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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초파일 봉축 장엄등 어제와 오늘
ysoo 추천 0 조회 57 13.05.16 23: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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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같이 넓게 퍼진 등불, 세상을 비춘다”

 

■ 봉축 장엄등 어제와 오늘

 

 

 

 

연꽃등 팔모등 주름등 ‘인기’

시대상 반영한 창작등 ‘제작’

집집마다 등 다는 전통 회복

세계인, 장엄등 매력에 빠져

 

 

척헌관등(陟觀燈).

조선 시대 한양 남산에서 바라본 사월 초파일 야경을 이르는 말이다. 밤을 환하게 밝힌 많은 등이 도성을 아름답게 장엄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 당시 문인 정이오(鄭以吾)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척헌관등’을 남산팔영(南山八詠)의 하나로 꼽았다.

부처님오신날이면 지혜와 광명을 상징하는 등을 다는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등 문화는 이제 불교문화를 넘어 한국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세계인도 장엄등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봉축 장엄등이 어떻게 변해왔고, 등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봤다.

 

“나라 풍속에 이날은 석가의 탄신일이라 하여 집집마다 등불을 켜 놓는다. 장대를 많이 세우고 수십 개의 등을 연이어 다는데 새.짐승.물고기 형상으로 등을 만들어 대단히 호화롭게 꾸미므로 구경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든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1469년부터 1494년까지 재위한 ‘성종’의 기록 일부이다.

이 내용만 봐도 조선 전기 사월초파일이면 각양각색의 등을 집집마다 밝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장대를 세워 수십 개의 등을 달았고, 그 등의 모양은 새, 짐승, 물고기의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는 “예전에는 집집마다 초파일이면 등을 다는 풍속이 있었다”면서 “지금은 희미해진 이 전통을 다시 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68년 서울 조계사에 걸린 등. 소박한 느낌을 준다.출처=조계종 중앙기록관.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가 연중행사와 풍속을 정리하고 설명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등의 종류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등은 28종류에 이른다.

“수박등.마늘등.연꽃등.칠성등.오행등.일월등.공등.배등.종등.북등.누각등.난간등.화분등.가마등.머루등.병등.항아리등.방울등.알등.봉황등.학등.잉어등.거북등.자라등.수복(壽福)등.태평(太平)등.만세(萬歲)등.남산(南山)등.” 등을 만드는 방법도 기록되어 있다. 종이로 바르기도 하고 붉고 푸른 비단으로 바르기도 한다는 것. 평평한 면과 모가 진 곳마다 돌돌 만 삼색종이나 길쭉한 쪽지 종이를 붙이면 펄럭이는 모습이 아주 멋있다고 <동국세시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 경문왕 6년(866년) 서라벌 황룡사에 간등(看燈)을 했다는 기록은 물론, 1123년 중국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쉬징(徐競)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연등회 날 등불을 켰다는 글이 게재돼 있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봉은사 연등도량문(燃燈道場文)’이란 글에서 “옛 조상님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 상서로운 밤에 진실한 마음으로 이 법회를 절에서 개최하오니 바다와 같이 넓게 퍼진 천 개의 등불은 온 세상을 비춘다”고 했다. 이 같은 기록들은 조선시대 이전 고려와 신라, 삼국시대에도 등을 만들어 걸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처럼 부처님오신날이면 등을 거는 풍속은 변함없이 계승되어 왔다. 또한 근세에 들어 제등행렬이 일반화되면서 각종 중대형 장엄등이 등장하는 현상을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팔각등이 주로 이용됐다. 물론 명칭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사용됐다.

 

1962년 통합종단 출범후 초파일 제등행렬에 다양한 등이 등장한다. 1962년 5월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는 “제등행렬에 수박등.초롱등.접시등 같은 각양각색의 등과 100여명의 외국인이 참석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제적 상황이 여의치 않은 현실로 인해 다양한 등이 등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국가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그 영향은 등 제작까지 미쳤다.

김용덕 한양대 교수는 ‘불교 전통 연등의 전승 실태 분석’이란 논문에서 “1970년대에 접어들어 산업화가 급속이 확산되면서 편리성을 추구하게 됨에 따라 등의 모습도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면서 “1970년대에는 팔모등.연꽃등.종이주름등.비닐등이 주로 사용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용덕 교수는 “1960년대 중반부터 수박등과 종이 초롱등이 사라지고, 70년대부터 연꽃잎 공장 생산등이 대중화하게 된다”면서 “1980년대 이후 1990년대까지 등문화는 산업화의 영향을 고스란히 반영해 펼쳐진다”고 밝혔다.

이 무렵 전기를 연결하는 인등이 법당에 등장하는 것을 일례로 들었다. 이전까지는 기름으로 인등을 켰지만 화재 우려와 편리성 때문에 전기를 활용한 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당시 글을 모아 놓은 <춘저록(春邸錄)>에는 사월초파일 모습을 담은 글이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天時四月樹如霞(천시사월수여하)

一夜燃燈幾萬家(일야연등기만가)

深院貂貂明竹葉(심원초초명죽엽)

高竿處處出蓮花(고간처처출련화)

山河照耀夕如晝(산하조요석여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시절은 사월인데 나무들이 놀처럼 붉구나,

하룻밤 등 다는 곳이 몇만 집 일런가,

깊은 산사에 대나무 잎이 환하고,

높이 세운 간대마다 연꽃이 피었구나,

세상은 환희 밝아 저녁이 대낮 같고”

 

초파일을 맞아 등이 달린 아름다운 경관을 잘 묘사했다. 사찰뿐 아니라 집집마다 등을 내거는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등이 ‘연꽃등’이다.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 모양으로 만들어 대중화된 등이다. 예전에는 대나무나 철사로 등의 틀을 만든 후에 창호지를 오려 붙이고, 손수 말은 연꽃잎을 붙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등 공장에서 생산된 틀과 종이를 조립한 뒤에 연잎을 붙이는 것으로 과정이 단축됐다. 노스님들의 기억에 따르면 “연잎도 창호지 같은 종이에 색을 물들여 말린 후에, 철사로 요철 부분을 만들어 고정하고, 하루 이틀 정도 지난 후에 철사를 제거했다”면서 “그렇게 되면 연잎에 요철 부분이 생기고, 그것을 가위나 칼로 잘라낸 후에 연잎을 말았다”고 회고한다.

 

 

 

형형색색의 장엄등이 서울 시내를 밝히고 있다. 지난 2012년 연등행렬. 불교신문 자료사진

 

 

연꽃등과 함께 많이 사용하는 것이 ‘팔모등’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일간지에는 팔모등을 단 사찰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김용덕 한양대 교수는 “팔모등의 불교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조형적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면서 “조형물 가운데 안정과 변화를 가장 잘 조화시키고 있는 도형이 팔각형”이라고 했다. 팔모등 재료는 대나무와 싸리나무를 사용하다가 지금은 철사를 주로 사용한다.

 

지금은 별로 사용하지 않지만 한때 인기를 끈 등이 ‘주름등’이다.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 사찰에서 사용했다. 박상희 행사기획단 팀장은 “주름등이란 이름 외에도 굽등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밖에도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수박등과 사물의 모양을 등으로 만든 ‘형상등’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형상등은 동물이나 식물 또는 물건 모양을 형상화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인 뽀로로 등과 TV를 소재로 만든 등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동물을 소재로 한 등에는 학, 사자, 호랑이, 사슴, 잉어, 자라, 거북이등이 있다. 식물을 형상화한 등에는 수박, 마늘, 연꽃, 머루등이 문헌에 나타난다. 이와함께 하늘을 소재로 한 칠성, 오행, 일월등이 있고, 물건 모양으로는 공, 배, 종, 북, 누각, 난간, 가마, 병, 항아리, 방울, 알등이 있다. 또한 문자를 그린 등은 수복등, 태평등, 만세등이 사용됐다.

 

최근 들어 서울의 연등행렬에는 다양한 모양의 장엄등이 선보여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부처님과 관음.지장.문수.보현보살이나 사천왕 등을 소재로 만든 장엄등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한 불자들의 신심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TV프로그램이나 만화, 동화책 등에서 소재를 찾아 만든 장엄등도 인기 만점이다. 시대 흐름과 현대인의 정서에 맞는 ‘창작등’이 새로운 봉축등의 역사를 쓰고 있는 셈이다.

 

김용덕 한양대 교수는 “전통등 전승의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손수 제작하면서 정성을 다해 만들어 불을 밝히는 것”이라면서 “등을 제작하고 연등하면서 소원을 빌고, 공양한 등의 소등(燒燈)을 통해 연등행사의 완성을 이룬다”고 조언했다.

 

조선 전기 문신 이행(李荇, 1478∼1534)의 문집. <용재집(容齋集)>에 나오는 ‘초파일 밤 2수(首)’이다.

 

“往時今夜洛陽城(왕시금야낙양성)

磊落繁星地上明(뇌낙번성지상명)”

“예전에 한양에 살 때의 오늘 밤에는,

별처럼 많은 등불이 땅 위를 밝혔네”

 

 

/ 불교신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 한성부(漢城府)

 

한성부(漢城府)

 

- 생략-

 

남산팔영(南山八詠) 정이오(鄭以吾)의 시.

 

운횡북궐(雲橫北闕)

“옥엽(玉葉)은 금궐(金闕)에 비끼고, 붉은 기와 푸른 하늘에 비치네. 뗑뗑 누수 재촉하는데, 북쪽에 상서로운 구름 일어나누나. 아름다운 기운 개인 날 서로 둘렀는데, 높은 기상 바라보니 다시 잇닿았네. 남산 같은 높은 복을 우리 임금께 드리려니, 조심조심 일만 년을 누리소서.” 하였다.

 

수창남강(水漲南江)

“장마물 들판을 덮었는데, 저 강의 흰 기운 성곽에 잇닿았네. 모래판[平沙] 휩쓸어 가고 온갖 냇물 다 모았네. 나루터에서 언덕이 묻힌 줄 알겠는데, 저 하늘 가 가는 배 아득하게 바라본다. 저녁 때 비 개이고 둥근 달 떠오르니, 용용(溶溶)한 그 모습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암저유화(巖底幽花)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 산중에 빽빽하게 녹음 무성하네. 물 건너니 그윽한 향기 풍기고, 가까운데 언덕 위 바위틈에 기이한 풀 있구나. 늦은 떨기 은일(隱逸)인 양 가련하고, 부질없는 꽃 흥망성쇠 애석하네. 이로부터 정(貞)하고 길(吉)하나니 하늘이 어찌 소나무 두었는가.” 하였다.

 

영상장송(嶺上長松)

“집을 둘러 층층의 묏부리 솟아, 공중에 버텨 푸른 일산 되었네. 비가 개이니 구름 와서 희게 걸치고, 밤이 고요하니 달이 맑게 흥청 이네. 벽이 서 있은 지 천 년은 되어, 바람 따라 10리에 소리 들리누나. 이 모습 돌아보는 이 없고, 떠들썩 명예만 따라 경쟁하네.” 하였다.

 

삼춘답청(三春踏靑)

북쪽 바라보면 비록 성시(城市)이지만, 남쪽으로 오면 곧 동천(洞天)이라네. 꽃을 찾으니 바람이 맑게 불어오고, 풀은 밟으니 날씨가 따사롭다. 이런 모임 많은 사람 있으리, 고상한 정희 열선(列仙)보다 낫구나. □□□

 

구일등고(九日登高)

술병 차고 높은 데 오르는 날, 하늘도 맑은 9월초일세. 단풍 숲 먼 골짜기에 한창이고, 푸른 소나무 층층의 언덕 둘러쌌네. 남동(藍洞)은 시 짓던 곳이고, 용산(龍山)에 모자 떨어지던 때로다. 예나 이제나 취함은 같은 것, 마음에 맞으면 그 밖에 다른 무엇 구하리.

 

척헌관등(陟?觀燈)

4월 8일 관등놀이 성대한데, 승평세월 이 얼마인가. 일만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사방이 고요하고 티끌 하나 없네. 붉은 불길 천 길이나 서린 듯, 별 광채 북두칠성[北辰]으로 향했네. 밤을 새워도 구경 부족하여, 닭 우는 새벽에 이른 줄도 모른다네.

 

연계탁영(沿溪濯纓)

정절(靖節 도연명의 시호) 선생은 다만 물에 다다랐고, 종군(終軍)098]은 일찍이 긴 노끈 청했네. 냇물 맑으니 발 어이 씻으리, 티끌 떨고 세상 물정 잊겠네. 천천히 흐르니 시내에 이끼 끼어 미끄럽고, 굽이쳐 돌아오니 옥 물결 감도네. 떨어진 붉은 꽃 물에 떠 동구 밖으로 나가니, 봉래(蓬萊) 영주(瀛洲) 여긴가 하노라.”

 

[주D-098]종군(終軍) : 한(漢) 나라 사람이다. 18세 때에 남월(南越 지금의 광동)왕이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라고 하였는데, 종군(從軍)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긴 노끈 하나를 주면 가지고 가서 남월왕의 목을 얽어 가지고 오겠다.”고 청하였다 한다.

 

 

 

 

해동잡록(海東雜錄) > 해동잡록 6

 

정이오(鄭以吾)

 

○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호는 교은(郊隱)이다. 공민왕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시를 잘하였으며, 선산(善山)에 지방관으로 있었는데 일처리가 맑고 간략하며 문치(文治)에 여유가 있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80여 세까지 살았고, 문정(文定)이라 시호하였으며, 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 선산 원이었을 때, 〈비봉산 제성단(飛鳳山祭星壇)〉이란 한 절구를 읊기를,

 

관아의 일이 끝나 한가한 틈을 타서 성곽 서쪽으로 나가니 / 衙罷乘閑出郭西

중은 없고 절은 낡고 길마저 험하구나 / 僧殘寺古路高低

제성단 언저리엔 일찍 봄바람이 찾아와 / 祭星壇畔春風早

붉은 살구꽃 반쯤 피고 산새가 우네 / 紅杏半開山鳥啼

 

하였다. 의종 때에 남극(南極)의 노인성(老人星)이 선주(善州 선산의 옛이름)에 나타났으므로 해마다 봄ㆍ가을ㆍ중기일(中氣日 춘분과 추분날)에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이를 제사 지내는데, 단은 부(府)의 서쪽에 있는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한양(漢陽) 〈남산팔영(南山八詠)〉에 〈척헌관등(陟?觀燈)〉이란 시가 있는데, 교은이 읊기를,

 

 

초파일(4월 8일, 즉 석가모니의 탄신일) 관등놀이 성대하니 / 八日觀燈盛

태평하기 몇 해이더뇨 / 昇平第幾春

만감(여러 감(龕). 감은 탑, 또는 탑 밑의 실(室))은 그림같이 밝고 / 萬龕明似?

사방은 티끌 없이 맑구나 / 四境靜無塵

무지개 같은 불꽃은 남두성에 서렸고 / 虹焰蟠南斗

별빛은 북두성을 에워쌌네 / 星芒拱北辰

밤을 새도 구경을 못 다 하겠구나 / 通宵看未足

새벽이 된 것도 깨닫지 못하였네 / 不覺到鷄晨

 

하였고. 또 〈답청(踏靑 청명(淸明)을 전후한 이른 봄의 들놀이)〉이란 한 절구가 있으니,

 

꽃 찾는데 바람이 산들 불고 / 問花風淡蕩

답청하는데 햇볕 따사롭구나 / 踏靑日暄姸

좋은 모임에 친구 많지 않으나 / 良會無多子

높은 정취는 신선보다 낫네 / 高情勝別仙

 

하였다.

동상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교은(郊隱)과 시를 논할 적에, 스스로 글귀를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내놓았으니,

 

연기는 두목의 진회001]의 밤에 비꼈고 / 煙杜子秦淮夜

달은 소동파의 적벽 가을에 밝구나 / 月蘇仙赤壁秋

 

하니, 교은이 여러 번 읊어보고, “롱(籠)ㆍ소(小)” 하였으나, 이첨이 처음에 알아듣지 못하므로, 정이오가 천천히 읊기를,

 

연기는 두목의 진회 밤에 덮였고 / 煙杜子秦淮夜

달은 소동파의 적벽 가을에 작구나 / 月蘇仙赤壁秋

 

하였다. 롱(籠)ㆍ소(小)라는 두 글자는 먼저 것에 비하여 백 배(倍)나 정채(精彩)롭다.

〈시어(詩語)〉

 

○ 이른 봄에 여러 늙은이들과 성(城) 남쪽에서 연구(聯句 시구 하나씩 부르는 것)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많은 동리 자제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교은이 먼저 부르기를,

 

소가 좇고 있는 언덕엔 풀이 비로소 파랗고 / 眠牛壟上草初綠

하니, 박치안(朴致安)이란 사람이 곧 응대하여 이르기를,

 

새 우는 가지 끝엔 꽃이 한창 붉구나 / 啼鳥枝頭花正紅

하매, 자리를 같이한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였으며, 시의 명성이 이때부터 당시에 크게 떨쳤다.

○ 교은의 시에,

 

송곳 세울 좁은 땅마저 권세가에 들어가고 / 立錐地盡入侯家

시내 산골짜기의 경치만 남아 있어 현에 속한 곳이 많구나 / 只有溪山屬縣多

 

하였는데, 호강(豪强)한 자들이 모두 차지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으며, 빼앗지 못한 것은 시내와 산뿐임을 말한 것이다.

동상 ○ 교은이 김방경(金方慶)의 〈행장〉을 보고서, “이것은 창연(蒼然)하면서도 노련한 솜씨의 작품이다.” 하고, 다만 몇 글자만을 고쳤다.

〈행장〉의 발문(跋文) ○ 탐라(耽羅)는 그 풍속이 노(? 서남지역에 사는 오랑캐)와 같고 그 땅이 멀며, 성주(星主 제주 목사)와 왕자(王子)와 토호의 세력 강한 자들이 평민을 다투어 차지하고, 일을 부리는데 이를 인록(人祿)이라 하며, 백성을 괴롭혀 욕심을 채우므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컫는다.

〈교은송인서(郊隱送人序)〉

 

[주D-001]두목(杜牧)의 진회(秦淮) : 두목의 박진회(迫秦淮)라는 시에

‘강뜰에 안개 덮이고 백사장에 달빛 쏟아지는데[煙籠寒水月籠沙],

밤에 진회에 정박하니 술집이 가까워라[夜泊秦淮近酒家]’라는 구절이 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 동국이상국전집 제39권 > 불도소(佛道疏)

 

봉은사(奉恩寺) 연등도량문(燃燈道場文)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어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묘문을 널리 열었고 천축(天竺)에서 성을 돌며 처음으로 등불을 밝히는 청정한 법석이 시작되었나이다. 이 의식은 선조로부터 숭상해 오던 전례(典禮)로서 후손에까지 유광(流光 조상 때부터의 은덕)이 미쳤나이다.

생각건대 미약한 사람이 기성의 교훈에 따라 춘약(春? 《주례(周禮)》의 춘관약사(春官?師)의 약어)에게 좋은 밤을 가려 법석(法席)을 절에 엄숙히 베푸니,

천 개의 아름다운 촛불 등잔은 찬란한 광명의 바다를 이루었고 백 가지 맛의 진귀한 음식은 풍성한 공양의 구름을 일으킨 듯하나이다. 수승한 인연을 맺는 곳에 그 감응이 즉시 통하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에 상서로운 조짐이 이르고 역복(曆服)은 더욱 오래어 나라의 앞날이 길이 편안함이 마치 구정(九鼎)001]을 정한 듯이 견고하고 백성들도 모두 경사를 함께 하여 마치 누대에 오른 듯이 기쁘게 하소서.

 

[주D-001]구정(九鼎) : 천하(天下)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는 것을 말한다. 하우씨(夏寓氏)가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서 만든 솥인데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 나라를 쳐 이기고는 구정을 낙읍(洛邑)에 옮겨 놓았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홍석모(洪錫謨)

 

4월四月

 

초파일(八日)

 

8일은 곧 욕불일(浴佛日)421)로 석가가 탄생한 날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이 날 등불을 켜기 때문에 등석(燈夕)이라고 한다. 수 일 전부터 각 가정에서는 각기 등장대[燈竿]를 세우는데, 맨 위에 꿩장목을 세우고 색을 넣은 비단으로 만든 깃발을 매단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는 장대 꼭대기에 대개 오래된 솔가지를 맨다. 각 집에서는 자녀 숫자대로 등을 달아 주위를 밝히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9일이 되어서야 그만둔다. 사치를 부리는 집에서는 큰 대나무 수십 개를 묶어 세우기도 하고 한강까지 가서 말짐으로 돛대를 실어다가 시렁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혹은 해와 달 모양을 한 일월권(日月圈)을 장대에 꽂아 바람을 받아 현란하게 돌아가게 하며 혹은 빙빙 도는 전등(轉燈)을 매달아 마치 탄알이 날라 가는 것처럼 불빛이 왔다갔다 하게 한다. 혹은 화약을 종이에 싸서 새끼줄에 매어 승기전(乘機箭)422)처럼 쏘아 올리는데, 이렇게 하면 불줄기가 마치 비처럼 흩어져 내린다. 혹은 장대 끝에 수십 줌 되는 긴 종이쪽들을 매달아 용 모양으로 펄럭이게 하며, 혹은 광주리를 매달기도 하고, 혹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바지저고리를 입혀 새끼줄을 매어 놀리기도 한다. 줄지어 늘어선 시렁들은 높게 보이도록 각각 새끼줄 수십 가닥을 벌려 끌어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만드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시렁이 낮고 작으면 사람들이 모두 빈정거리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고려사(高麗史) 에 “왕궁이 있는 서울(송도)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정월 보름에 이틀 밤씩 등불을 켜는데 최이(崔怡, ? ~ 1249)는 4월 8일에 등불을 켰다.”고 하였는데, 정월 보름의 연등행사는 원래 중국의 제도이며 고려 때까지 있었던 이 풍속도 이제는 없어졌다.

 

또 생각건대 고려사 에 “우리나라 풍속은 4월 8일이 석가탄신일이라고 하여 집집마다 등불을 켠다. 이보다 수십일 전부터 아이들은 종이를 잘라 깃발처럼 장대에 매달아 서울 거리를 외치고 돌아다니면서 쌀과 포목을 얻어 그날 비용으로 쓰는데 이를 호기(呼旗)라고 한다.” 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 등 장대에 깃발을 다는 것은 과거 호기의 유습이며 이것을 반드시 4월 8일에 행하는 것은 최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등의 이름에는 수박등?마늘등?연꽃등?칠성등?오행등?일월등?공등[毬燈]?배등[船燈]?종등?북등[鼓燈]?누각등?난간등?화분등?가마등?머루등?병등?항아리등?방울등?알등?용등?봉등?학등?잉어등?거북등?자라등과 수복(壽福)?태평(太平)?만세(萬歲)?남산(南山) 등의 글자를 넣은 등이 있는데 모두 그 모양을 종이로 만들어 등에 바른다. 혹은 붉고 푸른 갑사에 운모(雲母)를 박아 날아가는 신선이나 꽃, 또는 새를 장식하며 등의 면과 모마다 삼색 종이를 길게 오려붙여 바람에 너울너울 나부끼게 한다.

북등[鼓燈]에는 주로 말 탄 장군이나 삼국지(三國志) 의 내용을 그렸다. 또 그림자등[影燈]이 있는데 안에다 회전하는 기구[?機]를 장치해 놓고 말을 타고 매와 개를 데리고 호랑이?이리?사슴?노루?꿩?토끼 등을 사냥하는 모습을 종이에 그려 오린 다음 그 기구에 붙인다. 그러면 바람결에 그 기구가 돌면서 바깥으로는 이것들의 그림자가 비쳐 나오게 된다.

 

내 생각에는 중국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여오군채서(與吳君采書)?423)에 “영등을 아직껏 보지 못했으나 그것을 보는 것보다는 삼국지를 한 번 읽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으니 이것은 곧 삼국지 의 고사로 그림자를 만들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또 생각건대 중국 송나라 시인 석호(石湖) 범성대(范成大)의 ?상원기오중절배
해체(上元紀吳中節俳諧體)? 시에 “그림자가 돌아가니 말을 타고 종횡으로 달린다.” 라고 하고 그 주석에 이것을 마기등(馬騎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송나라 때부터 이런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시내 저자거리에서 파는 등은 천태만상으로 오색찬란하고 값이 비싸며 기이함을 자랑한다. 종로 거리에는 이 등불을 보려고 구경꾼들이 담장처럼 둘러선다. 또 난새[鸞鳥]424)?학?사자?호랑이?거북?사슴?잉어?자라 등에 신선들이 올라 탄 형상을 인형으로 만들어 팔면 아이들은 다투어 구입하여 장난감으로 가지고 논다.

 

영등 행사가 있는 날 저녁에는 으레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때문에 온 장안의 남녀들은 초저녁부터 남산과 북악의 산기슭에 올라가 등을 달아 놓은 시내 광경을 구경한다. 혹 어떤 이들은 퉁소나 거문고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논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은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고 불야성이 된다. 그렇게 떠들기를 밤새도록 한다. 장안 밖의 시골 노파들까지도 서로 이끌고 와서는 반드시 잠두봉(蠶頭峯)425)에 올라가 이 장관을 구경하고야 만다. 아이들은 각각 등 대 밑에 석남(石楠)426) 잎을 넣은 시루떡과 삶은 검정콩, 그리고 삶은 미나리 등의 음식을 차려 놓는데, 이것은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소한 음식으로 손님을 맞이해 즐기는 뜻이라고 한다.

 

또 물동이에다 바가지를 엎어놓고 빗자루로 두드리면서 진솔한 소리를 내는데, 이것을 물장구놀이[水缶戱]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중국 송나라 때 장원(張遠)427)이 쓴 오지(?志) 에 “서울 풍속에 염불하는 사람들은 염불할 때마다 콩으로 그 횟수를 헤아리며, 4월 8일 석가탄신일에 이르러 그 콩을 볶아 소금을 약간 쳐서 길가는 사람을 맞이해 다 먹기를 권하여 인연을 맺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 풍속에 콩을 볶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 생각건대 제경경물략 에 “정월 보름밤에 아이들이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북을 치며 노는 것을 태평고(太平鼓)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에 물장구[水缶]는 태평고의 뜻과
유사한 바가 있고 부처의 탄일에 연등 행사를 하므로 결국 정월 보름에 하던 것을 4월 8일로 옮겨 하는 것이다.

 

421) 욕불일(浴佛日)은 불상에 향수를 뿌리며 관불 의식을 거행하는 날이다.
422) 승기전(乘機箭)은 화살에 불을 붙여 당기는 병기(兵器)이다.

423) ?여오군채서(與吳君采書)?는 소동파의 시 제목이나 출처는 미상이다.
424) 난새[鸞鳥]는 봉황의 일종이다.
425) 남산 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누에머리처럼 생긴 바위다.
426) 석남(石楠)은 상록활엽관목으로 녹나무로 부른다.

427) 장원(張遠)은 중국 송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행지(行之)이며 산에 은거하였다.

 

八日卽浴佛日東俗以是日燃燈謂之燈夕 前數日人家各竪燈竿頭建雉尾色帛爲旗 小戶則竿頭多結老松計家內子女人口懸燈以明亮爲吉 至九日乃止 侈者縛大竹累十 又?致五江檣?而成棚 或揷日月圈隨風眩轉或懸轉燈往來如走丸或紙包火藥而繫於索衝上如乘機箭火脚散下如雨或繫紙片幾十把飄揚如龍形或懸筐?或作傀儡被以衣裳繫索而弄之 列?之棚務勝競高張數十索邪許引起矮小者人皆嗤之 按高麗史王宮國都以及鄕邑正月望燃燈二夜 崔怡於四月八日燃燈 上元燃燈本是中國之制而麗俗今已廢矣 又按高麗史國俗以四月八日是釋迦生日家家燃燈前期數旬?童剪紙注竿爲旗 周呼城中街里求米布爲其費謂之呼旗 今俗燈竿揭旗者呼旗之遺也 必以八日肇自崔怡也 燈名西苽蒜子蓮花七星五行日月毬船鍾鼓樓閣欄干花盆轎子山?甁缸鈴卵龍鳳鶴鯉龜鼈壽福太平萬歲南山等字燈皆象形紙塗 或用紅碧紗嵌雲母飾428)飛仙花鳥面面稜稜皆粘三色卷紙片紙??聯翩 鼓燈多畵將軍騎馬三國故事 又有影燈裏設旋機剪紙作獵騎鷹犬虎狼鹿獐雉兎狀傅於機爲風炎所轉外看其影 按東坡與吳君采書云影燈未嘗見與其見此何如一閱三國志耶 此必以三國故事作影也 又按范石湖上元吳下節物俳體詩轉影騎縱橫註云馬騎燈 盖自宋時已有此制也 市燈所賣千形百狀五彩絢爛重價衒奇鍾街上觀者如堵 又造鸞鶴獅虎龜鹿鯉鼈仙官仙女跨騎之狀?童競買而弄玩至燃燈之夕例弛夜禁士女傾城初昏遍登南北麓觀懸燈或携管絃沿街而遊人海火城達夜喧?鄕外村婆提?爭來必登蠶頭觀之 兒童各於燈竿下設石楠葉甑餠蒸黑豆烹芹菜云是佛辰茹素廷客而樂 又泛瓢於盆水用?柄叩而爲眞率之音謂之水缶戱 按張遠?志京師俗念佛號者輒以豆識其數至四月八日佛誕生之辰煮豆徵429)撤以鹽邀人于路請食之以爲結緣夜 今俗煮豆盖昉於此 又按帝京景物略元夕童子?鼓旁夕向曉曰太平鼓 今俗水缶似是太平鼓之意而以佛日爲燈夕故移用之也

 

428) 연대본에는 飾이 ?로 되어있다.
429) 연대본, 광문회본에는 徵이 微로 되어있다.

 

<列?之棚務 : ? = 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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