 많아야 산행기 내용이 넉넉해 지는데 이번엔 그러기가 어려울 듯 하다.
영경씨가 날 보며 하늘을 가리킨다.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나무 가지 사이로 새파란 하늘의 대조가 선명하다. 마침 바람도 잔잔하고 한 시간 이상 걸은 덕에 몸도 적당히 데워져서 자켓을 벗고도 걸을 만 하다. 아직은 손시림도 없어 이상적인 겨울 산행, 코는 쨍하게 시리되 햇볕은 눈부신 겨울 산행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간간히 휘익하고 몰려오는 설악 바람의 차가움에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
영경씨도 모처럼 겨울 산행의 즐거움을 되새김하는 모양이다. 체구가 워낙 가늘어 조금 걱정스럽기도 한데 아직은 겨울 설악을 즐기는 모습이다. 비회원으로 참가한 터라 서먹함을 덜어주려고 시몽과 함께 이런저런 너스레를 떨며 길을 걷는다. 게다가 막강 회장님의 친구시니 잘 모시지 않으면 안된다.
오전 11시 20분. 2시간 만에 서북능선 삼거리에 도착한다. 안내도에 2시간으로 나온 구간을 정확히 같은 시간에 걸었다. 여기서부터 중청 대피소까지는 3시간 40분으로 나와 있다.
앞서 가던 회장님은 일행을 기다리는 사이에 능선의 찬 바람을 맞느라 꽁꽁 얼은 듯한 모습이다. 겨울 산에서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는 것은 상당히 고역임이 분명하다. 선행하는 팀은 얼지 않기 위해,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다소 빠른 듯한 속도를 유지해야 하고 뒤따르는 팀은 오버 페이스를 하지 않기 위해 다소 늦더라도 본인의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선두와 후미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기야 그런 덕분에 앞서 가는 팀에게 같이 서서 커파 한잔 나눌 새도 없이 후미조가 도착하자 마자 쌩하고 달아난다며 갈구는 재미도 힘든 산행의 양념이다.
중간 헬기장에서 아까 한계령 휴게소에서 사온 감자송편 세쪽으로 간식을 대신하고 계속 길을 재촉한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다보니 오전의 오름길과는 달리 바람이 매섭다. 휙휙하고 불 때마다 노출된 뺨과 코, 입이 얼얼해 지는데, 그나마 줄기차게 나를 괴롭히지는 않고 간격을 두고 불어대는 것이 다행이다.
오후 2시 50분. 끝청에 도착한다. 산행 시작 4시간 20분만이다. 예전에 비해 좋은 속도로 걸어 왔는데 갑작스레 허기가 진다. 원래 허기가 지면 급격히 속도가 떨어지면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데 마침 여기서 이런 상황을 맞게 된 것이 기분나쁘다. 배낭에 들어있는 빵과 커피로 허기를 채우고 갈까 궁리하다 그러면 족히 15분은 지체될 테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중청 대피소이니 계속 걷기로 마음먹는다.
시몽에게 먼저 가라고 얘기하고 허기진 배를 달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보는데, 옛날 고교 시절 호빵 두개로 아침을 대신하고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을 오르다가 중간에 눈 앞이 노래졌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시몽은 오늘 먹은 양이 나랑 같은데 아무 어려움 없이 씩씩하게 잘 걷네.
끝청에서 중청봉 옆구리를 따라 약간의 오르막을 넘어서야 하는데 허기진 배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중간중간 10여초씩 멈춰 쉬며 겨우 올라서니 지척에 대피소가 보이고 날이 점점 추워지는지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불어댄다.
이제부터야 내리막이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중력의 법칙에 몸을 맡기면 된다. 도착하면 만사 젖혀두고 빵을 꺼내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달음에 대피소까지 내려간다. 오후 3시 25분. 한계령을 출발한지 5시간 5분만이다. 지난 여름보다 속도는 더 좋아진 셈인데 막판 배가 고파 헤맨 것이 옥에 티로 남는다.
먼저 도착한 일행은 벌써 자리 배정을 끝내고 대청봉을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이 상태로는 갈 수가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지금 내 처지에 딱 들어 맞는데, 주섬주섬 배낭에서 빵을 꺼내 먹으며 일행들에게 즐거이 다녀오시라고 권한다. 차갑게 언 빵 맛이 이렇게나 꿀맛 같을 줄이야... 빵 두개를 순식간에 삼키고 영경씨가 꺼내주고 간 치즈와 햄을 안주삼아 소주 두 모금 하고 나니 정신이 돌아오는 듯하다. 허기진 배로 산을 걷는 일은 정말 고역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흡연 구역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그 사이에 바람은 강풍으로 돌변해 있다. 담배 한개피 태우는 사이에 손이 얼어 버리는 듯하다. 대청봉을 다녀온 알공님은 손이 곱아서 라이터를 못 켜겠다며 불을 붙여 달라신다. 대피소의 바람이 이 정도니 대청봉 정상이야 오죽 했으랴.
5시가 조금 못 미친 시간, 취사장에 자리를 잡는다. 시몽은 고기를 넉넉하게 서근 반이나 사오고도 핀잔을 받는다. 많이 가져온 것보다 적게 가져 온 것이 핀잔받아야 정상인데 산에서는 오히려 거꾸로가 통하는 모양이다. 덕분에 삼겹살과 갈매기살로 포식을 해볼까.
비장의 무기인 프리머스 옴니 퓨얼 스토브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바람에 이고문님이 제대로 스타일을 구겼다. 화이트 개솔린을 연결하니 연료가 새면서 불꽃이 번지고, 가스를 연결해도 점화가 되질 않는다. 덕분에 내가 가져간 스노우피크 기가파워 BF 스토브가 주 화력으로 맹활약하며 "오늘은 붕어의 판정승"이라는 알공 심판님의 판정을 이끌어낸다. "음-무핫핫!" 기고만장의 웃음를 터뜨리고... 넉넉한 고기와 소주 덕분에 강추위 속 설악 정상에서의 저녁이 풍요롭고 따뜻하다. 옆 자리에는 광운대 산악회에서 온 것 같은데 삼계탕을 끓이는 모습이 이채롭다. 가만 보니 따끈한 국물과 고기, 안주까지 한꺼번에 해결된다는 점에서 삼계탕이나 백숙도 훌륭한 메뉴인 것 같다. 다음에 한번 써먹어 볼까...
근데 오늘 밥이 예사롭지 않다. 원래 코펠의 절반 정도만 쌀을 채워야 하는데, 5인용 코펠의 4/5를 쌀로 채우고 물이 모자라니 중간에 물을 더 붓자는 처음 보는 조리법이 선보이더니, 그 결과 또한 처음 보는 것이다. 뚜껑을 여니 윗 부분은 설었고 중간 층은 아예 생쌀이다. 중간이 설고 윗부분이 생쌀이라면 이해가 되겠는데 이건 정말 잘 모르겠다. 물을 흠뻑 더 붓고 불을 조절하면서 경과를 지켜봤지만 별 소용이 없다. 내일 주먹밥까지 해결할 요량으로 밥을 많이 한 건데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결국 대부분의 밥은 내일 어찌 해 보기로 하고 코펠에 담은 채 취사장 한쪽에 보관해 두기로 한다. 된장국은 아주 잘 되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보니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이건 거의 폭풍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 막 도착한 등산객 한 사람이 꽁꽁 언 채로 공단 직원에게 기상 상황을 물으니 현재 영하 17.5도에 강풍때문에 체감온도는 영하 41도라고 한다. 내일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도하고 주무시란 말을 덧붙이며. 내일도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진짜 어려운 산행이 될텐데 걱정스럽다. 하기야 이런 걸 각오하고 왔고 장비와 등산의류는 단단히 준비해 왔으니 맞부딪혀 나갈 수 밖에...당초에는 체력이 허락되면 공룡능선을 오를 예정이었지만 오늘 5시간 산행을 하면서 한겨울 10시간 산행은 아직 나에게 무리라 결론을 내리고 내일 천불동으로 하산하기로 진작에 마음먹은 터라 크게 긴장되지는 않는다.
오후 8시 30분. 다행히 대피소 내부는 난방시설이 가동되고 있어 포근하다. 하지만 영경씨 빌려주겠노라며 들고 왔던 다운 자켓은 홀랑 내가 꺼내입고 잠자리에 든다.
2일차 - 1월11일 일요일
눈을 뜨니 오전 5시 30분이 넘었다. 간밤에 몇차례 깨긴 했지만 9시간 동안 아주 편하게 잔 것 같다. 특히 밤에 난방을 끈 동안은 실내가 썰렁했는데 품에 끼고 있던 다운 자켓 덕택에 추운줄 모르고 편안한 수면을 즐길 수 있었다.
7시 40분 일출을 보려면 7시쯤 대청봉으로 출발하라는 안내방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누워서 취사장에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다 천천히 일어나서 취사장에 자리를 잡는다. 동계에는 식수를 제공하지 않고 판매하는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하는데 2리터 큰병이 3,000원이다. 어제 남은 밥의 대부분은 잔반통에 버리고 누룽지 부분은 끓여서 누룽지는 먹고 숭늉은 보온병에 채운다. 라면은 시몽이 조심스레 담아온 계란 덕분에 아주 제맛이 난다. 오늘은 하산을 마칠 때까지 이걸로 버텨야 하는데, 어제 허기가 져서 헤맸던 기억도 있어 한 젓갈이라도 더 뜨려고 애를 써본다.
바깥으로 나오니 길을 나서는 등산객들이 차비를 갖추느라 분주하다. 다들 든든히 입고 얼굴을 꽁꽁 싸매는 등 완전 무장을 하고 추위에 대비한다. 조금전 떠오른 태양 빛이 은은하게 주변을 비추는데 안타깝게도 디카로는 그 모습을 담아내기가 어렵다.
오전 8시20분 천불동 방향으로 출발이다. 회장님은 이미 저만치 앞서 출발하셨다. 2분만 참았다 같이 가지 그노무 급한 승질은... 다행히 바람은 많이 가라앉아 산행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고 기온도 어제 예보했던 영하 19.5도보다는 높은 듯하다. 여기서부터 휘운각까지는 상당한 급경사 내리막이지만 계단이 잘 정비가 되어 있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계곡으로 내려서기 전까지 능선을 따라 걷는 동안은 북쪽의 계곡에서 능선을 향해 올려치는 바람이 엄청나게 매섭다. 얼굴을 싸맨 버프는 콧김과 입김으로 축축해져 있다가 계곡의 얼음 바람에 뻣뻣하게 얼어붙는 것같다. 입과 코를 가리려 버프를 끌어올렸다가 호흡 곤란에 숨이 막힐 것 같아 얼른 도로 끌어내린다. 계곡 방향으로 내려서면 나아지길 기대하며 서둘러 걸음을 재촉해 9시 20분 휘운각에 도착한다. 대피소를 출발한지 1시간 만이다.
휘운각 대피소는 공사중이라 그런지 문은 열려 있지만 운영은 하지 않고 있다. 이 추위에 공사는 제대로 되는건지 의문이다. 그 와중에 회장님은 눈을 쌓아 만든 동굴 속에 들어 앉아 기념사진 한장.
가도가도 30~40cm 이상 쌓인 눈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쨍하게 맑고 푸른 날씨에 온 산을 뒤덮은 눈 속을 걷는 일은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행운이다. 일년에 몇 번이나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영경씨가 혹시 힘들어하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을 했었지만 꾸준하게 잘 걷는다. 예전에 암벽을 했다더니 그 관록이 발휘되는 것인지. 시몽과 고문님은 후미를 보면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시몽이 많이 부럽다. 난 지난 겨울 지리산 동계 산행 때 몹시도 힘들었었는데 시몽은 산행 경력 석달만에 모든 걸 쉽게 척척 해낸다.
손이 시려 장갑을 벗는게 겁나는데다 멀찍이 앞서간 선두조를 쫓다보니 사진 찍을 여유가 없다. 그래도 단 2~3초 동안이라도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과 순백의 눈과 태양 아래 황금색으로 물든 계곡 주변의 암벽을 바라보고 싶다. 사실 일년이 가도 쉽게 보기 힘든 장관인데 바닥 미끄러운 것에 신경을 쏟다보니 많이 놓친 것 같다.
오전 10시 20분. 대피소 출발 2시간 만에 양폭산장에 도착한다. 보온병에 넣어온 숭늉으로 한기를 달래고 흡연구역을 찾아 담배 한모금 마시니 훨씬 편안해진다. 이제 절반 이상 내려온 셈이니 하산 길의 부담도 많이 줄었다.
다시 길을 재촉한다. 오전 11시 20분 귀면암이다. 세번 째로 도착한 날 보시더니 김용덕 사장님은 개과천선했다고 놀리신다. 작년 힘들어 헤매던 때와 비교하면 그렇다는 뜻일게다. 하지만 지금도 많이 힘든데 내색만 않을 뿐임은 모르시다 보다. 영경씨가 조금 쳐졌는지 5분여를 기다리니까 그제야 모습을 나타난다. 그 짧은 사이에도 땀에 젖은 등판이 식으면서 싸늘한 한기가 감돈다. 겨울 산행은 어찌 보면 체온과의 전쟁이라 할 수 있겠다. 옷을 입고 벗기를 반복하면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으면 성공한 산행이다.
11시 50분. 귀면암을 내려선지 35분, 중청 대피소를 출발한지 3시간 30분만에 비선대에 도착한다. 수고하셨다며 일행을 맞이하는 휴게소 여종업원이 무척이나 반갑다. 이곳에 오면 산행을 마무리하는 막걸리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아이젠을 벗어 배낭에 걸고 난로를 피워 훈훈한 휴게소에서 달콤한 막걸리 몇잔으로 지친 몸을 달래본다.
오후 1시30분 소공원에 내려선다. 비선대에서 막걸리 마시며 쉰 시간을 합쳐도 5시간 만에 중청 대피소에서 이곳까지의 구간을 통과했으니 아주 빠르게 온 셈이다.
그건 그렇고 소공원을 코앞에 두고 콘크리트 대로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넘어지는 순간 접은 스틱 두자루를 쥐고 있던 오른손으로 바닥을 잘못 짚었는지 손목이 몹시 아파오고 힘을 줄 수 없다. 산속이라면 몰라도 대로에서 넘어졌으니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얼른 수습하고 일어섰지만 아픈 건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일단 귀경 버스표부터 사야 하기 때문에 시내버스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오후 4시 50분 표를 구입하고, 인근의 할매식당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이 식당은 양미리구이와 도루묵찌개를 먹으로 매년 한번씩은 찾아오던 곳인데 작년엔 올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요즘 고깃배가 안나가서 생선이 별로 없단다. 기대했던 양미리구이와 도로묵찌개가 허공에 뜨니 굳이 이 식당을 찾을 이유가 없어져 버렸는데, 그렇다고 딴 곳으로 옮기기도 뭐해서 그냥 주저 앉았다. 대신 시킨 김치찌개와 생선구이 맛은 그냥 밋밋하고 별로지만 산에서 남은 고기를 구워먹게 허락하고 기꺼이 불판과 가스 레인지를 내어주시는 할머니의 푸근한 인심을 반찬삼아 소주를 곁들여 점심식사를 마친다.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가서 동서울행 우등고속 버스에 오르는데 다친 팔 때문인지 온 몸에 한기가 돌아 다운 자켓을 꺼내 입고 의자에 몸을 기대 누웠는데, 그때부터 내릴 때까지는 아무 기억이 없다. 한가지 고문님이 깨워서 잠결에 포도주 원샷 하고 도로 누웠던 것 밖에는...
동서울에 도착해서는 택시를 세우신 알공님을 따라 동승하느라 일행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면서 이번 설악산 산행의 막이 내린다.
(다음 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손과 팔이 퉁퉁 부었다. 간밤에 잠자리에서 돌아누울 때는 오른 팔을 쓸 수가 없어 왼손으로 오른 팔을 들어서 적당한 자리로 옮긴 후에 몸을 돌리곤 했는데 깨어보니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행여 동계산행 금지령이라도 떨어질까 짐짓 별일 아닌 척 식탁에 앉았지만 오른 손으로 들어올린 젓가락이 입에 닿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거기에 반찬을 얹어서 입으로 가져가면서 먹는데, 모처럼 집에서 한 밥이 너무 끌려서 불편한 팔을 가지고도 아주 배불리 먹었다.
연세 지긋하신 정형외과 원장님은 내 손목 이곳저곳을 눌러보더니 엑스레이를 찍자고 하는데, 팔을 45도 씩 회전시키며 모두 4컷을 찍는다. 마지막에는 180도를 회전했을 때는 아파서 대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고 인대가 좀 상했다며 손수 기브스를 해 주신다. 1주일 후에 경과를 보자며 주사를 놔주고 약도 챙겨주시고...
이번 겨울 시즌 산행은 이걸로 마감인가 했는데 다행이고, 동계산행 금지령도 아직은 떨어지지 않아 더더욱 다행이다.
첫댓글 작품입니다. 읽다보니 순간순간 기억이 새로와지네요. 산행기 쓰려면 엄청난 기억 재생능력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너무 즐겁게 읽었고 부디 속히 쾌차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사진이 많으면 대충 기억이 나더군요 귿건한 시몽의 모습이 더 감명깊었습니다 마음으론 요 기브스 당장 풀고 싶군요
산행대장님! 자세하게도 기록하셨네요. 제가 지난 가을에 다녀온 기억 나는군요. 수고하셨어요.
오늘 정대리에게 물어볼게 있어 통화하다 부사장님 다치신 것 들었는데,,그 손목으로 자판은 어찌 두드려셨는지요~ 그 덕분에 재밌게 산행기 잘 읽고 제 눈도 눈구경 잘 했습니다~~ 따라 갔으면 참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