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14일, 이 날을 이스라엘에서는 건국 기념일이라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크바(대재앙)의 날이라 부른다. 이스라엘 건국을 전후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중동의 현대사는 피로 얼룩진 전쟁의 역사다. 이런 오랜 유혈 충돌의 배경에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갈등이 스며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중동 이슬람권의 석유 자원을 지배하려는 서구 세력의 탐욕적, 신식민주의적 패권주의와 이에 대한 이슬람권의 저항이 그 본질이다. 분쟁의 불씨를 제공한 원인 제공자로서 먼저 비난받아야 할 나라는 영국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 지역은 독일과 동맹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때 영국은 유리한 전황을 이끌어내기 위해 교활한 줄타기 사기 외교를 펼친다. 먼저 아랍인들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후 아랍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한다는 1915년 맥마흔-후세인 선언을 하고, 연이어 이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또 다른 비밀 협정들을 맺는다. 1916년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점령지 나눠 먹기 협약을 맺고, 연이어 막대한 유대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유대인 민족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벨푸어 협정을 맺는다. 결과적으로 아랍인들에게 했던 약속은 전후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말았고, 중동의 오랜 유혈 분쟁의 씨앗이 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로서 영화화되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흥미를 끈다. 1918년 영국은 아랍의 참전,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 정보국 소속 장교 로렌스를 아랍에 파견한다. 그는 아랍 지도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워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고, 드디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아랍인들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 칭호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막상 아랍 민족의 독립을 논의할 시기가 다가오자 열강들은 아랍의 분할 통치 음모(사이크스-피코 협정)를 기도한다. 이에 로렌스는 본국에 항의하고 아랍 민족의 단결을 호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 후 그는 본국의 소환 명령을 받고 귀국했고, 오토바이를 광적으로 몰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아랍 민족을 위해,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진정한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의문점이 너무나 많다. 일개 연락 장교에 불과한 그의 권한과 능력으로 전황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지극히 의심스럽고,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더라도 그의 행적은 수상하기 그지없다. 영국의 사기 외교 실행을 위해 투입된 하수인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나는 동방에서 손쉽고 빠르게 승리를 거두려면 아랍인의 도움이 필수적이고, 전쟁에 지는쪽보다는 이기고 나서 우리의 약속을 깨는 게 낫다는 내 확신에서 사기의 위험을 무릅썼다. 영감이야말로 동방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우리의 주요 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영국이 문서 상으로나 진정한 마음으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그들을 확신시켰다. 이를 위안 삼아 그들은 자기 몫을 다했다. 그러나 당연히 나는 우리가 함께 해낸 일을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끊임없이 심각한 수치심에 시달렸다.”
1. 맥마흔 선언 (맥마흔 – 후세인 선언)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이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메카의 하심 가문 칼리프인 후세인 빈 알리와 10여 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음으로써, 전후 오스만 제국 영토에서의 아랍 독립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이는 중동 지역에서 독일 편에 섰던 오스만 제국에 대한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아랍인들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핵심 내용은 아랍인들이 전쟁에 참여하면 전쟁 종결 후 아랍 지역의 독립 국가 건설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선언과 완전히 배치되는 벨푸어 선언과 사아크스-피고 협정으로 인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2. 벨푸어 선언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11월 영국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정한다고 한 선언이다. 그는 영연방의 대표적 시온주의자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서한을 보내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국가 건설을 인정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 직접적인 목적은 유대인들의 막대한 자본을 그들의 전쟁에 유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아가서 남아프리카 – 수에즈 운하 – 중동 –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국 식민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축으로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3. 사이크스-피코 협정 (소아시아 협정)
1915년 11월부터 1916년 5월까지 러시아의 동의 아래 영국(대표 마크 사이크스) 프랑스(대표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 협정. 이를 통해 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을 중심으로 한 지역뿐만 아니라 당시 터키 석유회사에 도이치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석유 채굴권 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영국은 오늘날의 요르단과 이라크, 쿠웨이트 대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또 하이파와 아크레 항구들과 하이파에서 프랑스 권역을 통과해 바그다드까지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통해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영국이 가장 큰 실리를 얻고, 러시아에게는 터키의 동부 지역을 주고 팔레스타인을 공동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는 맥마흔 선언의 내용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으로, 열강들의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협정이었다. 러시아제국은 이 협정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으며,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협정을 폭로함으로써 ‘영국은 당황하고, 아랍은 경악했으며, 터키는 기뻐했다’고 전해졌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서는 극단적 이슬람 세력에 의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마스의 창립자 아흐메드 야신은 2002년 한국의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저항을 테러라 부른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 테러에 맞선 테러의 균형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반기를 들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저항을 테러라고 부르는가?' 이런 표현은 결코 억지가 아니다. 정착촌을 건설하고 끊임없이 확장해 가면서 수천년 대를 이어 지켜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토지를 무단 점령하고 이들을 내몰아 현재까지 4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렇게 생존의 벼랑에 몰린 아랍인들의 어쩔 수 없는 저항을 테러라 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막강한 군대와 정보기관의 비호를 받으며 공공연한 국가 테러를 자행했다고 할 수 있다. 정착민들은 테러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명분 하에 총기를 지니고 있고, 사실상 군제에 편입되어 있다.
무자비한 무장 테러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 이스라엘이 훨씬 원조이다. 1947-9년 사이 아랍 원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하가나, 이르군, 스턴갱 등 여러 유대인 무장 테러 단체들이다. 스턴갱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유엔이 파견한 특사인 스웨덴 외교관 폴케 버나도트를 암살하기도 했다. 그들은 많은 폭탄 테러를 저지르면서도 적반하장으로 '우리는 자유, 정의, 저항과 해방을 목표로 투쟁한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대로 살던 집과 토지를 포기하고 난민이 되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들에 의한 집단 학살 공포 때문이었다.
1982년 레바논의 베이루트 학살도 국가가 개입한 잔인한 테러의 예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PLO 무장 게릴라 세력을 없애겠다고 베이루트를 점령했다. 그리고 9월 16-18일 3일 동안 외곽 빈민가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 두 곳을 탱크로 포위하고 150 내지 200 명의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를 투입해 난민들을 집단 학살하게 했다. 희생자는 적게는 800여 명에서 많게는 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 이후 레바논에서 반이스라엘 투쟁 열기가 고조되어 서방세계에서 자살 폭탄 테러의 원조로 여겨 비난하고 있는 헤즈볼라(신의 당이란 의미)가 결성되었다.
나는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애초에 만들어져서는 안 될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그 첫번째 이유는 국가 건립의 명분이 황당할 정로로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시오니즘이라 하여, 그들이 자신들만이 믿는 신 야훼로부터 선택받은 유일한 민족이고, 팔레스타인 땅을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수천 년 전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대를 이어 거기서 살아온 아랍인들 앞에 나타나 땅을 내놓으라며 무단 점령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다. 참으로 황당무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번째 이유는 유대인들이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가혹한 박해를 받은 피해자이면서, 이스라엘 건국 과정과 이후에 나치보다도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아랍인들을 박해했다는 것이다. 호되게 시집살이를 당한 며느리가 막상 시어머니가 되자 며느리에서 더 가혹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격이다. 2002년 들끓는 국제적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동예루살렘을 중심으로 720km에 이르는 분리장벽을 만들었는데, 이는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게토에 분리하여 가두어 둔 것을 연상시킨다. 표면적 이유는 보안을 위한 완충지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6일 전쟁 이후 불법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 정착촌을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통제하고 가두어두려는 것이다. 이로써 40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장벽 밖의 가족이나 친척들과 생이별하게 되고, 일자리를 잃었으며, 죄수와 같이 감금된 상태가 된 것이다.
두 세력이 서로 합의하여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기회도 있었는데, 호전적인 이스라엘 역대 정권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나도 어린 학창 시절 학교에서 중동 분쟁에 대해서 미국 등 서방세계가 주입한 방식으로 배웠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강국들을 물리치고 연이은 중동 전쟁에서 승리할 때 함께 박수를 쳤었고,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사막에서 옥토를 가꾼 뛰어난 의지를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았었다. 이것이 가혹하고 비인도적인, 종교적 광기에 가까운 이스라엘의 횡포에 의한 것이고,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깔고 있는 것임을 그땐 알지 못했다. 사실 신생 소국인 이스라엘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이집트를 비롯한 많은 아랍 국가들을 상대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곧이 곧대로 믿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다. 미국의 막강한 무기와 자금 지원이 없었다면 어림 없는 일이다.
현재 미국의 대외 원조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나라가 어디인지 안다면 누구나 깜짝 놀랄 것이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의 가난한 저개발 국가들이 아니다. 바로 이스라엘이다. 2020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20위로 약 42,000달러인 선진국이다. 참고로 한국은 25위 31,000달러이다. 과거 나치로부터 홀로코스트의 수난을 당한 피해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과연 타국의 원조가 필요한 나라일까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