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은 표충사를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천진의 덕화학단으로 입학하였다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으로 입학한다.
그리고 다시 서간도로 올라가 이회영, 이상용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한다.
약산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정규군을 길러 일본군과 투쟁하는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학교교육을 바꿔 앉아있을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시급하게 급격하고도 직접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주변의 학생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열혈지사를 규합하여 적의 군주이하 고관과 적의 기관등에 폭탄을 던져 싸우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8명의 학우들과 함께 길림으로 튀었다.
지금 바로 약산이 의열단을 결성한 길림이다.
후일 약산은 북경에 가서 단재 신채호를 만났다.
단재는 약산보다 18살이 위다.
약산은 단재가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닌 역사학자로서는 알고 있었지만 역시 구시대에 속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김원봉 입니다.'
'반갑소, 동지의 활약상은 익히들어 알고 있소. 참 장한 일이요.'
만나는 순간 약산은 단재야 말로 이 세상에 어느 사람보다도 젊은 피가 끓는 열렬하고도 급진적이며 과감한 인간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단재를 의열단의 고문으로 모신다.
후일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심산 김창숙도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의 고문이였다.
이러한 석학들이 약산을 지원했다.
단재는 곧바로 의열단을 위하여 6천4백여자에 이르는 '조선혁명 선언'을 집필한다.'
나 도올은 확언한다.
내 평생 고금의 많은 문장을 접했으되, 이 단재의 조선혁명선언만큼 나의 젊은 피를 끓게 만드는 정의로운 글이 없었다.
만고의 명문장이다.
"여기가 길림성의 광화로 라는 길인데...
우리독립운동사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을 기록하는 의열단이 결성된 곳 입니다.
의열단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 대로, 밀양의 열렬한 청년들이 모여서 만든것인데 그것을 주도한 인물은 약산 김원봉이죠.
약산 김원봉은 그 3.1운동을 경험하면서 평화로운 시위로서는 도저히 조선에 독립은 이룩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 낭비다.
오로지 우리가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유일한 길은, 무장투쟁밖에 없다고 하는 그 자각 그것은 자기들만의 자각이 아니라 이 자각을 민중화 시켜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열렬한 의지를 가지고 결성한 것입니다."
*사진 김원봉
(의열단사건 공판기사 1923년 4월 12일 동아일보 호외)
"이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결성이야 말로, 향후 모든 우리나라 무장독립투쟁의 모범이 되었고 그것이 바로 원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깐은 결국 따지고 보면 후대의 광복군결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20세기의 무장투쟁론이 이 의열단으로부터 시작됨을 우리가 명백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돼겠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1923년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그...의열단 조선혁명선언 이라는 것을 에...집필하도록 부탁합니다.
바로 이 조선혁명선언이야말로 제가 생각하기에 20세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명료한 논질을 가진 최상의 명문이 아닐까?
저는 아주 소신껏 우리 국민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거기 보면은 처음에 그...단재 신채호 선생에 정말 그...아주 뼈져린 가슴아픈 그것은 그...하나의 문장이라기 보다는 정말 피로 쓴 그러한 대문호의 글인데, 여기 에...거기에 보면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하고 인제 시작이 되는데...
'쇠사슬 채우기, 단금질, 전깃줄 바늘로 손톱밑과 발톱밑을 쑤시는, 코구멍에 물붓는, 생식기에 심지박는 모든악형...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나온데야 종신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다.'
그 일본의 만행을 소개한 후에, 결국 이 양반이 하는 말이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일본강도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짖는자가 과연 누구냐!'
이렇게 호통을 치시면서 강도일본을 구축을 주장하는 가운데도 또 다음과같은 논지들이 있다.
'그것이 첫째는 외교론(이승만)이요, 둘째는 준비론(최남선)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되는데? 무슨 얼어빠질 준비냐? 이러면서 이상의 의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등의 미봉을 버리고 민중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그 혁명의 제 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라!
그럼 민중은 어떻게 각오해야 돼느냐?
민중보고 각오해라, 각오해라, 도산 안창호가 아무리 외쳐봐야 그건 헛소리다'
이거에요.
'그것은 민중이 스스로 각오해서 민중스스로 협력을 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시고 제일 제가슴에 와서 닿는 말씀이 그 유명한 말이!
*혁명의 길은 파괴로부터 개척할 지니라!
뭐를 파괴하느냐
1. 이족통치를 파괴
2. 특권계급을 파괴
3. 경제약탈제도를파괴
4.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
5.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
에...그렇게 해서 모든 일제를 파괴 시켜야 한다.
그러면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혁명의 무기다.
강도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
"이것이 그 유명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의 요지 올시다.
우리민중이 다시한번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폭력이 평화의 유일한 수단이였습니다.
푸른날이 쓸데없으니 칼아! 나는 너를 위해 우노라!
단재는 서슬이 퍼런 칼날같이 살았다.
(1880 ~ 1936)
충남 대덕군 산내면 출생 청원에서 성장.
민족사학의 대두
이승만을 미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매국노라 하여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임정요원들을 모두 쓰레기같은 놈들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그는 아나키스트 국제활동을 하다가 대만에서 잡혔다.
그리고 10년형을 받고 안중근이 수감되었던 여순감옥에서 8년을 살다가 보석도 거부하고 죽었다.
1936년 2월 21일 이였다.
감옥에 있을때 '조선일보'에서 그의 명저 조선사를 연제하자 그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당시 신문이 쇼와연호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와연호는 곧 일본역사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말 일천의 타협을 모르는 칼날같은 인생이였다.
단재의 이러한 삶은 약산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주었다.
약산 김원봉은 정통적인 공산주의자인 이동휘나 아나키스트인 단재나 우당과도 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속에서 어떻게 가능한 투쟁을 하느냐?' 하는것이 항상 그의 문제의식이였다.
이념에 대한 일관된 헌신보다는 항상 현실적 투쟁을 먼저 생각했다.
현실적투쟁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여러 단체들의 통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