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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수변호사 | | |
▶30여년 검찰‥호남출신 천형같은 멍에 안고 살아와 ▶장생회 결성 주도, 고향 사랑 대단, 고향 장흥발전에 큰 관심
2003년 3월 18일, 법무부에 사표를 제출했던 정충수 전검사장이 1개우 후인 4월 초에 개인 변호사로 개업, 새롭게 출발한다.
정 변호사의 사표는, 주지하다시피, 이른바 검란(檢亂)'으로 불리는 참여정부의 '서열. 기수파괴'의 검찰 인사파동으로 인한 것.
이날 정변호사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띄운 '검찰을 떠나면서'라는 글에서 "명백한 귀책사유 없이 정치적 이유로 퇴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제하고 "검사 임관 이후 줄곧 호남 출신이라는 천형과도 같은 멍에를 안고 살았다"며 "어찌하여 검사 보직을 정하는데 출신지역과 학교가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통탄할 뿐"이라며 검찰인사에 강한 불만을 토로, 언론 등에 화제를 낳기도 했다.
다음은 정변호사의 '검찰을 떠나며'라는 글의 요지이다.
"저는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제 인생의 황금기를 바쳤던 정든 검찰을 떠납니다. 동기 검사가 검찰총수에 올랐을 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후배에게 길을 열어 주고 신임검찰총장의 지휘권 확보를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용퇴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많은 검찰선배들이 선택했던 아름다운 검찰의 전통으로서 우리 검찰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30여년 간 몸담았던 검찰을 떠나면서 왜 회한이 없겠습니까? 저는 검찰조직은 검사의 신분보장과 정치적 중립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버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륜 있는 검사들이 명백한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칙과 기준없는, 소위 일컬어지는 '정치적 이유'로 퇴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를 어찌 검사의 신분보장과 정치적 중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능력 있는 검사들이 기수파괴를 통한 검찰개혁의 이름 아래 아무런 명분과 이유 없이 검찰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개혁이라는 이름의 독류(獨流)에 휩쓸려 황망히 떠내려가고 있다는 느낌뿐입니다.
발탁을 목적으로 본연의 검찰업무보다는 소위 줄서기를 일삼는 또 다른 정치검찰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화와 개혁은 분명 우리시대의 화두이나, 이는 경륜과 능력을 아우르면서 안정 속에 이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검사생활을 마감하면서 동료, 후배, 가족, 친지들의 축복을 받으며 자랑스럽게 용퇴하리라던 바램이 무너진 채 퇴진하는 검사들과 마찬가지로 인적청산의 대상이 되어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자괴감이 없지도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검사 임관 후부터 즐곧 호남출신이라는 천형과도 같은 명예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묵묵히 감내해야 했던 아픔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5년 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호남출신이라는 족쇄는 완전하게 풀리지 못했고 이른바 역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경험도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공익의 대변자요 법의 감사자로서 객관적 의무까지 부여된 검사의 보직을 정함에 있어 출신 지역과 학교가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통탄할 뿐입니다. 지역의 볼모를 지양하는 것이 우리 역사발전의 원동력임을 확신합니다.
그러함으로 인하여 저는 감히 동료, 후배 검사들에게 퇴임의 변을 남깁니다. 앞으로 우리 검찰은 소임을 다한 선배 검사가 후배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용퇴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길이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후략…"
□소규모 로펌 개업 계획
정변호사의 변호사 사무실은 강남 고속터미날 부근의 장학재단 건물(서초구반포동 44-1 장학재단B/D 302호). 검찰 사퇴 후 화려한 경력으로 인해 대형 로펌에서의 스카웃 제의도 있었지만, 당분간 쉬고싶은 사정 등 여러 개인적인 사유로 해서 바로 3월 22일, 개인변호사를 개업한 것.
앞으로 정변호사는 15명∼20여명 남짓의 변호사들과 함께 로펌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인으로서 정변호사의 경력은 화려하다. 목포고, 고려대 법대 출신의 정변호사는 국민의 정부때 언론 등에서 늘 지목하는 '목포고 인물', 또는 '고대 인물'의 한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으며, 30년간 인생의 황금기를 검찰에서 보낸 만큼 일선검사에서부터 검찰·법무부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요직들을 두루 섭렵해 온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일선 검사시절 호남 출신의 검사로서 지역차별이 여전했던 96년도 대구에서의 검사생활이 가장 큰 고비였다고 한다.
"대구도 광주처럼 강성의 이미지고 호남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어요. 해서 늘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마치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심정으로 공평, 투명, 집념 등 검사로서 원칙에 더욱 충실했습니다. 결국 그 같은 노력들이 나중에는 대구 언론 등에서 '대구사람보다 대구를 사랑하는 사람' '대구에서 가장 공평무사한 검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대구에서뿐만 아니고 30여 년의 검사시절 내가 생명시한 것은 공평무사와 진실규명에 대한 투명성이었습니다. 이 같은 법조인의 자세는 갈수록 혼탁해지고 무질서해지는 세태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이 인간의 죄를 법에 의해 규정하고 처벌하는 일은 정의실현을 위해 인간들이 요청한 규범 같은 것이긴 해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해서 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더욱 공정하고 투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장생회 결성 주도 … 제2회 장흥인대상
지난 2000년 12월 26 재경 장흥군 향우회에서 정충수 변호사는 '제2회 장흥인 대상'을 수상했다. '장생회' 창립을 주도, 고향사랑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장흥인 대상을 수상하게 된 것.
장생회는 '장흥을 생각하는 장흥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친목단체의 이름이다. 이 모임은 지난 97년도, 당시 중부세무청장으로 재직하던 임향순 전 향우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향우회와 별도로 법조인, 실업인 등 전문인 위주로 향우친목모인을 결성하자는데 의견을 모은 끝에 서울 장흥출신 법조인, 고위 공직자, 세무사, 실업가, 학자 등 50여 명이 모여 결성된 친목단체. 이후 장생회 출신의 회원들 대부분이 향우회 및 장흥중고 동문회 회장단에 선임되는 등 재경장흥인물을 배출하는 모임이 되면서 장생회는 고향사랑운동의 근거지가 돼 왔다.
올 추석에도 고향인 안양면 수락리로 내려와 4일간 쉬기도 했던 정변호사는 일년에 두어차례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는 등 고향애찬론자로 유명하다. 수락리는 말 그대로 두메산골. 장흥에서 유치면의 몇몇 산골 마을을 제외하면 가장 오지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한편으로는 그만큼 청정한 지역이며 산수가 수려한 마을이기도 하다. 수락 마을 뒷산은 최근들어 보성군과 법정비화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삼비산이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솟은 봉우리는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던 전일봉이기도 하다. 정변호사는 앞으로 개인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지금은 폐허가 돼 바린 전일봉수대를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장흥신문 290호/2003-09-25 |
첫댓글 정충수님 홧~팅
지난 4월 법률사무소 개업 (서초구 반포동 44-1 장학재단 302호 전화 : 02-3482-4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