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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아산 84코스 역방향 제2부
모원리 안논들 쉼터전망루- 공세3리 새원마을- 공세지하통로2- 공세정미소- 공세리성당- 공세2리 마을회관- 입암산 등산로 입구- 인주파출소- 인주배수지 시민공원 입구- 공세4리 천등말과 공세6리 대진아파트 입구- 인주119안전센터- 공세5리 기산현대아파트 입구- 공세교차로- 신성리 버스정류소- 신성리마을회관- 밀두천- 밀두1리사무소- 밀두교- 럭키프라자- 씨월드모텔- 인주한식뷔페- 인주휴먼시아 아파트- 인주공단교차로- 국도제34호선 문방1교 아래- 인주산단로 문방2교 입구- 서해랑길 83·84코스 안내도
20240424
1.코스 소개
두루누비에서 서해랑길 84코스를, 근대 산업의 발전으로 생성된 아산만방조제와 간척지 위에 생성된 조용한 농촌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코스라고 소개하며, 1922년에 지어진 성당으로 수백년 된 느티나무와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운 '공세리성당',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생겨 난 '쌀조개섬', 주변 마을을 활기 넘치던 어촌에서 농촌으로의 변화를 생기게 한 '아산만방조제' 등 세 곳을관광 포인트라고 안내하고 있다. 서해랑길 84코스의 주요 경로는, 인주공단교차로 3.7Km 공세리성당 입구 2.8Km 백석포2리마을회관 8.4Km 쌀조개섬 입구 2.8Km 노양마을회관정류장으로, 거리 17.7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쉬움이다. 시점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문방2교 인주공단교차로 버스정류소, 종점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구룡교 북단 아래 쉼터정자 옆이다.
이렇게 소개된 서해랑길 84코스를, 85코스 시작점에서 역방향으로 출발하여 84코스 시작점에서 종료하였다. 서해랑길 84코스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에서 출발하여 북진한 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걸어온 충청남도 지역과 작별하고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로 진입하는 감격적인 탐방 코스이다. 지난해 2023년 6월 28일 서해랑길 55코스 탐방 때 전라북도 군산에서 충남 서천으로 넘어와서 10개월 동안 충청남도 지역의 28개 코스 서해랑길을 탐방하며 여름에서 봄까지 세 계절의 풍경 변화를 누렸다. 그리고 84코스에서 충청남도 지역과의 오랜 만남을 아쉽게 작별하고 경기도 지역으로 들어가 새로운 만남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서해랑길 84코스 역방향 탐방은 이 모든 벅찬 감정을 빼앗아 버렸다. 그렇지만 어찌하랴. 안내트레킹팀에서 진행하는 과정을 따를 수밖에. 섭섭함과 아쉬움, 슬픔을 날려 버리고 출발한다. 서해랑길 84코스 역방향 탐방을 2부로 나누어 기록한다.
2-1.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제2부 : 아산시 인주면 모원리 안논들 농로를 따라간다. 비 내린 뒤의 봄날 오후 날씨는 쾌청하여 마음이 가볍다. 드넓은 들녘은 거칠 것이 없이 활짝 열려 펼쳐져 있는데, 이 수평적 공간에 수직적으로 아담한 누각이 솟아 있다. 누각은 쉼터를 겸하여 사방을 전망하는 쉼터전망루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누각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누각에 올라가서 풍경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누려야만이 탐방의 제 맛을 느끼는 것이다. 일행들은 앞으로 진행하고 혼자서 누각으로 올라가 영인면과 인주면 지역을 사방으로 살피며 위치를 가늠한다. 영인산 왼쪽 아래가 영인면 면소재지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이며 옛 아산현의 관아가 있었던 지역이다. 현재의 영인초등학교 자리에 관아의 핵심시설이었던 객사(客舍) '아주관(牙州舘)'이 있었으나 사라졌으며, 그 문루인 여민루(慮民樓)는 영인초등학교 입구에 남아 있다. 아산현 관아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산향교가 자리하고 있어 아산 교육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영인산 뒤 동남쪽 지역에 아산시청과 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현충사 그리고 청백리의 대명사 맹사성을 기리는 맹사성 기념관이 있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쉼터전망루에서 영인산 너머를 그리움으로 추억한다. 지난 시절 찾아갔던 영인초등학교와 여민루(慮民樓), 급진개화파 김옥균의 무덤이 있는 김옥균선생유허(金玉均先生遺墟), 아산현충사와 민족의 영웅 충무공 묘소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쉼터전망루에서 봄날의 맑은 빛에 반짝이는 풍경을 조망하고 있으니, '江湖(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興(흥)이 절로 난다'는 맹사성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1절이 절로 흘러나온다. 청백리의 상징이자 명재상인 아산 출신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자연 속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는 삶의 즐거움을 네 계절로 나누어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를 노래했다. 당시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른 군왕에 대한 충성심이 '亦君恩(역군은)이샷다'라는 구절로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자연의 삶을 노래한 명작임에 틀림없다. "江湖(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興(흥)이 절로 난다/ 濁醪溪邊(탁료계변)에 錦鱗魚(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閑暇(한가)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江湖(강호)에 여름이 드니 草堂(초당)에 일이 없다/ 有信(유신)한 江波(강파)는 보내나니 바람이다/ 이 몸이 서늘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江湖(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小艇(소정)에 그물 실어 흘리 띄여 던져 두고/ 이 몸이 消日(소일)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江湖(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한 자가 넘는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縷繹)으로 옷을 삼아/ 이 몸이 춥지 아니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봄이면 시냇가에서 천렵하고, 여름이면 강가에서 강바람 맞으며 더위를 잊고, 가을에는 뱃놀이를 즐기고, 겨울에는 눈 덮인 설경을 누리는, 자연 속에서 안분지족하는 삶이 잘 표현되어 있다. 맹사성의 시대와는 달리 현대인은 문명의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자연 속의 삶에 대한 동경은 영원하다.
아산시는 조선시대 온양군, 아산현, 신창현 지역이었다. 이 3개 군현이 1914년 아산군으로 통합되었으며, 1986년 온양시가 분리독립되었다가 1995년 아산군과 온양시가 아산시 지명으로 통합되었다. 걸어온 아산시 영인면 지역과 현재 자리한 인주면 지역은 옛 아산현 지역이며, 아산현 관아는 현재의 영인면 아산리 영인초등학교 위치에 있었다. 아산현 지역은 온양군 지역과는 달리 아산만 바다와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 아산현을 노래한 한시를 음미하며 아산 지역을 상상해 본다. 임진왜란 시기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던 해평(海平)이 본관인 윤두수(尹斗壽, 1533~1601)는 임진왜란 전에 전국을 주유(周遊)하며 한시를 남겼다고 한다. 그 중에 아산현을 노래한 시가 그의 시문집 『오음유고(梧陰遺稿)』에 있는데, 아산현 객사인 아주관(牙州舘)에서 차운한 '아산객사차운(牙山客舍次韻)' 칠언절구이다. "山勢西奔到水窮(산세서분도수궁) 산세는 서쪽을 달려 바다에 이르러 다하고/ 荊榛古縣又秋風(형진고현우추풍) 오래된 옛 현에 또 가을바람 부는구나/ 南樓縱目知何處(남누종목지하처) 남쪽 누대에서 보이는 어느 곳을 알까/ 十里漁村落照紅(십리어촌낙조홍) 십리 어촌에 낙조만 붉어라"( 온양신문, 유은정의 '행복한 아산만들기' 참조) 윤두수는 '아산객사차운(牙山客舍次韻)'에서 아산현 지역의 바다 풍경을 읊고 있다. 영인산과 입암산 줄기가 아산만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노래한 것일까? 아산만 포구의 어촌에 붉은 낙조가 어리는 풍경을 읊은 것 같다. 삽교천방조제와 아산만방조제가 생겨나기 전,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아득한 시대, 바닷물이 아산현 지역을 에워싼 당시의 아산현 풍경을 상상한다.
모원리 안논들 쉼터전망루에서 내려와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인 서부내륙고속도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공세3리 새원마을로 들어오면 신풍산 자락의 공세1리 마을과 입암산 자락의 피나클랜드 수목원이 가늠된다. 탐방길에서 확인되고 가늠되는 위치와 그 유래를 알아보는 것은 탐방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서부내륙고속도로 공세리 구간, 피나클랜드 수목원, 신풍산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공세리 신풍산은 조운(漕運)하는 군졸들이 해운할 때에는 반드시 이 산에 올라가 순풍이 불기를 기도하였으므로 ‘신풍산(信風山)’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현재 공세리성당이 있는 곳에 자리했던 공세곶창(貢稅串倉)의 중요성이 분명히 확인된다.
공세3리 새원마을 농가의 벽화에는 농민들의 일상이 평화롭게 그려져 있다. 오늘날도 저 평화로운 모습대로 농민들의 생활이 꾸려지는지 길손은 알지 못한다. 벽화 풍경이 현실처럼 또 소망처럼 봄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새원마을에서 '공세지하통로2'로 가는 길은 새하얀 꽃길이다. 조경수로 조성된 공조팝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자잘한 꽃송이들을 하얗게 빛내고 있다. 꽃길의 축복을 받으며 봄날을 흐르는 기분을 느낀다. 멈추어 더 머물고 싶다. 길동무들은 벌써 국도 제39호선 '아산로'의 공세지하통로2를 통과하여 보이지 않는다. 어서 따라가야지. 마음이 급해진다. 그들의 뒤를 따라 '공세지하통로2'를 통과하여' 공세정미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길동무와 만났다.
2-2.공세리성당의 아름다움과 순교자의 상흔
공세길을 따라 공세리성당 방향으로 올라간다. 대내산에 공세리성당이 있고, 왼쪽 파란 지붕의 '인주농협하나로마트 공세점' 건물 오른쪽이 아산 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이다. 서해랑길을 따라가야 공세리 비석군(貢稅里碑石群)과 공세곶창(貢稅串倉) 석축 앞의 공세곶고지(貢稅串庫址) 설명안내판을 볼 수 있는데, 일행은 서해랑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공세곶고지 동쪽 아래를 통과하여 공세리성당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 진행을 어찌 따라가지 않을 수 있을까? 공세리 성당 오르는 아산공세곶고지 동쪽길에 공세리성당과 관련한 내용들을 적은 여러 게시판들이 전시되어 있고 박씨 삼형제 순교자상 입구에 밀양 박씨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등 박씨 삼형제 순교자를 소개하는 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그 길을 올라가면 공세리성당 입구를 지키는 수령 350년이 넘는 팽나무가 맞이한다. 이 팽나무는 성당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나무'라고 불린다. 공세리성당 경내에는 이 팽나무만이 아니라 느티나무, 피나무 등 노거수(老巨樹)들이 푸르름을 간직하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공세리성당의 고딕 건물이 이 노거수들과 어우러진 풍경이 단연 공세리성당을 대표하는 것 같다. 특히 성지박물관 뒤 드비즈 광장의 수령 150년 피나무 한 그루에 놀랐다. 이렇게 치솟은 피나무를 이번에 처음으로 보았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 중 제5곡 '린덴바움'이 이 피나무이다. 이제까지 관심을 가지고 피나무를 살펴보았는데 이번에 만난 이 피나무가 지금까지 본 피나무들 중 가장 오래되고 높이 솟았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있는 보리수/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일절을 불러보았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공세리성당을 한 바퀴 돌아 성모상 앞으로 나왔다. 좀더 주의를 기울여 자세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이곳에서 북쪽 아산만을 조망했어야 하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다. 이곳은 조선시대 세금으로 거둔 곡식(稅穀)을 보관했던 조창(漕倉)인 공진창(貢津倉)이 있던 자리인데 아산만으로 돌출한 곶(串)의 지형을 이루어서 '공세곶(貢稅串)'이라 불렸다. 80여 칸의 공진창(貢津倉)은 사라졌고, 공진창을 둘러싸았던 창성(倉城)의 흔적은 현재 남벽 쪽의 길이 10m, 높이 4m 정도의 석축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유적을 '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라고 부른다. 이 '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에 공세리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유-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 지역의 순교자 삼십이 위를 모신 순교자 묘지가 있다.
공세리성당은 1895년 간양골성당이 공세리로 이전하였는데, 에밀 피에르 드비즈(Emile Pierre Devise, 1871~1933. 한국명 성일론成一論) 신부가 공진창 터를 매입하여, 1899년 8월에 한옥식 성당을 건축하면서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드비즈 신부는 이후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오늘의 공세리성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세리성당은 아름다운 성당이다. 그렇지만 순교의 상흔이 너무 깊다. 신념이 절대자에게로 향하면 신앙심이 될 것이며 신앙심에 박해가 가해질 때 신앙심에 따라 절대적 신앙인은 순교할 것이다. 신념이 약하고, 절대에 대한 신념은 전무하여 신앙심은 전혀 없는 길손에게는 그것이 무서울 뿐이다. 오늘날 종교로 인한 분쟁과 전쟁, 살상이 일어날 때면 종교가 두렵고 더욱 무섭다.
공세리성당 입구 공세길로 내려와 헤어졌던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이곳에서 걸어오지 않은 서해랑길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 석축과 설명안내판, 공세리 비석군(貢稅里碑石群)과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運判官碑)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모른 채 멍청하게도 공세리 성당 입구 맞은편 입암산 등산로 입구 앞으로 가서 입암산 산행을 꿈꾸었다. 그날을 꿈꾼다, 입암산에서 영인산으로 이어지는 산행을.
2-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공세길을 따라 공세4리와 공세6리, 공세5리를 거쳐 공세교차로를 지난다. 아산소방서 인주119안전센터 맞은편 비닐하우스에 인주3공구 개발을 반대하고 보상 대책을 강구하라는 펼침막이 세 개 붙어 있다. 인주3공구 개발에 대한 지역민들의 분노가 표출되어 있다. 길손은 인주3공구 개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탐방을 마친 뒤 알아 보이, 인주일반산업단지 3공구는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신성리, 밀두리, 걸매리에 걸쳐 사업 면적은 1,817천㎢(549,643평)이다. 자동차 및 트레일러 제조업, 전기장비 제조업, 기타 기계 및 장비 제조업 등의 업종을 유치해 자동차 관련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며, 북쪽에 산업단지, 남쪽에 주거단지가 조성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발과 관련하여 주민들과 좀더 상세한 협상이 있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관람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가 생각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단순하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산골 마을에 연예기획사에서 글램핑장을 건설하려고 한다. 마을 위쪽에 글램핑장과 정화조가 건설되면 주민들이 사용하는 식수가 오염될 문제가 있다. 하류 쪽에 사는 주민들은 상류 쪽에 건설하려는 정화조의 위치를 변경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과 사업체 직원과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서사가 된다. 자연의 숲과 사슴, 인간들은 생태계를 이루어 조화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자연을 개발한다. 이 개발의 배후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은 상호 경쟁하고 보완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 각각의 생명체는 결코 악이 아니며 생존의 현장에서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이며 자본주의 체제를 굴리는 구성요소일 뿐이다. 영화의 결말이 뚜렷한 주제를 부각하지 않고 상징 장면으로 처리된다. 죽을 듯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가 상징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이 거친 숨소리는 사슴을 포획하려는 인간, 자연을 개발하려는 인간, 자연과 더불어 사슴처럼 살아가려는 인간, 이들 모두를 품은 자연 생태계 등 모두의 숨소리이며 그들 모두가 죽을 듯 힘겹게 살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톱니 같다. 순응이든 저항이든 자본주의 체제 속 모든 구성 요소로서 그들은 결코 악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이 영화의 숨은 주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세교차로를 지나 국도 제34호선 서해로 옆 보도를 따라 공세리에서 신성리로 들어가 신성리 버스정류소을 거쳐 타이어클럽 건물 옆 오른쪽 골목길로 진입하여 신성리 마을회관 앞을 통과한다. 서해로532번길은 밀두리 들녘으로 이어진다. 드넓은 밀두리 들녘에서 다시 영인산과 입암산을 바라보며 아산시 영인면과 인주면 지역의 위치를 그려본다. 인주면 면소재지 밀두리는 서남쪽에 펼쳐져 있고, 인주중학교는 밀두리 농로 왼쪽 감나무골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의 인주면 문방리 언덕의 흰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은 동화기업(주) 아산공장이며, 이 공장과 가까이 자리했던 인주중학교는 동화기업(주) 아산공장의 악취와 분진 때문에 2020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밀두리 들녘을 가로지르는 밀두천은 입암산 아래의 냉정저수지에서 흘러내려 인주산업단지 옆을 흘러 아산만으로 유입된다. 서해랑길은 밀두천을 따라 밀두리 들녘을 흘러간다. ‘밀두(密頭)’는 해안으로 밀려오는 밀물의 머리쪽이란 의미로 밀머리라 하였는데, ‘밀머리’를 한자로 옮겨 ‘밀두(密頭)’가 되어 이 지역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삽교천방조제와 아산만방조제가 축조되기전에는 이곳까지 밀물이 밀려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밀두교를 건너 서해랑길은 밀두리 인주휴먼시아 아파트 방향의 밀두리 네거리로 올라간다.
밀두리 네거리 인주휴먼시아 아파트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인주면 걸매리, 목적지인 인주면 걸매리 인주산단로 문방2교는 코 앞이다. 걸매리는 현재 아산시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직접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걸매리’ 지명은 새롭게 개척된 넓은 황무지란 뜻의 우리말 ‘걸매’를 한자를 빌려 ‘걸매(傑梅)’로 쓴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문방2교 앞에서 아산만방조제 방향을 바라보면 드넓은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이 풍경은 새롭게 개척된 넓은 황무지 '걸매'에 꼭 들어맞는다. 지난 시절 갯벌이었던 이곳은 농지로 간척되었고, 앞으로 해안 쪽에는 공업단지, 그 안쪽에는 주거단지가 자리하게 될 것이라 한다.
서해랑길 84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친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에서 충남 아산시로 넘어와 둔포면 신남리, 영인면 창용리, 구성리, 백석포리, 인주면 모원리, 공세리, 신성리, 밀두리, 걸매리 지역을 통과하여 걸매리 인주산단 앞을 흐르는 밀두천의 문방2교에 왔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지역과 충남 아산시의 세 개 면(面), 9개 리(里) 지역을 통과하였다. 먼 길을 걸어와 문정희(1947~) 시인의 '먼 길'을 모방하여 잘 견뎌준 몸과 몸을 이끌어준 신발을 칭송한다.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 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 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 문정희의 '먼 길' 전문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8.3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45분
인주면 모원리 안논들 농로를 따라간다. 앞의 쉼터 전망루에 올라가 풍경을 조망하고 서해랑길을 이어간다. 앞의 공사 중인 축대는 평택-부여-익산의 서부내륙고속도로인 것 같다.
모원리 안논들이 펼쳐져 있고 왼쪽에 세일철강(주) 아산공장, 중앙에 서해선 아산고가교, 오른쪽 뒤에 월랑산이 솟아 있다.
걸어온 안논들 아산호로20번길 농로, 중앙에 서해선 아산고가교, 왼쪽에 원랑산, 중앙에 고용산, 오른쪽은 거문이들이다.
앞쪽은 인주면 모원리 안논들,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지나는 끝쪽은 영인면 월선리 거문이들, 중앙에 금산이 솟아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와 음봉면 신수리 경계에 있는 금산(錦山)은 『1872년 지방지도(1872年地方地圖)』「아산」편에 일북면 동심산과 수항치 사이에 ‘금산(錦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금산 위에 돌로 쌓은 성 100여 간이 있어 ‘성재’라고도 한다. 금산은 높이 251m이며, 아산시 북부에 있는 산이다. 금산보다 북쪽에 있는 고용산[296m]처럼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금산의 능선이 동서 방향으로 발달해 있어 산세는 대체로 동서 방향으로 길게 발달해 있다. 금산을 이루는 기반암은 선캄브리아기 경기 편마암 복합체를 이루는 온양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 북서부에 중생대 쥐라기 때 관입한 흑운모 화강암이 일부 분포하고 있다. 정상의 남쪽으로는 중생대 백악기에 관입한 맥암류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분포하고 있다. 금산 아래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에 금성마을이 있다. 금성마을은 ‘쇠재’라고도 하며 옛날 질그릇을 구웠던 곳이다. 동쪽으로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이충무공 묘가 있고, 서쪽으로는 아산의 옛 고을 터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주면 모원리 안논들 뒤쪽은 영인면 월선리 지역, 왼쪽 뒤에 영인산, 오른쪽 뒤에 입암산, 그 왼쪽 자락에 피나클랜드 수목원이 있을 것이다. 오른쪽의 산은 신풍산인 것 같고, 그 아래에 공사 중인 축대는 평택-부여-익산의 서부내륙고속도로인 듯.
영인면(靈仁面)은 지리적으로 아산시의 북부에 있으며 남으로는 아산시의 염치읍, 서쪽은 인주면, 동쪽은 음봉면과 둔포면, 북으로는 아산호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마주하며 충청남도 북단의 도계를 이루는 면이다. 13개 법정리를 관할하며 영인산을 주산으로 하여 너른 농경지와 북쪽으로 아산호를 끼고 있어 수려하고 깨끗한 자연경관을 지닌다. ‘영인(靈仁)’은 고려 성종 때 당시 인주(仁州)의 별호(別號), 즉 별도의 이름으로 정하였던 ‘영인(寧仁)’에서 유래하였다. ‘영인(寧仁)’은 『고려사』의 지리지 외에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영인(寧仁)’이라는 별호가 등장하며 "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금 쓰고 있는 ‘영인(靈仁)’과는 한자 표기만 다른 것이다. 지명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어가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지만 ‘영인’이란 지명으로도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영인면은 조선시대 아산현의 관아가 있던 중심 지역으로 1914년 일제가 행한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현내면과 일북면, 이북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아산군 영인면이 되었다. 1922년 아산군청이 온양읍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아산군청이 있었으며,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영인면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호로20번길 농로 왼쪽은 공세리, 그 오른쪽은 모원리, 공사 중인 서부내륙고속도로 오른쪽 끝은 국도 제34호선 '장영실로'의세원교차로인듯. 왼쪽의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공세리로 넘어간다. 그 뒤에 공세리성당 십자탑이 보인다.
모원리 안논들 뒤에 국도 제34호선 '장영실로', 오티스엘리베이터아산CLC, 그 오른쪽에 (주)서영KMC KD 센터 건물이 있다.
인주면 모원리 안논들이 펼쳐지고 맨 왼쪽에 (주)서영KMC KD 센터, 중앙에 세일철강(주) 아산공장이 있다. 쉼터 조망루에서 사방을 조망하고서 조망루를 내려간다.
쉼터 조망루에서 내려와 해수침투 관측공을 살핀다. 염수에 의한 지하수 오염을 감시하는 관측시설물이라고 한다.
모원리 안논들 아산호로20번길 농로를 따라와 오른쪽 쉼터 조망루에 올라 조망하였다.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영인면과 인주면 사이를 가로지르고, 왼쪽 뒤에 원랑산, 중앙에 고용산이 솟아 있으며, 맨 오른쪽은 금산 줄기이다.
농로 왼쪽은 공세리, 오른쪽은 모원리 지역이다. 앞쪽은 신풍산, 그 왼쪽 뒤는 입암산인 듯. 서해랑길은 공사 중인 서부내륙고속도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공세리로 넘어간다.
아산시 공세리 신풍산(信風山)은 1855년(철종 6) 이호빈(李浩彬)이 편찬한 충청도 아산군[지금의 아산시] 읍지인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에 따르면, 조운(漕運)하는 군졸들이 해운할 때에는 반드시 이 산에 올라가 순풍이 불기를 기도하였으므로 ‘신풍산’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충남 아산시 신풍산은 인주면 공세리에 독립 구릉으로 발달해 있다. 『신정아주지』에는 신풍산은 아산현의 서쪽 십 리[약 4㎞] 거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바다에 접하여 우뚝 솟아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북쪽의 자그마한 언덕에는 공진성이 있고, 서쪽의 일맥(一脈)이 뱀처럼 길게 바다로 달려 들어가 서리어 누워 있는데, 이곳을 작계라고 하였다. 또한, 뱃사공의 노 젓는 노랫소리와 함께 돛단배들이 조수 물과 함께 임의로 내왕하고 있어, 아산현의 서쪽에 있는 명승지라 기록하고 있다. 신풍산은 입암산과 대내산 사이에 있는 산으로, 현재 천주교 공원묘원이 자리하고 있다. 대내산에는 공세리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마을 주민들은 ‘신풍산’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사중인 서부내륙고속도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북쪽 방향을 바라보면 공세3리 마을과 새원교차로가 보인다.
서부내륙고속도 남쪽 방향을 바라보면 공세교차로 국도 제39호선 '아산로'의 공세교차로가 보이고 맨 뒤에 영인산이 살짝 보인다. 맨 오른쪽 산은 신풍산이며 그 아래쪽은 인주면 공세1리마을, 중앙 뒤는 영인면 월선3리 마을인 것 같다.
아산호로20번길을 따라 공세3리 새원마을 앞을 통과한다. 신풍산 아래는 공세1리 마을이며 산 중턱의 기와 건물은 사찰인 듯.
공세리(貢稅里)는 공세1리~공세6리의 6개 행정리로 구성되었으며, 공세1리는 꽃동네, 동강, 하름말, 창안의 자연마을이 있고, 공세2리는 서강, 창안의 자연마을이, 공세3리는 새원마을, 공세4리는 천등말마을이 있다. 공세5리와 공세6리는 2000년대 이후 분구된 마을로 각각 기산현대아파트와 대진아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공세리는 마을 동쪽으로 인주면 모원리와 영인면 월선리, 남으로 인주면 냉정리, 서쪽으로 신성리, 북으로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충청남도 도계를 이루는 북단 마을이다. 공세리 마을 북쪽으로는 돈부리들, 이양청들, 새원들, 아산말들 등이 있어 벼 재배가 주요 소득원이다. 또한 1895년 지어진 공세리성당이 있으며, 종기 치료제로 유명한 이명래고약이 탄생한 지역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호로20번길 45-25호 농가에 농민의 일상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아산호로20번길 45-25호 농가에는 벽화가 벽 양쪽 두 군데에 그려져 있다.
국도 제39호선 아산로가 오른쪽 아산만방조제로 이어진다. 오른쪽 뒤 대내산에 공세리성당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아산로의 공세지하통로2를 통과하여 공세릿헝당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공세3리 꿈과 행복이 있는 새원마을' 표석을 돌아 오른쪽에 있는 '공세지하통로2'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부내륙고속도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아산호로20번길 45-25호 농가 앞을 거쳐 공세3리 새원마을 표석 앞으로 이어왔다.
공조팝나무 꽃이 하얗게 핀 아산호로20번길을 따라 '공세지하통로2'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위 도로는 국도 제39호선이다.
국도 제39호선 아산로의 '공세지하통로2'를 통과하여 공세2리로넘어간다.
공세지하통로2를 통과하면 곧바로 정면에 공세정미소가 있다. 왼쪽으로 꺾어 공세길을 따라간다.
왼쪽 도로는 국도 제39호선 아산로이며, 서해랑길은 아산로 아래 공세길 충남건업 앞에서 오른쪽 공세길을 따라간다.
공세길을 따라 올라간다. 오른쪽 대내산에 공세리성당이 있고, 왼쪽 파란 지붕의 인주농협하나로마트 공세점 건물 오른쪽이 아산 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이다. 서해랑길을 따라가야 공세리 비석군(貢稅里碑石群)과 공세곶창 석축 앞의 공세곶고지 설명안내판을 만날 수 있는데, 서해랑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공세곶고지 동쪽 아래를 통과하여 공세리성당으로 올라간다.
아산 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는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조선시대 공세곶창[공진창] 유적이다. 공세곶(貢稅串)은 영인산 북서쪽 산줄기의 입암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신풍산 북쪽에 거북 목처럼 작은 봉우리로 형성된 곶이다. 내륙 깊숙이 형성된 아산만의 가장 안쪽에 바다로 돌출되어 있는 수로 교통의 요지로, 서해의 바닷물이 그 좌우까지 들어왔다. 공세리 북쪽은 안성천 하구이고, 서쪽 약 4㎞ 지점은 삽교천 하구여서 조선시대에는 흔히 두 하천이 만나는 곳으로 표현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공세곶은 1425년(세종 7)부터는 아산현의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조창(漕倉) 기능을 갖기 시작했다. 그 뒤 1478년(성종 9)에 삽교천 하류에 있던 면천 범근내포의 조창 기능이 공세곶창으로 통합되고 수납 지역이 확대되어 금산을 제외한 지금의 충청남도 전 지역과 경기도 평택, 충청북도 옥천, 청주 등을 포함하여 충청 지역 40개 군현의 세곡을 모아 조운하는 주요 조창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창사(倉舍)가 없어 연해안 포구에 노적하였는데, 1523년(중종 18)에 이르러 80여 칸의 창고를 짓고 ‘공진창’이라 일컫게 되었다. 1631년(인조 9)에는 창고를 둘러싸는 창성(倉城)을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380척[115.14m], 높이가 5척 5촌[약 1.7m]쯤이었다. 공진창에는 세곡미 800석을 적재할수 있는 15척의 조운선과 720여 명의 조군[조졸]이 있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해운판관[종5품]이 상주하는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로 민간 운송업이 점차 활발해져 수납 지역이 점차 축소되고, 1762년(영조 38) 해운창 제도가 폐지되어 해운판관 대신 충청도사가 조운을 담당하게 되었다. 공진창은 인근 여섯 개 고을, 이후 세 개 고을의 조운만 이루어지게 되자 마침내 아산현감이 관리하게 되었다. 1865년(고종 2)에는 그나마 조창제가 폐지되어 공진창도 기능을 잃게 되었다. 방치되고 있던 공진창 터 일부는 1897년에 공세리성당의 주임신부였던 에밀 피에르 드비즈가 매입하여 성당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공세곶고지 아래를 통과하여 공세리성당으로 올라간다.
아산공세곶고지의 일부는 공세리성당, 일부는 인주농협 창고와 사무실로 이용되고 일부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창성(倉城)의 흔적으로 남벽 쪽의 길이 10m, 높이 4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남문거리에 여섯 기의 삼도해운판관비가 남아 있다. 주변에는 아산만방조제[1974년]와 삽교천방조제[1979년]가 축조되었고, 공세곶 바로 북쪽은 국도 39호선과 국도 24호선이 교차하는 교차로가 조성되어 있다. 한편, 아산공세곶고지 북쪽 일대는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아산공세곶고지는 1979년 7월 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아산공세곶고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일대가 조선시대 해운의 요충지였으며, 조선시대의 조운 제도와 주요 조창의 하나였던 공세곶창[貢稅串倉, 공진창]의 번성과 축소, 폐지의 변화 과정을 잘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더불어 퇴적과 간척 등에 의한 지형과 지리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공세곶고지 동쪽에 공세리성당과 관련한 내용들을 적은 여러 게시판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씨 삼형제 순교자상 입구에 밀양 박씨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등 박씨 삼형제 순교자를 소개하는 게시판이 전시되어 있다.
공세리성당 올라가는 오른쪽 터에 밀양 박씨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등 박씨 삼형제 순교자상이 조성되어 있다.
순교자 박씨 삼형제상 빈터에서 아산시 영인면 지역의 고용산(왼쪽)과 금산(오른쪽)을 조망한다.
공세리성당 경내에는 여러 수종의 노거수(老巨樹)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앞의 나무는 '문지기' 팽나무이다.
공세리성당 건축물은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간직했기에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공세리는 원래 조선시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했던 조창(漕倉)인 공진창(貢津倉)이 있던 자리이다. 17세기부터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세금을 베 또는 돈으로 내거나 사선(私船)을 임대하여 직접 경창(京倉)으로 운반함에 따라 점차 조창의 기능이 약화되다가, 19세기 고종 때 폐지되었다. 마을에는 지금도 조운의 책임을 맡았던 해운판관 등 관리들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들과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어 조창이 운영되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1890년 천주교 조선교구는 내포 지역인 예산 고덕 양촌과 교우촌이 있던 간양골에 성당을 설립하고 각각 퀴를리에(L. Curlier)[레오] 신부와 파스키에(P. Pasquier)[베드로] 신부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 때문에 퀴를리에와 파스키에 신부는 교구장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파스키에 신부가 병이 들어 홍콩으로 요양을 떠나는 바람에, 1895년 간양골성당을 아산 공세리로 이전(移轉)하였다. 초대 아산공세리성당 주임으로 임명된 에밀 피에르 드비즈(Emile Pierre Devise)[한국명 성일론(成一論)][1871~1933] 신부는 부임 1년 만에 명동성당[교구청]의 당가(當家)[사무처장] 신부로 발령을 받았고, 후임으로 기낭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런데 기낭 신부 역시 1년 만에 공주본당 창설을 위해 유구 요골[명곡리]로 전임(轉任)하여, 드비즈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다시 부임하였다. 이후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총 35년간 재임하면서 열정적인 선교와 사목(司牧) 활동을 벌여서 지역 천주교회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드비즈 신부가 먼저 한 일은 공진창 터를 매입하여, 1899년 8월에 한옥식 성당을 건축한 일이었다. 그리고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아산공세리성당은 대전교구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으로, 이후에 지어진 합덕성당[1929년], 예산성당[1934년], 공주 중동성당[1936년] 등 다른 성당의 건축적 모델이 되었다. 또한 아산공세리성당은 주변 자연 환경과 어우러지며 풍기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아산 지방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리성당 입구에 수령 350년의 노거수 팽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수종 : 팽나무, 지정일 : 1982.11.10. 수령 : 350년. 이 나무는 높이가 24M에 달하고 나무 둘레가 6M에 가깝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공세리성당 건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성당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품위있게 한다. 자연스레 지형에 맞춰 자란 뿌리와 패이고 갈라진 웅장한 나무줄기는 그동안 평탄치 않은 세월의 한을 한아름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나무는 공세리성당 '문지기 나무'로 불려지며 성당에 들어서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할 뿐 아니라 웅장하게 뻗은 나무 그늘에 잠시 머물러 있노라면 세속에 짜들고 지친 마음들이 차분하게 정화되고 새로워짐을 느낄 수 있다. - 설명안내판
'십자가의 길'을 한 바퀴 돌아 성지박물관 앞쪽으로 나온다. 예수의 행적을 형상화한 작은 조각상들이 14곳에 조성되어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길로 예수님의 사형선고로 시작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며 묻히시는 과정을 14처에 담아놓았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크나큰 사랑을 느끼고 체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들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법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설명안내판
사제관 뒤쪽에서 공세4리와 6리 남서쪽 마을을 바라본다. 공세6리 대진아파트 건물이 중앙에 보인다. 오른쪽 맨 뒤 흰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은 인주면 문방리 동화기업(주) 아산공장이다.
순교자 묘지 뒤쪽의 드비즈광장 입구에 수령 250년 느티나무 2그루가 솟아 있다.
수종 : 느티나무, 지정일 : 2013.3.14. 수령 : 250년. 이 느티나무 높이는 27m이고 둘레는 4.2m 낙엽활엽교목으로 청년기에 있는 느티나무이며 같은 위치에 나란히 두 그루가 서 있어서 일명 쌍둥이 느티나무라고도 부른다. 현 성당이 건축되기 전 옛 성당 앞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교우들이 성당에 와 쉬면서 좌담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순교자 현양탑 뒤에서 수많은 박해와 고난 속에도 신앙을 지켜냈던 순교자들의 영혼을 말없이 지켜보며 그 순교자들의 영혼을 시원한 그늘로 감싸안으며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함께하고 있는 것 같다. - 설명안내판
성지박물관 뒤 드비즈 광장에 수령 150년 피나무가 솟아 있다.
수종 : 피나무, 지정일 : 2015.4.14. 수령 : 150년. 이 피나무의 높이는 20m이고 둘레는 2.8m로 아욱목의 낙엽활엽교목으로 보기드문 노거수이다. 꽃자루에 커다란 포가 있는 것이 특징이며, 수피가 발달한 섬유자원이기도 하다. 목재는 연하고 가공하기 쉬우며 뒤틀리지 않아서 귀중한 가구재로 악기, 바둑판, 조각상, 밥상 등의 재료로도 사용되어지며, 꽂은 꿀이 많아서 밀원식물로 이용되고 어린 꽃봉오리는 그늘에 말려서 차로 마시기도 하고 열매는 묵주알로도 사용되어진다. - 설명안내판
성지박물관 뒷벽 앞에 지난 시절의 농기구 탈곡기, 생활 용구 나무절구와 나무공이가 전시되어 있다.
성지박물관 뒷벽 앞에 생활 용구인 풍구, 화로, 재봉틀이 전시되어 있다.
성지박물관 앞 성당 성전옆에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가 푸르게 하늘로 치솟아 있다.
수종 : 느티나무, 지정일 : 1982.11.1. 수령 : 300년. 이 나무의 높이는 31m 이고 둘레는 5.5m로서 웅대하고 고색창연한 천주교 성전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공세곶창지로 잘 알려진 이곳은 조선 성종 9년(1478)에 세곡해운창을 설치 운영하다가 종종 18년(1523) 80칸의 창고를 짓고 충청·전라·경상도의 3도로부터 거둔 세곡을 이곳에 집합, 조운선 15척으로 황해 500리 물길을 이용, 서울로 운반한 항구였다. 그 후 인조 9년(1631)경 당시 세곡 상·하역하는 사람들의 휴식처로 활용하기 위하여 성곽 옆에 많은 나무를 심었는데 이 나무는 그 중의 하나이며 영조 38년(1762) 해운창 폐지에 따라 이곳 조창도 폐지되었다. 이 나무는 고종 31년(1894)에 현 천주교 성전 건립 당시 성곽으로부터 3m 아래인 현 위치로 옮겨져 역사의 부침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 설명안내판
신유-병인박해 순교자 삼십이 위 순교자 현양비가 앞에 세워져 있고, 그 뒤에 순교자 묘지가 있다.
이곳은 천주교를 박해하던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1873년 병인박해가 끝날 때까지 단지 천주(하느님)를 믿고 공경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으신 공세리 지역의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아산지역의 첫 순교자는 1825년 3월에 체포되어 해미에 투옥되었다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 하 바르바라를 시작으로 특히 병인박해 때 걸매리 출신 박씨 일가는 물론 박홍갑, 오인악, 박제환(베드로) 등은 당시 불과 18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광스런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고귀한 목숨을 아낌없이 비치면서까지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던 이곳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삶과 얼, 정산을 우리는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 평생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순교자 박원서 마르코) - 설명안내판
'십자가의 길'을 한 바퀴 돌아 성모상 앞으로 나왔다. 왼쪽 뒤에 순교자 묘지, 오른쪽 뒤에 성지박물관이 있다.
내포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그 터전이 넓은 데다가 신자 수 또한 어느 지역보다 많아 오랫동안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교회 조직의 재건과 확대를 위해 내포의 중심 지역에 천주교 성당[본당]을 세운 것이다. 1890년에 양촌과 간양골에 두 개의 성당을 세웠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으로 1895년에 선교를 위한 입지 조건이 훨씬 좋은 공세리로 간양골성당을 이전하게 된 것이다. 1922년에 지은 성당과 사제관은 지역의 명물이 되었다. 1970년에 성당 내부의 목재 기둥과 북측의 제대가 있는 곳을 헐고 ‘T’ 자형의 ‘성 안토니 십자형’으로 증축하였다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아산시의 지원을 받아 2001년 성당과 옛 사제관을 원형대로 복원하였으며, 새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사업 등도 병행하여 2년 뒤인 2002년 10월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8월에는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였다. 2008년 9월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아산공세리성당의 기원과 성전 건축, 박해와 순교자, 6·25전쟁 때의 고난 등을 중심으로 특화시킨 아담한 공세리 성지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리 성당을 대충 살피고 내려오면 언덕 아래에 노거수가 치솟아 있고, 공세곶창지碑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조세미(粗稅米)를 보관하던 창고인 조창(漕倉)이 있던 자리이다. 조창은 수송이 편리한 수로(水路) 연변에 설치 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아산현 창고조(條)에는 이곳에 중종 18년(1523) 80칸의 창고를 짓고 아산·한산·연산·당진 등 인근 40 개 고을의 세곡(税穀)을 거두어 보관하였다가 아산만의 물길을 이용해 60척의 조운선으로 서울 경차(京倉)으로 수송하였다고 한 다. 이러한 조창은 영조 38년(1762)에 충청도 해운관이 폐지되면서 기능이 약화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없어졌는데 지금도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은 편리한 해운교통 때문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천주교 박해 당시 이를 피해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 유입,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1886년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에는 걸매리에 거주하는 박익서·박원서·박의서 등 천주교 신자 11명이 수원 감영에 끌려가 참수를 당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천주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1895년 도내에서는 최초로 천주교회 본당이 창설되면서 초대 성일론(에밀리온) 신부가 부임 포교활동을 하다가 1922년 군내 최초의 외국 건축양식인 고딕식 건물로 현 성당을 준공,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아산만은 삼국유사에 동명왕 주몽의 아들 비류가 고구려에서 남하, 최초로 도착하여 정착했던 곳(미추홀=밀두리)으로 고대에는 백제의 멸망을 가져온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 현장으로서, 근대에는 청일전쟁(1894.7.25.)의 시발지로 외세에 의해 전쟁터가 되는 등 우리 민족의 과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 비문 내용
수종 : 느티나무, 지정일 : 1982.11.10, 수령 : 250-300년. 이 나무는 수고가 21M이고 나무둘레는 3,9M이며 공세리성당에 들어서면서 언덕 입구에 눈에 띄게 확연히 드러나는 나무이다.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는 이 나무는 공세리성당을 대표하는 나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노쇠해서 현재 치료 중에 있다. - 설명안내판
공세리성당 주차장에 노아의 방주를 상징하는 듯한 배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고 뱃머리에는 십자가의 예수상이 붙어 있다.
1890년에 시작된 120년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공세리 성지·성당은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144호이며, 350여 년이 넘은 다수의 보호수가 있으며, 높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근대 고딕식 조적조 종교 건물로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수려한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져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명성답게 공세리 성당만의 독특한 매력과 아름다운 자태를 맘껏 뽐내고 있다. 공세리 성당의 아름다움은 이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성당이 위치한 1만여 평의 부지는 성종 9년(1478년)부터 영조 38년(1762년)까지 근 300년 동안 운영되었던 충청도 일대에서 거두어 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 창고지인 역사 유적지이기도 하다. 공세리 성당이 위치한 이곳은 내포지방의 입구로서 내포지역은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못자리라 불릴 만큼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중심지였다. 공세리 성당에는 1801-1873년 신유, 병인박해 때 이 지역에서 순교하신 32위의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는 순교 성지이기에 더욱 경건하고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공세리 성당은 1890년 프랑스 외방선교회 파스키에 신부님에 의해 예산 간양골에서 시작되어 그 후 5년 뒤인 에밀 드비즈(파리외널 교회) 신부님에 의해 지금 이 자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드비즈 신부님은 이곳에서 많은 일들을 하시는데 특이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이명래 고약으로 알려진 바로 그 고약의 원 개발자였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약을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주는데 그 비법을 당시 드비즈 신부님을 도와주었던 이명래(요한)에게 전수하여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기에 공세리 성당은 "이명래 고약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 설명안내판
공세길로 나와서 공세리성당 입구를 뒤돌아본다. 왼쪽에 공세2리 마을회관이 있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貢稅里)는 공세1리~공세6리로 이루어지며 인주면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여서 조세미를 모아두는 공세곶창[공진창]이 있었으며, 현재에는 국도 34호선과 국도 39호선이 교차하고, 아산만방조제를 지나는 국도 38호선이 평택시로 이어지는 아산시 육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공세리는 조선시대 충청 지방의 조세미를 모아 운반하던 공세곶창이 있었기에 일찍부터 공세지, 공세포, 공세곶고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자연스럽게 마을의 특징인 공세곶창의 의미를 담아 ‘공세리’라 이름 붙였다. 공세리는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있어 일찍이 어업이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포구마을이었다. 조선시대 물길이 좋아 세미를 모아 운반하는 곶창을 만들고 공진창이라 하였다. 1523년(중종 18) 80여 칸의 창고를 지어 세곡을 보관하였고, 1631년(인조 9)에는 창성을 쌓아 1865년 조창제가 폐지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이후 공세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흥면의 서강리, 하신원리와 현내면의 동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공세리라 하고 아산군 인주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리성당 입구 공세길로 나와 오른쪽에서 오는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신협 오른쪽 공세길을 따라오면 공세곶창 석축과 공세리 비석군(貢稅里碑石群)을 만날 수 있는데,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중요한 곳을 놓치고 말았다.
공세리(貢稅里)는 입암산 북쪽으로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며 아산만 앞까지 간척사업으로 너른 농경지가 분포한 마을이다. 또한 마을 앞 좌우로 국도 34호선이 지나고 국도 39호선이 남북으로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이다. 공세1리~공세6리의 6개 행정리로 구성되었으며, 공세1리는 꽃동네, 동강, 하름말, 창안의 자연마을이 있고, 공세2리는 서강, 창안의 자연마을이, 공세3리는 새원마을이, 공세4리는 천등말마을이 있다. 공세5리와 공세6리는 2000년대 이후 분구된 마을로 각각 기산현대아파트와 대진아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공세리는 마을 동쪽으로는 인주면 모원리와 영인면 월선리, 남으로는 인주면 냉정리, 서쪽으로 신성리, 북으로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충청남도 도계를 이루는 북단 마을이다. 공세리 마을 북쪽으로는 돈부리들, 이양청들, 새원들, 아산말들 등이 있어 벼 재배가 주요 소득원이다. 또한 1895년 지어진 공세리성당이 있으며, 종기 치료제로 유명한 이명래고약이 탄생한 지역이다. 현재 마을은 주민 공동체가 중심이 된 공세리마을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각종 마을 만들기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인주면사무소를 창성 안에 지었는데 1955년 밀두리로 옮기면서 면소재지의 기능 또한 이전되었다. 전에 면사무소로 쓰이던 건물은 인주고등공민학교로 쓰이다가 지금은 인주농업협동조합 공세지소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리 성당 입구 맞은편 공세길에 입암산(笠岩山) 등산로 입구가 있다. 입암산 1.6km, 영인산 7.2km 지점이다.
입암산 등산로를 바라보면 입구에 공세이발관이 있다. 이발관, 이발소 단어에는 향수가 묻어 있다.
입암산 등산로 입구에 인주파출소·공세리성당 버스정류소가 있으며 그 뒤에 인주파출소가 있다. 공세길을 따라간다.
공세리는 입암산 북쪽으로 바다를 마주하고 있으며 아산만 앞까지 간척사업으로 너른 농경지가 분포한 마을이다. 또한 마을 앞 좌우로 국도 34호선이 지나고 국도 39호선이 남북으로 이어지는 교통 요충지이다. 공세리는 공세1리~공세6리의 6개 행정리로 구성되었으며, 공세1리는 꽃동네, 동강, 하름말, 창안의 자연마을이 있고, 공세2리는 서강, 창안의 자연마을이, 공세3리는 새원마을이, 공세4리는 천등말마을이 있다. 공세5리와 공세6리는 2000년대 이후 분구된 마을로 각각 기산현대아파트와 대진아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공세리는 마을 동쪽으로는 인주면 모원리와 영인면 월선리, 남으로는 인주면 냉정리, 서쪽으로 신성리, 북으로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충청남도 도계를 이루는 북단 마을이다. 공세리 마을 북쪽으로는 돈부리들, 이양청들, 새원들, 아산말들 등이 있어 벼 재배가 주요 소득원이다. 또한 1895년 지어진 공세리성당이 있으며, 종기 치료제로 유명한 이명래고약이 탄생한 지역이다. 현재 마을은 주민 공동체가 중심이 된 공세리마을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각종 마을 만들기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인주면사무소를 창성 안에 지었는데 1955년 밀두리로 옮기면서 면소재지의 기능 또한 이전되었다. 전에 면사무소로 쓰이던 건물은 인주고등공민학교로 쓰이다가 지금은 인주농업협동조합 공세지소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소도시 지방상수도 사업으로 배수지와 송배수관 공사를 2004년 6월 17일~2007년 4월 20일에 걸쳐 완공하고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인주배수지 시민공원은 배수지가 있는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왼쪽은 공세4리 천등말 입구이며 입암산 등산로 입구이기도 하다. 오른쪽은 공세6리 지역 대진아파트 입구이다. 오른쪽 대진아파트 행복회관 뒤에 아산소방서 인주119안전센터 건물이 보인다.
공세길을 따라 공세6리 아산소방서 인주119안전센터 앞을 통과한다.
아산소방서 인주119안전센터 맞은편 비닐하우스에 인주3공구 개발에 대한 지역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알림막이 펼쳐져 있다. 인주일반산업단지 3공구는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신성리, 밀두리, 걸매리에 걸쳐 사업 면적은 1,817천㎢(549,643평)이라고 한다. 자동차 및 트레일러 제조업, 전기장비 제조업, 기타 기계 및 장비 제조업 등의 업종을 유치해 자동차 관련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며, 북쪽에 산업단지, 남쪽에 주거단지가 조성된다고 한다.
아산소방서 인주119안전센터 맞은편 비닐하우스 앞에 친환경농업마을 협동조합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아산군은 1914년 3개 군현[온양군, 아산현, 신창현]이 통합되어 생겨났으며, 1986년 온양시가 분리 독립하였으나 1995년 다시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어 도농복합시인 아산시가 되었다. 충남 아산시는 동단[배방읍 휴대리], 서단[선장면 신덕리], 남단[송악면 거산리], 북단[둔포면 운용리]을 경계로 한반도의 중앙부 및 충남의 최서북단에 자리하며 수도권과 충남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아산시와 인접한 도시는 동쪽으로 충남 천안시, 남쪽으로는 공주시, 서쪽으로 예산군, 북쪽으로 경기도 평택시가 있다. 북쪽은 차령산맥의 여맥에 속하는 낮은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남쪽의 산지에서 발원하는 곡교천이 서류하여 그 유역에 비옥한 평야지대를 형성하며 삽교천에서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유입된다. 지역에 고루 분포된 40여 개의 저수지는 관개용수로 이용되고 있으며, 중앙을 흐르는 곡교천의 물은 농업용수뿐만 아니라 공업용수로도 사용된다. 남쪽에 광덕산[699m]과 북쪽에 영인산[363m], 서쪽에 도고산[348m], 동쪽에 배방산[361m]이 아산시를 품어 해안지역의 도시들보다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의 피해를 줄여주며, 사계절 맑은 물과 신선한 공기를 공급한다. 아산시는 하천, 지천, 호수 등 수계가 잘 발달해 있어 텃새 및 철새도래지로서의 기능을 하며, 산림이 대부분 해발 500m 미만의 낮은 산으로 법정보호종인 황새, 큰고니, 참매, 수리부엉이 등 생태적 지위에 맞는 동물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길을 따라 공세4리 버스정류소 앞을 통과한다. 앞에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푸르게 무성하다. 아산시에 대하여 알아본다.
충남에서 인구 규모가 두 번째로 큰 아산시는 17개 읍·면·동 중에서 배방읍이 7만 1831명으로 가장 많고, 선장면이 3,773명으로 가장 적은 인구분포를 보인다. 지난 55년간의 연도별 인구추이를 살펴보면 1962년에 16만 4698명에서 2018년에 32만 9230명으로 거의 두 배[16만 4532명] 가까이 증가하였다. 인구 구조를 살펴보면 구성비에 있어서 30~34세가 가장 높고, 85세 이상이 가장 낮은 성비를 보인다. 아산시의 도시 형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충청도 54개 고을 중에 아산, 온양, 신창 고을이 명칭이나 행정계층상의 지위를 부분적으로 달리하면서 변천을 거듭하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의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당시 아산군, 온양군, 신창군의 3개 군이 통합되어 아산군으로 변경되었다. 아산시의 명소 가운데 현충사와 온양온천, 신정호, 공세리성당 등은 개화기와 광복 후 개발을 거듭하여 오늘날 아산시의 지역적 정체성 형성에 기여해왔다. 1919년에 착공하여 1931년에 개통된 장항선 철도의 개통은 온양역을 중심으로 근대적 시가지를 갖추게 되어 군청, 경찰서 등의 행정기능체, 금융기관, 상점, 시장, 온천욕장, 숙박시설 등 상업시설들이 들어섬으로써 온천도시로의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다. 2008년 수도권광역전철망이 아산시에 이르고, 일반도로망[국도 21호선, 국도 34호선, 국도 38호선, 국도 39호선, 국도 43호선, 국도 45호선, 지방도, 시도]이 인근 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당진대전고속도로, 논산천안고속도로]와 연결되었고,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제조업체의 증가는 인구증가로 이어져 공간적인 도시 팽창뿐만 아니라 재정자립도에서도 안정적인 도시로 성장하고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뒤 대내산 공세리성당의 십자가 첨탑이 보이고, 공세길 왼쪽에 대진아파트, 바로 앞 왼쪽에 공세4리 버스정류소가 있다.
인주면(仁州面)은 지리적으로 아산시의 북서부에 있어 남으로는 곡교천을 사이에 두고 아산시 선장면과 신창면, 서쪽으로는 당진시 신평면, 우강면과 시계를 이루며, 동쪽으로 아산시 영인면, 북으로는 아산만과 아산호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접해 있는 충남 북단의 도계를 이루는 면이다. 12개 법정리를 관할하며 아산만과 삽교호를 연결하는 미곡 생산의 중심지이자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및 인주일반산업단지 등이 들어선 산업도시이기도 하다. 인주면의 ‘인주(仁州)’라는 이름은 아산현(牙山縣)의 옛 명칭으로 백제 때 아술현(牙述縣)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음봉현(陰峯縣)으로 바꾸었고 고려 초에 인주라 하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인주’라는 이름은 동쪽의 영인산(靈仁山)과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또는 이곳 공세창에 40여 개 고을의 조세를 받아 쌓았는데, 그 공물이 축나지 않고 잘 관리된 것이 어질고 착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어질 ‘인(仁)’ 자를 써서 ‘인주’라 하였다고 전한다. 인주면은 본래 아산군 신흥면(新興面)에 속하여 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서면(一西面)의 6개 리와 이서면(二西面)의 3개 리, 삼서면(三西面)의 5개 리, 현내면(縣內面)의 3개 리, 천안군 돈의면(敦義面)의 2개 리를 병합하고 아산군의 고려 때 이름인 인주를 따서 인주면이라 하여 아산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인주면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공세길을 따라 공세5리 지역으로 넘어간다. 공세리 공감마을 조형물과 그 오른쪽에 공세5리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인주면은 영인산 서쪽 기슭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곡교천, 서쪽으로 삽교호, 북으로 아산만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너른 평야지대로서 예로부터 농업과 어업이 발달하였다. 3면이 호수와 물길로 이어져 아산만을 통해 서해로 통하고, 뒤로는 영인산이 있어서 영인산 지맥인 신풍산, 입암산을 등지고 각 마을이 형성되었다. 인주면은 공세리, 모원리, 신성리, 걸매리, 밀두리, 문방리, 대음리, 금성리, 해암리, 도흥리, 관암리, 냉정리의 12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1970년대에 아산만방조제와 삽교천방조제 물막이 공사로 삽교호와 아산호가 조성되어 쌀농사를 주로 하는 농어촌 지역이었으나, 문방리 일대에 1990년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이 들어서 연간 30만 대 규모의 중대형 승용차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를 가지고 있고, 걸매리에는 인주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36개의 기업이 입주하여 농업과 어업 외에도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아산만방조제와 삽교호방조제가 있어 국도 34호선이 동서로, 국도 39호선이 남북을 연결하여 접근성이 좋으며, 서해선 복선전철과 제2서해안고속도로가 공사 중인 교통 요충지이다. 인주면은 영인산을 배산으로 바다와 하천이 3면을 에워싸고 있어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좋은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어 선사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옛 부여와 고구려 땅에서 조수를 따라 내려오다 접근하기 좋은 물길을 갖추고 있어 비류백제가 정착한 미추홀[밀머리]로 추정되는 밀두리[密頭]를 중심으로 면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인 공세곶창[공진창]을 만들어 충청도 청주와 천안 등지의 세곡(稅穀)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케 하였다. 공세곶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이 공세곶창 자리 위에 1895년 설립된 공세리성당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공세길을 따라와서 왼쪽 국도 제34호선 서해로의 공세교차로를 뒤돌아본다. 맨 오른쪽 뒤에 고용산이 가늠된다.
국도 제34호선 '서해로' 남쪽 보도를 따라 인주면 신성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로' 남쪽 보도에서 공세리와 냉정리에 걸쳐 솟은 입암산을 바라본다. 왼쪽 아파트는 공세5리 기산현대아파트이다.
서해로 남쪽 보도를 따라와 천안옛날호도과자 가게 앞에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중앙 뒤에 신풍산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신성리 버스정류소 앞을 통과하여 앞의 타이어클럽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간다.
신성리(新城里)는 인주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2㎞ 지점에 있는 마을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신성리’라는 명칭은 자연마을인 새터[신촌(新村)]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신성리는 본래 아산군 일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터와 신흥면의 장수고개를 병합하여 신성리라 하고 아산군 인주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인주면 신성리가 되었다. 신성리는 인주면 북쪽에 있으며 동으로는 공세리, 서남쪽으로는 밀두리, 서북쪽으로는 걸매리, 남으로는 냉정리 등과 경계하고 있다. 남동쪽으로 입암산이 있으며 입암산 아래 냉정저수지가 펼쳐지고, 저수지 북쪽으로는 당지산이 자리하고 있다. 낮은 산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너른 농경지와 마을이 있으며 국도 34호선이 마을을 횡단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국도 제34호선 서해로 남쪽 보도를 따라가다가 자동차정비업체인 타이어클럽 오른쪽 골목 서해로532번길로 이어간다.
타이어클럽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와 서해로532번길을 따라 신성리 마을회관 앞으로 이어왔다.
신성리 마을회관 앞을 통과하여 서해로532번길을 계속 따라간다.
신성리(新城里)는 신성1리와 신성2리의 2개 행정리로 이루어지며 자연마을로는 아랫말, 윗말, 새터, 저건너, 너머말[넘말골], 장수고개 등이 있다. 아랫말과 윗말은 현재 마을의 주된 주거지역을 말하며, 저건너는 아랫말의 동쪽에 공세리와 접한 곳이고, 너머말은 새터의 남쪽 고개 너머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터는 용두산 밑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며, 장수고개는 용두산 서쪽 고개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장수가 용두산에 토성을 쌓고 이 고개에서부터 말을 달렸다고 한 이야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마을에는 역들, 공판들, 양원들 등의 너른 들이 있으며, 마을과 들을 가르는 국도 34호선은 통행하는 차량이 많아 주말과 공휴일에는 귀경 차량으로 교통체증이 심하다. 또한 인주초등학교가 있으며 길 건너편으로 인주신성아파트가 있다. 국도 34호선 변에 주유소와 휴게소, 식당 등이 있으여 마을 중심지를 이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로532번길을 따라 앞쪽에 보이는 신성1리 지역 마을을 통과하여 들녘으로 나간다.
서해로532번길을 따라 서해로532번길 57호 농가를 지나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서해로532번길을 따라 들녘으로 나오면 밀두리 들녘이 펼쳐진다. 오른쪽에 인주면 신성리의 인주콘크리트 공업(주) 공장이 있으며, 멀리 오른쪽 뒤에 인주휴먼시아 아파트 건물, 중앙 왼쪽에 흰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이 동화기업(주) 아산공장인 듯.
인주면 냉정리 냉정저수지(冷井貯水池)에서 흘러내리는 밀두천(密頭川)을 따라간다. 왼쪽 뒤에 인주면 문방리 동화기업(주) 아산공장, 중앙 뒤에 인주면 밀두리 아산휴먼시아 아파트 건물이 가늠된다.
인주면 냉정리 냉정저수지에서 흘러오는 밀두천이 인주면 밀두리 들녘을 흐른다. 왼쪽 인주면 밀두리 감나무골에 인주중학교, 오른쪽 뒤에 인주면 문방리의 동화기업(주) 아산공장이 있다. 인주중학교는 아산시 인주면 관암리 418-1 위치에서 1971년 3월 개교, 동화기업 분진(주)과 악취 때문에 2020년 3월 밀두리 644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동화기업(주)은 보드, 화학, 건장재 사업을 하며 대표적 업종은 원재료로 보드를 생산해 한샘, 현대리바트 등 가구업체와 건설사에 반제품 형태로 납품한다고 한다.
중앙 뒤의 신성리 마을을 거쳐 신성리에서 밀두리로 넘어왔다. 왼쪽에 인주면 신성리의 인주콘크리트 공업(주) 공장, 오른쪽 뒤에 입암산, 그 아래에 냉정저수지가 가늠된다. 냉정저수지를 거쳐 흘러오는 밀두천이 오른쪽에 있다.
왼쪽 뒤에 입암산, 그 아래쪽에 냉정저수지, 오른쪽 뒤에 영인산, 냉정저수지에서 흘러온 밀두천이 바로 앞에 있다. 영인산 왼쪽 아래가 영인면 면소재지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이며 옛 아산현의 읍치(邑治, 고을 수령이 일을 보는 관아가 있는 곳) 지역이다. 현재의 영인초등학교 자리에 읍치(邑治)의 핵심시설이었던 객사(客舍) '아주관(牙州舘)'이 있었으나 사라졌으며, 그 문루인 여민루(慮民樓)는 영인초등학교 입구에 남아 있다. 영인산 뒤 남쪽에 아산시청과 현충사, 맹사성기념관이 있을 것이다.
오른쪽 앞 현대로1312-9호 건물에 밀두1리 사무소, 밀두1리 부녀회가 자리하고 있다. 현대로 지선을 계속 따라간다.
밀두리(密頭里)는 밀두1리, 밀두2리, 밀두3리로 이루어지며 인주면소재지가 있는 마을로 넓은 들을 이용한 논농사가 주요 소득원이다. 최근에는 주위에 많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아파트단지와 상업시설이 늘어나는 등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밀두리의 ‘밀두(密頭)’는 해안으로 밀려오는 밀물의 머리쪽이란 의미로 밀머리라 하였는데, ‘밀머리’를 한자로 옮기면서 ‘밀두(密頭)’가 되었다. 밀두리는 본래 아산군 일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흥면의 신밀두리를 병합하여 밀두리라 하고 아산군 인주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가 되었다. 밀두리 마을 앞으로 국도 34호선이 좌우로 이어져 교통이 편리하며 아산만, 삽교호와 인접해 대부분의 지역이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현대로 지선을 따라오면 현대로 간선과 만난다. 서해랑길은 2003년 7월에 착공하여 2004년 12월에 완공된 밀두교를 건넌다.
밀두리는 자연마을로는 감나뭇골, 새원, 세때배기, 안골 등이 있다. 감나뭇골은 밀두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감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한자로 ‘시목동(柿木洞)’이라 한다. 새원은 밀두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둑을 막고 마을을 이룩하여 ‘새원’이라 부른다. 세때배기는 밀머리 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솟대박이가 있다는 의미로 불리게 되었고, 안골은 세때배기 안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밀두리는 동쪽으로 인주면 신성리, 남쪽으로는 관암리, 서쪽으로 문방리, 북쪽으로는 걸매리와 접해 있다. 삽교천방조제가 조성되기 전에는 아산만의 바닷물이 들어오던 지역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농지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인근에 인주일반산업단지 및 아산현대모터스밸리 등이 조성되어 유동인구가 많아 상권이 발달해 있으며, 인주휴먼시아 아파트가 건설되어 인구가 많이 유입되었다. 인주면 행정복지센터, 농업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 지소가 있어 행정과 금융이 모이는 곳으로 지금은 상업이 번성한 농촌 중심지 기능을 하는 마을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밀두천을 따라 내려와서 현대로와 만나 현대로의 밀두교를 건너서 현대로 동쪽 방향을 바라본다.
'현대로'가 끝나고 지방도 제628호선 '아산만로'가 럭키프라자 왼쪽에서 위쪽으로 이어진다. 럭키프라자 왼쪽 방향은 인주면 면소재지 중심가이다. 서해랑길은 럭키프라자 앞 '아산만로'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 좁은 골목길로 진입하여 이어간다.
럭키프라자 오른쪽, 유정다방 왼쪽의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다.
유정다방 옆 골목길을 따라 씨월드모텔 앞을 통과하여 걸어온 골목길을 뒤돌아본다.
골목길을 따라가면 지방도 제628호선 '아산만로'에 이른다.
골목길에서 나와 지방도 628호선 '아산만로'와 재회하여 아산만로 남쪽 보도를 따라 밀두리 네거리로 이어간다.
지방도 628호선은 온전히 충청남도 아산시 관내만 연결하는 도로이다. 아산시의 3개 면, 13개 리를 대략 동서로 연결한다. 「도로명주소법」에 따라 음봉면에서는 음봉로, 아산온천로가 부여되었고, 영인면에서는 영인산로, 인주면에서는 영인산로, 현대로, 아산만로 등으로 이름을 지었다. 지방도 628호선은 천안시와 아산시의 경계 지역인 아산시 음봉면 산동리 아산삼일원앙아파트 앞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이어진다.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인주휴먼시아아파트 앞 작은 네거리에서 지방도 623번과 만나면서 구간을 마감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방도 628호선 아산만로가 끝나는 밀두리 네거리에서 인주면 걸매리 인주일반산업단지 방향으로 이어간다.
밀두리 네거리 중앙 뒤 인주한식뷔페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 인주휴먼시아 아파트 쪽으로 와서 지방도 623호선 '아산만로' 횡단보도를 건너 인주면 걸매리로 넘어왔다. 인주산단로 보도를 따라 바로 앞 인주산단교차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일반 지방도 623호선은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인주휴먼시아아파트 앞에서 시작, 서진하여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대평리까지 이어진다. 일반 지방도 623호선은 충남의 2개 시, 11개 읍·면·동, 29개 리를 동서로 연결하는 도로이다. 「도로명주소법」에 따라 아산시 인주면에서는 아산만로, 선장면에서는 서부남로가 되고, 신창면부터는 순천향로로 이름이 부여되었다. 한편 충남 천안시에서는 보산원로, 광풍로, 광덕로 등으로 이름 지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주산단로 옆 보도를 따라 국도 제34호선 '서해로'의 문방1교 아래를 지나 문방2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인주산단로 문방2교 입구 인주공단교차로 버스정류소 옆에 서해랑길 83·8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인주면 밀두리 네거리 서쪽 인주휴먼시아 아파트 앞에서 지방도 623호선 '아산만로'를 건너 인주면 걸매리 지역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인주산단로 보도를 따라 인주공단교차로를 건너고 '서해로'의 문방1교 아래를 통과하여 문방2교 입구로 왔다.
인주산단로 인주공단교차로 버스정류소 옆에 서해랑길 83·8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안내도에는 거리 18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매우 쉬움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 탐방한 결과 18.3km, 4시간 45분이 걸렸다. 공세리성당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고 공세리비석군과 공세곶창(貢稅串倉)을 그냥 지나친 결과이다.
서해랑길 83·84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84코스 역방향 탐방 완주를 기념한다.
걸매리 문방2교 앞에서 멀리 아산만방조제와 서해선의 아산고가교를 조망한다. 앞에는 걸매리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으며 왼쪽 뒤에는 걸매리마을이 자리한다. 오른쪽 뒤 걸매리의 인주농협 조곡처리장과 그 뒤 신성리의 수원신성아파트를 가늠한다.
걸매리(傑梅里)는 인주면 소재지 북쪽에 있으며 바다와 면하여 갯벌이 보존되어 있는 마을이다. 간척지가 조성되어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걸매리의 상당 부분을 인주일반산업단지가 차지한다. ‘걸매리’라는 명칭은 새롭게 개척된 넓은 황무지란 뜻의 우리말 ‘걸매’를 한자를 빌려 ‘걸매(傑梅)’로 쓴 데서 유래한다. 걸매리는 본래 아산군 신흥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영둔, 나루말, 새신원을 병합하여 걸매리라 하고 아산군 인주면에 편입되었다. 걸매리는 아산시에서 현재 유일하게 바다와 직접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갯벌이 보존되고 있는 생태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10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산지와 넓은 평야를 이룬다. 아산만에 접해 있으며, 간척지가 조성되어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진흙벌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에 국도 제34호선 서해로가 달리고 중앙 뒤에 입암산, 그 왼쪽 아래에 공세리의 신풍산이 보인다. 왼쪽에 걸매리의 인주농협 조곡처리장과그 뒤의 신성리 수원신성아파트를 가늠한다.
걸매리는 법정리이자 단일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나루말, 당집말, 바깥말, 새신원, 영둔 등이 있다. 나루말은 영둔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나루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지명이며, 새신원은 영둔 서쪽에 있는 마을로 뚝을 막고 새로 마을이 되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영둔은 걸매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걸맷들을 개척하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인주면소재지 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쪽으로는 인주면 공세리, 남으로는 밀두리와 신성리, 서쪽으로 문방리, 북으로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 평택항과 접해 있는 충청남도 북단의 도계 마을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마을은 약 300여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150여 년경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너른 염전이 있어 소금을 생산하였으나 지금은 인주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어 공장지대를 이루고 있다. 걸매리 남쪽으로는 국도 34호선이 서에서 동으로 지나가고 있다. 걸매리는 아산은 물론 인근 해안가에서 유일하게 자연친화적 갯벌이 남아 있다. 걸매리갯벌은 백합, 실뱀장어, 망둥어, 맛조개, 삐쭉이, 소라, 숭어, 칠게, 청게, 농게, 우럭 등 다양한 생명체가 서식한다. 특히 어업을 겸하는 마을 주민들이 조직한 어촌계가 아산의 앞바다에서 생산활동을 하며 수입을 올리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주공단교차로 위로 국도 제34호선 서해로의 문방1교가 달리고 뒤쪽에 밀두리 인주휴먼시아 아파트 빌딩이 솟아 있다.
밀두천의 문방2교 건너편에 인주일반산업단지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