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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특집]'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의 석화산업(하) | ||||||
전진하는 한국 석유화학 규모의 경쟁력, 기술의 경쟁력, 환경의 경쟁력 | ||||||
2007-12-07 05:30:46 | ||||||
지난 1962년 대한석유공사가 설립된 이래 한국의 석유화학산업은 반세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재 세계 유수의 석유화학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후 미국 칼텍스와 합작하기로 합의하면서 그 해 11월 호남정유가 선정됐다. 1967년 전남과 토지분양계획을 맺고 45만여 평 부지를 매입하고 건설공사에 돌입, 1969년 3월 하루 6만배럴 규모의 국내 제2정유공장이 완공됐다. 락희화학은 1970년대 고도성장을 이뤘다. 여천에서는 호남정유가 들어선 이후 석유화학사업 추진을 위한 석유화학프로젝트위원회를 발족했다. 이 시기에는 대단위 여천공장, 중앙연구소를 건설하는 등 락희화학을 종합화학회사로 성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1976년 락희화학은 PVC페이스트수지, ABS, 글라스파이버(glass fiber)를 신규 사업종목으로 최종 선정하고 설비 공사 착공에 돌입했다. 1979년까지 총 9억4천만원을 투입해 14만2천여 평의 단지조성공사를 완료했다. 1974년 락희화학은 해외진출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상호를 ‘주식회사 럭키’로 변경했다. 이 시기에는 수출이 크게 확대됐다. 수출액은 1970년 100만달러에서 1973년 1천만달러, 1975년에는 3천만달러를 넘어섰다. 1978년에는 5천만달러를 돌파했다. 럭키는 1970년대 말 고부가가치 산업인 정밀화학산업에 착수했다. 1980년 온산공장을 준공하고 국내 최초로 분산염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1983년 7월에는 계면활성제공장을, 1984년에는 글라스파이버사업을 화성1사업부에서 인수했다. 특히 1986년 3월에는 국내 최초로 저공해 농약원제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1987년에는 에폭시레진을 생산하는 등 정밀화학사업 분야를 넓혀나가면서 종합 화학기업으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1991년 럭키는 럭키유화의 스타이렌모노머(SM) 사업을 포괄 양수하고 럭키소재와 럭키제약을 흡수합병하면서 석유화학산업의 수직계열화에 한걸음 다가섰다. 합병을 통해 럭키는 석화산업의 기초 원료인 VCM에서 유도원료제품과 가공제품에 이르기까지 총 200만t 규모의 석화제품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다. 이 해에는 럭키석유화학이 에틸렌 연산 38만5천t 규모의 NCC를 준공하면서 럭키는 정유부터 기초유분, 가공제품에 이르는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1990년대 럭키는 수직계열화를 바탕으로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한 선진기업과의 합작을 추진했다. 1990년 에폭시수지 생산메이커인 럭키다우케미칼과 유리장섬유 생산업체인 럭키화이버글라스 등을 설립했다. 1991년에는 MMA와 이소부틸렌을 생산하는 럭키MMA를 세웠다. 또한 해외에도 공장을 설립해 1983년 사우디 사빅과의 합작기업인 NPC(National Plastic Co.)를 비롯해 1990년 말레이시아에 럭키 팜코, 헨켈리카, 태국에는 솔비톨 합작공장인 타이와 럭키를 설립했다. 인도네시아에는 시나르 럭키 플라스틱 공장을 건설했다. 1995년 럭키금성그룹이 LG그룹으로 변경함에 따라 럭키 역시 LG화학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정밀화학분야 집중육성과 세계 최고수준의 연구개발력 확보를 위해 1995년부터 3년간 총 2조4천억원의 투자계획을 골자로 한 중장기 경영계획을 발표했다. IMF 한파가 몰아치던 1998년 LG화학은 7월 중국 닝보에 ABS 공장을 준공한데 이어 10월 폴리카보네이트 사업에 진출했다. 이듬해 9월 LG는 다우와 합작기업인 LG 폴리카보네이트 공장 기공식을 가졌다. 2000년 11월 LG화학은 대산단지에 있는 현대석유화학의 PVC 사업을 인수했다. 2003년에는 호남석유화학과 공동으로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하고 LG대산유화를 설립했다. 이는 2006년 LG화학으로 흡수통합됐다. 지속적인 설비증설을 추진해온 LG화학은 2007년 11월 LG석유화학을 흡수합병하면서 명실 공히 국내 1위의 석유화학기업으로 우뚝 서게 됐다. ▲ 호남석유화학 호남석유화학은 1973년 설립된 여수석유화학주식회사에서 출발한다. 정부가 발표한 여천지구 석유화학공업 육성 계획에 따르면 여수석화는 HDPE 연산 7만t과 PP 8만t, EG 8만t 공장을 건설하게 됐다. 1976년 여수석유화학은 호남석유화학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건설공사에 돌입했다. 1979년 3월 공장을 준공했지만 원료 공급원인 호남에틸렌 설비 건설이 늦어지면서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이에 따라 호남석화는 1979년 8월 일본에서 프로필렌을 수입해 PP공장만 우선 시운전했다. 10월에는 PE공장과 EG공장이 차례로 가동됐다. 1978년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호남석화는 롯데그룹의 일원이 됐다. 여천석유단지 전 공장의 가동률이 낮아짐에 따라 원료인 올레핀 수급불균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또한 잦은 유틸리티 공급중단과 초창기 공장운전 경험 미숙으로 가동정지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다행히 1982년부터 세계 경제가 회생의 기운을 보이면서 호남석화도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1980년 초 국내 가전 및 자동차업계의 특수용도 수지 수요가 증가하면서 호남석화는 복합강화 PP를 국산화하는데 성공했다. 1983년 호남석화는 경기호황과 맞물리면서 경영도 안정화를 찾았다. 제품 수요 증가로 호남석화의 공장가동률은 100%를 훨씬 초과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1985년에는 HDPE 8만6천163t, PP 11만1천370t, EO·EG 11만588t을 기록, 공장가동 이래 최대 생산을 이룩했다. PE 및 PP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원료인 에틸렌과 프로필렌 저장탱크도 증설했다. 1988년과 1989년은 호남석화가 종합화학회사로서 성장을 위한 기틀을 마련한 시기다. 1988년 호남석화는 여천산단 나프타분해 신규투자업체로 최종 선정됐다. 이에 따라 미국 러머스(Lummus)사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건설에 본격 착수했다. 1989년에는 PE 및 PP 신규설비를 잇달아 완공하고 가동에 돌입했다. 1988년 건설에 돌입했던 NCC가 1992년 하반기 완공되면서 호남석화는 에틸렌 기준 연산 35만t을 비롯한 제품의 수직계열화를 달성했다. 하지만 대산단지 신규 가동에 따른 공급 과잉 등 경영환경 악화에 따라 1993년 688억원의 창사 이래 최대 적자를 기록했다. 1994년부터 세계 석유화학경기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호남석화는 전사적인 경영혁신과 생산시설 증대, 연구개발 등에 박차를 가하면서 흑자경영을 지속했다. 1997년과 1998년 IMF 한파 속에서도 흑자는 계속됐다. 오히려 1997년 제3 에틸렌글리콜(EG)공장을 완공하면서 매출을 초과 달성했다. 2001년 호남석화는 공장 신증설을 단행해 에틸렌 생산능력을 연간 46만t에서 70만t으로, PP는 24만t에서 44만t으로 늘렸다. 또한 연간 4만t의 MMA설비를 신규 가동했다. 호남석유화학 여수공장 이 같은 노력 덕분에 2002년 매출은 창사 이래 최초로 2조원을 돌파했다. 호남석화는 LG화학과 공동으로 2003년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하고 롯데대산유화를 설립한데 이어 2004년에는 KP케미칼을 사들이는 등 외형을 크게 키웠다. 이후에도 호남석화는 지속적인 신증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05년에는 국내 NCC업체 최초로 중동진출을 선언하고 카타르페트롤륨과 합작기업 설립을 발표했다. 또한 2006년 1월에는 일본 미쯔비시레이온사와 MMA 및 PMMA합작기업 설립에 대한 MOU를 체결하고 대산MMA를 설립했다. 한편 호남석화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신증설 및 M&A를 실시할 계획이다. 2009년 롯데대산유화를 흡수할 계획인 호남석화는 지난 2006년 3월 ‘Exploring new Horizons’이라는 비전선포식을 통해 오는 2014년까지 ‘롯데그룹 석화3사 매출 100억달러 달성, EBTDA 20억달러’를 목표로 정했다. ▲ 삼성토탈 1988년 5월 삼성토탈의 전신인 삼성종합화학이 설립됐다. 석유화학공업육성법이 1986년 말로 만료됨에 따라 석유화학시장 진입이 용이해진 점이 삼성의 NCC 사업 진출을 부추겼다. 삼성종합화학은 회사 설립과 함께 에틸렌 연산 35만t을 비롯해 LDPE와 LLDPE, HDPE, PP 등을 생산하기로 했다. 또한 EO와 EG 병산설비도 검토 대상에 포함됐다. 하지만 가동 직후 공급과잉이 심화되면서 채산성이 악화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92년에는 호남석화와 한양화학(현 여천NCC)의 NCC가 잇달아 신규가동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국내 에틸렌 생산량은 1991년 초 대비 무려 78%이상 늘어난 279만9천t에 달했다. 이후 영업 극대화 노력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했지만 전반적인 석화경기 부진으로 인해 삼성종합화학은 IMF 금융위기 가운데 7대업종 구조조정 대상기업에 포함되고 말았다. 당시 빅딜 대상기업으로 낙인이 찍히면서 채권단으로부터 만기 대출자금에 대한 즉각적인 회수를 통보받는 동시에 신규 자금대출이 사실상 불가능해 부도위기까지 직면했다. 이에 따라 삼성종합화학은 과감하고도 신속한 구조조정작업에 추진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간 발전설비, 수처리설비 등 비핵심 자산뿐만 아니라 TPA 사업도 매각하는 등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수익위주로 발 빠르게 전환했다. 결국 삼성종합화학은 2003년 8월 프랑스 토탈과 계약을 체결하고 1조원에 가까운 외자를 유치, ‘삼성토탈’이라는 합작사로 거듭났다. 이에 따라 삼성토탈은 치열한 국제 생존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글로벌 선진업체 수준의 건실한 재무구조와 높은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토탈은 외환위기 때 지정된 7대 빅딜업종 중 자력갱생한 유일한 회사이다. 경영진을 비롯한 전 임직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공적자금 투입이나 탕감 없이 부채를 전액 상환, 사실상 무차입 경영을 하는 초우량기업, 글로벌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경영이 안정화되면서 삼성토탈은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2005년부터 대산 공장에 6천여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신증설 투자를 실시했다. 2005년 방향족공장 증설을 완료한 데 이어 2007년 9월 NCC, PP, SM 등 3개 핵심공장의 증설 공사를 끝마치고 본격가동에 들어갔다. 현재 삼성토탈은 에틸렌 85만t, SM 89만t, PE 40만t, PP 59만t, EO·EG 11만7천t, 파라자일렌 67만t의 생산능력을 갖추며 규모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삼성토탈은 오는 2010년까지 에틸렌 생산규모를 100만t까지 확대하는 등 주요 품목 생산규모를 100만t으로 늘릴 계획이다. <전문은 EBN화학정보 125호 참조> | ||||||
최일권 기자 [EBN화학정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