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나만의 작은 기도서
영국 속담에 “성공하려면 좋은 아내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나만큼이나 부지런하고 검소한 아내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아내는 늘 즐겁게 일을 도왔다. 소책자를 접거나 제본하고, 가게를 보고, 넝마를 사들였다가 제지업자에게 팔기도 햇다. 우리는 꼭 필요한 직공만 고용했고 식사는 검소하고 간단하게 했으며 가구도 싼 것만 들여놓았다. 예를 들어 나는 오랫동안 아침 식사로 빵과 우유를(차는 마시지 않았다) 2페니짜리 값싼 질그릇에 담아 백랍 수저로 먹었다. 이러헥 절제를 하며 살긴 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 집에도 사치가 점점 스며들었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려고 보니 식탁에 도자기 그릇과 은수저가 놓여 있었다! 아내가 나 몰래 23실링이라는 거금을 주고 산 것이었다. 거기에 대해 아내는 아무 변명이나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자기 남편도 다른 사람들처럼 도자기 그릇과 은수저를 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안에 최초로 도자기 접시가 등장했고, 세월이 흘러 재산이 불어나며넛 이런 그릇들도 점점 늘어 나중에는 몇백 파운드어치가 되었다.
나는 장로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 교리 중에 신의 영원한 뜻, 선민사상, 영벌(永罰) 같은 것들은 이해하기 힘들었고 어떤 것은 의심스럽기도 했다. 더구나 일요일은 공부하는 날로 정한 터라 진즉부터 예배에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인 원칙들을 모두 부정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한다는 것,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섭리로 다스린다는 것, 신이 가장 기뻐하는 봉사는 다른 이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 우리의 영혼은 불멸하며 모든 죄악은 반드시 벌을 받는 다는 것, 덕행은 살아서가 아니라면 죽어서라도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는 것 등은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다.
나는 이런 것들이 모든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의 종교 모두에 이런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종교를 존중했다. 하지만 그 존중의 정도가 다 같진 않았다. 내가 볼 때 어떤 종교는 위의 본질을 다른 교리들과 뒤섞어서 인간의 도덕성을 고취하고 촉진하고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열과 서로에 대한 미움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나쁜 종교라도 좋은 점이 있다는 생각으로 모든 종교를 존중했으므로 상대가 그의 종교에 대해 품고 있는 경외심을 해칠 만한 논쟁은 피했다. 우리 지역의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서 교회도 계속 늘어나야 했는데 그 대부분이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세워졌다. 나는 교회 건립을 위한 용도라면 교파를 가리지 않고 적은 금액이라도 기부했다.
나 자신은 예배에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예배가 올바르게만 행해진다면 정당하고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라델피아에 있던 유일한 장로교회 목사와 교회 예배를 후원하는 기부금을 해마다 보냈다. 그 목사는 이따금씩 친구로 나를 찾아와서 교회에 나오라고 권했다. 그럴 때면 솔깃해지기도 해서 가끔씩 교회에 가보기도 했고 한 번은 5주 동안 계속 나간 적도 있었다. 그 목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비록 일요일을 공부하는 날로 정했더라도 시간을 내서 계속 갔을 것이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는 신학적인 논쟁이나 장로교의 교류에 대한 설명뿐이어서 굉장히 건조하고 지루했으며 유익하지도 않았다ㅏ. 도덕적인 원칙은 전혀 가르치거나 역설하지 않아서 사람들을 훌륭한 시민이 아닌 장로교 신도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목사가 하루는 <빌립보서> 4장의 한 구절을 설교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 구절로 설교를 한다면 분명 도덕규범 얘기가 나오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목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라며 다음의 다섯 가지 계율만 쭉 얘기하고는 그만이엇따.
첫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
둘째, 성경을 부지런히 읽을 것.
셋째, 예배에 꼭 참석할 것.
넷째, 성찬식에 참석할 것.
다섯째, 하나님의 사절인 목사를 존경할 것.
좋은 말이긴 했지만 내가 그 구절에서 기대했던 말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거기에서는 원하는 바를 얻을 가망이 없을 것 같아 실망한 나는 두 번 다시 그 예배에 나가지 않았다. 그 몇 해 전, 그러니까 1728년쯤에 나는 작은 기도서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기도서의 제목은 ‘신앙 조항고 종교 의식’이라고 붙였다. 나는 다시 그 기도서를 사용하기로 하고 교회에는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내 행동이 비난 받을 수도 있지만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려는 것일 뿐 내 행동을 뉘우치려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