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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가 오시기까지
창 49:1-12
요절: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야곱의 매우 귀중한 신앙고백을 들어보았습니다: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의 일생에 걸쳐서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 “나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시고, 죄인을 끝까지 사랑해 주신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야곱은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수를 해줍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해 주셨듯시, 자신의 자식과 자식의 자식에게도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의 축복은 그 이상인 것, 즉 인간적 축복이 아닌 영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먼 훗날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의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그에게 넓은 땅을 주시고,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고, 그를 통해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구속사적인 성경이해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자신의 삶도 이 구속사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라고 합니다. 야곱이 죽기 바로 전에 아들을 모두 불러놓고 예언을 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마지막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제 자기 12 아들은 각 지파의 조상이 되어 앞으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는 자기 아들의 미래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룰 지파의 미래도 예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또한 그것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12형제의 미래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의 과거가 그대로 미래에 반영이 됩니다. 그들의 잘못은 자손의 번영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수 백 년 후에 태어날 사람이 조상의 잘못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희는 모여 들으라”라고 합니다. „들으라!“ 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지도자나 예언자, 선생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모세 오경인 토라를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도 합니다. “지금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가니 명심해서 들으라!”라고 합니다.
3-4를 보시겠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당시에 장자는 하나님께서 출생부터 능력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합니다. 좋은 풍채와 인간적인 능력을 갖추어 지도자가 되기에 꼭 알맞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3가지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두배의 상속, 제사장권, 왕권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권리를 잃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권리를 침해했습니다. 아버지의 후처 빌하와 잠자리를 함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능력과 장자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깝게도 그가 자신의 성격을 다스리지 못해 그의 탁월한 능력은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물의 끓은 같이 격렬합니다. 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입니다. 게다가 끓으면 위험합니다. 그에게는 낭만파 시인의 직업이 적합합니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아버지의 침상을 더렵혔습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배웁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도 잘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자신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다스리는 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앞으로 르우벤 지파는 이스라엘에서 별 의미가 없습니다. 두 배의 상속권은 요셉에게 넘어가고, 지도권(후에 왕권)은 유다에게로 가고, 제사장권은 레위에게로 갑니다. 르우벤 지파는 이미 사사 때에 멸망했습니다. 르우벤 지파에서 유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사, 선지자, 왕이 없습니다.
5-7절을 보시겠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두 형제가 똑같은 예언을 받습니다. „형제요“라는 말은 똑같은 타입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시쳇말로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쳐 다닌다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죄를 지을 때에도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세겜에서 끔찍한 살육을 하였습니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항상 뭉쳐있기 때문에 모의를 잘합니다. 야곱은 그들의 모의에 함께하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집회에 함께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서 기독교는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이 있는 곳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있는 곳에도 함께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짓으로 교회는 커질지라도 그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이 죄 없는 아이들까지도 죽인 이유는 그들의 분노때문이었습다. 르우벤은 정렬을 다스리지 못해 망했고,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벌을 받습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사람인지라 분노가 날 수는 있으나, 그것은 반드시 억제되어야 합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들의 노여움과 분기가 저주를 받습니다. 주의할 것은 시므온과 레위가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아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도 죄와 죄인은 구분됩니다.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두 지파를 완전히 분리시키셨습니다. 신기하게도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되어서, 다른 지파처럼 모여서 살지 않고 48개의 도시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8-10을 보시겠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유다에 내려와서 야곱의 예언이 절정에 이릅니다. 야곱에게서 생기가 돋습니다.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그는 적들을 굴복시킬 것입니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그는 야곱 아들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모든 형제들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유다 지파가 가장 커지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후에 유다지파와 작은 베냐민 지파만 남습니다. 나머지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사라집니다. 그 후손들은 약소해집니다.
유다는 “사자와 같다”고 합니다. 먼저는 젊은 사자 그 다음은 숫사자, 다음은 암사자와 비유합니다. 아무도 그를 건드릴 자가 없습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서 유럽의 제후와 왕의 문장으로 사용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The scepter will not depart from Judah, nor the ruler's staff from between his feet, until he comes to whom it belongs and the obedience of the nations is his“(NIV)
규는 지배자를 상징하는 자그마한 지팡이와 같은 모양입니다. 통치자의 지팡이는 긴 지팡이로서 지배자가 손에 쥐고 있으면 끝이 발 사이에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그들로부터 왕들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 왕들은 구체적으로 유다의 자손으로부터 나옵니다. 즉 유다의 후손들은 왕가를 이루게 됩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의 왕가는 실로가 오시기까지 계속됩니다. 그의 왕국은 메시아가 오시기까지만 계속됩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는 자신의 왕권을 메시아에게 넘겨줍니다.
여기에서 메시아 예언이 나옵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 역사의 정점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역사는 메시아가 오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앞에서 나온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여러가지의 예언이 이 한마디의 예언에서 구체화됩니다.
지금까지 족장들이 받은 약속을 살펴보겠습니다: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à 이 약속은 메시아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메시아를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2절의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와 연관지어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쳐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입니다. 복의 근원은 메시아이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으로 자신을 구속사의 중심으로 세우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13:15-16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à 아브라함은 많은 자손과 땅(보이는 땅: 가나안)을 구체적으로 약속 받습니다. 이것도 메시아적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약속의 자손과 육신의 자손을 구분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며, 가나안에 살지도 않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à 실의에 빠진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22:17-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à 12:3의 약속이 구체화 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메시아를 통해 천하 만민이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가르칩니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à 사도 바울이 22:17-18을 해석해서 만민이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을 통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축복 받음을 가르칩니다.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à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델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그대로 베델에서 야곱에게 이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아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점점 구체화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지금 믿음의 조상들에게 교육적으로 약속을 주십니다. 그들이 이해를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표현을 하십니다. 그들은 약속을 받았을 당시에는 그것이 메시아에 대한 약속인지 잘 몰랐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는 저희들은 이 약속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메시아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메시아의 약속이 다소 흐릿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메시아의 날을 기다렸다고 하십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창세기에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족장들은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땅과 자손의 약속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야곱이 바로 죽기 전에는 그에게 메시아가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메시아란 한 인물(실로)임이 분명해졌으며,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을 한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한 자손이 만민의 왕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 주요, 구원자로서의 의미는 없습니다. 예언은 계속해서 발전됩니다.
11-12절은 실로가 누구인지 흐릿하게나마 묘사됩니다. 지금 야곱은 앞으로 올 메시아를 보고 있지만, 이해에 있어서 자신의 환경적 요소를 넘지 못합니다. 당시의 문화적인 안목에서 메시아를 그리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전투용, 혹은 과시용 말을 타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나귀를 탄 사람은 평화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왕입니다. 지금 Arte에서 방영되는 영화 쇼군(사무라이 영화)을 보니 일본의 지배자는 자기를 위해 신하 전부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남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십니다.
야곱에 와서 메시아의 비밀이 많이 벗겨집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계속 진행되면서 메시아의 모습이 더욱 구체적이고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메시아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 모습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사11:1-9; 사9:6; 사53:2-5; 겔34:23-31; 미가서5:1-5를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을 복중에서 선택하시어 그의 인생을 축복하셔서 그는 죽기 전에 예언적 환상으로 메시아를 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천지와 인간을 지으신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아의 약속 3:15로 부터 구원사가 시작하여 메시아 예언으로 끝맺습니다. 이것을 실현시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이 역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메시아에 관한 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예언이 성취된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는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사셨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신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목적이요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삽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에는 삶이 계속될 것 같은 환상에 젖어 살지만, 우리의 인생을 매우 짧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항상 예수님의 가르침이 삶의 주인이 되고, 예수님이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땅에 둘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의 소망에 두시기를 바랍니다.