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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lightearth.net/ 글쓴이 : 네라
왜곡된 무심론....
감정을 가지고 다양한 삶의 측면을 가지고 모험과 탐험의 기회를 가진 인간은 어떤 이들에겐 부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미 상위 층에 존재하는, 어떤 천사와 같은 존재들은 스스로 '날개'를 꺽고 지상에 내려와 인간이 되길 마다하지 하는 겁니다. 인간의 그 겸험이 주는 다채로움과 살아 있음을 위해 말이죠. 지상을 걷는 인간 중에는 본래 지구인이 아니고 천사였으나, 기껏이 인간이 된, 천사의 영혼을 가진 존재들도 있습니다. 상위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니죠. 하위차원이든 상위차원이든 각자 특색이 있고 특징이 있을뿐입니다. 서로에겐 서로에겐 없는 구석이 있기에 그 상태에서 협동합니다. 인간과 같이 시공간상의 삶이라는게 겸험이란게 없는 천사들은 몸으로 겸험을 통해 배울 기회가 없는데, 자신들이 조력하는 인간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배우며 그들이 담당한 인간 혹은 인류가 상승해야 그들도 그 업적을 평가 받고 동반 상승합니다.
무란 유를 더욱 명징하게 잘 알기 위해 잠시 유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보는 쉼입니다. 역설적으로 무를 통해서 유는 명징해집니다.
유와 무가 대칭점이라면 우리 우주의 진리 중에 하나인 삼각주형(삼신일체)에 의해 무도 유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서 둘이 합쳐져 하나로 협동하는 중용 중심이 비로소 완성입니다.
무아란 무엇인가. 무아란 자기 속알지 개인 그릇의 실제적 실용적 확장입니다. 특별히 어느 하나만이 아닌, 만물과 일치됨에 장애가 없음이며 높은 곳에 올라서 보는 하나로 보는 조망과 같은 겁니다.
만물과 있는 그대로 일체가 되는 것이 맑은 상태가 무아이지 그 대상 자체를 없애는게 무아가 아니란 말입니다. 무아란 만물을 편애없이 높은 곳에 올라 보는 조망이지 여기 이자리에서 그것 자체를 없애는 게 아니다. 무아란 높은 곳에서 모든 곳을 내려보고 스며드는 하위차원에 대한 조망인것이다.
무란 유를 없애는게 아니라 없었던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자기를 둘러싼 주위 환경이 원래부터 있었던 절대적인것이 아니고 내가 노예로 종속 될 어떤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에 어떤 장애 없이 자유롭게 동참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동의한 어떤 '계획'이라는 것이다. 무니까 그렇습니다. 무니까 오히려 더 유에 더 잘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참할수 있다는 겁니다. 이역설을 이해 하시겠는가. 없었던 시절을 안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것입니다. 자기 태어남을 감사하십시오. 태어남이 없었다면 무를 사랑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당신이 유를 없애려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무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단지 유를 도피하고 회피하고 싶어하는 당신의 성질이기 때문이고 못된 송아지 엉덩이 뿔난 성질에 무라는 단어를 옳거니 이용하는 것일뿐이다. 창조란 그저 강박이나 집착이 아니라 아이들의 무해한 즐거운 놀이와 같았다. 없었을 때는 없었더라도 지금은 있다는 게 중요하다.
관심 없으면 여기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로부터 저리 가야합니다. 우리 우주를 떠나야지요. 왜 우리 우주안에서 유로 태어나가지고 유로 있으면서 자신을 우리 우주 소속이 아닌 무 인척 행세합니까. 그것도 유가 하는 일이다. 유가 없으면 가능하지 못한다. 지금 바로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십시요. 여러분들은 유 앞에 응석받입니다.
붓다가 그러덥니까? 붓다는 무를 깨닫고 나서도 유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유로서 본분을 다했다. 왜 자신이 유이니까 그렇다.유로 태어나 무를 동경하는 이들은 정말 그들 말대로 아예 태어나지 말아어야 했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에게 원한단면 그렇게 될것이다.
무란 무엇인가 무가 될 것이 없다는게 무이다. 지금까지 내가 되려고 아등바등했던 것 무가 사실은 허상임을 아는 것, 나를 속박해왔던 그 어떤 높다는 경지야 말로 진정한 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진짜 달성해야 할 무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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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악몽 비슷한 꿈을 꾸다가 그것이 꿈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자각몽이지요. 수면중 자각몽은 깨달음 수행의 하나의 응용할만한 기술이기도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그 꿈을 즐기려하나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고, 그 이상의 일반적이고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이 세계는 배움과 탐구 학습을 위해서 매트릭스 가상현실 일종의 긍정적 거대한 시뮬레이터 건물과 같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입니다.
바깥세계(내면세계)로부터 다차원 영혼의 루트라는 끈을 잃지 않고 본시는 그것이 시뮬레이터임을 기억하고 들어가 즐기는 무해한 긍정적 행위(창조)놀이 였습니다.
우리가 '시뮬레이터'라는 지구의 건물 안에 들어갔을 때 그 건물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가 밖(내면)으로 못 나오도록 막아버린 어둠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원과 신과의 연결과 진정한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하나의 고정된 현실로 알고 추종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대홍수 1만2천여년 이전에 우리의 신체의 다차원 유전자를 조작하고 2000년전 예수 탄생시(제로포인트)지구격자망의 의식을 조작함(아누나키의 네트)과 같은 실질적인 일을 통해서였습니다. 루시퍼와 아누나키 그리고 그에 추종하는 외계인 변절자로 대표되는 존재들이지요. 이들이 불경에서 말하는 마왕이고 아수라들입니다.
그후로 보석같이 아름다운 지구는 그 아름다움에 걸맞게 상대적으로 감옥행성 유배지로 전락했으며, 지금은 그들은 모두 물러갔지만 유태의 카자르나 일류미나티등 그들의 지구인 추종자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지구의 빗장을 걸어잠그고 봉쇄시킨체 지구를 경영하고 있지요.
본래 지구는 이 은하에도 몇되지 않는 전시행성으로서 우리 우주의 창조자(원인자)가 직접 창조한 행성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은하의 모든 다양한 생명체들이 모여 화합하는 아름다운 목적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다른 행성에는 목성과 같이 큰 행성조차도 생물군 종이 한두개로 단일하며 지구만큼 생물종이 다양하지 않다고 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물군은 지구에서 자체적으로 진화한게 아니라 이미 지구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며 은하 도처로 부터 지구로 온 것입니다. 널리 인간(생명)을 이롭게 하라라는 것은 우리 우주의 창조자 환인이 지구에 부여한 명제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수행보다도 더큰 명제, 우주 진화에 관련한 목적입니다. 깨달음을 얻은자는 개인 상승뿐만이 아니라 종족이라는 우주의 진화라는 더 큰 명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봉사하지 않으면 자신도 상승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자신도 종족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움을 주려는 우호적 외계 존재들은 극성이다 싶어도 그들은 의당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예수나 붓다가 내려온 것도 우주 진화에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현재 기독교의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니비루로부터 온 냉혹한 컴퓨터 기계들의 신 아누나키입니다. 아누나키는 금속전자생명체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전자 전기 시설과 설비들은 살아있는 그들의 몸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우주와 신에 대한 모든 안좋은 인상과 추억은 진정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이 존재들 루시퍼와 그 부하들로부터 기원합니다. 그 둘을 착각하여 혼동하지도 말고 똑같이 취급하지도 말고 한데 싸잡아서 부정하지도 말고 분별하여 예우하십시요. 그들 때문에 하느님을 몰라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들로부터 영혼의 연결과 영혼의 주체성을 빼앗고 여러분들을 로보트처럼 영적 노예로 부리며 여러분의 가짜 아버지 역활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뭔가을 얻어가고 배워가는게 있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우주창조 계획에는 없던 것이었는데 전례없는 실험이었던 거죠. 이왕 벌어진 일 거기서도 긍정성을 찾자는 거였습니다. 한번도 있어 본적이 없는 극단적인 상황은 그것이 무엇인지 배워가기 위해서 만큼은 필요하며 여러분은 희생양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스스로 자원한 봉사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주는 내성을 갖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화로 들어도 좋지만, 여러분들은 본시 백치상태의 어린아이와 같았는데 '할아버지' 근원자와 함께 있다보니 할아버지(근원자)와 아버지(그리스도-창조자)의 사랑도 고마움도 모르고 귀염만 받고 자라 겸손도 이타심도 모르는 철부지들이기에 루시퍼라는 무서운 삼촌에게 잠시 교육이 맞겨졌던 것 뿐입니다.
이제 그것을 졸업할 때가 되었고 그 계획은 철회되었으며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구가 너무나 시달려왔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죄의 수행이니 뭐니 하면 이런 상태를 아무리 고정화시키고 옹호하며 유예기간을 달라해도 그것은 여러분 사정이지 지구의 사정은 아닙니다. 행성이 없이 어디가서 '죄의 수행'을 할것입니까.
아누나키의 폭정에 학습된, 투정 속에 권력숭배 따위를 계속 추구하는 자들은 다른 삼차원 행성으로 가서 그들이 원하는 그 '죄의 수행'이라는 것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더 이상 어둠의 군주는 없을 것입니다.
외부(내면)으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때문에 여기에 와있으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신으로부터 우리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제한된 의식입니다. 다차원 연결을 통해 상위와 하나로 연결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완전의식이고 깨달음입니다. 5차원만 되도 모든 상위 차원과의 연결과 통합의 기회가 주어지며 하나로 가능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위헤 이곳을 버리는게 목적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이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기능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해서 근원자는 여러분을 통해 이곳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둠은 여러분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중간에서 이것을 단절시켜 왔습니다.
4차원 영계도 넘지 못하면서 아무리 깨달음을 추구해도 여러분은 그것을 달성할수는 없습니다. 설령 깨닫는다해도 죽었을 때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도로아미타불입니다. 4차원 영계를 벗어나는 것은 내면의 통로를 통해 상위 다차원 영혼과 우주와의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가짜일지라도 그 속에 들어가 체험하고 있는 우리들 서로 서로의 영혼은 가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들이며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붓다가 무를 깨닫고 난후, 무임을 알고서도 무시하거나 떠나지 않고 그 무라는 곳에 적극적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당신이 환상이라고 하찮게 여기고 천시하고 멸시하는 이곳, 당신을 위해, 무리라는 속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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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버스 이전도 고대인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컬럼버스가 지구를 일주함으로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이 아니라 보편적인 ㅤㅇㅏㄼ입니다.
과거 고대 중세에는 우리가 어둠에 감금되어 있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어떤 비젼을 통한 개인의 깨달음이란 말이 중요했던 것이지요. 지금은 그러한 때가 아닙니다. 보편적인 앎의 시대 빛의 시대입니다. 더군다나 고래로부터 중요한 고유 영성을 가지고 있었던 단일민족인 한민족은 외래 문화의 영향만 없었다면 사실 외래 종교의 비젼이 필요없어도 되는 나라였습니다. 한민족은 다른 이(은하)의 고통(음양이원성의분리)을 몸소 체감하고 평화와 화합을 지향하는 것을 몸소 행동과 삶으로 보여줘왔고 또 보여줄 것입니다. 한민족은 우리 우주의 창조자 환인의 직계 자손입니다. 한민족은 지구 '진동'후 재건에 쓰일것이며 재건 후 미래를 이끌어 갈 중요한 지혜 중의 하나가 장차 한민족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한민족은 다음 시대에 지구상 서로 다른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을 한데로 어우러져 화합하게 하는 윤화류이자 중재자 역활을 할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성은 한민족이 가진 민족성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 때까지 한민족은 은자의 나라로 남을 것입니다. 말법의 시대인 지금 세상에 드러난 나라들은 대부분 몰락합니다.
지금 우주 상황이나 지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때가 어느 땐지나 알고 깨달음 운운하세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직도 전통 수행종교입니까. 동서양이 만나고, 지각이 흔들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가고 있는데도 아직도 중세시대 따로 살고 있는 양 깨달음 운운합니까. 그것이 우연히. 아무 의미없이 일어나는 일이며 당신과 상관없다고 봅니까. 한참 깊은 산중과 계곡을 따라 지난하게 흐를땐 그것도 도움이 되고 흘렀으나 지금은 강물이 절벽을 만나 모든 것이 폭포와 포말이 되어 부산하게 떨어지는 종말의 상황입니다. 당신에게 그 깨달음의 수행을 하라고 무대를 제공했던 그 행성이 없으면 당신의 편안히 앉아 그 깨달음이란 것을 운운할 수도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지구인 말고 서로 우주를 교통하는 다른 우주인(영적존재) 외계인(다른 행성의 거주민) 여러분들이 말하는 그 깨달음이란 것을 다 깨달았습니다.그들은 죽지도 않고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지구인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깨달음 운운합니다.
허나 그런 존재들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겸험과 체험으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깨달음'이 자신의 의지와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깨달았다고 모두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듯이
깨달았다고 모두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고 삼차원의 시공의 카르마와 윤회에 벗어나서도 어둠을 행하는 마스터(스승)들도 있는 겁니다. 이들을 어둠의 군주라고 합니다.
아갈타 샴발라와 같이, 대부분의 상승마스터(승천한 스승들) 백색형제단이 거주하는 5차원에 빛의 도시가 있듯이 이런 존재들로 이루어진 어둠의 도시가 있습니다.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구성되는지 깨달음이라는 것을 보유하고 있는 외계 인종도 어둠을 행하기도 하는 겁니다.
4차원의 기계금속생명체 아눈나키도 당신이 원하는 수준의 그런 깨달음은 이미 다 갖고 있습니다.
우리 수준에서 밖을 내다보는, 우리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왜 가난과 전쟁과 질병과 계급 차별과 생로병사의 고통이 존재하는지 붓다가 처음 의문을 제기햇던 깨달음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깨달음은 그 이유를 아는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이타심의 선을 행하는가
자기 이기의 봉사심의 악을 행하는가와 같은 도덕적 문제는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 후에도 여전히 '의지'로 남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신체적으로 완전히 상위 빛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니르바나 깨달음을 얻고 신체적 해탈을 얻는다면 4차원 영계를 통과해 5차원 반 '에테르 신체' 문명으로 갑니다. 5차원부터가 본격적으로 다차원 통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즉 제한된 의식에서 벗어나 다차원 완전의식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다차원 완전의식이 깨달음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완전한 자각없이 이루어지는, 우리와 같이 생로병사라는 게 없습니다. 완전한 자각을 통해 생로병사를 초월하게 되고 그것을 의지대로 다룰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최초엔 지구에 오기전엔 지구 영혼이 아니었지만, 예수나 붓다는 본시 지구 영혼이 아니며 지구에 왔다고 깨달음을 얻은게 아닙니다. 상위차원에는 특별히 무엇을 두고 깨달음이란 게 없습니다. 다만 차원마다의 그 나름의 상승이 있을 뿐이죠. 깨달음이라면 지구에 오기전 부터 깨달은 존재들입니다. 지구에서의 그들의 수학과 깨달음은 그들이 오기전부터 조력하던 많은 우주의 영적 존재들과 많은 협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제한된 육체에 갇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들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데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은게 아니라 지구에 오기 전부터 이미 영적으로 높이 진보한 다른 행성의 빛의 존재였습니다. 우리 자신또한 그들만큼 높은 존재는 아니지만 최소한 다차원과 연결된 이 보편적인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우리 수준에선 깨달음입니다.
대분분 상위차원과 연결없이 육체적 죽음을 맞은 이들은 4차원에 머물면서 다시 3차원 윤회를 준비하며 배움을 얻습니다. 살아있을 때 상위차원과 연결을 이룬다면 이러한 4차원을 영계를 무사히 통과하여, 다리를 건너듯 건너게 되는 겁니다. 그럼으로 4차원은 빠르게 건너야 할 간단한 징검다리와 같지요.(동양에서는 4자를 죽을 사死자라 하여 운이없는 수로 여기고, 서양인은 절대자 하느님이 존재하는 13이란 숫자를 불운하게 여긴다는 것은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재미있는 일이죠)
5차원부터가 본격적인 내면 우주의 상태이며 다차원과 하나로 통합이 가능합니다. 5차원은 상위영혼과 육체를 '이어주고 연결해주는' 반 에테르 신체, 반 유체 영역입니다. 빛의 몸이란 이 에테르 신체를 말합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 인간도 신체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나 붓다가 승천했을 때 모두 이 빛의 몸 에테르 신체로 승천했습니다. 상승이나 해탈은 말뿐이 아니라 이와 같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일입니다. '실제적'임, 이것은 그들이 실질적인 일로 살아 돌아온다는 일입니다. 만일 그들이 지금 실제적으로 살아 돌아온다면? 그것을 반기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또 예수나 붓다가 돌아와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섬기는 경전의 구절과 빗대어 같은 말을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판단하겠지요. 정작 예수나 붓다 그 자체 보다도 경전이 더 중요해진 겁니다. 그들은 그 추종자들의 경전속에 영원히 실체없이 죽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살아 돌아온다면 큰일나지요. 이 얼마나 우수운 일입니까.
상위자아, 상위영혼의 존재들은 6차원에 존재합니다. 개체 영(순수 백광의 빛 기둥)의 존재들은 9차원에 존재합니다. 개체 영이 모인 대영그룹의 존재들과 대영그룹을 뛰어넘는 전체의식의 존재들은 10에서 12차원에 걸쳐 존재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 대아는 상위영혼의 존재를 말합니다. 상위영혼만 하더라도 거대한 자아이며 여러분 영혼 하나만을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다른 우주, 다른 시간선(평행우주)과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는 여러분의 나툼(전생) 영혼들을 포함하여 무수한 하위의 영혼을 동시 다차원적으로 거느립니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여러분이 이 모든(통합)것을 건너뛰어 막바로 12차원의 자리에 앉는다던가 13차원의 절대 하나님의 근원자의 자리에 앉는게 아닙니다. 그것이 불가능한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을 얻은자 일수록 무조건 그렇게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아십시요. 예수님도 붓다도 거기까지 신체적으로 가 있진 않습니다. 그들이 신체적으로 가는 것은 우리 우주의 모든 영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근원자에 도달하고 우리 우주가 모두 완성된 후에나 가능한겁니다. 어차피 함께 갑니다. 우리 우주는 아직 어립니다. 살아가야 할 날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하위 둔탁한 에너지, 삼차원에 절어 살고 있는 여러분은 현재 상태로는 실질적으로 고차원의 빛을 만날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빛을 만진다거나 하면 강력한 진동수에 육체적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정당한 절차나 준비 운동없이 물속에 들어갔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완급을 조절한 적정한 수위의 빛은 여러분에게 생명에너지를 전달하고 활력을 주며 치유의 에너지를 줍니다. 그 완충장치가 5차원 빛의 신체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들도 자신이 현재 있는 곳보다 더 높은 단계의 상위층으로 진화하는 것은 진동수를 높여만 가능한데(자신의 신체가 어디에, 어느 차원에 거주하는가, 이것은 그가 있는 곳에서 모든 차원이 하나로 연결되거나 통합하는 것과 또 다른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당한 능력과 업적으로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건너 뛰어야 하는 것은 4차원일뿐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님들이 지금 궁둥이를 깔고 앉아 있는 곳이 절대자가 앉아 있는 곳이 되는게 아니란 것이죠.지금 이순간 앉아있는 곳에서도 여러분은 절대자와 하나가 되고 그의 지복과 평화를 느끼며 만날수 있지만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곳은 여기, 그리고 앞으로가 될 5차원입니다.
영혼이 없으면 근원과 합일하려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여러분도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 지금 여러분은 영혼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이곳에서 무를 흉내내도 그것은 영혼이라는 요람안에서 장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이 있으며 그것을 놔두고 여러분이 근원자가 아닙니다. 그 영혼과 함께 하는 근원자입니다.
여러분의 궁둥이가 13차원 근원자가 앉아있는 '옆 자리(근원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근원자는 오직 근원자만이 될수 있으며 다른이가 대체하는게 아닙니다)'에 실질적으로 앉아 보는 것은 보다 더 실질적인 것으로 여전히 삶과 함께하며 우리 우주의 완성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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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극단적 금욕수행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중용을 깨달았습니다. 먹을 것도 먹지 않고 숨을 멈추는 극단적 육체를 학대하는 수준의 금욕수행을 멈추고 산에서 내려와 시냇물도 마시고 대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 호흡법을 통해 자유와 평화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해탈이 이루어졌습니다.
불교종교는 그들의 창시자라는 붓다와도 멀어졌지만
불교계열 가르침은 현 그 추종자들에 의해 단박하게 단어 하나만 따와서 심하게 왜곡되고 있음을 봅니다.
불교계의 가르침 또한 마음 그 자체를 없애는게 주안점이 아님을 압니다.
마음을 '없애는게'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며
마음을 '없애는게' 아니라 마음을 잘 다루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든 마음이 무엇인지 먼저 배우십시요. 마음이 어떤상태인지 무엇인지 모르는한 당신은 마음을 다루는 방법을 영원히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잘 다루는자만이 그것을 잠재우는 것도 가능합니다.
마음을 없앤다면 우리 수준에서 신성한 마음을 통해 그 이상으로 진보할 기회조차 얻질 못할 것입니다.
폭력적인 마음이 유유상종의 원리로, 마그네틱(magnetic) 원리로, 거울의 원리로, 끊임없는 악순환으로 폭력적인 마음을 불러옵니다. 그것은 자기가 끌어들인 결과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때까지 그것은 계속됩니다. 거울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보고 배우고 자각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자신에 대한 자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움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배움은 우주를 향한 성숙-진화를 위해 존재합니다.
빛도 어둠도 아니고 자기도 없다면 애당초 원천에서 그럴 가능성도 없겠지요. 그는 무일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요. 비록 어둠속에 슬픔과 고통이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백배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거울이란 정말로 상대방의 존재가 나의 거울이라는게 아니라 상대방과 내가 띠고 있는 에너지가 그렇다는 겁니다.)
마음을 없애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귀찮아 파괴를 행하는 자가 타인이라고 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 까요.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자 타인도 존중하지 못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고군분투하고 파괴를 행하고 있지요.
마음이 귀찮아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편법적인 것이며 편법적인 것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마음을 없애려는 당신들 그 마음이 그 어떤 것 보다도 더 추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을 소중히 여길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존중할 줄 압니다.
악한 마음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정하십시요.
소탈하게 대하십시요. 원하지 않으면 자기 목소리로 진심으로 단호히 명령하십시요. 그러면 스스로 흥미를 잃고 사라집니다.
두려움으로 외면하고 회피하기 위해 파괴를 행하십시요. 그러면 더욱 악착같이 들러붙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무만을 위한 무입니다.
맹수 조련사가 맹수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십시요. 조련사는 내부에서 나오는 확고한 목소리로 맹수를 다룹니다. 여러분이 맹수를 겁을 먹고 불신하고 대하면 맹수 또한 자신을 무시하는 기분이 빠지고 사납게 거칠어집니다. 공포는 또한 상대를 무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신이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 여러분을 억업하고 착취하는 존재로 생각하면 할수록 여러분과 신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이 사랑한다는 절대자 신을 매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공포와 불안으로 섬기는 학대증 자학증 이기적 권력 숭배이지 절대자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런 태도로 추종하고 섬기는 대상은 진정한 절대자 하느님이 아니라 정확히 어둠의 마왕들 루시퍼이고 아눈나키에 해당합니다.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없애려고 하면 더욱 기승을 부릴뿐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안의 두려움이 같은 두려움의 대상을 외부에 끊임없이 끌어옵니다. 우주는 같은 에너지를 가진 것 끼리 유유상종으로 끼리 끼리 모입니다. 당신이 공포의 군주를 공포로 대하는 한 '공포의 군주'에겐 그것이 당신이 자신의 공포를 원한다는 반증으로 들립니다.
없애려고도 싸우지도 말고 스스로 흥미를 잃고 물러가게 하십시요.
당신 주위를 둘러싼 환경은 모두 당신의 마음과 사고가 원인이되어 당신이 끌어들이고 만들어 놓은 가상현실입니다. 당신이 내 쏘은 사고 에너지들은 부메랑처럼 우주를 돌아 당신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그럼으로 외부로부터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의 정직한 모습를 바라보십시요. 회피하지 말고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안으로 시선을 돌려 내부를 탐구하십시요.
당신을 둘러싸고 유혹하는 지옥의 요귀와 악귀들은 모두 주위로부터 어느덧 사라지고 당신은 영롱한 빛과 꽃이 만발하는 들판에 일순간 앉아 있을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만든 환경에 스스로 공포로 지배받는 노예가 되고 그 환경에 대한 공포심이 지속적으로 같은 공포스런 환경을 자아내는 악순환의 고리(루시퍼의 카르마)로부터 벗어나 그 환경은 내가 만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주체가 되어 그 사고를 잘 다룰줄 아는 것이 마스터입니다. 다룰줄 모른다면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개인의 그릇을 벗어나, 그 대상만을 위한 사심없는 관조입니다. 개인적으로 '나'와 관련지어 생각하지 마십시요. 그것이 사물에서 떨어져 진정으로 '나'를 객관화하는 방법인것입니다. 사물을 객관화하는 방법인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대상으로부터 내가 없는(벗어난) 경지인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스스로 만든 환경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음으로 환경을 주도할 힘을 얻게 되는데,
거울을 보고 찡그리면 거울도 찡그립니다. 거울을 보고 웃으면 거울도 웃습니다. 거울을 탓할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은 용기이며
원하는 바를 외부 우주에 스스로 주는 것도 용기입니다. 우주에 웃음을 주면 우주도 웃음으로 화답합니다.
마스터는 스스로 주인이 된 자입니다.
5차원 상승(승천-승격)마스터는 깨달음을 얻고 3,4차원의 카르마를 벗어난 자입니다. 상승마스터는 그 사고의 에너지를 잘 다룸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의도하는대로 바꾸는 것 그것이 가능하였습니다.
5차원은 이런 세계입니다. 상상만으로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물질을 만들고, 환경을 순간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책상과 같은 상상속의 물건를 현실에서 만들려면 시간과 손발과 도구와 설계도가 필요하지만 우리 머리속 상상속에 있는 물체는 그 상상의 에테르 차원에서 실제로 그 진동수로 물리적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현실에 출몰시키는 것 이것이 고승들의 연금술이죠. (전설속의 티벳 고승들의 여러 이적중 최고의 능력으로 치는 것 중의 하나가 물질을 순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내머리 속 상상속의 괴물이 그 상상의 공간으로부터 현실로 튀어나와 행패를 부리는 것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의 힘을 완전히 자각하에 책임감있게 다룰줄 모른다면 5차원진입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스터가 된다는 것은 그 행위의 원인뿐만아니라 결과까지 완전히 자각하에 통제할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법입니다. 마법은 공짜없는, 댓가있는 결과이며, 스스로 주체가된 행함(내면의)의 결과입니다.
어느 날 한시에 최종적으로 무얼 이루면 나머지까지 다 돼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것만이 할수 있는 때가 있고, 그것이 아니면 할수 없는 때가 있씁니다.
그 어떤 것을 졸업하고 떠나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받아들여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수학(체험)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필요하고(받듬없이는 떠남도 없는 것입니다)그것이 아직 어린 씨이고 새싹일때, 약자일때의 도입시기를 존중하는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마음은 당신들에게 이와 같은 약자입니다.
자기 보고 있는 자기를 둘러싼 환경은 자기가 끌어들인 결과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 때까지 그 체험은 계속됩니다. 어둠은 어둠대로 나름의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요지는 어둠을 통한 자각, 빛, 그 어둠을 벗어났을 때의 빛이지 그 어둠을 상대하는게 아닙니다. 홍역을 앓고 나면 당신이 더욱 건강해지듯이 어둠에 빠졌을지라도 스스로를 자각했을때 성공적으로 벗어났을때 당신은 더욱 빛으로 상승하게 된다는 것을 아십시요. 이것은 물과 불에 담금질 했다가 꺼냈을때 검이 더욱 단단해지고 맑아지는 원리입니다. 자기가 없다면 반칙이며 애당초 이것이 가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도 모르지만 기쁨도 모릅니다. 딱한 일이죠. 남들이 그러한 경기를 통해 기쁨과 감동을 체험했을때 '자기를 버린' 자들은 그들을 바라보며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비록 인간들이 하는 일이라 해도 충분히 부러움을 살만한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파티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들에겐 허무나 절망이 아닌 희망과 용기를 요하는 일이지요.
그 게임의 와중에 우리는 너무 어둠에 시달려 때론 허무나 절망감도 느낍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고착된다면 허무나 절망감은 세상풍파에 시달려 메마른 병든 가슴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허무나 절망감은 어둠에 시달려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과 같습니다.
빛은 따뜻한 희망과 꿈을 품는 순수한 아이들의 동심과 같습니다. 아이들의 동심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밝게 해줍니다.
명상중 잡념을 억지로 없애고 백지로 말들려고 하면 더욱 없어지지 않고 기승을 부립니다. 이것은 잘못된 명상법입니다.
없애는게 아니라 잡념이 자연스럽게 떠나가도록 관조입니다. 나아가 빛으로 둘러싸인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광과 같이 어느 하나에 대해 명상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불교식 금욕적인 명상법은 내면으로 들어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없애려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것입니다. 명상은 내면으로 들어가 위로도 아래로도 문을 걸어닫고 언제까지나 혼자 틀어박혀 무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아닙니다.(무가 되고자 한다면 그렇게 되리라...)고요한것은 좋으나 거기까지입니다. 내면 우주도 외면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하나의 실질적 조직이고 사회입니다.명상은 내면을 통해 우주와의 만남이고 연결입니다. 그것은 시공의 초월한 상위와의 소통이며 신과의 대화이고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실질적인 것을 하지 않는 불교식 명상으론 죽음을 맞이 했을때 결코 윤회에서 벗어날수 없는 것입니다.
전통종교나 채널링이나 권위를 떠나 공평하게 편견없이 보십시요. 왜 전통종교가 여전히 여러분들에게 인기를 끌까요. 그것이 이름있는 권위에 대한 권력추종이라는 겁니다. 확실한 것을 찾아, 남들이 권위있다고 보는것,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두려움이고 권력 추종입니다. 두려움은 영혼을 얼어붙게 하는데 결과적으로 지각을 마비시킵니다.
전통이래봤자 불교는 2500년 밖에 안되었습니다. 뮤나 레무리어는 무려 그 이전 200만년의 지구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유란시아>서라고 하는 것은 천지창조의 수조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요. 현재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천상의 영역과 우주를 다루고 있는 것은 유란시아서 입니다. (물론 유란시아서도 여러분에 대한 필요에 의해 고의적으로 다 말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윤회전생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죠. 수레바퀴처럼 도는 윤회전생이란 루시퍼가 창조한 것입니다.) 물론 부처나 관음의 기원은 레무리아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2500년전의 붓다라는 한 개체 영혼 과도 거리가 먼 불교라는 전통수행종교야말로 지구의 한 지역에만 있는 것으로 이 우주에서는0.0000000000....00000000001%도 안되는 것입니다.
채널링은 90년대 중반부터 한참 쏟아졌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빛의 플레이아데스 활동 또한 이렇다할 성과를 맺지 못하자 그것을 마지막으로 보다 못한 우리 우주의 창조자의 직접 지구 개입을 선언한 글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결정된게 아니며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수 있습니다. 그때는 창조자는 개체의 자유의지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률이 있었기에 반신반의했는데 창조자 또한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자기 창조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는 캔더이시로 구체화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빛의 시리우스 은하연합도 메시지가 나오고 있지요. 은하연합은 말그대로 우리 은하 도처에서 다양한 행성들이 모인 8차원의 기구인 은하연합이고 캔더이시는 12차원 혹은 그 이상의 <영적 정부>의 재림기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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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창조를 사랑하지 않는자들은 모두 떠나라
1
면적을, 밑판을 무시하고 사다리의 최고정점 하나만을 찾는 이들에게
최고가 되겠다고 꿈꾸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원대한 꿈을 품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그 초입단계인 실질적 절차를 무시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그 길로 가는 길을 무시하고 존중하지 못하고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할수 있겠는가.
최고의 정점을 목표로 한다는게 나쁜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에고이다. 문제는 중간 과정를 없는양 무시하는데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에고라고 해서 모두 나쁜것이 아니며, 신성에 봉사하고 신성에 합치하기 위해 원동력처럼 사용하는 에고라는게 있다. 에고도 좋은 에고가 있고 나쁜 에고가 있다. 다 귀찮다고 모두 한데 싸잡아서 다 같이 취급하지 마라. 그런 것은 편의주의이며 분별없는 어린아이도 할수 있다. 에고가 없다면 당신은 나쁜일도 하지 못 할지언정 좋은 일도 하지 못한다. 에고는 불쏘시개이다. 문제는 그 에고를 어디에다 어떻게 사용하는 냐이다. 자기 하나의 욕망 하나만을 달성하기 위한을 위한 에고이냐(겨우 제 욕망만 채우려 하는 이기적인 수행자는 다 떨어진다), 개인은 개인이되 개인주의의 소아 에고가 아닌 자기 속알찌 그릇을 넓혀 지역사회 나라 국가 민족 전세계 인류 행성, 항성계와 성단 은하까지 확장하는 모두를 담는 대아의 자아 에고이냐이다.
최고정점 당신에게 있어 그것을 절대자 하나님이든 깨달음이든 부처의 경지든 극단적 금욕적 수행이든 프리덤티칭이든 최고 차원이든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찌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부분의 우주면적을 악귀와 마귀들이 들끓는 악의 소굴로, 공포의 대상으로 보는가. 그것은 그대 자신의 존재를 악마요, 자신의 탄생을 죄로 보는 것과 같다. 어찌 그대 자신을 악마요 죄인으로 보는가.
어찌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를 그의 궁궐 하나만으로 축소하려고 하는가.
청와대와 강남부자들이 존재하는 서울수도만 대한민국이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사는 지방중소도시는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하는 말과 같다.
최고 사령관만 군인이고 말단 사병은 나라 지키는 군인도 아니란 말과 같다.
그래서 최고 사령관만 깎듯이 경례하고 당신과 같은, 혹은 당신보다 아래인 말단 사병은 만나면 당신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러하듯이 무시하고 걷는가.
당신은 당신 돈 많은 직업을 가진 부자 아버지의 굵은 팔둑에만 매달린채 같은 반 친구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최고야 너희가 사는 집은 집도 아니야 너희와는 안놀아 하고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철없는 귀족의 도련님과 아가씨들이 그 궁궐 밖의 대부분의 백성들이 사는 세상을 하층민이라 가난한자라 멸시하고 노예로 무시하던 전근대 부패한 부르주아 계급 사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 당신들이 천시하는 자야말로 가난하기에 오히려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스스로 할줄 알아야했기에 최고만을 찾아 매달리는 응석쟁이 병든 도련님 같은 당신에겐 없는,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할줄 아는 힘이 있다. 그들은 이미 모든 부를 지금 여기에서 소유한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가난한만큼 정신이 건강하고 생기있다. ( 종교가 지배하고 있는 역사를 돌이켜 보면 힘없는 양같은 대중들에게 자기 스스로 힘을 가진 영웅들은 언제나 악마로 불려왔던 것이다)
'스스로' 라는 것은 생동감이다. 능동성이다. 살아 있음이다.
스스로 할줄 아는 자에게 신이 깃든다.
최고정점은 하느님은, 부처님은 지금 여기 스스로 그러한 자이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핵심 '원리'를 아는 자들도 그것이 표현되고 실현되는 실질적인 무대 대부분의 우주 면적과 그 과정에 대한 존중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 면면들 말이다.
최고의 경지란 것이 주는 지고의 복을 당신들이 추구해야할 부라하자. 그것이 당신들에겐 추구해야할 최고의 인기의 대상이고 권력이고 그것을 권력으로 대하는한 타락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남의 틀대로 짜맞춘대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세계에서 나는 죄를 행할 권리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생생하게 살아 았는 것이고 최고의 경지야 말로 죽은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피를 물려 받은 존재들은 당신뿐만이 아니라 그들로서 지금 여기에서 모두가 스스로 그 지분만큼 리더요 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그리고 그 왕들로 이루어진 멤버들 왕들의 사회가 있다)
대부분의 우주면적 삶을 존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지금'으로부터 떠나라. 두발이 땅에서 떨어진체 저 멀리 높은 허공의 최고정점만을 찾는 귀신이 되어라.
여러분들의 로봇 철 부처를 죽여야 참된 영성이 산다. 생명이 산다.
삶과 창조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현재로부터 떠나야 할 일이다.
여러분의 절대자 하나님을 죽여야 참된 영성이 산다. 생명이 산다. 그들이야말로 모두 여러분들에게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짜 부처와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는 냉혹한 기계들과 마귀들이며 여러분은 그들은 진짜 하나님 부처로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왜 여러분 자신이 그들에게 교육을 참하게도 받아 바로 스스로를 마귀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과정을 무시한체 최고 정점에만 매달리는
허무주의 도피주의적 '불'색추종자들에게 하는 말이 될것이다. 이 자들은 모두 철이 없다. 아버지의 뜻도 모른다.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에는 반도 이해를 못했다. 그 아버지에 대한 사랑조차도 언제든 자기 나약함과 공포 불안을 채우기 위해 최고의 권력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찾는 것으로, 수틀리면 언제든 갈아치울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한것을.(아, 최고를 추구하는 자에겐 생존에 두려움에서 나온 그러한 이기심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무엇이 삶이 주는 과정이 주는 교훈인지를 정녕모른다. 이기심을 강한것으로 잘못알고 있으나 영적인 세계에서 보면 가장 그런자야말로 낮은 것이 될것이다.)
의존성 자체가 잘못이 라는게 아니다. 당신들의 의존성이 문제는 그것이 항구적이라는데 있으며
가장 최악은, 최고의 권력을 끊임없이 찾아 아부하며 자기와 동등한 레벨이나 자기보다 못하다고 보는 힘이 없다고 보는 약자를 멸시하는 소인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들 콩쥐들, '재투성이 아가씨(신데렐라)'들이야 말로 가짜 어머니 아버지신의 권력에 의존적인 팥쥐같은 당신에게 없는, 바로 여기 지금에서 스스로 할줄 아는 힘(영혼)이 있다. 무에서 유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그들은 건실한 무산계급가이다. 그런자에게 스스로 주체가 된 상태에서 만민 평등과 사랑을 힘이 주어질 것이다. 로봇시녀 없이는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철없고 병든 부르주아 귀족들에겐 이제는 무엇이든 스스로 한다는 의식(영혼)이 필요하다.
기실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못하고 멸시하지 않는가. 나는 공주이고 왕자였는데 어쩌다 죄를 받아 궁궐밖으로 떨어져 나와 이 더러운 시궁창 하층민 짐승들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신세 한탄하지 않는가.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과 귀염만 받고 자라 사랑도 겸손도 감사함도 모르고 철이 없고 응석쟁이였기에 당신의 아버지가 세상 좀 배워오라고 당신을 이 넓은 세상에 보낸 것이다. 그것을 영혼을 통해 깨닫지 못하는한, 아버지가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낸 뜻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주위 이웃을 무시하고 배격하며 더욱 아버지에게만 매달리는한 당신에게 구원은 없다.
부처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지 않은 자를 돕지 않는다.
누군가 내가 나를 외면하고 져버리고 의존할 대상 스승을 찾지 말고 신(최고정점)을 찾지 말라. 그런 스승이라면 신이라면 한트럭을 가져다 준다해도 당신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것을 받아내야할 발판(스스로라는 최소한의 발판 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데 어떻게 그 이상을 받아내겠는가), 당신이 스스로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발판)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 하지 못하는한('스스로'가 신인것을) 스승 한트럭을 가져다 준다해도 당신이 당신 스스로 자신이 아닌 이상 주인공인 당신이 빠져 있는 이상 영원히 당신에겐 밑빠진 독처럼 결실은 맺지 못할것이다.
그것이 권력 숭배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의존성이 문제다 자신(발판)을 져버리고 외면하고 자신의 스스로 서야할 영혼의 힘을 져버리고 그것이 무슨 외부의 훌륭한 스승이든 신이든 무엇인든 당신이 힘이 있다고 보는 것 당신이 힘이 있다고 보는 것 타의 외부에 대한 인기에 대한 영합 그것이 나(영혼)를 버린 권력 추종이다.
권력이란것은 나와는 동떨어진 집단 사회적 단어나 정치적 단어가 아니다. 개개인 하나 하나 일상의 삶에서 어느 대상 어느 요소에나 있다.
너도 나도 다이어트에 성형수술 열풍이 부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선 외모가 권력이다.코흘리개 아이들에게도 영어를 가르치는 조기 교육의 열풍이 부는 학벌 지상주의 사회에선 학벌이 권력이다. 그 세계에 끼지 못하면 나고가 될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처럼 여긴다. 그것은 공포와 권력인것이다.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보단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집단 군중 심리와 유행으로부터 영혼으로 홀로설 용기가 없어 미친짓(외부의 힘, 타인의 힘, 권력숭배)에 동참 하는 것이다.'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인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조건없는 자기(자기 발판-영혼)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내용의 본질보다는 외부의 이름이나 타이틀을 보고 의존하고 내용을 판단한다. 학벌이나 학위나 타이틀 같은 다른 사람이 유명하다거나 권위있다고 하거나 누군가 남들이 국가가 공인해 주는 공인증 같은 권위을 꾸벅 추종한다. 스스로는 생각할줄 모르기에 누군가가 규정해 놓은 것, 외부에서 딱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름을 보고 판단하는게 당장 편한 것이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마스터(스스로 주인이 된자)가 된다는 일은 외면의 이름이나 타이틀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스스로 보고 행하는 영혼의 융통성이고 주체성이다. 그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왜 숱한 불경 성경 동학의 최제우(인간이 한얼님이며, 하늘님이 인간의 내부에 있다는 가르침(인내천)을 설파한 동학의 최제우 또한 채널러였다)까지 경전과 채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빛의 가르침들이 결실을 못했는가를 생각해보라 아무리 잘란 좋은 가르침 좋은 스승들도 당신들의 의존성 에너지 앞에선 당신들이 그런식으로 대하기 때문에 졸지에 권력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고하게 그 옛날 당신을 신으로 군림하며 통치하던 외계인들처럼 당신을 조종하는 조종자가 되거나 당신 내면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백안시되고 만다. 정작 주인공인 당신들이 빠져 있기 땜문에 밑 빠진 독에 물을 쏟아 붙는 것처럼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를 버림으로서... 무는 무를 낳을 뿐이다. 어둠이 실질적으로 당신의 육체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를 버린다면 그것은 그대로 어둠의 차지이며 수동적인 꼭두각시이다. 어둠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를 버리고 무로 만든다면 그것은 어둠에 실질적으로 동조하는 일이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나를 세워야하고 빛으로 채워야하는 능동성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들에겐 이런
당신이 스스로에게 당신 지분 당신 몫만큼은 리더가 되고 신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받쳐낼 튼튼한 지반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영혼)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영혼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영혼이 없다면 당신은 이곳에 올수 없었다. 당신이 이곳에 온것은 영혼이 온 것이다. 당신은 영혼을 통해 이곳으로 왔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여러분이 매달리며 숭배하는 그 대상을 향해 사용하라.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엇인가.탄생한 그대로 창조한 바대로 영혼으로 줏대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의 권력숭배 의식을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이든 어떤 잘란 스승이든 무엇이든 어떤 숭배의 대상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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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사랑할줄 아는 자는 이제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타인을 사랑하는 보편적인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실제적인 본론적인 일을 실천적인 일을 함에 약간의 지혜와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게 스스로 왕이된 존재들은 이제 그 다음으로 당신처럼 그렇게 스스로 왕이된 멤버쉽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이 있다는 것을 배울 차례이다. 실질적 구성을 형성하고 일을 하기 위해 각자 위치에서 분업과 협동의 지위의 위계 질서는 존재하지만 근본에서 마음으로 독립된 영혼으로 평등한 사회 말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자는 충만한자 부족함이 없는 자이다. 그 무엇에도 구애될 것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다. 리더는 왕은 홀로 책임의 고독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이다. 무엇이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기에 그 어떤 자신이 얽매이고 의존할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자입니다.
왕은 스스로에게 구애될것도 두려움이 없는 자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자이다. 위 아래 상관없이 그 내용을 보고 승복할 것에는 승복하고 겸손할 때는 겸손할 줄 안다.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한 자들은 이 세계에 진입도 못한 것이다. 이 세계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된자 진정으로 이렇든 탄생한자만이 들어갈 수가 있다. 자기를 내팽겨 쳐 버림으로서 자기 존재 자체 마져도 책임을 방기하는 자가 어떻게 왕이 될수 있겠는가. 스스로 왕이 되지 못했다는 말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고, 탄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세계에 진정으로 탄생하지도 자기 자신이 되지도 못했다.
이제 스스로 평등하게 왕임을 깨달은 존재들에게 말하지만 그 다음으로 다른 영혼들과 균형을 배울 차례이다. 스스로 왕이라고 해서 각자가 저 하나만 잘랐다고 버릇없는 아이처럼 오만하게 구는게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은 당신의 환상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중요하나 그 실질적인 것을 대함에 사랑만으로 되지 않으며 사랑과 지혜와 기술을 합한 삼위일체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혜와 의지의 힘이 빠졌을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위선적인 사랑과 구분하기 어렵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을 환상으로 보는 그것은 여전히 자기 위치에 대한 사랑의 부제로 인한 외부 힘의 굴종을 거꾸로 한것이고 그것의 반작용이다. 권력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자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로 변한 것 뿐이다. 여전히 그는 자기 내면의 공허와 부족함에 얽매여 있다. 그것을 외부의 물질이나 타인의 힘에 대한 소유 혹은 지배로 잊으려 하고 만회하려 든다. 외부의 물질이나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이 없으면 무언가 두렵다. 그 홀로 됨을 홀로가 되어 자기 자신을 대면하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 하기에 타인의 힘과 외부의 물질을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권력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루시퍼가 그랬다-대천사 루시퍼는 신을 배신하고 한번 타락한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부터 두려워 달아나는 자였다) 내면(영혼)에 만족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을 찾는다. 모든 어둠은 이러한 홀로서기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홀로서기란 무엇인가 스승이든 최고 정점이든 무엇이든 외부의 의존할 대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홀로선 주권의 왕이듯이 다른 사람도 그의 홀로섬을 고유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한다. 그 상태에서 협동하는 건강한 가족의 멤버쉽과 같은 사회가 있다.
하지만 자기 위치를 이미 사랑한다면 나는 나로서 충분한데 부족함이 없는데, 그가 왜 오만하게 굴겠는가. 오히려 스스로 충만함이 황금빛 액체 같은 빛이 향유처럼 밖으로 흘러나와 바닥으로부터 채운다. 그는 홀로 서서 근원의 우물에서 빛의 물을 길어내는 펌프와 같다. 각자는 각자 모두가 이렇게 근원에 튼튼히 뿌리 박고 서서 빛을 뿜어내는 우물이다. 모두는 이곳에서 앞서거나 뒤서거니 나온 정도 입은 계급장과 지위와 위치는 다르지만 그런것은 하나의 놀이다. 아무래도 좋게 된다. 근원으로 통하는 고유의 홈통(케이블-영혼)을 등짝에 동등하고 하나씩 달고 있기에 외부적인 지위 그것이 어떻게 되었어도 그 자신은 충만함으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하나이다. 하나라는 말은 대등하다는 말이다.
그런 사회에선 자기 자신의 위치를 먼저 사랑함으로 자기 위치를 사랑한 상태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고 하나의 목적, 같은 공동 목적(내용)에 자발적으로 동참함에 상하 우열 계급이 따로 없다. 그것은 표면의 이름이나 지위의 다름에 구애되지 않은 '내용'을 알기에 가능한것이다. 같은 배를 탔다는 그 자기에게도 깊이 상관이 있는 공동의 목적을 아는한, 선장이 없으면 배가 침몰 하지만 말단 선원인 내가 없어도 나의 역활이 없어도 (기관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트를 조이지 않으면)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계급은 존재하지만 각자의 몫만큼 리더가 된다. 그 상태에서 너나 할것이없이 자발적이 되고 협동하고 동참한다. 천상은 이런 세계이다. 그 깊은 뜻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말단 사병은 말단 사병대로 왕이고 사령관은 사령관대로 왕이다. 각자 나라른 지킨다는 일념하에서라면 상하 우열이나 서열은 없다. 환경미화원은 환경미화원대로 왕이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왕이다. 각자 역활과 위치는 다르지만 내가 없으면 나라가 유지 될수 없다 왕이란 면에선 대등하다. 그것이 권력이 아닌 사랑이다. 결코 동등하진 않지만 대등한 관계이다.끊임없이 비교하고 우열을 따지며 시기와 질투 경쟁심이란 없다. 그것은 저 하나만 생각하는 것이고 한가한것이다.
그것은 저마다 파트와 역활 위치는 다르지만 하나의 지휘자 앞에 모인 합창이고 하모니다.
감독이나 지휘자만 중요하다고 배우나 연주자 없으면 연극이나 음악이 이루어질수 있는가.
여러분 스스로도 창조나 창작을 해보아라. 그것이 시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무용이든 좋다. 신성한 예술이나 문학을 스스로 해보는 일은 우주를 융통성있게 통찰하고 이해하는 감각을 배로 증진시킨다. 경직된 것은, 두뇌가 초박형 개미 대가리인 것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창조하거나 창작할때 느끼는 희열과 기쁨은 창조자가 우주를 소욜돌이 치는 빛으로 창조 할때의 기쁨과 정확히 에너지 적인 면에서 같다. 물론 창조나 창작 과정에 항상 기쁨만 있을수는 없다. 하지만 창작의 고통이 있기에, 산고와 출산의 고통의 '과정'이 있기에 자식들을 아이를 낳았을때(창조했을때)의 어머니의 기쁨도 있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이나 고통을 극복하고 벗어난 뒤의 기쁨이 소중하게, 웃음으로 와 닿을 수 있는 것은 그전의 고통이나 슬픔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당신이 창조를 하잘것 없이 취급하고 멀리하는 것은 자유나 그것이 그 과정에서 오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면 문제가 있다.고통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면 당장 슬픔을 모를지언정 태어난 존재로서 영원히 그 기쁨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를것이다. 이 또한 반드시 칭찬할만한 것은 아니다.
창작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이 신과의 소통,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그 자신의 거대 자아, 내면과의 소통이 될것이다. 모든 창작과 예술은 우주와의 교신이고 채널링이다. 작가가 자신의 혼자 능력으로 창작하는 줄 알지만 사실 모든 예술의 영감은 우주로부터 다른 차원으로부터 온다.
작곡가나 작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이 창작중에 있는 자는 모든 것과 함께 하면서도 그것을 포괄하는 위치에 혼자일수밖에 없다. 요리사는 많은 재료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위치 혼자에 있다. 많은 것과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홀로 있는 것이다.바이올리니스트가 무수히 소리를 연마하는 것은 많은 소리와 함께 하면서 혼자 하는 고된 일이다. 발레리나가 율동을 연마하는 것은 많은 율동과 함께 하면서 혼자서 가야하는 고된 일이다 그들은 거기서 아직 이곳에 없는 곳으로부터 이곳에 없는 것을 이곳에 있게 하기 위해 아직 무언가를 짜낸다. 그러면서도 또 그와 같은, 다른 혼자 가는 존재들과 함께 언제가는 만나 무대위에서 공연하면서 협동하고 조화를 이룬다. '따로 또 같이'다.
그 원천으로부터 메시지를 짜내는 일은 극도로 엄정하게 내면에 홀로 침잠해야 하는 일이고 혼자서 하는 일이다. 미켈란젤로 모짜르트 다빈치 베토벤 고흐 모두 그렇다. 소위 말하는 아티스트의 창작의 고통이다. 작가 자신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력이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영감은 그 자신이 아닌 홀로있는 자에게 우주로부터 온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내면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고 협동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작가가 영감을 얻고 그 영감이라는 것과 순도 높은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홀로 있는 상태이다. 홀로 있는 상태는 모든 것을 배척하는 상태가 아니다. 아래를 잠시 닫아 둔 상태에서 상위와의 연결이다. 그것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한다는 식으로 아래와 주위 레벨에 대해 잠시 닫아두는 것이다. 홀로 있다보면 당신은 내면을 통해 천사들이 안내하고 지키는 상위의 천국 성안에 모셔져 있는 보물상자에 이를수 있다. 그곳에 당신을 포함한 우주에 관한 모든 것이 있다. 그것은 실질적 세계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작은 비단 특정 아티스트나 작가에게만 국한 된 일이 아니다 이 계에 내려온자는 모두 영혼차원에서 우주 창조를 위해 이 고통을 감내하기로 약속한 용감한 자들이다. 여러분은 모두 여러분 스스로 자신에 만큼에서만은 창조자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각자 위치에 맞게 협동한다.그들은 알건 모르건 의식하건 안하건 자각하건 안하건 그들의 삶을 통해서 창조를 행하고 있다. 다만 지금 지구인은 그 영혼의 창작을 자신의 완전히 자각하에 내면의 힘을 망각하고 이 세게를 지배하는 외부의 권력에 빼앗겼을 뿐이다. 이 힘을 되 찾는 것이 마스터이다. 마스터란 스스로 주인이 된 상태에서 창조를 행하는 자이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유일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일반인의 영혼은 작가처럼 작품이 아닌 바로 시공간안에 들어가서 그의 인생이란 것 삶이란 것 그 자체를 통해서 창작를 행한다. 시공간은 벗어나 있으면 한눈에 보이는 작은 건물과 같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그들에게는 마치 모든 것처럼 다가온다.그렇기에 그들은 삶의 카르마가 적용된다. 위대한 예술가는 삶이 아닌 작품 속에서 살기에 일반인에게 적용되는 카르마에서 벗어나 있다.
오늘날은 부모들이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서 수술로 아이를 낳고 있으나 이것이 산모와 아이의 유대감을 결여시키고 아이의 저항력을 약화 시킨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편의주의적이것 편리만 찾는 것에는 사랑이 없다. 자기 영혼을,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부정직한 종교 권력과 함께 여러분의 의존성의 대상은 또한 주류물질과학이다.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기회가 있을때 말하기로 하겠다.
여러분은 자동인형처럼 누군가에게 자신이 할일을 맡기고 수동적으로 따라가길 편하다고 선택하고 있다. 혹은 어떤자는 자신이 아예 자동인형이길 바라고 있다. 편리함만 찾고 그러기를 바라고 옹호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 그런다고 자기 존재자체에 대한 책임이 여러분들로부터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여러분이 그것을 언제고 자각할때 까지 정체된 상태로 풀어지길 기달릴 뿐이다. 당신이 영원히 스스로의 책임을 찾지 않는다면 영원히 정체될 뿐이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수고하고 감내하길 마다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것은 당당히 홀로 서서 가는 자세이다.
여러분 모두 스스로 환경을 창조를 하는 연기자나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보라 여러분을 스스로를 신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에 꼭두각시라고 스스로를 비하하지만 실제로 연기를 하는 배우나 축구하는 선수에게 물어보라. 배우와 축구선수는 무슨 기쁨으로 그짓을 하는가 배우와 축구선수는 거기서 무슨 희열을 느끼기에 그런 짓을 하는가. 그것은 단지 감독의 꼭두각시인가. 그런말을 그들에게 했다간 그들로부터 싸대기가 돌아올 것이다. 배우와 감독은 똑 같이 사랑받지 않는가. 배우가 관객들에게 더 인기가 높지 않은가.그만의 연기는 그가 아니면 못한다. 그것은 그만의 고유의 독립된 영역이다. 종속이 아닌 협동하는 관계이다. 감독은 그의 영역이 아니다. 자신이 꼭두각시라고 비하하는 자는 그 감독의 위치를 쥐어 주어야 성이 풀리겠는가. 자신을 비하하는 자는 감사할줄 모르고 탐욕하는 자이다. 그것은 주제를 모르는 에고이고 오만함이다. 배우나 축구선수가 스스로를 누군가의 꼭두각시로만 여기고 꿈이나 희망이나 비젼이나 영감이나 상상력이 없다면 그 각본을 자기 나름에 맞게 창조하는 연기도 못한다. 연기, 그것은 그 나름의 창조이다. 단지 실제가 없는 공상속의 잠재된 감독의 아이디어를 실제로 눈 앞에서 표현하고 시현화시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만이 할수 있는 독립된 능력이다. 아무리 좋은 각본도 좋은 배우를 만나지 못하면 빛을 볼수 없다. 좋은 감독도 좋은 선수가 있기에 빛을 보고 가능한 것이다. 작가나 감독도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그 전부터 원천이 있다. 축구를 하는데 선수 없이 모두가 심팜이고 감독일수는 없다.감독은 시공을 넘어 미래에 까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겸험과 지식과 지혜를 보유하고 있지만 여러분이 가진것을 가지지 못한 것이 있다. 감독이 운동장에서 선수가 되어 직접 뛸수는 없는 것이다. 감독의 아이디어를 삼차원적으로 시현화 하기 위해 운동장에서 뛰는 것은 감독도 두고 봐야 하는 또 하나의 아직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시간선으로 정해지지 않은 미래이다. 여러분은 각자가 여러분 몫만큼 신으로부터 지분과 창조 능력을 부여 받았다. 감독과 하나인것은 여러분들이기도 하기에, 여러분의 영혼은 왜 감독의 아이디어를 실제적 모형으로 시현시키는데 이바지 하는 것이 나에게도 행복인지를 알고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 하나의 공동의 목적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창조이다.> 신이 여러분이다. 신은 감독의 위치에서 감독도 하지만 여러분이 되어 여러분의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그 신이다. 신은 여러분과 함께 한다. 창조하고 협동한다. 실제 몸을 가진 여러분의 존재를 통해서 신은 '여기에 있게' 된다. 감독은 선수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킨다. 감독과 선수는 한 몸이다. 그리고 감독과 선수 코치 심판 의료팀 모두 관객으로부터 어느 하나 우열없이 사랑받는다. 하다 못해 골보이까지도... 처음부터 감독인 경우도 있지만 배우나 축구선수가 연기 겸험을 통해서 경륜과 연륜을 쌓았을때 비로서 감독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까지는 여러분은 여러분만 할수 있는 내부의 '장기'가 있으면서도 외부와 협동하는 존재이다. 장기가 내면이고 협동이 외면이다.
몸의 각 부분이 저 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머리가 되려고 경쟁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팔뚝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발목이 되려하고 발목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팔뚝이 되려하면 어떻게 그 몸은 유지 될수 있겠는가. 그것은 공멸이다. 팔뚝은 팔뚝으로서 각자 위치만큼 왕이고 발은 발로서 각자 위치만큼 왕이다. 각자 위치는 몸으로서 연결되어 이미 하나로서 연결되는 생명의 축복을 받고 있지 않는가.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치자.
기관병이 내가 선장이 아니라고 최고 자리가 아니라고 쫄때기라고 자기 비하와 신세 한탄만 하고 앉었다면 자기 사랑을 패기처분한다면 어떻게 안 보이는 곳에서 그가 홀로 자기 일에 스스로 최선을 다 할수 있겠는가. 어떻게 배가 유지되고 나갈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하는데 선장이 두눈 부릅뜨고 모든 곳에서 항상 옆에서 감시하고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선장이 옆에서 안 보면 아무일도 못하는 바보인가. 어떻게 독립된 개체로서 믿고 지분을 맡길수 있을텐가. 그것은 선장이 모두 혼자서 다 알아서 하는 이만 못하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들에게 과거 어둠의 시절 가짜 절대 신, 절대 권력으로 가짜 아버지 노릇을 했던 존재들이 여러분의 무서운 삼촌인 루시퍼이고 아눈나키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만든 방식들에, 그들이 만든 의존성의 로보트 노예들에 염증을 느끼고 지구에서 떠나갔다.)
볼트를 조이는 일은 선장이 아닌 오직 당신만이 할수 있다. 그 일에 있어서 만큼은 당신은 당신 스스로에게 선장이며 정확히 선장과 동등한 에너지를 공유한다. 이렇게 해서 신은 그 자신이면서 신은 모두 이기도 한것이다. (결코 혼자서 선장질을 하고 쫄다구짓을 하는 미친짓를 하는게 아니다.)
절대자 신 하나만 대가리가 달리면 되지 쫄다구 하나 까지 각자 고유의 대가리가 달린 이유가 무엇인가. 각자 대가리를 소멸시키는 그런식으로 해서 어떻게 우주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돌아갈수 있을 텐가. 안락사나 낙태와 같은 것을 종용하는 라엘리안이나 무묘앙에요 같은, 영혼에 대한 나약함에 근거한 편리만 찾는, 영혼에 대해 위선적 사랑을 말하는 자들이 이딴 식으로 배를 침몰시키려 하는 불쌍한 자들이다.(연민을 느낀다) 대가리를 소멸시키는 것보다 그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당신이 볼트를 하나 조이는 것은 당신이 선장(최고의 경지)이 되기 위함만이 아니다. 바다에서 배를 유지 하기 위함이다. 거기서 당장 자신의 생명의 안전과 기쁨을 얻는 것은 당신 자신이고 모두이다.
이타심, 사랑의 기쁨을 한번 느끼기 시작하면 당신은 거기서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자기일에 스스로 알아서 하는 능동성은 자기 일에 '사랑'이 없으면 안된다. 자기 일에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안된다. 사랑은 생명력이다. 능동성이다 살아있음이다. 모든 일이 강제와 강압이 없어도 조화롭게 돌아가는 강력한 법칙이다.
서로가 자리 바꿈을 하거나 위치가 이동할때는 그에 합당한 자질과 능력과 자격을 심사받고 이루어진다.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맡은 그 일을 얼마나 잘 해냈느냐 얼마나 사랑했느냐이다. 그것이 과정이고, 그 과정은 삶의 단계의 도상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심사하는 것도 피할수 없는 스스로의 정직한 자기 자신이다. 영적 세계에서 그 보상, 상과 벌은 우리 세계에서 처럼 외부에서 다른 사람이 평가하고 주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일 대 일 맨투맨식 만남, 당신 자아가 준다. 신은 이미 당신 자아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현존이며 신성한 자아라 한다. 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고 버리는 따위로, 정직한 자기 자신을 만나지 않고 회피는한 깨달음은 없고 상승할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에 종속된 하위 욕망의 자아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이지 송두리째 자아가 아니다. 당신이 자아를 버리는 말든 목적을 가지든 말든 상관없다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자아를 먼저 만나야 한다.
당신과 다른 사람의 영혼은 그 보다 더 한 환상인 당신에게 환상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가야할 첫번째 단계이다.
그리스도가 창조의 세계라면 부처의 세계는 순수 바탕의 세계이다. 그리스도를 동이고 부처를 정이라 할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으며 부처 또한 그렇다. 그 둘은 서로 속에 서로의 요소를 이미 가지고 있으며 서로 협동한다. 그리스도 또한 정과 동의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부처 또한 정과 동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러분은 이 세계에선 명상과 생활은 절도있게 구분해서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둘을 혼동하고 서로의 방식으로 서로의 영역을 없애려 하지 마라. 여기서 그리스도가 창조의 일이고 삶이라면 부처는 명상을 상징할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와 부처가 전쟁하는 꼴이다. 예를 들어서 명상할때는 마음을 비우고 무심하라 가르쳐도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할때 당신은 무관심하거나 무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뭔가 '또라이'가 아닌가. 명상을 할땐는 명상을 하고 일을 할때는 생각과 정신과 마음을 써서 일을 하라. 극단적인 골수 전통수행종교가 채널링을 마귀짓이라고 배타하는 것은 명상에 대한 가르침(자기들이 어디서 들은 것이 그것 뿐이라)과 자신들이 관심도 없는 대부분의 면적, 생활과 일과 창조와 행성 진화의 드라마에 대한 교훈과 지혜의 가르침을 서로 혼동하고 있기 대문이다. 명상을 할때는 마음을 잠시 비우고 고요해야 하지만 그것에서 깨어 생활을 할때는 다시 마음을 행동을 가슴을 주어담고 삶을 붙잡고 망치와 못과 연필과 붓을 들어야 한다. 명상을 할때는 마음을 '비우더라도' 생활의 일을 할때는 마음을 다시 주어 담고 '다루는방법을 배워야' 한다. 한참 생활을 하고, 일을 하는 데에 다 두고 한켠에 와서 마음을 비우라고'만' 말하지 말라. 그것은 누가 더 우월하거나 중요하다고 할수 없다. 균형이 맞아야 한다. 근원으로부터 나와 창조된 자는 생활만 하다보면 명상을 할수 없지만 명상만 하다보면 생활을 할수 없다. 명상과 생활은 함께 가는 것이다. 왜 창작을 하는 위대한 아티스트가 내면에 침잠하는지 이유를 알것이다. (예술가는 일반인의 카르마에서 벗어나 있으며,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완전한 창조는 가장 완전한 명상이다.그렇게 하다보면 명상과 생활이 합치되는 지점에 이르게 될것이다. 내면과 외면이 같아져서 하나가 되는 지점에 이를것이다. 그런시대가 앞으로 올 5차원 반 에테르문명이다.
3
명상을 통해 하나님과 부처가 현재 여기서 당신과 함께 한다는 느끼는 것,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의식을 사용해서 천국에 잠시 여행 가보는 것, 연결되는 것과 당신의 신체가 실질적으로 그 위치에 위치하는 것은 다르다.
그렇게 의식이 올라갔다 삶속으로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신체 또한 상승하게 된다. 신체가 실질적으로 위치하는 것은 12단계에 따른다.
수백만년 수억년의 영원한 삶일수도 있는 은하의 '삶', 그 전 과정을 다 마치고 10-12단계에 올랐을때 실질적으로 개체 자아가 전체 자아 전체 의식으로 소멸할수 있다. 그러나 의식을 통해 지금 천국과 연결되고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지금 현재 당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당신에겐 행복일 것이니 그것을 고역이나 불평부당한 노역이라고 할것이 없다. 정상적인 세상에선 그것은 기쁨이다.
의식의 여행이 아닌, 실질적 신체의 진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의식을 통해 상위를 여행하고 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느껴도 당신의 엉덩이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의식이 아닌 신체적으로 여러분들은 현재 3,4차원에 걸쳐 있고 5차원에 진입하는 중이다. 5차원 부터가 이러한 본격적인 깨달음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행성 레벨이다.
6차원은 여러분들의 상위영혼들이 존재들이 사는 행성 레벨이다. 상위영혼은 여러분 영혼 하나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무수한 하위 나툼 영혼을 자신의 내부에 동시 다차원적으로 거느리는 집단 의식의 존재이다.당신은 그중에 하나의 구성원과 같다. 이 우주에는 현재 이곳에 당신말고도 당신의 전생(나툼)이라고 부르는 다른 다른 차원과 시간대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당신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시간은 일직선 하나만이 존재하지 않으면 나뭇가지처럼 서로 조금씩 다른 역사가 무수히 한 갈래에서 갈라져서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을 모두 통합해 자신의 내부에 동시에 뿌리처럼 다차원적으로 거느리는게 상위영혼의 존재이다. 그 만큼 상위영혼은 속알지 그릇이 넓은 거대한 '자아'이며 당신 하나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 대아가 바로 이 상위영혼이다. 상위영혼부터 본격적인 집단의식이 시작된다.
개체의 영은 순수 백광의 빛 기둥으로 9차원의 행성과 성단에 존재한다. 개체 영이 모인 대영그룹과 가족은 10에 차원의 우주에 존재한다. 그들은 당신들의 게임을 관리 감독하는 자이다. 개체인 당신들은 게임의 플레이어들이다.
12차원 이상으로 나가면 더 이상 우리 우주가 아니다. 우리 우주와 같은 레벨의 무수한 다른 우주를 하부 그룹으로 포함한 초우주 존재들의 '내면'이다. 밖으로 '들어가니' 내면이 '나오고' 내면으로 '나가니' 밖으로 '들어간다.' 여기에 대해선 여러분에게 지금 해당사항이 아니기에 불필요해 말할것도 없고 생각할것도 없다. 우리 우주 내부에 대해서만 말해도 벅차다. 그것들 중에는 기계들로만 이루어진, 완성이 실패한, 스스로 패가망신한 우주 존재도 있고 이원성이 없는 따분한 우주 존재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우주는 그것이 또하나의 몸으로 이루어진 개체이고 영혼이고 생명체라 부를수 있다. 정확한 비유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 생명체를 이루는 그 안의 작은 분신들로 작은 세포중의 세포들이고 분자이고 원자이고 전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개체로서 다른 우주와 상위 우주 존재로부터 불리는 우리 우주의 이름은 인간의 언어로 '그리스도'이다. 이름 따위야 어찌되었든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것은 내용이다. 환단고기서에서 말하는 우리 민족의 시조신인 환인이 바로 이 그리스도라고 봐도 무방하다.그리스도와 환인 모두 하나님이나 한얼님의 아들이며 우리 우주의 창조자이고 원인자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제1 퍼스트 원인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인 창조자,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을 창조했다. 그리고 근원자 하느님이 거느리는 우주는 우리 우주 '그리스도', '환인' 말고도 많다. 그들은 모두 제1 퍼스트 원인자 하나님이 낳은 아들들이고 그들 우주들은 서로에겐 형제들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낳았다면 여러분들을 낳은 것은 그리스도이다. 근원자가 모든 우주를 다스리는 아버지이자 여러분들의 할아버지라면 그리스도는 여러분들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여러분들의 아버지이다.
다른 우주는 그들의 그 원인자, 대표자, 아버지가 따로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내용과 이름으로 불린다.그리스도와 환인이란 제 1 퍼스트 원인자, 근원자, 하느님/한얼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여러분에 대한 사랑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로를 낳은 하느님의 여러분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 우주의 진리는 사랑이다. 진리는 우주마다 다르며 다른 우주의 진리가 우리 우주에서 반드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우주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 전혀 다른 진리로 돌아가는 우주도 있기에 부처 의식이나 그리스도 의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의식이나 그리스도 의식은 우리 우주에서만 부처의 의식이고 그리스도 의식이다.부처와 그리스도 의식은 우리 우주에서 나왔다.
우리 들처럼 영혼으로 나와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의식과 부처 의식을 달성한 예수와 고타마 붓다는 아직 우리 우주를 신체적으로 벗어나 있지 않다.예수와 고타마 붓다는 아직 우리 우주를 신체적으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 우주엣 난 영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진화를 통해 완성을 이루고 한몸이 되었을때 하나의 몸이 되어 근원으로 간다. 그때까지는 당신들을 기다려주며 원조하고 조력하는 상태이다.
(여호와나 성모 에너지, 우리 우주가 시작될때 행성위의 여러분의 신체를 창조한 쉐크메트 사자인(고대 이집트의 여신)과 행성들의 궤도를 창조한 조인들 같은 것은 다른 우주에서 건너 왔다고 한다. 사자인과 조인들 같은 존재는 영적 존재들과 구분할수 없을정도로 아주 나이가 많고 높이 진보한 외계인인데, 여러분들이 신이라고 말할때 이들 또한 신이며, 최고 창조주 하나만을 신이라 말하고 여러분이 신이 아니라고 할때 이들또한 신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우주를 다른 우주 존재들과 상위 우주 존재들에 대해 하나의 몸으로 대표하고, 여러분들은 그의 몸을 이루는 분신들로서 건강한 신체 부위나 세포에 비유할수 있다.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왕이 되는 일은 세포가 건강하게 살아서 자기 위치 대로(위는 위대로 간은 간대로 두뇌는 두뇌대로 심장은 심장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기능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우리 우주의 창조자의 이루는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이고, 신의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건강하다는 것이고 행복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신과 여러분은 뗄수 없는 불가분의 공생 관계에 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세포나 몸의 기관을 죽이는 일이고 신을 죽이는 일임을 명심하라. 그것은 여러분이 사랑한다는 제 1 퍼스트 원인자, 모든 것의 원천을 죽이는 반역하는 행위임을 명심하라.
우주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거느리는 초우주 밖으로 나가면 그러한 초우주의 존재들을 내부에 하부 그룹으로 거느린 더 큰 또하나의 초초 우주 그룹의 존재가 있고 그 초초 우주 밖으로 나가면 그 초초 우주들의 그룹을 통합해 이루어진 더 큰 초초초 우주 그룹이 존재한다.
우리 우주 내에서 상위차원 존재들이 여러분들의 하위 차원의 존재들을 돕고 관리 하듯이, 상위 우주 존재들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하위 우주 존재들을 그룹을 관리한다. 언급하는게 무의미 할정도로 이런 우주 단계는 많다. 그리고 그 정점에 그 모두를 거느리는 13차원 하느님이 존재한다. 근원은 지금 여기 현재에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근원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지금 현재 여기에 존재하는 만큼 근원도 지금 현재 존재한다. 지금 현재에 근원이 존재하기에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신이거나 죽은 신이 아니다. 근원은 저기에도 있지만 이곳에도 있다. 그 하느님은 바로 당신 몸으로 여기에 내려와 있으며 당신이기도 한것이다. 하지만 당신만이 유일한 하느님은 아니다.
현재 여기서 하나님이나 부처와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것과 그 일을 다하고 실질적으로 신체가 소멸하여 그 자리에 위치하는 것은 똑 같이 중요하며 동질의 기쁨이다.
(신체적으로 당신이 하나님 근원의 13차원의 자리에 앉는다고(소멸한다고) 하나님 근원이 사라지고 당신이 하나님 근원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다시 임무를 부여 받고 영혼으로 창조되어 나올 수도 있다. 고도로 진화한 영의 존재들은 자신의 진동수와 밀도를 바꿔 언제든 거꾸로 하강하여 영혼이 되기도 하고 에테르체가 되기도 하고 육체가 되는 능력이 있다. 우리도 그 방식으로 아주 오래전에 지구에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상승중에 있는 것이다.
각 학년마다 그 '과정'을 다 거치고 졸업할 때 버리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손으로 정중히 받드는 단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단계들, 과정, 과정들을 즐겨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멀고 먼 길위에서 한숨만 쉬고 있어야 한다. 가야할 방대한 이 우주의 크기에 목표만 보고 매달린다면 그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당신 정신건강에 해롭다.
목적을 두되, 목적을 향해 갈때는 목적을 잊고 도상을 즐겨라, 부처와 하나님이 지금도 이 순간에 함께 함으로 그것이 가능하다. 과정은 끝이 없기에 지금 이순간 완전하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걸으면서도 쉬고 쉬면서도 걷는 과정 자체가 사실은 전부이고 완전함이다. 그것이 신의 호흡이고 살아 있음이다. 하나님이나 부처는 '궁궐' 안에서만 존재하는게 아니며 당신 내부에, 이곳에 존재한다. 여러분이 상위의 하위 디레토리로서 딸린 아들이고 자녀들이듯이 당신들에게도 하위 디레토리로 딸린 자녀들이 가지고 있고, 또 가지게 될 것이다.
부처와 하나님은 저곳에도 존재하지만 이곳에도 당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천국은 저곳에도 존재하지만 이곳에도 존재한다. 어느 하나로 가기 위해 다른 곳을 버리는게 아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 그둘 사이의 연결이 튼튼하고 건강해서 그 둘을 같게 만든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천국은 당신의 개개인들이 있는 곳으로 전 우주로 확장될수 있다.
여러분 몸에게 여러분의 진아, 대아, 상위영혼으로부터 생명에너지를 이어 받아 전달하는, 신체에 존재하는 빛의 신체, 5차원의 반에테르체(유체)를 자각도 못하고 5차원에 진입도 못한 여러분에겐 첫번째 단추가 중요하다. 여러분은 겨우 기초공사를 놓고 있는 지점에 있는 것이다. (6차원과 실질적으로 접촉할수 있는 5차원은 본격적인 내면의 세계이며 본격적인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지금의 여러분에게 당금에 가야할 목적지로 집중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특별하다. 그 이상의 너무 먼 목표는 그것에 촛점을 잃게 만든다. 5차원만 되어도 여러분은 그 위치에서 신체적으로 모든 차원과 통합과 교류와 소통과 연결이 가능하다.)
에고를 없애려거든 에고를 받들어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당신은 그것을 영원히 다룰수 없다. 다룰수 없는자 영원히 벗어날수도 없앨 수도 없다. 그것은 당신의 진화를 위해서도 다루어야할 중요한 도구이다.
당신 자신의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은 그 보다 낮은 당신에게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확실한 지혜와 의지로 사랑으로 창조된것이다. 환상을 환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자세라면 모르지만 당신이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상으로 본다면 당신은 영원히 충족될수 없다.
그런 자세로 어떻게 현재 이곳에서 자기 사랑이, 신과 함께 함이 가능하겠는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함은 당신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하나님과 부처를 사랑하지 못함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자가 어찌 남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부처를 사랑하겠는가.
사랑에 게으름을 피우고 태만을 부리면서 어느날 한시에 무얼 이루면 나머지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돼, 다 보상이 돼가 아니다. 그동안에 자신의 영혼을 없애려고 당신은 영원히 싸울것인가. 모든 것은 단계별로 이루어진다.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한다.
현재 지금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자가 즉 딛고 올라설 발판이 없는자가 어떻게 그 '없는' 발판을 딛고 다음 단계로 그 이상 으로 올라가려고 헛된 욕망을 품는가.
당신은 혼이라는 것 넋이라는 것 얼이라는 것을 무슨 수행의 거추장스런 방해물정도로 하찮게 취급하고 없애려 하지만 그것은 당신 하나의 사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혼이 없다면 이 우주가 돌아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당신은 당신 하나의 욕망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전체가 돌아가는 그림을 살펴보고 전체와의 균형을 생각하라.비록 언제가는 당신에게 소멸할것이라 해도 이 우주의 어느 곳 다른 이들에게는 여전히 영혼이 태어난다. 영혼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의 진화를 위해선 영혼이 필수 불가결한 단계가 있다.
얼이나 혼 넋이라는 것도 창조를 위해 하는 역활이 있다. 그 역활를 다 했을때야 비로서 배움을 마치고 소멸할수 있다. 공짜를 탐하지 마라. 뭘 했다고 무조건 소멸인가. 해 놓은 일도 없이 무조건 소멸이 아니다. 신체는 그렇게 해서 소멸하는게 아니다. 신체는, 신체의 일, 실질적인 일을 통해 소멸한다.
'이것은 그의 혼과 넋이 서린 작품이다', '민족의 얼이 담긴 땅'이라고 할때와 같이 넋이나 얼은 긍정적인 면이 있다.
얼이나 혼 넋이라는 것은 영이 자신을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구체화하고 표현하며 실현시키기 위한 역활을 한다. 그 또한 신의 일부이다.
한민족의 얼은 이 세계에 '남아'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장차 닥쳐올 지구 창조와 화합을 위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사도에 빠진 수행자처럼 무조건 없애려고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지구에 와서 지구의 녹을 먹고 수행을 하고 있는 자가 이 지구의 본래 목적대로의 창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가. 그것은 창조신에 대한 반역이다. 모두가 부르주아 궁전에 올라 애들처럼 살려고만 하면(당신의 수행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적이며 그 이득을 보기 위함이 아닌가) 쓰레기는 누가 남아 치우는가. 누가 집안 청소를 하는가. 겨우 제 한몸 이기적이고 편의적인것만 추구하며 무얼을 없애, 편의만 보려하는 희생의 삶이란것을 모르는 수행자는 그 넋과 얼 앞에서 발 뒤꿈치 때만큼도 못한 것이다. 이것은 진화와 수행의 혼돈하고 서로의 자리를 분간 못해서 벌어지는 촌극이다.
왜 수행은 마귀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진화'와 '우주면적'을 괴리를 두고 전쟁을 하는가. 그것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수행이 진화를 정상적으로 복원시키고 구원하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문제는 상위와 의식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의식이 그 혼에 고착될 때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것이라서 ㅤㅇㅓㄼ애야하는 것은 아니다. 없앤다는 것은 얼이나 넋 자체를 없애는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것에만 고착된 상태 행위를 없애는 것이다. 행동, 죄는 미워해도 사물은 미워하지 마라. 정상적인 세상에서 진화와 수행은 서로 배척하지 않으며 같이 간다. 수행은 그저 진화를 곁에서 도와주고 촉진시켜주고 균형을 잡게하는 보조 장치이지 결코 진화 배척하지 못하며 주가 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두발이 없이 땅(각 단계의 행성 층이나 배)에 닫지 앉고 모가지가 높은곳에만 매달려 있는 것을 우리는 구신이라고 한다. 천사나 상위 차원의 존재들도 행성에서, 배들에서 산다는 것을 명심하라.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우주에 대한 대부분의 면적에 대한 분별없는 공포이고, 그 공포가 외부의 힘(스승이나 최고신 최고의 경지따위)에 대한 권력을 추종하게 만들며, 당신이 품은 공포가 바로 당신이 무엇보다도 똑똑히 알아야할,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마귀의 전부인것이다.
4
최초에 우주 창조 계획에는 깨달음이란 없었다. 모든 것이 깨달음 상태였따. 여러분은 본래 부터 여기 오기전 부터 깨달았었다. 여러분이 온곳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이고 부처가 산다는 극락으로부터 였다.
여러분이 이 곳에 온 목적은 그 '깨달음'이란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잠시 여러분들이 어둠에 감금되고 지배되고 그 깨달음이라는 기억을 잃어버린 변질된 망각 상황하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으라고 나온 스승들의 말이었다. 깨달음이란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을 말한다.
원래부터 깨달은 상태였음으로 깨달음을 찾으라는 말이 그 시기가 지나면 절대적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스승들의 소임을 다하고 변질된 상황이 지나면 사라져버릴 것이다.
여러분들은 깨달음이란 것을 어떻게든 어린애가 부모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부모에가 달려가 다시 매달리는 것처럼 하나님이나 부처와 함께 있으려는 경지로만 생각한다.
만일 그런 깨달음이 목적이라면 여러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나 부처라는 것과 함께 있는 경지에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곳에 와 있을 필요도, 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처음부터 나중까지 함께 있으면 된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최선은 처음부터 구태여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다. 깨달음으로부터 나온 이유가 고작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일 인가. 손이 닿지 않는 등을 긁기 위해서 손바닥을 긁고 그것을 등에다 갖다 붙일 필요는 없다. 이 무슨 덤앤 더머 코미디 같은 일이란 말인가.
뭔지도 모르고 그런일을 하는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누가 당신들에게 하나님이나 부처로 부터 떨어지는 '죄'를 부여했는가.
여러분이 온 곳은 누구나 할것없이 이미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 부처라하는 그 최고의 높은 목표, 최고의 정점이라고 부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 상태에선 여러분은 이곳에 온 목적은 그런 깨달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시 그런 <깨달음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겸험과 체험을 통한 실질적 배움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은 기쁨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두레박이다.
각자 아래로 내려갔다가 물을 길어오는 하나님, 부처의 두레박이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길어오는 '물'이 삶의 체험을 통한 배움이고 지혜이고 교훈이고 창조의 데이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혼도 필요하고 넋도 필요하고 얼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두레박이 내려갔다가 엘리베이터처럼 오르는 길에는, 사다리와 같은 12단계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12차원이라고 한다.(7차원 이상의 집단 의식을 하나로 생략하고 줄여서 그 이하 7차원이라고도 한다) 각 차원마다, 여러분이 발을 딛고 올라가는 사다리의 발판 하나 하나 마다 여러분이 반드시 거쳐야할 그 나름의 수준의 층이 있고 삶이 있다.
정말 일을 잘 이루고 싶거든 최고 정점에 가고 싶거든 지금 현재 여기 당면한 단계부터 생각하라. 목적을 가지되 목적을 향해 걸을땐 걷는일에만 충실하고 목적을 잊어라.
여러분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는 다고 이 과정들 중간 단계를 모두 무시하고 여러분의 신체가 어느날 한날 한시에 하나님이 되고 부처님의 차리에 앉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부처든 하나님이든 떨어지지 않고 어디를 가든,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과 함께 할 뿐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나 부처가 앉아 있는 자리에 앉았을 때 하나님이나 부처가 그 길위에서 물을, 어떤 내용물을 길어왔느냐고 물었을대 아무 답변도 못한다면 다시 빠구되어 그 물이라는 것을 길어와야 한다.
그 물이 삶이고 배움이고 겸험이고 체험이고 그것을 통한 교훈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말은 정상적이 궤도로 올려 놓기 위함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도 그 궤도는 타야 한다.
다리 밑에서 온 배고픈 그지들처럼, 우리들이야 그 세계에 들지 못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든 저 하나 곤궁해서 탐식하는 아귀떼처럼 깨달음이란 것을 얻어볼까하고 저 하나 문밖에 서서 눈독을 들이지만(그것외엔 정신이 없고), 진짜 깨달은 자들은, 어느 정도 개인의 수행을 이루고 그 레벨 그 무대에 올랐다면 그 수준에선 진화, 진화, 우주의 진화가 본격적인 일이며 더 이상 개인의 수행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말로 깨달음은 자들은, 의식이 개인의 속알찌 그릇, 소아에서 대아로 우주 전체로 확장된 자이다. 무엇보다도 우주 자체가 우선이며, 우주가 이제 새롭게 하나의 대상으로 크게 다가온다. 당신은 이 우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주의 생명의 진화 그것이 신의 모습이고 우주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조그만 지구하나를 두고 극성스럽다 하지만 외계인이나 상위의 차원의 존재들이 이 조그만 지구의 당신들에게 관심을 갖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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