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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학 논쟁들
1.1. 삼위일체론
1.1.1. 사도신경
초대교회 4가지 주제들, 즉 로마제국, 핍박들, 교부들, 그리고 이단들 가운데 네 번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 첫 번째로 5장에서 ‘영지주의’에 대해 배웠다. 성민은 영지주의가 이단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사상임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영지주의가 기독교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이런 사실을 알기 전에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용(寬容, tolerance)을 가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관용을 가진 기독교인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교회사를 배우면서 이와 같은 행동들은 이미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경험되어졌던 것임을 알았다. 그들의 시행착오로 인해 신앙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스럽다고 성민은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사 학교가 아니었다면 . . . ? 휴~”
이제 성민은 신앙의 그릇됨, 즉 이단성 있는 신앙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신앙, 즉 믿음을 간직해야하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이 과연 전통적 신앙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고 이어받았는지 매우 궁금했다. 아니 조금 긴장되기도 했다. 과연 자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두렵기도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외쳤던 그 함성의 의미를 정말 알고 싶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근원으로”(ad fondes!)라는 슬로건을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발자취, 흔적, 또는 역사를 배우면서 자신의 정체성, 기독교인의 정체성, 또는 기독교인의 긍지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정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러한 긍지를 누구든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분들이 여기 교회사 학교에 모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관이나 기독교 역사의식이 한국교회에 널리 보급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성민은 오늘도 가진다.
“지난 시간에 ‘이단들’이란 주제 아래 ‘영지주의’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들도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몬타누스를 따르는 몬타누스파와 마르키온이었습니다. 1~2세기에 영지주의적인 신앙들이, 즉 이단성 있는 자들이 있었지만 핍박 시기였는지라 구체적으로 이단 형태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핍박이 종결되는 4세기 초에 이르면서 이단성을 가진 자들은 무리를 지어 파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관한 그릇된 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론과 신론이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라은성교수의 교회사 맥(脈)잡기 1, 정통과 이단』의 1~2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아무튼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이단성을 가진 자들이 핍박에서 벗어나면서 서서히 세상 속으로 등장하였고 무리들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에 관련된 교리였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the Trinity) 사상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긴 이유는 믿음의 중요한 내용이 바로 ‘신론’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우리에게 전해준 믿음의 형식, 즉 공식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사도신경’입니다. 이 외에도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칼케돈 신조’ 등이 있는데요. 그 가운데 우리 한국교회는 ‘사도신경’을 통해 예배 때마다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죠. . . .”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여기에 2006년 1월 호 ‘빛과 소금’이라는 월간잡지에 나온 내용인데요. 교수님이 말씀하신 ‘사도신경’에 관한 글을 담고 있어요. 이 내용에 적힌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요?”
사도신경
“그래요. 제가 잠시 보도록 할까요?” 교수님은 자매로부터 잡지를 받아들고 잠시 훑어보신다. 그러신 후, “예, 동의합니다. 특별히 다음의 부분입니다. 저희들을 위해 읽어주시겠습니까?”
‘사도신경’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 하나는 이단들에 반대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 시에 신앙고백을 위함이었지. 1세기부터 기독교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친 ‘영지주의’가 있었단다. 이 ‘영지주의’는 물질세계가 악하고 영적세계가 선하다고 하는 이원론적 혼합주의였어.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악한 물질세계를 창조할 수 있느냐고 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구약성경을 부인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마르키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지. 또 영지주의는 예수님께서 악한 육체를 갖는 성육신이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예수님이 사람처럼 보일 뿐이라는 ‘가현설’을 주장했던 이단성 있는 사상이었어.
“그러면 교수님! 사도신경이 언제 작성되었습니까?” 앞자리에 앉은 한 형제가 묻는다.
“그렇군요. 제가 알기로는 그 글에서 소개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 부분도 읽어봐 주시겠습니까?”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정확한 일자를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단다. 4세기 말 전에 ‘사도신경’이 사용되지 않았지. 그것의 분명한 이유는 앞서 말한 325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지금의 ‘사도신경’을 따라 신조를 작성하지 않은 것을 보아 알 수 있지. 그런데 ‘사도신경’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기록상으로 볼 때, 약 380년경에 밀라노 감독 암브로스(339~397)가 로마감독 시리키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최초로 언급되었단다. ‘사제들의 가르침을 접하기 어렵다면, . . 로마교회가 항상 보존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단다. 암브로스라는 분은 어거스틴의 스승이었지.”
“약 15년 후, 그러니까 거의 4세기 말에 이르러 루피누스(410년 사망)라는 사람은 ‘사도신경’을 해설하면서 ‘사도신경’이 오순절 이후 사도들에게 기인한 것이라고 언급했어. 하지만 루피누스의 설명에는 많은 의혹이 있지. 그래서 15세기 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활약했던 박식한 저자 로렌티우스 발라(1406~1457)는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라고 로마 카톨릭을 향하여 공격하기도 했단다. ‘사도신경’의 기원이 불명확하다고 해서 그 내용마저 사도적이지 않다거나 신약성경과 일치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란다.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기에 ‘사도신경’을 거부해서 안되는 것은 그것이 사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성경적 교리를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형식이었다는 것이죠. 떠도는 소문처럼 12명의 사도들이 직접 쓴 것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도신경 내용의 핵심이 우리가 지금 배우고자 하는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그 고백서에는 삼위 하나님에 대해 세 번의 ‘믿는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우리 아버지를 믿사오며 . . .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 . 성령을 믿사오며’ 그런 후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으로 끝맺음 합니다.”
1.1.1.1. 위증서
“교수님~ 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요. ‘로렌티우스 발라’는 누구인가요? 그가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라고 로마 카톨릭의 주장을 공격했다고 했는데 . . .”
로렌조 발라의 모습
“음~ 좋은 질문입니다. 발라(1406~1457)는 르네상스 시기 이태리 인문주의자, 수사학자, 법률가, 그리고 교육가였습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도 능통했습니다. 1431년 사제가 되어 로마에 있는 사도적 비서직을 맡았고 여기저기서 수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알폰소의 개인 비서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교회에서 그릇되게 가르치는 몇 가지 잘못들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우리가 읽었던 사도신경이 12사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발라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439년 ‘콘스탄틴 위증서’라는 글을 썼습니다. ‘콘스탄틴 기증서’가 교황청의 권력을 지지하기 위해 위조된 문서임을 밝혀낸 것입니다. 로마제국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증명은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발라의 이러한 증명을 인용하며 교황권력에 도전한 것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그러면 발라가 로마 카톨릭인들이 주장하는 교황청의 권력의 근거가 되는 ‘콘스탄틴 기증서’를 거짓이라고 밝혔다고 하셨는데 무엇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밝힐 수 있었습니까?”
“‘콘스탄틴 기증서’는 어디서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기원이 애매모호합니다. 어두운 중세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학자들은 9세기 경 위조 칙령집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 문서로 인해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틴이 이태리 지배권을 교황에게 이양했다는 것이고,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은 후 서방지역 지배권을 로마감독 실베스터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증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로렌티우스 발라가 쓴 ‘근거 없이 주장된 콘스탄틴 기증서의 위증에 대한 소고’를 직접 읽어보도록 합시다. 아래의 글은 코올만(Christopher B. Coleman)이 번역한 서문입니다.”
발라가 쓴 ‘콘스탄틴 위증서’의 한 페이지
콘스탄틴 기증서는 8세기 중엽에 쓰인 것으로 허위 이시도리안 칙령집(847~853)에 들어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의 어느 부분들은 교회법, 안셀름의 작품, 두스데디트의 작품, 그리고 그라티안 작품(교회법)에 들어 있기도 하다. 그 목적은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감독 실베스터(314~336)의 손으로 세례를 받고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은 후, 다른 네 곳의 대주교지역들에 대한 지상권과 모든 성직자들의 머리로서 특권을 갖고 있음을 확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후 그에게 라테란 궁을 비롯한 세상의 여러 부분들의 소유권을 이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성직자는 모든 특권을 가진다는 억지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특권을 실베스터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준다는 것이다. 교황의 말고삐를 붙잡으면서 이러한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실베스터에게 로마, 모든 이태리 지역, 그리고 서방 지역을 영원토록 로마청의 권한 하에 둔다고 콘스탄틴은 맹세했다고 한다. 그 결과 지상의 황제는 교회권에 종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 . 발라보다 수년 전에 니콜라스 쿠사누스는 이것이 위조된 것임을 비판했다. 하지만 발라의 비판은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문학적인 형태를 갖추어 비판했다.
“이어서 코올만은 27~29페이지에 이르러 5가지로 그것이 위증서임을 증명합니다. 간략히 말하면 . . .”
1. 콘스탄틴과 로마감독 실베스터가 그런 권한을 줄 수 없었고, 받지도 않았다.
2. 그런 권한을 콘스탄틴이 소유하지도 않았다.
3. 콘스탄틴은 로마감독 실베스터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4. 그래서 기증서란 있을 수 없다.
5. 지금까지 소유한 교황권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역사를 이렇게 까지 왜곡시켜 사람들을 수백 년 동안 속였다고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은 빈번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왜곡시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느껴봅니다. 우리의 주제에서 많이 벗어났는데 되돌아가도록 할까요?”
1.1.2. 단일신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분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터툴리안’이라는 교부, 즉 변증가입니다. 터툴리안만 아니라 이레니우스와 같은 교부들도 한결 같이 ‘영지주의’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물론 이레니우스가 터툴리안보다 훨씬 더 ‘영지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두 분 역시 영지주의를 경고하면서 동시에 삼위일체에 관해 강조했습니다. 영지주의 사상이 삼위일체 사상에 큰 해를 끼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더욱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해 당시 사람들은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생 하시는 아들이라고 했으니 또는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낳으셨다고 하니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종속하는 것을 보니 아들은 아버지보다 열등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성령 하나님은 보내심을 받는 분이시기 때문에 더욱 열등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즉 교부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동일하신 분이심을 강조하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이 서로 동일하심을 강조하는데 노력했던 인물을 오리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적 본질 면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리겐에 의하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모두 위격, 즉 신의 내적인 관계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각 위는 육체적인 구별로 나타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삼위일체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한 가지는 ‘위격’의 의미입니다. ‘일체’라는 것은 신ㆍ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한 분이시라는 것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삼위일체에서 ‘삼위’의 ‘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늘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심을 오해하며 강조하다 보면 두 가지 그릇된 이단성 있는 사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양태론’(樣態論, modelism)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론’(養子論, adaptionism)입니다. 양태론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 .”
“교수님! 질문이 하나있는데요. ‘단일신론’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제가 초대교회사에 관한 책자를 읽을 때에 늘 삼위일체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용어인데요.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어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단일신론’(單一神論, monarchianism)이란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만을 강조하는 사상이지요. 문자적으로 설명하면, ‘monarch’(모나크)라는 말이 ‘군주’라는 뜻을 갖고 있죠? 그럼 하나님께서 군주처럼 그리스도와 성령을 지배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군주체제식의 신관이라 여기는 것이 좋죠. 성부 하나님이 가장 우두머리라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단일신론이 크게 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양자론적 단일신론’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저는 여기에서 그냥 양태론과 양자론이라 각각 부르는 것이죠. 또는 양태론을 가리켜 ‘사벨리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양자론을 ‘아리안주의’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단일신론을 다시 자세하게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을 흑판에 아래와 같이 쓰셨다.
단일신론
양태론적 단일신론
사벨리안주의
양자론적 단일신론
루키안
오리겐주의
“그런데 교수님, 왜 양자론을 오리겐주의와 루키안으로 나누는 것입니까?”
“아! 예~ 제가 계속해서 설명하겠지만 질문하셨으니까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양자론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단순히 하나님이 부여하신 어떤 능력으로 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1에 나오는 ‘로고스’라고 보는 것이죠. 그 이론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지만 세례를 받기 전까지 로고스로 힘을 공급받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죠. 이런 사상을 처음으로 암시하고 제공했던 자가 바로 오리겐입니다. 오리겐은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한다고 주장했던 자입니다. 이러한 종속설이 바로 아리안들에 의해 채택된 것이죠.
1.1.2.1. 양태론
히폴리투스의 모습
“양태론은 삼위일체의 일체를 고수했지만 삼위일체의 위에 대한 설명에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한 분 계시는데 창조 때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구원을 이루실 때는 성자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그리고 구원 사역을 성취해 가실 때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 즉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세 모습으로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어떤 때는 아버지로, 다른 때는 회사원으로,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아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는다는 것이죠. 한 분 하나님을 유지했지만 그 하나님의 삼위의 구별을 짓지는 못했다는 것이죠.”
“이런 양태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자는 프락세아스(Praxe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프락세아스는 로마도시에 나타나 당시에 유행하던 양자론에 반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정통으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동시에 ‘영지주의’에 관해 어느 정도의 답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태론을 선호했습니다. 그를 이어서 ‘노에투스’, ‘에피고누스’, ‘클레오메네스’ 라는 사람들이 그의 양태론을 발전시켰습니다. 프락세아스처럼 이런 사람들도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이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의 고통은 곧 성부 하나님의 고통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부 고난설’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성자 하나님이 죽으신 것은 곧 성부 하나님이 죽으신 것으로 여겼죠.”
“양태론이 더욱 발전하게 된 것은 로마감독 제피리누스와 칼리스투스 때에 활약했던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에 의해서입니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은 세 이름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다른 이름을 가진 것에 불과하고 다른 사역의 형태를 나타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설명으로 인해 방금 말한 두 명의 로마감독들도 그의 견해를 추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혜성처럼 나타났던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양태론을 추종하고 있으며 교회 재산을 횡령하는 두 명의 감독들을 비난했습니다. 로마도시에서 또 다른 교회를 세워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으려고 했으나 황제에 의해 ‘적대교황’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쓴 『모든 이단들에 대한 논박』(Philosophoumena)은 이때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지금까지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대체적으로 양태론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지네요.”
“방금 설명을 통해 그렇게 만일 느꼈다면 제가 설명을 잘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정통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신앙 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태양, 빛, 그리고 열로 설명했다면 죄송하지만 양태론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했다는 것이죠. 물론 잘못된 설명입니다. 비록 한 분 하나님이심을 설명할 수 있지만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단성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면 다른 설명, 즉 양자론에 관해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1.1.2.2. 양자론
세례 받는 예수님에 대한 아리안들의 모자이크
“양태론이 정통적 삼위일체 설명으로 오해할 수 있다면 양자론적 설명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따르는 형태이기도 합니다. 양자론은 약 190년에 로마에서 그 자취를 드러냈습니다. 양태론이나 양자론 모두 로마에서 그 사상의 시작점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흥미 있는 일입니다. 데오도투스라는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로마감독 빅토르(189~198)는 데오도투스를 출교시켰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데오도투스라는 사람이 로마감독 제피리누스(198~217) 시기에 위와 같은 양자론을 억지 주장했습니다. 그런 후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200~275)은 완전하게 도덕적으로 생활한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또 지속적인 이적들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268년 안디옥의 지역노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이제 양자론적 설명은 사모사타의 바울 다음으로 안디옥의 루키안과 그의 제자 아리우스에게로 연결됩니다. 이 중에서 아리우스가 양자론을 가장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이단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 ‘아리안’(Arian)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사상을 가리켜서 ‘아리안주의’(Arianism)라고 합니다."
1.1.2.2.1. 루키안
“아리우스의 스승 루키안은 사모사타 출신으로 안디옥에서 사립학교를 운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약 312년 순교한 자이기도 했습니다. 루키안은 예수님의 인간 의지와 인성을 강조했던 사모사타의 바울을 추종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성령에 충만한 초자연적 인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상태의 인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을 초자연적 인간으로 여기는 루키안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관해서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보고 아리우스만 아니라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라는 자도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유세비우스라는 사람이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입니다. 이분은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를 최초로 쓰신 분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정치적 인물로서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아리안 편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인물입니다. 혼동되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 . . 눈치를 보니까 벌써 혼동하시는 분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네요.”
“아무튼 양자론은 이론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20세기 초 포스트모더니즘(후기 현대주의, postmodernism)의 큰 이슈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 즉 ‘역사적 예수님’(historical Jesus)을 찾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단지 모범을 보인자와 도덕군자로만 보려고 했습니다. 구원과는 관심 없고 지상에서 올바른 삶 또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인인 양 억지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우리 주위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1.1.2.2.2. 아리우스
아리우스
“아리우스라는 사람에 관해서는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조직신학에서도 끊임없이 줄기차게 등장하는 이름이 될 것입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켜 ‘아리안주의’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그는 자신의 신학사상을 무리를 지어 분파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가장 이단적 영향을 많이 끼친 자입니다. 결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아리안주의를 받아들인 지역은 대체적으로 이슬람으로 인해 점령당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구약성경 선지서들 중 하박국말이죠. 악한 자가 흥왕할 때 하박국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그가 받은 답변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더 악한 자가 악한 자를 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죠.”
“아리우스(약 256~336)의 개인적 기록을 우리는 접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311년 이후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장로 또는 사제로 사역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그는 이미 상당히 나이가 든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 루키안처럼 모범적 삶을 위해 금욕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루키안의 다른 제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교회 역사가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와 친분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가르치며 하나님이 아니심을 가르쳤습니다. 313년부터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이에 대하여 성자(聖子, the Son)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동일하신 분임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관해 교회 역사가인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철학자 소크레테스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하하하. 우리를 위해 강경희씨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리우스라 불리는 장로는 합당한 논리적 사고를 행하는 자였습니다. . . 그는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고 하면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시작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자가 없었던 때가 있다는 의미죠.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독 알렉산더는 이 사태를 신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320년에 이집트지역 감독들 약 100여명이 모인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토록 하고 출교시켰습니다. 또 그의 직분도 파직했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감독 알렉산더에게 서신을 썼습니다. 그 서신 안에서 아리우스의 이단성을 확연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서신의 일부를 방금 읽으신 강경희씨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하나님은[성자는] 항상 성부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성부가 아니셨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십니다. 무에서 창조된 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영원하신 분)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분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자는 피조물이며 사역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본질에 있어 성부와는 다를 뿐만 아니라 본성상 성부의 참된 말씀이거나 참된 지혜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했을 뿐입니다. 모든 이성적 피조물들처럼 변덕스러운 성품을 지녔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에 의해 설명하기 어려우신 분입니다. 그에게 보이지도 않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성부를 완전하게 또 정확하게 알지도 못합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구별도 할 수 없는 자일뿐입니다. 성자는 자신의 본질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되었던 것이고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우스의 사상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1. 로고스(logos)와 성부는 동일한 본질이 아니고,
2. 성자는 피조물에 불과하고, 그리고
3. 성자가 세상을 창조한 자이기는 하지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던 자이다.
“어떻습니까? 문제가 일어날 만 한 것이죠?”
“하지만 아리우스는 이에 대하여 불평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동방 교부들을 부추겼습니다. 서신들을 써서 루키안의 제자들에게 보냈습니다. 자신의 견해가 루키안의 견해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이단자로 정죄 받았다고 자신의 억울함을 알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곳에 다니면서 자신의 사상을 가르치고 추종자들을 만들었습니다. 일전에 이단의 정의에서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이단성을 가진 자들이 무리를 형성하여 파당을 지으면 이단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 내에서 큰 문젯거리로 나타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리우스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보낸 서신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고명철씨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 당신에게, 신실하고 정통신앙을 지니신 유세비우스에게, 주님에게 주어진 진리에 대해 전권을 행사하는 감독 알렉산더에 의해 부정하게 핍박을 받는 나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로 막 떠나려는 암모니우스를 통해 당신에게 정중한 인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를 위한 형제애를 당신에게 알리고, 또 앞에서 언급한 감독, 즉 알렉산더가 우리에게 돌을 던지지 않은 것 외에 모든 것으로 핍박하는 그것에 관해 알리고자 합니다. 그는 우리를 무신론자라하여 도시 밖으로 추방시켰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성자에 관해 공개적으로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자는 성부처럼 태어나지 않은 분이며 영원하시다고 했습니다. 성자는 곧 하나님으로서 태어나지 않은 분으로부터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 . . 이에 반해 우리가 믿고, 가르쳤고, 그리고 현재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성자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지 않은 것의 어떤 부분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분은 성부의 본질로부터 유래되지도 않았고 시간 전에 존재했던 성부의 의지와 섭리에 의해 존재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오래 전에 태어나셨지만 불변하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태어나기 전에, 창조되기 전에, 확립되시기 전에는 그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분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성자가 시작이 있었고, 하나님은 시작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 일로 우리는 현재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아리우스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일어나면서 로마제국에 큰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끝나고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밀라노 칙령’이라고 부릅니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에 누구도 어떤 종교라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억눌렸던 이단성을 지닌 자들이 자신의 사상들을 유포시켜 무리들을 만들거나 파당을 짓게 되므로 로마제국 내에 혼란이 있게 된 셈이죠. 당시 로마제국의 인구 약 15%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추산되는데 그들은 많은 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생겨났다가보다는 핍박 시절 아리우스와 같은 사상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를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 즉 영지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들의 사상이나 아리우스가 말하는 사상이 유사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아리우스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고 여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정치적 안정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요구된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아리안주의 이단으로 인해 교계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서로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틴 대제는 스페인 감독 호시우스를 통해 아리우스와 알렉산더 간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세계 최초의 범교회 종교회의가 325년 니케아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1.1.3. 니케아 범종교회의
“범종교회의와 교리논쟁과 연관을 짓는 것이 1차 범종교회의를 배우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집니다. 1~2차 범종교회의는 삼위일체론 논쟁과 관련을 맺고 있고, 3~4차 범종교회의는 기독론 논쟁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것을 써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는 중요하겠지만 성민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1차 범종교회의(니케아, 325)
삼위일체론
2차 범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381)
3차 범종교회의(에베소, 431)
기독론
4차 범종교회의(칼케돈, 451)
“교수님! 질문이 있어요. ‘종교회의’라는 용어와 ‘범종교회의’라는 용어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요?” 민상석씨가 물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4.2.4. 오리겐’에서 설명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복습을 위해 반복하도록 하겠습니다. 325년 이전 범종교회의가 있기 전까지 지역 감독들의 모임, 즉 종교회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synod’(시노드)가 있었는데 감독들이 세상을 떠나면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거나 교회적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해결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약 190년 부활절 일자를 정하는 일에 있어 문제가 있었고, 약 250년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정기적으로 감독들의 종교회의를 가졌습니다. 갖가지 종교회의를 통해 정통 신앙들을 점검하게 되었죠. 그런데 ‘범종교회의’는 지역적으로 볼 때 범지역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황제에 의해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수적으로도 과히 지역종교회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범종교회의는 대규모였습니다.”
“그럼 교수님, 지금까지 몇 차례의 ‘범종교회의’가 있었는지요?” 민상석씨가 계속하여 질문했다.
“민상석씨! 매우 중요한 질문들을 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살펴보게 될 1~4차 범종교회의들, 즉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그리고 칼케돈 회의들까지를 프로테스탄트들은 범종교회의로 인정합니다. 1~7차 범종교회의를 동방정교회에서는 인정하는 것에 반해 로마 카톨릭은 1~21차 범종교회의를 억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수님! 왜 그렇게 범종교회의들에 관해 기독교 내에서도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지요?”
“예~, 민선생님은 저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군요? 4차 범종교회의가 451년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로마 카톨릭주의가 일어나면서 정통신앙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카톨릭’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주의’가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리고 동방정교회의에서는 1~4차에다가 5~7차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모인 장소가 대체적으로 동방지역입니다. 8차부터 지역은 서방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죠. 여기에다가 자신들이 7차까지 만을 범종교회의로 인정한다는 면에서 자신들만이 정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여 ‘Orthodoxy’(정교회)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8차부터는 서방교회에서만, 즉 로마 카톨릭만 범종교회의를 인정하고 있죠.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궁금증이 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니케아 범종교회의에 관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318명 정도의 감독들이 동방교회를 어지럽혔던 현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회집했던 것입니다. 225명은 동방교회에서, 4명은 서방교회에서, 그리고 그 외에는 소속이 불명확한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당연히 1차적 문제는 아리안주의였고, 2차적 문제는 분파에 관한 현안이었습니다. 키프리안을 다루면서 등장했던 노바티안 분파자들과 도나투스파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올바른 교회임을 주장했던 것을 기억하시겠죠?”
Sumela 수도원에 그려져 있는 니케아 범종교회의 그림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순전한 피조물이었고, 무(無)에서 창조되었고, 타락할 가능성을 언제든 지닌 사람이었고, 양자된 하나님의 아들이지 본성상으로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리고 이름으로만 하나님으로 불렸다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설교에서, 저서에서, 그리고 서신들을 통해 널리 알리면서 추종자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아리우스 보다 앞서는 교부들의 가르침과 그의 주장과 비교해보면서 아리우스의 주장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삼위일체’(Trinity)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은 세례의 형태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으로서 자신의 제자들이 되려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신앙을 고백할 때 위의 이름들로 세례를 베풀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셨습니다. 이러한 ‘성삼위일체’의 세 이름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 진리이며 중요한 진리였습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에 잘 나타나 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아리안주의가 있기 전에 기독교계에서 쓰인 2~3세기의 작품들을 보면, ‘성삼위일체’에 관한 가르침과 고백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비교해볼 때 아리안 가정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죠. 약 323년 아리안 위기가 일어났을 때 삼위일체론에 반대하여 아리안을 따르는 자들과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교회 지도자들 간의 갈등은 거의 5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사에서 최초로 정부, 즉 로마제국이 교회 문제나 교리논쟁에 간섭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혁신자들의 편에 서서 전통적 진리를 변호하는 자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범종교회의에 대한 불행한 사실은 그 범종교회의에 대한 자세한 회의록을 우리가 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지식은 대체적으로 당파적인 저자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당시 종교회의에는 두 명의 저자가 참석하였는데 회의를 소집한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찬미자이며 이단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자인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회의록이 쓰였다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범종교회의의 기록들은 매우 부족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릇된 자신의 견해를 아리우스는 서신들을 써서 유포하며 추종자들을 모았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든 인물들 중 루키안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로마제국이 ‘4두 정치’아래 있을 때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루키니우스의 배우자며 콘스탄틴 대제의 누이였던 황후 콘스탄티아,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매우 가까운 친분을 가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342년 사망)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매우 정치적이죠. 아리우스는 정말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인물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입니다. 무슨 혜택이라도 볼까 해서 말입니다. 제가 너무 직설적인지는 몰라도 실제 그렇습니다. 여기의 유세비우스는 후에 339~342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이 됩니다.”
“점점 교회적 문제가 의견 불일치로 치닫는 것을 간파한 콘스탄틴 대제는 호시우스를 급파하여 사건 진상을 파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호시우스는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시리아 등지에서 모인 56명의 감독들의 견해를 듣게 되었는데 모인 감독들은 만장일치로 아리안 견해를 정죄하고 출교를 명했습니다. 이제 325년 봄이 되었습니다. 지역 종교회의를 개최해서 교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콘스탄틴 대제는 5월 20일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여름 궁정에서 범종교회의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318명의 감독들이 로마제국 여기저기에서 참여했습니다.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감독들로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소아시아, 페르시아, 다뉴브 강과 에게 해 지역, 그리고 그리스에서도 참여했습니다. 더욱이 아프리카, 스페인, 고올, 그리고 이태리에서 각각 한 명의 감독이 참여했습니다.”
“종교회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는 참여했던 감독들 가운데는 핍박 시절에 불구된 몸을 가지고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한 콘스탄틴 대제는 참여한 감독들에게 간단한 환영 연설을 하고 격려했습니다. 교회의 모반은 자신에게 매우 불편한 사건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범종교회의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죠. 종교회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만장일치로 아리우스 신학이 정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참석한 감독들 318명 가운데 아리우스는 겨우 22명의 지지를 받았을 뿐입니다. 다음은 종교회의가 작성한 ‘니케아 신조’입니다. 채송화씨가 읽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믿는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특이하게 나셨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본질(ousia, 오우시아)로부터 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오,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셨지만 창조되신 분이 아니시며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우스)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하시고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시었고,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또한 성령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그분이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거나, 그분이 나시기 전에 계시지 않았다고 하거나, 무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하거나,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다른 존재들이나 본질로부터 만들어졌거나 창조되었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발표되는 니케아 신조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 깊게 새겨야할 단어는 ‘동일본질’, 즉 호모우시우스라는 단어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동일하신 본질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적 단어가 아님에는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호시우스가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단어를 사용하여 삼위일체를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첨가했다고 여겨집니다. 아무튼 감독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이 신조를 통과시켰고 황제 콘스탄틴 대제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삼위일체를 다룬 후 감독들은 다른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분파자들에 관한 문제였죠. 분파자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보편교회의 가르침을 수용해야한다고 결정 내렸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부활절 일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적 유월절에 부활절을 지킨 것처럼 로마인들도 지켜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 감독들은 이러한 결정을 자신의 교인들에게 통보했습니다.”
“끝으로, 감독들은 20가지 교회법(canons)을 선포했습니다. 5가지 교회법들은 최근 핍박 중에 신앙을 포기했던 자들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배교했던 자들은 12년의 참회를 행한 후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참회가 완성되기 전에 죽게 되거나 몸이 아프게 되면 ‘노자성체’(路資聖體, Holy Viaticum)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타락한 교리 입문자들은 3년간의 참회를 행해야만 하고 군대를 떠났다가 다시금 군입대를 해서 황제 리키니우스를 대패시킨 기독교인들은 13년 동안 참회를 행해야만 했습니다.”
“교수님! ‘노지성체’가 무슨 뜻입니까?”
“방금 설명했던 것처럼, ‘노자성체’란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체, 즉 성찬에 대한 로마 카톨릭 용어입니다. 그렇다고 8번째 성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틴어로 ‘바티쿰’(Viaticum)이란 ‘여행을 위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비아’(via)의 형용사 형태입니다. 그래서 풀이하면 ‘여행을 위해 제공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성체는 죽은 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여행하는 죽어가는 사람을 위로하려고 베풀어지는 음식을 말합니다. 만일 죽어가는 사람이 단단한 음식을 취하지 못할 경우 성체는 빵보다는 잔만을 제공합니다.”
“이단성을 가진 분파자들을 사면하는 내용도 두 가지 법령에 담겨 있었습니다. 75년 전에 있었던 ‘적대 교황’(antipope) 노바티안으로 시작된 분파자들은 참회하는 죄인들을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나 성의 없게 다루었다고 불평했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노바티안은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 핍박(250) 시기에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므로 은혜로부터 멀리 떠난 자들이 영원토록 교회로부터 추방당해야한다고 주장하여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고, 교회가 핍박의 시기에 배교한 자들을 면제할 권한을 소유했음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스스로 ‘순결한 자들’(the pure)이라 칭하고 우상숭배, 성적 범죄, 그리고 살인죄를 멀리했습니다. 재혼을 성적 범죄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소아시아에 노바티안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범종교회의는 이러한 노바티안들을 용납하고 보편교회 성도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 분파자는 사모사타의 바울, 즉 안디옥의 악명 높은 감독이었습니다. 268년 감독들의 지역 종교회의에서는 그의 이단성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Paulinians)은 다시금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직자로 재개하려면 다시금 수임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다음 10가지 교회법은 성직자 생활의 여러 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거세한 자들은 수임을 받을 수 없고, 최근에 믿음을 소유한 자도 수임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가지 교회법은 세 지역, 즉 대주교구, 즉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범종교회의는 고대 관습을, 즉 알렉산드리아 대감독에게 이집트, 리비야, 그리고 펜타폴리스 교구를 지배하도록 했습니다. 이들 중 예루살렘 대교구가 가장 높은 교구라고 밝혔습니다.”
“위와 같은 많은 일들을 다루었던 니케아 범종교회의는 325년 6월 19일에 열린 후 4주 동안 개최되었습니다. 이 해는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틴 치정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자~ 기나 긴 아리안 논쟁이 삼위일체론을 해결한 것처럼 속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의도에는 무엇인가 만족치 못하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래서 성민은 교수님께 질문하기로 했다.
“교수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삼위일체 논쟁을 위해 종교회의가 개최되었고, 만장일치로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모여 아리안 사상을 정죄했고, 그리고 신조까지 만들었는데 또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잘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성민씨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제가 2차 범종교회의가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잖습니까?”
“그것은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다른 문제들을 다뤘던 종교회의였다고 여겨지는데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2~4차 범종교회의도 모두 삼위일체 논쟁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교수님의 말씀대로 1차 범종교회의로 삼위일체론이 마무리 되지 않았다는 말씀이 되잖아요. 허참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니케아 종교회의 결정에 아리우스가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적인 힘을 통해 자신의 억지 주장을 계속적으로 함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정치적 잔꾀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리우스의 견해는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근본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매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황제 콘스탄틴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헛된 욕망은 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의 생각입니다. 더욱이 그는 범종교회의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만하면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 시작부터 그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작성한 자신들의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승리할 자신을 갖고 있었기에 너무 서두른 것이죠. 이것이 결국 단점으로 드러나게 되었죠.”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감독들이 아리안 문서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감독들은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힘껏 정통신앙을 고수하면서 변호했던 교부는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그는 328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감독직을 계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335년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안들을 심하게 다뤘다는 혐의를 받고 감독직에서 면직을 당했습니다. 이일로 인해 황제 콘스탄틴에게 청원했지만 336년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 . .”
1.1.4. 아타나시우스
“교수님, 아타나시우스를 ‘교부’라고 칭하셨는데요. 어떤 분이십니까?”
“예,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혜성같이 나타나서 정통신앙을 고수했던 분을 소개하려니 흥분되기도 합니다. 이분을 보면서 진리와 함께 수고하고, 진리 편에 서고, 그리고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무엇임을 여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면, 그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분’(Against the world)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홀로 세상에 맞서서 정통신앙을 위해 싸웠던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에 관해 자세한 내용은 ‘기독신문’의 기사 내용에서 찾아 읽어 보도록 합시다.”
아타나시우스의 모습
아타나시우스의 삶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수하기 위한 위대한 논쟁으로 엮어져 있다. 생명을 다하여 이 신앙을 고수하려고 노력했다. 핍박으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사탄은 실패하자, 이제는 새로운 방법으로 교회를 넘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근본 신앙인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진리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교회는 아직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확고한 어떤 형식적 교리를 갖추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서 아리우스는 세속정치와 신앙을 유착시키고 엮어 자신의 해석된 교리를 교회에 심으려고 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에 대한 위험성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가 간파하자, 곤경에 처한 아리우스는 정치력을 가진 자들을 포섭하여 이에 맞섰던 것이다. 콘스탄틴 대제의 후광을 받고 있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로 하여금 325년 니케아 범종교회의를 개최토록 하였다. 하지만 참석한 감독들은 하나같이 아리우스의 견해를 정죄했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기는커녕, 정치적 책략을 통해 니케아 정통신앙을 뒤엎고 이 신앙을 굳게 붙잡고 있으며 자신에게 가시가 되는 아타나시우스, 즉 알렉산더의 후계자를 지목하고 20년 동안이나 6회에 걸친 추방을 통해 집요하게 핍박하고 괴롭혔다.
“6차에 걸쳐 약 20년 이상 추방을 당하면서도 정통 삼위일체론을 고수했던 아타나시우스는 정말 위대하신 분이셨습니다. . .”
1.1.4.1. 1차 추방(336~338)
“교수님! ‘6회, 20년 이상’ 추방당했다고 하셨는데 그분의 추방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러지요. 첫 번째 추방은 33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올 지방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습니다. 325년 니케아 범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아 추방당한 아리우스는 간교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황제궁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황제의 누이 콘스탄티아와 왕자를 돌보고 있던 사제를, 즉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 아리우스는 자신의 견해를 황제에게 알립니다. 그리하여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것을 콘스탄틴 대제는 아타나시우스에게 허락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황제명을 거절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아리우스를 따르는 아리안들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황제가 아타나시우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모반을 꾸몄습니다. 335년 두로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아타나시우스가 이집트 감독 아르세니우스의 살해 혐의가 있다고 모함 했습니다. 또 손목을 자르고 마술을 이용하여 붙였다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혐의를 조사하는 중 죽었다고 알려진 아르세니우스가 종교회의로 걸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리안들은 당황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아리안들은 이런 저런 방법을 통해 아타나시우스를 증오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에 반대하여 소송되는 혐의들을 당당하게 응답했습니다. 아리안들은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무슨 작은 것이라도 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여기저기로 수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오는 곡물 실은 배들을 막고 운행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거짓을 황제에게 고했습니다. 황제 콘스탄틴 대제 생각에 아타나시우스가 너무나 막강한 세력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행사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 후 프랑스 트레베스로 아타나시우스를 추방시켰던 것입니다.”
“추방을 당하는 동안 은자 안토니와 알렉산더와 같은 지도자들은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틴에게 아타나시우스의 결백을 주장하며 청원했으나 황제의 대답은 종교회의 결정을 자신이 번복할 수 없다고 하며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교구민들이 여전히 아리우스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추방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337년 63세에 세상을 떠난 황제 콘스탄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로마제국을 각각 나눠 맡았습니다. 장자 콘스탄틴 2세에게 영국, 스페인, 고올, 그리고 알프스 산맥 서쪽을 맡겼고, 차자 콘스탄틴우스 2세에게 트레이스, 아시아, 이집트, 그리고 동방을 맡겼고, 그리고 삼자 콘스탄스에게 이태리, 아프리카, 그리스, 그리고 일리리쿰을 맡겼습니다. 이들 중 콘스탄틴 2세는 아타나시우스를 자신의 교구로 되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이리하여 그의 1차 추방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 황제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복잡한 로마제국 상황은 ‘7.2. 콘스탄틴 왕조’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리기 부담스러운 분이 혹 계시면 지금이라도 뒤쪽에 있는 7장을 참고하시기를 권합니다.”
1.1.4.2. 2차 추방(339~346)
“339년에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로 추방당했습니다. 이것이 7년 동안의 2차 추방(339~349)입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황제 콘스탄틴 대제의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아리안들은 그의 후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리안들의 지도자 유세비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감독 대리 그레고리를 지지하면서 세속 총독에게 강권하여 아타나시우스가 계속 교구에 남아있으면 혼란과 음모만 있을 뿐이라고 하여 추방시키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웃 교회들은 그의 임명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339년 4월 6일 추방당하여 346년 10월 21일까지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오지 못했습니다. 341년 추방당한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100명의 감독들이 모인 종교회의를 요청하였고, 이 회의에서 로마감독 율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가 무죄임을 확인하여 캅파도키아인 그레고리를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안으로서 아타나시우스를 추방시키도록 했지만 나머지 황제 콘스탄틴 대제의 두 아들은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후원 아래 개최된 343년 8월 사르디카 종교회의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황제 콘스탄스는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아타나시우스를 복직시키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리안들이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호의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알렉산드리아 감독 대리인 그레고리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바뀌게 되어 아타나시우스는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7년 동안의 추방생활을 접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이리하여 2차 추방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1.1.4.3. 3차 추방(356~362)
“서로마제국 황제 콘스탄스는 350년 1월 18일 고올의 막넨티우스에 의해 살해됩니다. 그러자 아리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예전처럼 아타나시우스를 억압하고, 그리고 니케아 정통신앙을 반대했습니다. 황제는 시르미움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니케아 신조를 대신할 수 있는 어떤 형식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사벨리우스 이단을 따르는 포티누스는 아리안들의 후원을 받아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353년 서방교회 감독들은 아흘레에 모여 시르미움의 형식을 거절하고 355년 밀라노에서도 모여 그 형식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다음해, 356년 아타나시우스, 로마감독 리베리우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아리안 감독들로부터 정죄를 받고 추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리안주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사태를 지켜보다가 이제는 압력을 행사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자신의 비서 디오게네스를 355년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어 무력 진압하라는 명했으나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음 해 356년 그는 군대장관 시리아누스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냈습니다.”
[356년] 2월 8일 목요일 아타나시우스는 . . .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인 . . . 데오나스 교회에서 . . . 다음 날 아침 성찬식을 준비하는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교회는 포위되고 교회당 문이 부서졌습니다. 이런 명령을 내린 자는 시리아누스였습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 . . 조용히 제단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에게 시편 136편을 낭송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회중들은 낭송되는 각 구절마다 큰 목소리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무장한 군인들은 성단소(聖壇所, chancel)를 에워쌌습니다. 하지만 회중들과 감독은 두려워하지 않고 아타나시우스의 예식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로 시작하자고 권하자 회중들과 예식을 인도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모두 교회당 밖으로 끄집어내었습니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우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예식을 이끌었습니다. 교회당 밖으로 끌려나온 그는 6년 14일 동안 회중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6월 아타나시우스를 증오하는 적대감이 다음과 같이 일어났습니다.”
[356년] 6월 13일 목요일 아침, 즉 심야 집회가 마친 직후, 몇 명의 여인들을 제외한 모든 회중이 떠났을 때 시리아누스 명에 따라 테오나스 교회는 폭풍이 몰아쳤고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인들은 살해당했고, 교회당은 이교도들의 난폭한 행동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도 이집트 사막으로 물러가서 하나님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적들은 그를 죽이려고 군사를 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타나시우스는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357년 아리안들은 시르미움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니케아 정통신앙에 가까운 형식을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니케아 정통 신앙처럼 ‘동일본질’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사본질’(homoiousios, 호모이우시오스)라고 말하는 아리안들이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359년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소집된 두 번의 종교회의, 즉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감독들이 각각 모였습니다. 이 종교회의들에서 아리안들과 니케아 정통신앙인들 간에 화해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봅니다. 약 400명의 감독들이 이태리 아리미눔에 모였고, 160명의 감독들이 소아시아에 있는 셀루치아에 모였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기독교 내에 통일된 신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타협적인 성격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종교회의들을 가리켜 ‘반(半)아리안’(semi-arian)식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자께서 성부와 유사하다고 하면서 그것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에 관해 아타나시우스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희미한 용어로 표현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세속권력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추방당한 아타나시우스를 대신하여 새로운 감독을 선출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감독이 된 게오르기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는 자들과 아리안주의를 배격하는 자들에게 난폭한 핍박을 명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추방당했습니다.”
“마침내 361년 12월 이런 만행을 견디다 못해 일어난 사람들은 게오르기를 교수형에 처해 죽였습니다. 게다가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배교자 율리안이 황제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황제 율리안은 전임자에 의해 추방당한 모든 감독들에게 자유를 주면서 자신의 교구로 되돌아갈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제 정통 감독들은 자신의 교구로 되돌아 갈 수 있었고 아타나시우스 역시 362년 2월 21일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모든 아리안들을 자신의 교구로부터 추방시켰습니다. 또 종교회의를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최하여 니케아 정통신앙을 강화하였습니다.”
“추방당한 가운데서도 아타나시우스는 글들을 써서 지금 우리들에게 남겼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안 역사,’ 4권으로 구성된 ‘아리안들에 반대하여 쓰인 글들’, ‘세라피온’에게 보내는 4개의 교리적 서신들, 그리고 ‘셀루치아 종교회의와 아리미눔 종교회에의 관하여’ 등입니다.”
“우리는 3차 추방에 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3차 추방은 그가 이룩한 일들 중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리안주의 붕괴였습니다.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1년 11월 3일] 죽은 후 열렬한 아리안주의 황제 [발렌스, 364~378]의 치리 하에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362년에 이르러 아리안들 내부에서 무엇인가에 의해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분열의 씨앗은 모호한 실체 때문이었습니다. 추방당한 가운데서 이러한 분열을 바라보았던 아타나시우스는 글을 써서 그 붕괴를 가속화 시켰습니다. . . . . 그러자 숨어있는 아타나시우스를 찾아내기 위해 제국 심문자들이 수색했습니다. 마을들, 동네들, 사막들, 그리고 수도원들, 심지어 무덤에도 가서 그를 찾으려고 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그의 황금시기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1.1.4.4. 4차 추방(362~364)
“362년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수용하는 온건한 아리안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성령의 신성을 부인했던 자들을 정죄하고, 아리안 이단자들을 파직시켰습니다. 만일 회개한다면 평신도로서 교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하는 사제들은 황제 율리안에게 고발하여 아타나시우스를 다시금 도시에서 추방시켜야 한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에 안정을 되찾을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황제 율리안은 자객을 보내어 아타나시우스를 죽이도록 지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양떼들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나일 강변에 있는 데바이스 사막으로 물러갔습니다.”
황제 조비안이 그려져 있는 동전
“363년 황제 율리안이 피살당하자 율리안을 이은 기독교인 황제 조비안(Jovian)은 아타나시우스에게 내려진 추방 명령을 철회하였습니다. 조비안은 그의 정통성을 높이 칭송하며 정통신앙에 대한 교의들을 쓸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따라 아타나시우스는 학식 있는 동료 감독들을 불러 니케아 범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정통교리들을 정리했습니다. 이단자 아리안들이 거짓 교리를 정통교리로 만들려는 계획들은 이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안디옥에서 조비안을 만나 충고를 준 후 364년 2월 14일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복직했습니다.”
1.1.4.5. 5차 추방(365~366)
황제 발렌티니안이 그려져 있는 동전
황제 발렌스가 그려져 있는 동전
“불행하게도 황제 조비안은 겨우 8개월 동안 치리한 후 364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로마는 또 다시 나뉘어져서 서로마제국은 발렌티니안 1세에게, 동로마제국은 발렌스(365~378)에게 맡겨졌습니다. 황제 발렌스가 일 년 반 후 황제 배교자 율리안이 추방시킨 모든 감독들은 세속권력자들에 의해 다시금 제거되어야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365년 10월 5일 로마 집정관은 교회당을 마구 침입해 들어와 성직자들을 수색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67세의 아타나시우스에게 도망할 것을 권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5차 추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길지 않은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366년 2월 1일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습니다.”
1.1.4.6. 6차 추방(367~373)
“그런데 황제 발렌티니안은 아리안 주의를 선호하여 367년 아리안 감독 유독수스에 의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교구를 박탈당한 모든 감독들을 추방시켰습니다. 이제 여섯 번째로 아타나시우스가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추방당한 그는 여러 교회들, 수도원들, 그리고 이집트 사막 등지를 두루 다녔습니다. 한 편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지역 총독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감독 아타나시우스를 복직시켜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아타나시우스는 다시금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대하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정말 겸손하고 낮은데 마음을 두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덕행은 비길 데 없을 정도로 숭고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쉽게 그분에게 올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설교 시 온유했고, 친절했고, 열정적이었고, 그리고 상냥했습니다. 더욱이 그분의 삶은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분의 삶은 천사적 삶이었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항상 부드러웠습니다. 결코 난폭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삶은 항상 설교의 현장이었습니다. 누구든 그분을 닮고 싶어 했습니다. 금식과 기도로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유한 자들의 부정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겸허한 자들에게 늘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말할 수 없는 추방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46년 동안 지켰습니다. 약 373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했고, 거룩하고 헌신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육신 속에서 그는 사랑과 자비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 공의, 그리고 거룩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만난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난과 불행을 짊어지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수난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을 감사하게 지내도록 하셨고,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를 불멸하도록 했습니다. 그분의 눈물은 우리의 기쁨이 되었고, 그분의 장사되신 것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성화가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대단하신 분이 아닙니까? 추방당한 가운데 그가 쓴 『안토니의 생애』는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거스틴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1차 범종교회의, 즉 325년 니케아에서 개최된 범종교회의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범종교회의 간 사이를 장식했던 인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타나시우스의 생애는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