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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럭키 우아 아파트 원문보기 글쓴이: 元泉
孔子(B. C. 551~479) - <인물 세계사>
일생을 바쳐 학문을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실천을 중시한다. 망하려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시당한다. 정의가 행해지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라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논어], ‘태백’(泰伯)편 중에서
▷ 짧은 정치적 영광과 긴 방랑, 그리고 애제자의 죽음
공자는 기원전 551년 오늘날 중국의 산둥성 취푸(曲阜) 동남쪽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를 일컫는 영어 콘휴셔스(Confucius)는 존칭인 공부자(孔夫子)의 라틴어식 표기이다. 공자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주나라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예(禮) 전문가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5살 때 노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제나라로 떠났다가 2년 뒤 귀국했다.
공자가 48살 때 계손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500년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돌려받음으로서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이 시기가 공자의 정치 생활에서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삼환 씨 세력을 타도하려다가 실패하고 한 무리의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났다.(기원전 497년) 이후 공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4년만인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때 공자의 나이 68살이었다.
이후 공자는 노나라의 악(樂)을 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나 가장 아끼는 제자 안연이 세상을 떠나자 깊은 실의에 빠졌다. 온몸으로 흐느껴 우는 공자를 제자들이 말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는 울고 싶은 만큼 울게 내버려두어라.’ 애제자를 떠나보낸 슬픔 가운데에서도 공자는 기원전 481년 [춘추(春秋)]를 완성했다. 72살 때는 역시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일어난 정변에 휘말려 피살되었다. 이번에도 공자는 제자를 위해 곡했다. 그리고 기원전 479년 73살 때 공자는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정명(正名)에 나타난 보수주의자로서의 공자
공자라고 하면 인(仁)부터 떠올리지만 공자에서 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禮)이다. [논어] 첫 부분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말하는 배움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인가? 그것은 예다. 공자가 말하는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제도, 문화, 문물, 사상, 예법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이러한 예는 문(文)이기도 하다. 악명 높은 양호로 오인되어 광(匡) 지방 주민들에게 붙잡혔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이 문(文)을 말살시킬 작정이라면 살아날 수 없겠지만, 하늘이 문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면 그들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주나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공자의 자의식을 엿보기 충분한 발언이다. 공자가 말한 ‘이 문’(斯文)에서 ‘문’은 주나라 문화의 총체이자 곧 예이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시대상을 배경으로 되새겨보면, 당시 사회는 하극상(下剋上)의 상황, 즉 대부가 제후를, 제후가 제왕을 이기려하고 그 지위를 넘보는 상황, 사실상 주나라 봉건 질서가 무너져가는 현실이었다. ‘자기를 극복해 예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극복해야 할 것은 하극상의 주체 또는 그러한 욕망이다. 돌아가야 할 예는 주나라의 전통적인 질서와 문화다. 극기복례는 결국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통적인 주나라 정치·사회·문화 질서가 흔들리면서 많은 이들이 본래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합당하지 않은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 주나라 정치·사회·문화 질서를 회복시켜야 한다.’ 극기복례에 관한 한 공자는 다분히 보수적인 모습을 지닌다. 공자의 정명(正名), 즉 이름의 뜻과 실제가 같도록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것은 이미 정해진 각자의 신분과 지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유교무류(有敎無類)에 나타난 혁신가로서의 공자
공자는 출신 성분, 사회적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유교무류(有敎無類), 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늘날에는 당연해 보이는 이 생각은 그러나 공자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공자의 교육 목표는 군자(君子), 즉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었는데,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 일은 전통적인 신분 질서에 따라 귀족들이 세습했다. 그러나 공자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능력과 덕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며, 여기에서 혁신가로서의 공자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전적으로 공자가 창안해 낸 생각이라 하기는 힘들다. 이미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전통적인 주나라 신분 질서와 사회 계급 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를 도모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유교무류로 대표되는 공자의 교육 철학과 인간관은 충분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극기복례에서 볼 수 있는 보수성과 유교무류에서 볼 수 있는 혁신성. 변화와 혼란의 시대를 산 공자의 얼굴은 한 가지가 결코 아니다.
▷유교적 합리주의, 인문주의의 길을 놓은 공자
공자는 제자 자로가 조상의 영혼과 귀신을 섬기는 법을 묻자 ‘아직 능히 사람도 섬기지 못하는 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느냐’라 답했고, 죽음에 대해 묻자 ‘아직 삶을 알지 못하는 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라 답했다. 공자는 사후의 삶 같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현재의 삶의 경험에 충실하면서 그 의의를 밝히고자 했다. 또한 제사를 올려야 마땅한 조상 이외의 다른 신에 제사 지내는 것을 꾸짖었으며, ‘귀신을 공경은 하되 가까이 하지는 말라’ 말했고 괴력난신(怪力亂神), 즉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에 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공자는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탄식했지만, 인격성을 갖춘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늘을 긍정했다기보다는 애제자를 잃은 비탄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관심은 주나라의 문물, 사상, 제도, 전통을 통틀어 일컫는 의미의 ‘문’(文)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있었으며, 인간의 역사와 문화와 삶 바깥의 신적(神的), 초자연적, 초월적, 신비적 영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유교를 현세적 합리주의, 유교적 합리주의, 유교적 인문주의 등으로 형용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공자의 이런 태도에 있다. 공자 사상의 막대한 영향력 속에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은 적어도 그 주류 사상에서는 현세주의와 인문주의의 길을 걸었다.
▷이상을 추구했던 공자. ‘아니 될 줄 알면서도 애써 행하려는 자’
공자는 실패했는가? 적어도 그의 생애만 살펴본다면 성공을 거두었다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정치를 실천에 옮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주나라 문화를 부흥시키려는 뜻도 여의치 못했다. 자신의 가르침을 가장 잘 계승할 제자로 기대했던 안연도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한나라 이후 비록 여러 차례 부침(浮沈)은 겪었지만 2천 년 가까운 세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사상계의 패자(覇者)로 자리 잡았다. 왜 그토록 공자의 생명력이 길었을까? 공자와 유교가 지닌 보수성 또는 체제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 통치자의 지배 이념으로 적합했으며, 이에 따라 동아시아 역대 왕조들이 공자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일리 있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공자의 생명력의 비밀은 어쩌면 그의 지독한 이상주의(理想主義)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공자는 자기 당대에 ‘그 아니 될 줄 알면서도 애써 행하려는 이’(知其不可而爲之者)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하극상의 혼란이 팽배한 현실에서 주나라 문화와 질서를 이상으로 삼아 추구했던 그로서는 당연히 들을 만한 얘기였을 법하다. 바로 그 지점에 공자의 생명력이 있다. 전통 동아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공자는 ‘그 실현하기 힘들 줄 알면서도 애써 실현키 위해 노력할 만한 이상적 정치와 문화와 사회관계’를 제시하고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현실에서 쉽게 이룰 수 있는 이상에 매료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루기 쉽다면 그것이 과연 이상일까? 이상은 이루기 힘들 때 이상으로서의 매력과 힘을 발휘한다.
孔子(BC 551 ~ BC 479)-<두산백과>
▷要約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시조.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仁)에 대한 공자의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孝悌)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출생-사망 : BC 551 ~ BC 479
자 : 중니(仲尼)
본명 : 구(丘)
국적 : 중국 노(魯)
활동분야 : 교육, 철학
출생지 : 중국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
공자는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鄒邑:지금의 山東省曲阜의 남동)에서 BC 551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춘추 말기 사람으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인(仁)이며,‘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다)'를 그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인(仁)을 단지 도덕규범이 아닌 사회질서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원래 송의 귀족이었으나 노(魯)로 망명하였다. <맹자>에는 공자가상(商) 왕가의 후손이라는 서술 있어 때로는 공자를 상 왕족의 혈통으로 여기기도 하였으나, <사기>에는 이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단지 "그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 그를 송(宋)의 후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버지의 자는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다.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나는 십오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 삼십이 되어 뜻을 세웠다(吾十有五而志于學三十而立)."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하였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공자는 19세 때인 BC 533년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직이 되었다. BC 517년 삼환씨의 제가에 실패한 소공(昭公)과 함께 제(齊)로 갔다. 제에서 관직 등용에 실패한 뒤 노로 되돌아왔다. 공자는 51세 때인 BC 501년 노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었고, 56세 때 대사구(大司寇)로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노의 정치에 실망하고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주유천하의 길을 나서 위, 조, 송, 정, 진, 채, 초를 방문하였다. 그 후 공자는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한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 - 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가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공자는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다. 이는 그의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자의 사상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인(仁)에 대한 공자의 정의는 <논어>에서만 해도 사람다움(人),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보는 이유는 공자가 '인(仁)'을 단지 도덕적 규범으로서가 아닌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사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공자 사상의 인(仁)은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釋迦(석가)-<두산백과>
▷要約
불교를 창시한 인도의 성자(聖者)로 성은 고타마(Gau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悉達多)이다. 부처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세존, 석존, 세존, 석가, 능인적묵, 여래, 불타, 붓다, 불(佛)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원어명 ; Śākyamuni
출생-사망 : BC 563? ~ BC 483?
본명 : 고타마 싯다르타
별칭 : 석가모니·석가문·능인적묵·석존·부처·붓다·여래·세존
국적 : 인도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룸비니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는 샤카(샤키야,Sākya)라는 민족의 명칭을 한자로 발음한 것이고 모니(muni)는 성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석가모니라 함은 본래는 '석가족(族) 또는 샤키아 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au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ā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을 중심으로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Śuddhodāna:淨飯王)와 마야부인(Māyā:摩耶)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 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人)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네팔계(系)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 왕[阿育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石柱)가, 1896년에 발견·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島史) Dīpava sa》, 《대사(大史) Mahāva sa》에 근거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 전하는 중성점기(衆聖點記), 즉 불멸(不滅) 후 최초의 율장(律藏)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齊)나라의 영명(永明)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 외에 BC 624∼BC 544년 설, BC 463∼BC 383년 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부인과 사별하였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16세에 결혼하였다. 부인은 야쇼다라[耶輸陀羅]라고 하며, 곧 아들 라훌라[羅睺羅]도 얻었다.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설적으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써 설명된다.
석가모니는 29세 때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 강(江)을 건너 마가다왕국(王國)의 왕사성(王舍城:Rājag ha)으로 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2명의 선인(仙人)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 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웠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통일에 의하여 하늘에 태어나 보려는 것이었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고행은 육체적인 면의 극소화를 통하여 정신의 독립을 구하는 이원적 극단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菩提樹:Bodhi-tree) 아래에 자리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함경(阿含經)》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제(四諦:苦·集·滅·道의 4가지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십이인연(十二因緣)·사선삼명(四禪三明)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겠다. 즉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直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如實知見: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었는데, 공포에도 고통에도, 나아가서는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不動)의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解脫:mok a)이라고 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nirvā a)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설법
석가모니는 성도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는데, 범천(梵天)의 간절한 권청(勸請)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악마의 유혹, 설법주저(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 범천권청 등은 마음속의 일을 희곡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석가모니는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M鹹gadāva)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제에 관하여 설하였다. 이것을 특히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법을 깨달아 제자가 되었다. 여기에 최초의 불교 교단(sa gha:僧伽)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 강(江)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다. 제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율장》 등의 원시불교 경전을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을 후세에 편집한 것이지만, 후세에 정형화된 다음의 교설을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원형 또는 그 핵심을 알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一切皆苦·諸行無常·諸法無我 또는 一切皆苦를 빼고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사제·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무기(無記:일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 실천을 지향함을 말한다) ·법(法: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오온(五蘊:色·受·想·行·識의 5가지 존재의 구성 요소)·육근(六根:법의 분류로서 眼·耳·鼻·舌·身·意의 주체. 이에 대응하는 色·聲·香·味·觸·法의 객체, 즉 六境을 더한 十二處와, 거기에 眼識 등의 六식을 추가하여 十八界를 말하기도 한다)·연기(緣起: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함을 말함. 12연기가 특히 유명하다)·열반·일체중생의 평등 등이 그것이다.
혹서의 인도(印度)의 중부지역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敎化) 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 "교주(敎主)의 말은 끝났다. 우리의 교주는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내가 설한 교법(敎法)과 계율이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쿠시나가라(Kuśinagara)의 숲에 이르렀을 때, 석가모니는 심한 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하였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沙羅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는 "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 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 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茶毘:화장)되고, 그 유골[舍利:śarīra]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승(大乘)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불타에는 법신(法身:진리로서의 불타)·보신(報身:보살의 願·行에 의하여 성취된 불타)·응신(應身:중생구제를 위하여 상대방에 상응하게 나타나는 불타)의 3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 성도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사르나트), 입멸지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靈地)로서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cus)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크산티페(Xanthippe)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세노폰은 《회고록(Memorabilia)》에서 어머니의 엄격함에 대해 불평하는 아들과 아들을 타이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근거로 후대 저작들에서 크산티페는 종종 잔소리 많은 악처로 묘사되는데 이는 과장된 측면이 크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휩쓸렸다. 당시 아테네에는 기존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의 법을 새로이 차용하고자 한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하자 귀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으나 다시 세를 회복한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고자 했다. 비록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론들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고, 제자와 친구들 상당수가 귀족주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idon)》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사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직접 남긴 저작이 없기 때문에 그의 고유한 사상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의 학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과 그 안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언행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되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문답법이라는 독특한 교육방식과 재판과정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그의 철학사상의 특징과 의의는 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교사들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주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하고 불경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함과 무모함이 어떻게 다른지, 우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해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의 추구라는 변증법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둘째,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seauton)’는 고대 격언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셋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하였던 그는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또한 그는 옳은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덕과 앎을 동일시하였다. 최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된 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추구는 스토아학파의 선구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넷째,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이후 플라톤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아름다움, 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는데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상의 개연성에 비약적 측면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를 하느님의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자체가 예수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예수라는 이름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 탄생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제16장 16절을 보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는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에 보면, 광야에서 나와 베다니로 돌아갔는데, 여기서 첫 번째 제자를 얻어 그들과 함께 갈릴리로 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행하였다. 공생활에서의 최초의 유월절(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거기서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었다. 예수는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어느날 밤 조용히 찾아온 바리새파(派) 지도자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에게 자신을 계시(啓示)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일러 주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중생(重生:거듭 남) 또는 신생(新生:새로 남)의 교리이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으나, 예수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갔다(누가 4:25∼30). 세례자 요한이 헤롯왕에게 살해된 사실을 안 후, 예수는 갈릴리를 떠나 필립비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 떠났는데, 그 길에 제자들에게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말해주었다. 예수가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을 때 예수가 그들 앞에서 변모하여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같이 눈부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 즉, 예수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시(啓示) 방법으로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자의 신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달았던 것이다(마태 17:1∼8, 마르코 9:2∼8, 누가 9:28∼36).
그 후 예수는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가 설교도 하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곤 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지닌 권위에 놀란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가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