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우미사
삼우(三虞)란 장례를 치르고 첫 번째로 지내는 제사를 초우(初虞)라
하고,
두 번째로 지내는 제사를 재우(再虞)라 하며,
세 번째로 지내는 제사를 삼우(三虞)라 하는데
삼우는 묘지에 가서 지내는 제사로써 유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초우나 재우는 독실한 유교집안이 아니면 지내는 집안이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장례후 3일만에 묘지에 가서 지내는 제사를
삼우라고 함은
엄격한 의미에서 초우, 재우가 생략됐으니
삼우라고 불릴 수가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현재의 삼우는 장례후 3일만에 묘소에 간다는 변형된
의미로서의 삼우 일뿐이다.
그러면 가톨릭에서 지내는 삼우미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물론 삼우란 어휘 자체가 위에서 설명한 유교 풍습에서 나온 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는 그와 다르다 하겠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자가 죽으면 즉시 사망미사를 드리고,
장례날 장례미사를 드린다.
(성직자나 그 부모들이 죽으면 사망부터
장례미사 전까지 많은 미사를 드리지만
이도 사망미사와 장례미사와는 구분된다.)
그리고 장례후 3일만에 삼우미사를 드림으로 세 번째로 드리는
미사(제사)가 분명하니
유교문화의 전래와는 장례후 3일만에 묘소에 가는 것과 삼우라는
용어만이 같을 뿐
미사(제사)를 드리는 시기가 다르다
(유교는 장례후부터 계산하지만 가톨릭은
사망후부터 계산된다.)
또한 묘소를 찾는 것은 비신자들은 묘소를 돌보고 비록 땅에 묻혔지만 장례후
정적(精的 = 영적(靈的)으로 상봉이라는 의미일 뿐이지만,
가톨릭신자는 그 외에 예수님이 묻히신지 3일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
등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성경적 의미와
예수님이 묻히신지
3일만에 부활하셨음을 기억하여
부활을 간구하는 신학적 의미로 가톨릭적 제례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가 수용해 왔으며 지금은 자연스럽게 정착되었으니
시비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2. 49제
(미사 또는 기도)
49제(薺)에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한다는 것은 결론부터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49제는 불교의 윤회설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사람이 죽은지 49일이
되는 날이 중음(中陰)이 차는 날로서
그동안 일곱 번의 생사를 거쳐 각 과보(果報)를 감지(感知)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 가서 태어나는 날이라 하여 49제를 지내는 것이다.
즉 삼계육도에 가서 누리는 후생안락(厚生安樂)을 위하여
독경공양(讀經供養)으로 명복을 비는 것이다.
그러므로 49제에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함은
윤회설을 수용하는 결과가 되니 잘못이라 생각한다.
3.
탈상
탈상(脫喪)이란 해상(解喪)이라고도 하여 어버이의 3년상을 마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유교에서의 효를 인간의 근본으로 삼은 데서 나온 것이다.
즉 부모가 돌아가심은 자식의 불효에 기인한다 하여
불효한 잘못에
대한 속죄와 부모를 여윈 슬픔을 차을 수 없어
3년이란 긴 세월을 생업(生業)도 전폐하고 죄인으로 지내고
3년째에 대상(大詳)을 지내고 상복을 벗어 정상생활로 돌아와야 하는
엄격한 제도이다.
이러한 폐습을 수정하여 국민의례준칙은 1백일 탈상을 권장해 왔다.
불교에서는 49제로써 탈상한다.
현재는 3년 탈상 역시 제대로
지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다만 형식만 갖추는 집안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언제 탈상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맞을까?
두가지를 들 수 있으니 그 하나는 아론이 죽은 뒤(민수기 20, 29)와
모세가 죽은
뒤(신명기 34, 8) 30일동안 곡하는 기간을 마쳤다는
구약시대의 지도자들의 성경 적 상기(喪期)와,
다른 하나는 오순절을 들 수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유다인들이 출애급의 파스카사건의 종결을
오순절에 기념했던 것과 같다.
히브리말에서 오순절이란
「쉰번째」날로써 「종결」, 「끝」이라는 뜻을 지닌다.
신약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의 새로운 파스카의 완성이며 재창조의 시작이기에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국 천주교 상례 토착화의 현실과 전망」주제하의 세미나에서
밝힌 바 있다.
전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일 뿐이니 이를 선택함은 신학적 의미가 없고,
오순절을 택함이 신학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4.
장례절차
장례절차(상복, 염습, 입관,
행상, 도묘, 화관 등)는 오랜 풍습으로
우리 민족 문화로 정착되어 왔으며,
비신자들의
장례절차 속에는 유.불식뿐 아니라 무속적 요소도 다분히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의 장례절차는
무속적 요소(출관때 바가지를
깬다든가 노제, 산신제를 지내는 등)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형식(염습 등)에서는 유.불식이
존재하지만 이것이 반 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더욱이 우리 교회는 오래전부터
임종에서 매장까지 각 과정마다 어떻게 하라는 그리스도교적 절차를 「성교예규」에 상세히
설명 제시하고 있다.
혹 절차나 과저에 미신적
요소나, 반그리스도교적 요소가 있다면
그 부분을 제거하거나
그리스도교적으로 수정 보완하면 될 것이다.
5.
제사문제
제사문제는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가톨릭신문에서도
『연미사를 바치면서도
전통적 제사는 따로 지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제사문제는 한국교회 초기(1791년
신해박해)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가
부모의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았거나 불살랐다하여 처형된 뼈아픈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 후 제사문제는 죽은 사람을
신으로 모심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의 발로임을 교황청이 이해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연미사를 드리고 따로 집에서 제사를
모심은
미사의 의미보다 제사를 중시해서라기보다는
‘선조를 기억하는
예식’에서도 미사를 드리고 제사를
지내도록 허용되어 있으니,
우리 민족의 효심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지 탓할일은 아니라고 본다.
소위 서구식으로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도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을
외면한 그릇된 것이지 그리스도교적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문제는 반
그리스도교적이란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공경의 표현으로 보고,
다만 사목적으로 미사를 드리고도
따로이 제사를 꼭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교육함은 필요하겠다.
6. 죽은이를 위한
기도문제
위령기도는 모두 같이 바치고, 여러
기도문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끝에 바친다.
우리가 ‘죽은이를 위해서’
기도하기보다는
죽은 이들에게서도 효력을 발하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로써
차라리 ‘죽은이들에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죽은이를 위한 기도는 특히 장례의식과 조상(弔喪)기간에 적합할 것이다.
이에 반해서 죽은 이와 함께 바치는
기도, 죽은 이에게 바치는 기도,
즉 하느님과 함께 이미 천국에서
영복을 누리고 있는 그들과 함께 살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가 그들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우리가 죽은이에게 바치는 기도가
우리의 일상 생활속에서 훨씬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라고 제시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외국에는 연도가 없다고 한다. 죽은
이를 위해서 「묵주의 기도」를 바친다고 한다.
기도중에 가장 완전한 주님의 기도와
성모님께 간구하는 성모송,
그리고 구원경으로 꾸며진 「묵주의 기도」는 다른 모든 기도가 함축된 기도라고
본다.
이 묵주의 기도가 연도문에 미치지
못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장례후에 죽은 이를 위한
기도문이 상황(시기)에 맞게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례이후는
묵주의 기도나 호칭기도
(예수성심
호칭기도, 성모 호칭기도, 성요셉 호칭기도, 103위 한국 성인 호칭기도,
모든 성인들의 호칭기도중 하나)를
바침이 좋을 것으로 본다.
혹자는 기도의 대상자가 연옥에
있다면 그 기도가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위령기도를 바쳤을때 그가 이미 천당에
있다면
그 기도는 다른 연옥영혼에게 돌아간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그렇다면 위령기도가 아닌 위와 같은
기도를 바쳤을 때
그가 연옥에 있다면 기도문에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는
통공(천상, 지상, 연옥)으로 연옥
영혼까지도 우리 안에 포함되니 문제가 되지 않고,
그가 천국에 있다면 그도 지상의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구할 것이니
더 효과적이라 할 수 있겠다.
Requiem aeternam IN.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