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발생한 IMF사태는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경영난으로 부도 위기에 몰렸으며 대기업들은 구조 조정을 시작 하였다. 따라서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많은 중소기업들은 재기의 기회를 잡기 위하여 중국으로 기업 이전을 하였으며 대기업에서 해고된 실업자들은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바다를 건너왔다. 따라서 칭다오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차츰 증가하기 시작 하였다.
97년 10월 10일 티엔진(天津)천주교 한인 공동체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김 철제 바오로 신부가 칭다오를 방문한 후 대구 대교구의 승인으로 동년 10월 20일 칭다오 천주교 한인공동체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칭다오 신자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고, 중국 칭다오 한인공동체에 정식으로 본당이 설립 된 것이다. 사목자로서의 의무를 짊어진 김 바오로 신부는 길 잃은 양들을 기쁜 마음으로 끌어안고 신앙의 밭을 일구어 나갔다.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더욱 풍성하게 빛날 대망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사제관 임차
10월 26일 사제관을 임차하였다. 그 당시에 한국인들이 많이 상주하던 사방구 실험소구 아파트를 임차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달라 전세가 없었고, 오로지 월세 성격의 임차가 성행하였다. 임차는 보통 6개월 납이나 1년 납을 냈다. 1년 임대료는 인민페 15000 위안이었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집에 사는 것이 습관이 된 중국인들과 달리 익숙하지 않은 추위와 낡은 집에서의 생활은 한국인들에게 타향에 살아가는 어려움을 배가시켰다.
김 신부는 교우들과 자주 등산을 하였다. 등산하면서 중국 신앙 생활의 어려움을 자문해 주고 성경 말씀도 해설해주며 신자들과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미사 장소 이전
1997년 11월 30일 海天(하이티엔) 호텔 지하 1층으로 미사 장소를 이동 하였다. 미사는 주일10시 30분에 1대만 드렸다. 신자들의 가정, 공장의 창고 혹은 식당 등을 전전하다가 공공 장소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니 그 때의 그 감격은 지금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고 초대 공소회장 현진 아오스딩은 말한다. 80여명의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었지만, 주님에 대한 사랑은 간절하고 깊었으며,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좀더 체계적이고 안정된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하던 모든 신자들에게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 일이었다.
그 해 12월 24일 하이티엔 호텔에서 성탄 미사 및 축하연이 있었다.
첫 여성 레지오 '인자하신 어머니' 레지오 쁘레시디움 (pr.) 창단 97년 12월4일칭다오 본당에 첫 여성 레지오 pr이 탄생하였다. 인자하신 어머니 pr로 단장 이각형 카타리나, 부단장 김지현 데레사, 서기 이혜훈 도미니카, 회계 김양선 비아가 선임되었다. 인자하신 어머니 pr은2007년 7월 5일 500차 주 회를 맞이하였다.
사목회 결성
1998년 4월에는 사목협의회가결성 되었다. 공동체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 여러 분야의 분과를 발족하였다. 전례, 교육, 사회, 청소년, 재무부를 두어서 체계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각 분과의 임원을 두어 본당 운영을 시작한 시기이다.
구역 결성
초기 구역 구성은 시내반, 이촌반, 은도반으로 구성되었다.
종교국 및 천주교 애국회와 상견례
1998년4월 칭다오 성미카엘 주교좌당에서의 최초 한국인 미사와 관련하여 종교 국 및 애국회와 상견례를 하였다. 변함없이중국 측 과의 관계 향상을 위한 본당의 노력은 이어지고 있었다.
박 성진 요한 신부 재임 시에 이루어지게 되는 성미카엘 주교좌당에서의 미사봉헌은 이미 초기부터 싹 텄던 것이다.
본당 설립 후 처음 이루어진 세례식
1998년 4월12일 칭다오 천주교 한인공동체 설립 후 처음으로성미카엘 주교좌당에서제2차 세례식 및 부활절 미사가 거행되었다. 세례자는 10명으로 서용원 페리오, 서동욱 리노, 권혁상 알로이시오, 권혁중 이냐시오, 윤해룡 제노, 염태억 루까. 이영빈 심포로사, 서예리 체사리아, 신순자 엘리사벳, 김경미 바실리샤였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서 세상에 다시 태어남을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육신은 어머니의 품에서, 그리고 주님의 품에서 새롭게 영으로 다시 태어났다. 영생의 기쁨을 안겨주는 세례식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첫영성체
첫영성체 교리를 실시하여 6월 28일김 은영 카타리나 외 4명이 첫 영성체를 모시게 되었다.
남성피정
1998년8월 제1회 남성 피정이 교남 백과수 호텔에서 열렸다. 사목위원을 선발하고, 교육한다는 취지아래 이루어졌다. 빈 의자를 예수님으로 설정하여 둘러앉아 기도, 묵상나누기, 대화를 하면서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1박2일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참석자는 박광수 아우스딩, 하일용 아삽, 권용안 프란치스코, 신재식 베드로, 박주현 마르셀리노, 김손희 율리아노, 김남훈 요한이었다.
자전거 전교
박광수 아우스딩의 말에 의하면 김철제 바오로 신부는 직접 자전거를 타고 신자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시부전에서 청양, 칭다오 신자들의 공장과 가정을 방문하고 서로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기도 하고 기도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고 하였다.
제4편 2대 정삼덕 베네딕도 신부 (1998년 9월 ~ 1999년 12월)
초대 신부로 부임해서 중국칭다오 천주교 한인공동체의 기초를 다졌던 김 철제 바오로 신부가 1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9월 6일 한국 포항 홍해 본당으로 이임하였고, 9월 13일 2대 정 삼덕 베네딕또 신부가 성당동 성당에서 칭다오 천주교 한인 공동체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김 철제 신부가 초대 교회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라 하면 2대 정 삼덕 신부의 시대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과 신심 단체의 활성화를 이룬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 신부는 지금도 신자들이파워 있는 신부로 기억되어 있을 정도로 활발한 추진력을 보여 주었다.
정삼덕 베네딕또 신부가 부임하면서 칭다오본당에도 좀 더 발전적인 변모를 하게 되었다. 좀더 효율적인 신자 관리를 위하여 본당의 교적을 만들기 시작 하였다.더불어 본당 신자들의 영명 축일 명부를 작성하기 시작하였고, 축일을 맞이한 신자들에게는 미사 때에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사목협의회 회장단 임명 칭다오 본당의 체계적인 운영 관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1998년 10월25일 사목 협의회 회장단이 임명되었다. 회장에 안 병철 바오로. 부 회장에 박광수 아우스딩이 임명되었다.
첫 견진성사
98년 11월22일 제1 차견진 성사가 있었다. 북경 주임 신부인 김영환베네딕또 몬시뇰집전으로 이루어졌다. 토요일 칭다오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北京이 폭설로 비행기가 이륙하지 않아서 비행기 안에서 10시간여 동안 갇혀 있다가 되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일요일 비행기로 청도에 올 수밖에 없었다. 미사가 이미 끝나 신자들이 귀가하여서 견진 성사자들만 다시 불러들여 견진 예식을 거행하였다.
임철호 프란시스코 외 27명의 신자들이 견진 성사를 받게 되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들에게 견진성사로 깊은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되어 그리스도와 굳건히 맺어지게 되었다.
포항 흥해 성당 성금 전달
12월 포항흥해성당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전달하였다. 자선주일 2차 헌금 2,465,80원+$100,00+별도 개인 헌금을 전달하였다.
사목협의회 정기총회
99년 1월10일 사목협의회 정기총회 총무 및 분과장 임명이 있었다.
성미카엘 주교좌당 보수 공사
성미카엘 주교좌당이 1932년 창건 이래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1999년 4월 18일 주교좌당 보수기금 접수를 시작 하였다. 5월 1일성전 보수공사 준공 및성모상 축성식에 본당 신부 및 사목위원들이 참석하여 성전신립기금 20,000위안을 전달 하였다. 인민폐 약 160만 위안 정도 소요되는 대공사였다.
사제관 구입
처음으로 사제관을 구입하였다.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사방구 실험소구 아파트가 중국 기업에 팔려서 불시에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다시 이사한 금옥(金玉)산장은 음침하고 누추하였으며 유난히 쥐가 많아서 살기에는 무척 불편하였다. 다행히 기름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어서 겨울을 춥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화장실에는 온수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온수를 쓸 수 있었는데 온수 사용 중 감전이 되어 정신부가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 개선과 사목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대구 대교구에서 u$100,000을 지원하였다. 1999년1월18일 은도화원 銀都花圓 觀霞褸 14層 c房(154,48제곱미터)을 u$96,000 주고구입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이 51,720 위안을 모금하여 사제관 가구 구입 비용 및 실내 장식 비용으로 지출하였다. 그 당시 은도화원은 한국인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고 보안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사제관으로 적합하였다. 입주는 1월 20일에 이루어졌다.
사목협의회 회장 임명
1999년 3월7일사목협의회 회장으로 이문희 베드로가 임명되었다. 부회장에 박광수 아우스딩이 유임되었다.
구역 구성 현황
본당 설립시에 80여명에 불과했던 구역이 활성화가 잘 이루어졌음을알 수 있다. 정 신부는 매달 반별로 돌아가면서 반 모임에 참석해서 저녁 식사도 같이하고 교우들과의 친목에 힘썼다. 이촌반에서는 진복팔단을 적어놓고 가정 성화를 위해 노력을 했다.
반 명
가구 수
신자 수(예비자)
이촌반
22
44(예비자4)
시내반
17
46(예비자6)
은도반
14
38(예비자2)
동해안반
14
20(예비자3)
겨자씨반
9
23
래 서
2
3
황 도
1
2(예비자3)
총 79가구: 172명, 예비신자: 17명
※1999년 5월 9일 기준 반 구성과 신자 수(유아 포함)
샹그리라 호텔로의 이전
99년 11월21일 성당 장소가 하이티엔 호텔 지하1층에서 샹그리라 호텔로이전하였다. 신자들이 늘어서 옮겼다고는 하나 그 외에도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세가지 이유는 첫째 칭다오시 정부 종교국과 샹그리라 경영진, 칭다오 본당의 협의로 샹그리라 호텔에서 합법적으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정부 당국으로부터 발급 받고 미사 참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샹그리라 호텔의 총 책임자가 가톨릭 신자라서 대여료를 거의 형식적으로 저렴하게 책정하였고, 안전 문제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세 째는 성당 옆에 스탠드 바가 있어서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성탄 전야미사 및 성탄 축하 예술제
1998년 12월 24일 성탄 전야미사 및 성탄 축하 예술제가 하이티엔 호텔 지하 1층에서 저녁 6시에 거행되었다.
성탄 전야 미사는 구역경배, 촛불 행렬, 미사가 봉헌 되었고 이어서 성탄 축제 예술제가 열렸다. 전신자의 촛불 입장 행렬이 들어서고, 사목협의회 회장의 개회사, 김 요한의 축시가 낭독되고 예술제 막이 오른다. 유년부와 초등부, 청소년부위 성가와 무용 발표회가 다채롭게 펼쳐져서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덥혔고 성탄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 올려주었다.
지역 반별 연극 공연이 펼쳐지고, 아마추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진지한 교우들의 연기가 신앙의 열기를 더해가고, 개인 및 가족 단위의 장기 자랑이 소개 되었다.
멍석을 깔아주면 프로 못지않은 재량을 선보이는 교우들의 열정적인 모습은 참 으로 아름다웠다.
예술제는 다과회로 이어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고 성탄전야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했다. 타국에서 이루어진 성탄전야축제는 모든 교우들의 가슴을 진한 감동으로 물결치게 했다.
부활대축일 미사
99년 4월 4일 주교좌당에서 정 삼덕 베네딕도 신부의 집전으로 부활 대축일 미사를 거행하였다. 미사 후 신자들에게 부활 계란을 배분 하였는데 각 구역에서 그림을 그려서 봉헌한 것이어서 그 의미를 더 하였다. 뉴올리언즈(現 농혜원 SPR)에서 부활 축하 음악제가 정삼덕 베네딕도 신부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성가대의 성가 합창, 중창, 청소년부 현악 중주, 피아노 협주 등 밴드 연주, 클래식 기타, 종교 음악 감상, 부활 미사곡 등의 공연이 있었다. 감독 하일용 아삽, 연출 임 노엘, 진행 신 베드로, 음악 해설 민영진 대건 안드레아, 조연출 청소년부, 송 스테파노가 봉사하였다.
사목협의회 정기 총회
1999년 1월10일 사목협의회 정기 총회가 개최되었다. 개회 기도는 지도 신부가, 신년사는 회장이 하였다.
각 분과 위원장의 98년도 업무 활동 보고가 있었고, 총무의 결산보고, 심의가 있었다. 부회장에 의해서 99년도 기본 운영 방안이 토의되었다. 지도 신부에 의한총무 및 신임 분과 위원장 임명이 있었다.
신임 분과 위원장 운영 방안이 발의되었으며, 세부 실시 계획은 2월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99년도 각분과 예산이 토의되었고, 2월 예산 확정 회의를 하기로 하였다.
사목 위원들이 지켜야 할 지침서
99년도 平恊 기본 운영 방안 목적은 청도한인 천주교회 공동체의 건전한 발전과 전 교우들의 신앙심을 더욱 굳건히 하고 平協 운영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임시 제정한다.
운영 방안은 개인 능력위주보다 신진대사를 원활히 하여 고른 참여의 기회를 주고, 공조협조체제로써 튼튼한 조직 기반을 구축하여 공동체의 힘으로 운영한다. 특수상황이 발생시 전분과장이 공동 역할을 분담하여 상호 지원체제를 확립한다.
전 임원은 청도 시 종교 국에 청도한인천주교회 교우대표로 개인 이력서 첨부 정식 등록하고, 중국 정부 종교 국 규정에 따르고 매월 제출하는 종교 활동 내용 보고서에 서명하여 합법적인 중국 국경내 외국인 종교 활동을 한다.
성가대
1999년 2월7일 성가대가 발족하였다. 3월21일 성가대를 구성하여 첫모임을 가졌다. 지도는 민지연 율리아나가 반주는 민 은진 레지나가 하였다. 4월 4일 성가대 단장에 김선혜 안젤라가 임명되었다. 성가 대원은 모두 10여명이었다.
복사단
2월28일 복사단을 창단하였다.
초대 복사단장에 손민 토마스가 임명되었고, 김해솔 프란치스코, 양우석 아론, 박홍철 라파엘, 염승익 다니엘 등 5명으로복사단이 구성되었다.
밀알테니스단
4월11일 밀알 테니스단이 창단되었다. 단장에 권용안 프란치스코가 선발되었다. 10여명의 단원이 모집되었다. 교우들의 친목 도모 및 예비신자 선교를 목표로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한다는 의사가 있으면 비신자도 입단하게 하는 등 선교에 힘썼다. 한 달에 한번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친교를 다졌다.
사랑회
1999년 5월12일 제1차 사랑회 정기회의를 개최하였다. 사제관에서 오후 12시30분에 사목협의회 회장단의 부인들,(회장: 윤정혜 아셀라, 부회장: 신영숙 소피아, 총무: 이혜훈 도미니카.) 각 지역구 반장 5명, 레지오 단장 등 총10명이며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었다. 회의 내용은 사목 협의회 의결 사항 전달 및 공동체 발전을 위한 건의 및 토의였다
지금의 구역장 협의회 형태의 모임과 거의 비슷하였다. 특별한 명칭 없이 “사랑회”라고 붙여 각 반의 반장들과 각 부서별로 모여 모임을 가지며 친교의 차원에서 가족적인 분위기로 시작 하였다.
“사랑회” 모임은 한 달에 한번 신부님의 지도하에 구체적으로 성당 안에서의 전례 예식과성당 행사 때 각 부서 별로 할 일들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들의 활동을 더 나은 길로 발전시키고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첫 남성 레지오 쁘레시디움 "하늘의 문" 창단
1999년 11월24일 첫 번째 남성 레지오 쁘레시디움 "하늘의 문"이 창단되었다. 당시 6명의 형제들로 구성 되었고, 단장에 진 중민 사도요한, 부단장 권용안 프란칙스코, 서기 조영욱 요한보스코, 회계 최영태 베드로가 선임되었다.
제5편 3대 이 성진 요아킴 신부 (1999년 12월 ~ 2002년 6월)
2000년은 가톨릭 교회에서 정한 대희년(大禧年)을 맞이하는 해였다. 1999년 성탄 전야의 자정을 기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정문을 열면서 시작된 이 대희년은 새로운 천년기인 제 3천년기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뜻 깊은 시기에칭다오 본당은이성진 요아킴 신부를 맞이하여 대희년의 기쁨을 맞이하기 위한 진정한 회개와 사랑의 실천, 새 삶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면서 대희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성진 요아킴 신부는본당의 내실화에 중점을 두고 신자들 간의 구체적인 친교 활동을 펼쳐 튼실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였다.
사목 지침과 신앙 생활의 길잡이를 구상하여 소책자로 만들어 신자들에게 지침서가 되게 하였다.
사목지침서
(정감 있는 공동체 )
청도에 교회 공동체가 설립 된지 5년 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2명 3명이 중산로 성당 에서 만나면서 시작된 우리 공동체는 300명 가까이 되는 큰 공동체로 성장 하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 공동체는 외적인 성장에 중심을 둔 탓에 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지만 내적으로는 교회의 원래 모습인 “하느님 나라를 이 지상에서 실현”하는데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각기 다른 지역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가 외국이라는 생소한 곳에서 다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다 보니 공동체의 구성원 상호간에 불일치를 가져 온 것 같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고국을 떠나오면서 낯선 이국땅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통해 어떠한 어려움도 다 극복 하리라는 희망으로 중국 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 생활을 통해 중국 생활도 많이 적응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정감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어렵고 힘이 들 때 힘이 되어주고, 기쁨을 나누는 정감 있는 공동체야 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는, 또한 하느님께서도 바라시는 공동체 인 것입니다.
우리는 올 한 해를 정감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데 사목의 1차 목표로 정해놓고 “지상에서의 하느님 나라 실현”이라는 교회의 본래 모습을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이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특별히 아래 사항들을 실천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전 신자 신앙생활
- 식사 전 성호경 긋기
- 매일 아침 기도, 저녁 기도 바치기
- 남의 허물 덮어주고, 남 칭찬하기
- 현 모임에 적극 참석하기
2. 청소년 심신 활동
- 주일 학교에 참석하기
- 주일학교 행사에 적극 협조하기
- 기초 기도문 외우기
3. 전신자 단체 가입 권유 활동
- 각종 단체에 가입 ! (레지오 마리애, ME)
- 서안 후원회 적극 활동
- 각종 취미 모임에 가입(신자 상호간의 친화도모)
4. 미사 참례 배가 운동(500명)
- 냉 담자 인도 활동
- 예비자 교리반 인도(년2회 영세)
5. 중국교회와의 유대 강화
- 중산로 성당 주일 미사 성취
- 신학생 재정적 후원
- 산동성내 기타 소 공동체 돌보기(연태, 위해, 교주, 교남, 래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
2000년 1월1일정삼덕 베네딕또 신부와 이성진 요아킴 신부 공동 집전으로 이루어졌다.
설날 떡국 잔치
칭다오지역 특성상 혼자서 명절을 지내는 형제들이 많았다.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청도에 남아 쓸쓸하게 지내는 형제들과 함께 명절 연미사를 사제관에서 지냈다. 솜씨 좋은 자매님들이 끓인떡국과 맛깔스런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윷놀이도 하면서 친교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20여명의 교우가 참석하였다.
첫 주일 학교 개교와 자모회 결성.
2000년3월26일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 및 중고등부 신임 교사임명장을 수여하였다. 모두 10명으로 이루어졌다.
신자들의염원이던 주일학교가 4월2일에 초 등부, 중, 고등부의 신앙 생활을 위하여 開校하였다. 처음 주일학교가 구성될 때에는초, 중. 고등부 합쳐 32명의 학생들뿐이어서 학년 구성에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학생 레지오 pr. 형식으로 운영이 되었다. 게다가 학생들과 주일 학교의 모든 사항들을 구역 반장들과 교리 교사의 자체 해결로 이루어지다 보니 이로 인한 문제점이 많이 발생 되었다. 이런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자모회가 구성 되었다. 주일 학교의 교육은 교사회에서 맡게 하고, 간식 준비와 행사준비 등은 자모회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주일학교가 자체적으로 활발히 성장하여 5월에는 초등부 주일학교아동절 기념 운동회를 개최하고, 8월18~19일에 초등부 주일학교 첫 여름성경학교가 화교학교에서 열렸으며 많은 청소년들이 참여 하였다.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은 어른 못지않게 청소년들에게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제일 예민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이 시기에 중국생활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하여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처음 시작되는 여름성경학교는 주님 안에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생각하자는 교육과 어려움을 잠시 잊고 휴식을 갖게 하자는 계획으로 실행되었다. 12월에는 은총잔치를 열면서 주일학교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루르드의 성모" 레지오 쁘레시디움 창단
2000년5월6일 "루르드의 성모" 레지오 쁘레시디움이 창단하였다. 초대 단장에 이 정자 카타리나가 선임되었다. 이촌에서 창단해서 그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서 활동하다가 지역 특성상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교우들이 시내로 집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단원 감소로 청도로 옮겨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회
5월14일 대학생회가 구성되었다. 회장에 강진 토마스가 선발되었다. 청도대 학생과 해양대 학생으로 이루어졌고, 13명이 첫 출발을 하였다.
반모임활성화
반 구성을 겨자씨반, 동해안반, 시내반, 이삭반, 은도A반, 은도B반, 이촌반 등으로 나누었다 이로 인해서 5개반에서 7개반으로 나뉘어 모이면서, 신부님의 사목 지침이었던 서로 돕고 곁에서 이웃이 되어 함께 꾸리는 교회를 만들어 갔다.
이 요아킴 신부는 모든 교우들 가정 방문을 하여 가정 기도와 집 축복식 그리고 짧은 면담을 하였다. 가정 방문을 통해서 교우들의 문제점을 세심하게 살폈다.
구역 활성화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반장의 역할과 활동을 강조했다. 새로운 신자를 방문하여 반모임에 초대하고, 주일 미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반모임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반원들에게 전화, 방문하여 참여하게 하였고, 참여한 반원 모두가 주인 의식을 갖고 역할을 하도록 지원했다.
반원 가정의 어려움이나 문제를 파악해 그 문제를 잘 극복 하도록 함께 기도하고 용기를 주며 격려하였다. 가족 기도 모임을 활성화하는 방안으로는 가정에서 가족 기도 모임을 하도록 권하며 성 가정이 되도록 기원하였다
사목협의회 구성 2000년9월24일이문희 베드로가사목협의회 회장에 유임되었고, 남성 부회장에 민영진 대건안드레아, 초대 여성 부회장에 이정자 카타리나가 임명되었다.
제1회 본당의 날 행사
10월22일 제1회 "본당의 날" 행사를 청도 유아 시범학교에서 개최하였다. 구성원들의 공동체성을 재인식, 연대성을 자각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하게한다는 목적으로 개최된 체육대회는 구역 기준으로 청백으로 나누어 경쟁을 하였고, 점심은 구역에서 준비하였다. 후원물품으로 행운권 추첨을 통해 교우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연길 국제학교 학생 한국 기업 취업
돈보스코회 수도회에서 설립한 연길 국제학교 첫 졸업생을 한국 기업체에 취업시켰다.
제대회
2001년 1월 제대회가 결성되었다. 제대회장에는 최은연 오틸리아가 선임되었다. 제대용품을 미사 때마다 옮겨가면서 관리를 하였다. 4명 정도의 제대회원이 활동하였다. 샹그리라 호텔로 미사장소를 옮기면서 제대용품을 캐비넷에 넣어서 호텔에 보관하게 하였다가 사용하였다.
제1차 아치에스행사.
3월29일레지오아치에스행사가 개최되었다.
황도(黃島) 교남(橋南), 교우들의 첫 반모임.
2001년 7월 매주 월요일 오후7시 및 황도 교남, 교우들의 첫 반모임이 있었다.
그 해 12월 23일 교남지역 예비신자첫 영세식 및 첫 영성체가 있었다.
사목협의회장 임명.
2001년 9월23일사목협의회장에 최영남 펠리스가 임명되었다.
죄인들의 피난처 쁘레시디움 창단
2002년 4월3일 남성레지오 쁘레시디움 죄인들의 피난처가 창단되었다. 초대 단장에 박동국 필립보가 임명되었다.
중국천주교 애국회와교류
성전 건립 기반 조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성전 건립 기반 조성을 위하여 관계자들과의 협의가 있었다.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성전 건립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현재 미사 장소로 이용하고 있는 샹그리라 호텔 측과도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 강화하기로 하였다.
성미카엘 주교좌당과의 협조를 긴밀히 하기 위하여 중국 본당 관계자들과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중요 행사시에 초청, 참관 유도 및 정기적 회동 (분기 1회)을 통한 교류를 가졌다.
주교좌당 이용 횟수를 늘리는데 힘썼다. 부활절, 성탄 미사, 영세 식 등 특별한 행사시에는주교좌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대축일이나 특별한 미사 때에만 주교좌당에서 미사를 드렸지만 그 감동은 대단했다. 이성진 요아킴 신부는 주일미사도주교좌당으로 옮겨서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종교국 측과의 면담을 자주하면서주교좌당에서는 허락을 받아 내었으나 종교국에서 반대를 해서 뜻을 펼치지 못했다.
교무금 납부
교회 운영의 밑바탕이 되는 교무금 납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전년도 미납교무금 현황을 파악하여 각반 반장의 협조 아래 완납토록 촉구하였다. 더불어 교무금을 내지 않고 있는 가정을 찾아서 모든 가정이 작으나마 교무금을 납부토록 권장하였다. 교무금 납부가정은 80여가구였다.
이 요아킴 신부는 초기 교회 때 중국의 다른 지방에 상주하는 신부가 칭다오본당에 한 달에 한번씩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한 것처럼 리엔타이(煙台), 지아오난(膠南), 라이서(萊西), 위하이(威海), 황따오(黃島)에서 한 달에 한 번씩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본당의 특별한 날이나 대축일 때에 칭다오 본당에서 미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