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를 “업론자(業論者)”라고 합니다.
모든 업은 과거, 전생으로부터 왔다고
합니다.
DNA검사를 하는 의학자들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은 정해졌다고 합니다.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이 검사만으로
신체적 특징이나 어떤 내장 쪽이 약해서
특정 나이가 되면 암이 발생하는 것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 검사 대상이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미래를 점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운명은 결정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업이 그들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치니까요.
업은 karma(카르마)라고 합니다.
제가 풀어보니 “가로막(다)”에서 나온
단어로 보였습니다.
뭔가 진행을 하려고 해도 가로 막혀서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이 손해만 남습니다.
저는 전생을 약 40생을 봤습니다.
장군과 왕으로 살았던 시절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었습니다.
이 많은 업 때문에 하는 일이 안되기도
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생을 찾아 봤고, 나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습니다.
어떤 스님은 석가모니가
업을 완전히 없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깨치고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업을, 업장을 완전소멸할 수가
있을까요?
저에게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서는 “업은 없다”라고
했으니까요.
스승에게도 왜 분명 업은 존재하는데
내 안에서는 “업이 없냐?라며 묻기도
했었습니다.
스승도 답을 못 내렸습니다. 내 안에서
나온 이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몇 일 전에 답을 알아냈습니다.
내 안에서 답이 흘러 나왔습니다.
업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은 연극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말씀을 드린 내용입니다. 우리들은
삶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이 곳에 옵니다.
왜 그런 것인지는 분명했습니다. 경험으로
많은 이해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드라마, 영화처럼 악역은 분명 존재합니다.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틱해야 재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나면 무(無)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무아(無我)상태가 됩니다.
내 몸이 나(我)라고 하면, 내 몸이 없어지니
무아(無我)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살아서는 이런 경지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삶이 연극이라는 것이 알아지면
내 삶, 내 인생이라는 것이
덧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현생에서 나를 괴롭히던
악마같은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을 마치고
저승에 돌아갔을 때가 느껴졌습니다.
저를 반기며 자기들의 역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미안해 했습니다.
축구경기와 비슷합니다. 경기가 끝나면
잘 배우고, 잘 찼다고 하면 될 것을
어떤 이는 감정이 남아서 다음 경기에서
파올을 하고 시비를 겁니다.
이러면 서로 악감정이 생깁니다.
즉, 업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어떤 이는 기분좋게 공 잘 찼다며
악수를 권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이 삶을 진짜라고 생각하면 치열하게
싸우면서 업을 만들게 되고
누구든 그 업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전생의 업보“를 들고
이번 생에서도 업의 굴레를 못 벗어납니다.
우리는 수억년, 이니 수조년을
이어서 살아온 신(神)들입니다.
죽었다는 것도 몸만 없어졌지
마음 즉, 내 안의 본질은 죽지를 않습니다.
증명을 하면, 귀신이 왜 존재하며,
전생을 왜 운운합니까?
이번 생이 끝이면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남지 말아야 하는데도 말이죠.
우린 사실 필요한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왜 ”존재“라는 단어를 쓰는 지 아십니까?
내가 어떤 상황이나, 보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
그 즉시 현황이나, 화면들이 상황이 되어
바로 앞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차원세계처럼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생각하면 그 대상이
내 눈앞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린 그냥 존재하는 객체이지
힘들게 왔다리 갔다리 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설악산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설악산이라는 말이 끝나기 전에 내 앞에
나타납니다.
우린 이런 것을 상상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수치를 계산하는 날이 오면
상상하는 것이
곧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저 업이 없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그 역할에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짱!하고 나타나서
도와주기도 하고 가로막기도 합니다.
물론 도와주는 역할은
빚을 진 사람들이겠지요.
가로 막는 역할은
해를 받은 사람들이구요.
마음을 깨치고 계속 내면을 이해하게 되면
이 삶이 연극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악역이 이해가 되어서
저의 이해를 돕는 스승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누구에게 감정이 있던 것이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윤석열이 나쁘다고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보면 그는 대단한 스승입니다.
시나리오를 가지고 충실히 행했을 뿐입니다.
물론 본인은 모를 것입니다. 그저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의 수괴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시나리오를 알게 될 때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츰 자신의 존재가 몸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쓰는 물건들은
다 소품(小品)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연극에 필요한 소품들인 것이지요.
이 것이 인식이 되면 나는 사라집니다.
나는 몸을 가진 나(我)이지요. 이기적이고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사라지면 내면을
이용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내면은 나의 본질이며, 내 자신의 정체성이고,
안 보이지만 나를 끌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습지요? 이 곳은 엄연히 연극판데기인데
살기 위해서 남을 해치며 업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업이 너무 많아서 털어내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업을 털어내며 살아야 합니다.
이럴 때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납니다.
과거 내가 애를 먹인 존재들이지요.
인생에서 이렇게 많이 꺾여 보면
그 본질이나 이치가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깨우치기 쉬운 까닭입니다.
지금 힘들다면 업을 터는 중이고
잘 된다면 전생에 업을 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업이 없다“는 것이 알게 되면
그 어떤 의미없는 업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깨닫는다는 것 = 업 없음“
이라는 공식이 적용될 법도 하네요.
아마도 업의 굴레를
”바퀴“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업의 굴레는 없앨 수가 없으니까요.
우린 중심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디든 우리가 있는 곳이 중심입니다
누군가가 원하면 우린 나타납니다.
그래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존재 그 자체입니다.
어디서든 주인이 되니까요.
당신의 업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업을 만들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업이 없어지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주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디서든 당신은 중심입니다.
변두리가 아닙니다.
온 우주의 센타가 당신입니다.
당신은 신이니까요.
우린 그렇게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