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미국 주식부호 27위 … 전력선통신 국내 벤처 CEO로 새 도전
73세 억만장자의 벤처 도전기
황규빈 젤라인 회장
한때 미국 주식 부자 27위에 올랐던 한 재미동포 사업가가 지금은 직원 20명인 국내 벤처기업 CEO를 맡고 있다. 황규빈 젤라인 회장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그는 수퍼스타였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한국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와 장관을 미국으로 세 번이나 보내고야 그를 만났다. 미국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 기술참모에 임명했다.
젊은 빌 게이츠는 그에게 물건(MS-DOS)을 사달라고 졸랐다. 러시아와 북한 정부는 투자해 달라며 그를 초청했다. 그는 무하마드 알리, 그레고리 펙, 도널드 트럼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존 덴버와 함께 미국 의회가 미국 발전에 기여한 이민자에게 주는 공로로 100년에 한 번 수여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유력 매체들은 앞다퉈 그를 다뤘다. 황규빈(73·미국명 필립 황). 집 차고에서 시작한 텔레비디오라는 회사로 한때 그는 미국에서 주식 부호 27위에 이름을 올렸다. 만약 그가 25년 전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다 팔았다면 통장에는 12억 달러가 찍혔을 것이다. 요즘 환율로 치면 1조5000억원쯤 된다.
30대 후반에 사업을 시작한 그는 이제 종심(從心)을 넘겼다. 은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명함을 하나 새로 새겼다. 젤라인이라는 회사 CEO다. 직원이 20명 남짓인 국내 벤처다. 쫄딱 망한 걸까? 아니다. 정점만큼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큰 부자다. 미국에 아파트 960채가 있고, 호텔 3개와 100여 개 상점이 입점한 쇼핑센터를 운영한다.
“자산은 2억 달러 정도 된다”고 했다. 임대수입은 제외하고다. 지난 20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황규빈 젤라인 회장을 만났다. 4시간30분간의 인터뷰, 1시간이 넘는 사진촬영에도 그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이력을 봤을 때, 현재 위치가 좀 의외입니다.
“젤라인은 10년 전부터 투자했던 회사예요. 1년 전부터 제가 직접 경영합니다.”
>> 왜죠?
“제가 그동안 국내 15개 회사에 투자를 했는데, 13곳이 파산했거나 투자 지분을 처분했죠. 젤라인은 살아남은 두 곳 중 하나예요. 가능성이 보이는 곳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투자 요청”
젤라인은 전력선통신(Power Line Communication: PLC)용 핵심 칩을 만드는 곳이다. PLC는 일반 전기선으로 인터넷도 되고, 원격 검침도 가능한 통신 기술. 이 회사는 요즘 떠오르고 있는 지능형 전력망 시장에 핵심 기술로 불리는 첨단검침인프라(AMI) 분야에 국제표준 기술을 갖고 있다. (박스 기사 참조)
>> 그동안 젤라인에 얼마를 투자했습니까?
“260만 달러 정도요.”
>> 회수는 좀 하셨습니까?
“지난 10년간 기술개발을 하고 시범사업만 했죠. 드디어 지난해 말에 처음으로 한국전력에 5만 칩 주문을 받았어요. 사실상 10년 만의 첫 매출이죠.”
>> 벤처 성공률이 보통 5%라고는 하지만 국내 투자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네요.
“예전에 미국으로 직접 찾아와 투자해 달라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엔지니어 출신이다 보니 다른 것은 안 보고 기술과 이론, 아이디어만 보고 투자한 곳이 많았습니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3500만 달러를 투자해 1달러도 회수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웃으면서 ‘이제 회수 좀 하셔야겠네요’ 하더라고요(웃음).”
사실 그는 한국 투자에 대한 아픈 기억이 많다. 큰 투자는 큰 것 대로, 작은 투자는 작은 대로 실망이 컸다. 그 때문에 그는 “다시는 한국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미국에서 돈 가져와 새로 투자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젤라인이 잘되면 지분(30% 보유) 일부를 팔아 투자하면 몰라도”라는 전제였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접 투자를 요청했다면서요?
“1983년인가? 청와대 과학기술담당 비서관이 찾아왔더군요. 나중에 부총리를 지내신 오명씨였어요. 대통령 메시지를 갖고 왔다며 한국에 투자 좀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땐 너무 바빠서 외면했죠. 그런데 얼마 후 오명씨가 체신부 장관 자격으로 또 찾아왔어요. 하지만 투자 조건이 맞지 않아 곤란하다고 했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이 그를 찾아 실리콘밸리로 왔다. 바뀐 체신부 장관(최순달씨)이었다. “각하께서 직접 만나길 원하십니다.” 더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황 회장은 청와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독대했다. 결과적이지만, 잘나가던 그와 그의 회사 텔레비디오가 추락하는 계기가 된 자리였다.
>> 압력 같은 걸 느꼈나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전 대통령이 그러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 손재주는 탁월하다. 그런데 돈이 없다. 그러니 조국에 투자 좀 하고 기술도 이전해 달라. 그런데 당시는 한국에 투자하려면 외국인 소유 지분이 49%를 넘길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소지분 투자는 안 한다. 100% 투자하게 해달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비서관에게 해결하라고 지시하더군요.”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다.
“이틀 만에 해결됐다고 연락이 옵디다. 결국 2600만 달러를 투자해 콘트롤데이타 공장을 인수하고 텔레비디오 생산설비를 옮겼죠. 그렇게 만든 것이 1984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PC 생산회사인 텔레비디오 코리아입니다. 한국인 직원이 700명 일했어요.”
콘트롤데이타. 한국 노동사에 이 회사는 아픈 상처로 남는 곳이다. 1980년 초 다국적 기업인 콘트롤데이타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고 미국인 본사 중역 3명이 노조에 의해 납치·감금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회사 측은 일방적으로 철수를 선언했다. 그 과정에 노조에 대한 폭력이 있었고 많은 노동자가 해직됐다. 구로공단에 위치한 그곳에서 황 회장 역시 쓴맛을 봤다.
“내가 왜 양키냐?”
>> 투자 3년 만에 철수를 하셨죠?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노동운동이 뜨거웠습니다. 텔레비디오 코리아도 비켜가지 못했어요. 700명 직원 중 400명이 참여한 파업이 일어났는데, 4개월간 공장 생산라인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주문받은 물건 납품은커녕 거래처에서 피해 보상과 계약 해지가 줄을 이었어요. 결국 1100만 달러에 공장을 매각하고 철수했습니다.”
>> 지금도 억울하십니까?
“미국 일이 워낙 바빴기 때문에 한국 공장은 임원에게 맡겼는데, 직원들과 교류가 없었던 것은 실수였어요. 하지만 해도 너무하더군요. 그때 파업 중인 노조를 만나러 가는데, 공장에 ‘양키 고 홈’이라고 써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노조 대표를 찾아가 물었어요. ‘내가 눈이 파라냐, 코가 크냐? 내가 왜 양키냐’고요. 그랬더니 미국에서 100% 투자했으니 양키 회사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노조 상대 못하겠다고 투자액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팔아버렸죠.”
공장이 멈춘 4개월은 텔레비디오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납품이 미뤄지는 사이 후발 대만업체가 미국 유통망을 잠식해 들어온 것이다. 거래선은 끊어졌고 회복은 쉽지 않았다. 황 회장은 그의 자서전 『버티지 못할 시련은 없다』에 “텔레비디오가 위기로 접어든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 공장의 파업 사태였다”고 적었다.
>> 북한에서도 투자를 해달라고 했죠?
“1987년에 초청을 받아 평양에 갔습니다. 한 인사가 조국을 위해 공장을 지어달라고 하더군요. 이후에도 그런 권유가 많았습니다. 당시 박영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국장도 만났죠. 박 부국장은 1994년에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한 인물입니다. 타임지와 포춘에서 내 기사를 봤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시 북한은 미국법상 적성국가였고, 투자가 법적으로 불법이었기 때문에 투자하지는 못했습니다.”
>> 텔레비디오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IT 분야에 유지보수를 위해 직원 10명이 있어요. 부동산 사업 쪽에는 200명 정도 됩니다. 원래 제 지분은 60% 정도였는데, 얼마 전 나머지를 다 사들여 100%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가는 1달러가 안 되죠.”
>> 텔레비디오는 얼마나 대단한 회사였나요?
“게임용 흑백 모니터가 히트하고, 이후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장착한 CRT 터미널(단순 기능의 브라운관 컴퓨터)로 세계시장 1위에 올라섰죠. 세 번째 히트작은 PC와 PC 간에 네트워크를 구현한 기술이었어요. 그때는 애플에서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이용한 개인용 컴퓨터가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던 시기였는데, 우리는 세계 최초로 PC 네트워크 시스템을 실현한 것이죠.”
황 회장이 텔레비디오를 세운 것은 1975년이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처럼 집 차고에서 시작한 회사였다. 자본은 9000달러. 5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와 10년간 모은 돈의 전부였다. 그는 이 돈을 다 날릴 때까지 집에 돈 한푼 갖다주지 못했다. 그 전에 창업자금을 모아보자고 시작한 작은 편의점에서 그의 아내는 스무 시간씩 일했다. 곧 기회가 찾아왔다.
>> 게임기용 모니터가 소위 대박을 쳤죠?
“당시 흑백 게임이 인기였는데, 게임용 모니터를 만드는 곳은 모토롤라뿐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흑백TV를 바라보는데 번뜩이더군요. TV 한 대를 사다가 뜯어보니 충분히 게임용 모니터가 될 것 같더군요. 설계를 완성하고, 제가 어디로 간지 아십니까? 한국이에요. 모니터를 싸게 생산해 줄 곳을 찾아간 거죠. 결국 여섯 번 퇴짜를 맞고 대한전선에서 모니터 생산 제안을 받아줬습니다.”
>> 얼마나 벌었나요?
“2년 동안 20만 달러를 벌었죠. 비행기 삯도 구하기 힘들었던 제가 기반을 잡게 된 거죠.”
>> 그 돈도 금방 날렸다던데요?
“흑백 게임 인기가 오래가지 않았고, 금방 컬러 모니터가 나왔죠. 우리 경쟁력은 가격이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컬러 모니터까지 저가에 만들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CRT터미널이죠. 우리는 기존 단순한 CRT터미널에 한 개에 10달러짜리 마이크로 프로세서칩을 이용해 획기적인 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이 제품 제작 역시 한국에서 했다). 그사이 번 돈은 다 쓰고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야 했죠(웃음).”
9000달러 회사가 20억 달러로
1983년 이 회사의 매출은 1억8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후 그의 신화는 나스닥 상장으로 정점에 이른다. 액면가 1센트짜리 주식은 1983년 5월 상장과 동시에 18달러로 치솟았고, 6개월 만에 50달러를 넘어섰다.
9000달러로 시작한 회사는 20억 달러짜리로 변했다. 지분 62%를 보유했던 황 회장이 주식 행사를 할 수 있었던 시점의 주가는 40달러50센트. 약 3000만 주를 보유했던 그는 12억 달러로 포브스지가 선정한 미국 27위 주식 부호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이민 100년사에 그는 가장 성공한 코메리칸이 됐다.
>> 이후 텔레비디오는 하락세를 걷기 시작하는데요, 한계에 부닥쳤나요?
“PC시장 경쟁이 워낙 치열해졌습니다. 텔레비디오와 애플, IBM이 경쟁했는데 MS-DOS용 PC를 밀어붙인 IBM에 주도권을 빼앗겼습니다. 한국 공장 파업사태로 잃어버린 유통망도 회복하기 어려웠죠.”
황 회장의 자서전을 보면 MS-DOS용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레이 노르드 노벨 창업자와 계약에 실패한 것을 후회하는 대목이 나온다. 가격 협상 문제로 황 회장은 노르드와 결별했고, 노르드는 IBM과 손을 잡았다. 결국 네트워크가 되지 않는 PC를 팔 처지에 놓인 텔레비디오는 회사 매출의 70%를 차지하던 PC사업을 접게 된다. 화려한 날의 끝이 그렇게 다가왔다.
>> 자본은 충분했을 텐데, 다른 기술 개발이나 새 시장 진출, 업종 전환은 고려하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고 도전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쉽지 않더군요. 1000만 달러를 투자해 오늘날 LED와 같은 발광 소재 연구 회사에 투자도 해봤는데, 결국 파산했어요. 세계 1등을 쉽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전 재산 자선재단에 등록
>> 한국 투자도 잘 안 됐고….
“아직 1달러도 회수 못했잖아요(웃음).”
>> 투자자 입장에서 화가 안 나시나요?
“임직원이 열심히 해서 실패한 곳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투자받은 돈을 엉뚱한 데 쓰고 낭비하다 망한 곳이 제가 투자한 곳의 절반이에요. 제가 젤라인을 맡아 직접 경영해 보니 1년 만에 경비가 3분의 1로 줍디다.”
>> 국내 벤처기업 후배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벤처가 활기가 없다고 하는데,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I’자 ‘e’자만 붙어도 묻지마 투자할 때 쉽게 돈 받아 내 돈처럼 써서 다 망하고 신뢰를 잃은 거잖아요. 이제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투자를 받기 힘들어졌죠. 선배로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너무 큰 꿈을 꾸지 말라는 거예요. 벼락부자 생각 말고 차근차근 하라는 겁니다. 대박을 쳐서 서른 살에 은퇴할 생각 말고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하면 기회가 옵니다. 하긴, 나도 일흔 살 넘어 하고 있는데….”
>> 텔레비디오는 역사가 됐는데, 여전히 부호시네요?
“1980년대 중반에 회사 수익금 중 아내에게 1000만 달러를 줬는데, 아내가 그 돈으로 새너제이 등에 아파트 200채를 샀대요. 그게 늘고 늘어 1000채가 됐죠.”
>> 그런데, 재산이 모두 자선재단에 등록돼 있다죠?
“그렇습니다. 딸 둘 모두 공부 잘 시켰고 아파트도 한 채씩 사줬어요. 그러면 됐죠. 현재 패밀리 비즈니스를 하고 있지만, 딸들은 월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선재단을 만들어 부동산 사업 수익의 20%는 재단에 넣고 80%는 환원을 하고 있습니다. 딸들도 유산 상속 같은 건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 돈 관리 잘하는 법을 어려서부터 가르쳤죠.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 하게 하고, 용돈을 주면 지출 내역을 영수증 첨부해 제출하도록 했어요.”
>> 평생 번 돈을 사회에 내놓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죠.
“한국 기업인들을 보면 말로만 환원하고, 자녀에게 불법으로 상속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자식이 바보 같아도 기업 넘겨주고요? 미국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가끔 제게 한국 사람이니 한국에 환원하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에게 할 겁니다. 제1순위는 교육입니다. 내가 너무 힘들게 공부해서…. 모교(유타주립대)와 한국 모 대학에도 기부를 했습니다. 아, 얼마 전 비행기에서 신문을 봤는데, 이 대통령이 재산을 환원한다는 내용 중에 깜짝 놀란 것이 있었죠. 탈북자 자녀 교육을 후원하는 내용이 있더군요. 무릎을 딱 쳤어요. 나도 북에서 내려왔는데, 내가 할 일이다 싶었죠. 가능하다면 황장엽씨도 만나 상의하려고 해요. 본격적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쉬고 싶진 않으세요?
“10년 전엔 더 젊었지만, 지금도 젊잖아요. 젤라인이 잘되는 걸 보고 싶어요. 그런 게 너무 좋습니다.”
긴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촬영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황규빈 회장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촬영 장소와 집무실을 뛰듯이 들락거렸다. 연방 웃고 정열적이던 그에게서 5시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직원이 슬쩍 다가와 귀띔해 줬다.
“사실은 30분째 바이어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젤라인은 어떤 회사?
전력선통신 국제표준 기술 보유
젤라인은 미국 인텔리온, 스페인 DS2와 함께 세계 3대 전력선통신(PLC) 칩메이커로 꼽힌다. 핵심 기술은 고속전력선을 통해 원격검침을 할 수 있는 첨단검침인프라(AMI)용 칩이다. 정부가 녹색 성장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지능형 전력망(스마트 그리드) 사업의 핵심 솔루션으로 평가받는다. 전력선통신은 인터넷 케이블망이 아니라 기존 전력선을 통해 통신이 되도록 하는 기술로 한때 초고속 인터넷 시장 유망 기술로 각광받았다. 현재는 지능형 전력망 시장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이 회사의 기술은 최근 국제표준기구(ISO)의 표준으로 채택되는 쾌거를 거뒀다. 세계 최초로 전력선통신 분야 국제표준이 된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그간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제 빛이 보인다”고 했다. 황 회장도 그래 보였다. 그는 지식경제부와 한국전력이 추진하는 스마트 그리드 사업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황 회장은 “1차적으로 내년에 한국전력이 전자식 전력량계 100만 대를 보급하는데, 핵심 칩을 공급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국제표준을 획득한 젤라인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전력은 2020년까지 1800만 가구의 전력계를 실시간 계량과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전자식으로 교체할 계획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중국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올 전망이다. 지난 5월 중국 정부가 PLC 시범사업을 시작했고, 향후 1억8000만 가구에 고속PLC 기술을 적용한 원격검침 계량기를 도입할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황규빈 회장은 현재 중국에 PLC 관련 합작회사를 갖고 있다. 젤라인은 중국에서 여러 차례 PLC 시범사업을 수행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