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의거의 의의와 인간적·종교적 비극성
- 韓·中에서의 僧團과 國家的 暴力의 관계를 중심으로 -
블라디미르 티코노프 (박노자, 경희大)
1. 머리말: 중국에서의 승려와 전쟁.
원시 불교의 정치·사회 사상은 철저한 이분법론 (二分法論)으로 짐작된다. 즉, 출세간인 수행자 단체 (승가)는 오로지 해탈과 일체 중생 제도 (자리이타)를 이상으로 삼아 현실적 정치·사회 생활에 원칙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세간의 물질적 보시에 대한 보답으로 법보시 (설법)을 행하여 사회의 순화와 정신적 발전에 기여하였다. 수행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쟁들은 종식될 수 없었지만, 일단 승가는 전쟁에서 직접 참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전쟁을 오로지 찰제리계급의 몫으로 보고, 파라문과 같은 성직자의 참전을 불허하는 고대 인도의 풍습상 불교도의 초세속적인 태도와 정치·전쟁에서의 중립성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1). 그런데 불교적 도덕적 논리에 기반을 둔 和合·正法統治 등의 정치 사상을 통일 제국 이념으로 채택한 공작왕조 아육왕 이후로는 불교 교단도 전륜성왕론 창제·유포 등으로 국가 권력과의 보다 가까운 관계를 지향하기 시작하였다2). 그리고 중앙 집권적 체제와 국가 조직 위주의 사회를 그 전통으로 하는 중국에 불교가 도입하게 될 때, 정·교 관계 형태, 대 (對)국가 태도 등은 교단의 주요 현안으로 부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전 시기부터 근세까지 중국 불교 교단의 역사를 개관하면, 승려들이 인과응보, 업설 등을 근거로 한 생명 존중의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관 (불살생계 등)을 도입하여 살벌한 시대들의 사회적 분위기를 상당히 순화·정화하면서도 동시에 국왕 신성성 (神聖性)개념이나 국가 우위주의 등의 기존의 사회·정치 체제에 적응해야만 한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3). 결국, 원칙상 폭력을 부정하고 죄악시하는 중국 불승들이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들을 인정하여 나름대로 협조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은 발생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서, 북조의 오호십륙국 불교의 개척자로서 유명한 불도징 (佛圖澄; 232-348 ?)은 지계 (持戒)정신이 뛰어나고 경전에 통할한 정통 사문으로서 원칙적으로 폭력을 당연히 부인하였다. 불법 (佛法)의 뜻을 물은 석호 (石虎)에게 그가 “불법이란 살생하지 않는 것” (“佛法不殺”)이라고 용감하게 대답한 것이나, “다스림이 사납고 형벌이 지나치면 (...) 끝내 복을 받을 수 없다” (“布政猛烈 淫刑酷濫 ... 終無福祐”)고 임종의 순간에도 임금에게 반성을 촉구한 것은, 살륙으로 얼룩진 전란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무조건적 자비와 비폭력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현실 정치 차원에서, 불도징은, 교화해서 안될 악인들을 국가 권력이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만 죽여야 할 사람과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것이 군주의 현실적 자비라고 덧붙였다 (“但當殺可殺 刑可刑耳”). 즉, 이상의 차원에서 계율과 불교의 자비·인욕 개념에 의한 비폭력 이념을 제시한 불도징은, 현실적으로는 위정자에 의한 폭력 (형벌)이 때로는 불가피하고 필요하다고 인정하였다. 또한 실제로, 곽흑략 (郭黑略)장군의 전쟁 승부를 점쳐 준다든가, 찬탈·탐학·살륙 등으로 누명을 쓴 석호의 군사·정사를 도와 “대화상”의 칭호를 받는다든가, 국가의 후원으로 사찰을 건립하고 불교 축제를 장엄하게 연다든가 등의 국가와의 결탁 행위로 (<양고승전>, 권9, 神異上)4), 불도징은 중국·한국의 정·교 관계 전형 (典刑)의 기본적 틀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론적으로 폭력을 부인하면서도 실제로 국왕이 수행하는 전쟁에 협조까지 한 후대의 신라인 원광 (圓光)은, 사실상 불도징의 정·교 관계 패러다임을 그대로 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불도징에게 영험 (靈驗) 과시를 강요하고, 담요 (曇曜; 5세기)으로 하여금 법란 (446-452) 이후에 불교를 부흥시켜 준 황제를 부처와 같은 존재로 보게 한5) 북조의 독재적 국가와 달리, 강남의 귀족 사회에서 승려들이 군주를 예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펼 만큼 승가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런데 국가가 아니면 개별적인 귀족의 외호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은 강남의 사회도 마찬가지었고, 결국 수·당과 신라·고려의 불교 전통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강남보다 이민족 지배하의 하북 불교이었다. 당나라 건국 이후에 중국 불교의 조직 형태와 후원 세력도 매우 다양하고 (권문세족의 공덕원, 왕경의 국찰, 공인 사찰, 사립사찰, 민간 신앙 결사, 불교적 색채의 비밀 결사 등)6), 선·교, 성·상 구분에 따라서 이론적인 기반도 천차만별이었지만, 중국적인 사회 관습 (국가·가문주의의 수직적 사회 관계, 일체 사회 조직의 관료화 추세, 계통 계승 중시)과 전통 윤리 (특히 충·효 위주의 국가·가정적 의리)에 적응하여 “정통성”이 인정되는 집단 (국가, 비밀 결사 등)이 행사하는 “정당한” 폭력 (국가의 전쟁·형벌, 결사의 폭동)을 동의·합리화, 그리고 때로는 협조하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그러면서도 승려들의 권선 (勸善)으로 역대의 제왕들이 현실·상징적으로 생명 존중의 정책 (방생지 보호, 사형수 감형, 살생 금지령 등)7)을 취했음을 아울러 지적해야 한다. 여기에서 정치적 풍토를 정화·순화시키면서 불가피하거나 정당하다고 인식되는 폭력 행사를 인정해야만 하는 살생 문제에 대한 중국 승단의 태도의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승단이 “정당한” 폭력을 인정했지만, 수·당대의 미륵 화신을 사칭하는 반란 집단 (613년의 宋子賢·向海明, 開元 연간의 王懷古 등)이나 송 이후의 불교적 색채의 비밀 결사 (송대의 미륵교, 송·원·명·청대의 백련교, 19세기초의 灤州 王氏의 미륵 숭배 집단 등)와 같은 비 (非)승단 민간 불교 (내지 유사 불교) 조직을 제외하고, 정통 승려들은 어떤 형태로든 직접 참전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가령, 북위 시절의 402년의 사문 장교 (張翹)의 난 (<위서>태조기, 권2)이나, 481년의 사문 법수 (法秀)의 난 (<위서>고조기, 권7 上), 490년의 사문 사마혜어 (司馬慧御)의 난 (<위서>고조기, 권7 下), 그리고 그 당시의 최대 종교 반란인 515년의 사문 법경 (法慶)의 대승비 (大乘匪) 난 (<위서>숙종기, 권9) 등의 일련의 불교적 색채가 짙은 반란들은 일어났지만, 그 난의 원인은 종교보다는 사회·정치·민족적 모순에 있었고, 그 난들의 우두머리는 비록 정식 승려이었지만 주류 교단과 사이 먼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한 사람을 죽이면 일주보살 (一住菩薩)이 되고, 열 사람을 죽이면 십주보살 (十住菩薩)이 된다”는 살해장려형의 법경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살벌한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했을 뿐, 불교 교학과 사실상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8). 즉, 비 (非)승단 계통의 유사 불교적 비밀 결사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사문이 지도하는 소위 “종교 반란”도 결국, 정통 교단의 전쟁관 (戰爭觀), 참전 문제에 대한 입장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보기 어렵다. 정부 (중앙과 지방의 행정부)와 정통 승단의 관계에 있어서는, 승려들에게 외교적인 역할을 시키거나 (예: 당 乾符 연간에 高騈이 僧 景仙을 시켜서 南詔의 王이었던 世隆에게 중국에 귀부하도록 설득하게 했음) 전쟁 승리를 기원하게 하는 것 (예: 수 煬帝가 僧 智閏에게 고구려 원정의 성공을 빌게 헀음9)) 등의 전쟁과 관련된 임무를 의뢰할 수 있었지만, 法難 때 (예: 北周 武帝의 佛敎 彈壓, 574-577) 강제 환속된 승려들을 군대로 보내는 경우만 제외하면, 직접적인 참전을 강요한 사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624년에 천하가 완전히 평정되기도 전에 돌궐이 침입했을 때, 승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고조가 불승들을 군대로 보낸 것과 같은 극단적 참전 강요 조치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10). 또한, 예외적인 경우에는, 중앙 정부도 아닌 지방 행정관들은 외적 (外敵)이나 도적의 침입 때, 병사가 모자라면 승려로 하여금 고향 방어 임무를 수행케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1553년에 왜구가 소주 (蘇州)의 해변을 침범했을 때, 지방병이 패주한 상황에서 절도사가 소림사 (少林寺)의 천지 (天池), 천원 (天圓) 등을 설득하여 승병 (僧兵)을 모집케하여 결국 외적을 성공적으로 섬멸했다 (<節錄樵書>). 남북조 전란기 때나 명·청대의 운남 개척 때에는 승려들이 가끔 도성 축조, 도성 수비, 직접적인 참전까지도 한 일은 있었지만, 이는 중앙 정부의 정책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사찰과 해당 지방관의 공존·공생 관계의 소치이었다. 한 마디로, 중국에서의 호국 불교는, 어디까지나 의례적 행위·외교적 활동의 단계에 머무르고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직접적 참전의 단계까지 오르지 못하였다.
2. 삼국·통일 신라·고려 시대의 승려와 전쟁.
중국의 한역 불교를 받아들인 고대 한국은 “승가에 의한 호국과 국왕에 의한 불교 외호”라는 중국적인 정·교 관계의 패러다임을 수용·토착화·계승·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나 귀족에 의한 “공적인” 살생 (전쟁, 형벌, 사냥 등)에 대해서는, 고대 한국 승려들도 설법 등의 많은 방편을 동원하여 전란 시대의 잔혹한 풍토를 순화·정화하면서도 왕권·국가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까닭에 일단 불가피할 때의 최소한의 국가적 폭력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 전래 당시 (4-6세기)의 삼국은 귀족 위주의 중앙 집권적 국가의 형성 과정의 완성 단계에 있었고, 그 형성 과정에 있어서의 전쟁의 역할은 실로 거의 절대적이었다. 전쟁에 의해서만 납세·부역 인구와 영토의 획득, 통치 체제의 정비·단련, 왕권 강화를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총동원 분위기 조성 등의 목적은 달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고대 국가 형성 과정이 완성 단계에 접어든 법흥왕대 (514-540)부터 통일을 이룬 문무왕대 (661-681)까지의 全시기를 흔히 “征服 國家 時代”라고 命名할 만큼 국가 체제 완비 과정에서의 전쟁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11). 그런데 지배 체제가 어느 정도 틀이 잡히고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피정복 인구가 얻어진 뒤에, 치자·피치자간의 모순적 관계와 고유 인구와 피정복민간의 이질성 등을 지양할 수 있고, 피치자에 대한 치자의 부당한 행위·피치자의 무장 저항의 가능성 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도덕 관념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12). 전쟁을 본업으로 삼는 고대 한국의 상무적인 왕들이 불가의 불살생관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법흥왕 (529)13)과 백제의 법왕 (599)14)은 살생 금지령을 내려, 형식적으로 살생을 부정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존중의 뜻을 밝혔다. 또한 이념의 형식이었지만, 신라의 국왕은 폭력 없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전륜성왕이나 자비희사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신문왕과 그 왕비, 그리고 효소왕의 덕망을 찬양하고 그들의 명복을 비는 <황복사 금동사리함기> (706)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대개 성인은 가만히 있으면서 더러운 세상에서 뭇 중생을 길러 준다. 도덕의 극치인 무위로 염부제의 만물을 제도해 준다. 신문대왕은 보살오계 [불살생계 등. - 저자]로 누리에 응하고 십선으로 백성을 거느리니 그 다스림은 안정하고 그 공덕은 이루어졌다 (...)”15)
이론적으로나마, 살생을 금하는 보살오계로 만물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이 “왕즉보살론”은, 신라에 대한 백제·고구려 유민의 적개심을 무마하여 삼국의 백성을 동질화시켜야 하는 통일 신라 초기의 왕들에게 불가의 보편적인 인도주의가 어느 정도 절실히 필요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또한 불가의 업설에 의해서, 선행을 닦는 것이 임금으로 태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니 신라의 왕들은 과거세와 현세의 자비행을 강조함으로써 권력의 정통성을 입증하였다. 예를 들어서, <창림사 무구정탑지> (855)에서는 문성왕의 전·현세 자비행 공덕은 다음과 같이 찬양된다:
“(...) 나랏님은 여러 겁에 걸쳐서 선행을 닦아 그의 자리는 사람과 하늘 가운데서 가장 으뜸으 로 되었다. 그리고 목숨 있는 것들이 고통의 바다에서 떠올랐다 잠겼다 하고 여섯 가지 길을 돌며 거듭 태어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건져 주는 문을 만들어서 부처의 정토로 이끄는 것 은 무구정탑을 건립하는 것보다 나은 길이 없다 (...)”16)
국왕이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임을 자칭하는 것은 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념에 불과하지만, 자비행은 권위 부여의 주요 근거가 되는 사상적인 풍토에서 현실적인 정치도 어느 정도 정화·순화되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왕이 보살의 태도를 취하는 배경에, 정통성 확립과 사회적 모순 완화 등의 현실적 필요성도 있었지만, 신라 승려들의 헌신적인 설법 노력도 있었다.
왕권이 자비희사의 보살임을 자임함에 따라 귀족 사회에서도 생명 존중의 불교적인 윤리는 널리 유포되었는데, 이를 신라 사찰의 건립 연기 설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동래의 영취사의 <고기>에 실려 있던 설화에 따르면, 신문왕대에 중앙 귀족인 충원공 (忠元公)은 동래 온천에 가서 거기에서 매가 자기 새끼를 감싸 주는 꿩을 측은히 여겨 움키지 못한 것을 목격하였다. 공은 이에 감동을 받아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여 거기에서 영취사라는 절을 세우게 하였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편 영취사條). 왕도 충원공의 감동을 공감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통일 전쟁 때 미증유의 살륙과 약탈을 목격한 왕을 위시한 중앙 귀족 사회 전체가 국내의 풍토 순화를 위한 자비행 선양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리라 짐작된다. 김대성 (金大城)이 자기가 사냥해서 죽였던 곰을 꿈에서 본 뒤에 살생의 업보를 깨달아 먼저는 곰을 위하여 장수사 (長壽寺)를 짓고 그 다음에는 전·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석굴암을 지었다는 연기 설화에서는 (<삼국유사>제5권, 효선편 大成孝二世父母 神文代條), 경덕왕대의 불교 장려책이 귀족 불교에 대한 후원 뿐만 아니라 평민도 공감할 수 있는 자비행의 독려를 포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대인 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귀족 청소년의 교육 단체인 화랑도들도 자비행을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진성여왕대의 효종랑과 그의 무리가 가난한 효녀와 그 어머니를 먹여 주었다는 내용의 <삼국유사>제5권, 효선편 빈녀양모條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불교의 생명존중론이 신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신라 사회에 생명 존중의 모범을 보여 준 것은 승가이었다. 신라 고승의 출가·득도 동기에 관한 설화를 보면, 인간의 사냥 등의 살생 행위에 의해서 축생들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속세를 등지게 됐다는 이야기들은 매우 많다. 예를 들어서, <황룡사 구층탑 찰주본기> (872)에 의하면, 고승 자장 (慈藏)이 젊었을 때 살생을 좋아하여 한 번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니 이에 감동되어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당고승전>의 자장傳과 상반되어 사실로 보이지 않은데, 살생의 악덕에 대한 의식과 출가를 연결시키는 일종의 고승談 전형 (典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자장의 오대산 신앙을 이어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신효거사 (信孝居士)에 대해서도 비슷한 내용의 생명존중관을 내포하는 설화가 있다. 즉, 어머니를 봉양할 고기를 얻으러 사냥에 나선 그는, 학 다섯 마리를 활로 쏘니 신기한 깃 한 조각을 얻었다. 그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면 모두 다 짐승으로 보이고, 다만 오대산 근처의 사람들만 인간으로 보였다 (<삼국유사>권3, 탑상편 臺山月精寺五類聖衆條). 여기에서 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악업을 짓는 중생이 내생에 축생도로 떨어 질 수 있다는 인과응보說 形態의 불교의 보편적인 도덕관은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신효가 쏜 다섯 마리의 학은 사실상 오류성중 (五類聖衆)으로 밝혀졌는데, 여기에서 일체의 유정 (有情)의 불성 (佛性)을 인정해 주는 화엄종의 성기 (性起) 사상이 표출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살생에 대한 거부감에 의한 출가·득도의 설화는 자장 계통에 국한되지 않는다. 밀교의 혜통도 사냥때 자기가 죽인 수달이 소생되어 새끼들을 감싸 준다는 기적에 감동되어 출가했다고 하고 (<삼국사기>제5권, 신주편 혜통항룡條), 유식의 진표도 자신이 사냥때 꿰매어 고통을 준 개구리의 울음소리에 참회하여 승려가 됐다고 한다 (<송고승전>권14, 명률편 진표傳)17). 살생에 대한 거부 반응, 일체 생명에 대한 외경이 신라 여러 종파의 승려의 공론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애장왕대의 승려 정수 (正秀)가 자기 옷을 벗어 얼어서 죽어 가는 거지 여자의 몸을 덮어 살려 준 뒤에 하늘에서 “정수를 마땅히 왕사 (王師)로 시켜야 한다”는 공중의 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삼국유사>제5권, 감통편 정수사구빙녀條). 왕이 이에 따라 그를 국사 (國師)로 봉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왕도 들어야 할 “하늘의 목소리”는 불승의 자비행에 대한 전체 사회의 긍정적인 여론을 상징하는 것 같다. 생명 손실의 방지는 승가의 본분이고, 일체 생명을 아껴야 진정한 승려가 된다는 개념은 당대 사회의 통론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승려 혜숙 (惠宿)이 “살생유택”의 계명을 저버린 한 국선의 살생 행위를 규탄하여 자기 살까지 베어 준 것은 사회의 긍정적인 반응과 국선 자신의 부끄러움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삼국유사>제4권, 의해편 이혜동진條).
그런데 현실적으로 중생들을 자비롭게 제도하기 위해서 신라와 같은 중앙 집권적 국가에서는 국가와의 합의·타협은 전제 조건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고, 국가와의 타협을 하려면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에서의 참가의 정당성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살생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신라 승려들은 논리적인 당착을 범하면서도 바로 그 다음 단락에서 국왕을 위한 살생을 인정 해준다. 예를 들면, 7-8세기의 의적 (義寂)은 왕의 사신이 되어 전쟁터에 나가서 많은 살생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하는 <범망경>의 제11경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무릇, 나라를 위해서 사명을 띠면 꼭 승부를 기약해야 되고 거짓말로 속이고 꾀를 써서 전쟁 을 하게 함으로, 안으로는 평등과 자비에 어긋나고 밖으로는 물건과 생명을 손상시키니 때문에 금제하여 끊게 한다. (...)
군중에 들어가 왕래하지 말라는 것은, 전장은 시끄럽고 복잡한 곳이라 도인으로서는 밟을 데 가 아니며, 반드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도인이든 속인이든 다 금지한다.
만일 재가 보살이라면 몸은 무관이 되고 이름은 용감한 위세를 떨치는 것이므로 꼭 막을 수 는 없고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만 몸의 들어감을 허락하되, 살해만을 하지 말아야 하리니, 마치 석가 종족과 유리왕 (琉璃王)이 싸우는 때와 같다. (...)”18) (<보살계본소>권下 本).
여기에서 보이는 의적의 입장은, 일단 무관이라는 “공적인 폭력의 직업적 行使者”의 존재를 기성 사실로 인정하되 무관의 살생 행위의 범위를 되도록 최소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중요한 일만 아니면 군영에 출입도 하지 말라, 참전하되 살해하지 말라 등의 요구를 재가 보살에게 한다. 그런데 참전하게 된 이상 살생 해위를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임을 의적 자신도 뻔히 알았을 것이다. 그가 언급한 석가족과 코살라국 비두닷바 (비유리)왕의 전쟁이 대규모의 살륙이었음을 당대인들은 숙지하고 있었다. 결국, 그가 “살생 없는 참전”을 주장한 것은 살생을 절대적으로 금지시키는 불교의 윤리와, 살생을 절실히 요구하는 왕국 체제를 절충시키려는 실패한 시도이었다. 마찬가지로, 살생 도구의 보관을 금지하는 <범망경> 제10경계에 대해서, 의적은 “왕 등의 귀인들은 외환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평민은 호법하기 위해서 무기를 소지해도 되는데 살생만 삼가야 한다”는19) 해석을 하였다. 살생 도구를 일단 갖춘 국가간에 무력 충돌이 일오나지 않을 가능성이 많지 않음을 통일 전쟁을 목격한 의적이야 말로 잘 알았겠지만, 자비의 불법과 무력의 왕법을 조화시킬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범망경>제1중계인 불살생계를 설명하면서 의적은 <유가사지론>을 인용,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살생은 허락되어 있다고 단정했다.
근본적으로 태현의 입장도 의적과 같다. 그는 “신명 (身命)과 바꿀 만한 보배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20) <대지도론>의 주장에 근거하여, <유가사지론>에서 말하는 <중생을 위해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악인 (惡人)의 목숨을 끊는다면 악업 (惡業)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큰 공덕이 생긴다”는21) 논리에 대해서, “업도 (業道)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역시 범죄가 성립된다”고22) 단정할 정도로 생명 존중 사상이 투철하다 (<범망경고적기>, 제3권, 快意殺生戒). 그런데, 이러한 태현도 <범방경>제10계 (畜殺生具戒)를 설명함에 있어서 “정법 (正法)을 수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비축해도 罪가 되는 바 없다”고23) 주장하였다. 마찬가지로, 그 다음 계인 제11계 (通國使命戒)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태현은 “국가의 사신이 되어서 살생하게 한다면 안되지만 싸움을 조절하여 중지시키기 위해서 나라의 일을 맡는 것은 罪가 아니다”라고24) 공언하였다 (같은 책, 제4권). 호국과 호법을 동일시하고, 통일 전쟁을 “백제, 고구려 침략의 중지를 위한 爲民 전쟁”으로 선전하였던 신라에서, 태현으로서 “정법 수호와 전쟁 중지를 위하여” 무기를 들 것을 허락해 준 것은 과거의 통일 전쟁에 대한 합리화이자 왕법과의 “이론적인” 타협 추구이었다. 사실, 이러한 타협의 골격은 일찍이 국왕의 “乞師表” 작성 명령에 대한 圓光의 유명한 대답에서 이미 보인다. 원광은 남을 살해하게 만드는 일종의 “사신”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 “사문의 行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도 “신라의 국토에서 사는 이상 국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전례를 일찍이 정해 놓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4, 진평왕 30년條).
당나라의 사정도 그러하였듯이, 신라의 중앙 정부는 승려의 입군 (入軍), 참전을 보통 강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662년에 김유신을 따라 고구려 원정에 從軍한 것으로 보이는 원효가 소정방 (蘇定方)의 암호 서신을 풀이하는 데 도움을 준 것처럼 (<삼국유사>권1, 기이편 제1 태종춘추공조) , 화랑도의 승려 낭도를 위시한 일부의 재경 승려들은 종군하면서 非전투적 임무 (각종의 자문 등)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협의의 “참전”과 상당히 다르다. 도옥 (道玉; 속명: 驟徒)처럼 환속하여 자청 입군할 수 있었지만, 도옥은 자신이 “한 가지 善도 취하지 못하였다” 라고 공언함으로써 승려로서의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였다. “보국살신 (報國殺身)은 道의 用”이라는 도옥의 논리는 신라의 “호국·호법 일치론”의 뜻을 매우 잘 압축시켜 보여 준 것이지만, 도옥의 환속·입군을 승려 참전의 사례로 볼 수 없다. 또한 <고려사>제113권 崔瑩傳에서 “당 태종의 침략을 물리친 3만의 승군”이 언급되는데, 연개소문의 숭도억불적 (崇道抑佛的) 종교 정책하에서도 그러한 것이 과연 가능하였는가에 대한 의심이 강하고, 이 언급은 역시 승군이 엄연히 존재하는 고려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같은 통일 전쟁기에 백제 부흥 운동에서의 승려 도침 (道琛)의 군사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舊唐書>권199 上, 열전 백제국전; <新唐書>권220, 열전 백제전), 이러한 활동은 망국이라는 극단적인 상황만 아니었으면 불가능하였으리라 본다. 한마디로, 신라를 위시한 삼국의 중앙 정부에 의한 승군 징발, 승려 참전은 정상적인 경우에는 불가능하였으리라 볼 수 있다. 비록, 국가 권력과 타협한 승가의 이론가들은 재가보살들에게 ”호법을 위한 호국 전쟁 참여“를 허락했지만, 출가보살은 어디까지나 ”불살생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전투 참여型의 참전 이외에 사서 (史書)에서 간혹 첩보 활동에서의 승려 이용의 사례를 볼 수 있지만25), 그것도 정상적인 경우로 보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서, 고구려 승려 도림 (道琳)이 장수왕의 간첩으로 백제에 들어와 개로왕을 상대로 공작을 펴서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승리를 가능케 하였다는 설화성이 심한 <삼국사기>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1년條의 자료가 있는데, 이 도림이 신라의 도옥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道를 알지 못하였다“고 공언함으로써 승려로서의 실패를 먼저 분명히 하였다. 승단에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는 승려면 국가의 전쟁·첩보 등과 사이 멀었으리라 본다. 어떤 논자들이, 중국 유학 중인 義湘이 김인문을 통해서 당나라 장군 薛邦이 신라를 칠 사실을 알고 671년에 일부러 귀국하여 이를 왕에게 일러바쳤다는 것을 (<삼국유사>제2권, 기이편 제2 문무왕법민條) 화엄종을 비롯한 신라 승가가 군사·첩보의 분야에서도 국가와 가깝게 협조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여기에서 당군 작전 계획의 정탐은 義湘의 고의적인 행위가 분명히 아니었다. 義湘에게 당군 계획을 말해 준 사람은 김인문이었고 (<삼국유사>권4 의해편 의상전교조에 의하면, 金欽純이었을 가능성도 있음), 義湘에게 급거 귀국을 종용한 것도 김인문 (내지 金欽純)이 아닌가 싶다. 670-671년간에 신라의 대당 (對唐) 항쟁이 본격화되어 義湘의 입장도 곤란해져 그가 일찍이 귀국하게 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상황의 논리지 義湘의 의도적인 밀탐 활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삼국의 승려가 국가의 첩보 활동이나 전쟁 수행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매우 드문 예외이었지만, 671년에 밀교승 명랑이 문두루법을 통해서 당선 (唐船)을 침몰시켰다는 설화 (<삼국유사>권2 기이편 제2 문무왕법민조)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의 호국적인 기도는 분명히 승려의 담당 분야이었다. 신라 호국 불교의 진정한 의미는 “正法을 외호하는 왕에게 언제든지 불·보살의 陰助가 있다”는 개념을 전제로 하는 위국 (爲國)적 의례적 활동에서 찾아야 되지 않을까 한다.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왕권은 승려들의 불살생계를 보통 존중했었지만, 통일 신라 하대에 승려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왔다. 진성여왕대 (887-897)에 중앙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지방 호족과 초적 (草賊; 농민 반란군)의 발호로 국가 질서가 유명무실해지자 토지·노비 소유자인 巨刹들은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국가의 보호를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된 큰 사찰들은 三寶 淨財를 지키기 위해서 이제 일종의 防衛隊들을 편성해야만 하였는데, 이러한 사찰 방위대에 관한 자료로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은 895년의 해인사 묘길상탑지 (海印寺 妙吉祥塔誌)다. 이 자료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法輪의 戒導로서 크게 봐서 으뜸으로 삼는 것이 護國” (“...輪之戒道也 大較以護國爲先”)이라고 표현되는 “호국·호법 일치론”이다26). 그리고 해인사 별대덕 僧訓이 독자적으로 모집한 방위대에 대해서, “魔軍”이라고 표현되는 승가를 괴롭혔던 반란도와 싸웠다는 사실과, 골고루 승·속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僧軍”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 부대가 사찰 방위대이었음을 말해 줄 뿐이고, 실제로 전몰한 병사 이름 중에서 법명이 아닌 속인 이름으로 보이는 명칭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승군” (사찰 방위대)의 지도자들은 승려이었지만, 그 병사들 중에서 사찰과 의존적인 관계에 있었던 부근 농민이나 사찰 토지를 경작하는 속인들이 많이 들어 있었으리라 본다. 사찰이라는 조직체가 불가피하게 살생의 상쟁에 휘말렸지만, 승려가 되도록 살생을 멀리 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개념은 그대로 존재했을 것이다.
신라 하대의 사찰 방위대 문제와 관련된 또 하나의 자료는, 신라말에 해인사의 승통 희랑 (希朗)이 후백제에 지는 왕건의 軍을 도우려고 戰場에 “신병” (神兵)을 보냈다는 <伽倻山海印寺古蹟> (<朝鮮寺刹史料> 卷上)의 설화다. 이 자료의 신빙성에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만약에 역사적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하는 설화라고 가정한다면, 희랑이 실제로 왕건에게 사찰 방위대의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가정이 맞는 경우에도 현존하는 자료를 가지고 이 사찰 방위대 구성원 중에서 승려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라의 호국·귀족 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고려 시대에는, 불교 교단에 대한 국가 통제는 개인 승려의 차원을 완전히 벗어나 태조 - 광종 시기에 완비된 승록사 (僧錄司)·僧科·僧階 등의 국가 제도를 중심으로 크게 체계화·가중되었다. 승려들은 형법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엄격하게 국법·국가 관료 체제 아래 있었다. 그리고 승려들이 무조건 담당해야 할 消災·祈雨·祝壽·忌日追福 道場 등의 소위 “호국적 의례”의 부담은 커져 신라불교도 지녔던 국가적·미신적 면들이 더욱더 심화되었다27). 그리고 고려 국가의 체질상으로 중앙 관료적 면들과 귀족적 면들이 혼합된 관계로, 각종의 귀족 세력의 후원을 받는 여러 종단들은 귀족 파벌간의 투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특히 고려말에 露呈된 사찰의 농지 겸병과 고리대업, 교단과 권문세족의 노골적 야합, 순수 수행의 부재 등의 각종의 병폐들은, 바로 고려 불교의 이러한 근본적 성격의 문제에 기인되었다. 신라 시대에 비해서도 국가·귀족과 더욱더 밀착해진 고려의 교단은, 지배자에 의한 제도적 폭력·살생 (전쟁, 형벌)에 대해서는 보다 더 “관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승려의 본분이 중생을 자비로 구한다는 것은 잊혀지지 않았다. 고려 국초를 예로 들자면, 승려를 근본적으로 왕화 (王化)에 도움을 주어 “나라로 하여금 仁으로 돌아가게 하고 (...), 뭇 사람으로 하여금 善으로 들어가게 하는”28) “국가의 자비의 스승”으로 간주하였다. 왕건과 같은 崇佛의 군주가 “불법을 지키기 위하여 담과 구덩이가 될 것이고, 절을 지키기 위하여 견고한 城과 연못이 되겠다”29)고 약속할 만큼 불교의 외호를 王政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이상, 승려도 왕자의 보필자가 되어 그에게 자비를 설파함으로써 그의 정치를 순화시킬 수 있었다 (聖住山派의 玄暉의 碑文: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943年). 왕건이 많은 禪師들에게 “백성을 어떻게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자문을 구한 사실로30) 미루어 봐서, 그는 신생 국가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 필요한 유교적인 爲民 정책에 불교적 자비 개념을 加味시키려고 한 것 같다 (桐裏山派의 允多의 碑文: “大安寺廣慈大師碑”, 950年). 또한, 다른 자료로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迦智山派의 승려로서 曹洞宗을 수입한 逈微 (864-917)는 그의 비문에 의하면 후고구려의 弓裔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병정으로 하여금 살생의 죄를 짓게 하지 말라”31) 등으로 諫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殉敎라고 부를 만한 죽임을 당하였다 (“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946年). 이와 같이 불살생의 근본 정신은 잊혀지지 않았지만, “정법 외호자”로 간주되는 군주의 “정당한” 살생에 대한 승가의 태도가 상당히 달랐다는 것을 왕건과 須彌山派의 이엄 (利嚴; 870-936)의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느껴 볼 수 있다:
왕건: “(...) 늘 두 흉악한 무리가 있어 비록 好生之心이 간절하나 점차로 서로 죽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과인이 일찍이 부처님의 경계함을 배웠으므로 가만히 자애로운 마음을 내고자 하나, 장난질하는 흉악한 도적의 참담함 (?)을 남겨 몸이 위태로워지는 禍를 부를까 두렵습니다 (...)”32)
이엄: “(...) 帝王과 匹夫는 닦는 바가 서로 다르지만, 비록 군대를 움직이더라도 또한 백성을 어여삐 여겨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은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자를 죽이지 않는 것이니, 어찌 죄가 있는 무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함이 (중생을) 널리 구제하는 것입니다”33) (“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937年)
여기에서 보이는 이엄의 殺生觀은 불교의 자비 정신과 親국가적 타협적 태도의 혼합인 듯하다. 이엄의 이 대답을 들은 왕건이 형벌을 더러 감면해 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죄 있는 무리”에 대한 살륙을 불교가 허용한다는 것은 살생 문제에 있어서의 승가의 커다란 양보가 아닐 수 없었다. “죄 있는 무리”와 “무고한 백성”을 분간하는 것이 국가의 몫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대답이 국가의 “합법적 폭력 체제” (전쟁, 형벌)에 대한 전면적인 합리화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덧붙여서 말해야 할 것은, 廣學·大緣 두 大德이 비법을 행하여 해적을 퇴치하였다는 자료 (<삼국유사>제5권, 神呪篇 명랑신인條)에서 보이듯이, 고려는 국초부터 신라의 전례대로 법력이 크다고 인정되는 승려들에게 전승 (戰勝) 기도를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문벌 귀족과 밀착하게 결부된 승가가 국가의 “정당”한 폭력 (전쟁, 형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국가적 초비상의 경우에는 국가에 의한 僧兵의 모집·참전은 가능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자료로서 알 수 있는 최초의 승군 징발 사례는 1010년에 고려의 국운을 심하게 위협하는 契丹의 재침 시기의 일이었다. 遼軍의 포위를 당한 西京에서 장군 지채문 (智蔡文)이 승려 법언 (法言)과 함께 9천 명의 병사를 이끌어 적군을 요격하여 3 천 명을 죽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법언이 전사하였는데, 다음 해에 왕은 그의 망생순국 (忘生殉國)을 가상히 여겨 수좌 (首座)의 관직을 추증하였다 (<고려사>세가4 현종2년7월34);열전7 지채문條35)). 법계가 없었던 법언에게 수좌 (首座; 교종의 두 번째 법계; 수좌·승통들 중에서 국사·왕사가 선발되었음)를 추증한 것으로 봐서, 승려의 戰死 殉國은 그 당시로서 매우 범상치 않은 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지채문·법언이 이끌었던 9천 명의 병사 중에서 승려의 비중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법계도 없는 일개의 승려가 王의 近臣과 함께 이 군대를 영솔한 것으로 봐서는, 이 9천 명 중에서 僧軍들은 상당수에 이르렀다. 그들이 적군 3천 명을 베는 전과를 올리는 배경에, 모종의 사전의 훈련과 조직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추측컨대, 고려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준 契丹의 제1차 침입 때부터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에 직면되는 서북의 사찰들은 僧兵을 어느 정도 길렀을 것이다. 1010년 직후에는 契丹 再侵의 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 실제로 서북 뿐만 아니라 중부의 많은 사찰들도 적군 약탈 저지, 아군 원조 등의 목적으로 독자적인 승병 양성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때 강조에 의한 穆宗 시해 사건 (1009), 최질의 반란 (1014) 등 일시적으로 모반 사건이 속출되어 사찰들은 내란 발생과 이에 따른 반군 약탈 등을 염려할 근거도 있었다. 그 당시 나말여초 시대처럼 사찰 방위대 형식으로 조직된 승병의 위엄을, 북산 (北山)의 승병이 서울로 내려온다는 뜬소문이 나돌자 서울에서 놀라 계엄령을 선포하였다는 <고려사>의 기사에서 실감할 수 있다 (세가4, 현종5년11월)36).
1010년의 승병의 첫 동원은 현지 사령관인 지채문에 의한 일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국가에 의한 정규적인 승병 조직은 편성된다. 1104년에 윤관 (尹瓘)의 여진 정벌 계획과 관련하여, 별무반 (別武班)이라는 특수 騎·步兵 부대가 조직되어 그 일익 (一翼)으로 수원 (隨院) 僧徒로 구성된 항마군 (降魔軍)도 편성되었다. 국초부터 국가에 비상 상태가 있었을 때 이들 수원승도들이 동원되어 여러 부대에 분속 (分屬)되었다는 <고려사> (지35, 병1, 병제, 숙종9년12월條)37)의 자료로 미루어 봐서는, 아마도 나말여초부터 사찰에서 잔재하는 사찰 별로의 승병들이 고려 전기 (前期) 내내 국가에 의해서 비정기적으로 이용되었다가 결국 윤관에 의해서 하나의 특수 부대로 체계화되었으리라 보여진다. 즉, 9세기말 혼란기부터 방위대로서 존재해왔던 소규모의 여러 승군들이 윤관에 의해서 단순히 통합·상비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1104년의 항마군 창설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면 안된다. 10-11세기의 현지 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승군의 산발적인 거병·참전 대신에 국가에 의한 승군의 체계적인 이용의 시대가 온다. “호국 도량” 거행과 마찬가지로 승병 제공은 국가에 대한 승가의 하나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이는 승려들에게 “적어도 출가보살이 살생을 삼가야 한다”는 전통적인 승가 원칙에 “일체의 신민이 병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의 원칙이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僧兵 제도의 완비에 따라서 승병 참전의 범위도 넓어졌다. 예를 들어서, 1135년에 김부식의 군대가 妙淸의 亂을 진압했을 때, 승병의 참여는 매우 활발하였다. 평양을 포위했을 때 550명의 승군들이 투입되어 토성을 쌓아 올리는 등 승려들은 非전투적인 과제도 수행했지만38), 갑옷을 입은 승려 관선 (冠宣)이 반란군 數十명을 도끼로 쳐죽임으로써 관군의 사기를 고무했다든가39), 승려 상숭 (尙崇)이 도끼로 십여명을 죽여 관군의 逆戰을 이끌었다든가40) 승려들의 직접적인 살생 행위도 당연시되었다 (<고려사>열전11, 김부식傳). 그런데 반란 진압 과정에서의 출가자에 의한 살생 행위는 “정법 수호론”으로 어느 정도 합리화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귀족 파벌간의 투쟁에의 무장 승려의 개입은 이미 “호국·호법”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즉, 1126년에 이자겸 (李資謙)의 아들인 玄化寺 首座 義莊이 아버지의 黨派에 대한 숙청이 벌어지자 현화사 승군 300명을 영솔하여 서울로 행진하였다는 것은 (<고려사>권 127, 이자겸傳; “金德謙墓地銘”), 승단의 政治化의 정도와 불살생·자비에 대한 “不感症”을 잘 반영해 준다.
그런데 승단의 무장·政爭 개입·참전은 절정에 이른 시기는 무신집권기·대몽 (對蒙)항쟁기이었다. 국초부터 문벌 귀족과 밀접하기 연결된 교종 사찰들은 무신들의 국정 장악·지방민 수취 등에 대한 극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여 오래지 않아 적극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우선, 1174년에 歸法寺를 위시한 重光寺·弘護寺 등 巨刹들의 승군은 정권을 專橫한 李義方을 제거하려다 이의방의 세력과 대대적인 무력 충돌을 일으켜 양쪽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고려사절요>권12, 명종4년 정월條). 이 거사를 일으킨 승군은 격퇴되었지만, 같은 해에 鄭筠 (정중부의 아들)과 직결된 무장 승려들은 (僧 宗旵 等) 왕의 묵시적인 동의下에서 이의방을 죽이는 데에 드디어 성공하였다 (<고려사절요>권12, 명종4년12월條). 그 후에 승려들은 공주 명학소 (鳴鶴所)의 亡伊 (1176-1177), 전주의 旗頭 竹同 (1182) 등의 반란의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고 (<고려사>세가19 명종6년3월條; 세가20 명종12년4월條), 崔忠獻의 제거를 모의하다가 실패를 당하기도 하는 (<고려사>권129 열전 최충헌傳) 등 고려의 정치·군사 생활의 주요 요소를 이룬다. 특히 몽고군에게 쫓겨 오는 契丹의 침입 (1215-1219)으로 시작되는 대몽항쟁기에는, 僧兵은 자기 사찰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관군과 합세하여 침략자를 상대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은 매우 흔했다. 승려 출신 김윤후 (金允侯)가 몽고의 명장 (名將) Salitai (撤禮塔)를 射殺하여 (1232), 그 뒤에 군인으로서 누차에 걸쳐서 혁혁한 공로를 쌓은 것은 그 당시 고려 승가의 군사적 능력의 증거다 (<고려사>열전16, 김윤후條). 몽고지배기가 끝난 뒤에도, 1359년의 紅賊 내침때나 (<고려사>권107, 權適傳), 1374-1377년간의 왜구 (倭寇)의 극심한 내침 (<고려사>권82 兵志 辛禑 2년7월條 등), 1388년의 崔瑩의 명나라 정벌 (<고려사>권113 崔瑩傳) 등에서 대규모 (수천 명에 달함)의 승군이 동원되어 국방에 투입되곤 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년의 승군 동원 체제의 중요한 특성은, 이는 그전과 같은 산발적인 기병 (起兵)·참전에 의한 것은 아니었고, 국가에 의한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징발 (徵發)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사찰들은 일정한 규모의 승병 뿐만 아니라 일정한 匹數의 軍馬, 軍艦 製造하기 위한 일정한 규모의 인력 등을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등 잡역을 짊어지게 되었고, 이 징발령을 거역할 경우에는 군법에 의한 처벌에 처하곤 하였다. 이와 같이 승단은 국가적 자원 동원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이상, 불살생계나 생명 존중과 같은 국가의 가치와 상반되는 불교의 사상적인 특성은 당국자들에게 고려될 리가 만무하였다. 이제 불승의 참전은 “호법·호국 정신”에 의한 임의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국가 관료 체제의 하나의 관행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 승군의 인적 구성 문제를 간단하게 살펴 보겠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말의 해인사 사찰 방위대는 비록 승려들의 영도를 받았지만, 많은 속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속인들이 사찰의 토지를 경작하는 등 사찰과 모종의 경제적 관계를 맺은 주민 (내지 예속 농민)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고려조의 경우에는, 국초부터 윤관이 별무반을 편성했던 시기까지 승병 징발의 대상자는 주로 소위 隨院僧徒이었다고 <고려사>에서 명시되어 있다 (志35 병제 숙종9년12월條). 帶妻인 그들은 準승려로서의 면모도 완전히 없지 않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해당 사원에 예속되어 사원과 국가에 役을 납부해야 하는 寺院田의 佃戶이었다. 유사시에 軍役을 짊어져야 하는 그들의 신분적 위치는 郡縣의 일반民과 대동소이하였다고 보여진다41). 1193년에 일어난 雲門의 亂의 주동자로 알려져 있는 金沙彌와 같은 경우에는, 바로 이러한 수원승도 출신의 지방 세력가로 이해되기도 한다42). <고려도경> (권18)에서 “재가화상” (在家和尙)이라고 불리는 수원승도에 대한 기술은 있는데, 이에 의하면 그들은 관청의 賦役 (기물 운반, 도로 공사, 관개수리 공사 등)과 국가의 병역을 납부해야 하였다. 서긍 (徐兢)은 契丹에 대한 高麗의 勝利가 바로 이 “재가화상”의 승병의 힘에 의한 것이라 듣기도 하였다43). 승병의 상당부분을 이룬 것은 이들 수원승도이었지만, 승군의 영솔권을 처음부터 정격 승려들은 쥐고 있었고, 고려 후기에 접어들수록 승군에서의 정격 승려의 참여가 계속 넓어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승병의 상당수를 사찰의 예속농민들이 이루었다는 사실은, 사찰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 주고, 예속민에 대한 사찰의 수취를 국가적 수취 체제에 편입시켜 준 국가의 역할을 부각시켜 준다. 그 당시 지배층의 意識으로는, 국가로부터 예속민에 대한 수취권을 保障받은 巨刹들이 유사시에 국가에 그 예속민으로 구성된 승병을 제공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관계이었다.
13-14세기의 고려 승려들은 전쟁·형벌에 대한 불교적인 입장을 어떻게 정리했는가? 이를 논하기 앞서, 무신집권기에 수선사 (修禪社)와 최씨정권의 밀착, 13세기 후반의 백련사 (白蓮社)와 왕권·趙仁規 (1227-1308)세력의 밀접한 관계 등에서 명확히 볼 수 있는 政權에 대한 敎權의 隸屬의 상황에서, 佛家의 이론가들이 완전 비폭력의 원리원칙적인 입장을 당연히 취할 수 없음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의 외호를 받는 불승들이 국가의 제도화·합법화된 폭력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 해도 일부 고승의 전쟁·형벌觀은 불교의 범위를 상당히 많이 벗어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한 가지 예로, 1230년대부터 최씨정권의 많은 후원을 받고, 당대의 문인 관료들과 폭넓은 교류 관계를 가졌던 상주 지역 토호이자 유학자 출신의 천책 (天頙; 1206-?)의 의견을 들 수 있다. 한편으로는, 국자감 동문이었던 민호 (閔昊)에게 보낸 長文의 편지에서 천책은 불교 원리에 입각한 戰爭 對處觀을 피력하기도 한다:
“또한 유리왕은 술에 취한 코끼리를 놓아 석종 (釋種) 500 명을 밟아 죽이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 때 대중들은 다 근심과 번뇌에 쌓여 있었되 도피할 곳은 없었다. 오직 우리 세존께서 밝은 얼굴로 환한 빛을 비치며 미소를 지으셔, 다문 (多聞)의 아난이 성과 (聖果)를 증하셨다. 오히려 술에 취한 코끼리도 계도되었거늘, 범부 인간들이야 어름이 녹이듯이 풀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목련이 難을 免하려고 쇠로 성곽을 만들기를 청하였는데, 세존께서 성곽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다. 모든 것이 업보 (業報)에서 기인되어 부처와 무관하고 중생과만 관계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이와 같이 안다면, 많은 의심과 힐난은 명확하게 판단될 수 있다”44) (<湖山錄>제4권, “答芸臺亞監閔昊書”).
위에서 말한 것은, 승가에 戰亂이 닥쳐오면, 이를 무기가 아닌 불승의 법력 (法力, 즉 道德力, 도덕적 威信)으로 鎭靜시켜야 한다는 원시 불교의 가르침이다. 고려의 거의 전국토가 몽고군에 짓밟히고, 조정과 주민이 불력 (佛力)에 의거하여 이를 퇴치하려고 하였을 그 당시에, 부처가 남의 폭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였다는 전승을 다시 되새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천책은 불교의 이름으로 적군에 대한 적극적인 살상 행위를 고무하기도 하였다. 이연년 (李延年)의 난을 (1237) 무력으로 평정한 김경손 (金慶孫; ?-1251)의 편지에 천책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금 반란도들이 다 남김없이 소진 (掃盡)되어 남국 (南國)은 세청 (洗淸)되었다. 천자 (天子)로 하여금 남쪽을 돌아봐야 할 근심을 없앴고, 국가의 적년 (積年)의 치욕을 씻었다. 나 (노승)도 국가를 위해서 마땅히 축하해야 할 일이다. (...)
또한 선덕 (先德)들이 말하기를 공사 (公事)는 불사 (佛事)가 아님이 없고, 군문 (軍門)은 바로 법문 (法門)이다. 활을 잡고 활시위를 당기면 각각 신통을 나타내는 것이며, 칼로 춤추고 창을 휘두르면 몸과 손이 하나로 움직인다. 즉, 그들의 쪽이 이미 오역 (五逆: 殺父, 殺母, 殺阿羅漢, 破和合僧, 出佛身血)의 마음을 품고 일조 (一朝)에 여러 주 (州)의 인물을 석권 (席卷)하여 금성 (錦城; 현재의 전라도 나주)에 처들어 왔다. [그들을 토벌하는 각하는] 차라리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 그 죄를 오히려 받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살아서] 이렇게 한없는 악업 (惡業)을 짓게 하는 것보다 낫다. 이는 위대한 보살은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은 큰 사업이다.
보지 않으셨습니까? <유가론>에서 말하기를 만약 보살이 보살의 정계 (淨戒)·율의 (律儀)에 안주 (安住)하여 여러 중생이 다른 많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보면 이에 생각을 일으키기를 ‘내가 만일 저 [악한] 중생의 목숨을 끊는다면 물론 지옥으로 떨어지겠지만 그들로 하여금 무간업 (無間業)을 짓게 놓아 둘 수 없다’. 보살이 이러한 생각을 일으켜 그 [악한 중생의] 목숨을 끊는다면 이는 무죄 (無罪)이고 오히려 복 (福)을 받는다. 이를 “보살의 무염위범 (無染違犯)이라고 한다.
지금 상국 (相國)께서 지의 (至義)로 지불의 (至不義)를 벌 (罰)하셨고, 지인 (至仁)으로 지불인 (至不仁)을 벌 (罰)하셨으니 나라와 임금께 충성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이는 대보살 (大菩薩)의 마음을 쓰는 것과는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 하물며 지금 엄숙하게 재 (齋)를 올릴 도구를 갖추시고 특별히 아름다운 자리를 마련하시고 칼날에 맞아 죽은 가혼 (驚魂)을 안양 (安養)으로 인도하시니 이는 재가 보살 (在家菩薩)의 대비 (大悲)를 보이시는 것이다. (...)”45) (<호산록>제4권, “答指揮使金公景孫書”).
위의 편지에서 보이다시피 천책은 불법 (佛法)과 왕법 (王法)을 완전히 일치시켜 왕권의 정치적 반대자를 “오역의 무리”로 몰아 “그들이 더 이상 악업을 짓지 못하게” 그들을 죽이는 것을 “보살의 자비행”으로 봤다. 그 당시로서 정권의 입장에서 전라남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할 필요는 물론 있었지만, 불교도로서 이를 일종의 “성전” (聖戰)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이미 불법 (佛法)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었다. 불문 (佛門)과 군문 (軍門), 즉 사찰과 군대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몽고 침략 상황에서의 사찰의 군사화 (軍事化) 정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영가 천도재를 지냄으로써 살생의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천책의 소박한 신념은 불교의 주술적 (呪術的) 이해가 승병의 살생 행위를 합리화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 준다.
한 마디로, 삼국·통일신라·고려 승가는 불교의 불살생 정신·생명 존중 이념을 중시하여 이를 對사회적으로 널리 유포시키는 한편, 현실적으로 국가의 공인·외호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제도적·합법적 폭력 (전쟁, 형벌)에 대하여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여 “호법·호국 일치론”을 들어 이를 합리화하였다. 나말의 혼란 속에서 거찰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와 노비 등의 경제적인 부 (富)를 보호할 필요성이 있어서, 중앙 정부와 무관하게 사찰들이 자체적으로 예속 농민과 승려와 구성된 방위대들을 편성하였다. 그 방위대들의 활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은 “정법 수호”, “진호국가론” 등이었지만, 실제적으로 해당 지역의 반란도의 진압은 주요 목적이었을 것이다. 나말 혼란기에 처음으로 사찰 단위로 편성된 승병 (사찰 방위대)을 신라 불교 교단의 對사회적인 활동의 주요 부분으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는 신라 불교의 호국적인 면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신라 불교의 호국성은 주로 문두루 법회, 백고좌회 등과 같은 의례적 활동을 통해서 나타났고, 그 당시 교단의 호국 이념은 승려의 직접적인 참전까지를 요구하지 않은 것 같다. 신라 교단사상의 의례적인 호국과, 혼란기 속의 사찰 수위 방편으로서의 승병 편성은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
고려 시대에 교단에 대한 국가의 통제 능력과 개별적 사찰·종단과 문벌 귀족의 밀착의 정도는 그 전 시대에 비해서 훨씬 향상되었다. 이와 함께 사찰 소유 토지의 면적과 예속 농민 (수원승도)의 수로 대표되는 종단들의 경제적 부 (富)도 크게 증강되고, 예속 농민에 대한 사찰의 수취 체제는 국가로부터 확고한 보장을 받기도 한다. 국가 경제·사회의 주요 요소가 된 사찰들이 국가의 주요 부담인 국방의 의무도 같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그 당시 국가 지도층의 당연한 발상이었다. 결국, 나말 시대부터 있어 왔던 사찰 방위대들은 처음으로 국가에 의해서 “항마군”으로 집결·제도화된다 (1104). 그리고 무신란으로 기존의 교단과 밀착했던 문벌 귀족들이 무너지고 지방민에 대한 사찰의 수취가 위협을 받게 되자, 사찰들은 그 시대의 상무적 (尙武的) 분위기에 편승하여 신속히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사찰 단위로 편성된 승병들은 무신 지도자에 대한 적극적인 제거의 시도를 펼치기도 하고, 사찰 중심의 수취 체제를 위협했던 지방 민란의 진압에 나서기도 하고, 몽고군과의 투쟁에서 많은 전공 (戰功)을 세우기도 하였다. 위에서 제시한 천책의 예에서 보이듯이, 이 과정에서 승가는 무사적인 정신을 상당히 많이 익혀 적군에 대한 살상 행위를 “보살행”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고려말에 접어들어 승병의 참전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졌고, 승병 징발權은 승가에 대한 국가의 고유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물론, 천책의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이상 (理想)의 차원에서는 승려들은 불살생을 중시했지만, 현실적 차원에서는 국가에 의한 폭력을 종교인으로서 공공연하게 인정해야만 하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이러한 괴리 (乖離)는 결국 교단의 도덕적 권위를 떨어뜨려 종교 단체로서의 승가의 정체성을 상당히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거시적으로 보면, 원시 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짓밟는 교단의 치부 (致富) 행각, 석가모니의 청정 승가의 이상에 전적으로 위반되는 정교 결탁 (政敎 結託), 그리고 근본 오계 중에서도 으뜸되는 불살생계를 저버리는 국가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 이 세 가지 요소는 고등 도덕적 종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궁극적인 퇴락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3. 사명 대사 의거의 비극성.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통일 신라·고려 시대에 교단의 경제적 부 (富)의 수호의 필요성, 국가와의 예속적인 관계 등으로 인해서 승가의 불살생의 이상과 살생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 괴리 (乖離)가 생겼다. 조선조에 접어들어 승가의 사회적 위치가 획일적으로 격하되어, 역대 왕들의 對불교 태도에 상당한 차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승려들은 실제로 일반민과 같이 병역을 위시한 일체의 부역의 대상자가 된다. 국가로서는 일반민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는 승병의 제공은 승가의 하나의 존재 이유이었다46). 승병은 이제 사찰의 예속민이 아닌 순수 승려로만 충당된다. 불살생의 이상은 이론적으로 남았지만, 승병의 제공만 승단의 생존의 길이었을 그 당시에는 이는 실천에 옮겨질 리는 만무하였다. 이상과 현실 간의 격차는 종교인으로서의 많은 고승들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명당 유정 (1544-1610)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불살생 정신과 현실적인 살생의 필요성은 적지 않은 내면적 갈등을 빚게 하였다. 원칙적으로, 유정 철학의 기본 이념은 생명 존중, 중생 제도에 있었고, 폭력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시 (詩)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남의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였으니
남도 또한 내 형을 죽였으리라
어찌하여 네에게 돌아오는 것은 생각치도 않고
남의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였나?47)
이 시 (詩)는 결국 사명당의 폭력觀이 원시 불교의 정신을 근거로 하였음을 보여 준다. 임진왜란 첫해에 사명당은 유점사에서 왜병의 살생·약탈을 설법으로 막아 적군들에게 살생의 업보를 설명했다는 것도 이러한 생명 존중의 정신을 잘 보여 준다. 그러한 사명당은 상황의 논리에 의해서 자신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사실상 군인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
형봉 (衡峰)에서 토란 굽기 실로 내 소원인데
벼슬에 살찐 말이 어찌 본분이랴
장해 (瘴海) 십 년 동안 부질 없이 수자리 살았구나.
향성 (香城) 어느 날 돌아 갈 기약을 정할른지 (...)48)
[“過震川”}
그는 승병장으로서 파격적인 출세를 했던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쓸쓸한 객관에서 어금니가 아파
앉아서 지난 일 생각하니 좋은 일 하나 없다.
머리 깎고 중 되어도 언제나 길에 있었고,
수염 남겨 세속 본 받아도 역시 집은 없었다.
연하 (烟霞)의 업 (業)은 설어서 익기 어렵고
존성 (存省)하는 공부에는 채찍질 하지 못하였다.
진퇴의 두 길을 다 그르쳤는데
흰 머리로 어이하여 또 배를 탔는지?49)
[“在馬島客館左車第二牙無故酸痛伏枕呻吟”]
결국, 사명당은 “범과 용을 항복시킨 일이 (즉, 戰功) 장하지만 마침 황벽 선사 (黃蘗 禪師, 임제의 스승)를 만나면 문득 당황하겠다”는50) 명구 (名句)를 지어 자신의 군 생활을 어느 정도 아프게 느꼈는지 잘 보여 주었다. 물론, 선 공부에 몰두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의 고통의 표면적인 이유이었지만, 군에서 부득이하게 살생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도 그에게 적지 않은 괴로움을 주었을 것이다. 생명 존중을 중시하면서도 왕군에 의한 살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신라의 승장과 태현, 법력에 의한 적군 퇴치를 이상시하면서도 진압군의 폭력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려의 천책 등의 많은 과거의 승려처럼 비폭력의 청정 승가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매우 비극적인 것으로 여긴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