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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알기 쉬운 조직신학 총론
언약신학과 조직신학 송 영 재 교수(개혁신학연구원, 조직신학) 언약신학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하부구조를 형성한다. 언약신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 맺기 위해서 인간과 세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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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과 조직신학
송 영 재 교수(개혁신학연구원, 조직신학)
언약신학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하부구조를 형성한다. 언약신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 맺기 위해서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셨고, 죄는 관계의 상실이며, 속죄는 관계의 회복이며, 성화는 관계의 성장이며, 영광과 종말은 관계의 완성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자녀로써의 관계, 부부로써의 관계, 백성으로써의 “관계” 모티프(motif)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이 개혁주의 조직신학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언약적(covenantal) 관계라는 핵심사상은 개혁주의 조직신학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해석학적 무게(hermeneutical gravity) 되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언약신학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1. 구원론과 조직신학
성경은 구원에 대한 책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 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가장 큰 주제와 관심사는 역시 구원론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조직신학에 대한 총론을 언약적 관점에서 구원론과 연관시켜 기술해 보려고 한다.
성경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쉽게 말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말해도 좋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창조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배운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계에 대한 안목, 즉 "세계관"을 배운다는 말과 다름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영적, 정신적, 심리적, 인식론적, 인격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제까지의 관점을 버리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 곧 세계관의 변화이다. 그래서 죄인이 거듭난다는 것은 곧 그의 세계관이 새롭게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신학은 곧 성경적 세계관이고 따라서 조직신학이 다르면 세계관이 달라진다. 세계관이 달라지면 당연히 구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 하였듯이 구원은 곧 세계관의 전환이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을 배웠느냐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세상을 보는 시각이 결정되며 경건의 유형과 삶의 방식도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신학이 다르면 사는 방식도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자기가 보는 시각대로 세상을 살게 되어있다.
따라서 믿음은 단순한 체험이 아니다. 믿음은 체험을 포함하고 수반하는 것 이지만 먼저 세계관의 전향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하나의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국 내 믿음과 경건과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신학이 다르면 세계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면 구원관이 다르고 구원관이 다르면 그에 따른 신앙의 스타일과 삶의 성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연쇄적인 상관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두가 구원을 말한다고 해서 다 똑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신학과 세계관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가 말하고 있는 구원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2. 구원론과 조직신학 서론
조직신학 서론에서는 어떤 특정 신학의 바탕에 깔린 전제가 무엇이며 그 전제가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인지를 판가름 하게 된다. 전제가 비 성경적이면 세부적인 교리들은 연이어서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학의 전제는 곧 계시론에서 판가름 난다. 신학은 복잡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그렇지 않다. 신학의 다양성을 초월해서 기독교 신학의 최종적인 관건은 역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인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 즉, 계시라는 것이 있다면 인간이 그 뜻을 어떻게 인식하여 신학적 명제와 구체적인 신앙의 규범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있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 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따라서 계시관은 신학의 분수령이고 거기에서 방향이 엇갈리면 결과적으로 신학은 달라지게 되어있다.
그것은 이렇다. 개별적인 교리들은 계시에서 유추되는 것 이기 때문에 계시를 인식하는 방법과 계시를 진술하는 방법에 따라 교리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신학의 신론, 창조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성화론, 교회론, 종말론 등은 계시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결정된(해결된) 것으로 전제하고 형성된 교리들이다. 그러나 조직신학 서론에서는 특정 신학의 그러한 개별적인 교리들이 과연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인식되고 신학적인 명제로 전환 되었는지에 대한 원칙적인 의문을 제시한다. 왜냐 하면 그 신학에서 가르치는 개별적인 교리들의 진위 여부는 그 교리들의 근거가 된 계시론, 즉 계시 인식의 방법과 계시진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연 이성의 권위를 계시의 권위보다 위에 두는 신학과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신학은 이미 계시인식과 진술방법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다른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개별적인 교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합의를 이룰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계시를 변증법적(non-propositional)으로 이해하는 신정통 신학과 계시를 언어적이고 명제적으로(propositional) 이해하는 개혁신학이 신학적으로 같은 배를 탈 수 없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신앙과 이성의 타협적인 협력을 주장했던 중세 스콜라 신앙과 이성의 주종관계를 주장했던 개혁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저들이 자유의지나 하나님의 전적은혜의 교리등에서 첨예하게 대립 했다는 사실은 시작부터 예견 된 바이다.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언어적인 자기계시(self revelation in human language)로부터 시작된다. 팔마 로벗슨의 언약에 대한 정의는“주권에 의한 피로 맺은 약정”이다. 이것은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없었다면 신학은 인간의 말 장난 일 뿐이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언약행위를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발적인 비하” (God’s voluntary condescension) 라고 정의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인간이 알아듣도록 인간의 수준으로 자기를 비하시키면서까지 구원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고 본 것이다.
3. 구원론과 신론
신학에서 신관은 다른 모든 교리들을 결정하는 구심점이 된다. 따라서 구원론 역시 신론에 의해서 그 성격이 결정되어 진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부인하는 신학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신학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무한하시며(infinite) 동시에 인격적(personal)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분이시다.
모든 범신론적 신학은 하나님의 무한성을 부인하여 신앙을 도덕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반대로 모든 초월주의적 신학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여 신앙을 무질서와 비약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및 주권적 섭리를 부정하여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역사와 점진적인 성화를 부정하여 초월적이고 신비한 체험으로만 믿음을 지탱해가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삼위일체는 인식론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성경은 아들을 아는 것이 곧 아버지를 아는 것 이라고 했다. 아들과 아들에 대한 것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다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인간이 인식하는 문제에 있어서 세분께서는 상호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세분 중 어느 한 분만 떼어 놓고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분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두 분을 필연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 더 좋은 방법은 구원론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역시 삼위일체는 구원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가 빠르다. 구원에는 영원과 과거와 현재가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성부께서는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성자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고 하셨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아버지는 택하시고, 아들은 속죄하시고, 성령은 거듭나게 하셔야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가지만 빠져도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으로도 하나님의 필연적인 존재방식 이지만 구원론적으로도 필연적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성경적으로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
언약적 하나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하나님이시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면서도 인간에게 또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창세전에 구원을 작정하셨으면서도 역사에 성육신하여 들어오셨고 지금도 자녀들안에 계시면서 영광의 순간까지 보호하시고 성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하나님은 당신을“자발적으로 비하” 시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셨다. 언약신학은 곧 임마누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동시에 스스로 낮추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4. 구원론과 인간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도덕적인 결함(moral deficiency)인가 아니면 인격적인 죄(personal sin)인가?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인 결함으로 본다면 약간의 추가적인 선행이나 노력과 하나님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결함이 아니고 인격적인 또는 관계상의 죄라면 문제는 다르다. 죄는 도덕적인 선행이나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내적 변화와 관계의 회복으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죄인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속죄와 은혜로만 해결 될 수 있다.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인 결함으로 보는 것은 성선설에 근거한 인간론이며 인간의 문제를 인격적인 죄로 보는 것은 성경적인 인간론이다.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결함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 된다.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하자가 있는 인간을 만든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제가 죄 이며 그 책임은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결국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결함이라면 그것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인(언약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속죄의 필요성이 없게 된다. 도덕적인 결함은 인격적인 문제가 아니고 유전적인 문제이다. 만약 인간의 문제가 인격적인 성격을 갖지 않고 단순히 잘 못된 창조로 인한 유전적인 문제라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 없게 된다. 또 자신의 선행이나 도덕적인 노력으로 결함을 보충하면 되기 때문에 자유의지로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의 노력을 돕는 일종의 "도우미" 정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인간론이 잘못되면 구원론은 자동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짐승의 피가 인간 속죄의 피로 불완전한 이유가 어디에 있나? 짐승의 피는 사실 그 자체로써 어떤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결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시적으로(ceremonially) 불완전한 이유는 죄가 도덕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것이요, 관계적인 것이요, 언약적인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결함은 원인이 아니고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가출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을 도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가출한 자식을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식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사랑을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간 자식으로 볼 뿐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고 나간 자식 일 뿐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탕자의 도덕적 부패성이 아니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화목하고 관계를 다시 회복 할 것이냐 말 것 이냐 그것이었다.
인격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은 책임일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는 책임을 요구한다. 이 책임은 노예적인 책임이 아니고 곧 축복과 보호(security)를 가져오는 부자간의 책임이요 부부간의 책임이다. 책임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responsible love). 동산에서 금단의 시험을 통해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은 영생복락을 약속하시고 대신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순종을 요구하셨다.이것은 노예적인 시험이나 순종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안전(security)을 위한 시험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이처럼 영생복락의 약속과 순종의 책임을 수반하는 언약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언약에서도 변함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랑이라고 했다. 혼인메타포는 곧 언약메타포를 의미한다.
5. 구원론과 기독론
팔마 로벗슨은 언약은 “주권에 의한 피로 맺은 약정”이라고 정의했다. 언약에 대한 이 정의는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비하”(voluntary condescension) 하신 것이 언약이다. 둘째로, 언약은 피로 맺은 것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다. 피흘림은 언약파기에 따라오는 책임이다. 언약파기의 대가는 죽음인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다. 히브리어로 언약은 “보리트”인데 “쪼갠다”는 의미를 갖는다. 살을 쪼개고 피를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짐승의 쪼갠 살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심으로 피흘림의 언약을 맺으셨다.
세번째로, 언약은 약정이다. 약속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요 하나님의 구원약정이다. 이 약정을 보증하는 증표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할례를 주셨다. 둘 다 피흘림을 뜻하는 증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곧 이 피흘림의 약정이 성취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곧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언약적 죽음이요 언약적 속죄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흠 없는 제물이 될 수 없다. 또 만일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는 인간을 대표하는 언약의 머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구원론적인 필요에 의해서 보더라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셔야만 했다. 죄인이 의롭게 되었다는 칭의(justification)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속죄론에 근거한 것이다. 죄 용서함이 없이는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다.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대신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 하셨기 때문에 저를 믿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해야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고 행위의 심판에서 면제 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는 인간의 도덕적인 결핍을 “돕는” 추가적인 의미로서의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상실에서 시작된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속죄하여 깨어진 관계를 변화 시키고 회복하는 은혜이다.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결핍이었다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 조차도 없어지게 된다. 도덕적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돕는 은혜로서 충분할 것이다. 약간의 도덕적인 결핍을 돕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야 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문제가 결핍이나 도덕적인 문제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한 은혜가 아니고 본래부터 하자 있는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당연히 책임을 느끼고 인간에게 베풀어야 하는 보상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듯 기독론은 인간론 및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피를 도덕적인(moral) 것으로 보지 않고 화목을 위한 의식적인(ceremonial) 것으로 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는 도덕적인 것 이전에 언약적이고 관계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도 언약적이요 관계적이다. 화목을 위한 속죄의 피흘림이란 뜻이다. 옳은 행위를 논하기 전에 먼저 옳은 신분이 요구 된다는 것이다. 죄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신분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로서 이차적으로 옳은 신분에서 나온 옳은 행위와 실천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신학에서는 새로운 신분으로 인한 새로운 관계를 먼저 따진다. 새로운 신분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는 이차적인 문제요 시간의 문제다.
6. 구원론과 성화론: 연속성과 불연속성
복음과 율법의 문제를 다룬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 이것은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는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모토이다. 특히 루터가 많이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중요하다. 이 자유는 두 가지로 봐야 한다. 첫 번째는 구원론적 자유 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이루지 못한 언약을 완성해 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이 된다. 타락 전에는 아담에게 순종의 언약이 주어졌다. 이것은 다른 말로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이 언약은 율법을 순종함으로 성취되는 언약이다. 그런데 아담은 실패하였고 율법의 정죄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이후 인간을 구원 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언약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은혜로 인간을 구원 하시기로 작정 하였기 때문에 이 언약은 은혜 언약이라고 부른다. 이 언약의 머리는 곧 그리스도 이시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였고 그 순종은 은혜언약을 충족 시키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은혜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어 율법의 정죄 함으로부터 자유 하게 된다. 이 언약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신 언약이기 때문이다.
구원론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가 은혜언약으로 완성하신 것은 곧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이 이루지 못한 행위 언약을 완성 하신 것이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완성 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율법의 정죄 함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한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로마서이다 (8:1-2).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행위언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 가서도 안 된다. 이것이 구원론적 완성이다. 율법의 정죄 함으로부터 해방 되었다.
구약과 신약
두 번째 의미의 자유는 새 언약에서 오는 자유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완성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이 타락이후 은혜언약이 출발했다. 이미 창세기 3:15에 원시복음이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 언약이 예고 된 것 이다. 그래서 타락의 시작과 함께 구속의 역사는 창3:15에서 시작 되었다. 구속의 역사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구속의 역사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진다. 그러나 은혜언약이라는 큰 구도 안에서 구약과 신약은 연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신약은 물론이고 구약에도 복음이 담겨 있다. 구원의 관점에서 본다면 둘 다 내용적으로 차이가 없는 복음의 역사로 봐야 한다. 행위언약은 창조와 함께 실패 하였고 대신 시작된 은혜언약의 역사가 구약과 신약을 포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자와 참 형상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옛 언약과 새언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0:1을 보면 구약은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형상임을 알게 된다. 구약은 모형이요 신약은 실체이다. 구약은 약속이요 신약은 성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 하심은 이 두 번째 의미를 갖는다. 그림자가 참 형상으로, 모형이 실체로, 약속이 성취로 대치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새 언약은 율법의 모형적인 기능으로부터 자유한 언약을 의미한다. 그림자적 기능으로부터 자유함을 의미한다. 복음의 구약적 표현내지는 복음의 구약적 모형으로부터 자유한 것을 의미 한다.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이 두책들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역사적 관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은 내용적인 차이점이 아니고 동일한 은혜언약을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집행 했느냐의 차이점이다.
은혜언약은 아담에서 시작 했고 아브라함에 와서 구체적으로 세워 졌으며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심으로 은혜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의 규범을 가르쳐 주셨다. 그 율법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형의 기능을 갖은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 할 때 우리는 구약의 모형적 기능이 신약의 실체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이것은 대치(displacement) 또는 폐지(abrogation)가 아니고 성취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심이 아니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 하셨다.
유효기간 만료
구약시대와 옛 언약을 대표하는 개념은 율법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을 율법의 완성으로 요약할 정도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 하셨다. 구약 율법의 완성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양면이 있음을 기억하자. 구약에서 신약으로 옮겨 가면서 율법은 신약에서 계속되는 연속적인 측면이 있고, 반면에 신약에서는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불 연속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율법의 정신은 강화, 확대 되지만 율법의 구약적인 집행은 그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다. 신약에서 율법의 정신은 더욱 강화 되지만 반면에 율법의 구약적인 집행은 유효기간 만기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 하였다 (마 5:17). 이 말씀은 앞서 말한 양면성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 준다. 완성이란 말씀 속에는 단절의 의미가 들어있다. 완성은 불완성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전에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 완성되면 이전 것은 더 이상 불필요 하게 되는 단절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반면에 이것이 율법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폐지되지 않았다는 말 속에는 계속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아직 덜 완성된 것과 완성된 것 사이에는 단절성도 있지만 연속성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단절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율법 폐기론으로 빠지고 계속성을 너무 강조 하다 보면 율법주의로 빠질것이 틀림 없다. 그렇다면 단절된 것은 무엇이고 계속되는 것은 무엇인가. 쉽게 요약하면 단절된 것은 형식(form)이고 계속되는 것은 정신(principle)이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과 신약의 해석을 살펴보면 이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구약의 율법은 제사법, 사회법, 도덕법이 있었다. 이 세가지 율법은 모두 십계명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세가지 율법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율법들의 정신은 신약에서 계속되고 오히려 강화 되지만 그것들의 집행은 유효기간 만기로 인해 필요치 않게 되어 버렸다. 제사법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완성되었다. 히브리서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번에 대속제물로 드려짐으로 모든 제사법이 완성되었다. 그림자가 본체로, 모형이 실체로 바뀌었다. 속죄의 정신은 새 언약과 함께 더 강화 되었지만 동물의 피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사항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로 완성되면서 더 이상 구약사회를 지배했던 사회법은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교회가 출범하고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 죤 머리는 “기독교 윤리”에서 간음에 대한 구약적 법 적용과 신약적 법 적용의 차이점을 요한복음 8장을 통해서 보여준다. 구약에서는 사형의 사유가 되었던 간음이 신약에서는 이혼의 사유로 바뀌게 된다. 새 언약의 완성으로 인해 형벌의 적용이 달라진 것이다.
국가적 이스라엘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그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다. 국가적 민족적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과 같이 결부 되었는데 구속사적으로 볼 때 땅에 대한 약속은 다윗왕국과 포스트 바벨론시대에 성취되었다. 국가적 이스라엘은 구속사적으로 볼 때 옛 언약에 대한 그들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기능을 다했고 시간은 만기 된 것이다. 이제 그것은 영적 이스라엘의 법으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태복음 5장에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법에 담겨있는 정신인 성결의 요구는 신약에서 더욱 강화 된다. 신약시대에서 국가는 국가대로 범죄를 처벌 하지만 교회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범죄를 처벌 하지 않는다. 영적인 징계를 통해서 성결의 삶을 요구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약에서는 이혼의 사유가 훨씬 좁혀 졌다. 거의 이혼을 하지 말라는 쪽으로 해석된다. 또 구약에서는 묵인 되었던 일부다체제가 신약에서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신약에서는 물리적인 형벌은 국가가 영적인 형벌은 교회가 집행 하도록 되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던 구약의 형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셨다.
도덕법의 불변하는 정신은 사랑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도덕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문자적인 해석은 유효기간이 만기 되었다. 때문에 신약에서는 간음과 살인은 단순히 육체적인 차원을 넘어서 마음으로도 범할 수 있는 죄로 확대 되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구약의 단순히 의무적인 것에서 신약의 자발적이고 내면적이 것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로 확대 된 것이다. 문자적이고 의무적인 율법은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지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갖게된다. .
그래서 주님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요약이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다. 간음한 여인은 7계명을 범했지만 간음한 여인을 사랑으로 용서해 주지 못하고 미워한 저 유대인들은 6계명을 범한 더 큰 죄인들 이다.
새언약의 삶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실천적 의미는 무엇인가? 연속성이 무시되면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정신은 더 강화 되었기 때문에 성도는 율법을 폐지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반대로 불 연속성을 무시하면 우리는 새 언약의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다. 새 언약의 삶은 성령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폐지하는 삶을 살아서도 안되고, 동시에 율법을 구약적으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또는 생각은 구약적으로 하고 생활은 신약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두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들 이다. 이것은 틀렸을 뿐 아니라 불 가능하다.
언약 백성은 그래서 율법의 최소한이 아닌 그 정신을 강화 시킨 최대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구약에서는 몽학 선생으로 문자적 순종을 요구한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원리였다. 이 것은 어린아이를 위한 율법 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전 삶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범위가 더 넓고 강도가 높은 순종을 요구 한다. 부분적인 순종이 아니고 포괄적인 순종을 의미 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순종은 유효 기간이 만기 되었고 넒은 의미에서의 순종이 요구된다. 규칙은 많이 줄었지만 자발적으로 알아서 살아야 되는 것 이다. 제도는 유효기간 만기로 끝났지만 그 정신에는 연속성이 있다. 신약시대에서는 제도 자체를 법적으로 강조해서는 안되고 순종의 정신을 존중하고 받드는 한도 내에서 집행을 해야 한다.
새 언약 성도의 삶에 있어서 “최소한의 순종”이란 있을 수 없다. 단순히 “믿음의 표현”이란 말도 모호하다. 전자는 순종에 있어서 최소한이라는 것과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은 새언약의 정신에서 어긋난 것이다. 예를 들면 십일조를 성도의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것은 신앙을 십일조로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문제는 십일조는 잘하는데 삶의 변화가 없다는 데 있다. 십일조는 신앙의 여러 척도들 중에 하나이지 전체가 아니다. 새 언약 아래에서는 그리스도의 주권사상에 의거한 선하고 적절한 제도를 말할 때 율법의 정신도 지키고 복음의 자유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구약이 더 살기 힘들었을 것 이라고 말한다. 까다로운 규칙도 많고 형벌도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칙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쉬운 것이다. 진짜 어려운 것은 규칙 없이 사는 생활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기가 점점 어려워 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규칙대로 사는 것이 효도지만 커서는 규칙 플러스 “알아서 해야”되기 때문이다. 알아서 해야 되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명하거나 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해석하고 싶어 한다. 성경이 분명하게 명하거나 금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개인의 자유에 맡겨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다. 이것은 그럴듯한 말 같이 보여도 결국 생각은 구약식으로 하고 생활은 신약식으로 하겠다는 자기 모순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이지 율법의 정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이 구약보다 더 자유롭다거나 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쉽게 사는 법 보다 어렵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살기 보다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종 노릇 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구약적인 형식은 빨리 버릴수록 좋고 또 버리도록 힘 써야 한다.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모순만 나타낸다. 그러나 신구약을 초월한 율법의 정신이나 더욱 강화된 신약의 윤리적 요구는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 솔직히 우리의 복잡한 현실에서 율법의 정신을 외치는 것은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단순한 이상주의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어두울수록 이상을 외치고 붙들어야 하는 것 이 개혁주의 정신일 것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지 않을 때 이중적인 믿음을 갖게 된다.
율법주의는 진정한 복음이 없어서(불 연속성 부인) 나온다. 형식주의와 매너리즘은 진정한 자유를 맛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복음, 진정한 자유가 없는 곳에는 거꾸로 율법의 정신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연속성 부인) 뒤로는 거짓자유와 향락과 불순종의 삶이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다.
7. 구원론과 성령론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인 결핍이나 능력의 결핍으로 보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능력의 결핍을 돕고 채워주는 추가적인 은혜로만 볼 때 당연히 성령의 사역도 인간의 부족을 보충해주는 분으로 이해하게 된다. 부족한 능력을 부어주고 채워주는 신비한 영으로만 성령을 보게 되는 것 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가 능력의 결핍이 아닌 인격적인 죄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능력의 결핍을 돕는 추가적인 은혜가 아니고 죽은 죄인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은혜라고 한다면 성령의 근본적인 사역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이기 전에 우리의 부패했던 인격과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일 이라고 봐야 한다.
성령신학에 큰 혼란이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을 능력의 결핍을 돕는 능력의 필터로 조명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회복의 필터로 조명해야 할 것인지는 바로 성령과 관련된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의 종합적인 구도 속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의 종합적인 관계성을 무시한 채 성령론만 따로 떼어서 말하게 되면 성령은 자연스럽게 힘 없는 인간을 도와주는 신비스런 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자기부인이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순종의 삶 같은 것은 불필요하게 된다. 능력만 채워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받자 능력받자 하는 초월적인 사상들이 거룩한 순종의 삶, 인격의 변화, 자녀로써의 영광과 명예 같은 주제들을 무시한채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속적인 “성령론”으로 가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개혁신학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기대하지만 순종과 인격의 성화를 골자로 하지 않은 성령론과 초월주의는 인정하지 않는다. 성령의 궁극적인 역할은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능력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주권아래서 순종하면서 살도록 지어졌다. 성령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사람 안에서 역사 하신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일치한다. 하나님나라는 그 나라의 통치권(Lordship)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따라서 성령사역의 핵심은 죄인을 거듭나게 하여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열매 그리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이고 순차적인 우선순위가 있다. 성령세례는 죄인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중생을 의미하며,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면서 변화되는 성품을 의미하며,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방편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아래서 그 주권을 통해서 그 주권을 영화롭게 한다는 중심주제가 성령론에 포함되어야 한다. 은사 일변도로 나가는 성령론은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지 않고 파워나 능력을 강조하여 성화의 질서를 초월해 버리는 지나치게 초월적인 성향으로 나간다.
개혁주의 성령론에 의하면 성령세례는 "보편"적이며, 성령의열매는 "보편-예외"적이며, 성령은사는 "예외"적인 성격을 갖는다. 성령세례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가장 우선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이다. 첫째로, 성령세례를 통해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둘째로,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도달해야만 하는 목표이다. 성품적인 변화는 다양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선순위에서 볼 때 "보편-예외적"인 성격을 갖는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보편적인 신분만큼은 중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성령의 은사는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예외적"인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순차적으로 볼 때 가장 우선순위가 낮은 것이다. 성령의 세례나 열매처럼 누가 가진 것을 내가 못 가져도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칙은 예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 순차적으로 밑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 중요성에 있어서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열매보다 밑이며, 성령의 열매는 거듭 나게 하는 성령세례보다 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있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밝혀진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항상 정비례 하지 않는다. 은사와 순종은 필연적으로 정비례 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가 좋은 사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분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성령세례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축복이요 선물이다. 성령세례는 바로 언약적 관계회복의 시작을 선언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세례(거듭남)와 성령의 열매(성품의 변화)는 “됨(being)”을 강조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일”(doing)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됨”이 “일”보다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은 “됨”을 무시하면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방편이 되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성령론의 최고 원칙이다. 더 나아가서 성령론과 기독교세계관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진정한 성화와 영성은 성도의 삶을 지배하는 그리스도 주권사상(Lordship)이 있어야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를 넘어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주권사상이 빠진 영성이나 종교적 체험을 개혁신학은 멀리한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영성이나 체험은 순종 없는 제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언약신학은 “됨”(being)의 신학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묵상해보자.
8. 구원론과 언약적 기독교 세계관
새언약과 함께 도래한 "그리스도의 통치"와 "주권"은 자연적으로 역동적인 삶을 유발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은 세상을 개혁하는 경건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우리의 모든 사고와 활동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순종과 기쁨으로 나타나야 한다. 가정생활, 교회생활, 사회생활이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있어야 하며, 그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 삶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될 때 언약적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과 사회와 문화가 유기적인 통일성을 갖게된다. 언약적 세계관은 세상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정신이 아니라,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정신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 제사장, 선지자"로 세상을 다스리고,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며, 말씀으로 인도하는 세계관이 언약적 세계관 이다. 언약적 세계관은 바로 청지기적 세계관이다.
창조언약
아담은 본래 왕, 제사장, 선지자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고(왕),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며(제사장), 말씀으로 해석하는(선지자)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창조되었다. 창조언약으로 맺어진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함께 인간의 세상에 대한 총체적인 역할을 유기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서 사회생활을 생각할수 없었듯이, 또한 사회를 떠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창조언약이다.
팔마 로벗슨은 "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금단의 시험은 창조언약의 특수명령이며,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말씀은 창조언약의 일반명령이라고 정의 한다. 그리고 특수명령인 금단의 시험은 일반명령(문화명령)을 포함하는 언약적 관계의 총체적인 시험이었지, 단순히 선악과를 먹느냐 안먹느냐의 개별적 시험이 아니었다. 금단의 시험은 왕과, 제상장과 선지자로써의 시험이었고, 아담의 불순종과 실패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써의 언약적 불순종이요, 언약적 실패였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본래 관계는 단순히 육신의 삶을 제외시킨 영적인 것만이 아니고 전인간적이다. 언약적 관계와 언약적 삶은 영과 육을 모두 포함시킨다. 반대로 죄 역시 단순히 영적인 것만도 육신적인 것 만도 아니라 전인간적이다.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속에는 가정과 사회를 비롯한 육신의 삶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한 것이 죄라면 이로 인해 사람은 세상과의 관계와 책임을 또한 더불어 상실한 것 이다.
로벗슨은 바로 여기에 근본주의 신학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 신학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영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그 관계와 인간의 세상과의 관계는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영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세상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성도의 관심밖의 문제로 규명하여 비사회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반사회적인 신앙양식을 격려하게 된다.
새창조: 창조의 회복과 완성
첫 창조에서 아담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써 실패하였다. 아담안에서 인간은 모두 같이 불순종하고 실패 하였다. 그러나 새창조에서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써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성 하였다. 그리고 은혜언약의 머리가 되어서 대리적으로 순종하였고,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그의 순종을 전가함으로 그와 함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을 다시 주셨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본래의 창조구도를 부인하는 복음이 아니고 완성하는 복음 이다. 여기서도 역시 복음은 단순히 영적인 문제가 아니고 성도의 세상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유기적으로 포함했던 첫창조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새창조이다. 팔마 로벗슨은 이렇게 말한다. "창조구조에 반대되는 방법이 아니라, 부합하는 방법으로써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신다." 창조때 인간에게 주어진 사회생활의 책임은 안식일과 혼인과 노동이다. 인간은 안식(예배)하며, 가정을 만들고, 건전한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바른 안식(예배), 바른가정, 바른노동은 본래 첫창조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언약적 의무이다. 새창조는 이 첫창조의 의미를 더욱 확대하고 증가시킨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진정한 안식(예배)과 가정과 노동이 있을 때 비로서 인간은 왕과 제사장 선지자로써의 책임을 다할수 있다.
복음과 문화 (교회와 세상)
새창조안에 사는 성도들의 세상과 사회에 대한 태도는 근본주의자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들은 영과육의 이분법적 구도속에서 수동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살지만 언약의 신앙을 갖은 성도들은 역동적이고 개혁적이고 청지기적인 세계관을 갖고 산다. 언약적 세계관을 갖고사는 성도들은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에 순종하며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한다.
소위 "문화명령"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 "정녕죽으리라" 했지만 죽지않았다. 심판의 유예를 의미한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었으나, 인간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하셨다. 인간으로 사는동안은 "땅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문화책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 예술, 도덕, 정치, 경제는 인간이 창조주로부터 받은 문화적 사회적 책임에서 비롯되었다. 성도들은 이들 분야에서 역동적이고 개혁적인 의무를 갖는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문화를 죄의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거역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하며 문화를 의의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문화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종교와 신앙의 영향력이 점점 축소되는 것은 문화자체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교회가 창조명령인 문화적 책임을 포기해서 그런 것이다. 문화를 기피하면 신앙은 세상밖으로 ㅉ겨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이 점점 현대인들의 의식속에서 희미해 지거나 사라져 가고 있는 것에 교회는 일조 했다고 볼 수 있다.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문화를 포기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탄의 영향력이 문화를 통해서 커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언약적 세계관은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 변혁시켜야 한다. 문화는 사탄의 소유가 아니라 본래 창조속에 의도 됐던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찾아야 한다.
심비에 쓰여진 하나님의 법
심비에 적힌 법은 자유와 순종의 조화를 의미한다. 새언약과 함께 도래한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에 자유롭게 그러나 철저히 순종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심비에 적힌 하나님의 법이다. 이것은 역동적 세계관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하는 내적인 능력과 힘이 된다.
역동적인 삶은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것 이다. 하나님의 법 없이 살면 두가지 모순된 현상이 나타난다. 자유할것에 속박되고(율법주의), 속박되어야 할것엔 자유하는(비윤리적인) 모순된 삶을 살게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자유할것에 자유하고, 속박되어야 할것에 속박되는 (순종하는) 조화된 삶을 산다. 자유를 누리면서도 윤리적인 삶을 산다. 그러므로, "심비에 쓰여진 법"은 성도의 신앙과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은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법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9. 구원론과 종말론
구원은 현재적으로 완성 되었지만 미래적으로 종결되어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신분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걱정할 것이 없으나, 아직 몸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미래에 있으므로 성도들은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그날을 기다리며 남은 죄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에 대한 인식도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야 한다. "이미" 완성된 현재의 구원에 대한 기쁨과 만족함을 누려야 할 것이며, 반면에 여기에서 안주하지 말고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미래의 종말을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전천년설에 의거한 천년 중심의 종말론은 항상 미래적 구원(현재 부정적)에 관심을 갖게 되어 상대적으로 현세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내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현세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고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냉소적이거나 도피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 그러나 천년왕국에 대한 열정적인 기다림으로 인해 성도들로 하여금 희생과 열심을 갖게 하는데 효과적이다. 무 천년설을 믿는 사람들은 미래의 종말을 믿으면서도 현재의 구원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신념 속에서 현실적 삶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한다. 기독교 윤리나 문화 및 사회참여등에도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종말론은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바로 개인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결정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10. 언약과 조직신학에 대한 결론
조직신학은 곧 성경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세계관은 일관성 있는 하나의 체계이므로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종말론이 하나의 체계로 서로 맞물려 있다. 신학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성경적 세계관을 받아 드리고 그 세계관속에서 가치판단을 내리고 우선순위를 결정하여 자기가 선택한 방식대로 살아간다. 복음은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비 성경적 세계관을 버리고 성경적 세계관을 수용하여 일관성 있게 믿고 행동하는 것 이다. 복음을 믿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세계"로의 진입이요 전향이다. 그렇다면 조직신학은 곧 복음의 이와 같은 넒은 의미로 풀어낸 것 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필자는 오늘날 조직신학의 위기를 여기에서 찾는다. 과거에는 인정 받던 조직신학이 오늘날 다수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조직 신학자들이 조직신학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풀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히 조직신학을 배운 신학생들 역시 교회에서 설교할 때 조직신학을 성도들의 생활과 관계 있는 세계관으로 풀어내지 못하게 된다. 저들의 언어로 저들의 피부에 와 닿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저들의 심리저변에 깔린 무의식적인 세계관을 공략하고 변화 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조직신학이 세계관으로 재 해석되지 못한 채 교리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 조직신학이 강단에서 힘을 못 쓰게 된 이유 중에 하나이다.
과거에 청교도들은 설교를 조직신학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저들이 조직신학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풀어서 일반인들의 언어로 일반인들의 "세상 사는 법"과 연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 된다. 복음에는 믿고 천국 간다는 단순한 메시지와 함께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포괄적인 세계관과 주권사상(Lordship)이 깔려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조직신학과 세계관의 연계를 알고 그 후에 개별적인 교리들을 실천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강단이 더욱 풍성해 질 것이다.
11. 언약신학과 목회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의 서정에서(거듭남에서 종말까지) 하나님께서 지배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일(doing) 보다는 됨(being)에 있다. 하나님은 일(work)을 만들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고 동산에서 그에게 됨(being)의 책임을 맡기셨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됨(being)을 배워야만 했던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됨”의 책임에 실패한 인간을 기어코 “됨의 상태”로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의지를 담고 있는 책이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있는 신학이다.
파워, 열매, 결과, 부흥, 사역, 계발, 등등 목회의 현장에서 우리의 신학과 영성은 지나치게 일(doing) 중심으로 가고 있다. 가시적인 결과를 위해서 무엇을 자꾸 하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맡겨진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기 보다는 먼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다. 먼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신앙과 인격과 생활과 사회에서 먼저 “된”(have become)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봉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엡 4:11-12) 먼저 온전한 성도를 만들고 시키라고 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은 이처럼 관계중심의 언약신학적인 목회철학을 지향한다.
언약영성과 목회 파라다임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믿음은 종교적 "체험"이기 전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다. 인간의 종교적 체험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흘러나온 체험이어야 한다. 체험이 없는 관계보다는 하나님과의 옳 바른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은 종교적 체험이 더 위험하다. 남녀관계에서 혼인의 바른 관계를 통하지 않고 육체적 체험을 갖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부부의 육체적인 체험은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체험 이어야 한다.
아담의 시험은 인격의 시험이었다.
진정한 종교인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이고 관계에서 출발한다. 인격을 시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책임이다. 책임을 통해서 하나님은 과연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책임을 지킬 수 있는 인격적 존재임을 확인하신 것이다. 인간이 언약적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죄는 결핍이나 도덕적 타락 이전에 언약의 파기다.
죄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기에서 비롯된 것 이다. 언약적 관계를 깨뜨린 것이 죄의 본질이다. 개혁주의 죄론은 언약개념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죄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신앙과 영성의 본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죄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상실, 또는 언약적 인격적 관계를 상실한 것으로 정의한다. 영적 도덕적 타락 이전에 언약적 인격적 관계의 단절이 죄의 본질이라고 믿는 것이다. 짐승의 피가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나 의식적으로(ceremonially) 불완전한 이유는 동물의 피가 언약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짐승의 피로는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언약적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짐승의 피는 언약적으로 불완전하다. 언약은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문제를 해결 받거나 초월적인 영적 체험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영적 체험이나 도덕적 순결함이 그들의 영혼의 문제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교회에 나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다. 바른 관계 없이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적 "간음"이 될 수 있다. 도덕적 노력은 무거운 율법주의가 될 수 있다. 성령보다 악령을 영혼의 주인으로 초대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영적체험의 부재와 도덕적인 타락은 하나님과의 멀어진 관계의 결과일 뿐이다.
구원과 영성의 의미
따라서 개혁주의에서 구원이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상실된 관계회복이며, 성화 또는 영성이란 그 회복된 관계가 깊어지고 성숙해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상실된 관계를 회복시킨 사건이다. 또한 성령의 임재로 인한 성화와 영성은 신령한 존재로의 어떤 비약이 아니라 회복된 관계의 인격적 성장이라고 믿는 것이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호크마는 성화는 인간 본체상의 변화가 아니라 인격의 방향상의 변화라고 정의 한다. 이것은 성화가 신령한 존재로의 존재적 비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으며 성장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기독교의 체험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회복을 전제로 하고 또 그 관계의 성숙함을 위한 체험이 되어야 축복이 된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는 상관없는 영성을 추구하고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과 "직통" 하기 원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관계회복 없이 하나님과 직통하려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죄성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을 주입하는 것이 되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이르러 온전한 성도가 되라는 말씀은 이것을 의미할 것이다.
모든 은사와 체험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고 사랑으로 종결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성령론에 의하면 예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 순차적으로 밑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중요성에 있어서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열매보다 밑이며, 성령의 열매는 거듭 나게 하는 성령세례보다 밑이라는 것을 보았다. 성령의 은사가 있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보았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정비례 하지 않는다. 은사와 거룩한 성품은 같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고린도 교회가 좋은 사례이다.
성령의 세례(거듭남)와 성령의 열매(성품의 변화)는 “됨(being)”을 강조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일”(doing)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됨”이 “일”보다 앞서야 한다는 뜻이다. 성령은 “됨”을 무시하면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방편이 되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성령론의 최고 원칙이다. 더 나아가서 성령론과 기독교세계관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진정한 성화와 영성은 성도의 삶을 지배하는 그리스도 주권사상(Lordship)이 있어야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를 넘어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주권사상이 빠진 영성이나 종교적 체험을 개혁신학은 멀리한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영성이나 체험은 순종 없는 제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언약신학은 “됨”(being)의 신학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묵상해보자.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에 반대되는 것은 지배하려는 욕심이다. 진정한 사랑은 섬김으로 나타나고, 지배 욕은 세속적 권세로 나타난다 것이 마 20:25-28 의 교훈이다. 지배하려는 욕망은 곧 죄의 본질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곧 지배 욕 이다. 출세, 돈, 명예, 권력, 섹스 등에 관련된 욕심은 모두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들 이다.
안타깝게도 종교적인 욕심도 역시 그렇다는 사실이다. 영적으로 창조된 인간은 종교심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이웃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은 부패된 영적 체험이나 영적권세는 한마디로 이름만 다르지 인간의 원초적인 지배 욕에서 나온 다른 욕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사랑과 관계없는 영적 체험은 결국 자기도취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다. 죄의 본질이 자기도취요 자기만족이기 때문이다.
지배욕은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며, 사랑의 변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진정한 사랑을 모를 때 사람은 이웃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죄란 곧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리고 이웃의 사랑에 굶주린 상태를 말한다. 죄는 사랑에 굶주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을 증오하게 만들며 이 증오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지배하려는 지배욕심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죄인의 본능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웃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곳 에는 이같이 죄가 지배하며 남을 지배하려는 욕심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분쟁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반대로 남을 지배해야 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교회에서 문제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랑 받기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미움과 세력다툼으로 표출되는 것 뿐이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찾는 영적체험이나 영력에 대한 욕심 같은 것도 사실은 진정으로 사랑 받기 원한다는 그들의 내적 부르짖음 이다. 사랑에는 자유함이 있고 두려움이 없다. 사랑에는 자충족적인 요소가 있다. 스스로 만족시키는 힘이 있다. 욕심은 만족시키지 못한다. 종교적 욕심을 포함해서 모든 욕심이 그렇다. 결론적으로, 개혁주의 목사는 과연 어떤 영성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묵상이 없이 교회성장 일변도로 나가는 것은 문제를 더 만들 소지가 크다. 개혁주의 목회자는 앞뒤 가리지 않고 교인들의 영적체험의 욕구를 채워주는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영성과 언약적 영성을 이해하고 교회성장과 부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상호보완적인 목회의 두 파라다임
개혁주의 영성이 무엇인가? 은사를 통한 전도나 봉사의 전투적인 영성도 물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영성에는 성령의 열매를 통한 성품의 변화, 즉 “됨”의 영성도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언약적인 영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통한 전도나 봉사의 전투적인 “일” 중심의 영성도 주셨지만, 그 보다 더 새 계명을 통해서 관계적인 “됨” 중심의 영성을 더 크고 귀한 것으로 주셨다.
정통신학에서 개혁자들의 정적인 교회론이 취약점으로 드러났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은사를 통한 전도, 선교, 봉사의 전투적인 영성을 잃어 버리고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정적인(static) 교회론에 빠져서도 안 되겠지만, 반대로 동적인(dynamic)한 목회론을 추구 한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전투적인 영성에만 빠지면 절룩발이 영성을 갖게 된다. 언약신학에서 새계명에 근거한 언약적이고 성품적인 영성도 전도와 선교의 사명에 또 다른 큰 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영성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를 성장시키고 온전케 하는 영성을 은사위주의 전투적인 영성보다 앞세워서 나가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성경적 파라다임은 은사활동 위주로 전도와 봉사를 강조하는 전투적 영성을 성도를 온전케 하자는 성품적인 영성에 종속 시킬 때 가능하다. 이 두 가지 영성과 목회 스타일이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서로 상호보완 되야 만 할 것이다.
전투적인 영성일변도로 나가면 성도들의 기대와 요구에 따라서 끊임없는 신령한 영적 에너지 공급이 되지 않을 때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성도들은 목사가 하나님과 직통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목사가 자기들 보다 영력이 몇 배나 쌘 사람으로 착각하는데 이 착각을 계속 유지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영적 정신적 육신적 손실이 크다. 점진적으로 강도 높은 영성을 요구하게 되고 전투적 성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경우 목사는 영적 슈퍼맨이 되든지 아니면 영적으로 절단이 난다. 영적고갈로 인하여 절단이 났는데도 성도들의 기대를 생각하여 슈퍼맨인척 하면서 계속 버텨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타고 날 때부터 체질적으로 범인을 능가하는 스태미나가 넘치는 슈퍼맨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평범한 보통사람 들이다.
반면에 성품적인 영성은 새 계명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했다. 성도들은 진정으로 사랑할 때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사랑 받을 때 능력이 생기고 사랑을 줄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해서 위대한 희생이 이루어 진다. 사랑은 순종하게 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순종하며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다. 언약적 관계에서 최고의 가치는 순종으로 표현되는 사랑이 아니겠는가. 기독교 신앙과 영성의 종착역이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언약신학은 “일”보다 “됨”이,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가, 봉사보다는 성품의 변화가 더 우선이라고 믿는데서 출발한다. 개혁주의 신학과 언약적 영성은 확연하게 “됨”(being)의 영성을 앞에 세운다. 전도와 선교조차도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일 보다 앞에 설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인격적인 관계와 교제를 위해서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약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믿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언약적인 목회와 영성은 은혜와 은사, 됨(being)과 일(work)이 적절한 주종관계를 이룰 때 가능할 것이다. 관계적인 영성과 전투적인 영성이 적절한 주종의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목회, 언약신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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