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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대식 시인은 2011년 8월 9일 오전 8시 30분 신천연합병원에서
향년 69세로 소천했다.
박소담 시인은 경기 평택출신으로 월간<문학세계>에 시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흥문인협회 회원, 시향문학회 회원, 시흥자치신문 논설위원, 색소폰 라르고 회원을 지냈다.
부인 이지선씨와 함께 여섯 번째 부부시집을 냈다.
우중충한 것을 싫어하셨던 고인의 빈소는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었다.
"제 아빠여서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합니다."
"열심히 살은 그대, 천국에서도 화이팅!"
사랑하는 가족들의 화환을 보면서 많은 사랑을 받고 떠나시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 8월 10일 신천연합병원에서 고인의 지인들이 故 박소담 시인을 추모했다.
문도진(55)시인이 색소폰연주를 했다. 문도진 시인은 故 박소담 시인을 회고하며
"소담 형님의 권면에 의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음악을 좋아하는 형님을 색소폰의 세계로 안내하여
시와 색소폰으로 동고동락하였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아름다운 시간의 추억이 새록새록 기억되어지길 ..." 바란다고 했다.
고인을 사랑했던 많은 지인들이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많은 지인들이 빈소를 찾았다.
신천연합병원에서 대야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리기 위해 출발했다.
대야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집전되었다.
장지는 미산동에 있었다.
장지에 모셔졌다.
가족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손자의 손에 영정이 들려 장지에 들어섰다.
떠날 때도 손자의 손에 영정이 들려 있었다.
아버님을 모시고 내려오는 딸 박신영(39)씨에게 아버님에 대해 여쭤보았다.
"아버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울지 않았다. 아버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은 최고의 날들이어야 하니까.
울 시간은 많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수술실에 들어갈 때도 "아빠 화이팅!"을 외쳤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했다. 이제 아버지를 산에 모시고 내려오면서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절제된 슬픔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아들 박신규(38)씨는 아버지를 "인자한 호랑이"라고 했다.
호탕하고 인자하셨지만 한 번 화를 내시면 호랑이가 되셨다고 회고했다.
"인자한 호랑이"라는 말에 고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아내 이지선(63)씨는 사회봉사를 많이 하셨던 고인이
"내가 암을 걸려보니 너무 고통이 심하다며 암환자를 위해서 기부를 하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2011년 10월 7일 고인의 70세 생일을 맞았다. 거실에는 색스폰을 부는 고인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성당에서 연미사를 드리기 위해 가족들이 집을 나섰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가족들이 향을 피웠다.
집으로 돌아와서 지인들과 기도를 드렸다.
막내 처제 이금례(49)씨는 "큰 형부는 아버지 같은 분이다. 내가 막내다 보니까
아기처럼 토닥거리셨는데 돌아가셨다.
문학을 공부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아직도 그림자 흔적들이 가득하다."고 했다.
무덤을 찾았다. 손자들이 할아버지께 술을 올렸다.
손자들은 무덤가에서 놀았다. 고인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손자들에게
원하는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갖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손자들은 자전거 등 자신이 평소 가지고 싶었던 것을 말했고,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일일이 선물들을 사주었다고 한다.
천진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할아버지도 저 세상에서 빙그레 웃고 있을 듯했다.
음복을 했다.
무덤을 내려와서 점심을 들고 고인의 아내와 처제들은 고인이 생전에 봉사를 다녔던
기관에 일일이 떡과 과일을 선물했다.
"남편이 이렇게 하는 것을 원할 거라는" 이지선(63)씨의 말을 들으면서 아! 하는 가벼운 탄성이 나왔다.
이 두 분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故 박소담 시인의 가족이 평소 고인을 알고 지내던 지인들을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했다.
딸 박신영(39)씨가 어머니가 쓴 ‘떠날 때 더 멋진 당신’을 읽었다.
떠날 때 더 멋진 당신
-이지선
당신이 담담하게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이별 연습을 하면서 이 순간이 어쩌면 당신과의 마지막일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동안 대수롭지 않은 일에 티걱 거렸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태어난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새로운 생명에게 살 자리를 넘겨줘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라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에 감사하던 당신. 치아 몇 개를 뽑고 다시 해야 한다는 의사에게 얼마 살지도 못한다는데 돈 들여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신의 말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결국 두 달도 못 쓰고 떠났지만 그때 해주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다른 봉사나 사회활동을 할 때는 몰랐는데 암 투 병을 하면서 암이 이처럼 고통스러운지 몰랐다며 암 환자를 위해 도울 수 있도록 내게 부탁도 했지요. 해외 근무를 많이 했던 당신이 애들 자랄 때 같이 하지 못한 게 가장 큰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아 지난여름 중국 여행 때 손자를 데리고 간 것은 참 잘했어요. 생명 연장을 위한 의료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한 당신이 죽음보다 고통을 더 두려워해 호스피스 병실로 옮겼을 때 편안해하던 당신 얼굴에서 나도 안심이 되었어요. 신부님이 임종을 준비하기 위한 병자성사와 의사인 목사님의 기도와 돌봄을 받는 당신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족 모두가 오래 전에 장기기증을 신청했는데 암으로 사망한 당신은 어렵다고 해서 실천하진 못했지요. 저라도 몸 관리를 잘해서 당신 뜻을 이룰게요. 떠날 날이 가까워오자 아들 딸 부부와 순주증과 그동안 얼룩졌던 상처들을 씻고 형제와 가까이 했던 친구를 불러 화해와 용서와 위로를 주고 받으며 이젠 떠날 준비가 다 됐다며 홀가분해 하던 당신. 참 부러웠어요. 장례식은 하늘나라로 가는 축제로 해달라는 부탁대로 흰 국화가 아닌 화려한 꽃으로 장식했고 화환도 그렇게 보내 달랬지요. 시화전도하고 당신이 살아온 길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열심히 산 그대 천국에서도 파이팅! 하고 내가 보낸 꽃바구니와 "제 아버지여서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합니다."한 자식들의 꽃바구니도 보았지요? 옆에 있을 때의 당신보다 떠나간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 날마다 당신 사진에 뽀뽀를 합니다.
남편에게 쓴 편지는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딸의 낭송 뒤에 지인들이 고인의 시를 낭송했다.
이런 사람
박소담
뜨거웠으면 좋겠다
삶의 힘줄이 터지도록
구름 낀 날은 싫다
따가운 햇살에 속살이 돋아나도
뜨거운 태양이 좋아
산다는 것도 그래
길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
짧아도 뜨겁게
죽고 나면 이런 소리 듣고 싶어
"참 아까운 사람이야
좀 더 살았어야 하는 건데"
(2001년 3권 째 시집 중에서 -낭송 정문자)
우리는 홀로 떠나야한다
-박소담
혼자라는 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신이 선택해준 운명이니
우리는 홀로 떠나야한다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떠나야할 꿈동산이 어딘지 모르는
어둠의 미로라 할지라도
우리는 홀로 떠나야한다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이
찬란한 햇살로 하늘에 올라
어디론가 사라져가듯
우리는 홀로 떠나야한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와
나를 사랑하는 모든 것이
만남과 이별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우리는 홀로 떠나야한다
홀로 태어났다는 건
홀로 떠나야함을 의미하는 것
꽃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처럼
조용한 입맞춤으로
우리는 홀로 떠날 줄 아는
이별의 완숙함을 배워야한다
(1998년 부부시집 1집에서 -문도진 낭독)
이상과 허상
박소담
따지고 보면 삶의 빈터위에
집 한 채 마련한 후
죽음의 깃발 하나
단단히 꽂아 놓고
오순도순 산들 그만인데.
꿈틀거리는 허상의 빛
저 편을 넘어서려는
지나친 욕망 때문에
삶의 깃발만 꽂아 놓고
영원의 줄을 잡고 고뇌에 빠져든다.
태어나면서 고통 준
모태의 산고(産苦)에도
꼬옥 쥔 손아귀엔
어차피 빈손인 걸
아픔과 고뇌
생의 종착역 내리기 전
떨쳐버려야지
떨쳐버려야지
(2000년 2번째 시집에서-박길목 낭송)
고인의 친구 김규성(71)씨는 "먼저 간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네. 이제 내 차례 인가봐 가서 보세"라고 적었다. 김부자 자치신문 사장은 "소담선생님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하늘나라 아프지 않는 곳에서 편안히 웃으세요. 2011. 10. 7 소담 선생님을 그리며" 이만균(79) 씨는 "그대 떠남도 참 아름답구나. 우리 그대 추억 새기며 어찌 이렇게 그리운지 모르겠네." 정문자 씨는"시간이 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아 슬픕니다. 더 문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나눌 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랑해요. 소담선생님" 최영철(62)씨는 "마음의 고향처럼 포근하고 넉넉하고 유난히 정이 많으셨던 아름다운 거인 영원한 휴머니스트 못다 하신 사랑을 유족들에게 건강과 행복으로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했다.
함께 문학 활동을 했던 문협지부장 이연옥(59)는 너무 무거운 짐을 남긴 거 같아 미안하다 하신 말씀 사랑으로 받습니다. 선생님 힘차게 달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김민지씨는 "시흥시에서 술 마시고 싶은 사람이 김민지라고 하신 말씀 실천을 하지 못해 아쉽습니다."고 했다. 이정우씨는 "소담선생님, 님을 그리워합니다." 안봉옥 전 문협지부장은 "뭔지 모를 느낌도 없이 그냥 그렇게 가까이 계신듯합니다."고 했다. 이명예씨는 "포도나무처럼 부지런하고 멋지신 생전의 모습이 그립습니다."고 추모했다.
박길목(55)씨는 "소담형님은 이름처럼 소박하시다. 포도농장을 가꾸고 시를 쓰고 또 색소폰을 연주하신다. 삶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나는 소담 형님의 서늘한 그늘에서 한동안 즐겁게 살았다."
최준렬(54)씨는 "리노형님!!! 70세 생신을 축하합니다. 가족과 형님을 좋아했던 저희들을 바라보면서 항상 즐거우세요. 사랑합니다. 리노 형님"
황옥순(66)씨는 "송암 포도농원에 놀러 가면 반갑게 맞아주시던 소담 부부 그립습니다."
최분임(50)씨는 "좋은 말씀으로 여러 사람들을 토닥여주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가겠습니다."
박근식(74) 큰 형님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허전하다."고 했다.
박길목시인은 故박소담시인을 추억하는 시를 소래문학에 발표했다.
<소담 숲마을 유치원>
-박길목-
※구월동에서 버스 터미널 쪽으로 쭈욱 걷다보면
※소담 숲마을 유치원이 나온다.
가로수 뒤 켠으로 가끔씩 눈 맑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흔들리는 잎사귀에 걸터 앉아 그네 타면
발길 바쁜 바람도 잠시 브레이크를 밟는다.
구월동에 九月이 오기 전 나는 소담이라는
착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떠나 보냈다.
그를 터미널 까지 배웅하면서 언제쯤 돌아오냐는 인사는
차마 하지 못했다.
구월동에 九月이 오고 갔다.
소담 숲마을 유치원 아이들이 노란 가방을 메고
모두 집으로 갔다.
저문 하늘, 꽃물 뒤집어 쓴 구름은 어디쯤 갔을까 하고
새로 나온 작은 별 하나가
소담스레 깜박거렸다.
※구월동: 인천광역시
※소담 숲마을 유치원: 인천광역시 구월동 소재
딸 박신영(39)씨는 "사랑에 솔직한 아빠, 항상 껴안고 뽀뽀하고 그래도 아쉬워 사랑을 글로, 노래로 하던 아빠, 당신이 그립습니다."
아들 박신규(38)씨는 "아들 못 다한 말들 나중에 꼭 다시 나눠요."
사위 한인석(44)씨는 "항상 불꽃같이 신생을 사셨고 한순간도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시며 멋진 인생을 사신 자랑스런 아버님이셨습니다. 아버님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닮고 싶은게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지선 아내(63)씨는 "나를 평생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요."라고 했다.
시인은 시로써 말한다.
故 박소담 시인과 이지선시인이 여섯 번째 부부시집을 냈다.
내 생에 봄이 다시 온다면
박소담
내 생에 봄이 다시 온다면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산마루에
아내가 좋아하는 산막 한 채 지어놓고
앞마당에 매화 한 그루 잘 키워
벗하며 살고 싶네
매화꽃 탐스럽게 피거든
그리운 사람에게
꽃다발 한 아름
강물에 띄워 보내주고
청매실로 술 담가 푹 익거든
정다운 친구와 술잔 나누며
뱃고동 소리 담아
내가 좋아하는 시 한 편
낭랑하게 읊어주고 싶네
(2011년 박소담. 이지선 여섯 번째 부부시집 중에서)
생존
이지선
갈라진 시멘트 콘크리트 사이로
민들레 노오란 꽃 피워냈다
홀씨 하나 날아들어
뿌리 내림 오죽했으랴
그 꽃도 홀씨 되어
어딘가에 뿌리내려
꽃을 피워내겠지
시멘트 바닥을 원망하지 않으며
( 2011년 박소담. 이지선 여섯 번째 부부시집 중에서)
병원 앞 풍경
이지선
장맛비에 우비를 입은 노파가 병원 입구에서
아마도 어느 공터에 심었던 듯 호박잎을
검정비닌 봉지에 몇 무더기 담아놓고
오가는 사람에 상관없이
호박잎 줄기를 다듬고 있다
다 팔아도 한 끼 식사거리도 안 될 것 같은데
노파의 손놀림은 꾸준하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이 눈물인지 빗물인지는 모른다
손발이 부러진 사람, 수명을 연장 받지 못한 환자
불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난 신생아, 세상을 떠난 시신도
노파 앞을 스쳐 병원에 들어가지만
노파의 눈은 오직 호박잎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 2011년 박소담. 이지선 여섯 번째 부부시집 중에서)
세상을 읽는 시선이 따뜻했던, 또한 이웃을 사랑했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진솔했던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깊은 아쉬움을 토했다.
"저 세상 끝의 천국에는 시인들만의 동아리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시를 토론하고 쓸 것이다. 천천히 오라."고 했던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는 길에도 그 깊은 고통을 맞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유머와 품위를 잃지 않고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고마웠습니다. 팔을 활짝 펼치고 사람을 반기던 그 따스함과 빛남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영면을 기원합니다. 마음을 다해
인사를 했다.
첫댓글 대작이 완성 되었군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고인과 함께 하였던 시간들이 주마등 처럼 스치고 지나 갑니다.
이렇게 방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정리하고 올리기 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영숙님의 열정이
대단함을 새삼 느낍니다.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는
말을 되새 깁니다.화산처럼 타오르는 열정으로 세상을 살다가 떠나신 형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한번 새겨 봅니다.
그곳에서도 밝은 모습으로 계실 거라 믿습니다. 와, 대단하세요. 정말 고생하셨겠습니다. 제일 위 문장은 중복돼 있어서 약간 손 보셔야 할 듯...
소담선생님이 어디서 만나던지 환하게 웃으시며 선뜻 반겨주셨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될듯합니다. 두 분 사시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그 마지막 가시는 길도 아름다웠던 분으로 또한 기억될듯합니다. 중복된 문장은 다시 정리했습니다. 깊은 관심 고맙습니다.
소담 형님 떠나시면서 까지 저에게 선물을 주고 가셨네요.생전의 말씀 ""길목씨, 미워하지마.미워하지마..." 그래서 저는 지금 대답합니다."형님 미워 미워...'
소담선생님의 자상하신 모습이 그립습니다.
천국에서 평강하시길 바랍니다.
일면식 없는 저이지만 사진을 읽으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거듭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언제 다녀가셨군요. 반갑습니다. 그곳에서 평강하시지요! 언제 올라오세요. 소래사람들과 뵙게요.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