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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책소개 스크랩 리뷰 스피릿 로드; 탁재형 지음
민욱아빠 추천 0 조회 26 13.06.10 11: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술은 일상의 어느 부분이다.  술이 목적은 아니지만, 일상의 무언가를 할 때 술은 언제나 기분과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수단이었고 위로와 안정을 주는 친구였다.  다음날엔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몸과 머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마시는 순간만큼은 내 옆의 든든한 무언가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럽으로 학회를 가는 친구에게 압생트를 부탁하여 마셔본 일이 있었다.  그땐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과 작품에 관심이 증폭되었을 때라, 때마침 유럽에 다녀오는 친구에게 압생트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녹색을 띄는 투명한 액체에서는 강렬한 알코올의 기운과 허브향이 올라왔다.  압생트가 담긴 잔 위에 티스푼을 걸쳐놓고 그 위에 각설탕을 놓은 다음 증류수를 천천히 방울방울 떨어뜨리면 설탕과 증류수에 희석되는 녹색의 액체는 어느순간 투박한 색으로 변하며 또다른 느낌의 술이 된다.  깔끔함은 달달함이 섞인 투박함으로 변하고 희석된 알코올은 조금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아니스와 쑥향은 약간은 거부감이 들게 하면서도 은근히 잔을 입으로 가져가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였다.  고흐가 황반에 변성이 일어나도록 마셔댄 이유가 이런거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아브신트 쑥의 독성으로 제조법과 재료가 바뀌었지만, 압생트와는 첫만남은 무척 매력적이고 신선했었다. 

  나의 일상의 든든한 동료이자 친구인 알코올이 이런 매력적이고 신선한, 또는 다양한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얼마나 더 행복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화학증류주인 소주와 밍밍한 맥주, 그리고 아스파탐 가득 달달한 막걸리에 익숙해져버린 나의 입이 어느순간 안스럽다는 생각이 든 건 이 책을 읽어가면서였다.  스피릿로드에 진열된 수많은 술들을 전부 만날 수는 없지만 개중에 보이는 반가운 술들은 구하려면 한없이 비싸기만 하다.  그동안 나에게 행복과 위안을 준 술들이 케미컬들과 밍밍함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니 순간 우울함이 엄습한다.  물론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의 일상의 행복과 위안은 대체 무엇때문에, 언제부터 이렇게 싸구려로 취급받았던 걸까?

  이야기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경험은 시선과 느낌이 만나 말과 글로서 표현이 된다.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한 이가 말이나 글에 재능까지 겸비하고 있으면 나로서는 무척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책의 내용과 별도로, 저자에게 내가 가지는 부러움이다.  단지 술에 대한 설명만 있다면 단락이 명확하게 나뉘는 이런 형식의 책은 사실 좀 지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술을 통해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안다.  마치 비어라오를 한 병 쥐어주고 메콩강의 모래밭으로 데려가거나 쓰라 써를 한 통 쥐어들게 하고 오지의 마을 무덤을 돌며 망자의 인생을 함께 감상하고자 하는 듯 하다.  술과 이야기가 같은 비중으로 균형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한 권의 책은 풍성하고 든든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언뜻 설명중에 보이는 ‘신의 물방울’식의 느끼한 과다망상형 비유는 적당한 선에서 끊고 중지하는 센스까지 몇 곳에서 보인다.

  이런저런 삶의 입장이나 일상을 꾸려가다보니 알코올과의 만남도 서서히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많아진다.  더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싸구려 화학주나 밍밍한 맥주에 대한 서운함이 커지니 이 땅에서는 알코올과의 만남을 즐길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신, 스피릿로드에 진열된 술들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리고 전부 도수가 만만찮은 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나서 내 인생의 위안과 행복을 좀 더 나은 친구들과 느끼고 즐기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우선은 송명섭 장인의 죽력고부터 찾아보아야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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