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함이라”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순종치 않는 본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정적인 본으로 남겨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복을 받은 민족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는 했는데 맞을 때는 아주 혹독하게 얻어터집니다.
왜 본이기 때문입니다. 학급의 반장과 같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실패한 모델인
이스라엘처럼 되지 말라고 합니다. 거울을 보고 잊어버리듯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그렇게 표현했습니다(약1:24)
사실은 자기 얼굴만큼 기억이 잘 안 나는 얼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은 뚜렷하게 기억나는데 자기 얼굴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게 율법을 들여다보곤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가진 자는 잊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심비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사랑을 자유하게 하는 율법,
또는 최고의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율법이 아닙니다. 사랑도 법이 됩니다.
사랑은 율법보다 더 강한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의무와 책임감으로 사람이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사랑은 그 이상입니다. 희생을 대가로 지불할 수 있는 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율법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를 얻기 위해서 세상이 도는 대로 같이
따라 돌아가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의 일반인처럼 살면 그게 바로 악입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질 것입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쾌락을 누리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할 겁니다. 결국은 인간의 최고의 쾌락은
동성애와 마약입니다. 여행도, 맛있는 음식도, 스포츠도 다 그게 그거라는 거죠.
고소득 시대가 되면 그런 것이 다 싫어집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딱 두 가지
호모섹스와 마약입니다. 이 두 가지가 사람을 병들게 만들 겁니다. 제가 히브리서를
처음 강해한지 27년이 지났는데 그땐 그럴 것이라고만 했는데 이젠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을 못 누린다면 앞으로 닥칠 세속의
물결을 어떻게 이기겠느냐는 겁니다. 세상물결에 종교도 사상도 삼켜지고 있습니다.
계12장에서 광야로 나가보니 하나님이 예비한 곳이 있더라 말씀합니다.
예비한 곳이 우스운 말로 ‘남미나 태평양의 섬’입니까? 아니면 어느 장막입니까?
광야로 나가보니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와서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리라‘ 한 그곳, 성령 안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궁전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 길로 가는 비밀을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바로 골방입니다. 오직 그 방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밀히 보시는 중에 갚으시는 곳이며 주님이 말씀하신 거처(요14:23)입니다.
성령 안에서 아가서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신비한 곳이 바로 예비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미리 말씀 하셨습니다.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함께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입니다. 육체는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의 닻이 주님께 던져졌으므로 ‘흔들어봐라 흔들리는 울타리와
담벼락 같은 우리를 흔드는 자는 누구냐?’ 다윗처럼 큰 소리로 외치게 됩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반석’이라고 노래합니다. 세상이 나를 흔들지만 내 영혼은
반석이신 여호와에게 확실하게 꽂혀있다고 고백합니다(시62)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윗을 보실 때에 기뻐하시는 겁니다. 이 상태가 바로 바로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일곱째 날 안식인데 이는 창2:3의 안식입니다.
이 날은 토요일이다 일요일이다 그런 개념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입니다. 지금은 안식이 어느 날이 아니라 어떤 차원과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차원의 개념입니다. 장소적인 천국이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못할 지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안식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그곳에 들어가도록 힘써야합니다.
힘쓴다는 말은 간절히 사모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파악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비밀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수그리스도께서 안식이 되기 위한 우리의 사도와 대제사장인데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살아서 활력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곧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활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은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머리에만
말씀이 기억되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동거합니다. 우리와 함께 삽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호 로고스’가 ‘너희 안에 운동하면 곧 일을 하면’하는 뜻입니다. 살아 활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을 다스리고 그 운동력은
우리의 관절과 골수를 다스리십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 속에 와서 우리의 혼과 영의
위치를 바꾸어 질서를 잡고 영을 강하게 하고 또 그 혼이 영의 명령을 듣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그리고 또 관절과 골수는 골수에서 피를 생산하여 관절로
연결하여 온 몸에 이어지는데 이 관절과 골수를 살아 있는 말씀이 관장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 활력이 있어’ 그래서 말씀은 우리 온 몸의 건강이 된다고
잠언 3장과 4장은 말씀합니다. 영과 생명의 기운 곧 생명에너지가 몸의 건강이 됩니다.
속에 있는 영과 혼에 말씀이 작용하면 그 생명의 능력이 우리 육신의 건강이 됩니다.
영과 혼에 작용한 생명이 관절과 골수를 통해서 온몸의 건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링거처럼 생명의 기운이 공급되는 양약입니다.
우리의 골수를 윤택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잠3:8)
13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일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르는 회개로 성령의 선물을
받아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우리 영과 혼의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관절과 골수의 구조가 드러나서 분리될 건 분리되고 연결될
건 연결이 됩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예수 그리스도께 까지 높아지려는 자신의
지혜가 복종되고 겸손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모든 기능이 순복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타나지 않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12절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영과 생명의 말씀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의 찬송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