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수의 카자흐스탄 견문록 - (2차카작행84) 알마티감리교회 버전 화전놀이-깝차카이 달래캐기
교육원에서 카작말 공부를 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립니다. 문열고 나갔다 들어온 목사님이 나가보라고 해서 나가보니, 아내였습니다. 지금 달래 캐러 가니 빨리 나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강사가 바뀌어서 처음으로 하는 카작말 수업, 다행히 첫 시간이라 45분만 하고 끝난다고 했고,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책보따리 챙겨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날씨가 아주 화창하여, 아침에 결정한 일이라는 목사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진즉부터 들어왔던 알마티감리교회 한인들의 연중행사 <달래캐기>에 마침내 우리가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12시에 출발하여 1시간 30분을 달렸습니다. 바라홀까 시장에서 조금 막히고, 다연이 엄마 차가 단속 카메라에 찍혀 벌금 무느라 약간 지체되었지만, 알마티 도심을 벗어나, 교회 한인 식구들을 태운 넉 대의 승용차는 신나게 달렸습니다. 포장상태는 우리만 못하지만, 우리 고속도로처럼 쭉쭉 뻗은 도로, 양 옆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마치 광주에서 담양, 조치원에서 청주 들어가는 길목(영화 글레디에이터 마지막 장면인가에도 나오는 바로 그 환상적인 모습)만 같았습니다. 교외로 접어들자, 차들이 줄어들면서 사람도 드물어지고, 차창 밖으로 일망무제의 들판이 펼쳐집니다. 군데군데에서 한가롭게 말과 소가 마른풀을 뜯어먹고 있습니다. 길가로 갈대숲 같은 게 노란 빛을 자랑하며 나부끼고 있습니다. 가슴이 툭 틔는 것만 같은 정경입니다.
알마티에서 멀어질수록 길 옆 나무들의 키가 작아집니다. 강수량이 적어서 그렇답니다. 그 대신 까마귀들의 집이 많아집니다. 까치는 한 나무에 하나 정도만 집이 있는데, 까마귀는 목사님 표현대로 완전히 아파트입니다. 한 나무에 감 열리듯 여러 개가 지어져 있습니다. 아니 아파트 단지처럼 아예 그 일대의 나무마다 수십개, 수백개의 까마귀집이 떼 지어 있습니다. 날 때도 무리를 지어 다니더니, 사는 것도 그러합니다. 까치와 까마귀의 대조적인 생태를 그냥 느끼게 해줍니다.
깝차카이 호수, 흐르는 물을 막아서 인공으로 조성했다는 이 호수는 바다라로 불러야 할 만큼 넓었습니다. 푸른 물빛을 멀리에서 보면서 차는 계속해서 조금 더 달렸는데, 언덕에 무슨 이라크 전쟁터를 연상하게 하는, 폐허화한 집들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다차>라 해서, 사회주의 시절, 여름이면 주말농장처럼 채소도 가꾸고 휴가를 보내던 집들인데, 분리독립 이후, 그곳에 물을 공급하는 비용을 개인들이 부담하게 되자 저절로들 포기하면서 폐촌이 되고 말았다는 설명입니다. 그 마을 쪽으로, 그러니까 한번 오른쪽으로 꺾였다가 돌아서, 지금까지의 진행방향에서 볼 때 왼쪽으로 차가 달리니, 아까보다 더 끝없는 평원이 보여 우리로 하여금 계속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작년에 박박티 갈 때, 나는 이미 한번 체험한 것이지만 다시 보아도 좋습니다. 이윽고 포장도로가 끝나고 울퉁불퉁, 꼬부랑꼬부랑 하는 길을 달립니다. 장난 좋아하는 목사님이 갑자기 길을 벗어나 초원으로 차를 몰아 우리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한참동안 세상 근심 잊어버리들 웃었습니다.
망망한 초원 지대에 그런 곳이 있을까 상상도 못했는데, 가파라는 언덕길을 곤두박질치듯이 하며 더 내려가자, 산이 보이고 강물이 흐릅니다. 얼마나 맑은지 아주 진한 녹색 강물입니다. 왼쪽으로 꺾여서 낭떠러지길을 조심조심 차를 몰아 넘어가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 나옵니다. 사방으로 산이 둘러싼 가운데, 풀밭이 전개되었습니다. 바로 그곳이 달래밭이랍니다. 눈을 들어 강 건너를 보니, 달나라도 같고 화성도 같습니다. 나무가 자라지 않아 오직 바위와 흙과 모래로만 이루어진 그 산들이 뿜어내는 기이한 분위기, 뭐랄까, 이 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그 담백한 빵 같은 그런 묘한 느낌을 줍니다. 때때로 그 강 건너편에서 방목하는 말들이 물 마시러 내려오곤 한다는데 철이 일러서 그런지 안 보였습니다. 엄 권사님은 때때로 낚시하러 이곳에 온다는데, 물이 맑은 나머지 아가미가 빨간 고기들, 특히 커다란 잉어들이 그렇게 많답니다. 손을 대보니 얼음물이었습니다. 천산에서 눈이 놁아 흘러내린 물이 여기까지 오는 것이라나요?
아이들이 마냥 좋아합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그 풀밭을 뛰어 올라 산 정상까지 갔다오더니만, 이번에는 물가로 내려가서 노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남녀할 것 없이, 준비해 간 쇠꼬챙이로, 달래 캐느라 인사불성입니다. 흙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습니다. 달래를 발견하는 순간, 쇠꼬챙이로 그 옆을 푹 찌르면 쑥 들어갑니다. 한번 재끼면 순순히 재껴지면서 달래 뿌리가 보입니다. 흙만 탈탈 털어서 비닐봉지에 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아직은 좀 일러 달래가 작은데 일주일쯤 지나면 파만해진다고 하니 다음 번 나들이가 또 기다려집니다. 그걸로 김치를 담갔다가 일년후에 먹으면 아주 일미라고들 합니다. 이번 주일날에는 그걸 썰어 넣은 간장으로 콩나물비빔밥을 해먹기로 했습니다. 오면서 목사님한테 말씀드렸습니다. “이 달래캐기 전통, 계속 유지하도록 하세요. 아름다운 나들이입니다.” 그런데 금년 11월로 파송 10년을 맞는 강목사님, 원래 약속했던 기간이 종료되므로, 현지인 목사님을 물색해 그분에게 교회를 넘기고 새로이 주어지는 사역을 감당해야 한답니다. 그렇다고 당장 알마티감리교회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고, 당분간 그 옆에서, 현지인목사님이 완전히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해주어야 할 것 같답니다. 문득 선교사로 나온 분들에 대해서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존경심과 함께 인간적인 안쓰러운 감정이 솟구칩니다. 내 것이 없는 삶, 안정을 바라서는 안되는 삶, 유목민처럼 계속해서 새로운 사역을 찾아 떠나야 하는 삶, 그것이 선교사 분들의 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느낍니다.
저녁 속회예배가 있기 때문에, 4시에 그곳을 떠나는데, 더 달래를 캐고 싶고 더 있다 가고만 싶습니다. 서울에 있는 우리 교회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면 얼마나 신날까 싶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또 가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나야 녹음테이프 녹취하는 일, 책 보는 일, 카작말 공부, 외대 강의해 주는 일로 분주해 괜찮지만, 매일 고국이 그리워, 전화할 때 눈물 흘리곤 아내가 오늘 나들이를 아주 좋다고 반응하니, 꼭 다시 묻어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