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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시 중구 내황동에 위치한 박효환 감목관 비. 그동안 울산 감목관으로 알려졌던 박효환은 울산 감목관이 아닌 것으로 연구됐다. 울산에는 이같은 감목관 비 3개가 현존해 있다. |
세종조부터 목장의 전문적 관리와 효율성 위해 중앙정부서 관원 파견
신라 때부터 운영돼 온 장기 동배곶목장 방어진과 함께 울산목장 관할
우리나라에서 말의 사육은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나 부여, 옥저, 고구려 등에서는 이미 목장을 설치해 소, 돼지와 더불어 말의 목양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소를 이용한 밭 갈기가 시작되었고 기마전이 보급됨에 따라 말의 수요가 증대하였다. 이와 같은 필요성에 대두됨에 따라 삼국시대에는 주로 귀족층을 중심으로 사설 목장형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원과의 관계가 깊어져 제주에 몽고식 국영목장을 설치하여 말의 증산에 힘쓰게 되면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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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 91호 기마인물형 토기. |
이 당시 말의 용도는 군사상의 전마, 통신용의 역마, 교통, 운반, 교역용의 말, 농경을 위한 농마 등 다양하였으나 식용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마정(馬政)은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며 여러 번의 변화를 거듭하여 1894년에 목장의 폐지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중대한 일로서 인식되어 왔다.
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마정에 대한 필요에 의해 마필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조선 초기의 말 정책을 살펴보면 계절에 따른 말의 관리를 위하여 건초로서 겨울을 대비하고 더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초옥(草屋)을 지어 보호하고 좋은 종마(種馬)의 번식을 위하여 거세(去勢)를 금지하며 병들어 거세해야 할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낙인(烙印)을 찍도록 하는 등 말의 보호와 육성에 대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407년에는 각 지방마다 말의 육성(育成)과 치료(治療) 등을 위하여 중앙의 사복시에는 수의(獸醫)를 두어 각 지방 목장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또한 여러 가지 관리상의 문제로 각 고을마다 말을 관리하여 기르도록 하고 중앙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며 변고(變故)가 생긴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책임을 지우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이후 있어온 목장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여러 섬에 있는 목장의 관리가 허술한 것을 지적하며 제주와 풍토(風土)가 비슷한 전라도 해변의 바다를 연한 넓은 땅을 중심으로 목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목장(牧場)의 말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감목관(監牧官)은 세종 7년을 기점으로 종6품(從六品)의 관원(官員)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말이 크게 번식하지 않는 등 실효(實效)가 없었다.
그 후 세종 23년에는 ‘각 도의 감목관을 2품 이상의 현관(顯官)을 지낸 바 있는 부지런하고 근신(勤愼)하여 공사(公事)에 힘쓰는 자’를 뽑아 임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목장에 대한 정책은 시기에 따라 전문 감목관제나 지방의 수령이 함께 관리하는 겸감목관제(兼監牧官制) 등으로 여러 차례의 변화(變化)를 겪기도 하였다.
말에 대한 정책은 대체적으로 사복시(司僕侍)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형식적인 위계질서 상으로는 병조(兵曹) 소속으로 되어 있었으며, 각도 관찰사나 지역의 병마절도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일의 성격에 따라 이조와 병조, 비변사, 의정부, 형조, 예조 등 다양한 각사(各司)가 관여되어 실질적으로 국가의 중대사(重大事)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수 많은 목장들이 황폐화되었다. 그런데 효종이후 북벌계획과 국가 경제적인 안정을 찾은 후 다시 목장에 대한 관리의 필요성에 의하여 목마산업이 장려되었다. 이후 많은 목장이 통합되고 폐쇄되는 과정을 밟으면서 후기까지 존속된 목장 중에서 말을 기르던 곳은 모두 46개소이다. 이 목장들은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목장 소재지의 수령을 통하여 지방 행정과 마필관리를 함께 하였던 겸감목관제로 운영하거나 국가에서 전문 관리인으로 감목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전국의 목장은 겸감목관(兼監牧官)과 감목관(監牧官)이 모두 19곳으로 나누어 관리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 9곳만 감목관이 파견되었다.
울산목장은 경상도에서는 진주의 목장과 함께 감목관이 파견된 9곳 중의 하나로 울산 방어진목장과 장기 동배곶목장을 함께 관리하였다. 울산목장(방어진. 장기 포함)이 관리한 마필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전국 목장에서 약 10%의 규모를 가진 강원도와 경상도를 이어내린 동해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목장이었다.
울산목장은 좁은 의미로 울산(방어진)목장이라 부르며 넓은 의미로는 방어진목장과 장기목장을 포함하여 울산목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울산(방어진)목장을 북쪽에 있는 장기목장에 대비하여 남목(南牧)이라 한다.
북목 장기목장은 신라 때부터 있어온 유서 깊은 목장이었으나 목장 소재지 주변의 읍의 크기에 따라 울산목장에 소속되게 되었다. 남목, 즉 울산(방어진)목장은 지금의 울산시 동구지역에 있었던 목장으로 목장의 설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총 2차례의 목장 이전(移轉)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시대에 따라 구마성(舊馬城)과 신마성(新馬城)이라 불리고 있다.
신마성의 설치 연대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감목관 파견 시기와 기타 구마성의 설립연대 및 목장 전반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未洽)한 실정이다. <울산 동구지>에서는 간략한 언급만 있고 <울산 광역시지> 는 거의 언급이 없는 실정이다.
울산지역의 향토사학에서 기존에 연구된 자료에 의하면 울산목장의 감목관에 대해서는 현재 지역에 남아 있는 선정비(善政碑)를 기준으로 변엽, 황경 등 몇 사람을 언급하였으나 감목관 역임 연대가 잘못되었거나 심지어는 내황동에 있는 감목관 박효환 같은 경우는 울산감목관을 역임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울산 목장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번에 연재하는 내용들은 울산목장에 대한 하나의 시도로 본다.
앞으로 울산 목장의 다양한 부분에 대하여 제 학자들의 좀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